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뇨후루 어빌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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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뇨후루 어빌룬은 만주 팔기 양황기 출신으로, 누르하치의 심복이자 개국공신인 어이두의 아들이자 순치제의 보정대신이었다. 그는 오보이에게 협조하여 숙사하를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 1661년 순치제의 유언에 따라 소니, 오보이 등과 함께 보정대신으로 임명되어 강희제를 보좌했으나, 오보이가 전횡을 휘두르자 이에 협조했다. 이후 강희제에 의해 체포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투옥되었다가 사면되었으며, 1673년에 사망했다. 그의 딸들은 강희제의 황후와 후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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뇨후루 어빌룬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존칭일등공
본명어빌륭
어빌륭
만주어 이름ᠨᡳᠣᡥᡠᡵᡠ ᡝᠪᡳᠯᡠᠨ
한자 표기鈕祜祿 遏必隆
사후 시호각희 (恪僖)
생애
출생미상
사망1673년
민족만주족
가문뉴호루 씨
아버지아이두
어머니누르하치의 딸, 목서선 공주
배우자라디 아이신 교로, 레이디 아이신 교로, 레이디 바야라, 레이디 수수 교로
자녀딸 6명, 아들 7명
친척누르하치 (외할아버지), 효소인황후 (딸), 온희귀비 (딸), 알링아 (아들)
관직
소속청나라
양황기 만주
직책청나라의 섭정
재임 기간1661년 ~ 1667년
공동 섭정소닌, 소크사하, 오보이

2. 생애

뇨후루 어빌룬은 만주 양황기(鑲黃旗) 출신으로, 후금의 개국 공신인 어이두의 아들이자 누르하치의 외손이다.[1][2][3][4] 아버지의 공으로 일찍 작위를 계승했으나[5], 홍타이지 재위 기간 중 정치적 부침을 겪기도 했다.[5] 청나라 초기, 여러 군사 작전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나[6][7], 섭정 도르곤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탄압받아 작위와 재산을 잃기도 했다.[5][8]

순치제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복권되어 다시 중용되었고[5], 1651년에는 일등 공(一等公)으로 승진했으며[5], 1657년에는 란의위 내대신(鑾儀衛 內大臣)과 태자태보에 임명되었다. 1661년, 순치제의 유언에 따라 소닌, 숙사하, 오보이와 함께 어린 강희제를 보좌하는 4명의 보정대신 중 한 명이 되었다.[5][3]

보정대신 시기, 어빌룬은 점차 권력을 장악하는 오보이에게 협력하였고, 다른 보정대신인 숙사하를 모함하여 제거하는 데 가담했다.[5] 1667년 소닌이 사망한 후 오보이의 전횡이 심화되었으나 어빌룬은 계속 그를 따랐고, 이로 인해 강희제의 신임을 잃었다.[5] 1669년, 강희제가 오보이를 숙청할 때 어빌룬 역시 연루되어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고 투옥되었으며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5][8] 그러나 아버지 어이두의 공을 참작하여 사면되었고[5], 1673년에 사망했다. 그의 작위는 유지되어 후손에게 상속될 수 있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가계

뇨후루 어빌룬은 만주 양황기(鑲黃旗) 출신이다.[1][2] 그의 가문인 뇨후루 씨족은 조선 국경 북쪽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아버지는 누르하치의 심복이자 후금의 개국공신인 어이두(額亦都, 1562–1621)이며, 어빌룬은 어이두의 16명의 아들 중 막내였다.[3] 어머니는 누르하치의 딸인 무쿠션(穆庫什)이다.[4] 이러한 배경 덕분에 어빌룬 가문은 청나라 황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훗날 그의 두 딸은 강희제의 황후(효소인황후)와 후궁(온희귀비)이 되었다.

