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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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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케아 제국은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점령된 후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에 의해 비티니아의 니케아에 세워진 비잔틴 제국의 계승 국가였다. 에게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을 차지했으며, 라틴 제국, 불가리아 제국, 셀주크 투르크 등과 대립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1261년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며 비잔티움 제국을 부활시켰지만, 튀르크의 침략으로 인해 아나톨리아 영토는 14세기 초에 대부분 상실되었다. 니케아 제국은 헬레니즘을 강조하고,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하며 주변국과의 교역을 통해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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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통칭니케아
국호니케아 제국
로마자 표기Nikaia Jeguk
번역로마인의 왕국, 그리스
국가 유형제국
존속 기간1204년 ~ 1261년
위치소아시아 북서부
지도
1204년의 니케아 제국
1204년 제4차 십자군 직후의 니케아 제국
수도
법률상 수도니케아(이즈니크)
사실상 수도님파이온(케말파샤)
언어 및 종교
공용어중세 그리스어
종교동방 정교회(국교)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통치자 칭호황제
주요 지도자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 (1204년 ~ 1222년)
요안니스 3세 두카스 바타치스 (1222년 ~ 1254년)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 (1254년 ~ 1258년)
요안니스 4세 라스카리스 (1258년 ~ 1261년)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 (1259년 ~ 1261년)
역사
주요 사건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1204년: 건국(망명 정권)
1205년: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
1225년:
1261년 7월: 동로마 제국 복원
화폐
통화드라크마
현재
국민
국민로마인, 이후 헬레네

2. 역사

제4차 십자군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라틴 제국이 성립되자,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인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는 비티니아의 니케아로 도망쳐 그곳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뒤를 잇는 국가를 세웠다. 에페이로스 공국과 트라페주스 제국이라는 두 개의 강력한 비잔티움 계승 국가가 있었지만, 두 나라 모두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거리가 멀어 실질적인 영향력은 니케아에 미치지 못했다.[7]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는 플랑드르의 앙리에게 패배하기도 했지만, 발두인 1세 라틴 황제가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불가리아인에게 패배한 후 앙리가 유럽으로 소환되면서 테오도로스는 북서부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을 점령할 수 있었다.[8] 1208년 총대주교좌를 니케아에 설치하여 자신의 지위를 강화했고, 1219년에는 라틴 제국의 여제 플랑드르의 욜란다의 딸 마리아와 결혼했다.

1230년 불가리아가 에페이로스 공국을 복속하고 트라페주스 제국의 힘이 약해지면서, 니케아 제국은 실질적인 비잔티움 계승 국가로 남게 되었다. 요안니스 3세는 영토를 확장하여 1235년 불가리아의 이반 아센 2세와 동맹을 맺고 테살로니카와 에페이로스를 손에 넣었다.[1] 1242년, 몽골이 니케아 동쪽의 셀주크 영토를 침략했지만, 몽골은 결국 니케아에 대한 셀주크의 위협을 제거했다.[5]

요안니스 3세의 아들인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트라키아에서 불가리아인들의 침략에 직면했지만, 영토를 성공적으로 방어했다.[6] 1257년 니케아와 에피로스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6] 테오도로스 2세가 1258년에 사망하자 에피로스는 시칠리아의 만프레드와 동맹을 맺었다. 요안니스 4세 라스카리스가 그를 계승했지만, 아직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미카엘 팔라이올로고스 장군의 섭정 아래 놓였다. 미카엘은 1259년 자신을 공동 황제로 선포했고, 곧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연합 침공을 물리쳤다.[6]

미카일 8세는 시칠리아와 라틴 제국의 공격을 막아내고 권력을 강화한 후, 1260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을 선언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제노바와 동맹을 맺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여, 1261년 7월 수도를 점령하고 라틴인들을 몰아냈다. 그는 미카일 8세로 즉위하여 동로마 제국의 부활을 선포했다.[1]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라틴 군대에서 해방시키고 비잔티움 제국을 복원하기 위해 발행한 동전


스트라테고포로스 장군이 격파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샘의 문"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로 복귀하면서, 옛 니케아 제국의 영토는 부를 빼앗기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재건과 유럽에서의 전쟁 자금으로 사용되었다.[1] 아시아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병사들이 이동하면서 국경은 방어되지 않았고, 튀르크 가지(Ghazi)들의 습격으로 침략당했다.[1]

