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트마어 크라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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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트마어 크라머는 "축구 교수"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독일 출신의 축구 감독이다. 그는 선수 시절을 거쳐, 독일 축구 협회에서 활동하며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1960년대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을 지도하여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승리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일본 축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서독 대표팀 코치를 거쳐, 바이에른 뮌헨을 이끌고 유러피언컵 2연패와 인터컨티넨탈컵 우승을 달성했다. 또한,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의 기술고문으로 활동하며 1992년 올림픽 본선 진출에 기여했다. 크라머는 다양한 클럽과 국가대표팀을 지도했으며, 2005년에는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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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트마어 크라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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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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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25년 4월 4일 |
출생지 | 도르트문트, 독일 |
사망일 | 2015년 9월 17일 |
사망지 | 라이트임빙클, 독일 |
감독 경력 | |
1960–1963 | 일본 (기술 고문) |
1964–1966 | 서독 (수석 코치) |
1971–1974 | 이집트 |
1974 | 미국 |
1974 | 헤르타 BSC |
1975–1977 | 바이에른 뮌헨 |
1977–1978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
1978–1981 | 알이티하드 |
1981–1982 | 아리스 살로니카 |
1982–1985 | 바이어 레버쿠젠 |
1984–1985 | 말레이시아 |
1991–1992 | 대한민국 U-23 (기술 고문) |
1997 | 태국 |
메달 기록 | |
메달 | 남자 축구 |
동메달 | 1973년 |
3위 | 1974년 |
2. 지도자 경력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일본 대표팀이 아르헨티나를 꺾는 이변을 일으키며 8강에 진출한 후, 크라머는 일본 축구 발전을 위한 5가지 제언을 남겼다.
- 강한 팀끼리 싸우는 리그전 창설
- 코치 제도[19] 확립
- 잔디 구장을 많이 만들고 유지할 것
- 국제 시합 경험을 많이 쌓을 것. 대표팀은 1년에 한 번 유럽 원정을 가서 강호와 대결할 것
- 고등학교부터 일본 대표팀까지, 각각 2명의 코치를 둘 것
이 제언들은 1965년 일본 축구 리그 발족 등 나가누마 겐 등에 의해 모두 실행에 옮겨졌다.[21]
1964년 1월 1일, 서독으로 돌아가 헬무트 쇤 서독 국가대표 감독의 수석 코치가 되었다. 이 시기에 서독은 1966년 FIFA 월드컵에 참여하였고, 잉글랜드와의 결승에서 아쉽게 패했다. FIFA(국제 축구 연맹)는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1967년에서 1974년까지 전 세계를 돌며 활동하게 했다. 이 시기에 크라머는 1969년 일본에서 FIFA 감독 훈련을 시행하여 일본의 감독 잠재력을 가진 자들을 발굴하였다. 이후, 1974년 8월 1일, 크라머는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사령탑에 올랐다.
1975년 1월 16일, 독일의 명문 클럽인 FC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초기에 뮌헨에서 소극적인 관리 스타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뮌헨의 주장이었던 프란츠 베켄바워는 크라머를 옹호하며 그에게 신뢰를 보냈다. 베켄바워는 과거 크라머의 도움으로 어려운 시기를 극복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크라머는 바이에른을 유러피언컵에서 1975년과 1976년 2회 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달성했고, 1976년에는 인터콘티넨털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1975-76 분데스리가에서 바이에른 뮌헨은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리그 타이틀을 방어하는 데 실패하여 크라머는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감독을 맡았으나, 바이에른 뮌헨 시절만큼의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프랑크푸르트와 바이에른 뮌헨은 크라머와 줄라 로란트 감독을 맞바꾸는 거래를 했지만, 두 팀 모두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결국 크라머는 1978년 6월 30일 프랑크푸르트와 결별했다.
이후 크라머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이티하드(1978-1981), 그리스의 아리스 테살로니키(1981-1982) 감독을 거쳐 1982-83 시즌에 바이어 04 레버쿠젠 감독으로 분데스리가에 복귀했다. 레버쿠젠에서 두 번째 시즌에 팀을 리그 9위에 올려놓았으나, 그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세 번째 시즌 후 해고되었다.
