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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교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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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교동계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 세력을 지칭한다. 군부 정권 시절 김대중의 비서들과 재야 출신 정치인들을 의미했으며, 김대중이 창당한 정당에 참여한 측근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동교동계는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함께 한국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김대중과 김영삼의 잦은 대립과 협력을 통해 민주화 운동과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김대중의 정계 복귀 이후 새정치국민회의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나,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대북송금 특검과 노무현 탄핵 사태를 거치면서 분열되었고, 이후에도 정치적 노선 차이로 인해 다양한 행보를 보였다.

2. 역사

동교동계는 김대중의 자택이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동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따르던 상도동계와 함께 대한민국의 정치 계파를 설명할 때 많이 쓰인다.[1] 1991년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과 이기택의 민주당이 합당했을 때, 잠깐 동안 '''신민계'''로 불리기도 했다.[2]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는 대한민국 정치사에 여러 영향을 미쳤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1968년 신민당 원내 총무 경선, 1970년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등 네 차례에 걸쳐 맞대결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두 계파는 때로는 힘을 합치기도 하고, 때로는 반목하기도 하면서 애증의 관계를 유지했다.[3][2]

2. 1. 민주화 운동과 야당 시절

군부 정권 시절 동교동계는 김대중의 동교동 집에 드나들던 비서들이나 재야 출신 정치인들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김상현, 권노갑, 김옥두, 한화갑, 박지원, 남궁진, 설훈 등이 동교동 비서 출신 정치인들이다.[1]

2. 2.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진 뒤, 통일민주당에서는 김대중의 동교동계와 김영삼의 상도동계가 최종 대선 후보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단일화 방식이 계속 합의되지 않아 계파간 분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1987년 10월 25일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시국토론회에서 김영삼은 학생들의 야유를 받으며 교정을 떠난 반면, 김대중은 학생들의 환호와 더불어 목마를 태워져 교내를 행진하는 정반대의 환영 분위기가 형성되는 일이 터지며 단일화 합의는 완전히 무산되었다. 김대중은 다음 날 동교동계와 함께 통일민주당을 탈당,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독자적으로 대선에 출마하였다. 동교동계 인사들은 김대중과 함께 모두 평화민주당으로 이적하였으나, 유일하게 김상현 전 의원만 통일민주당에 남아 김영삼을 지지했다.

결국 야권이 분열되면서 표가 갈리게 되었고, 13대 대선에서는 민주정의당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개표 결과 김대중서울특별시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호남에서 1위를 차지했고, 김영삼은 부산광역시경상남도에서만 1위를 차지했다.

2. 3.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와 김대중의 정계 은퇴

1990년 3당 합당으로 김영삼은 민주자유당 창당을 주도, 보수 정당으로 편입되었다. 원래 노태우는 김대중에게 먼저 3당 합당 제의를 하였으나 김대중은 "국민이 만든 여소야대가 불편하다고 마음대로 바꾸려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크게 후퇴시키는 일이고 정치 윤리를 망치는 일이다"라고 말하며 제의를 거절하였다.[1] 3당 합당에 반대한 노무현, 김정길, 김상현 등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한 뒤 꼬마민주당을 창당하였고, 김대중은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꼬마민주당과 합당하여 민주당을 창당하였다.[1] 김대중은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한 김영삼과 이 선거에서 두 번째로 맞붙었으나 패배했고, 정계 은퇴를 선언한 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연수를 떠났다.[1]

김대중이 정계 은퇴를 선언한 뒤 민주당의 당권은 이기택이 차지하게 되었고 동교동계 인사들은 민주당에 남았다.[1]

2. 4. 김대중의 정계 복귀, 새정치국민회의 창당과 DJP 연합

김대중은 1995년 7월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귀국하여, 민주당을 탈당한 뒤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였다. 김대중은 케임브릿지 대학교에서 연수 과정을 밟으며 마거릿 대처 등 영국의 신보수주의 정치인들을 연구하였고, 중도정치세력의 건설을 모색했다. 동교동계의 일원들 중 노무현 등은 김대중의 정계복귀를 비판하며 통합민주당에 잔류하였으나,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민주당을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였다. 통합민주당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과 합당, 한나라당으로 당명을 개정했다.[1]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은 자유민주연합김종필 총재와 박태준 전 총리와 연합하여 DJP연합을 결성하였고, 마침내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김대중이 당선된 뒤 동교동계는 새정치국민회의 계파의 주류가 되었고, 상당수의 동교동계 인사들이 국민의 정부 내각에 등용되었다. 2000년 1월 김대중은 새천년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여 세력 확장에 나섰다.[1]

