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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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Dionysius Exiguus)는 6세기에 활동한 수도사로, 서기(Anno Domini, AD) 연도를 고안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현재 루마니아 도브루자 지역인 소스키타이 출신으로,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능통했다. 그는 또한 그리스어 원전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힘썼으며, 교회법 연구에도 업적을 남겼다. 디오니시우스는 기독교 박해를 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원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준으로 하는 서기 연도를 고안하여, 부활절 계산표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그의 부활절 계산표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부활절 날짜 논쟁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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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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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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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 성인 |
출생 | 약 470년 |
사망 | 약 544년 (73세 또는 74세) |
축일 | 9월 1일 (비잔틴 전례력의 첫날) |
숭배 | 동방 정교회 |
출생지 | 스키티아 미노르, 동로마 제국 |
사망지 | 로마, 동로마 제국 |
시성일 | 2008년 7월 8일 |
시성 장소 | 부쿠레슈티 |
시성 주관 | 루마니아 정교회 성 시노드 |
관련 인물 | 디오니시오스 소 디오니시우스 작은 디오니시우스 |
주요 업적 | |
업적 | 기독교 시대 계산 부활절 날짜 계산 교회법 번역 수학 및 천문학 연구 |
기타 | |
별칭 |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 (Dionysius Exiguus, 영어: Dennis the Small, the Dwarf, the Little, or the Short) |
특징 | 겸손 |
2. 생애와 배경
카시오도루스에 따르면, 디오니시우스는 "스키타이" 출신이었지만 성격은 진정한 로마인이었고, 그리스어와 라틴어 모두에 매우 능통했다.[3] 그는 또한 철저한 가톨릭 신자이자 뛰어난 성서 학자였다.[4] "스키타이"라는 모호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용어의 사용은 당대 사람들이 그를 분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그에 대한 개인적인 정보 부족이나 그의 고향인 소스키타이에 대한 지식 부족 때문일 수 있다.[5] 6세기에 이르러 "스키타이"라는 용어는 소스키타이의 주민을 의미하거나, 단순히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로마 세계의 북동쪽 출신을 의미할 수 있었다. 이 용어는 명확한 민족적 속성이 없는 광범위한 의미를 지녔다.[5] 디오니시우스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스키타이 수도승" 요한네스 막센티우스의 경우에도, 두 수도승 모두 로마를 기준으로 한 지리적 기원 때문에 "스키타이"로 불렸다. 마치 리에즈의 파우스투스가 "갈리아"인 것과 같다.[5]
단일 시리아 자료에 근거한 의심스러운 주장으로, 디오니시우스와 친척 관계였던 것으로 보이는 동로마의 반란 장군 비탈리아누스가 고트족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추가적인 증거 없이 디오니시우스를 포함한 모든 스키타이 수도승을 "고트족"으로 규정하는 근거가 되었다.[5] 그리스어와 라틴어 자료에서 비탈리아누스는 때때로 같은 모호한 용어인 "스키타이"로 불린다. 그는 "훈족", "고트족", "스키타이", "베시족" 병사들을 지휘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이 정보는 장군의 군사적 활동에 대해 더 많이 말해줄 뿐 그의 기원을 명확히 하는 데는 거의 관련이 없다. 게다가 스키타이 수도승 중 누구도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아리우스파 고트족과 혈연이나 정신적 유대감을 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디오니시우스의 고트족 기원은 의심스럽다.[5] 비탈리아누스는 소스키타이 또는 모이시아에서 태어난, 라틴화된 현지 트라키아인 출신이었던 것 같다. 그의 아버지는 라틴식 이름인 파트리시오루스였고, 두 아들은 트라키아식 이름을, 한 아들은 고트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5] 스키타이 수도승들이 번성했던 시대에, 오랫동안 라틴화되었던 다뉴브 강 하류의 속주들은 이미 라틴어를 사용하는 신학자들을 배출하는 중심지였다. 디오니시우스 또한 비탈리아누스의 가족과 친척 관계였던 것처럼, 그리고 다른 스키타이 수도승들과 그 시대의 다른 트라코-로마 인물들( 유스티누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등)과 마찬가지로 현지 트라코-로마 출신(로마화된 게타이-다키아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5]
2. 1. 출신과 초기 생애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는 소스키타이(현재의 루마니아 도브루자 지역)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5] 당대 기록에서는 '스키타이인'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민족적 정체성보다는 지리적 출신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된다.[5] 6세기에 이르러 "스키타이"라는 용어는 소스키타이의 주민을 의미하거나, 단순히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로마 세계의 북동쪽 출신을 의미할 수 있었으며, 명확한 민족적 속성이 없는 광범위한 의미를 지녔다.[5]그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모두에 능통했으며,[3] 이는 당시 동로마 제국 지식인 사회에서 활동하는 데 필수적인 소양이었다. 그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카시오도루스는 디오니시우스를 "성품은 진정한 로마인이자 완벽한 가톨릭 신자"라고 묘사했는데,[3] 이는 그가 동로마 제국의 문화와 가톨릭 신앙에 깊이 헌신했음을 보여준다.
