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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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위한 개헌 시도와 부정 선거 논란 속에서 치러졌다. 자유당의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득표율은 낮았고, 민주당의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되어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었다. 선거 과정에서 민주당 신익희 후보의 사망과 조봉암의 야권 단일 후보화, 무효표 증가 등 이변이 있었으며, 조봉암은 이후 간첩 혐의로 처형되었다.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선거
선거 정보
국가대한민국
국기 연도1949년
선거 유형대통령 선거
이전 선거195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이전 선거 연도1952년
다음 선거3·15 부정선거
다음 선거 연도1960년 3월
선거일1956년 5월 15일
투표율94.4% ( 6.3%p)
대통령 선거 결과
이승만
이승만
후보이승만
소속 정당자유당
득표수5,046,437
득표율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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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후보조봉암
소속 정당무소속
득표수2,163,808
득표율30.0%
대통령 당선 정보
직책대통령
선거 전 대통령이승만
선거 전 대통령 소속 정당자유당
선거 후 대통령이승만
선거 후 대통령 소속 정당자유당
부통령 선거 결과
장면
장면
후보장면
소속 정당민주당
득표수4,012,654
득표율46.4%
이기붕
이기붕
후보이기붕
소속 정당자유당
득표수3,805,502
득표율44.0%
부통령 당선 정보
직책부통령
선거 전 부통령함태영
선거 전 부통령 소속 정당무소속
선거 후 부통령장면
선거 후 부통령 소속 정당민주당
지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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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별 우세지역 (이승만 우세 지역: 파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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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거 배경

1954년 11월 국회에서 "사사오입 개헌"이라고 불리는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연임 제한을 철폐한 자유당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각각 지명했다. 이승만은 처음에는 3선이 민주주의에 반한다며 출마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이는 진심이 아니었다. 자유당과 경찰은 관민을 동원해 이승만의 출마를 요구하는 관제 데모를 조직했고, 이승만은 "민의에 따라 재출마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한편,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는 세력이 결집한 민주당은 1956년 3월 28일 신익희를 대통령 후보로,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진보당 창립 준비 위원회는 3월 31일 조봉암을 대통령 후보로, 박기출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이범석 등도 입후보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유당과 민주당의 양자 대결 구도였다.

민주당은 "못살겠다. 갈아 보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서울특별시 한강 강변 선거 연설회에는 30만 명이 넘는 청중이 참가하는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이승만 독재 정치에 불만을 품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신익희 후보가 전라북도 유세 중 열차 안에서 뇌출혈로 급사(5월 5일)하면서, 이승만의 재선은 확실해졌고, 선거의 초점은 부통령 선거로 옮겨갔다. 진보당은 신익희 후보 급서에 따라 박기출 부통령 후보를 사퇴시켰다.

2.1. 사사오입 개헌

1948년 제정된 헌법과 1952년 개정된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4년으로 하고, 재선을 통해 1차 중임만을 허용했다. 이 헌법 규정대로라면 이승만은 더 이상 출마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장기 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중임 제한을 철폐한다'는 내용을 담은 개헌안을 발의했으나, 국회에서 사실상 부결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사사오입의 원리'를 내세워 2차 개헌을 통과시켰는데, 이를 '사사오입 개헌'이라고 한다.

3. 후보 선출

1954년 11월, 국회에서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이라 불리는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의 연임 제한을 철폐한 자유당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이승만은 처음에는 "자신이 3선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반하므로 출마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이는 진심이 아니었다. 자유당과 경찰은 관민을 동원하여 이승만의 출마를 요구하는 관제 데모를 조직했고, 이승만은 "민의에 따라 재출마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출마를 선언했다.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결집하여 결성된 민주당은 1956년 3월 28일 신익희를 대통령 후보로,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민주당 결성 과정에서 가입을 거부당한 조봉암과 민주당 참가를 거부한 서상일 등은 진보당 창립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고, 3월 31일에 조봉암을 대통령 후보로, 박기출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이들 외에도 이범석 등 여러 명이 입후보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유당과 민주당의 양자 대결 구도로 선거전이 진행되었다.

