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고지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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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03고지 학살은 1950년 8월 17일 한국 전쟁 중 북한군이 미군 포로 41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북한군의 공세로 미군이 303고지에서 포로로 잡히면서 발생했으며, 미군의 반격 과정에서 북한군은 포로들을 사살했다. 이 사건은 미군 측의 전쟁범죄 조사와 북한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303고지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매년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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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고지 학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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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위치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303고지 |
목표 | 미국 육군 전쟁 포로 |
날짜 | 1950년 8월 17일 |
시간 | 14시 00분 |
시간대 | KST |
유형 | 집단 처형 |
사망자 | 42명 |
부상자 | 4 ~ 5명 |
가해자 | 조선인민군 병사 |
동기 | 불명 |
관련 전투 | |
전투 | 낙동강 방어선 전투 |
지명 정보 | |
영어 명칭 | Hill 303 massacre |
한국어 명칭 | 303 고지 학살 사건 |
한자 명칭 | 三百三高地虐殺 |
로마자 표기 | 303 Goji Haksal |
일본어 명칭 | 303高地の虐殺 (303 kōchi no gyakusatsu) |
배경 | |
관련 전투 | 부산 교두보 전투 |
관련 전투 목록 | 마산 전투 피의 계곡 학살 전투산 전투 제1차 낙동강 돌출부 전투 포항 전투 대구 전투 볼링장 전투 303 고지 학살 안강-기계 전투 통영 상륙 작전 형산강 방어 전투 다부동 전투 |
추가 정보 | |
관련 정보 | 캠프 캐럴 |
2. 배경
한국 전쟁 초기,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국군과 UN군은 낙동강까지 후퇴하여 방어선을 구축했다. 특히 부산 교두보의 중심이자 미국 제8군 사령부가 위치한 대구는 반드시 지켜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다.
1950년 8월, 북한군은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 낙동강 전선에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대구 북방의 왜관 지역은 낙동강 도하를 시도하는 북한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UN군 사이의 치열한 격전지가 되었다.
왜관 북쪽에 위치한 303고지(자고산)는 해발 303m의 비교적 낮은 고지였지만, 왜관 읍내와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주요 도로 및 경부선 철교, 그리고 주변 지역을 한눈에 감제할 수 있는 핵심적인 군사 요충지였다.[17] 이 고지를 장악하는 것은 왜관 방어와 대구로 향하는 북한군의 진격을 막는 데 매우 중요했다.[17] 북한군 제13사단과 제1사단 등이 이 지역으로 공격해 오면서 303고지를 둘러싼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2. 1. 한국 전쟁 발발과 초기 전황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대한민국을 침공하여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국제 연합(UN)은 대한민국을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UN 회원국인 미국은 북한의 침략을 저지하고 대한민국의 붕괴를 막기 위해 지상군 파병을 결정했다.[1]한국에 처음 파병된 미군 부대는 제24보병사단이었다. 이 부대는 북한군의 초기 공세를 막아내며 다른 UN군 증원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임무를 맡았다.[2] 제24사단은 제1기병사단, 제7보병사단, 제25보병사단 및 미 제8군 지원 부대들이 한반도에 도착하기 전까지 몇 주 동안 고립된 상태로 북한군과 싸워야 했다.[2] 제24사단의 선발대였던 스미스 특무부대는 1950년 7월 5일 오산 전투에서 북한군과 처음 교전했으나 큰 피해를 입었다.[3] 이후 한 달 동안 제24사단은 수적으로나 장비 면에서 우세한 북한군에 밀려 계속 남쪽으로 후퇴했다.[4][5] 제24사단의 각 연대들은 조치원, 천안, 평택 등에서 교전하며 남하했다.[4] 대전 전투에서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지만, 7월 20일까지 북한군의 진격을 성공적으로 지연시켰다.[6] 이 무렵 제8군의 전투 병력은 한반도에 증원된 UN군 부대들과 합류하며 북한군과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증가했다.[7]
대전이 함락되자 북한군은 부산 교두보를 완전히 포위하기 위해 공세를 이어갔다. 북한군은 기갑 전력과 수적 우세를 앞세워 UN군을 계속 남쪽으로 밀어붙였다.[8]

한편, 미 제8군 사령관 월튼 워커 대장은 대구에 제8군 사령부를 설치했다. 부산 교두보의 중심에 위치한 대구는 낙동강 계곡의 입구이자 주요 교통 중심지였으며, 부산을 제외하면 UN군이 통제하는 유일한 주요 도시였다. 대구는 서쪽과 남쪽의 낙동강, 북쪽의 팔공산이라는 자연 지형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다. 대구 방어는 남쪽에서부터 미 제1기병사단, 대한민국 제2군단 소속의 제1사단과 제6사단이 맡았다. 호바트 R. 게이 소장이 지휘하는 제1기병사단은 낙동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했다. 제5기병연대와 제8기병연대가 강을 따라 약 24km에 걸쳐 전방에 배치되었고, 제7기병연대는 포병 부대와 함께 예비대로 후방에 위치하여 북한군의 도하 시도에 즉시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북한군은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 5개 사단을 집결시켰다. 남쪽에서부터 제10사단, 제3사단, 제15사단, 제13사단, 그리고 제1사단이 포진했다. 북한군은 상주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낙동강 계곡을 주 공격로로 삼아 남하할 계획을 세웠으며, 제105기갑사단의 일부 병력도 공격을 지원했다.