1261년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가 요한 4세 라스카리스를 폐위하고 눈을 멀게 한 사건은[1]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복원된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1] 이 사건은 아르세니우스 아우토레이아누스 총대주교에 의한 미카엘 8세의 파문과 니케아 근처에서 거짓 요한 4세가 이끄는 반란으로 이어졌다.[1]

옛 니케아 제국 영토는 점진적으로 튀르크에게 정복되었다.[3] 안드로니코스 2세가 상황을 개선하려 했으나 실패했고,[3] 1300년경에는 옛 니케아 제국의 거의 전 지역이 튀르크에게 정복되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맞은편의 아주 작은 지역만 남았다.[3]

2. 1. 성립

제4차 십자군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라틴 제국이 성립되자,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인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는 비티니아의 니케아로 도망쳐 그곳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뒤를 잇는 국가를 세웠다. 니케아 제국 외에도 에페이로스 공국과 트라페주스 제국이라는 두 개의 강력한 비잔티움 계승 국가가 있었지만, 두 나라 모두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거리가 멀어 실질적인 영향력은 니케아에 미치지 못했다.[7]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는 플랑드르의 앙리에게 1204년 포이마네논과 프루사(현재 부르사)에서 패배하는 등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발두인 1세 라틴 황제가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불가리아인에게 패배한 후, 앙리가 차르 불가리아의 칼로얀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유럽으로 소환되면서 테오도로스는 북서부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을 점령할 수 있었다.[8]

테오도로스는 1208년 총대주교좌를 니케아에 설치하여 자신의 지위를 강화했고, 1219년에는 라틴 제국의 여제(女帝) 플랑드르의 욜란다의 딸 마리아와 결혼했다.

2. 2. 확장

1230년 불가리아가 에페이로스 공국을 복속하고 트라페주스 제국의 힘이 약해지면서, 니케아 제국은 실질적인 비잔티움 계승 국가로 남게 되었다. 요안니스 3세는 영토를 확장하여 1235년 불가리아의 이반 아센 2세와 동맹을 맺고 테살로니카와 에페이로스를 손에 넣었다.[1]

1224년, 라틴 테살로니키 왕국은 에피로스 데스포타스 테오도로스 콤네노스 두카스에게 함락되었고, 그는 바타체스와 경쟁하며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테살로니키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이 제국은 1230년 클로코트니차 전투 이후 불가리아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단명했다. 트라페주스 제국은 실질적인 힘이 없었으므로, 니케아 제국만이 유일하게 효과적인 비잔티움 국가로 남았고, 요안니스 3세는 그의 영토를 에게해 전역으로 확장했다. 1235년, 그는 불가리아의 이반 아센 2세와 동맹을 맺어 테살로니키와 에피로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확대했다.[4]

1242년, 몽골이 니케아 동쪽의 셀주크 영토를 침략했지만, 몽골은 결국 니케아에 대한 셀주크의 위협을 제거했다.[5] 1245년, 요안니스는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의 딸 호엔슈타우펜의 콘스탄스 2세와 결혼하여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5] 1246년, 요안니스는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대부분을 회복했고, 테살로니키를 그의 영토에 편입시켰다.[5] 1248년까지 요안니스는 불가리아인들을 물리치고 라틴 제국을 포위했다. 그는 1254년 사망할 때까지 라틴인들로부터 계속해서 땅을 빼앗았다.[5]

요안니스 3세의 아들인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트라키아에서 불가리아인들의 침략에 직면했지만, 영토를 성공적으로 방어했다.[6] 1257년 니케아와 에피로스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6] 테오도로스 2세가 1258년에 사망하자 에피로스는 시칠리아의 만프레드와 동맹을 맺었다. 요안니스 4세 라스카리스가 그를 계승했지만, 아직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미카엘 팔라이올로고스 장군의 섭정 아래 놓였다. 미카엘은 1259년 자신을 공동 황제(미카엘 8세)로 선포했고, 곧 만프레드, 에피로스 데스포타스, 그리고 라틴 아케이아 공작의 연합 침공을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물리쳤다.[6]

