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온순 (18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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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온순은 1812년에 태어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김이회의 양자로,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다. 1860년대에는 문화현령, 합천군수, 순창군수, 담양부사 등을 역임하며 지방관으로 활동했고, 1870년대에는 해주판관, 밀양부사, 청주목사, 안주목사 등을 지냈다. 1880년대에는 공조판서,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하며 정치 활동을 했고, 1890년대에는 판의금부사, 지돈녕부사 등을 거쳐 보국숭록대부에 이르렀다. 그의 외손자는 독립운동가 서재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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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온순 (181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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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자 | 金穩淳 |
본관 | 안동 김씨 |
자 | 성집(成集) |
호 | 퇴우당(退憂堂) |
생애 | |
출생 | 1812년 |
사망 | 1882년 |
묘소 위치 | 경기도 양주군 고읍면 회암리에 위치 |
관력 | |
음서 |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 |
관직 |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사옹원첨정(司饔院僉正)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 공조참판(工曹參判) 형조참판(刑曹參判) 동지의금부사 지돈녕부사 돈녕부 판돈녕부사 숭록대부 |
가족 관계 | |
아버지 | 김이재 |
어머니 | 정부인 남양 홍씨 |
부인 | 정부인 파평 윤씨 |
아들 | 김응수(金應洙) |
손자 | 김정국(金鼎國) |
2. 생애
김온순은 1812년 김이의(金履禕)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현감을 지낸 김이회(金履會)의 양자가 되었다.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1848년 12월 명능참봉(明陵參奉)이 되었으나, 1849년 상을 당하여 사퇴하였다. 1852년 6월 헌릉참봉(獻陵參奉)을 시작으로 1853년 예빈시직장과 사옹원직장, 1855년 장원서별제, 한성부주부 등을 역임하였다. 1859년 빙고별제를 거쳐 1860년에는 장원서별제, 한성부주부, 사직서령, 돈녕부판관을 지냈다.
1862년 음력 윤 8월 문화현령(文化縣令)으로 부임한 이후 여러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1865년 합천군수를 거쳐 종3품으로 승진했고, 순창군수로 자리를 옮겼다. 1866년에는 선정(善政)을 베푼 지방관으로 인정받아 고종에게서 활과 화살, 통개(筒箇)를 선물로 받았다. 1868년 담양부사로 부임하여 세금을 크게 줄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1872년 해주판관과 해주군수, 1874년 밀양부사를 거쳐 수운판관으로 내직으로 돌아왔다. 1875년 임실군수, 1876년 진주목사로 부임하여 공물 부족분을 자신의 녹봉으로 충당하기도 했다. 1878년 청주목사로 부임하였다가, 1879년 선혜청으로부터 세금 징수 실적이 낮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했지만, 고종이 무마시켰다. 1879년 통정대부로 승진하고, 안주목사를 거쳐 1880년 다시 청주목사로 부임했다. 1881년 가선대부와 가의대부로 승진했다.
1881년 안주목사를 거쳐 1882년 공조참판, 오위도총부 부총관, 한성부 판윤, 공조판서, 동지의금부사, 경연특진관을 역임했다. 1883년 호군으로 전임되었다가 자헌대부 한성부 판윤으로 발탁되었고, 이후 대호군과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884년 지의금부사가 되었다가 갑신정변으로 사직하고 지방으로 내려갔다. 1885년 동지의금부사와 지의금부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의금부 회의에 소집될 수 없었다.
1888년 다시 지의금부사와 대호군이 되었다. 1891년 80세의 고령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가자되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지돈녕부사에 제수되었다. 1892년 판의금부사가 되고, 내금위대호군을 거쳐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 상호군에 임명되었다. 1893년 다시 판의금부사가 제수되었다. 최종 관직은 보국숭록대부에 이르렀다.
2. 1. 초기 활동
1812년에 김이의(金履禕)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현감을 지낸 김이회(金履會)의 양자가 되었다. 김온순의 양아버지 김이회는 사후에 증 이조참의에 증직되었지만, 양자 김온순의 출세로 다시 증 이조참판, 이조판서에 거듭 추증되었다.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여 1848년 12월 명능참봉(明陵參奉)이 되었으나, 1849년 상을 당하여 사퇴하였다.2. 2. 관료 생활 초반
1852년 6월 헌릉참봉(獻陵參奉), 12월 사옹원봉사를 지냈다. 1853년 12월 예빈시직장과 사옹원직장, 1855년 6월 장원서별제, 한성부주부가 되었다가 7월에 다시 상을 당하여 사퇴하였다. 1857년 12월 빈전도감의 낭청으로 참여하여 특별히 승진, 서용되었으며, 1859년 12월 빙고별제가 되었다.1860년 3월 다시 장원서별제가 되었다가 5월 한성부주부, 9월 사직서령, 10월 돈녕부판관을 지냈다.
