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티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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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리스티데스는 뤼시마코스의 아들로,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장군이었다. 그는 클레이스테네스를 따르며 귀족파에 속했고, 마라톤 전투에서 장군으로 임명되었으며, 기원전 489-488년에는 집정관을 지냈다. 테미스토클레스와 해군력 강화 정책을 두고 대립했으며, 기원전 485-482년 사이에 도편 추방되었다. 페르시아 전쟁 시기에 소환되어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델로스 동맹의 기금 책정을 담당했다. 그는 공정함으로 칭송받았으나, 말년에는 재산 피해를 입어 국가 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사망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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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티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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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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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기원전 530년경 |
사망 | 기원전 468년경 (약 62세) |
출생지 | 아테네 |
사망지 | 라우리온 또는 렘노스 |
국적 | 고대 아테네 |
군사 정보 | |
복무 기간 | 기원전 490년 - 기원전 479년 |
소속 | 아테네 |
참전 | 페르시아 전쟁 마라톤 전투 살라미스 해전 플라타이아이 전투 |
정치 경력 | |
정당 | 아테네 귀족파 |
직업 | 군인 정치가 |
2. 생애
아리스티데스(Ἀριστείδης|아리스티데스grc)는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장군으로, "정의로운 자"(Δίκαιοςgrc)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뤼시마코스의 아들로 태어나[2] 클레이스테네스를 지지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스트라테고스(장군)로서 활약하여 명성을 얻었고, 이 공로로 다음 해 최고 행정관인 아르콘으로 선출되었다.[2] 그는 아테네가 전통적인 육상 강국으로 남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해군력 증강을 꾀한 테미스토클레스와 정치적으로 대립했다.[3]
이 대립은 결국 기원전 485년에서 482년 사이 아리스티데스가 도편 추방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추방 투표 당시, 글을 모르는 시민이 아리스티데스에게 그의 이름을 써 달라고 부탁하며 "어디서나 그를 '정의로운 자'라고 부르는 것이 짜증 난다"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3][16][6][17]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하자 망명에서 소환되어 다시 스트라테고스로 활동했다.[3] 그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테미스토클레스를 도와 승리에 기여했으며,[3][18]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는 아테네 군대를 성공적으로 지휘했다.[7]
전쟁 후, 그는 이오니아 도시들의 신뢰를 얻어 스파르타의 제독 파우사니아스를 대신하여 새로 창설된 델로스 동맹의 재정 기틀을 마련하는 중책을 맡았다. 그가 정한 동맹 기금 분담액은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오랫동안 동맹 운영의 기초가 되었다.[3]
말년에는 테미스토클레스와 관계를 일부 회복하여 아테네 성벽 재건을 돕기도 했다고 전해진다.[3][19] 그는 페리클레스가 정치적으로 부상하기 전인 기원전 468년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3][20] '정의로운 자'라는 별명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침략으로 재산을 잃어 가난하게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국가로부터 연금을 지원받았다고 한다.[3][20]
2. 1. 초기 생애와 정치 입문
아리스티데스는 뤼시마코스의 아들로, 아테네의 중산층 가문 출신이었다.[2] 그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정치가 클레이스테네스의 추종자였으며, 아테네 정계에서 귀족파에 속했다는 사실 외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2] 그는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자신의 부족인 안티오키스 부족을 지휘하는 스트라테고스로 처음 군사적 두각을 나타냈다. 이때 보여준 뛰어난 역량 덕분에 다음 해(기원전 489년~488년)에 최고 행정관인 아르콘으로 선출되었다.[2] 그는 아테네가 전통적인 육상 강국의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정책을 추구했으며, 테미스토클레스가 제안한 해군 정책에 주요 반대자 중 한 명이었다.[3]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아리스티데스와 테미스토클레스의 대립은 젊은 시절 케오스의 스테실라우스라는 미소년의 애정을 다투었던 것이 발단이었다고 한다.[4][5][15]
