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니콘 (모스크바의 총대주교)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니콘은 1605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러시아 정교회의 총대주교를 역임했다. 그는 차르 알렉세이 1세의 후원을 받아 노보스파스키 수도원장, 노브고로드 대주교를 거쳐 1652년 모스크바 총대주교에 선출되었다. 니콘은 교회 개혁을 추진하여 예배 의식 및 전례서를 개정하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재정립하려 했다. 그러나 개혁에 대한 반발과 권력 투쟁으로 인해 1658년 총대주교직에서 물러났고, 1667년 파면되어 유배되었다. 그의 개혁은 러시아 정교회 내 종교적 분열을 초래하고, 구교도 탄압으로 이어지는 등, 러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니콘은 1681년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니즈니노브고로드주 출신 - 겐나디 야나예프
    소련의 정치인이었던 겐나디 야나예프는 소련 부통령을 지냈으며, 1991년 8월 쿠데타를 주도했으나 실패 후 체포, 사면 후 러시아 국제 관광 아카데미에서 근무하다 폐암으로 사망했다.
  • 니즈니노브고로드주 출신 - 샤잠 사핀
    샤잠 사핀은 소련의 레슬링 선수로, 1952년 헬싱키 올림픽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라이트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1952년 소련 선수권 대회와 1953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각각 동메달을 획득했다.
  • 모스크바 총대주교 - 모스크바 총대주교 키릴
    모스크바 총대주교 키릴 1세는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으로, 다양한 주교직을 거쳐 2009년 총대주교로 선출되었으나, 푸틴 대통령과의 관계, 우크라이나 침공 지지, 재산 축적 의혹 등으로 논란이 있다.
  • 모스크바 총대주교 - 모스크바 총대주교 알렉세이 2세
    알렉세이 2세는 1990년부터 2008년까지 모스크바 총대주교이자 전 러시아의 총대주교로,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정교회의 부흥을 이끌고 해외 러시아 정교회와의 재통합에 기여했으나, KGB 협력 의혹과 동성애 반대 입장 등으로 논란이 있었다.
  • 모르도바인 - 니콜라이 메르쿠시킨
    니콜라이 메르쿠시킨은 러시아의 정치인으로, 모르도바 공화국 대통령을 거쳐 사마라주 주지사를 역임했으며, 안정적인 경제 유지와 정시 급여 지급으로 인기를 얻었지만 반대자 출마 제한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 모르도바인 - 스베틀라나 호르키나
    스베틀라나 호르키나는 이단 평행봉에서 뛰어난 기량으로 올림픽 2연패와 세계 선수권 5연패를 이룬 러시아의 전 기계체조 선수로, 은퇴 후에는 러시아 체조 연맹 부회장과 국가 두마 의원으로 활동하며 정치에도 참여했다.
니콘 (모스크바의 총대주교)
기본 정보
니콘 총대주교의 초상화, 1660-1665년경
니콘 총대주교의 초상화, 1660-1665년경
이름니콘
출생명니키타 미닌
출생1605년 5월 7일
출생지니즈니노브고로드 근처 벨데마노보, 러시아 차르국
사망1681년 8월 17일
사망지야로슬라블, 트로피노의 성 니콜라스 교회, 러시아 차르국
매장지새 예루살렘 수도원
국적모스크바 대공국
종교러시아 정교회
직책
직함모스크바 총대주교
재임 시작1652년
재임 종료1666년
이전모스크바의 요시프 총대주교
이후모스크바의 요아사푸스 2세 총대주교
기타 직책대군
개인 정보
배우자별리 (이혼)
자녀3명의 아들을 일찍 잃음
모스크바 총대주교 니콘의 17세기 자필 서명

2. 초기 생애와 배경

니콘은 1605년 5월 7일,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약 96km 떨어진 벨데마노보(Вельдеманово) 마을에서 모르도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1][2] 그의 속명은 니키타(Никита)였으며,[2] 핀족 모르도바인 혈통이라는 설도 있다.[2]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글을 배웠다.[1]

젊은 시절 결혼하여 본당 신부가 되었으나,[1] 1635년경 세 자녀를 모두 잃은 후[1] (페스트로 잃었다는 기록도 있음[2]) 수도사의 길을 택했다.[1] 아내를 설득해 수녀원에 보낸 뒤, 백해솔로베츠키 제도 내 안제르스키 섬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며 '니콘'이라는 이름을 받았다.[1]

그는 뛰어난 웅변술과[1] 재능, 행동력을 지닌 인물로,[2] 이러한 자질은 훗날 차르 알렉세이 1세의 주목을 받아 빠른 출세의 발판이 되었다.[2]

2. 1. 어린 시절과 수도 생활

니콘은 1605년 5월 7일,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약 96km(90 버스트) 떨어진 벨데마노보(Вельдеманово) 마을에서 모르도바 농부 미나의 아들로 태어났다.[1] 속명은 니키타(Никита)였다.[2] 핀족 모르도바인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설도 있다.[2]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직후 사망했고,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계모에게 학대를 받았다.[1] 그는 본당 신부에게 글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1]

12세에 집을 나와 마카리예프 수도원에 들어가 1624년까지 견습 수사로 지냈다.[1] 그러나 부모의 간청으로 집으로 돌아와 결혼하였고, 인근 마을에서 본당 신부가 되었다.[1]

니콘의 엄격한 미적 관점을 대표하는 신 예루살렘 수도원의 니콘의 거주지


그의 웅변 능력은 마카리예프 수도원 부지에서 열린 무역 박람회 때문에 그곳을 방문했던 모스크바 상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상인들의 도움으로 그는 수도 모스크바의 인구 밀도가 높은 교구에서 사제로 봉사하도록 초청받았다.[1] 그는 모스크바에서 약 10년 동안 사제로 활동했다.[1]