3.1. 자유당

1956년 3월 6일, 자유당은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이승만이기붕을 각각 정·부통령 후보로 만장일치 지명하였다. 이승만은 80세가 넘는 고령이었음에도 장기 집권을 향한 권력욕을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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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 제3대 대통령·제4대 부통령 후보
대통령 후보
이승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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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대통령
제헌 국회의장
제헌 국회의원
제3대 전반기 민의원의장
제3대 국방부 장관
제3대 민의원의원

3.2. 민주당

민주당은 3월 29일 전국대의원대회에서 신익희 전 민의원의장과 장면 전 총리를 각각 정·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못살겠다, 갈아 보자》라는 구호 아래 자유당을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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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제3대 대통령·제4대 부통령 후보
대통령 후보
신익희
부통령 후보
장면
신익희
신익희
장면
장면
제헌·제2대 민의원의장
제헌 국회부의장
제1·2·3대 민의원의원
제2대 국무총리
제헌 국회의원
초대 주미 대사


민주당은 "못살겠다, 갈아 보자"라는 선거 슬로건을 내걸고, 서울특별시를 흐르는 한강 강변에서 열린 선거 연설회에는 30만 명이 넘는 청중이 참가하는 등, 경찰과 관리에 의한 선거 방해에도 불구하고 서울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이승만의 독재 정치에 불만을 품은 광범위한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3.3. 진보당

진보당 창당을 준비하던 진보당창당추진위원회는 1956년 3월 31일 진보당 전국추진위원대표자회의를 열고 만장일치로 조봉암 전 농림부장관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진보당은 서상일 전 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으나, 본인이 수락을 거부하자 1956년 4월 1일 선거대책위원회를 열고 박기출 전 경상남도체육회장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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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 제3대 대통령·제4대 부통령 후보
대통령 후보
조봉암
부통령 후보
박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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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전·후반기 민의원부의장
초대 농림부 장관
제1·2대 민의원의원
진보당 선거대책부위원장
전 진보당 추진위원회 의장
전 민족자주연맹 중앙위원

3.4. 기타 군소 후보

공화당은 1956년 4월 1일 중앙위원회를 열고 이범석총리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으며, 대통령 후보는 지명하지 않았다. 이범석은 사실상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며 선거에 나섰다.

조선민주당은 1956년 4월 3일 중앙상무집행위원회를 열고 이윤영 수석최고위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으며, 대통령 후보는 지명하지 않았다. 이윤영은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기로 했다.

윤치영 대한국민당 최고위원은 1956년 3월 31일 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였다. 윤치영은 이날 자신은 국민당의 공천을 받은 것이 아니고 개인 자격으로 입후보하는 것이며, 대통령으로는 이승만 박사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예언자를 자칭하는 것으로 유명한 백성욱 전 내무부 장관 역시 "이승만 대통령의 3선을 위해 나선다"며 1956년 4월 5일 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였다.

이승만과 숙질지간이라는 이종태도 1956년 4월 8일 이승만을 지지한다며 부통령 선거에 무소속 입후보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종태는 선거를 불과 이틀 앞둔 1956년 5월 13일 이승만 대통령이 이기붕을 원하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며 사퇴를 선언하였다.

윤정훈 조국봉찬회 회장은 무소속으로 부통령 후보에 출마하려 했으나 후보 등록 서류를 후보 등록 마감 3분 뒤에 제출하여 입후보가 각하되었다.

4. 선거 운동

1954년 11월, 국회에서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대통령의 연임 제한을 철폐한 자유당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이승만은 처음에는 3선이 민주주의에 어긋난다며 출마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냈으나, 이는 진심이 아니었다. 자유당과 경찰은 이승만의 출마를 요구하는 관제 데모를 조직했고, 결국 이승만은 "민의에 따라" 재출마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는 세력은 민주국민당을 중심으로 민주당을 결성, 1956년 3월 28일 신익희를 대통령 후보로,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진보주의 세력은 진보당 창립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고, 3월 31일 조봉암을 대통령 후보로, 박기출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이범석 등도 출마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유당과 민주당의 양자 대결 구도였다.

민주당은 "못살겠다. 갈아 보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서울특별시 한강변 연설회에 30만 명이 넘는 청중을 모으는 등, 경찰과 관리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대도시를 중심으로 이승만 독재 정치에 불만을 품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신익희 후보가 전라북도 유세 중 열차 안에서 뇌출혈로 급사(5월 5일)하면서, 이승만의 재선은 확실해졌고, 선거의 초점은 부통령 선거로 옮겨갔다. 진보당은 신익희 후보의 급서에 따라 박기출 부통령 후보를 사퇴시켰다.

