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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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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뇌공은 후한 말 형주의 명족으로, 유표를 섬기다 교주 자사 장진의 뒤를 이어 교주 자사가 되었다. 이후 유비 휘하로 들어가 진원장군이 되었고, 유비의 한중왕 추대와 유비 즉위에 참여했다. 유비 사후에는 감황후의 시호를 정하는 데 관여했으며, 유선 시대에는 제갈량과 함께 감부인의 시호를 논의했다. 뇌공은 《삼국지》에 열전이 기록되지 않았으며, 오의 설종은 그를 "연로하며 인자하고 신중하나 시사에 통달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아들 뇌광은 제갈량을 따라 출정했으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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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공
기본 정보
이름뇌공
다른 이름뇌방(雷放)
뇌박(雷薄)
성씨뇌(雷)
시대후한 ~ 삼국 시대
출생지예주(豫州) 교국(譙國)
사망 연도미상
소속원술
여포
조조
역할장군
현장
가족미상
상세 정보
섬긴 군주원술
여포
조조
주요 활동원술 휘하에서 호해와 함께 여포 공격
여포에게 항복
조조 휘하에서 현장 역임
기본 정보
이름뇌공(頼恭)
출생 연도미상
출생지형주(荊州) 영릉군(零陵郡)
사망 연도미상
소속 국가촉한(蜀漢)
주요 직책태상(太常)
섬긴 군주유표(劉表)
유비(劉備)
유선(劉禅)

2. 행적

처음에는 유표(劉表)를 섬겨 조정에서 보낸 교주자사 장진이 부장 구경에게 살해되자 유표가 교주로 파견해 교주자사가 되었다. 그러나 창오태수가 된 오거가 병사를 보내 쫓아내자 영릉으로 도망쳤다가 되돌아갔다. 뇌공은 후한 말의 형초의 명족으로, 원래 형주 자사 유표를 섬겼다. 교주 자사 장진이 이민족의 반란으로 살해되자, 유표로부터 후임 자사로 임명되었다. 또한 동시기에 창오 태수도 사망했기 때문에, 장사 태수 오거가 후임 태수로 임명되었다. 그와 동시에, 교지 태수였던 사섭이 사실상 후임 자사가 되었기 때문에, 뇌공은 교주의 주치인 교지군으로 갈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오거의 곁에 머물게 되었다. 용맹하기로 알려진 오거였지만, 뇌공은 무인이었던 그의 지휘 하에 놓이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아 불만을 품고 반목했다. 유표의 사후, 오거에게 쫓겨나 영릉으로 돌아갔다.

208년 경에는 유비를 섬기면서 진원장군이 되었다. 220년에 뇌공을 포함해 허정(許靖), 제갈량(諸葛亮), 미축(麋竺), 왕모(王謨), 황주(黃柱) 등 120명이 함께 유비가 즉위하도록 간청하는 상주문을 올렸으며, 후에는 태상이 되었다.

223년유비(劉備)가 사망하면서 감황후의 영구가 도착하자 제갈량이 올린 상소에서 종묘 사직에 제사를 지내는 일과 조회, 장례 등의 방면에 대한 예의를 지내는 일을 뇌공과 함께 상의하면서 시호의 규칙에 따라 감황후를 소열황후라고 정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왕모가 태상이 되었다.

왕모, 황주와 함께 그 사적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전을 만들지 못했다고 하며, 아들로는 뇌굉(賴宏)이 있다.

건안 24년(219년) 가을, 많은 군신들과 함께 유비를 한중왕으로 추대했다. 유비가 왕이 되자, 황주 및 왕모와 함께 구경(태상)에 임명되었다. 또한 이듬해에는 제갈량, 미축, 허정, 황주, 왕모와 함께 유비에게 즉위를 촉구하는 권진문을 보냈다.

건흥 원년(223년), 유선이 즉위하자, 어머니인 감부인에 대해 제갈량 등과 함께 시호 검토를 진행하여, 관을 유비와 함께 합장했다.