1635년경, 그의 세 자녀가 모두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1] (30세가 되기 전에 페스트로 세 아들을 잃었다는 기록도 있다.[2]) 그는 이를 신의 섭리로 여기고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했다.[1] 먼저 아내를 설득하여 수녀가 되게 한 후, 자신은 백해안제르스키 섬에 있는 외딴 은둔처로 물러났다.[1] 수도사가 되면서 그는 '니콘'이라는 이름을 받았다.[1]

1639년에 그는 수도원 원장과 다툼이 생겨 배를 타고 수도원을 탈출했다. 항해 중 폭풍을 만나 키 섬에 좌초되었는데, 훗날 니콘은 이곳에 큰 수도원을 세우게 된다. 그는 결국 노브고로드 교구의 코제오제르스키 수도원에 도착하여 1643년에 그곳의 수도원장이 되었다.[1]

2. 2. 수도 생활과 차르와의 만남

1635년경, 그의 세 자녀가 모두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다. 니콘은 이를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먼저 아내를 설득하여 수녀원에 들어가게 한 뒤, 자신은 백해솔로베츠키 제도 내 안제르스키 섬으로 가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며 '니콘'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1639년, 니콘은 수도원장과 갈등을 겪고 보트를 타고 수도원을 떠났다. 폭풍우를 만나 그의 배는 키 섬에 잠시 머물게 되었는데, 훗날 그는 이곳에 큰 수도원을 세우게 된다. 이후 노브고로드 교구의 코제오제르스키 수도원에 정착하여 1643년 그곳의 수도원장이 되었다.

1646년, 니콘은 수도원장 자격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당시 관례에 따라 어린 차르 알렉세이 1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매우 독실했던 알렉세이 1세는 니콘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를 로마노프 왕조와 깊은 관련이 있는 모스크바의 중요한 노보스파스키 수도원의 수도원장(아르키만드라이트)으로 임명했다. 이는 니콘이 빠른 속도로 출세하는 계기가 되었다.

3. 경건 열성자회와 종교 개혁의 배경

니콘은 노보스파스키 수도원에서 활동하며 1630년대 후반 결성된 경건 열성자 그룹에 합류했다. 이 모임은 혼란의 시대 이후 러시아 사회의 종교적 해이를 문제 삼으며 신앙 부흥과 경건함 회복을 목표로 했고, 이는 니콘의 종교 개혁 추진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이후 1649년 노브고로드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1]

3. 1. 경건 열성자회 (Zealots of Piety)

니콘은 노보스파스키 수도원에서 봉사하는 동안 '경건 열성자'(боголюбцыrus) 혹은 '경건파'로 불리는 집단의 일원이 되었다. 이 집단은 1630년대 후반부터 활동한 교회 및 세속 인사들의 모임으로, 차르 알렉세이의 고해 신부인 스테판 보니파티예프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혼란의 시대를 겪은 후, 경건파 구성원들은 당시 러시아 사회의 문제들이 러시아 국민의 종교성 부족에 대한 신의 분노 때문이라고 믿었다. 이에 따라 그들은 러시아 정교 신앙의 부활과 대중의 종교적 경건함 갱신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 그룹에는 표도르 르티셰프, 수도원장 이반 네로노프, 카잔 성당의 사제, 그리고 나중에 니콘의 개혁에 반대하게 되는 아바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645년, 젊고 신앙심이 깊었던 차르 알렉세이가 16세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개혁 의식이 강한 성직자들이 모스크바로 모여들었다. 니콘 역시 차르 알렉세이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모스크바의 노보스파스키 수도원장을 거쳐 빠르게 승진하여 1649년에는 노브고로드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노브고로드 대주교 시절 그는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 군중에게 심하게 구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 행렬을 이끌며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다.[1]

경건파의 주요 주장은 다성부(多聲部) 성가 금지, 설교 도입, 성직자 규율 개혁 등이었다. 특히 다성부 금지는 기존 예배 방식을 크게 바꾸는 문제였기에 정교회 중심부에서는 추진이 더뎠다. 그러나 당시 노브고로드 대주교였던 니콘은 이미 자신의 관할 구역에서 다성부를 금지하고 있었으며, 모스크바를 방문할 때마다 차르 알렉세이에게 단성부(單聲部) 예배를 선보였다. 니콘의 이러한 노력은 차르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마침내 1651년 알렉세이가 소집한 교회 회의에서 단성부 도입이 공식적으로 결정되었다.

3. 2. 개혁 이전의 러시아 정교회 상황

17세기 중반은 류리크 왕조의 단절과 이어진 동란 시대(스무타, 1598-1613년)의 혼란이 겨우 수습되던 시기였다. 1613년 동란 시대가 끝나고 미하일 로마노프가 로마노프 왕조의 초대 차르로 즉위했으며, 그의 아버지인 필라레트가 모스크바 총대주교 자리에 올랐다. 이후 국가와 러시아 정교회는 하나가 되어 모스크바 국가의 재건을 시작했다.