8월 5일부터 북한군 5개 사단은 대구를 점령하고 UN군의 최후 방어선을 무너뜨리기 위해 낙동강 여러 지점에서 도하를 시도했다. 미군은 북한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으나, 대한민국 국군이 담당한 지역에서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양측에서 자행된 전쟁 범죄에 대한 보고와 소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 2. 303고지의 전략적 중요성
미군에 의해 303고지로 불린 자고산은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북쪽에 위치한 해발 303m 높이의 야산이다.[17] 이 고지는 북동-남서 방향으로 약 3.2km 길이의 길쭉한 타원형 모양을 하고 있으며, 남쪽 비탈면은 왜관 읍내 가장자리까지 이어진다. 서쪽 비탈면은 낙동강 동쪽 강변과 맞닿아 있다.[17]303고지 정상에서는 왜관 읍내 전체와 주변의 도로망, 경부선 철도,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교량들, 그리고 남북으로 길게 뻗은 낙동강 계곡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17] 왜관은 낙동강을 따라 남북으로 도로가 이어지고, 북동쪽으로는 다부동을 거쳐 대구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이기도 했다.[17]
이러한 지리적 이점 때문에 303고지는 왜관 읍내 자체는 물론, 낙동강을 건너는 주요 교통로인 경부선 철도와 도로 교량들을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17] 따라서 303고지를 확보하는 것은 북한군의 대구 방면 진격을 저지하고 왜관 지역을 방어하는 데 매우 중요했다.
2. 3. 부산 교두보 전투와 대구 전투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대한민국 침공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UN은 한국을 지원하며 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UN 회원국인 미국은 북한의 침략을 격퇴하고 한국의 붕괴를 막기 위해 지상군을 한반도에 파견했다.[1]
한국에 가장 먼저 파견된 미군 부대는 제24보병사단이었다. 이 부대는 압도적인 북한군의 초기 공세를 막아내고, 후속 부대가 도착할 시간을 벌기 위한 지연 작전을 수행하라는 임무를 받았다.[2] 제24사단은 수 주 동안 고립된 상태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며, 제1기병사단, 제7사단, 제25사단 등 미 제8군의 증원 부대가 전개할 시간을 확보해야 했다.[2] 제24사단의 선발대인 스미스 특임대는 7월 5일 오산 전투에서 북한군과 처음 교전했으나 큰 피해를 입었다.[3] 이후 한 달간 제24사단은 병력과 장비에서 우세한 북한군에게 계속 밀리며 남쪽으로 후퇴했다.[4][5] 사단 예하 연대들은 조치원 전투, 천안 전투, 평택 전투 등에서 계속 후퇴하며 방어선을 구축했다.[4] 제24사단은 대전 전투에서의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지만 거의 전멸 상태에 이르렀고, 7월 20일까지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데 성공했다.[6] 이 무렵 제8군의 전투 병력은 북한군과 거의 대등한 수준에 이르렀고, 매일 새로운 UN 부대가 도착하여 전력을 보강하고 있었다.[7]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은 부산 교두보를 완전히 포위하려 했다. 북한군은 우세한 전차와 병력을 앞세워 UN군 진지를 계속 돌파하며 남쪽으로 밀어붙였다.[8]