비탈리아누스와의 친족 관계 및 고트족 출신이라는 주장은 확실한 근거가 부족하며,[5] 당시 "스키타이"라는 용어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고려할 때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비탈리아누스는 트라키아인출신 이었던것 같다.[5]
2. 2. 종교 및 학문 활동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는 그리스어 원전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힘썼다. 대표적인 번역 작품으로는 "성 파코미우스의 전기", 아르메니아인들을 위한 "콘스탄티노플의 성 프로클루스의 교훈", 뉘사의 성 그레고리의 "인간 창조에 관하여(De opificio hominis)", 그리고 아르키만드리트 마르켈로스가 저술한 "세례자 요한의 머리 발견에 대한 역사"가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키릴로스의 네스토리우스를 반박하는 공의회 서한과 디오니시우스에게 오랫동안 귀속되었던 다른 몇몇 작품들은 현재 더 이전의 것으로 인정되고 마리우스 메르카토르(Marius Mercator)의 작품으로 분류된다.디오니시우스는 교회법 연구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여러 법집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 두 가지 판본의 공의회 법령 모음:
- * '''전 교회 교회법전(Codex canonum Ecclesiæ Universæ)''':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동방 공의회의 교령들만을 포함하며, 니케아(325년)부터 칼케돈(451년)까지의 네 차례의 보편 공의회의 교령들도 포함한다.
- * '''교회 법령전(Codex canonum ecclesiasticarum)''': 라틴어로만 되어 있으며, 내용은 일반적으로 다른 것과 일치하지만 에페소 공의회(431년)는 빠져 있고, 소위 "사도들의 교령"과 사르디카 공의회의 교령, 그리고 카르타고(419년) 아프리카 공의회의 138개 교령이 포함되어 있다.
- * 호르미스다스 교황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그리스어 교령의 또 다른 이중 언어판. 서문만이 보존되어 있다.
- 시리키우스에서 아나스타시우스 2세(384~498)까지의 교황칙서 모음(''Collectio decretorum Pontificum Romanorum'')
친구이자 동료였던 카시오도루스에 따르면, 디오니시우스는 출신은 스키타이(Scythian)였지만, 성품은 진정한 로마인이자 완벽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그리스어와 라틴어 두 언어와 성경에 매우 정통했다. "출신은 스키타이였지만"이라는 애매한 표현은 디오니시우스와 동시대 사람들이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그의 고향인 스키타이에 대해서도 몰랐기 때문에 그의 출신을 판단하기 어려웠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3. 서기(Anno Domini) 연대 고안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Dionysius Exiguus)는 서기 연표를 고안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는 그레고리력과 율리우스력 모두의 연도를 표기하는 데 사용된다. 그는 자신의 부활절 표에서 여러 부활절을 식별하기 위해 이를 사용했지만, 어떤 역사적 사건의 연대를 표기하는 데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가 그의 표를 고안했을 때, 율리우스력 연도는 그 해에 재임한 집정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는 스스로 "현재 연도"가 "프로부스 유니오르 집정관 시대"라고 언급했으며, 이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이후 525년"이라고 언급했다. 그가 어떻게 그 숫자에 도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적용한 시스템에 대한 증거는 있다. 그는 기독교인을 박해한 폭군의 기억을 계속하고 싶지 않아서 이전 부활절 표에서 사용되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연대기를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연도 표기 시스템을 고안했다.[6] 윤년이 4로 정확히 나뉘도록 숫자를 배열했고, 그의 새로운 표가 그의 새로운 시대 이후 한 "빅토리아 주기"(아래 참조), 즉 532년 후에 시작되도록 했다는 제안이 있다.