1632년 (천총 6년), 아버지 어이두의 공적으로 내려진 일등 자작위를 세습했다. 그러나 1637년, 조카딸과 관련된 재판에 부당하게 개입하려 했다는 이유로 자작위를 박탈당했다.[5]

1643년, 홍타이지 사후 왕위 계승 과정에서 도르곤에게 반대했다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5] 같은 해, 누르하치의 일곱 번째 아들인 아바타이를 따라 북중국 원정에 참여하여 여러 마을을 점령하는 데 기여했다.[6] 1645년1646년, 청나라가 베이징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은 후에는 레케데훈 휘하에서 명나라 부흥 세력인 허텅자오를 후베이에서 몰아내는 작전에 참여하여 작은 세습 지위를 받았다.[7]

하지만 그의 정치적 입지는 불안정했다. 양황기 소속이었던 그는 백기를 기반으로 권력을 장악한 섭정 도르곤에게 지속적으로 의심을 받았다.[5] 1648년, 도르곤이 자신의 주요 경쟁자였던 호오거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어빌룬의 조카는 어빌룬이 과거 도르곤에게 반대했다고 고발했다.[5] 이 일로 어빌룬은 사형 선고까지 받았으나, 형벌은 감형되었다.[8] 그럼에도 재산의 절반을 몰수당하고 귀족 작위를 박탈당하는 등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5]

2. 2. 청나라 초기 관료 생활

천총 6년(1632년)에 아버지 어이두의 1등 자작(一等子爵) 작위를 계승하였다.[5] 이후 태종 홍타이지를 따라 명나라와의 전쟁에 종군하였다. 그러나 1637년, 조카딸과 관련된 재판에 부당하게 개입하려 했다는 이유로 작위를 박탈당했다.[5]

1643년, 누르하치의 일곱째 아들인 아바타이를 따라 북중국 원정에 참여하여 여러 마을을 점령하는 데 기여했다.[6] 청나라명나라를 물리치고 베이징을 수도로 삼은 후인 1645년과 1646년에는 레케데훈의 휘하에서 명나라 충신 허텅자오를 후베이 지역에서 몰아내는 작전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고 작은 세습 지위를 받았다.[7]

순치제 즉위 초, 당시 섭정을 맡고 있던 도르곤은 자신의 권력 기반인 정백기(正白旗)와 달리 양황기(鑲黃旗) 소속이었던 어빌룬을 경계하고 의심하였다.[5] 1648년, 도르곤이 자신의 주요 경쟁자였던 호오거를 박해하는 과정에서, 어빌룬의 조카는 어빌룬이 1643년 홍타이지 사후의 황위 계승 과정에서 도르곤에게 반대했다고 고발했다.[5] 이로 인해 어빌룬은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형벌은 감형되었다.[8] 그럼에도 재산의 절반이 몰수되었고, 1645-46년에 얻었던 작은 세습 작위마저 박탈당했다.[5]

1650년 도르곤이 사망한 후, 순치제는 친정을 시작하며 어빌룬에 대한 신임을 회복시키고 그의 작위를 복권시켰다. 순치 8년(1651년)에는 일등 공(一等公)으로 승진하였고, 순치 14년(1657년)에는 란의위 내대신(鑾儀衛 內大臣) 겸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임명되었다.

2. 3. 보정대신 시기

순치 18년(1661년), 순치제의 유언에 따라 소닌, 숙사하, 오보이와 함께 보정대신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7세였던 어린 강희제를 대신하여 합의제로 정무를 처리하는 역할을 맡았다.[5] 4명의 보정대신 중 서열은 소닌과 숙사하에 이어 세 번째로, 오보이보다는 앞섰다.[3]

그러나 실제로는 권력을 장악해가는 오보이에게 협조하며 거의 모든 결정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5] 어빌룬은 오보이와 결탁하여 다른 보정대신인 숙사하를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데 가담했다.[5]

강희 6년(1667년)에 소닌이 사망하자 오보이가 유일한 실권자가 되어 전횡을 휘둘렀다. 어빌룬은 이러한 오보이를 계속 따랐고, 이로 인해 강희제의 신임을 점차 잃게 되었다. 같은 해 강희제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어빌룬은 1등 공작의 작위를 받았다.

강희 8년(1669년), 강희제가 오보이를 숙청할 때 어빌룬 역시 오보이에게 협력했던 죄목으로 지위를 박탈당하고 투옥되었다.[5] 만주족 귀족 기예수는 강희제가 오보이를 처벌하기 직전, 어빌룬이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21가지 죄목을 보고하기도 했다.[5] 어빌룬은 사형 선고까지 받았으나, 이후 감형되었다.[8] 강희 9년(1670년), 아버지 어이두의 공을 참작하여 사면을 받았다.[5]

2. 4. 몰락과 죽음

강희 6년(1667년), 강희제가 친정을 시작한 후 어빌룬은 1등 공작의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오보이의 전횡을 따르면서 점차 강희제의 신임을 잃었다.