한편, 미국 제8군 사령관 월튼 워커 대장은 대구에 제8군 사령부를 설치했다. 부산 교두보의 중심에 위치한 대구는 낙동강 계곡의 입구에 자리 잡아 다수의 북한군 부대가 협력하며 진격하기 좋은 경로였다. 또한, 대구는 부산을 제외하고 UN군 통제 하에 있던 마지막 주요 도시이자 주요 교통 및 물류 중심지였다. 대구는 서남쪽의 낙동강과 북쪽의 팔공산이라는 자연 장벽으로 보호받고 있었다.[9] 대구 방어는 남쪽에서 북쪽 순서로 미 제1기병사단, 대한민국 제2군단 예하 제1사단과 제6사단이 맡았다. 호바트 R. 게이 소장이 지휘하는 제1기병사단은 낙동강 남쪽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했다. 제5기병연대와 제8기병연대가 강을 따라 24km에 달하는 전선을 방어했고, 제7기병연대는 포병 부대와 함께 예비대로 후방에 배치되어 북한군의 도하 시도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즉시 지원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10]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 북한군은 5개 사단을 집결시켰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제10사단[11], 제3사단, 제15사단, 제13사단[12], 그리고 제1사단이 포항 덕성동에서 왜관을 거쳐 구미까지 전선을 형성했다. 북한군은 상주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자연 통로인 낙동강 계곡을 주 공격 축으로 삼아 남쪽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14] 제105기갑사단의 일부 병력도 공격을 지원했다.[10]
8월 5일부터 이들 북한군 5개 사단은 대구를 함락시키고 UN군의 마지막 방어선을 무너뜨리기 위해 낙동강 곳곳에서 수많은 도하 공격을 시도했다. 미군은 훈련과 장비의 우위를 바탕으로 북한군의 진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으나, 한국군 담당 구역에서는 어려움을 겪었다.[15] 이 시기 동안 양측에서 자행된 전쟁 범죄에 대한 단편적인 보고와 소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16]
3. 학살
303고지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의 정확한 내용은 상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주로 사건에서 살아남은 미군 병사 네 명의 증언에 의존하고 있다. 이 생존자들은 이후 포로로 잡힌 북한군 병사 세 명을 학살에 가담한 인물로 지목했으나, 지목된 북한군 병사들 역시 사건 경위에 대해 서로 다른 진술을 하여 사건의 구체적인 전개 과정은 여전히 불분명한 부분이 있다.
3. 1. 북한군의 진격과 미군 포로 발생
미국 제1기병사단 예하 부대 중 가장 북쪽에 배치된 것은 제5기병연대 G중대였다. G중대는 제8군 우익 최전방인 303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19] G중대의 북쪽에는 대한민국 육군 제1사단이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20]
며칠 동안 유엔군 정보 당국은 한국군 제1사단 맞은편 낙동강 건너편에 대규모의 북한군 병력이 집결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1950년 8월 14일 새벽, 북한군 1개 연대가 수중교를 이용해 왜관 북쪽 9.7km 지점에서 낙동강을 건너 한국군 제1사단 구역으로 진입했다. 자정 직후, 미군과 한국군의 경계선 바로 북쪽 고지에 있던 한국군 부대가 이 북한군 부대의 공격을 받았다. 날이 밝자 미 공군은 수중교를 폭격하여 일부 파괴했다. 북한군은 남쪽으로 계속 공격을 이어갔고, 정오 무렵에는 303고지의 제5기병연대 G중대에도 북한군의 소화기 사격이 시작되었다. 이전의 다른 도하 부대들이 동쪽 산악 지대로 향했던 것과 달리, 이 부대는 남쪽의 왜관을 목표로 삼았다.[22]
