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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영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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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호영 베드로는 1803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1838년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 중 한 명이다. 그는 이경언 바오로에게 가르침을 받고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를 통해 교리 교사로 임명되었다. 1835년 체포되어 4년간의 옥살이 동안 신앙을 지키며 고문과 고난을 겪었으며, 하느님을 부인하지 않고 순교했다.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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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영 베드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호영 베드로
이호영 베드로
이름이호영 베드로
출생일1803년
사망일1838년 11월 2일
축일9월 20일
교파로마 가톨릭교회
출생지경기도 이천
사망지서울
직업순교자
시복일1925년 7월 5일
시복인교황 비오 11세
시성일1984년 5월 6일
시성인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매장지절두산 천주교성지

2. 생애

이호영은 1803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여읜 후 서울로 이주했다. 그는 이경언 바오로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스승의 순교를 통해 신앙의 의미를 깊이 깨달았다.[2] 1834년 조선에 입국한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는 그의 성품을 보고 교리 교사로 임명했다.[2] 1835년 2월,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4년간 옥살이를 했다.[2] 그는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켰으며, 옥중에서도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이어갔다.[2] 오랜 수감 생활과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838년 11월 2일 35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병사하며 순교했다. 그는 한국의 103위 성인 가운데 첫 번째 순교자로 기록되었다.[2]

2. 1. 출생과 성장

이호영은 1803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서울로 이사했으며, 가족은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평화롭게 지냈다.[2] 그는 이경언 바오로를 스승으로 모시고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이경언은 조선왕조 제3대 태종의 15세손이자 이경도 가롤로와 이순이 루갈다의 막내 동생이었다. 이경언은 1827년 체포되어 청주로 압송되었고, 혹독한 고문 끝에 감옥에서 순교했다. 그의 죽음은 이호영에게 신앙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 주었다.[2]

1834년 1월, 청나라에서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조선으로 입국했다. 이는 1801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2] 순교 이후 33년 만에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은 외국인 사제였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크게 기뻐하며 처음으로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2] 유방제 신부는 이호영의 헌신적이고 온유하며 정직한 성품을 보고 그를 교리 교사로 임명했다.[2]

어느 날 이호영은 과거 시험에 급제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아름다운 음악이 들리고 누군가 왕의 총애받는 신하가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호영은 이 꿈을 자신의 순교에 대한 암시로 받아들였다.[2] 실제로 1835년 2월, 그가 일터에서 돌아왔을 때 포졸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체포했다.[2]

이호영은 4년 동안 감옥에 갇혀 온갖 고문과 고난을 겪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신문 내용과 답변을 편지에 남겼다.[2]

"어찌하여 너는 부모 공경에 반하며 조정에서 금지하는 천주교를 믿느냐?"

"그런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천주교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이면 임금님과 자신의 부모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어떻게 당신은 이렇게 훌륭한 종교가 부모 공경에 반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너는 돌아가신 부모님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는 동물보다 못하며, 죽어야 마땅하다. 너는 너의 종교를 포기하겠느냐? 아니면 죽겠느냐?"

"죽은 사람이 제사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왕을 위해 죽는 사람은 반역자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주에 하늘과 땅, 사람, 천사 그리고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신 왕중의 왕이십니다. ... 어떻게 당신은 전인류의 아버지를 부인하기보다 죽음을 택한 사람을 비난할 수 있습니까?"


재판관은 그의 다리뼈가 드러날 정도로 주뢰를 틀며 배교를 강요했지만, 이호영은 "저는 절대로 하느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형리가 허리와 다리를 매질하며 "만일 네가 소리지른다면, 나는 그것을 네가 배교한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협박했으나, 이호영은 끝내 소리를 내지 않았다.[2] 《기해일기》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그는 혹독한 매질의 고통 속에서도 입 한번 열지 않았다"고 기록했다.[2]

그는 옥중에서 병으로 죽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4년간의 긴 수감 생활 동안 기도와 단식을 계속하며 선량함과 순박함의 모범을 보여 옥졸들과 동료 죄수들의 감탄을 샀다. 그와 같은 감방을 쓰던 한 늙은 죄수는 그에게 감화되어 과거를 뉘우치고 세례를 받기 위해 교리 수업을 받기도 했다.[2] 이호영과 그의 누나 이소사는 비록 다른 감방에 있었지만, 옥졸들의 배려로 때때로 만나 서로를 격려하고 같은 날 순교자로서 죽기를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병약하여 누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2]