2. 5.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와 노무현의 당선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민의 정부는 레임덕이 왔다. 야당인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가 높은 지지율로 사실상 대권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민주당 내에는 한나라당과 대적할 만한 대권주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동교동계는 1997년 대선에서 국민신당 후보로 출마하여 3위를 기록했다가 민주당에 합류한 이인제 의원을 대선 후보로 내세웠으나, 국민 경선 과정에서 노무현이 급부상하게 되었고 결국 민주당의 최종 대선 후보는 노무현이 확정되었다.[1] 호남 지역의 색이 강했던 새천년민주당에서 영남 출신의 노무현은 이질적인 인물로 여겨졌고, 또한 노무현이 3김 정치 청산을 내세우며 기존 동교동계의 권위에 대적하는 행보를 이어가며 동교동계와 노무현의 갈등이 불거졌다.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노무현은 영남권 후보를 한 명이라도 당선시키지 못할 경우 후보 재신임을 묻는다고 통지했고, 그 결과 영남권 후보 당선에 실패하자 노무현은 약속대로 재신임을 물었다. 5일 뒤인 6월 18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일단 노무현에 대한 재신임은 의결되었으나, 뒤이어 열린 8.8 재보선에서도 민주당이 참패하자 동교동계는 노무현의 후보 사퇴 및 거취 발표를 주문했다. 같은 해 9월 월드컵 4강 신화 열풍을 타고 정몽준이 출마를 선언하자, 동교동계 인사들 일부는 정몽준으로의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며 후보 단일화 협의회(후단협)를 결성,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여 집단 행동에 나섰다. 한화갑 대표를 비롯한 동교동계 당권 인사들은 이러한 후단협의 집단행동을 사실상 방관하였다. 11월 25일 최종 결선 투표 끝에 노무현이 단일화 후보로 확정된 이후 후단협에 참여했던 동교동계 인사들은 모두 민주당으로 복당하였으나, 일부는 탈당하여 한나라당과 자유민주연합으로 입당하기도 했다. 한편 동교동계가 대선 후보로 지지했으나 노무현에게 밀려 경선 후보를 사퇴한 이인제는 대선 18일을 앞두고 자유민주연합으로 이적했다.

후단협 사태가 봉합된 뒤 동교동계 인사들은 노무현의 선거운동을 지원했고, 그 결과 노무현이 이회창을 누르고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1]

2. 6. 대북송금 특검, 열린우리당 분열과 노무현 탄핵

참여정부 출범 이후 한나라당이 발의한 대북송금특검 법안에 노무현 대통령이 서명하면서 동교동계는 집단적으로 반발했다. 대북송금특검 법안 통과로 박지원 등 국민의 정부 인사들이 구속 수감되면서 동교동계와 친노 세력 간 갈등이 심화되었다.[4]

2003년 9월, 친노 인사 40여 명은 새천년민주당을 탈당, 개혁국민정당 세력 및 한나라당 탈당파 '독수리 5형제'와 함께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노무현은 2003년 9월 29일 새천년민주당을 공식 탈당했다.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의 총선 관련 발언을 이유로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은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조순형 대표를 비롯한 새천년민주당 내 동교동계 의원들은 탄핵소추안 발의에 동참하고 찬성표를 던졌다. (이낙연 의원은 탄핵안 발의에는 참여했으나 본 투표에서는 반대표를 던졌다.)[5] 탄핵소추안은 가결되었으나, 새천년민주당은 역풍에 직면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탄핵 사태에 우려를 표명했다.[6]

추미애 선대위원장의 '삼보일배'에도 불구하고, 새천년민주당은 17대 총선에서 9석을 얻는 데 그쳤고, 호남 지역 동교동계 의원들 상당수가 낙선했다. 이로써 정치집단으로서의 동교동계는 사실상 소멸하였다.

2. 7. 참여정부 이후와 동교동계의 분열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6년, 대북송금 특검으로 구속되었던 박지원 등 동교동계 인사들에 대한 특별사면이 단행되는 등 동교동계와의 화해가 이루어졌다.[2]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 서거 이후 동교동계는 분열을 겪었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광옥, 김경재, 한화갑 등 일부 동교동계 인사들은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2] 김대중의 비서실장을 지낸 한광옥은 박근혜 대선캠프에 합류했고, 박근혜 당선 후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김경재 역시 박근혜 대선캠프에 들어가 대통령 홍보특보를 지냈다. 한화갑은 박근혜가 호남 인사를 많이 기용한다고 하여 지지했으나, 박근혜가 취임 후 약속을 어기자 비판으로 돌아섰다. 권노갑, 박지원 등 동교동계 주류는 이러한 행위를 정치적 배신이라고 비판했다.[2]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동교동계는 다시 분열했다. 문재인박지원의 충돌로 '반문재인' 바람이 불었고, 안철수국민의당을 창당하자 권노갑, 박지원 등 동교동계 주류가 대거 합류했다.[2] 더불어민주당에 남은 김홍걸, 설훈, 김한정 등은 이들을 비판했지만, 국민의당은 호남 지역구를 석권했다.[2] 그러나 문희상, 설훈, 이석현, 김한정, 이훈 등 더불어민주당에 남거나 문재인 후보를 도운 동교동계 인사들도 있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호남 민심이 문재인을 선택하면서 동교동계 주류의 선택은 실패로 돌아갔다. 2018년 국민의당이 바른정당과의 통합을 추진하며 호남계와 갈등을 겪었고, 동교동계는 민주평화당 창당에 참여했다.[2][7]

참조

[1] 웹인용 역사속으로 …④-1`동교동계`의 분화와 동교동사람들 http://www.siminsori[...] 2023-04-06
[2] 뉴스 ‘정치 종가’ 동교동계의 패배…국민의당 ‘탈당 카드’ 속내는? http://www.hani.co.k[...] 2017-05-26
[3] 뉴스 상도동계·동교동계 http://www.kookje.co[...] 2017-04-20
[4] 문서 김부겸, 김영춘, 이부영, 이우재, 안영근 의원
[5] 뉴스 탄핵반대 2명은 이낙연ㆍ김종호의원 https://www.hankyung[...] 한국경제 2004-03-18
[6] 뉴스 DJ "매우 심각한 상황" , YS "사필귀정" https://www.pressian[...] 프레시안 2004-03-12
[7] 뉴스 국민의당, 지방선거 선전 다짐…"내분 부끄럽다" 자성론도 http://www.yonhapnew[...] 2018-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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