2. 3.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과 비잔티움 제국의 부활

미카일 8세는 시칠리아와 라틴 제국의 공격을 막아내고 권력을 강화한 후, 1260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을 선언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미하일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적대 세력인 제노바와 동맹을 맺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여, 1261년 7월 수도를 점령하고 라틴인들을 몰아냈다. 그는 미카일 8세로 즉위하여 동로마 제국의 부활을 선포했다.[1]

1260년,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는 이전 황제들이 성공하지 못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을 개시했다. 그는 제노바와 동맹을 맺었고, 그의 장군 알렉시오스 스트라테고풀로스는 공격 계획 수립을 위해 수개월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관찰했다. 1261년 7월, 대부분의 라틴 군대가 다른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는 틈을 타 알렉시오스는 도시 경비병들을 설득하여 성문을 열게 했다. 도시 안으로 진입한 그는 베네치아 지역을 불태웠다(베네치아는 제노바의 적이었고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

몇 주 후, 미카엘 8세는 황제로 인정받으며 비잔티움 제국을 복원했다. 아카이아의 일부 지역은 곧 탈환되었으나, 트라페존트와 에피로스는 독립적인 비잔티움 그리스 국가로 존속했다. 복원된 제국은 셀주크를 대체하여 등장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새로운 위협에 직면했다.[1]

요한네스 3세와 테오도로스 2세를 섬겼던 미카엘 8세는 요한네스 4세의 섭정에 취임하여, 1259년에는 공동 황제로서 통치하였다. 미카엘은 쿠만인과 셀주크 왕조의 터키인을 포함한 군대를 편성하여 에피로스 전제후국의 테살로니키로 진격하였다. 에피로스 측은 시칠리아의 만프레디와 아카이아 공국과 반 니케아 동맹을 맺었지만, 니케아 군은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그들을 진압하고 알타로 입성하였다.

이듬해 미카엘은 셀주크 왕조, 몽골, 불가리아 등 여러 나라와 동맹을 맺어 콘스탄티노폴리스 재정복 준비를 갖추었다. 1260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에는 실패하였지만, 그 다음 해 니케아 장군 알렉시오스 스트라테고포로스에게 트라키아 순찰을 명령함으로써, 베네치아 공화국의 호위 함대가 흑해로 출격 중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1261년 7월, 베네치아 해군이 없는 틈을 타 니케아 제국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함으로써 라틴 제국은 붕괴되었다.

2. 4. 여파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로 복귀하면서, 옛 니케아 제국의 영토는 부를 빼앗기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재건과 유럽에서의 전쟁 자금으로 사용되었다.[1] 아시아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병사들이 이동하면서 국경은 방어되지 않았고, 튀르크 가지(Ghazi)들의 습격으로 침략당했다.[1]

1261년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가 요한 4세 라스카리스를 폐위하고 눈을 멀게 한 사건은[1]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복원된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1] 요한 4세는 니케아에 남겨졌고, 이후 비티니아의 요새에 유배되어 투옥되었다.[1] 이 사건은 아르세니우스 아우토레이아누스 총대주교에 의한 미카엘 8세의 파문과 니케아 근처에서 거짓 요한 4세가 이끄는 반란으로 이어졌다.[1]

옛 니케아 제국 영토는 점진적으로 튀르크에게 정복되었다.[3] 1282년 미카엘 8세 사후, 튀르크의 습격은 영구적인 정착과 튀르크 아나톨리아 베일릭(beyliks)의 수립으로 바뀌었다.[3] 안드로니코스 2세가 상황을 개선하려 했으나 실패했고,[3] 1300년경에는 옛 니케아 제국의 거의 전 지역이 튀르크에게 정복되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맞은편의 아주 작은 지역만 남았다.[3] 비잔티움 아나톨리아의 최종 멸망은 1326년 부르사 함락,[3] 1331년 니케아 함락, 1337년 니코메디아 함락으로 이어졌다.[3]

3. 군사

니케아 제국은 트라키아 지역을 제외하면 비잔티움 제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그리스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제국은 전성기에 약 2만 명의 병력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이는 십자군 국가들과의 수많은 전쟁에 참여한 기록으로 남아있다.[1]

니케아 제국은 콤네누스 왕조의 군대의 일부를 계승했지만, 마누엘 황제와 같은 콤네누스 황제들이 가졌던 자원이 부족했기에 그들이 동원했던 군대의 규모와 질에는 미치지 못했다. 소아시아 서부는 바다와 접해 있어 다른 분열 국가들보다 부유했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1]