당시 조선 감옥의 참혹한 환경에 대해 후일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와 펠릭스 리델 주교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천주교인들은 하나의 옥방에 너무 많이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에 누워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수감생활이 고문보다 더 가혹하다고 여겼다. 고름 그리고 바닥에 깔린 에서 나는 악취로 인해 그들은 빠르게 병에 걸렸고, 몇 명은 이삼일 내에 죽었다. 그러나, 그것들 중 가장 심각한 것은 굶주림과 목마름이었다. 고문을 견뎌낸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도 나중에는 굶주림으로 인해 굴복했다. 그들은 하루에 겨우 두 줌의 밥으로 연명하며, 때때로 바닥의 짚을 찢어서 씹거나 옥방에 서식하는 를 잡아 먹었다.[2]

— 다블뤼 주교


나는 굶주림으로부터 오는 그러한 고난을 목격하고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들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움직이는 해골처럼 보였다. 고통과 굶주림, 가려움 그리고 고름이 흐르는 상처는 그들의 겉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끔찍해 보인다.[2]

— 리델 주교


이호영은 "저는 검에 베여 죽기를 원했었지만,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은 저도 원치 않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때는 1838년 11월 2일이었고,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는 한국의 103위 성인 가운데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2]

2. 2. 신앙 생활

이호영은 이경언 바오로를 스승으로 모시고 많은 것을 배웠다. 이경언은 조선왕조 제3대 태종의 15세손이며 이경도 가롤로와 이순이 루갈다의 막내 동생이었다. 그는 1827년 체포될 때까지 이호영을 가르쳤고, 청주로 압송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옥사했다. 스승의 순교는 이호영에게 신앙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했다.

1834년 1월, 청나라에서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조선으로 입국했다. 이는 1801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2] 순교 이후 33년 만의 일로, 당시 조선의 천주교인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신자들은 처음으로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유방제 신부는 이호영의 헌신적이고 온유하며 정직한 성품을 보고 그를 교리 교사로 임명했다.

어느 날 이호영은 과거 시험에 급제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고,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그를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호영은 이 꿈을 자신의 순교에 대한 암시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1835년 2월 어느 날, 일터에서 돌아온 그를 포졸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체포했다.

이호영은 4년 동안 옥살이를 하며 온갖 고문과 고난을 겪었다. 그는 옥중에서 주고받은 편지에 심문 내용 일부를 남겼다.

: "어찌하여 너는 부모 공경에 반하며 조정에서 금지하는 천주교를 믿느냐?"

: "그런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천주교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이면 임금님과 자신의 부모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어떻게 당신은 이렇게 훌륭한 종교가 부모 공경에 반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

: "너는 돌아가신 부모님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는 동물보다 못하며, 죽어야 마땅하다. 너는 너의 종교를 포기하겠느냐? 아니면 죽겠느냐?"

: "죽은 사람이 제사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왕을 위해 죽는 사람은 반역자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주에 하늘과 땅, 사람, 천사 그리고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신 왕중의 왕이십니다. ... 어떻게 당신은 전인류의 아버지를 부인하기보다 죽음을 택한 사람을 비난할 수 있습니까?"

재판관은 그의 다리뼈가 드러날 정도로 주뢰를 틀며 배교를 강요했지만, 이호영은 "저는 절대로 하느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또한 허리와 다리에 매질을 가하며 "만일 네가 소리지른다면, 나는 그것을 네가 배교한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협박했지만, 그는 끝내 소리를 내지 않았다.

《기해일기》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그는 혹독한 매질의 고통 속에서도 입 한번 열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이호영은 옥중에서 병으로 죽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4년간의 긴 투옥 기간 동안 그는 기도와 단식을 계속하며 선량함과 순박함의 모범을 보여 옥졸들과 동료 죄수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와 같은 감방을 쓰던 한 늙은 죄수는 그에게 감화되어 과거를 뉘우치고 세례를 받기 위해 교리 수업을 받기도 했다.

이호영과 그의 누나 이소사는 각기 다른 감방에 갇혀 있었지만, 옥졸들의 배려로 가끔 만나 서로를 격려하며 같은 날 순교자로서 죽기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호영은 쇠약해져 누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당시 조선 감옥의 열악한 환경에 대해서는 이후 입국한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1845년 입국)와 펠릭스 리델 주교(1877년 투옥)가 기록을 남겼다.

: "천주교인들은 하나의 옥방에 너무 많이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에 누워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수감생활이 고문보다 더 가혹하다고 여겼다. 고름 그리고 바닥에 깔린 에서 나는 악취로 인해 그들은 빠르게 병에 걸렸고, 몇 명은 이삼일 내에 죽었다. 그러나, 그것들 중 가장 심각한 것은 굶주림과 목마름이었다. 고문을 견뎌낸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도 나중에는 굶주림으로 인해 굴복했다. 그들은 하루에 겨우 두 줌의 밥으로 연명하며, 때때로 바닥의 짚을 찢어서 씹거나 옥방에 서식하는 를 잡아 먹었다."