당시 교회가 직면한 주요 과제 중 하나는 동란 시대 동안 다른 종교를 가진 국가에 점령되었던 지역의 정교 신자들에 대한 문제였다. 이 지역 신자들의 예배 의식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정교회와 차이가 발생했다. 서 루스 지역의 루스인들은 16세기 동안 가톨릭을 국교로 삼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 아래 있었다. 이들은 콘스탄티노폴 총대주교청의 관할 아래 정교 신앙을 유지했지만, 예수회 등 가톨릭 교회의 압력으로 1596년 브레스트 교회 연합을 통해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연합을 추진했던 가톨릭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가 사망한 후, 서 루스 지역에서는 키예프 주교좌를 회복하고 예수회의 교육 방식을 도입한 독자적인 정교 교육을 시작했다. 가톨릭 및 프로테스탄트와의 교리 논쟁 과정에서 신학은 더욱 발전했으며, 라틴 문화의 영향을 받은 미술, 음악, 문학이 나타났다. 또한 서 루스 정교회는 모스크바보다 먼저 서유럽의 발전된 인쇄 기술을 받아들였고, 이곳에서 출판된 서적들이 모스크바로 유입되었다. 모스크바 정교회는 이러한 서 루스의 새로운 정교 문화를 수용할 것인지, 아니면 이단으로 간주하여 배척할 것인지의 중요한 기로에 서 있었다.

한편, 동란 시대가 끝난 후 모스크바 정교회는 조직을 재정비하고 차르의 보호 아래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 내부적으로는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1636년, 니즈니노브고로드의 사제들이 당시 총대주교 이오아사프 1세에게 보낸 탄원서에는 해당 지역 교회의 성직자들이 무지하고 태만하며, 교회 내 풍기가 문란하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일부 사제나 부제들은 성찬 예배 때 성가의 여러 구절을 한꺼번에 부르는 방식(다성부 또는 다선율)으로 의식을 빨리 끝내려 했으며, 신도들 사이에서는 문란한 연회가 벌어지기도 했다.

1645년, 차르 미하일의 아들 알렉세이(1629-1676)가 16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젊고 신앙심이 깊었던 차르 알렉세이 아래에서 개혁 성향이 강한 성직자들이 모스크바로 모여들었다. 후대의 연구자들은 이들 개혁파 성직자들을 '경건파'(боголюбцы|보골륩치ru)라고 부른다. 니콘 역시 이 경건파의 일원이었으며, 나중에 개혁에 반대하게 되는 아바쿰(1620년 - 1682년)도 초기에는 경건파에 속했다. 니콘은 모스크바로 온 후 차르 알렉세이의 깊은 신임을 얻어 모스크바 노보스파스키 수도원장, 이후 노브고로드 대주교로 빠르게 승진했다.

경건파의 주요 주장은 다성부 예배 금지, 설교 도입, 성직자 규율 개혁 등이었다. 하지만 다성부 금지는 기존의 예배 방식을 크게 바꾸는 것이었기 때문에 정교회 중심부에서는 쉽게 추진되지 못했다. 당시 노브고로드 대주교였던 니콘은 이미 자신의 관할 지역에서 다성부를 금지했으며, 모스크바를 방문할 때마다 차르 알렉세이에게 단성부로 진행되는 예배를 선보였다. 1651년, 알렉세이가 소집한 교회 회의에서 마침내 단성부 예배 도입이 결정되었는데, 여기에는 니콘이 보여준 예배가 큰 영향을 미쳤다.

3. 3. 서방 교회의 영향과 문제점

서(西)루스 지역의 루스인들은 16세기를 거치며 가톨릭을 국교로 삼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이 지역의 정교회 신자들은 본래 콘스탄티노폴 총대주교청의 관할 아래 있었으나, 예수회를 비롯한 가톨릭 교회의 지속적인 압력을 받았다. 결국 1596년, 서루스 정교회는 로마 교황의 관할권을 인정하는 브레스트 교회 연합을 맺게 되었다.

연합을 추진했던 가톨릭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가 사망한 후, 서루스 지역에서는 키예프 주교좌가 회복되었고, 예수회의 교육 방식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정교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가톨릭 및 프로테스탄트와의 신학적 논쟁 과정에서 서루스 정교회의 신학은 더욱 정교하게 발전했으며, 라틴 문화의 영향을 받은 미술, 음악, 문학 등이 새롭게 등장했다. 또한 서루스 정교회는 모스크바보다 앞서 서유럽의 발전된 인쇄 기술을 도입했고, 이를 통해 출판된 서적들이 모스크바로 유입되었다.

이러한 서루스 정교회의 새로운 문화적 흐름은 모스크바 정교회에게 큰 고민거리였다. 모스크바 정교회는 이를 수용할 것인지, 아니면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4. 니콘의 개혁

니콘이 모스크바 총대주교로 임명될 당시, 러시아 정교회 내에는 이미 교회 개혁의 필요성이 논의되고 있었다. 이전 총대주교 시절부터 예배서 개정 등의 시도가 있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니콘은 총대주교가 되자 러시아 정교회의 예배 의식과 전례서를 당대 그리스 정교회의 기준에 맞춰 통일하는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외국의 학식 있는 성직자들과 교류하고 시노드(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개혁은 비잔티움 제국 멸망 이후 러시아가 정교회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과, 우크라이나 등 서부 지역 통합 과정에서 그리스 정교회의 영향을 받은 신자들을 포용하려는 차르 알렉세이의 정치적 필요성과도 맞물려 진행되었다.[2]

그러나 니콘의 개혁은 기존의 러시아 전통 의례를 중시하던 많은 성직자와 신자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개혁 과정에서의 강압적인 방식과 전통 파괴에 대한 반감은 결국 구교도 운동의 시작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러시아 정교회의 오랜 분열을 야기하는 결과를 낳았다. 니콘의 개혁은 러시아 정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로 평가받지만, 동시에 극심한 내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4. 1. 총대주교 선출 (1652)

1652년 8월 1일, 니콘은 모스크바 총대주교로 선출되었다. 니콘은 자신이 보야르(귀족)들에게 그다지 인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총대주교직 제안을 거절했다.