이처럼 고위에 올라 조정에 깊이 관여했지만, 진수에 의한 『삼국지』의 편찬이 이루어졌던 시대에는, 사료가 산실되었기 때문에 열전이 쓰이지 않았다.

설종손권에게 보낸 서간에서, 뇌공의 인품을 "연로하며 인자하고 신중한 인간이었지만, 시사에 통달하지 못했다"고 평하고 있다.

아들 뇌광은 승상 서조 영사가 되어, 제갈량을 따라 한중으로 출정했지만, 젊은 나이에 죽었다. 제갈량은 그의 죽음을 매우 애석하게 여겨, 류부장사 장예장완에게 편지를 보내 "영사 뇌광과 연속 양옹을 잃은 것은 조정에게 중대한 손실이다"라고 말했다.

2. 1. 유표 휘하

유표(劉表)를 섬겨 조정에서 보낸 교주자사 장진이 부장 구경에게 살해되자 유표가 교주로 파견해 교주자사가 되었다. 그러나 창오태수가 된 오거가 병사를 보내 쫓아내자 영릉으로 도망쳤다가 되돌아갔다.

뇌공은 후한 말의 형초의 명족으로, 원래 형주 자사 유표를 섬겼다.

교주 자사 장진이 이민족의 반란으로 살해되자, 유표로부터 후임 자사로 임명되었다. 또한 동시기에 창오 태수도 사망했기 때문에, 장사 태수 오거가 후임 태수로 임명되었다. 그와 동시에, 교지 태수였던 사섭이 사실상 후임 자사가 되었기 때문에, 뇌공은 교주의 주치인 교지군으로 갈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오거의 곁에 머물게 되었다.

용맹하기로 알려진 오거였지만, 뇌공은 무인이었던 그의 지휘 하에 놓이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아 불만을 품고 반목했다. 유표의 사후, 오거에게 쫓겨나 영릉으로 돌아갔다.

2. 2. 유비 휘하

유표(劉表)를 섬겨 조정에서 보낸 교주자사 장진이 부장 구경에게 살해되자 유표가 교주로 파견해 교주자사가 되었다. 그러나 창오태수가 된 오거가 병사를 보내 쫓아내자 영릉으로 도망쳤다가 되돌아갔다.

208년 경에는 유비를 섬기면서 진원장군이 되었다. 220년에 뇌공을 포함해 허정(許靖), 제갈량(諸葛亮), 미축(麋竺), 왕모(王謨), 황주(黃柱) 등 120명이 함께 유비가 즉위하도록 간청하는 상주문을 올렸으며, 후에는 태상이 되었다.

223년유비(劉備)가 사망하면서 감황후의 영구가 도착하자 제갈량이 올린 상소에서 종묘 사직에 제사를 지내는 일과 조회, 장례 등의 방면에 대한 예의를 지내는 일을 뇌공과 함께 상의하면서 시호의 규칙에 따라 감황후를 소열황후라고 정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왕모가 태상이 되었다.

왕모, 황주와 함께 그 사적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전을 만들지 못했다고 하며, 아들로는 뇌굉(賴宏)이 있다.

뇌공(賴恭)은 후한 말의 형초의 명족으로, 원래 형주 자사 유표를 섬겼다.

교주 자사 장진이 이민족의 반란으로 살해되자, 유표로부터 후임 자사로 임명되었다. 동시기에 창오 태수도 사망했기 때문에, 장사 태수 오거가 후임 태수로 임명되었다. 그와 동시에, 교지 태수였던 사섭이 사실상 후임 자사가 되었기 때문에, 뇌공은 교주의 주치인 교지군으로 갈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오거의 곁에 머물게 되었다.

용맹하기로 알려진 오거였지만, 뇌공은 무인이었던 그의 지휘 하에 놓이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아 불만을 품고 반목했다. 유표의 사후, 오거에게 쫓겨나 영릉으로 돌아갔다.

그 후 형주 남부를 지배한 유비의 지휘 하에 들어가, 진원장군에 임명되었다.