1991년부터 1992년 2월까지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의 기술고문을 맡아 28년 만의 올림픽 본선 자력 진출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국내 축구계와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해 1992년 하계 올림픽 본선을 치르지 못하고 대한민국을 떠나야 했다.
크라머의 감독 경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기간 | 국가 | 팀 |
---|---|---|
1960 | 일본 (감독 대행) | |
1960-1963 | 일본 (고문) | |
1964-1966 | 서독 (수석 코치) | |
1971-1974 | 이집트 | |
1974 | 미국 | |
1974 | 헤르타 BSC | |
1975-1977 | FC 바이에른 뮌헨 | |
1977-1978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 |
1978-1981 | 알 이티하드 | |
1981-1982 | 아리스 테살로니키 | |
1982-1985 | 바이어 04 레버쿠젠 | |
1984-1985 | 말레이시아 | |
1991-1992 | U-23 대한민국 대표팀 | |
1997 | 태국 |
2. 1. 초기 경력
"축구 교수"[2]로 알려진 크라머는 축구의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161cm의 작은 키 때문에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그는 Viktoria Dortmund와 Germania Wiesbaden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감독으로서의 경력은 토이토니아 립슈타트, VfL 게제케, FC 파더보른, TuS 에빙-린덴호르스트와 같은 클럽에서 시작되었다. 1948-49 시즌을 시작으로 크라머는 독일 축구 협회(DFB)에서 처음으로 일하게 되었다. 1963년까지 그는 뒤스부르크에서 DFB 산하 서독 대표팀의 수석 코치를 맡았다.크라머는 이 시기에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기도 했다. 서독 텔레비전 방송국 ZDF에서 스포츠 담당 편집장으로 일했다. 하지만 축구계와 멀어진 느낌을 받아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이후 DFB에 의해 일본으로 파견되어 축구 강사로 활동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 축구 협회는 1960년에 외국인 전문 코치를 초빙하는 것을 고려했다. 크라머는 이 역할에 선택되었다. 크라머의 지도력과 선수들의 노력으로, 일본 대표팀은 도쿄 올림픽에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 크라머는 이 결과를 일본 축구의 괄목할 만한 발전으로 보았다. 크라머는 국가대표팀뿐만 아니라, 최초의 전국 리그 창설, 코치 훈련, 국가대표팀 강화 등 일본 축구 발전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했다. 이는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일본이 동메달을 획득하는 데 기여했다.
2. 2. 언론계 진출과 일본으로
크라머는 이 시점에 언론계에 진출하려 시도했다. 그는 서독 텔레비전 방송국 ZDF의 스포츠 담당 편집장이 되었다. 그러나 크라머는 축구계와 크게 동떨어진 느낌을 받아 6개월 만에 이 직책을 그만두었다. 이후 그는 독일 축구 협회(DFB)에 의해 일본으로 파견되어 축구 강사로 활동했다.1960년,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 축구 협회는 대표팀 강화를 위해 외국인 감독 초빙을 검토하고 있었으며, 나리타 주지로의 중개와 회장인 노즈 겐의 결정으로 크라머가 임시 감독으로 초빙되었다.[12][13][14]