니콘을 설득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차르 알렉세이와 보야르들이 직접 무릎을 꿇고 간청한 후에야 니콘은 마음을 돌렸다.

성직자들과 함께 있는 니콘의 그림


그는 총대주교직을 수락하기 전에, 전체 회의 참석자들에게 러시아 정교회의 교리, 규범, 관습에 관한 모든 사항에 대해 절대적으로 복종하겠다는 엄숙한 서약을 하도록 요구했다. 이러한 조건을 내건 후에야 비로소 총대주교직을 수락하였다.

4. 2. 예배 의식 및 전례서 개정

니콘이 총대주교로 임명될 당시 러시아 정교회 내에는 이미 교회 개혁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일부 교회 고위 성직자들은 이전 총대주교인 요아사프가 시작한 교회 예배서 개정 작업을 이어받아 일부 의식을 수정하려 했으나,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기에는 다소 소극적이었다.

니콘은 보다 대담한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외국의 저명한 그리스 고위 성직자들과 상의하고 모스크바로 초청하여 협의를 거쳤다. 이 과정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키예프의 학자들은 당시 모스크바에서 사용되던 예배서가 이단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사용되던 성상(이콘) 역시 고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양식에서 벗어나 서유럽(프랑코니아와 폴란드) 바로크 양식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점을 니콘에게 확인시켜 주었다.[2]

알렉세이 키브셴코. 니콘 총대주교와 에피파니 슬라비네츠키가 예배서를 개정하고 있다.


니콘은 이러한 새로운 양식의 성상 사용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가가호호 수색하여 문제의 성상을 찾아내도록 명령했으며, 그의 병사들은 이 '이단적인' 성상들의 눈을 파내고 도시를 돌며 조롱하는 행위를 벌였다. 또한 앞으로 이러한 성상을 제작하거나 사용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후대의 연구에서는 니콘 시대의 모스크바 예배서가 당시 그리스에서 사용되던 것과는 다른 판본에 속하며, 개정되지 않은 모스크바의 서적이 실제로는 그리스 서적보다 더 오래되고 권위 있는 것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리스 서적은 여러 세기에 걸쳐 개정되면서 비교적 새로운 요소들이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1654년, 니콘은 시노드(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요아사프 총대주교 시기 개정된 예배서를 재검토하도록 했다. 시노드의 다수는 "우리 고유의 전통보다는 그리스의 것을 따라야 한다"고 결정했다. 165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두 번째 공의회에서는 예배서 개정을 최종 승인하고, 이에 반대하는 소수파(원로 사제당과 콜롬나 주교 바울 포함)를 파문했다. 이러한 개혁은 1654년의 대규모 전염병 발생 시기와 맞물려 진행되었다.

총대주교가 된 니콘이 처음으로 착수한 사업 중 하나는 기도서의 통일이었다. 당시 러시아 각지의 기도서는 내용에 차이가 많았기에, 니콘은 그리스 학자들에게 표준 기도서 작성을 의뢰했다. 이어서 니콘은 러시아의 전통적인 예배 방식 대신 그리스식 의례를 도입하는 개혁에 착수했다. 1653년 부활절 직전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변경 사항을 담은 내용을 발표했다.

# 십자 성호를 그을 때, 기존의 두 손가락 방식 대신 그리스와 같이 세 손가락을 사용할 것.[12]

# 대재(사순 시기) 중 에프렘의 기도 시 무릎 꿇어 절하는 횟수를 기존 16회에서 4회로 줄일 것.

니콘의 이러한 개혁은 비잔티움 제국 멸망 이후 러시아가 전 동방 정교회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하려는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깊었다. 또한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가 서부 루스 지역을 병합하면서 그리스 정교회의 영향을 받은 정교도들을 포용해야 할 필요성과도 맞닿아 있었다.

개혁 과정에서 텐트형 교회(예: 성 바실리 대성당) 건축이 엄격히 금지되었고, 많은 오래된 교회들이 '고대 비잔틴 양식'의 새로운 교회를 짓기 위해 철거되었다. 이러한 강경한 조치는 니콘과 그의 개혁에 대한 구교도들의 깊은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4. 3. 니콘의 개혁에 대한 반발과 구교도의 출현

니콘이 총대주교로 임명될 당시 러시아 정교회 내부에는 이미 교회 개혁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원로 사제'(경건파)로 알려진 일부 교회 고위 성직자들은 이전 요아사프 총대주교 시절 시작된 예배서 개정 작업을 이어받아 일부 의례 수정을 시도했지만,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니콘은 과감하게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외국의 학식 높은 그리스 고위 성직자들과 교류하며 조언을 구했고, 이들을 모스크바로 초청하여 협의했다. 이 과정에서 니콘은 당시 모스크바에서 사용되던 예배서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기준에서 벗어난 이단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사용되던 성상 역시 고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 서유럽(프랑코니아와 폴란드) 바로크 양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2]

니콘은 이러한 새로운 양식의 성상 사용을 강하게 비판하며, 이를 찾아내기 위해 가택 수색까지 명령했다. 그의 병사들과 하인들은 이렇게 찾아낸 '이단적인' 성상들의 눈을 파내고 도시를 돌며 조롱하는 행위를 벌였다. 또한 그는 앞으로 이러한 성상을 제작하거나 사용하는 자들에게 엄벌을 내릴 것이라는 칙령을 발표했다.

