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미스 해전 (기원전 3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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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살라미스 해전 (기원전 306년)은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디아도코이 전쟁 중 안티고노스 1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가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함대를 격파한 해전이다. 데메트리오스는 키프로스를 장악하고 있던 프톨레마이오스에 맞서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하여 키프로스를 점령했다. 이 승리로 안티고노스는 왕을 칭하며 마케도니아 왕국을 선포했고, 디아도코이 전쟁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살라미스 해전은 이후 디아도코이들의 왕위 경쟁에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학자들은 이 해전을 사모트라케의 니케 조각상을 세울 수 있는 세 가지 해전 중 하나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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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스 해전 (기원전 306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분쟁 | 디아도코이 전쟁 |
시기 | 기원전 306년 |
장소 | 살라미스 앞바다 |
결과 | 안티고노스 왕조의 결정적인 승리, 키프로스 점령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안티고노스 왕조, 아테네 |
교전국 2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지휘관 및 지도자 | |
안티고노스 진영 지휘관 | 데메트리오스 1세, 라리사의 메디오스 |
프톨레마이오스 진영 지휘관 | 프톨레마이오스 1세, 메넬라오스 (포로) |
병력 규모 | |
안티고노스 진영 | 약 180척 (아테네 함선 30척 포함) |
프톨레마이오스 진영 | 메넬라오스 휘하 함선 60척, 프톨레마이오스 휘하 함선 140척 및 수송선 200척 |
피해 규모 | |
안티고노스 진영 | 전함 20척 손상 |
프톨레마이오스 진영 | 전함 80척 손실, 전함 40척 및 수송선 100척 나포, 메넬라오스 군대 항복 |
시각 자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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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 |
전쟁의 일부 | 디아도코이 전쟁 |
2. 배경
알렉산드로스 3세의 죽음 이후 벌어진 디아도코이 전쟁 동안,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고대 이집트를 장악하고 키프로스 섬을 점령하여 경쟁자인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에 대항하는 작전 기지로 삼았다.[2]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는 키프로스를 기지 삼아 안티고노스가 지배하는 시리아와 소아시아 해안을 습격할 수 있었다. 기원전 306년 초, 안티고노스는 이러한 위협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아들인 데메트리오스 1세에게 섬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동생 메넬라오스에게 전함 60척을 주어 적의 뒤를 치게 하려고 살라미스를 출항시켰다. 이에 대해 데메트리오스는 10척을 요격에 내보내 소수 병력으로도 충분히 방어할 수 있는 좁은 길목에서 맞서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수중에 있는 전함 180척의 함대와 육군으로 프톨레마이오스 함대 본대에 총공격을 가해 이를 격파했다. 프톨레마이오스 함대 중 퇴각할 수 있었던 것은 8척뿐이었고, 나머지는 나포되거나 침몰했다. 데메트리오스 군의 전리품에는 여성과 프톨레마이오스의 군자금도 있었다.
당시 데메트리오스는 마케도니아의 지배자 카산드로스가 고전 아테네에 설치한 수비대를 전복시킨 그리스에 있었다. 아테네는 인접한 메가라와 함께 민주주의 통치를 회복하고 데메트리오스와 동맹을 맺었다. 그 결과, 데메트리오스가 기원전 306년 봄 아테네에서 키프로스를 점령하기 위해 출항했을 때, 30척의 아테네 4단 노선 갤리선이 함께 했다.
에게 해를 건너 데메트리오스는 카리아 해안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아버지와의 동맹 조건에 따라 로도스인들에게 합류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로도스인들은 거절했다. 데메트리오스는 킬리키아로 가서 더 많은 병력을 보충한 후, 15,000명의 보병과 5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키프로스로 건너갔다. 이와 함께 53척의 중형 함선(7척의 7단 노선 갤리선, 10척의 6단 노선 갤리선, 20척의 5단 노선 갤리선)과 110척 이상의 경형 함선(3단 노선 갤리선 및 4단 노선 갤리선)으로 구성된 함대가 함께 했지만, 정확한 숫자는 다소 불분명하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형제인 메넬라오스에 의해 저지되었는데, 그는 12,000명의 보병, 800명의 기병, 그리고 60척의 함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3. 해전의 전개
살라미스에서 대립한 두 사령관, 프톨레마이오스(왼쪽)와 데메트리우스(오른쪽)의 대리석 흉상
한편, 형의 요청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본인은 함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출항했다. 그는 키프로스 서부 해안의 파푸스에 전함 140척(모두 4단 노선과 5단 노선)과 수송선 200척에 10,000명 이상의 병력을 이끌고 도착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는 데메트리우스에게 키프로스를 떠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데메트리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가 그리스의 시키온과 코린토스에서 수비대를 철수한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제안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키티온에서 그레코 곶을 돌아 살라미스까지 밤에 질주하여 데메트리우스를 기습하고, 자신의 함대를 형제의 60척과 합쳐서 데메트리우스보다 우위를 점하려 했다. 그러나 데메트리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도착을 알고, 이를 막기 위해 조치를 취했다. 그는 자신의 배에 미사일 발사기를 장착하고, 최고의 병력을 해병으로 태우고, 자신의 함대를 도시 항구 바로 바깥에 정박시켜 메넬라오스를 항구에 가두고 두 적 함대 사이에 위치했다. 이는 데메트리우스가 메넬라오스가 항구에서 나와 그의 후방을 공격하기 전에 프톨레마이오스를 격파할 수 있다는 계산된 위험을 감수했음을 의미했다.