8월 15일 새벽 3시 30분,[19] 303고지의 G중대원들은 T-34 전차 2대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 보병 50여 명이 고지 아래 강변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목격했다. 또한 이들 뒤에 다른 북한군 부대가 뒤따르는 것을 확인했는데, 이 후속 부대는 즉시 F중대와 교전을 시작했다. 포위될 위험에 처하자 F중대는 남쪽으로 후퇴했으나, G중대는 303고지에 남았다. 오전 8시 30분경, 북한군은 303고지의 G중대와 이를 지원하던 H중대 박격포 소대를 완전히 포위했다. 이로써 303고지의 미군 병력은 다른 미군 부대와 완전히 고립되었다. 제5기병연대 B중대와 전차 소대로 구성된 구원 부대가 G중대와 접촉을 시도했으나, 303고지를 에워싼 북한군의 포위망을 돌파하지 못했다.[20]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8월 15일 새벽이 되기 전 H중대 박격포 소대원들은 303고지 부근에서 적의 움직임을 감지했다.[19][24] 소대장은 G중대에 연락하여 한국군 1개 소대 병력 60명이 지원을 위해 오고 있다는 정보를 전달받았다.[19] 그러나 아침이 되자 소대원들이 목격한 것은 T-34 전차 2대와 200명이 넘는 북한군 병력이었다. 잠시 후, 일단의 한국인들이 고지 경사면으로 접근해 왔다.[24] 미군 초병이 이들을 불렀으나, 돌아온 것은 자동소총 사격이었다.[19] 당시 박격포 소대장이었던 잭 허드스페스(Jack Hudspeth) 중위는 이들을 아군으로 오인했다.[23] 일부 미군 병사들은 접근하는 병력이 북한군임을 알아채고 사격 준비를 했으나, 허드스페스 중위는 아군 오사를 우려하여 발포를 금지하고 군사재판 회부까지 언급하며 위협했다. 나머지 미군들은 접근하는 병력이 충분히 가까워져 군모의 붉은 별을 식별할 수 있을 때까지 적군인지 아군인지 확신하지 못했다.[24] 이때 북한군은 이미 미군 진지에 바짝 다가선 상태였다.[41] 북한군은 총격전 없이 미군 참호까지 도달했다.[24] 허드스페스 중위는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 차이로 인해 저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항복을 명령했다.[23] 북한군은 소대원 전원을 포로로 잡았는데, 그 수는 31명[24][25][26]에서 42명[29] 사이로 추정된다.
이들을 사로잡은 부대는 북한군 제105기갑사단 제206기계화보병연대 제2대대 제4중대였다. 북한군은 미군 포로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귀중품을 약탈한 뒤 고지 아래로 끌고 갔다.[19][24] 인근 과수원에서 북한군은 포로들의 손을 뒤로 묶고, 일부의 옷과 신발을 빼앗았다.[23][26] 북한군은 포로들에게 얌전히 있으면 서울의 포로수용소로 보내질 것이라고 말했다.[24]
3. 2. 포로 수감 및 학살 정황
미군 포로들을 사로잡은 부대는 북한군 제105기갑사단 제206기계화보병연대 제2대대 제4중대였다.[19][24] 북한군은 미군 포로들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귀중품을 약탈한 뒤[19][24] 그들을 고지 아래로 이동시켰다. 한 과수원에 이르자 북한군은 포로들의 손을 뒤로 묶었고, 일부의 옷과 신발을 빼앗았다.[23][26] 북한군은 미군 병사들이 얌전히 따르면 서울의 포로수용소로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24]처음 포로를 잡은 부대가 이후 이틀 동안 계속 포로들을 감시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포로로 잡힌 뒤 이들을 감시한 것은 북한군 제3사단 병력이었다는 일부 증거가 존재한다. 포로가 된 첫날 밤, 북한군은 미군 포로들에게 물, 과일, 담배를 주었다.[28] 생존자들은 이것이 포로로 잡힌 3일 동안 북한군에게 받은 유일한 음식과 물이었다고 주장한다.[27] 미군 포로들은 마실 물을 더 구하기 위해 모래를 파기도 했다.[41] 북한군은 밤을 틈타 포로들을 낙동강 건너편 후방으로 이동시키려 했으나, 미군의 포격으로 인해 안전한 이동이 불가능했다. 밤중에 미군 포로 두 명이 포박을 풀면서 잠시 소동이 일었다. 북한군 병사들은 미군 포로들을 쏘겠다고 위협했으나, 한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군 장교가 오히려 위협하던 자신의 병사 중 한 명을 쏘았다고 한다.