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도토스 1세 소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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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디오도토스 1세는 기원전 3세기경 박트리아의 사트라프였으며,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건국한 인물이다. 그는 안티오코스 2세 치세에 박트리아 사트라프가 되었으며, 제1차 시리아 전쟁에서 셀레우코스 군을 지원하기 위해 전쟁 코끼리를 보낸 기록이 있다. 디오도토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혼란을 틈타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며, 그의 정확한 독립 시기는 논쟁의 대상이다. 그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번영을 이끌었으며, 아들 디오도토스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디오도토스 1세는 자신의 초상을 담은 주화를 발행하여 왕국의 독립과 정체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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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도토스 2세는 기원전 3세기 중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왕으로, 파르티아와의 동맹을 통해 왕국 안정을 꾀했으나 에우튀데모스 1세에게 암살당해 왕조가 교체되었으며, 그의 주화는 왕국의 경제 및 정치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받는다.
디오도토스 1세 소테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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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칭호 | 바실레우스 |
계승 | 박트리아의 왕 |
재위 기간 | 기원전 255년경 – 기원전 235년경 |
왕조 | 디오도투스 |
출생 | 기원전 300년경 |
사망 | 기원전 235년경 |
사망 장소 | 박트리아 |
가족 관계 | |
자녀 | 디오도토스 2세 |
이름 | |
그리스어 | Διόδοτος Σωτήρ |
2. 배경 및 사트라피 시절
디오도토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2세(재위: 기원전 261년 - 기원전 246년) 통치 시기에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 지역의 사트라프(총독)로 임명되었다.[5] 전통적으로 아케메네스 왕조 시절부터 왕위 계승자에게 주어지던 중요한 지역인 박트리아 사트라피를 맡았다는 사실은 디오도토스가 상당한 능력을 인정받았음을 시사한다.
사트라프 재임 기간 동안 디오도토스는 지역 행정, 개발(관개 시설 확장, 공공건물 건설 등), 그리고 중앙아시아 유목민 침입에 대한 방어 문제 등에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8] 기원전 273년경 익명의 박트리아 사트라프가 제1차 시리아 전쟁에서 셀레우코스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바빌론에 전쟁 코끼리 20마리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6] 이 사트라프가 디오도토스 본인이었는지 혹은 그의 전임자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7]
기원전 246년 안티오코스 2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들인 셀레우코스 2세와 안티오코스 히에락스 사이에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하면서 셀레우코스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된 이러한 상황은 디오도토스를 비롯한 제국 동방의 여러 총독들이 독립을 모색하는 배경이 되었다.
2. 1. 셀레우코스 제국의 통치
박트리아 지역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에 걸쳐 있는 옥수스강 유역을 포함하는 곳이었다. 이 지역은 기원전 329년에서 기원전 327년 사이에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되었고, 그는 이곳에 자신의 퇴역 군인들을 정착시켰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한 후 이어진 디아도코이 전쟁 동안 박트리아는 상당한 자율성을 누렸으나, 기원전 308년에서 기원전 305년 사이에 셀레우코스 1세에 의해 이란과 중앙아시아의 다른 알렉산드로스 정복지와 함께 셀레우코스 제국에 편입되었다.셀레우코스 1세는 기원전 295년경 박트리아를 포함한 동방 영토의 통치를 아들이자 공동 통치자인 안티오코스 1세에게 맡겼다. 안티오코스 1세는 기원전 295년부터 기원전 281년까지 이 지역에 대한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그는 이 지역을 여러 개의 사트라피(주)로 나누었으며, 박트리아도 그중 하나였다. 또한 그리스 양식의 도시들을 건설하거나 재건하고, 주조소를 열어 아티카 중량 표준에 따른 주화를 생산했다. 기원전 281년 안티오코스 1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셀레우코스 제국의 전체 통치자가 된 후, 그는 동방 지역을 자신의 아들인 안티오코스 2세에게 맡겼고, 안티오코스 2세는 기원전 261년 왕위를 계승할 때까지 이 지역을 다스렸다.[5]
디오도토스는 안티오코스 2세(재위: 기원전 261년 - 기원전 246년)의 통치 기간 동안 박트리아의 셀레우코스 사트라프(총독)가 되었다. 전통적으로 아케메네스 왕조 시절부터 왕위 계승자에게 주어지던 박트리아 사트라피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디오도토스가 이 자리에 임명된 것은 그의 능력이 뛰어났음을 시사한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나중에 안티오코스 2세의 딸과 결혼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불확실하며 논란의 여지가 있다.