전투 당일 동이 트자 프톨레마이오스 함대는 살라미스 시가 눈앞에 나타났고, 그곳에서 데메트리우스 함대가 전개되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키프로스에서 나포한 함선으로 180척으로 증강된 데메트리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상대로 주력을 집중시키고, 안티스테네스 휘하의 10척의 5단 노선 갤리선을 살라미스 항구의 좁은 출구를 봉쇄하여 메넬라오스의 개입을 막거나 적어도 지연시키도록 했다. 데메트리우스는 그의 최정예 함선들, 즉 7척의 페니키아 7단 노선 갤리선, 아테네 함대, 그리고 그 뒤에 10척의 6단 노선 갤리선과 10척의 5단 노선 갤리선을 라리사의 메디우스 제독의 지휘 아래 좌익에 집결시켰다. 메디우스는 데메트리우스 자신도 기함인 7단 노선 갤리선에 탑승하여 좌익에 있었지만, 함대의 실제 총사령관으로 보였다. 그의 중군은 사모스의 테미손과 펠라의 마르시아스의 지휘 아래 함대에서 가장 가벼운 함선으로 구성되었고, 우익은 함대의 수석 항해사(메디우스 다음으로 2인자, ''archikybernetes'')인 할리카르나소스의 헤게시푸스와 코스의 플레이스티아스에게 맡겨졌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그의 함대를 적의 배치에 맞춰 신속하게 배치했다. 그는 그의 군대를 수송하는 수송선에게 후퇴를 명령하고, 그의 함대의 가장 큰 함선들을 직접 지휘하는 자신의 좌익에 집결시켰다. 역사학자 리처드 빌로우즈는 "이 전투는 두 왕조의 군주 중 누가 먼저 적의 우익을 격파하고 적의 중앙을 공격할 수 있는지 겨루는 일종의 경주였다."라고 썼으며, "메넬라오스가 살라미스에서 탈출하여 제때 개입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문제였다."
가장 완벽하고 아마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전투 기록을 제공하는 디오도루스 시쿨루스에 따르면, 두 함대가 약 3 스타디아 떨어진 지점에서 데메트리우스와 프톨레마이오스 모두 공격 신호(금도금 방패)를 올렸고, 두 함대는 서로 돌진했다. 디오도루스는 충각 공격과 해상 백병전의 양상과, 전투를 지배한 미사일 교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데메트리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군이 그의 기함에 탑승했을 때 용맹함을 떨쳤는데, "그들에게 창을 던지고 다른 자들은 가까운 거리에서 창으로 찔러" "모든 종류의 많은 미사일"의 공격을 받는 중에도 용맹을 떨쳤다. 그의 세 명의 보디가드는 방패로 그를 보호하려 했지만, 한 명은 죽고 다른 두 명은 심하게 부상을 입었다. 아테네인들도 두각을 나타냈으며, 데메트리우스는 노획한 전리품에서 아테네에 1,200벌의 갑옷을 하사했다. 결국 양쪽 좌익 모두 승리했지만, 경주에서 이긴 것은 데메트리우스였다. 프톨레마이오스가 데메트리우스의 중앙을 공격하려 했을 때, 그의 함대의 나머지 부분은 이미 패배하여 도주하고 있었다. 한편, 메노에티우스의 지휘를 받는 메넬라오스의 60척의 함선은 데메트리우스의 봉쇄를 뚫고 탈출했지만, 이미 전투는 패배한 뒤였다.