하네다 공항에서 크라머를 맞이한 오카노 슌이치로는 크라머를 일본 축구 협회가 마련한 숙소인 야마노우에 호텔로 안내하려 했다. 그러나 크라머는 "일본 대표팀 선수들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오카노가 혼고의 "수학여행 학생들이 사용하는 여관"이라고 설명하자, "바로 그곳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오카노는 선수들이 이불에서 자고, 아침 식사는 밥, 생계란, 소금에 절인 연어, 된장국, 점심은 덮밥 등이라고 설명하며 "갑자기 일본 생활에 적응하는 것은 무리다"라고 설득했지만, 크라머는 "선수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지 않고 어떻게 선수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내일부터 그곳으로 가게 해 달라"고 완강하게 말했다. 또한 당시 연습장으로 빌렸던 도쿄 대학 혼고 캠퍼스 내의 고텐시타 그라운드가 울퉁불퉁한 흙으로 된 상태였음에도, 크라머는 "아무 말 없이 바로 지도를 시작해 주었다"고 한다.[15]
당시 일본에는 각 지역별, 대학별 코치술밖에 없었지만, 크라머는 세계에 통용되는 코치학을 가져왔다. 정확한 패스, 트래핑 등의 방법에서, 인스텝 킥과 인사이드 킥을 차는 방법 등 육성에 필요한 기초를 가르쳤다.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은 시합이다. 그것을 위해 실전 연습이 필요하며, 그것을 할 수 있는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부분이 있으므로, 기본을 하자"고 말하며 기본 동작, 응용 동작, 실전을 섞어가면서 개인에 맞는 트레이닝도 설정했다.[15]
크라머는 스스로 모범이 되는 플레이를 보여주며 실기 지도를 했다. 초보적인 연습의 반복에 대해 비판도 있었지만, 그는 방침을 바꾸지 않았다. 당시 크라머의 제자로는 가마모토 구니시게, 스기야마 류이치 등이 있었다.[16]
당시 일본에서는 구하기 어려웠던 테이핑을 오카노가 입수한 큰 반창고로 대신하거나, 크라머가 직접 선수용 약을 조제하기도 했다. 연습은 엄격했지만, 선수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선수들은 크라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후에 멕시코 올림픽 대표팀 주장이 된 야에가시 시게오는 오카노에게 "오카노 씨, 저는 크라머를 위해 싸울 겁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크라머는 오카노, 그리고 크라머의 친어머니와 평생 형제와 같은 교류를 이어갔다.[17]
2. 3. 일본 축구의 아버지
"축구 교수"와 나폴레옹 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2] 크라머는 선수 시절 빅토리아 도르트문트와 SG Germania Wiesbaden|게르마니아 비스바덴영어 등에서 활약했지만, 무릎 부상으로 1951년에 은퇴했다.[10] 지도자 경력을 시작하며 서독 유스 대표팀 감독을 맡아 프란츠 베켄바워를 발탁하여 지도하기도 했다.[11]1960년,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 축구 협회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을 지도하기 위해 크라머를 임시 감독으로 초빙했다.[12] 이는 나리타 주지로의 중개와 노즈 겐 회장의 결정으로 이루어졌다.[13][14]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크라머가 이끄는 일본 대표팀은 아르헨티나를 꺾는 등 8강에 진출했다. 1965년 일본 축구 리그 발족 등, 크라머는 일본 축구 발전에 5가지 제언을 하였고, 이는 나가누마 겐등에 의해 실행에 옮겨졌다. 크라머의 지도를 받은 선수와 코치들은 멕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했고, 크라머는 이를 매우 기뻐했다.[23]
1967년 FIFA 공인 트레이너가 된 크라머는 1969년 일본에서 FIFA·AFC·JFA 공동 주최 "코칭 스쿨"을 지도했다. 2005년에는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8]
2. 3. 1. 일본 축구에 남긴 유산