강희 8년(1669년), 강희제는 오보이를 체포하여 숙청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주족 귀족 기예수는 어빌룬이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21가지 죄목을 강희제에게 보고했다.[5] 결국 어빌룬 역시 지위를 박탈당하고 투옥되었으며, 사형 선고를 받았다.[8] 하지만 형벌은 감형되었고, 작위는 유지되어 후손에게 상속될 수 있었다.

강희 9년(1670년), 아버지 어이두의 공을 참작하여 사면을 받았다.

강희 12년(1673년), 사망하였다.

3. 가족 관계

어빌룬은 만주족 귀족인 니오후루 씨족의 아이신교로 에이두 계열 출신으로, 그의 가족은 청나라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2] 그는 여러 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그 사이에서 많은 자녀를 얻었다.

그의 딸 중 두 명은 강희제후궁이 되었는데, 둘째 딸은 효소인황후[9], 셋째 딸은 온희귀비이다. 이들을 통해 어빌룬 가문은 황실과의 강력한 인척 관계를 형성했다.

아들들 역시 청나라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여섯째 아들 옌데는 옹정제 시대에 관료로 활동했으며 그의 아들들은 건륭제 시대까지 고위직에 올랐다.[2] 특히 일곱째 아들 알링가는 강희제 사후 벌어진 황위 계승 분쟁에 깊이 관여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2]

3. 1. 부모


  • 아버지: 아이신교로 에이두 (額亦都중국어; 1562년 ~ 1621년) - 누르하치의 측근이었다.
  • 어머니: 무쿠선 (穆庫什중국어), 화석공주 (和碩公主중국어; 1595년 ~ 1659년 6/7월) - 누르하치의 넷째 딸이다.

3. 2. 배우자


  • 정실 부인 (嫡妻), 아이신기오로 씨 (愛新覺羅氏)[9]
  • 두 번째 부인 (繼妻), 아이신기오로 씨 (愛新覺羅氏)
  • 세 번째 부인 (三繼妻), 바야라 씨 (巴雅拉氏)
  • * 정4품 공작 부인 (? – 1725), 넷째 딸
  • ** 아이신기오로 씨의 정4품 공작 윤승 (雲升)과 결혼; 정1품 곽후공 고세 (高塞)의 아들
  • * 알링가 (阿靈阿; 1670–1716), 정1품 공작 (一等公), 일곱째 아들
  • 측실 (側室), 슈슈기오로 씨 (舒舒覺羅氏)
  • * 효소인황후 (孝昭仁皇后; 1653 – 1678년 3월 18일), 둘째 딸
  • ** 1665년에 강희제와 결혼하여 자녀 (2명의 아들)를 둠
  • * 온희귀비 (溫僖貴妃; ? – 1694년 12월 19일), 셋째 딸
  • ** 강희제와 결혼하여 자녀 (1명의 아들, 1명의 딸)를 둠
  • * 파카 (法喀; 1664년 5월 17일 – 1713년 2월 9일), 정1품 공작 (一等公), 셋째 아들
  • * 옌주 (顔珠; ? – 1665), 정1품 어전 호위 (一等侍衛), 넷째 아들
  • * 푸바오 (富保; ? – 1678), 정2품 어전 호위 (二等侍衛), 다섯째 아들
  • * 옌데 (尹德), 정1품 공작 (一等公), 여섯째 아들

  • 불명
  • * 공주 부인, 첫째 딸
  • ** 몽골 바린 씨의 자시 (札什)와 결혼
  • * 사일린 (塞林), 정3품 어전 호위 (三等侍衛), 첫째 아들
  • * 둘째 아들
  • * 정1품 자작 부인, 다섯째 딸
  • ** 정1품 자작 아유시 (阿玉什)와 결혼