디오니시우스가 그리스도의 강생에 기반한 달력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연대기를 대체하려는 욕망은 사람들이 세상의 즉각적인 종말을 믿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는 증거가 있다. 당시 어떤 사람들은 재림과 세상의 종말이 예수의 탄생 후 500년에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현재의 세계 창조 연대기는 그리스어 70인역/칠십인역grc의 정보를 바탕으로 세계 창조와 함께 시작되었다. 세계 창조 연대기에서 예수는 5500년(또는 세계 창조 후 5500년)에 태어났고, 세계 창조 연대기 6000년은 세상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믿었다.[6] 따라서 세계 창조 연대기 6000년(서기 500년경)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과 동일시되었다.
3. 1. 서기 연대 고안의 배경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는 서기 연표를 고안한 인물로, 이는 그레고리력과 율리우스력 모두의 연도를 표기하는 데 사용된다.[6] 디오니시우스 이전에는 로마 제국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즉위 연도를 기준으로 하는 디오클레티아누스 기원(순교자 연대기)이 사용되었다.[6] 그러나 디오니시우스는 기독교인을 박해한 황제의 이름을 딴 기원을 사용하는 것을 꺼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준으로 하는 새로운 기원(서기)을 고안하게 되었다. 그가 어떻게 그 숫자에 도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적용한 시스템에 대한 증거는 있다.[6]당시 율리우스력 연도는 그 해에 재임한 집정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는데, 디오니시우스는 "현재 연도"가 "프로부스 유니오르 집정관 시대"이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이후 525년"이라고 언급했다.[6]
디오니시우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 연대기를 그리스도의 강생에 기반한 달력으로 대체하려 한 것은, 당시 만연했던 종말론적 신앙, 즉 세상의 종말이 예수 탄생 후 500년에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불식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6] 당시 어떤 사람들은 재림과 세상의 종말이 예수의 탄생 후 500년에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6] 현재의 세계 창조 연대기는 그리스어 칠십인역의 정보를 바탕으로 세계 창조와 함께 시작되었는데, 이 연대기에서 예수는 5500년에 태어났고, 세계 창조 연대기 6000년은 세상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믿었다.[6] 따라서 세계 창조 연대기 6000년(서기 500년경)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과 동일시되었다.[6]
3. 2. 서기 연대 계산 방법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는 서기 연표를 고안한 인물로, 그레고리력과 율리우스력의 연도 표기에 사용된다.[6] 그는 부활절 표에서 서기 연대를 사용했다.[6] 디오니시우스는 "현재 연도"를 "프로부스 유니오르 집정관 시대"이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이후 525년"이라고 언급했다.[6] 그가 이 숫자를 계산한 구체적인 방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적용한 시스템에 대한 증거는 남아있다.[6]디오니시우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 연대기를 대체하여 새로운 연도 표기 시스템을 고안한 이유는, 기독교인을 박해한 폭군의 기억을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그가 세상의 종말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막기 위해 새로운 달력을 고안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당시 일부 사람들은 재림과 세상의 종말이 예수 탄생 후 500년에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칠십인역 정보를 바탕으로 한 세계 창조 연대기에 따르면, 예수는 세계 창조 후 5500년에 태어났으며, 세계 창조 연대기 6000년이 세상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여겨졌다. 따라서 세계 창조 연대기 6000년(서기 500년경)은 그리스도의 재림 및 세상의 종말과 동일시되었다.
3. 3. 서기 연대의 확산과 영향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가 고안한 서기 연대는 그레고리력과 율리우스력 모두의 연도를 표기하는 데 사용된다.[6] 그는 자신의 부활절 표에서 여러 부활절을 식별하기 위해 서기 연대를 사용했지만, 역사적 사건의 연대를 표기하는 데는 사용하지 않았다.[6] 디오니시우스는 기독교인을 박해한 폭군의 기억을 계속하고 싶지 않아서 디오클레티아누스 연대기를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연도 표기 시스템을 고안했다.[6] 당시 어떤 사람들은 재림과 세상의 종말이 예수의 탄생 후 500년에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70인역/칠십인역grc의 정보를 바탕으로 한 세계 창조 연대기에서 예수는 5500년에 태어났고, 세계 창조 연대기 6000년은 세상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믿었다.[6]4. 부활절 계산표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는 525년 교황 요한 1세의 요청으로 95년 후의 부활절 날짜(532년~626년)를 계산한 표와 계산 방법("argumenta")을 작성했다. 이는 당시 사용 중이던 아키텐의 빅토리우스의 부활절 계산표에 오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빅토리우스의 표는 526년 부활절 날짜를 음력 22일인 4월 19일로 표시했고, 482년에는 그리스 정교 부활절 날짜를 4월 24일 토요일로 잘못 표기하기도 했다. 디오니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부활절 계산 방식을 따랐으며, 이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서방 교회에 소개했다.