2. 2. 테미스토클레스와의 갈등과 도편 추방
아리스티데스는 아테네가 강력한 육군을 바탕으로 한 육상 강국으로 남아야 한다는 보수적인 정책을 추구했다.[3][14] 이는 해군력 강화를 주장했던 테미스토클레스의 정책과 정면으로 부딪혔고,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주요 반대자 중 한 명으로서 대립했다.[3]플루타르코스는 철학자 케오스의 아리스톤의 말을 인용하며, 두 사람의 경쟁이 젊은 시절 케오스 출신의 아름다운 소년 스테실라우스를 둘러싼 애정 다툼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들은 스테실라우스의 애정을 얻기 위해 "과도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경쟁했다고 한다.[4][5][15]
이 정치적, 개인적 갈등은 결국 기원전 485년에서 482년 사이에 아리스티데스가 도편 추방을 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3] 도편 추방 투표 당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글을 모르는 한 시민이 아리스티데스에게 다가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채, 자신의 도편(도자기 파편)에 '아리스티데스'라는 이름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아리스티데스가 시민에게 "아리스티데스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소?"라고 묻자, 시민은 "아니오. 그를 알지도 못하오. 다만 어디서나 사람들이 그를 '정의로운 자'라고 부르는 것을 듣는 게 짜증 나서 그렇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3][16] 이 말을 들은 아리스티데스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이름을 도편에 적어주었다고 한다.[6][17]

2. 3. 페르시아 전쟁에서의 활약
기원전 480년 초, 페르시아의 침공에 맞서 아테네를 방어하기 위해 망명자들을 소환하는 법령이 내려지면서 아리스티데스는 망명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기원전 480년에서 479년까지 스트라테고스(장군)로 선출되었다.[3][18]기원전 480년 9월에 벌어진 살라미스 해전에서 아리스티데스는 테미스토클레스를 충실히 지원했다. 그는 아테네 보병을 이끌고 프쉬탈레이아 섬에 상륙하여 그곳에 주둔하던 페르시아 수비대를 격파함으로써 아테네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3][18]

이듬해인 기원전 479년, 아리스티데스는 다시 스트라테고스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8월에 열린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는 아테네 군대를 지휘하는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전투에 임하기 전, 그는 군대 내 일부 과두정파 불만 세력이 꾸미던 음모를 성공적으로 진압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7] 플라타이아이에서의 승리 이후, 그는 이오니아 동맹 도시들의 깊은 신뢰를 얻게 되었다. 이오니아 도시들은 스파르타의 제독 파우사니아스에게 반기를 든 후, 아리스티데스에게 최고 사령관직을 맡겼다. 또한 새롭게 결성된 델로스 동맹(기원전 478년)의 각 회원국이 부담할 기금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권한을 그에게 위임했다. 그가 책정한 분담금 액수는 매우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이후 델로스 동맹이 유지되는 동안 과세의 기본 기준으로 사용되었다.[3][19]
2. 4. 델로스 동맹 창설과 기금 책정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이 전투 이후, 아리스티데스는 이오니아 동맹국들의 두터운 신뢰를 얻었다. 당시 스파르타의 제독 파우사니아스의 오만한 행동에 반감을 느낀 이오니아인들은 스파르타의 지휘를 거부하고 아리스티데스를 새로운 연합체의 최고 사령관으로 추대했다.[7] 이는 기원전 478년,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해상 동맹인 델로스 동맹의 창설로 이어졌다. 아리스티데스는 새로 결성된 동맹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각 회원국이 부담해야 할 기금(분담금)의 액수를 결정하는 중책을 맡았다. 그에게는 이 기금 분담 비율을 정하는 데 있어 절대적인 권한이 주어졌다. 아리스티데스가 책정한 분담금 액수는 동맹국들 사이에서 매우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이 기준은 이후 델로스 동맹이 유지되는 동안 오랫동안 과세의 기초로 활용되었다.[3]2. 5. 말년과 죽음