3. 3. 자녀

에빌룬은 여러 명의 배우자를 두었으며, 슬하에 많은 자녀를 두었다. 그의 자녀 중 일부는 청나라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거나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배우자 및 자녀
배우자자녀 이름작위/직책비고
정실 부인, 아이신 교로[9]자녀 기록 없음
두 번째 부인, 아이신 교로자녀 기록 없음
세 번째 부인, 바야라 씨넷째 딸정4품 공작 부인 (? – 1725)아이신 교로 씨 윤승(雲升, 정1품 곽후공 고세의 아들)과 결혼
알링가 (阿靈阿; 1670–1716)정1품 공작 (一等公)일곱째 아들. 강희제 사후 황위 계승 분쟁 연루.[2]
측실, 슈슈 교로 씨 (舒舒覺羅氏)둘째 딸 (효소인황후; 1653 – 1678)황후1665년 강희제와 결혼, 아들 2명 출산.
셋째 딸 (온희귀비; ? – 1694)귀비강희제의 후궁, 아들 1명과 딸 1명 출산.
파카 (法喀; 1664–1713)정1품 공작 (一等公)셋째 아들. 1667년 부친 작위 계승 후 박탈됨.[2]
옌주 (顔珠; ? – 1665)정1품 어전 호위 (一等侍衛)넷째 아들.
푸바오 (富保; ? – 1678)정2품 어전 호위 (二等侍衛)다섯째 아들.
옌데 (尹德)정1품 공작 (一等公)여섯째 아들. 옹정제 때 관료. 아들 체렝(호광 총독), 네친(건륭제 군기처) 활동.[2]
불명첫째 딸공주 부인몽골 바린부의 자시(札什)와 결혼.
사일린 (塞林)정3품 어전 호위 (三等侍衛)첫째 아들.
둘째 아들정보 없음
다섯째 딸정1품 자작 부인정1품 자작 아유시(阿玉什)와 결혼.



에빌룬의 두 딸(효소인황후, 온희귀비)은 강희제의 황후와 귀비가 되어 황실과의 강력한 연결고리를 형성했다. 그의 아들들 역시 고위 관직에 오르거나 작위를 세습하며 가문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일곱째 아들 알링가는 강희제 사후 황위 계승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2]

4. 평가 및 기타

순치제도르곤 사후 어빌룬의 작위를 회복시켜 주었으며, 1661년 어린 강희제가 즉위하자 소닌, 수사하, 오보이와 함께 4명의 보정대신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네 명 중 서열은 세 번째였으나, 실권자인 오보이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5] 이후 수사하가 제거되는 과정에도 연루되었다.[5]

1667년 강희제의 친정 시작 후 1등 공작 작위를 받았으나, 1669년 오보이가 숙청될 때 기예수에 의해 21가지 죄목으로 탄핵당했다.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감형되어 작위는 유지되었고 후손에게 세습이 허용되었다.

4. 1.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평가

어빌룬의 정치적 행보는 권력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는 모습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초기 경력에서 조카딸과 관련된 재판에 개입하려다 작위를 잃었던 사건[5]은 그의 권력 지향적 성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도르곤 집권기에는 호오거 박해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 선고까지 받았으나[5][8], 순치제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작위를 회복하고 강희제 시대에는 4명의 보정대신 중 한 명으로 임명되는 등 정치적 부침을 겪으면서도 권력 핵심에 접근하는 모습을 보였다.[5]

섭정 시기, 어빌룬은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 오보이의 결정에 대부분 동조하며 그의 권력 강화에 일조했다. 특히 경쟁자였던 수사하를 제거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원칙이나 도의를 저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그의 기회주의적인 면모와 정치적 도덕성 부재를 드러내는 부분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 소닌 사후 오보이가 독주하는 상황에서도 어빌룬은 이를 견제하기보다는 순응하는 길을 택했다.

1669년 강희제가 친정을 강화하며 오보이를 숙청할 당시, 어빌룬 역시 기예수에 의해 21가지 죄목으로 탄핵받아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형이 감형되어 작위를 유지하고 후손에게 세습까지 할 수 있게 된 점은 그의 정치적 생존력 또는 당시 청나라 지배층 내부의 역학 관계 및 귀족 가문에 대한 특수성이 작용했음을 시사한다. 전반적으로 어빌룬은 격동의 시기에 권력의 부침 속에서 생존하고 영향력을 유지하려 애썼으나, 그 과정에서 보여준 행보는 권력 지향적이며 기회주의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4. 2. 대중 매체

텔레비전 드라마 《강희왕조》에 등장하였다.

참조

[1] 서적 Kennedy
[2] ECCP Ebilun
[3] 서적 Kennedy
[4] 서적 Rawski
[5] 서적 Kennedy
[6] 서적 Oxnam
[7] 서적 Kennedy
[8] 서적 Oxnam
[9] 문서 eldest daughter of Ajige, Prince 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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