디오니시우스는 로마에서 사용하던 아키텐의 빅토리우스의 표를 무시하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작성된 표를 확장하여 사용했다. 이 표는 알렉산드리아의 키릴 주교의 부하가 444년 작성한 것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연도를 사용했다.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의 부활절 계산표는 라오디케아의 아나톨리우스가 고안한 메톤 주기를 율리우스력에 적용한 19년 음력 주기를 기반으로 한다.
디오니시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 연도 대신, 그리스도의 강림 이후 연도를 사용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폭군의 기억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강림 후 525년이라고 표기했다.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의 부활절 계산표는 7세기 후반 로마, 영국, 아일랜드에서 채택되어 아키텐의 빅토리우스의 음력 한계(16~22)를 디오니시우스의 음력 한계(15~21)로 점진적으로 대체했다. 이로써 로마 교회와 알렉산드리아 교회 간의 부활절 날짜 논쟁이 종식되고, 두 교회는 같은 날 부활절을 지키게 되었다. 프랑크 교회는 8세기 후반 알쿠인의 지도 아래 디오니시우스의 계산표를 받아들였다.
디오니시우스의 방법은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311년 이전부터 사용되었으며, 니케아 공의회는 모든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와 로마 교회와 "동시에" 부활절을 기념하도록 하였다.
4. 1. 부활절 계산표 작성의 배경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는 525년 교황 요한 1세의 요청으로 95년 후의 부활절 날짜(532년~626년)를 계산한 표와 계산 নিয়ম("argumenta")을 작성했다. 이는 당시 사용 중이던 아키텐의 빅토리우스의 부활절 계산표에 오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빅토리우스의 표는 526년 부활절 날짜를 음력 22일인 4월 19일로 표시했고, 482년에는 그리스 정교 부활절 날짜를 4월 24일 토요일로 잘못 표기하기도 했다. 디오니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부활절 계산 방식을 따랐으며, 이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서방 교회에 소개했다.디오니시우스는 로마에서 사용하던 아키텐의 빅토리우스의 표를 무시하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작성된 표를 확장하여 사용했다. 이 표는 알렉산드리아의 키릴 주교의 부하가 444년 작성한 것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연도를 사용했다.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의 부활절 계산표는 라오디케아의 아나톨리우스가 고안한 메톤 주기를 율리우스력에 적용한 19년 음력 주기를 기반으로 한다.
디오니시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 연도 대신, 그리스도의 강림 이후 연도를 사용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폭군의 기억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강림 후 525년이라고 표기했다.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의 부활절 계산표는 7세기 후반 로마, 영국, 아일랜드에서 채택되어 아키텐의 빅토리우스의 음력 한계(16~22)를 디오니시우스의 음력 한계(15~21)로 점진적으로 대체했다. 이로써 로마 교회와 알렉산드리아 교회 간의 부활절 날짜 논쟁이 종식되고, 두 교회는 같은 날 부활절을 지키게 되었다. 프랑크 교회는 8세기 후반 알쿠인의 지도 아래 디오니시우스의 계산표를 받아들였다.
디오니시우스의 방법은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311년 이전부터 사용되었으며, 니케아 공의회는 모든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와 로마 교회와 "동시에" 부활절을 기념하도록 하였다.
4. 2. 부활절 계산 방법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는 525년에 교황 요한 1세의 요청으로 95년 후의 부활절 날짜(532년~626년)를 계산한 표와 계산 방법을 설명하는 규칙("argumenta")을 작성했다. 이는 당시 사용 중이던 빅토리우스의 표가 부활절 날짜를 부정확하게 표기한 것에 대한 개선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디오니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계산 방식을 따랐으며, 19년 주기(메톤 주기)를 사용하여 삭망(new moon)과 에팍트(epact)를 기준으로 부활절 날짜를 결정했다.디오니시우스는 로마에서 사용하던 아키텐의 빅토리우스의 표를 무시하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작성된 표를 확장하여 사용했다. 이 표는 키릴 주교의 부하가 444년에 작성한 것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를 기준으로 연도를 표기했다. 디오니시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 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해(Anni Domini Nostri Jesu Christi)"를 사용하여 새로운 표를 추가했다.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의 부활절 계산표는 라오디케아의 아나톨리우스가 고안한 메톤의 19년 음력 주기를 율리우스력에 적용한 것이다. 이 음력 주기는 알렉산드리아의 아나니우스가 제안하고 알렉산드리아의 키릴이 채택한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의 19년 음력 주기의 변형이다.