후기 연구에 따르면, 니콘 시대의 모스크바 예배서는 당시 그리스에서 사용되던 판본과는 다른 계통에 속하며, 오히려 개정되지 않은 모스크바의 예배서가 그리스의 것보다 더 오래되고 권위 있는 원형을 보존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리스의 예배서는 여러 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개정되면서 오히려 새로운 요소들이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1654년, 니콘은 시노드(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요아사프 총대주교 시기의 예배서 개정 작업을 재검토하게 했다. 시노드는 "우리 고유의 고대 전통보다는 그리스의 것을 따라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1656년에 열린 두 번째 모스크바 공의회에서는 이러한 예배서 개정을 최종 승인하고, 이 개혁에 반대하는 소수의 성직자들, 특히 '원로 사제' 그룹과 콜롬나의 주교 바울 등을 파문했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개혁은 1654년 러시아 전역을 휩쓴 대규모 전염병과 시기적으로 맞물렸다.

개혁은 건축 양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 고유의 텐트형 교회(예: 성 바실리 대성당) 건설이 엄격히 금지되었고, 많은 오래된 교회들이 '고대 비잔틴 양식'에 따라 새로 짓는다는 명목 하에 철거되었다. 이러한 강압적인 방식은 구교도(스타로베리)들이 니콘과 그의 개혁 전반에 대해 깊은 반감을 품게 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Deprivation of the cloth of Patriarch Nikon
니콘 총대주교의 파면
]니콘의 개혁은 러시아의 전통적인 예배를 중시하는 성직자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니콘 자신도 속했던 경건파 성직자들 중 다수는 이 예배 개혁을 단순한 "의례의 수정"이 아닌 러시아 정교의 전통을 파괴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니콘은 라틴파(가톨릭)의 영향을 받은 이단자로 비춰졌다. 당시 많은 신자들에게 신앙생활은 곧 예배 의례와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의례의 변경은 신앙 자체의 변화를 강요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니콘은 반대파에게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는 개혁을 거부하는 이들을 교회법 위반자로 규정하고 파문하거나 수도원에 감금하고, 심지어 유배형에 처했다. 대표적인 반대파 지도자였던 사제 아바쿰은 시베리아토볼스크로 유배되었다. 이러한 탄압은 반발을 더욱 심화시켰고, 러시아 정교회는 니콘의 개혁을 따르는 공식 교회와 전통을 고수하는 구교도로 분열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

1667년 12월에 열린 모스크바 대 시노드에서는 비록 니콘 자신은 다른 죄목으로 파면되었지만, 그의 교회 개혁 자체는 정당한 것으로 재확인되었다. 동시에 이 시노드는 아바쿰을 비롯하여 개혁을 받아들이기를 끝까지 거부한 모든 이들을 파문함으로써 교회 분열을 더욱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5. 권력 투쟁과 몰락

니콘 총대주교는 러시아 정교회의 권위를 높이고 세속 권력으로부터 교회의 독립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차르 알렉세이 1세와의 초기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주권'(Gosudar) 칭호를 사용하고, 심지어 차르보다 교회가 우위에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3][4] 특히 교회의 지위를 격하시키고 국가에 종속시키는 내용을 담은 1649년 법전(소보르노예 우로제니예)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차르 및 보야르(귀족) 세력과의 갈등이 깊어졌다.[6]

이러한 니콘의 권력 강화 시도와 그의 강경한 태도는 많은 정적을 만들었고, 결국 차르와의 관계 파탄으로 이어졌다.[7] 1658년, 니콘은 차르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신의 중요성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새 예루살렘 수도원으로 물러났으나, 이는 오히려 그의 정치적 고립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러시아 정교회는 니콘이 후임자 선출을 거부하면서 오랫동안 총대주교 공석 상태를 겪게 되었으며, 결국 1666년 소집된 대규모 교회 회의에서 니콘은 공식적으로 총대주교직을 박탈당하고 벨로제르스크 또는 페라폰토프 수도원으로 유배되었다. 이는 니콘 개인의 몰락일 뿐만 아니라, 러시아 역사에서 교회와 국가 권력 간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5. 1. 니콘의 권력 강화와 차르와의 갈등

니콘은 필립 대주교를 시성하고 그의 유해를 모스크바 크렘린으로 옮겨 차르들에게 교회를 상대로 저지른 범죄를 상기시켰다(알렉산드르 리토프첸코의 그림).


1652년부터 1658년까지 니콘은 차르 알렉세이 1세의 단순한 측근을 넘어 사실상 동료에 가까운 지위를 누렸다. 그는 공문서와 사적인 편지에서 주권(Gosudar)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3] 1654년 10월경에는 차르로부터 '대군'(Velikii Gosudar, 위대한 군주)이라는 칭호까지 부여받았다. 이는 과거 차르 미하일이 그의 아버지이자 총대주교였던 필라레트에게 부여했던 특별한 칭호였다. 특히 1654년부터 1667년까지 이어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 시기처럼 차르가 군대를 이끌고 수도 모스크바를 비웠을 때, 니콘은 섭정으로서 최고 통치자 역할을 수행하며 막강한 정치 권력을 행사했다.[3] 이러한 니콘의 권력 집중은 고위 보야르(귀족)들 사이에서 상당한 불만을 야기했다.[3]

니콘은 교회를 세속 권력으로부터 분리하고, 교회와 국가가 각자의 영역을 지키며 조화롭게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권위에는 두 개의 칼, 즉 정신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이 있다"고 말하며, "최고의 주교는 차르보다 높다"고 공언했다.[4] 심지어 차르를 '달'에, 총대주교를 '태양'에 비유하며 총대주교가 차르보다 우위에 있다는 인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교회를 국가와 유사한 위계질서로 조직하고 총대주교가 이를 완벽하게 통제하려 했다. 개인적으로 니콘과 차르 알렉세이는 차르가 자신의 모든 자녀의 대부로 니콘을 삼으면서 긴밀한 관계를 공식화하기도 했다.[5]

니콘은 특히 1649년에 제정된 소보르노예 우로제니예(Sobornoye Ulozheniye, 러시아 법전)에 강하게 반대했다. 이 법전은 성직자의 지위를 낮추고 교회를 사실상 국가에 종속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수도원 소유 토지에 대한 과세 수입을 국가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도록 규정했기 때문이다.[6] 니콘은 이 법전을 '악마의 서'라고 부르며 비난했다.