: — 다블뤼 주교

: "나는 굶주림으로부터 오는 그러한 고난을 목격하고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들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움직이는 해골처럼 보였다. 고통과 굶주림, 가려움 그리고 고름이 흐르는 상처는 그들의 겉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끔찍해 보인다."

: — 리델 주교

이호영은 "저는 검에 베여 죽기를 원했었지만,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은 저도 원치 않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머지않아 숨을 거두었다. 때는 1838년 11월 2일이었고,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는 한국의 103위 성인 가운데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2. 3. 체포와 투옥

1834년 1월, 청나라에서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가 조선으로 입국했다. 이는 1801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순교한 이후 33년 만에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은 외국인 사제였다.[2] 당시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크게 기뻐하며 처음으로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유방제 신부는 이호영의 헌신적이고 온유하며 정직한 성품을 보고 그를 교리 교사로 임명했다.

이호영은 어느 날 과거 시험에 급제하는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고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이 꿈을 자신의 순교에 대한 암시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1835년 2월 어느 날,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온 이호영은 기다리고 있던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호영은 이후 4년 동안 감옥에 갇혀 온갖 종류의 고문과 고난을 겪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심문 내용과 답변 일부를 편지에 남겼다.

> "어찌하여 너는 부모 공경에 반하며 조정에서 금지하는 천주교를 믿느냐?"

>

> "그런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천주교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이면 임금님과 자신의 부모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어떻게 당신은 이렇게 훌륭한 종교가 부모 공경에 반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

> "너는 돌아가신 부모님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는 동물보다 못하며, 죽어야 마땅하다. 너는 너의 종교를 포기하겠느냐? 아니면 죽겠느냐?"

>

> "죽은 사람이 제사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왕을 위해 죽는 사람은 반역자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주에 하늘과 땅, 사람, 천사 그리고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신 왕중의 왕이십니다. ... 어떻게 당신은 전인류의 아버지를 부인하기보다 죽음을 택한 사람을 비난할 수 있습니까?"

재판관은 그의 다리뼈가 드러날 정도로 주뢰를 틀며 배교를 강요했지만, 이호영은 "저는 절대로 하느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형리가 그의 허리와 다리를 매질하며 "만일 네가 소리지른다면, 나는 그것을 네가 배교한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협박했지만, 이호영은 끝내 소리를 내지 않았다.

《기해일기》는 당시 상황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그는 혹독한 매질의 고통 속에서도 입 한번 열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이호영은 감옥에서 병으로 죽는 것 또한 하느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4년의 긴 투옥 기간 동안 그는 끊임없이 기도와 단식을 이어갔으며, 그의 선량함과 순박함은 옥졸들과 동료 죄수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와 같은 감방을 쓰던 한 늙은 죄수는 이호영에게 감화되어 과거를 뉘우치고 세례를 받기 위해 교리 공부를 시작하기도 했다. 비록 다른 감방에 수감되어 있었지만, 이호영과 그의 누나 이소사는 옥졸들의 배려로 가끔 만날 수 있었고, 만날 때마다 서로를 격려하며 같은 날 순교하기를 약속했다.

당시 조선 감옥의 열악한 환경은 후일 조선교구의 주교가 된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와 펠릭스 리델 주교의 기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다블뤼 주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천주교인들은 하나의 옥방에 너무 많이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에 누워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수감생활이 고문보다 더 가혹하다고 여겼다. 고름 그리고 바닥에 깔린 에서 나는 악취로 인해 그들은 빠르게 병에 걸렸고, 몇 명은 이삼일 내에 죽었다. 그러나, 그것들 중 가장 심각한 것은 굶주림과 목마름이었다. 고문을 견뎌낸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도 나중에는 굶주림으로 인해 굴복했다. 그들은 하루에 겨우 두 줌의 밥으로 연명하며, 때때로 바닥의 짚을 찢어서 씹거나 옥방에 서식하는 를 잡아 먹었다.

리델 주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나는 굶주림으로부터 오는 그러한 고난을 목격하고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들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움직이는 해골처럼 보였다. 고통과 굶주림, 가려움 그리고 고름이 흐르는 상처는 그들의 겉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끔찍해 보인다.