3. 1. 키프로스 상륙과 살라미스 공방전
데메트리오스 1세는 키프로스 섬 북동쪽에 있는 카르파시아 반도에 상륙하여 해자와 울타리로 보호되는 요새화된 야영지를 세웠다. 그는 그곳에서 지역을 약탈하기 시작하여 카르파시아와 우라니아를 점령했다.[1][2] 함대를 그곳에 남겨두고 육로로 살라미스 도시를 향해 진군했다. 메넬라오스는 도시에서 약 40 스타디온 (약 5마일) 떨어진 곳에서 데메트리우스와 전투를 벌였지만, 보병 12,000명과 기병 800명으로 구성된 그의 군대는 짧은 전투에서 패배하여 큰 손실(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1,000명이 사망하고 3,000명이 포로로 잡힘)을 입고 성벽 뒤로 퇴각해야 했다. 데메트리우스는 포로를 석방하고 자신의 군대에 편입시켰지만, 곧 그들이 탈주하려 하자 시리아에 있는 그의 아버지에게 보냈다.[1][2]
전투 후, 메넬라오스는 서둘러 살라미스 포위 공격을 준비하여 성벽에 투석기를 설치하고 형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전령을 보냈다. 데메트리우스 역시 "폴리오르케테스"("공성자")라는 별명을 안겨줄 첫 번째 포위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숙련된 장인들과 대량의 목재와 철재가 아시아에서 수송되어 미사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덮개가 씌워진 두 개의 대형 공성망치를 포함한 대형 공성 무기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각 층에 투석기와 발리스타가 갖춰진 거대한 9층 높이의 이동식 공성탑 또는 헬레폴리스를 건설하여 200명 이상의 승무원이 운용했다.[1][2] 데메트리우스는 함대와 공성 훈련을 시작하여 도시를 공격했다. 며칠 후, 데메트리우스의 기계가 성벽에 틈을 만들었고 이어진 공격은 결정적인 상황에 거의 다다랐지만, 밤이 되면서 중단되었다. 밤중에 메넬라오스는 가연성 물질을 모아 가장 큰 공성 무기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
3. 2. 프톨레마이오스의 개입과 해전
프톨레마이오스는 지중해와 그리스에 세력을 확대하고 제4차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우위를 얻으려고 했다. 안티고노스는 기원전 306년 이를 저지하고자 아들인 데메트리오스를 파견했다.[2]
프톨레마이오스는 동생 메넬라오스에게 60척을 주어 적의 뒤를 찌르도록 살라미스로 출항시켰다. 반면 데메트리오스는 10척을 요격하도록 하고, 소수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좁은 길에서 맞서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수중에 180척의 함대와 육군으로 프톨레마이오스 함대의 본대에 총공격을 해서 적들을 격파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함대 중 퇴각할 수 있었던 것은 8척뿐이었으며, 나머지는 나포되거나 침몰당했다. 데메트리오스 군이 얻은 전리품에는 여성과 프톨레마이오스의 군자금도 있었다.
4. 해전의 결과 및 영향
살라미스 해전 이후 메넬라오스는 저항을 계속했지만, 데메트리오스에게 패해 휘하의 보병 20,000명과 기병 2,000명과 함께 사로잡혔다. 이로써 데메트리오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세력 하에 있던 키프로스를 점령했다. 이 승전보를 받은 안티고노스는 같은 해에 아들을 공동 통치자로 하여 마케도니아 왕을 칭했다. 이에 맞서 이듬해에는 다른 디아도코이들도 왕을 칭하게 되었고, 디아도코이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갔다.
데메트리우스는 네온과 부리쿠스에게 패배한 적을 추격하고 바다에서 사람들을 구출하도록 지시한 후 개선하여 그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의 함대는 손상된 배 20척만 잃었고, 수리 후 모두 재사용되었으며, 프톨레마이오스의 함대는 80척을 잃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데메트리우스의 군대가 승무원과 함께 프톨레마이오스의 전함 40척과 약 8,000명의 병사가 탑승한 수송선 100척 이상을 온전하게 노획했다는 것이다. 플루타르코스는 더 나아가 프톨레마이오스가 배 8척만 구출할 수 있었고, 프톨레마이오스의 배 70척이 나포되었다고 주장한다. 데메트리우스에게 사로잡힌 수많은 포로 중에는 나중에 데메트리우스의 애인이 된 기생 라미아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아들 중 한 명인 레온티스코스가 있었다. 데메트리우스는 밀레투스의 아리스토데무스와 함께 그의 기함을 시리아로 보내 안티고노스에게 승리를 보고하게 했다.