4. 이념과 헬레니즘

니케아 제국 시대에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묘사할 때 이전의 "로마인" 대신 "헬레네스(Έλληνες)"라는 용어를 널리 사용했다.[9] 당시 사람들은 니케아 제국을 "헬라스(Ελλάς)" 또는 "헬레니콘(Ἑλληνικόν)"과 같은 형용사로 표현하는 것을 선호했다.[10][1]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 황제는 로마인(Ῥωμαῖοι)과 그라이코이(Γραικοί)라는 용어를 헬레네스(Ἕλληνες)로 대체했고,[3] 테오도로스 2세 황제는 자신의 영토를 "새로운 헬라스"라고 묘사했다.[11]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게르마노스 2세는 서방 세계와의 공식 서신에서 현지 주민을 묘사하는 데 "그라이코이"라는 용어를, 국가의 이름으로는 "그리스인들의 제국(Βασιλεία τῶν Γραικῶν)"을 사용했다.[12]

일부 학자들은 니케아 제국 시대를 부상하는 헬레니즘 민족 의식과 그리스 민족주의의 징후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민족 의식의 고양이 공식적인 제국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고 지적한다.[13] 공식 이데올로기에서는 비잔티움을 로마 제국으로 보는 전통적인 견해가 유지되었고, 니케아 황제의 신민을 가리키는 로마이오이(Ῥωμαῖοι)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점이 이를 보여준다.[13]

13세기 니케아의 이데올로기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중요성과 도시 탈환에 대한 희망을 특징으로 하며, 정치적 보편주의나 헬레니즘 민족주의에 대한 주장보다는 구약성서의 유대인 섭리에 대한 관념에 더 많이 의존했다. 이 시대의 황제는 종종 모세[15] 또는 조로바벨과 비교되거나, 불기둥으로 비유되기도 했다.[16]

이 시대의 수사법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전쟁과 재정복을 찬양했다.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를 찬양하며 셀주크 술탄과의 전투를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전투로 묘사하고, 테오도로스의 상처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상처와 비유했다.[17] 디미테르 안겔로프는 서방 십자군 이데올로기가 이러한 관점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제시하며, 이 시기에 미카엘 4세 아우토레이아노스 총대주교가 전투에 참가하는 니케아 군대에게 죄의 완전한 용서를 제공했다는 언급이 있는데, 이는 서방의 전면 사면과 거의 동일한 관행이라고 지적했다.[17]

13세기 비잔티움 사람들은 제국의 상황과 고대 그리스의 상황을 비교했다. 코니아테스는 테오도로스 1세가 죽인 셀주크 술탄을 크세르크세스와 동일시했고, 게르마노스 2세 총대주교는 요한 3세 바타체스의 승리를 마라톤 전투 또는 살라미스 해전과 비교했다.[19]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는 아버지의 승리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승리와 비교하고 당대 "헬레네스"의 무예적 가치를 칭찬했다.[20]

이 시기에 비잔티움어에서 "헬레네스"라는 단어의 사용 방식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까지 "헬레네스"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이교도의 잔재와 관련되었으나, 이 시기에는 "그라이코이"와 "헬레네스"라는 용어가 모두 제국의 외교적 용어로 사용되어 제국과 그 시민들을 라틴인들과 구별하려는 욕구에 의해 촉진된 종교적, 민족적 자기 정체성의 형태가 되었다.[21]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게르마노스 2세는 그의 편지에서 좋은 혈통을 그의 헬레니즘 조상의 순수성과 동일시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와의 어떤 연관성보다 그의 헬레니즘 언어 및 민족적 배경에 더 큰 가치를 두었다.