2. 3. 지방관 생활
김온순은 1862년 음력 윤 8월 문화현령(文化縣令)으로 부임한 이후 여러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1865년 1월 7일 합천군수로 부임했다가 종3품으로 승진했고, 그해 5월 23일 순창군수로 자리를 옮겼다.1866년 6월에는 선정(善政)을 베푼 지방관으로 인정받아 고종에게서 활과 화살, 통개(筒箇)를 선물로 받았다. 1868년 8월 24일에는 담양부사로 부임하였는데, 세금을 크게 줄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승정원일기에는 이조(吏曹)가 김온순에 대해 "백성에게 거두어들이는 것을 줄이지 않은 것이 없고 상납목(上納木)을 시가(市價)보다 줄였으며 해장죽(海長竹)은 그 잡비(雜費)를 제거하여 가는 곳마다 혜택을 입혔으므로 아직도 인자한 유풍(遺風)을 볼 수 있습니다"라고 보고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872년 7월 16일 해주판관이 되었다가 다시 해주군수가 되었다. 1874년 7월 12일 밀양부사를 거쳐 11월 수운판관으로 내직으로 돌아왔다. 11월 13일에는 황해도 암행어사 조병필(趙秉弼)이 김온순이 해주판관으로 있을 때 군호(軍戶)를 고르게 보급했다고 보고하여 통훈대부로 승진했다. 1875년 9월, 임실군수로 부임하였다. 1876년 12월 진주목사로 부임하여, 공물 부족분을 자신의 녹봉으로 충당하여 이조의 칭찬을 받았다.
고종은 지방관 인사 실적과 암행어사들의 보고를 보고 "전 진주 목사(晉州牧使) 김온순(金蘊淳)은 과연 잘 다스렸구나."하고 칭찬했다. 1878년 4월 26일 청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879년 8월에는 선혜청으로부터 세금 징수 실적이 낮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했지만, 고종이 무마시켰다.
1879년 4월 통정대부로 승진하고, 7월 안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880년 1월 다시 청주목사로 부임했다. 두 번째 청주목사 재직 중인 1881년 1월 시종신(侍從臣)의 아버지라 하여 특별히 가선대부로 승진했고, 4월 흥인군 이최응의 건의로 가의대부로 승진했다.
2. 4. 정치 활동
1881년 7월 29일 안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882년 9월 공조참판으로 발탁되었고, 9월 14일 오위도총부 부총관이 되었다. 1882년 8월 1일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가 8월 27일 공조판서가 되었다. 11월 20일 동지의금부사가 되고 11월 21일 겸 경연특진관이 되었다.1883년 호군으로 전임되었다가 8월 1일 자헌대부 한성부 판윤으로 발탁되었다. 8월 20일 대호군으로 전임되었다. 상소를 올려 사직하려 하였으나 고종이 만류하였다. 8월 27일 공조판서를 천거할 때 고종이 특별히 3망까지 받았는데도 김온순의 이름을 더 넣어서 결국 그로 낙점하여 임명했다. 9월 19일 대호군으로 다시 전임되었다.
1884년 5월 지의금부사가 되었다. 그해 12월의 갑신정변 사건으로 사직소를 올리고 지방으로 내려가 있었다. 1885년 5월 29일 동지의금부사가 되고 그날 다시 지의금부사가 됐다. 그러나 병으로 지방에 내려가 있었으므로 의금부 회의에 소집할 수 없었다.
2. 5. 생애 후반
1888년 4월 29일 다시 지의금부사가 되었고, 5월 12일에는 대호군이 되었다. 1891년 1월 행 호군으로 전임되었다가 80세의 고령으로 특별히 은전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가자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해 1월 지돈녕부사에 제수되고, 4월 24일 다시 지돈녕부사에 임명되었다.1892년 2월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892년 5월 22일 내금위대호군이 되고, 대호군 재직 중 그해 11월 5일 전직 승정원승지 김병억(金炳億)의 할아버지라는 이유로 특별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 그날 상호군에 임명되었다. 1893년 2월 19일 다시 판의금부사가 제수되었다. 최종 관직은 보국숭록대부에 이르렀다.
3. 가족 관계
3. 1. 가계
- 할아버지: 김방행
- 아버지: 김이회
- 부인: 미상
관계 | 이름 |
---|---|
장녀 | 안동 김씨 |
사위 | 서광하 |
외손자 | 서재필 (1864년 1월 7일 - 1951년 1월 5일) |
장남 | 김완근(金完根) |
손자 | 김병억(金炳億) |
차남 | 김성근 (1835년 3월 19일~1919년 11월 27일) |
손자 | 김병칠 |
손자 | 김병팔 |
3. 2. 외척
김온순의 외손자는 서재필이다. 서재필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개화사상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큰 공헌을 하였다.관계 | 이름 |
---|---|
아버지 | 김이회(金履會) |
사위 | 서광하(徐光夏) |
외손자 | 서재필(徐載弼, 1864년 1월 7일 - 1951년 1월 5일) |
장남 | 김완근(金完根) |
손자 | 김병억(金炳億) |
차남 | 김성근(金聲根, 1835년 양력 3월 19일~1919년 양력 11월 27일) |
손자 | 김병칠(金炳七) |
손자 | 김병팔(金炳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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