[28] 포로로 잡힌 미군 장교 2명, 박격포 소대장 잭 허드스페스(Jack Hudspeth) 중위와 전방 포병 관측 장교 세실 뉴먼(Cecil Newman) 중위는 프레드 라이언(Fred Ryan) 이병의 증언에 따르면 탈출 계획을 논의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허드스페스 중위와 뉴먼 중위는 그날 밤 탈출했으나 다시 붙잡혀 처형되었다. 북한군은 미군 포로들을 낮에는 숨기고 밤에 이동시키려 했지만, 미군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었다.[41][25]
다음 날인 8월 16일, 포로들은 경비병들과 함께 이동했다. 박격포 소대원 중 한 명인 로이 L. 데이 주니어(Roy L. Day, Jr.) 상병은 일본어를 할 수 있었기에 일부 북한군 병사와 대화할 수 있었다. 그날 오후 데이 상병은 미군 병력이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포로들을 살해하라는 북한군 중위의 명령을 엿들었다.[19][41][28] 그날 늦게 미군이 303고지 탈환을 위해 공격을 시작했고, 제61야전포병대대와 제82야전포병대대가 낮 동안 고지를 포격했다. 그날 밤, 미 제5기병연대 G중대는 303고지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20] 한편, 경비병들이 포로 중 다섯 명을 데리고 갔는데, 나머지 포로들은 그들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28]
8월 17일 새벽, 미군이 제70전차대대 A중대(M26 퍼싱 장비)의 지원을 받아 303고지를 다시 공격했지만, 북한군의 격렬한 박격포 반격으로 저지되었다.[22] 아침 내내 북한군 경비병들은 포로를 구출하려는 미군과 교전했다. 정오(12:00)경, 북한군은 미군 포로들을 고지 위의 계곡(가리 (지형))에 배치하고, 50여 명의 경비병을 남겨두었다.[23][28] 그날 동안 몇 명의 미군 포로가 더 추가되어 고지 위의 포로 수는 45명이 되었다.[22] 그러나 한 생존자는 총 포로 수가 67명이었으며, 나머지 인원은 8월 15일 또는 16일에 처형된 것으로 추정했다.[29]
3. 3. 처형
8월 17일 새벽, 제5기병연대 제1대대와 제2대대 병력이 제70전차대대 A중대의 지원을 받아 303고지를 공격했으나, 북한군의 거센 박격포 공격으로 왜관 외곽으로 후퇴했다. 아침 내내 미군 포병은 고지 위의 북한군 진지를 맹렬하게 폭격했다.8월 17일 오전 동안, 포로를 지키던 북한군 위병들은 포로 구출을 시도하는 미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12시경, 북한군은 미군 포로들을 고지 위의 계곡(걸리)으로 이동시켰고, 약 50명의 위병이 배치되었다. 그날 낮 동안 몇 명의 미군 포로가 더 잡혀오면서 고지 위의 포로 수는 45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한 생존자는 포로의 총 수가 67명이었으며, 나머지 22명은 8월 15일 또는 16일에 먼저 처형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오후 2시(14:00), 유엔군의 공습이 시작되어 고지에 네이팜탄, 폭탄, 로켓, 기총소사가 쏟아졌다. 이 시점에서 북한군 장교 한 명은 미군이 접근하고 있어 더 이상 포로들을 데리고 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장교는 부하들에게 포로 사살을 명령했고, 북한군은 계곡 안에 무릎을 꿇고 모여 있던 미군 포로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학살 가담자의 수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린다. 나중에 포로로 잡힌 북한군 병사 한 명은 위병 50명 전원 또는 대부분이 학살에 가담했다고 증언했지만, 미군 생존자들은 부사관의 지휘 아래 14명의 위병이 샤파긴 기관단총으로 사격했다고 증언했다. 북한군 병력 일부는 학살 현장을 떠나기 전 다시 돌아와 첫 총격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확인 사살했다.