패배 후,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로 퇴각했고, 메넬라오스는 살라미스와 그 수비대를 항복해야 했으며, 이는 데메트리우스의 힘을 더욱 증가시켰다. 데메트리우스는 이후 키프로스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이동하여 수비대를 자신의 군대로 편입시켰다. 그의 군대에 추가된 총 전력은 보병 16,000명과 기병 800명이었다. 경쟁 관계에도 불구하고, 프톨레마이오스와 데메트리우스의 관계는 상호 존중과 기사도적인 행동으로 특징지어졌다. 가자에서의 프톨레마이오스 승리 후 프톨레마이오스는 데메트리우스의 포로와 짐 수송대를 무조건 석방했는데, 이는 다음 해 무스에서의 데메트리우스의 성공 이후 데메트리우스에 의해 보답받았다. 데메트리우스는 살라미스 이후에도 이를 존중하여, 개인 소지품과 함께 포로가 된 메넬라오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다른 친척 및 친구들을 즉시 석방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기원전 295년에 키프로스를 재탈환하고, 데메트리우스의 어머니와 자녀들을 살라미스에서 발견했을 때, 그는 다시 즉시 그들을 석방함으로써 보답했다.
살라미스에서의 승리는 안티고노스가 스스로 왕(''바실레우스'')으로 선포하는 적절한 구실로 사용되었다. 마케도니아 왕좌는 기원전 309년 카산드로스에 의해 알렉산드로스 4세가 살해된 이후 비어 있었다. 동시에 데메트리오스는 아버지와 함께 공동 왕으로 추대되었다. 안티고노스의 왕 칭호 수여 후에는 기원전 306년 가을, 대규모로 이집트 침공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그 다음은 데메트리오스가 기원전 305-304년에 로도스 공방전을 벌였지만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기원전 302년, 남은 군주들인 프톨레마이오스, 카산더, 셀레우코스, 그리고 리시마코스가 차례로 스스로 왕 칭호를 부여한 후 안티고노스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고 기원전 301년 입소스 전투에서 그를 격파했다. 안티고노스는 전사했고, 그의 왕국은 붕괴되어 승자들 사이에 분할되었다. 데메트리오스는 전투에서 살아남았고, 그의 대규모 함대 덕분에 키프로스, 키클라데스 제도, 시돈, 티레, 코린토스, 그리고 소아시아 서부의 주요 도시들을 포함하는 해안 및 섬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키프로스는 레반트 지역에서 데메트리오스가 작전을 펼치는 기지가 되었고, 아테네와 남부 그리스에 대한 지배권을 강요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에 부재한 동안 프톨레마이오스는 기원전 295년에 키프로스를 점령했다.
현대 학자들은 살라미스 해전을 아모르 고스 해전 (기원전 322년) 및 코스 해전 (기원전 261/255년)과 함께 사모트라케의 니케 조각상을 세울 수 있는 세 가지 해전 중 하나로 제시한다.
5. 역사적 의의 및 평가
기원전 306년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로 안티고노스는 왕(''바실레우스'')을 칭하는 명분을 얻었다. 알렉산드로스 4세가 카산드로스에게 살해된 기원전 309년 이후 마케도니아 왕좌는 비어 있었고, 데메트리오스는 아버지와 함께 공동 왕으로 추대되었다.[1] 안티고노스의 왕 칭호 수여 후, 기원전 306년 가을 대규모 이집트 침공과 기원전 305년-304년 로도스 공방전은 실패했다.[2] 기원전 302년, 프톨레마이오스, 카산더, 셀레우코스, 리시마코스는 스스로 왕을 칭하고 안티고노스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어, 기원전 301년 입소스 전투에서 그를 격파했다. 안티고노스는 전사했고, 그의 왕국은 승자들에게 분할되었다. 데메트리오스는 전투에서 살아남아 함대를 기반으로 키프로스, 키클라데스 제도 등 해안과 섬 지역을 지배했다. 이후 키프로스는 데메트리오스의 작전 기지가 되었으나, 기원전 295년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점령당했다.
현대 학자들은 살라미스 해전을 아모르 고스 해전, 코스 해전과 함께 사모트라케의 니케 조각상을 세울 수 있는 세 해전 중 하나로 제시한다.
살라미스 해전 이후에도 메넬라오스는 저항했지만, 데메트리오스에게 패배하여 휘하 병사들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 이로써 데메트리오스는 키프로스 섬을 점령했고, 이 승전보를 받은 안티고노스는 아들을 공동 통치자로 하여 마케도니아 왕을 칭했다. 이에 대항하여 다음 해에는 다른 디아도코이들도 왕을 칭하며, 디아도코이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참조
[1]
논문
The Date of the Nike of Samothrace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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