그러나 니콘의 이러한 강력한 권력 행사와 주장은 수많은 정적을 만들었다. 그의 오만한 태도와 행동 또한 반감을 샀다. 1658년 여름, 니콘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차르 알렉세이에게 "주권 총대주교가 주권 차르를 가리고 있다"고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한때 니콘을 "가장 친한 친구"라고 불렀던 알렉세이 차르는 그에게 갑자기 냉담해졌다.[7]

결국 1658년 7월, 니콘은 총대주교직을 유지한 채 돌연 모스크바 근교의 신 예루살렘 수도원으로 물러났다. 이는 차르를 압박하여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시위성 행동으로 해석되지만, 이미 니콘에게 등을 돌린 차르는 그의 복귀를 요청하지 않았다. 이후 교회는 임시 수장을 선출했지만, 니콘 자신이 후임 총대주교 선출을 거부하면서 러시아 정교회는 1658년부터 1667년까지 실질적인 총대주교 공석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5. 2. 니콘의 사임과 유배 (1658-1667)

1658년 7월, 니콘은 자신의 중요성을 과시하고 차르 알렉세이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일부에서는 차르를 압박하여 권위를 회복하려는 시위 행위로 분석)로, 공개적으로 총대주교 예복을 벗고 모스크바 서쪽 약 40km 거리에 자신이 세운 새 예루살렘 수도원으로 떠났다. 그러나 니콘은 공식적으로 총대주교직에서 사임한 것은 아니었다.

차르 알렉세이는 니콘의 이러한 행동에 동요하지 않았고, 그의 복귀를 요청하지 않았다. 니콘과 차르의 관계는 소원해졌고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다. 교회는 임시 수장을 선출하려 했으나, 니콘 자신이 후계자 선출을 거부하면서, 러시아 정교회는 1658년부터 1667년까지 거의 9년 동안 실질적인 총대주교 없이 운영되는 상황에 놓였다. 차르는 니콘을 멀리하면서도 교회의 그리스식 개혁은 계속 추진했으며, 이 기간 동안 개혁 반대파는 다시 세력을 키울 기회를 얻었다.

1660년 2월, 공석인 총대주교 자리를 채우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시노드(교회 회의)가 열렸다. 시노드는 새로운 총대주교를 선출하는 것 외에도 니콘이 총대주교 지위와 사제 서품 자격을 모두 상실했다고 결정하려 했다. 그러나 저명한 교회 전문가였던 에피파니우스 슬라비네츠키가 이러한 결정의 교회법적 정당성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니콘 축출 시도는 무산되었다. 차르 역시 시노드 결정의 유효성에 대해 확신하지 못해 이를 강행하지 않았다.

이후 6년 동안 니콘의 지위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당시 동방 정교회의 여러 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했지만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고, 결국 이 문제는 범 정교회 시노드에서 다루기로 결정되었다.

1666년, 차르 알렉세이는 대규모 교회 회의를 소집했고, 같은 해 12월 이 회의는 니콘의 총대주교직을 공식적으로 박탈했다. 이후 니콘은 벨로제르스크의 수도원 또는 볼로그다 인근의 페라폰토프 수도원으로 유배되었다.

5. 3. 니콘의 죽음과 유산 (1681)

차르 알렉세이와 교회는 1666년 대규모 교회 회의를 열어 니콘의 총대주교직을 공식적으로 박탈하고, 그를 벨로제르스크의 수도원(혹은 볼로그다의 페라폰토프 수도원)으로 추방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1667년에는 안티오키아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까지 초청된 교회 회의에서 니콘이 추진했던 전례 개혁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개혁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파문할 것을 선언했으며, 이후 두 손가락으로 십자 성호를 긋는 등 기존 전례를 고수하는 이들은 정교회로부터 분리파(라스콜리니키), 즉 고의식파로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고의식파의 강한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교회 당국과 차르 정부는 이들을 지속적으로 탄압했다. 니콘 자신은 이후 차르 표도르 3세의 허락을 받아 모스크바로 돌아오던 중 1681년 8월 17일에 사망했다.

6. 니콘 개혁의 영향과 역사적 의의

니콘 총대주교의 개혁은 러시아 정교회 역사상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그 파장은 종교를 넘어 러시아 사회와 문화 전반에 미쳤다. 니콘은 당시 러시아 정교회의 예배서와 성상 등이 초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전통에서 벗어나 서구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고, 이를 그리스 정교회의 기준에 맞춰 개혁하고자 했다. 이 개혁은 예배 의식, 성상, 교회 건축 등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졌다.

하지만 니콘의 급진적이고 강압적인 개혁 추진 방식은 전통을 중시하던 많은 이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개혁을 거부하고 기존의 신앙 양식을 고수한 이들은 구교도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는 결국 러시아 정교회의 심각한 분열(라스콜)을 초래했다. 니콘은 반대 세력을 강하게 탄압했고, 1667년 모스크바 대 시노드에서 개혁이 공식 승인되면서 교회 분열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니콘의 개혁은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교회의 독립성과 권위를 높여 세속 권력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했으며, 한때 차르 알렉세이의 신임을 바탕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교회의 우위를 강조하는 그의 입장은 결국 차르 및 보야르(귀족)들과의 갈등을 야기했고, 이는 그의 정치적 몰락으로 이어졌다.