이 학살에서 4명 또는 5명만이 다른 전우들의 시신 아래에 숨어 목숨을 건졌다. 최종적으로 미군 포로 41명이 이 계곡에서 살해되었다. 희생자 대부분인 26명은 박격포 소대 소속이었지만, 다른 곳에서 포로가 된 병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군의 공습과 포격으로 북한군은 결국 고지를 포기하고 물러갔다. 공습이 끝난 오후 3시 30분(15:30), 미군 보병들이 고지를 공격하여 큰 저항 없이 오후 4시 30분(16:30)에 확보했다. 고지에 도달한 E중대와 F중대 병력은 약 60명이었다. 포격과 공습으로 303고지 위의 북한군 약 500명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고, 생존자들은 혼란 속에서 흩어져 도주했다. 학살 생존자 중 두 명은 고지를 내려오다가 아군에게 신원 확인 전에 오인 사격을 받았으나 다행히 맞지는 않았다. 제5기병연대는 손이 뒤로 묶인 채 기관총으로 살해된 미군 포로들의 시신을 곧 발견했다.
다음 날인 8월 18일, 미군은 왜관 근처에서 파괴된 제70전차대대 소속 전차 두 대의 승무원 여섯 명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들 역시 303고지에서와 유사하게 포로로 잡힌 뒤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3. 4. 미군의 303고지 탈환과 시신 수습
8월 17일 오후 2시, 유엔군은 네이팜탄, 폭탄, 로켓, 기총소사 등을 동원하여 303고지에 대한 공습을 시작했다.[30] 이 공습과 이어지는 포격으로 북한군은 큰 피해를 입고 고지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303고지 위에서 약 500명의 북한군 병사가 사상했으며, 생존자들은 혼란 속에서 퇴각했다.[22]공습이 끝난 오후 3시 30분, 미군 보병 부대가 고지를 공격하기 시작하여 큰 저항 없이 오후 4시 30분에 고지를 완전히 확보했다.[22] 고지 정상에 도달한 E중대와 F중대 병력은 약 60명 규모였다.[22] 고지를 탈환한 제5기병연대를 비롯한 미군은 포로 상태였던 미군 병사들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들은 손이 등 뒤로 묶인 채 총격, 특히 기관총 등으로 학살된 상태였다.[34][28] 골짜기에서는 총 41명의 미군 포로 시신이 수습되었다.[28]
학살 현장에서는 4명[23][25] 또는 5명[41][29][32]의 미군 병사가 다른 시신들 아래에 숨어 극적으로 생존했다.[23] 이들 중 2명은 고지를 내려오던 중 아군에게 발견되었으나, 신원이 확인되기 전까지 잠시 총격을 받기도 했지만 다행히 부상은 입지 않았다.[23][28]
4. 여파
303고지 학살 사건은 한국 전쟁 중 발생한 비극으로, 이후 관련국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이 사건을 즉각 전쟁범죄로 규정하고 조사에 착수했으며, 유엔군 사령부를 통해 북한 측에 강력히 항의하며 책임자 처벌을 경고했다. 북한 군 지휘부 또한 사건 발생 전후로 포로 처우 개선 지침을 내린 정황이 있으나, 이것이 실제 현장에서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사건의 정확한 진상은 소수 생존자의 증언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관련자들의 증언마저 엇갈리는 부분이 있어 전모를 명확히 밝히는 데는 한계가 따른다. 이 사건은 한국 전쟁 당시 전쟁범죄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다.
4. 1. 미군의 반응과 전쟁범죄 조사
303고지의 사건을 전해들은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미국 육군 원수는 8월 20일 북한 측에 잔학 행위를 비난하는 방송을 송출했다.[28][32] 미공군은 북한군 점령 지역에 북한군 지도부에게 보내는 삐라를 대대적으로 살포했다. 맥아더는 이 방송에서 "중대하고 보편적으로 인식되는 지휘 책임의 포기에 관한 귀하, 또는 귀하의 지휘 하에 있는 상급 현장 지휘관의 부작위는 이러한 만행을 용인하고 장려하는 것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으며, 신속한 시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당국은 전시법과 선례에 따라 귀하 및 귀하의 지휘 하에 있는 지휘관을 범죄 행위에 책임이 있는 자로 체포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본 사건과 그 외 다른 전쟁범죄의 책임이 있는 북한군 군사 지도자들을 처벌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38]303고지 사건은 한국 전쟁 중 미군이 북한군의 잔혹 행위를 비난한 최초의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된다.[34][35] 1953년 말, 조지프 매카시가 위원장을 맡았던 미국 상원 국토안보 및 정부 문제 위원회는 한국 전쟁 동안 발생했다고 주장되는 1,800 건에 달하는 전쟁범죄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303고지 학살은 이 위원회에서 최초로 조사한 사건들 중 하나였다.[36] 사건의 생존자들은 위원회에 나와 증언했으며, 미국 정부는 북한군이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는 폭력을 저질렀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행위를 비난했다.[23][37]
학살 상황에 대해서는 이 사건에서 살아남은 4명의 미군 병사의 증언에 근거한 개요만 파악되어 있다. 또한, 후에 미군에 의해 포로로 잡힌 북한군 병사 중에서, 사건에서 살아남은 미군 병사의 증언에 의해 학살에 참여한 것으로 보이는 3명의 북한군 병사가 특정되었지만, 이 3명에 의한 사건 설명도 각각 모순을 포함하고 있었다.