결국 이호영은 병약해져 서서히 죽음을 맞이했고, 누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저는 검에 베여 죽기를 원했었지만,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은 저도 원치 않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1838년 11월 2일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겨우 35세였다. 이로써 그는 한국의 103위 성인 가운데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2. 4. 옥중 생활과 순교

1834년 1월, 청나라에서 유방제 파치피코 사제조선으로 입국했다. 이는 1801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2] 순교 이후 33년 만에 처음으로 외국인 사제가 조선 땅을 밟은 사건이었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크게 기뻐하며 처음으로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유방제 신부는 이호영의 헌신적이고 온유하며 정직한 성품을 보고 그를 교리 교사로 임명했다.

어느 날 이호영은 과거 시험에 급제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아름다운 음악이 들렸고, 누군가 왕의 총애하는 신하가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호영은 이 꿈을 자신이 순교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1835년 2월 어느 날, 일터에서 돌아온 그를 포졸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체포했다.

이호영은 이후 4년 동안 감옥에 갇혀 온갖 고문과 고난을 겪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신문 내용과 답변 일부를 편지에 남겼다.

: "어찌하여 너는 부모 공경에 반하며 조정에서 금지하는 천주교를 믿느냐?"

: "그런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천주교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이면 임금님과 자신의 부모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어떻게 당신은 이렇게 훌륭한 종교가 부모 공경에 반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 "너는 돌아가신 부모님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는 동물보다 못하며, 죽어야 마땅하다. 너는 너의 종교를 포기하겠느냐? 아니면 죽겠느냐?"

: "죽은 사람이 제사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왕을 위해 죽는 사람은 반역자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주에 하늘과 땅, 사람, 천사 그리고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신 왕중의 왕이십니다. ... 어떻게 당신은 전인류의 아버지를 부인하기보다 죽음을 택한 사람을 비난할 수 있습니까?"

재판관은 그의 다리뼈가 드러날 때까지 주뢰를 틀며 배교를 강요했지만, 이호영은 "저는 절대로 하느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재판관이 형리에게 그의 허리와 다리를 매질하게 하며 "만일 네가 소리 지른다면, 나는 그것을 네가 배교한 것으로 간주하겠다."라고 협박했지만, 이호영은 끝내 소리를 내지 않았다. 《기해일기》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그는 혹독한 매질의 고통 속에서도 입 한번 열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이호영은 옥중에서 병으로 죽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4년의 긴 투옥 기간 동안 그는 기도와 단식을 계속하며 선량함과 순박함의 모범을 보여 옥졸들과 동료 죄수들의 감탄을 샀다. 그와 같은 감방을 쓰던 한 늙은 죄수는 그에게 감화되어 과거를 뉘우치고 세례를 받기 위해 교리 수업을 받기도 했다. 비록 다른 감방에 갇혀 있었지만, 그의 누나 이소사와는 옥졸들의 배려로 가끔 만나 서로를 격려하며 같은 날 순교자로서 죽기를 약속했다.

당시 감옥의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1845년 조선에 입국한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와 1877년 투옥되었던 펠릭스 리델 주교는 당시 수감 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천주교인들은 하나의 옥방에 너무 많이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에 누워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수감생활이 고문보다 더 가혹하다고 여겼다. 고름 그리고 바닥에 깔린 에서 나는 악취로 인해 그들은 빠르게 병에 걸렸고, 몇 명은 이삼일 내에 죽었다. 그러나, 그것들 중 가장 심각한 것은 굶주림과 목마름이었다. 고문을 견뎌낸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도 나중에는 굶주림으로 인해 굴복했다. 그들은 하루에 겨우 두 줌의 밥으로 연명하며, 때때로 바닥의 짚을 찢어서 씹거나 옥방에 서식하는 를 잡아 먹었다.
-- 다블뤼 주교

: 나는 굶주림으로부터 오는 그러한 고난을 목격하고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들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움직이는 해골처럼 보였다. 고통과 굶주림, 가려움 그리고 고름이 흐르는 상처는 그들의 겉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끔찍해 보인다.
-- 리델 주교

결국 이호영은 병약함으로 인해 서서히 죽어갔고, 누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저는 검에 베여 죽기를 원했었지만,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은 저도 원치 않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1838년 11월 2일, 3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로써 그는 한국의 103위 성인 가운데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3. 시복 · 시성

이호영 베드로는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다.[3] 이후 1984년 5월 6일에는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집전한 미사 중 거행된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참조

[1] 웹인용 한국 천주교 절두산 순교성지 성인 유해실 http://www.jeoldusan[...] 2014-10-05
[2] 뉴스 "A million gather for Pope's mass in Seoul: “Korea’s first apostles” were lay martyrs" http://vaticaninside[...] 2014-09-17
[3] 뉴스 복자 124위 특집. 124위 시복 후속 조치·현황 http://www.catholict[...] 가톨릭신문 201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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