아리스티데스는 아테네에서 계속 중요한 지위를 유지했다. 처음에는 테미스토클레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며, 스파르타를 속이고 아테네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테미스토클레스를 도왔다고 전해진다.[3][19]그의 사망 장소에 대해서는 아테네에서 죽었다는 기록과 흑해로 여행하던 중 사망했다는 기록이 엇갈린다.[3][20] 네포스는 아리스티데스가 기원전 468년에 사망했다고 기록했다.[3][20] 아리스티데스는 생전에 테미스토클레스가 도편 추방되는 것을 보았으며, 테미스토클레스에게 항상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페리클레스가 정치적으로 부상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3][20]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인해 그의 재산은 큰 피해를 입어, 사망 후 장례를 치를 비용조차 부족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그의 후손들은 기원전 4세기까지도 국가로부터 연금을 받았다고 한다.[3][20]
3. 평가 및 유산
아리스티데스는 그의 공정함과 정의로움으로 인해 후대에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아리스티데스의 생애를 기록했으며, 후대의 저술가 플루타르코스는 로마 제국 시대에 저술한 ''영웅전''에서 그의 전기를 다루었다.[21] 철학자 플라톤 역시 그의 대화편 ''고르기아스''와 ''메논''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아리스티데스를 훌륭한 지도자의 모범적인 사례로 언급하며 칭찬했다.[8][9][22] 다만 플라톤은 다른 대화편 ''테아이테토스''에서는 그의 손자를 언급하며 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10][23]
3. 1. 긍정적 평가
아리스티데스는 공정함과 정의로움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정의로운 자'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이러한 명성을 보여주는 일화로 도편추방 당시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글을 모르는 한 시민이 아리스티데스에게 다가와 도편에 '아리스티데스'라는 이름을 써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 시민은 아리스티데스를 알아보지 못했으며 단지 사람들이 그를 '정의로운 자'라고 부르는 것이 듣기 싫다는 이유를 댔다고 한다.[3] 아리스티데스는 묵묵히 자신의 이름을 적어주었다.[6]
그의 공정함은 델로스 동맹 결성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원전 478년, 동맹 창설과 함께 각 회원국이 부담할 기여금을 결정하는 어려운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아리스티데스가 산정한 금액은 모든 동맹국에게 공정하다고 널리 인정받았다. 이 평가 기준은 이후 동맹 기간 동안 과세의 기초로 계속 사용되었다.[3][7]
후대의 여러 저술가들도 아리스티데스를 높이 평가했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그의 생애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3] 플루타르코스는 로마 제국 시대에 저술한 ''영웅전''에서 아리스티데스의 전기를 다루었다. 철학자 플라톤 역시 그의 대화편 ''고르기아스''와 ''메논''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아리스티데스를 훌륭한 지도자의 모범적인 사례로 언급하며 칭찬했다.[8][9][21][22]
3. 2. 부정적 평가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아리스티데스의 손자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는 긍정적인 평가는 아니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를 너무 일찍 스승 곁을 떠나 나중에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는 학생의 예시로 들었다.[23]3. 3. 현대의 기념물
아리스티데스의 조각상이 미국 도시 보스턴의 루이스버그 스퀘어에 있다. Charles Brocas|샤를 브로카프랑스어가 1806년에 그린 아리스티데스 그림은 프랑스 도시 툴루즈의 오귀스탱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참조
[1]
서적
Histories
[2]
논문
Aristeides der ‚Gerechte‘ – sein Archontat und seine Rolle bei Marathon
Berlin/Boston
2015
[3]
EB1911
Aristides the Just
[4]
웹사이트
Themistocles, 3
https://www.perseus.[...]
[5]
웹사이트
Aristides, 2
https://www.perseus.[...]
[6]
서적
Life of Aristeides
[7]
서적
Accustomed to Obedience?: Classical Ionia and the Aegean World, 480–294 BCE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023-05-15
[8]
서적
Gorgias
[9]
서적
Meno
[10]
서적
Theaetetus
[11]
서적
ギリシア哲学者列伝
[12]
코토뱅크
アリステイデス
[13]
서적
Histories
[14]
EB1911
Aristides the Just
[15]
서적
Parallel Lives, Aristides
[16]
EB1911
Aristides the Just
[17]
서적
Life of Aristeides
[18]
EB1911
Aristides the Just
[19]
EB1911
Aristides the Just
[20]
EB1911
Aristides the Just
[21]
서적
Gorgias
[22]
서적
Meno
[23]
서적
Theaete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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