4. 2. 북한군의 반응
역사가들은 한국 전쟁 초기에 북한군 최고사령부가 포로 총살을 직접 승인했다는 증거는 없다는 데 동의한다.[34] 303고지 학살과 같은 사건들은 통제되지 않은 소규모 부대나 복수심을 품은 개인에 의해 자행되었거나, 포로를 관리하기 어려운 불리하고 절망적인 전장 상황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32][38] 군사 역사학자 T. R. 페렌바크는 이러한 학살 행위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까지 이어진 대일본제국 군대의 억압적인 통치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군 하에서 포로 고문과 처형에 익숙해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39]실제로 북한군 지휘부는 포로 처우에 대한 지침을 내린 바 있다. 1950년 7월 28일, 북한군 제3사단장 리영호 소장은 김책 전선사령관과 최용건 총사령관의 재가를 받아 포로 살해를 "엄격히 금지한다"는 내용의 명령을 하달했다. 그는 각 부대의 정치장교에게 이 규칙을 병사들에게 철저히 주지시키도록 지시했다.[38]
사건 이후 미군이 확보한 북한군 문서들은 북한군 지도부 역시 일부 병사들의 잔학 행위를 인지하고 우려했음을 보여준다. 8월 16일자 북한군 제2사단 정치부가 내린 명령에는 "우리 군의 일부에는 항복해 오는 적병을 아직 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로잡은 포로를 적절히 처우할 것을 병사에게 가르칠 책임은 각 부대의 정치부에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38]
4. 3. 학살의 진상 규명과 역사적 의미
303고지 학살의 구체적인 상황은 사건에서 살아남은 미군 병사 4명의 증언에 근거하여 개요만 파악되어 있다. 이후 미군에 의해 포로로 잡힌 북한군 병사 중에서, 생존 미군 병사의 증언을 통해 학살에 참여한 것으로 보이는 3명의 북한군 병사가 특정되었다. 하지만 이 3명의 설명 또한 각각 모순을 포함하고 있어, 사건의 전모를 명확히 밝히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이러한 증언의 불일치는 한국 전쟁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전쟁범죄의 진상을 규명하는 과정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지를 보여준다.5. 기념 및 추모 사업
303고지 학살 사건은 한국 전쟁 중 발생한 비극으로, 한동안 잊혔다가 1980년대 주한미군 장교의 노력으로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희생된 미군 병사들을 기리기 위한 추모 사업이 시작되었다.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의 미국 육군 기지 캠프 캐럴과 사건 현장인 자고산(303고지)에는 여러 차례 추모비가 세워졌으며, 2010년 사건 60주년에는 대한민국 국군과 지역 사회의 협력으로 새로운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매년 자고산에서는 한미 동맹의 의미를 되새기고 전쟁의 비극을 기억하기 위해 미군, 한국군, 지역 주민이 함께 참여하는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다.
5. 1. 기념비 건립과 추모 행사
303고지 학살 사건은 《타임》[23], 《라이프》[41] 등 미국 주요 언론을 통해 보도되며 알려졌지만[40], 이후 한동안 잊혀졌다. 한국 전쟁 이후 미국 육군은 왜관의 303고지(자고산) 근처에 캠프 캐럴을 영구 주둔지로 설치했다.사건이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1985년, 캠프 캐럴에 주둔하던 데이비드 캥거스 소위(Second Lieutenant David Kangas)가 관련 기록을 검토하던 중 학살 장소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 그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전투 기록을 찾아 학살 위치를 파악하고 생존자들을 추적했다.