1960년,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 축구 협회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을 지도하기 위해 데트마어 크라머를 임시 감독으로 초빙했다.[12] 대표팀 강화를 위해 외국인 감독 초빙을 검토하던 중, 나리타 주지로의 중개와 노즈 겐 회장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인선이었다.[13][14]하네다 공항에서 크라머를 맞이한 오카노 슌이치로는 크라머를 일본 축구 협회가 마련한 숙소인 야마노우에 호텔로 안내하려 했다. 그러나 크라머는 "일본 대표팀 선수들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오카노가 혼고에 있는 "수학여행 학생들이 사용하는 여관"이라고 설명하자, "바로 그곳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오카노는 선수들이 이불에서 자고, 아침 식사는 밥, 생계란, 소금에 절인 연어, 된장국, 점심은 덮밥 등이라고 설명하며 "갑자기 일본 생활에 적응하는 것은 무리다"라고 설득했지만, 크라머는 "선수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지 않고 어떻게 선수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내일부터 그곳으로 가게 해 달라"고 완강하게 말했다. 또한 당시 연습장으로 빌렸던 도쿄 대학 혼고 캠퍼스 내 고텐시타 그라운드가 울퉁불퉁한 흙바닥이었음에도 "아무 말 없이 바로 지도를 시작해 주었다"고 한다.[15]
이전까지 일본에는 각 지역별, 대학별 코치술밖에 없었다. 크라머는 세계에 통용되는 코치학을 가져와 정확한 패스, 트래핑 방법, 인스텝 킥과 인사이드 킥을 차는 방법 등 육성에 필요한 기초를 가르쳤다.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은 시합이다. 그것을 위해 실전 연습이 필요하며,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부분이 있으므로 기본을 하자"고 말하며 기본 동작, 응용 동작, 실전을 섞어가면서 개인별 맞춤 훈련도 설정했다.[15]
크라머는 스스로 모범을 보이며 실기 지도를 했다. 초보적인 연습 반복에 대한 비판도 있었지만, 방침을 바꾸지 않았다. 당시 크라머의 제자로는 가마모토 구니시게, 스기야마 류이치 등이 있었다.[16]
당시 일본에서는 알려지지 않았고 전용 도구도 없었던 테이핑을 오카노가 입수한 큰 반창고로 대신하거나, 스스로 선수용 약을 조제하기도 했다. 연습은 엄격했지만, 선수를 소중히 여겼기에 선수들은 크라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훗날 멕시코 올림픽 대표팀 주장이 된 야에가시 시게오는 오카노에게 "오카노 씨, 저는 크라머를 위해 싸울 겁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크라머는 오카노와 그의 친어머니를 포함하여 평생 형제와 같은 교류를 이어갔다.[17]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크라머가 이끄는 일본 대표팀은 아르헨티나 대표를 꺾는 등 8강에 진출했다. 올림픽이 끝난 후, 임기를 마친 크라머는 귀국에 앞서 5가지 제언을 남겼다.[18]
- 강한 팀끼리 싸우는 리그전 창설
- 코치 제도[19] 확립
- 잔디 구장을 많이 만들고 유지할 것
- 국제 시합 경험을 많이 쌓을 것. 대표팀은 1년에 한 번 유럽 원정을 가서 강호와 대결할 것
- 고등학교부터 일본 대표팀까지, 각각 2명의 코치를 둘 것
1965년 일본 축구 리그 발족 등, 크라머의 제언은 나가누마 겐 등에 의해 모두 실행에 옮겨졌다.[21] 크라머는 이후에도 가마모토의 독일 유학을 실현시키는 등 일본 축구에 기여했다. 크라머의 지도를 받은 선수·코치를 중심으로 구성된 나가누마 겐 감독의 일본 대표팀은 멕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22] 이 경기를 관전하던 크라머는 일본 대표팀의 활약을 기뻐했다고 한다.[23]
1967년 FIFA 공인 트레이너가 되었고, 1969년 일본에서 개최된 FIFA·AFC·JFA 공동 주최 "코칭 스쿨"을 지도했다.