문화적으로 니콘의 개혁은 러시아에 그리스 및 서구 문화 요소를 받아들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는 러시아의 예술, 건축, 음악 등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쳤고, 이후 러시아 사회에서 서구화와 전통 사이의 정체성 논쟁을 심화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니콘의 개혁은 러시아 정교회의 분열이라는 부정적 결과를 낳았지만, 동시에 러시아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장기적인 변화를 추동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6. 1. 종교적 분열과 구교도의 탄압

니콘 총대주교가 임명될 당시 러시아 정교회 내에서는 이미 개혁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일부 교회 고위 성직자들은 이전 요아사프 총대주교가 시작한 교회 예배서 개정 작업을 이어받았으나,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기에는 소극적이었다.

니콘은 보다 대담한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외국의 학식 있는 그리스 고위 성직자들과 교류하며 조언을 구했고, 그 결과 당시 모스크바에서 사용되던 예배서와 성상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초기 형태에서 벗어나 서유럽 바로크 양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2] 니콘은 이러한 새로운 서구식 성상을 이단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는 병사들을 동원해 집집마다 수색하여 서구식 성상을 찾아내 눈을 파내고 거리를 돌며 조롱하게 했으며, 이러한 성상을 제작하거나 사용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1654년, 니콘은 시노드(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예배서 개정을 논의하게 했다. 회의 결과 다수는 "우리의 옛 전통보다는 그리스의 것을 따라야 한다"고 결정했다. 1656년에 열린 두 번째 공의회에서는 예배서 개정을 최종 승인하고, 이에 반대하는 소수의 성직자들, 특히 콜롬나의 주교 바울 등을 파문했다. 이러한 개혁은 1654년 러시아 전역에 퍼진 대규모 전염병과 시기적으로 맞물렸다.

니콘의 개혁은 예배 방식뿐만 아니라 교회 건축에도 영향을 미쳤다. 성 바실리 대성당과 같은 전통적인 텐트형 교회의 건설이 엄격히 금지되었고, 기존의 많은 교회들이 철거된 후 "고대 비잔틴 양식"을 따른 새로운 건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급진적이고 강압적인 개혁 방식은 전통을 중시하던 많은 성직자와 신자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니콘을 지지했던 경건파 성직자들 중 상당수조차 예배 개혁을 단순한 의례 수정이 아닌 러시아 정교회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로 받아들였고, 니콘을 라틴파의 앞잡이이자 이단자로 여기기 시작했다. 신앙생활에서 예배가 전부였던 이들에게 의례의 변경은 신앙 자체의 변화를 강요하는 것과 같았다.

반대파에 대해 니콘은 교회법 위반자로 몰아 파문, 수도원 감금, 유배 등의 강권적인 처벌을 가했다. 대표적인 반대파 지도자였던 아바쿰은 시베리아토볼스크로 유배되었다. 니콘의 개혁을 거부하고 전통적인 예배 방식을 고수하려 한 이들은 구교도(스타로오브랴치) 또는 분리파(라스콜니키)로 불리게 되었다.

1667년, 안티오키아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까지 초청된 대규모 교회 회의(모스크바 대 시노드)에서 니콘의 개혁은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승인되었으며, 이를 따르지 않는 모든 이들에 대한 파문이 선언되었다. 이로써 러시아 정교회 내의 분열은 공식화되었고, 이후 구교도에 대한 국가적 탄압이 계속되었다.

6. 2. 국가와 교회의 관계 재정립



1652년부터 1658년까지 니콘은 차르 알렉세이와 단순한 주종 관계를 넘어선 동료에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그는 공문서와 사적인 편지에서 차르와 마찬가지로 주권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 특히 1654년부터 1667년까지 이어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 기간 동안 차르가 군대를 이끌고 모스크바를 비웠을 때 이러한 관계는 더욱 두드러졌다. 1654년, 차르는 대규모 군사 작전을 시작하며 니콘에게 국가 통치를 맡겼다.[3] 이러한 니콘의 막강한 권한은 기존의 고위 보야르(귀족)들 사이에서 상당한 불만을 야기했다.

니콘은 교회를 세속 권력으로부터 독립시키고, 교회와 국가가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며 영구적으로 분리되어 조화롭게 협력하는 관계를 정립하는 것을 자신의 중요한 사명으로 여겼다. 그는 "권위에는 두 개의 칼, 즉 정신적인 것(교회)과 세속적인 것(국가)이 있다"고 주장하며, "최고의 주교(총대주교)는 차르보다 높다"고 선언하여 교회의 우위를 강조했다.[4] 또한 그는 교회를 국가 조직과 유사하게 총대주교가 완벽하게 통제하는 위계적인 구조로 개편하고자 했다. 개인적으로 니콘과 알렉세이는 차르가 니콘을 자신의 모든 자녀의 대부로 삼으면서 돈독한 유대를 공식화하기도 했다.[5]

니콘은 특히 1649년에 제정된 소보르노예 우로제니예(러시아 법전)에 강하게 반대했다. 이 법전은 성직자의 사회적 지위를 격하시키고 교회를 사실상 국가에 종속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법에 따라 수도원이 소유한 토지에 대한 과세가 국가 재정으로 귀속되도록 규정되었다.[6] 니콘은 이를 교회의 권위를 침해하는 부당한 조치로 여겼다.