건안 24년(219년) 가을, 많은 군신들과 함께 유비를 한중왕으로 추대했다. 유비가 왕이 되자, 황주 및 왕모와 함께 구경(태상)에 임명되었다. 또한 이듬해에는 제갈량, 미축, 허정, 황주, 왕모와 함께 유비에게 즉위를 촉구하는 권진문을 보냈다.

건흥 원년(223년), 유선이 즉위하자, 어머니인 감부인에 대해 제갈량 등과 함께 시호 검토를 진행하여, 관을 유비와 함께 합장했다.

이처럼 고위에 올라 조정에 깊이 관여했지만, 진수에 의한 『삼국지』의 편찬이 이루어졌던 시대에는, 사료가 산실되었기 때문에 열전이 쓰이지 않았다.

설종손권에게 보낸 서간에서, 뇌공의 인품을 "연로하며 인자하고 신중한 인간이었지만, 시사에 통달하지 못했다"고 평하고 있다.

아들 뇌광은 승상 서조 영사가 되어, 제갈량을 따라 한중으로 출정했지만, 젊은 나이에 죽었다. 제갈량은 그의 죽음을 매우 애석하게 여겨, 류부장사 장예장완에게 편지를 보내 "영사 뇌광과 연속 양옹을 잃은 것은 조정에게 중대한 손실이다"라고 말했다.

2. 3. 유선 시대

뇌공은 후한 말 형초의 명족으로, 처음에는 유표(劉表)를 섬겼다. 교주 자사 장진이 이민족의 반란으로 살해되자, 유표로부터 후임 자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사섭이 사실상 후임 자사가 되었기 때문에, 뇌공은 교주의 주치인 교지군으로 갈 수 없어 오거의 곁에 머물렀다. 뇌공은 무인이었던 오거의 지휘 하에 놓이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아 불만을 품고 반목했고, 유표 사후 오거에게 쫓겨나 영릉으로 돌아갔다.

그 후 형주 남부를 지배한 유비의 지휘 하에 들어가, 진원장군에 임명되었다. 208년 경에는 유비를 섬기면서 진원장군이 되었다가 220년에 뇌공을 포함해 허정(許靖), 제갈량(諸葛亮), 미축(麋竺), 왕모(王謨), 황주(黃柱) 등 120명이 함께 유비가 즉위하도록 간청하는 상주문을 올렸으며, 후에는 태상이 되었다. 219년 가을, 많은 군신들과 함께 유비를 한중왕으로 추대했고, 유비가 왕이 되자 황주 및 왕모와 함께 구경(태상)에 임명되었다.

223년유비(劉備)가 사망하면서 감황후의 영구가 도착하자 제갈량이 올린 상소에서 종묘 사직에 제사를 지내는 일과 조회, 장례 등의 방면에 대한 예의를 지내는 일을 뇌공과 함께 상의하면서 시호의 규칙에 따라 감황후를 소열황후라고 정했다. 유선이 즉위하자, 어머니인 감부인에 대해 제갈량 등과 함께 시호 검토를 진행하여, 관을 유비와 함께 합장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왕모가 태상이 되었다.

왕모, 황주와 함께 그 사적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전을 만들지 못했다고 하며, 진수에 의한 『삼국지』의 편찬이 이루어졌던 시대에는, 사료가 산실되었기 때문에 열전이 쓰이지 않았다. 그의 아들로는 뇌굉(賴宏)이 있다. 설종손권에게 보낸 서간에서, 뇌공의 인품을 "연로하며 인자하고 신중한 인간이었지만, 시사에 통달하지 못했다"고 평하고 있다. 아들 뇌광은 승상 서조 영사가 되어, 제갈량을 따라 한중으로 출정했지만, 젊은 나이에 죽었다. 제갈량은 그의 죽음을 매우 애석하게 여겨, 류부장사 장예장완에게 편지를 보내 "영사 뇌광과 연속 양옹을 잃은 것은 조정에게 중대한 손실이다"라고 말했다.

3. 평가

4.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유비가 황제로 즉위할 때 이름만 등장한다.

5.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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