5. 경제

니케아 제국은 생산력이 매우 높아 주민들의 생활 필수품을 모두 국내에서 충당할 수 있었다. 가장 오랜 기간 통치한 황제 요하네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는 식량 수입을 금지하기도 했다.[1] 황제의 직할지에서는 농업과 목축을 통해 이윤을 창출했고, 특히 계란 판매 수익으로 보석으로 장식된 “계란 왕관”을 만들게 했다. 한편으로는 면세 특권과 하천 어업권을 포함한 프로노이아 제도를 통해 귀족들에게 많은 특권을 부여했다.[2]

1219년 베네치아 공화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여 귀족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관세를 면제받았으며, 니케아 귀족들은 비단 직물을 원했다.[3] 제노바 공화국과도 동맹을 체결하여 투자를 늘린 한편, 제노바는 이탈리아 연안 도시로서는 처음으로 흑해 무역에 참여할 수 있었다.[4]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국내 농업이 타격을 입은 셀주크 제국이 식량 수입을 필요로 하게 되자, 니케아 제국은 그곳에 수출함으로써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5] 몽골이 제2 불가리아 제국을 공격하고 있었던 것도 있어, 주변 국가에서는 니케아 제국의 세력만이 두각을 나타내는 형태가 되었고, 경제 성장과 함께 이것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재정복을 가능하게 했다고 여겨진다.[5]

6. 니케아 제국의 황제

이름출생-사망재위 기간비고
콘스탄티노스 라스카리스1204년공식적인 즉위는 없었음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1174 - 12221204 - 1222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
요안니스 3세 두카스 바타치스1192 - 12541222 - 1254테오도로스 1세의 사위, 뇌전증 환자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1221 - 12581254 - 1258요안니스 3세의 아들
요안니스 4세 라스카리스1250 - 13051258 - 1261테오도로스 2세의 아들, 미하일 8세에 의해 폐위되어 실명당하고 감옥에 갇힘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1224 - 12821259 - 1261스트라테고스(Strategos); 요안니스 4세의 섭정이자 공동황제; 알렉시오스 3세의 증손자, 1261년 동로마 제국을 부활시킴


참조

[1] 논문 Byzantine Culture in Late Mediaeval Greek States http://histsociety.w[...] 2015
[2] 서적 Faiths Across Time: 5,000 Years of Religious History [4 Volumes]: 5,000 Years of Religious History ABC-CLIO
[3] 서적 Bisanzio, Venezia e il mondo franco-greco https://books.google[...] Istituto ellenico di studi bizantini e postbizantini di Venezia 2002
[4] 서적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 324–1453 https://books.google[...] Univ of Wisconsin Press
[5] 서적 The Columbia history of the world
[6] 서적 A Short history of Greece from early times to 1964
[7] 서적 Chronicle Abhandlungen der historischen Classe der königlich bayerischen Akademie
[8] 서적 The Lascarids of Nicaea: The Story of an Empire in Exile Adolf M. Hakkert
[9] 논문 Chapter 2, Greek Ethnic Survival Under Ottoman Domination https://scholarworks[...] 2008
[10] 서적 Byzantium and the Rise of Russia: A Study of Byzantino-Russian Relations in the Four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11] 서적 A History of Greece https://books.google[...] Macmillan International Higher Education 2009
[12] 서적 Byzantine Art and Diplomacy in an Age of Decline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
[13] 서적 Imperial ideology and political thought in Byzantium (1204–1330) Cambridge University Press
[14] 서적
[15] 서적 A Byzantine government in exile : government and society under the Laskarids of Nicaea, 1204–1261 Oxford University Press
[16] 서적
[17] 서적
[18] 논문 Byzantine 'Nationalism' and the Nicaean Empire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22] 서적 The Origins of the Greek Nation:the Byzantine Period (1204–1461) New Brunswick
[23] 논문 Antique Nation? 'Hellenes' on the Eve of Greek Independence and in Twelfth-Century Byzantium
[24] 논문 Byzantine 'Nationalism' and the Nicaean Empire
[25] 서적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 324–1453 https://books.google[...] Univ of Wisconsin Press
[26] 서적 The Columbia history of the world
[27] 서적 A Short history of Greece from early times to 1964
[28] 서적 ビザンツ帝国史 東海大学出版会
[29] 서적 東欧史(世界各国史13) 山川出版社
[30] 서적 The Lascarids of Nicaea: The Story of an Empire in Exile Adolf M. Hakkert
[31] 논문 Chapter 2, Greek Ethnic Survival Under Ottoman Domination https://scholarworks[...] 2008
[32] 서적 Byzantium and the Rise of Russia: A Study of Byzantino-Russian Relations in the Four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33] 논문 Byzantine Culture in Late Mediaeval Greek States http://histsociety.w[...]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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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간행물 Byzantine ‘Nationalism’ and the Nicaean Empire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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