그러나 교회의 독립과 권위 강화를 위한 니콘의 이러한 적극적인 행동은 그에게 수많은 정적을 만들었다. 결국 1658년 여름, 반대 세력들은 차르 알렉세이에게 총대주교 니콘의 권력이 차르의 권위를 넘어서고 있다고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한때 니콘을 "가장 친한 친구"라고 불렀던 알렉세이는 갑작스럽게 그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7]

6. 3. 문화적 변화와 서구화 논쟁

니콘이 총대주교로 임명될 당시, 러시아 정교회 내에는 이미 개혁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원로 사제'로 알려진 일부 교회 고위 성직자들은 전임 요아사프 총대주교가 시작한 교회 예배서 개정 작업을 이어받았지만, 실제적인 변화를 이끌기에는 소극적이었다.

니콘은 보다 과감한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외국의 저명한 그리스 고위 성직자들과 교류하며 조언을 구했고, 이들을 모스크바로 초청하여 협의했다. 이 과정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키예프의 학자들은 당시 모스크바에서 사용되던 예배서가 그리스 정교회의 기준에서 벗어났으며, 널리 쓰이던 성상 역시 고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양식과는 거리가 멀고 서유럽(프랑코니아와 폴란드)의 바로크 양식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점을 니콘에게 확신시켰다.[2]

니콘은 이러한 새로운 양식의 성상을 '이단적인 가짜 성상'으로 규정하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가가호호 수색하여 해당 성상들을 찾아내도록 명령했으며, 그의 병사들은 성상의 눈을 파낸 뒤 조롱하며 거리를 행진하게 했다. 또한 앞으로 이러한 성상을 제작하거나 사용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후대의 연구에 따르면, 모스크바 예배서는 니콘 시대에 그리스인들이 사용하던 것과는 다른 판본에 속했으며, 개정되지 않은 모스크바 서적은 실제로 그리스 서적보다 더 오래되고 존경받을 만했으며, 그리스 서적은 수 세기에 걸쳐 여러 번 개정되어 더 새로운 혁신을 포함했다.

1654년, 니콘은 시노드(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요아사프 총대주교 시기 개정된 예배서를 다시 검토하게 했으며, 시노드의 다수는 "우리 자신의 고대인들보다 그리스인들을 따라야 한다"고 결정했다. 165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두 번째 공의회는 첫 번째 공의회가 제안한 대로 예배서의 개정을 승인하고, 원로 사제당과 콜롬나 주교 바울(Paul of Kolomna)를 포함한 소수의 반대자들을 파문했다. 개혁은 1654년의 대규모 전염병과 일치했다.

텐트형 교회 (예: 성 바실리 대성당)의 건설은 엄격히 금지되었고, 많은 오래된 비정경적인 교회들이 "고대 비잔틴" 양식으로 설계된 새로운 교회를 짓기 위해 철거되었다. 이러한 무자비함은, 니콘과 그의 모든 업적에 대해 구교도들이 지금부터 풀 수 없는 증오를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13년 전쟁(1654-1667년)에도 불구하고, 17세기의 모스크바 궁정 및 귀족들 사이에서는 폴란드를 비롯한 서유럽과 라틴 문화가 유행했다. 차르 알렉세이는 라틴어를 새겨 넣은 폴란드풍의 옥좌를 만들게 했다. 니콘(Никонru)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1652년에는 서 루스의 키예프에서 성가대가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니콘은 그들의 음악에 매우 감동했다. 니콘은 로마 교황의 관과 비슷한 보관을 쓰거나, 자신은 러시아인이지만, 신앙 면에서는 그리스인이라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니콘의 개혁은 러시아 정교회 전례와 문화에 그리스적 요소, 나아가 서구적 요소를 도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는 러시아의 예술, 건축, 음악 등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러시아 사회 내에서 서구화에 대한 오랜 논쟁을 촉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니콘의 개혁은 러시아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으며, 이는 이후 러시아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중요한 논쟁거리로 남게 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Никон (Минов) // Nikon (Minov) http://www.hrono.ru/[...]
[2] 웹사이트 Запрещение патриархом Никоном фряжских икон // The banning by Patriarch Nikon of Western-style icons (in Russian) http://historydoc.ed[...] 2015-07-05
[3] 웹사이트 Никон (Минов) // Nikon (Minov) http://www.hrono.ru/[...]
[4] 서적 The Patriarch and the Tsar I. The Replies of the Humble Nicon, by the Mercy of God Patriarch, against the Questions of the Boyar Simeon Streshneff and the Answers of the Metropolitan of Gaza Paisius Ligarides Trübner
[5] 서적 A History of the Church of Russia John Henry Palmer
[6] 웹사이트 Ограничение привилегий церкви в Соборном Уложении 1649 года // The limiting of Church privileges in the Legal Code of 1649 http://www.jourclub.[...] 2014-04-13
[7] 서적 Russia and the Russians. From Earliest Times to 2001 Penguin Books
[8] 서적 Peter the Great, His Life and World
[9] 문서
[10] 간행물 From Peasant to Patriarch: Account of the Birth, Upbringing, and Life of His Holiness Nikon, Patriarch of Moscow and All Russia Written by His Cleric Ioann Shusherin Lexington Books 2007
[11] 문서 詐欺師や道化師たちは(中略)十数人の群れを成して横行し、ある連中が教会を出たかと思うと、また別の連中が入ってくる。彼らは、教会の中で反抗的になり、騒動をおこし、喧嘩をし、罵り合う。……或る者は狂人を装い、或る者は隠遁者風に黒衣を着こみ、足枷(あしかせ)をはめ、乱髪で歩く。また、或る者は、足に人糞や血を塗りつけて教会を渡り歩く
[12] 문서 16世紀にイヴァン4世が出した『百章令』において、十字の画き方が決められていた。

「右手の親指と下の二本の指をひとつにあわせ、人差し指と中指を立てて広げすこし曲げた状態で十字を切る(画く)こと」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