디오니시우스의 부활절 계산표는 7세기 후반 휘트비 공의회 이후 영국 교회에서 받아들여졌고, 8세기 후반에는 알쿠인의 지도 아래 프랑크 교회에서도 채택되었다. 이후 베다 베네라빌리스에 의해 더욱 발전되어 중세 시대 부활절 날짜 계산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디오니시우스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가 자신의 부활절 계산 방법을 승인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부분적으로만 사실이다. 공의회는 부활절을 전 세계에서 같은 날 기념하도록 결정했지만, 구체적인 계산 방법을 명시하지는 않았다. 디오니시우스의 방법은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었으며, 그는 이를 율리우스력으로 변환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율리우스력 부활절은 동방 정교회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4. 3. 부활절 계산표의 의의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의 부활절 계산표는 부활절 날짜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교회의 전례력을 통일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당시 사용 중이던 빅토리우스의 부활절 계산표가 526년 부활절 날짜를 음력 22일인 4월 19일로 표시하는 오류를 범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전에도 빅토리우스의 계산표는 482년 그리스 정교 부활절 날짜를 4월 24일 토요일로 잘못 표기한 적이 있었다.디오니시우스는 교황 요한 1세의 요청에 따라 525년에 95년 후(532년~626년)의 부활절 날짜를 계산한 표와 계산 방법을 설명하는 규칙("argumenta")을 작성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사용하던 아키텐의 빅토리우스의 계산표 대신 알렉산드리아의 원칙을 따르는 새로운 계산표를 제시했다. 이 표는 알렉산드리아의 키릴이 444년에 작성한 라틴어 표를 확장한 것이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로 연도를 표기했다.
디오니시우스의 계산표는 라오디케아의 아나톨리우스가 고안한 메톤 주기를 율리우스력에 적용한 19년 음력 주기를 기반으로 한다. 이 음력 주기는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의 19년 음력 주기를 변형한 것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아나니우스가 제안하고 알렉산드리아의 키릴이 채택했다.
디오니시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 247년으로 끝나는 키릴의 계산표의 마지막 19년 주기를 복사하고,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폭군의 기억을 피하기 위해 ''Anni Domini Nostri Jesu Christi''(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해)로 번호를 매긴 새로운 95년 표를 추가했다. 그는 예수의 탄생 연도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지만, 그의 계산표는 서기 1년 또는 기원전 1년을 기준으로 추론될 수 있다.
디오니시우스의 계산표는 7세기 후반 휘트비 공의회 이후 영국 교회 대부분에서 채택되었고, 8세기 후반 알쿠인의 지도 아래 프랑크 교회에서도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로마 교회와 알렉산드리아 교회 간의 부활절 날짜 논쟁이 종식되고, 두 교회 모두 동일한 표를 사용하여 부활절을 지키게 되었다.
디오니시우스는 니케아 공의회가 자신의 부활절 계산 방법을 승인했다고 밝혔지만, 이는 부분적으로만 사실이다. 공의회는 모든 교회가 같은 날 부활절을 기념하도록 권고했지만, 구체적인 계산 방법을 명시하지는 않았다. 디오니시우스의 방법은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이미 4세기 초부터 사용되었던 방식을 율리우스력으로 변환한 것이었다. 율리우스력 부활절은 3월 21일 이후 첫 번째 니산 14일(달의 14일) 다음의 일요일로 정의된다.
5. 비판적 검토
5. 1. 예수 탄생 연도 계산의 오류
5. 2. 역사적 평가와 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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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cerea în rândul sfinţilor a domnitorului Neagoe Basarab, a lui Dionisie cel Smerit si a mitropolitului Iachint de Vic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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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書
文明の誕生 メソポタミア、ローマ、そして日本へ
中央公論新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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