1990년 캠프 캐럴 주둔지 본부 앞에 첫 추모비가 세워졌으나, 캥거스 소위가 생존자들을 찾아낸 것은 1991년이었다. 생존자 중 프레드 라이언과 로이 맨링은 1999년 한국을 방문하여 학살 현장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했다. 이들 생존자들은 미 육군 기록에 전쟁 포로로 정식 등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보상을 받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후 캠프 캐럴 주둔군과 대한민국 국군, 왜관 지역 주민들이 함께 자고산의 실제 학살 장소에 더 큰 기념비를 세우기 위한 모금 운동을 벌였다[42]. 1990년에 세워졌던 첫 기념비는 2003년 8월 17일 자고산 위로 옮겨졌다.
2009년에는 제501지원여단 병사들이 두 번째, 더 큰 기념비를 세우기 위한 모금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참전 용사, 정치인, 지역 시민들의 도움으로 사건 발생 60주년인 2010년 5월 26일, 새로운 기념비가 CH-47 치누크 헬리콥터로 자고산 정상에 세워졌다[43].
매년 자고산에서는 303고지에서 희생된 장병들을 기리는 추모 행사가 열린다. 캠프 캐럴 주둔 미군 장병들은 대한민국 국군 및 지역 주민들과 함께 자고산을 올라 추모비에 헌화하며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27].
5. 2. 한미 동맹 강화와 역사 교육

303고지 학살 사건은 미국 《타임》[23], 《라이프》[41] 등 주요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으나[40][15],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잊혀 갔다. 한국 전쟁 이후 주한미군은 303고지(자고산) 근처 왜관읍에 캠프 캐럴을 설치했다. 이 사건은 1985년, 캠프 캐럴에 근무하던 데이비드 캥거스(David Kangas) 미 육군 소위가 관련 기록을 조사하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는 학살이 일어난 정확한 장소를 찾기 위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의 전투 기록을 확인하고 생존자들을 추적했다.
캥거스 소위의 노력으로 1990년 캠프 캐럴 부대 앞에 첫 추모비가 세워졌고, 1991년에는 생존자들의 소재가 파악되었다. 1999년에는 당시 생존자 세 명 중 프레드 라이언(Fred Ryan)과 로이 맨링(Roy Manring)이 한국을 방문하여 학살 현장에서 열린 추모식에 참석했다. 하지만 이들 생존자들은 미 육군 기록에 전쟁 포로로 정식 등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보상을 받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후 캠프 캐럴 주둔 미군 장병들은 실제 학살 장소인 자고산 정상에 더 큰 기념비를 세우기 위한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이 모금에는 대한민국 국군 장병들과 왜관 지역 주민들도 동참했다[42]. 그 결과 2003년 8월 17일, 캠프 캐럴 앞에 있던 기념비가 자고산 위로 옮겨졌다. 2009년에는 미 제501지원여단 장병들이 중심이 되어 두 번째 기념비 건립을 위한 모금을 진행했다. 대한민국 재향 군인, 정치인, 지역 주민들의 도움으로 사건 발생 60주년이 되던 2010년 5월 26일, 새로운 기념비가 CH-47 치누크 헬기로 자고산 정상에 세워졌다[43].
매년 자고산에서는 303고지에서 희생된 장병들을 기리는 추모 행사가 열린다. 캠프 캐럴 주둔 미군 장병들은 이 행사에 참여하여 자고산을 오르고 기념비에 헌화하며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27]. 이러한 추모 활동은 한미 동맹의 의미를 되새기고, 전쟁의 비극을 잊지 않으며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역사 교육의 계기가 되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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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文ではTuksong-dong、現在の得成里 득성리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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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語では[[:en:underwater bridge|underwater bridge]]。丸太や土砂などを用い、水面に隠れる程度の浅い位置に構築物を設け、その上を人や車両が渡れるようにする手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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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 Korean Soldiers remembered at Hill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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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8軍 (アメリカ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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