4.1. 후보 단일화 논의와 신익희의 사망

민주당과 진보당은 자유당에 대항하기 위해 후보 단일화를 추진했다. 진보당은 대통령 선거에는 민주당 신익희 후보를, 부통령 선거에는 진보당 박기출 후보를 내세우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대통령과 부통령 모두 민주당 후보로 단일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1956년 4월 25일, 양당은 조봉암이 후보직을 사퇴하여 대통령 선거에서라도 단일화를 이루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5월 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지방 유세 도중 뇌일혈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써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과 조봉암 두 명만 남게 되어, 조봉암이 사실상 야권 단일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반공 보수 정당이었던 민주당은 진보 성향의 조봉암을 끝까지 지지하지 않았다. 대신 신익희를 추모하는 뜻에서 무효표를 던질 것을 독려하는 추모표 캠페인을 벌였다.

4.2. 추모표 캠페인

민주당은 신익희의 죽음을 애도하며, 추모표를 던질 것을 호소했다. 이는 이승만에 대한 반대 심리를 결집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추모표 캠페인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얻어, 투표수 9,067,063표 중 20.5%인 1,856,818표가 무효표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야당세가 상대적으로 강한 서울특별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서울에서는 투표자 수 608,741명 중 284,359명이 무효표를 던져 유효투표율은 53.8%에 그쳤다. 반면 부통령 선거에서는 서울 투표수 중 96.4%가 유효표였고, 민주당 장면 후보가 76.9%를 얻었다.

5. 선거 결과

1956년 5월 15일에 치러진 제3대 대통령 선거는 94.4%의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5.1. 대통령 선거

1956년 5월 15일 치러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이승만 후보가 무소속 조봉암 후보를 큰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하지만 당초 예상했던 80%대의 득표율이 아닌 50%대에 머물렀다. 이는 4년 전 대통령 선거 때보다 20% 이상 하락한 수치로, 이승만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이 강했음을 보여주었다.

민주당 신익희 후보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신익희 추모표로 여겨지는 무효표가 185만 표 이상 발생했다. 특히 서울특별시에서는 무효표가 이승만의 득표수를 넘어서는 현상이 나타났다. 진보 계열의 조봉암 후보는 지난 대선에 비해 3배 가까운 득표를 얻으며 선전했다. 조봉암은 이 선거에서 북한의 자금을 받았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당했지만, 2011년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조봉암의 고향인 강화군에서는 2만 표 가량이 이승만 표로 둔갑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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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대통령 선거 후보별 득표 (1956년 5월 15일)
당락후보정당득표수득표율
(%)
당선이승만자유당5,046,43755.7
조봉암무소속2,163,80823.9

5.1.1. 지역별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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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이승만조봉암
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
서울205,25363.325,63136.7
경기도607,75777.144,96722.9
강원도644,69390.810,5169.2
충청북도353,20186.125,87513.9
충청남도530,53177.156,59022.9
전라북도424,67460.2109,49039.8
전라남도741,62372.199,88527.9
경상북도621,53055.3129,79144.7
경상남도830,49262.3288,65437.7
제주86,68387.96,10512.1
합계5,046,43770.0797,50430.0
출처: 대한민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

5.2. 부통령 선거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 장면 후보가 자유당 이기붕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장면 후보는 4,012,654표(46.4%), 이기붕 후보는 3,805,502표(44.0%)를 얻었다. 이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심판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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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통령 선거 후보별 득표
당락후보자정당득표수득표율
(%)
당선장면민주당4,012,65446.4%
이기붕자유당3,805,50244.0%


대통령과 부통령이 서로 다른 정당 소속으로 선출되는 여소야대 현상이 나타났으며, 이는 자유당의 장기 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강했음을 보여준다.

5.2.1. 지역별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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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선거 지역별 결과
지역이승만 (자유당) 득표율조봉암 (무소속) 득표율
서울특별시63.3%36.7%
경기도77.1%22.9%
충청북도86.1%13.9%
충청남도77.1%22.9%
전라북도60.2%39.8%
전라남도72.1%27.9%
경상북도55.3%44.7%
경상남도62.3%37.7%
강원도90.8%9.2%
제주도87.9%12.1%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약 20만 표 차이로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로써 대통령과 부통령이 서로 다른 정당 소속으로 선출되는 여소야대 현상이 나타났으며, 이는 자유당의 장기 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강했음을 보여준다.

6. 선거 이후

3.15 부정선거 이후, 진보당 당수 조봉암이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6.1. 조봉암 사건

1958년 조봉암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이는 명백한 정치적 탄압이었다. 2011년 대한민국 대법원은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6.2. 4.19 혁명

3.15 부정선거는 4.19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4.19 혁명은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