1975년부터 1976년, FC 바이에른 뮌헨을 이끌고 UEFA 챔피언스컵에서 우승했을 때, 크라머는 인생 최고의 순간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최고의 순간은 일본이 멕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했을 때입니다. 저는 그렇게 죽을 힘을 다해 싸우는 선수들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24]
2005년, 크라머는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 제1회 수상자가 되었다.[8]
2. 4. 서독 대표팀 코치와 FIFA
1964년 1월 1일, 크라머는 서독으로 복귀하여 헬무트 쇤 서독 국가대표 감독의 수석 코치가 되었다.[2] 이 시기에 서독은 1966년 FIFA 월드컵에 참여하였고, 잉글랜드와의 결승에서 석패하였다.[2] 그의 재능은 FIFA(국제 축구 연맹)의 인정을 받아 1967년에서 1974년까지 전 세계를 돌며 활동했는데, 이 시기에 크라머는 1969년 일본에서 FIFA 감독 훈련을 시행하여 일본의 감독 잠재력을 가진 자들을 발굴하였다.[2] 이후, 1974년 8월 1일, 크라머는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사령탑에 올랐다.[2]2. 5. FC 바이에른 뮌헨 감독 시절
1975년 1월 16일, 크라머는 독일의 명문 클럽인 FC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초기에 뮌헨에서 소극적인 관리 스타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2] 그의 경질설이 돌았을 때, 뮌헨의 주장이었던 프란츠 베켄바워는 크라머를 옹호하며 그에게 신뢰를 보냈다. 베켄바워는 과거 크라머의 도움으로 어려운 시기를 극복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2]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크라머는 뮌헨을 이끌고 유러피언컵에서 1975년과 1976년 2회 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또한 1976년에는 인터콘티넨털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 최고의 클럽으로 인정받았다.[2]
그러나 1975-76 분데스리가에서 바이에른 뮌헨은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리그 타이틀을 방어하는 데 실패했다. 이로 인해 크라머는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2]
2. 5. 1. 바이에른 뮌헨 이후
크라머는 FC 바이에른 뮌헨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여러 클럽과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수행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1977년부터 1978년까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감독을 맡았으나, 바이에른 뮌헨 시절만큼의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프랑크푸르트와 바이에른 뮌헨은 크라머와 줄라 로란트 감독을 맞바꾸는 거래를 했지만, 두 팀 모두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결국 크라머는 1978년 6월 30일 프랑크푸르트와 결별했다.[2]이후 크라머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이티하드(1978-1981), 그리스의 아리스 테살로니키(1981-1982) 감독을 거쳐 1982-83 시즌에 바이어 04 레버쿠젠 감독으로 분데스리가에 복귀했다. 레버쿠젠에서 두 번째 시즌에 팀을 리그 9위에 올려놓았으나, 그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세 번째 시즌 후 해고되었다.[2]
이후 크라머는 말레이시아 축구 국가대표팀(1984-1985),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1991-1992), 태국 축구 국가대표팀(1997) 등 다양한 국가의 대표팀 감독직을 역임했다. 2002년에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으며, 2005년에는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2]
크라머의 감독 경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기간 | 국가 | 팀 |
---|---|---|
1977-1978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 |
1978-1981 | 알 이티하드 | |
1981-1982 | 아리스 테살로니키 | |
1982-1985 | 바이어 04 레버쿠젠 | |
1984-1985 | 말레이시아 | |
1991-1992 | U-23 대한민국 대표팀 | |
1997 | 태국 |
2. 6. 대한민국 U-23 대표팀 기술고문
데트마어 크라머는 1991년부터 1992년 2월까지 대한민국 U-23 국가대표팀의 기술고문을 맡아 28년 만의 올림픽 본선 자력 진출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국내 축구계와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해 1992년 하계 올림픽 본선을 치르지 못하고 대한민국을 떠나야 했다.2. 7. 기타 경력
1991년부터 1992년 2월까지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의 기술고문을 맡아 28년 만의 올림픽 본선 자력 진출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국내 축구계와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해 1992년 하계 올림픽 본선을 치르지 못하고 대한민국을 떠나야 했다.[2] 2002년에 축구계에서 공식 은퇴하였고, 2005년에는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2]3. 은퇴 이후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일본 축구 대표팀을 지도하여 아르헨티나를 꺾는 등 8강 진출을 이끌었다. 올림픽이 끝난 후 일본 축구 발전을 위한 5가지 제언을 남겼다.[18]
이 제언들은 1965년 일본 축구 리그 발족 등 나가누마 겐 등에 의해 실행되었다.[21] 이후에도 가마모토 구니시게의 독일 유학을 지원하는 등 일본 축구에 지속적으로 기여했다. 크라머의 지도를 받은 선수와 코치들은 멕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22]
1967년 FIFA 공인 트레이너 자격을 얻었으며, 1969년 일본에서 열린 FIFA·아시아 축구 연맹(AFC)·JFA 공동 주최 "코칭 스쿨"을 지도했다.
FC 바이에른 뮌헨 감독 시절(1975-1976) UEFA 챔피언스컵 우승을 이끌었지만, 인생 최고의 순간은 일본 대표팀이 멕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을 때라고 회고했다.[24]
2005년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 첫 회 수상자로 선정되었고,[8] 2011년 독일 축구 연맹(DFB) 명예상을 받았다.
2015년 9월 17일 바이에른 주 Reit im Winkl|라이트 임 빈클영어에서 별세했다.[25][26] 일본 프로 축구 리그(J리그)는 9월 19일과 20일에 열리는 모든 공식 경기에서 묵념을 거행했다.[9]
4. 사생활
크라머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독일 공수부대에서 선임 중위로 복무했다.[18] 그는 두 번 결혼했으며, 바이에른주의 라이트 임 빈클에서 가족과 함께 거주하다가 2015년 9월 17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국제적인 업적을 인정받아 독일에서 연방 공로 훈장을 수여받았고, 두 개의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1년에는 히로히토 일왕으로부터 일본에 기여한 공로로 직접 서보장을 수여받았다.[18] 또한 미국 원주민 수족과 모히칸족 부족의 명예 족장이었다.[18]
크라머는 "말의 마법사"라고도 불리며, 수많은 명언을 남겼다.[18]
5. 수상 내역
수상 내역 | |
---|---|
مصر|이집트ar | |
FC 바이에른 뮌헨 | |
개인 |
5. 1. 클럽
클럽 | 대회 | 우승 |
---|---|---|
FC 바이에른 뮌헨 | 유러피언컵 | 1974-75, 1975-76 |
인터컨티넨탈컵 | 1976 |
5. 2. 국가대표팀
مصر|이집트ar- 팔레스타인 네이션스컵 1972
- 아프리카 게임 동메달: 1973
-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3위: 1974
5. 3. 개인
수상 내역 |
---|
프랑스 풋볼 선정 역대 최고 감독 40인 (2019)[1] |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1] |
6. 감독 통계
팀 | 시작 | 종료 | 기록 | |||||
---|---|---|---|---|---|---|---|---|
경기 | 승 | 무 | 패 | 승률 | ||||
헤르타 BSC | 1974년 7월 1일 | 1974년 7월 9일 | 0 | 0 | 0 | 0 | — | |
미국 | 1974년 8월 1일 | 1975년 1월 16일 | 2 | 0 | 0 | 2 | 0.00 | |
바이에른 뮌헨 | 1975년 1월 16일 | 1977년 11월 27일 | 136 | 63 | 31 | 42 | 46.32 |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 1977년 12월 9일 | 1978년 6월 30일 | 23 | 11 | 3 | 9 | 47.83 | |
사우디 아라비아 | 1978년 9월 3일 | 1980년 12월 1일 | 17 | 6 | 6 | 5 | 35.29 | |
알 이티하드 | 1978년 9월 3일 | 1980년 12월 1일 | ||||||
아리스 테살로니키 | 1980년 12월 1일 | 1981년 5월 30일 | ||||||
바이어 레버쿠젠 | | | 108 | 36 | 30 | 42 | 33.33 | ||
합계 | 286 | 116 | 70 | 100 | 40.56 |
7. 어록
크라머는 "말의 마법사"라고도 불리며, 수많은 명언을 남겼다.[18]
한편, 크라머는 입이 상당히 거칠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코치 겸 통역을 담당했던 오카노 슌이치로는 크라머의 욕설을 의역하는 데 고생했다고 한다. 직역하면 선수들이 충격을 받아 울음을 터뜨릴 정도였기 때문이다. 오카노는 회장 시절에 크라머처럼 성격이 급하고 직설적인 필립 트루시에 감독의 통역을 맡게 된 플로랑 다바디에게 "트루시에의 거친 말은 의역해서 전달하고, 어려우면 번역하지 않아도 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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