바빌론에서 발견된 천문 일지에는 기원전 273년 초, 익명의 박트리아 사트라프가 바빌론에 전쟁 코끼리 20마리를 보내 제1차 시리아 전쟁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와 싸우는 셀레우코스 군대를 지원했다는 기록이 있다.[6] 이 사트라프는 디오도토스 본인이거나 그의 전임자였을 수 있다.[7] 이 시기 박트리아의 상황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주로 아이-하눔 유적 발굴을 통해 확인된다. 당시 관개 시설이 확장되고 공공 건물이 건설되거나 확장되었으며,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에서 온 유목민들의 침입으로 추정되는 군사 활동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사트라프였던 디오도토스는 이러한 지역 문제들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구체적인 활동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8]
안티오코스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인 셀레우코스 2세와 안티오코스 히에락스 형제가 왕위를 두고 다투면서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중앙 정부의 혼란은 각지의 총독들이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이탈하는 배경이 되었다. 폼페이우스 트로구스에 따르면, 박트리아 총독이었던 디오도토스 역시 이러한 상황을 틈타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는 마케도니아의 지배로부터 동방의 여러 민족이 이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 2. 박트리아 사트라피
박트리아 지역은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에 걸쳐 있는 옥수스강 유역을 포함하며, 기원전 329년에서 327년 사이에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곳에 자신의 퇴역 군인들을 정착시켰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한 후 이어진 디아도코이 전쟁 시기 동안 박트리아는 상당한 자율성을 누렸으나, 기원전 308년에서 305년 사이에 셀레우코스 1세에 의해 이란과 중앙아시아의 다른 알렉산드로스 정복지와 함께 셀레우코스 제국에 편입되었다. 셀레우코스 1세는 기원전 295년경 이 지역의 통치를 아들이자 공동 통치자인 안티오코스 1세에게 맡겼다. 안티오코스 1세는 기원전 295년부터 281년까지 박트리아를 포함한 동방 영토에 대한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이 시기 박트리아는 제국의 여러 사트라피(주) 중 하나였으며, 안티오코스 1세는 이 지역에 그리스식 도시들을 건설하거나 재건하고, 주조소를 설치하여 아티카 중량 표준에 따른 주화를 발행했다. 기원전 281년 안티오코스 1세가 제국 전체의 통치자가 된 후, 그는 동방 지역을 자신의 아들 안티오코스 2세에게 맡겼으며, 안티오코스 2세는 기원전 261년 왕위를 계승할 때까지 이 지역을 관리했다.[5]디오도토스는 안티오코스 2세의 통치 기간(기원전 261년 ~ 기원전 246년) 동안 박트리아의 셀레우코스 사트라프(총독)로 임명되었다. 전통적으로 아케메네스 왕조 시절부터 왕위 계승자에게 주어졌던 중요한 지역인 박트리아 사트라피를 맡았다는 사실은 디오도토스가 상당한 능력을 인정받았음을 시사한다. 바빌론의 천문 일지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73년 익명의 박트리아 사트라프가 제1차 시리아 전쟁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와 싸우는 셀레우코스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바빌론에 전쟁 코끼리 20마리를 보냈다고 하는데,[6] 이 사트라프가 디오도토스였거나 혹은 그의 전임자였을 가능성이 있다.[7]
이 시기 박트리아의 상황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주로 아이-하눔 유적 발굴을 통해 확인된다. 발굴 결과에 따르면 당시 박트리아에서는 관개 시설이 확장되고 공공 건물이 건설되거나 증축되었으며, 중앙아시아 스텝 지역 유목민들의 침입으로 추정되는 군사적 활동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사트라프로서 디오도토스는 이러한 지역 개발과 방어 문제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의 구체적인 활동 내용은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8]
3.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
디오도토스 1세는 원래 셀레우코스 제국의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 지역을 다스리는 사트라프(총독)였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2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들인 셀레우코스 2세와 안티오코스 히에락스 사이에 왕위 계승 다툼이 벌어지는 등 제국이 혼란에 빠지자, 디오도토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오늘날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으로 알려진 새로운 독립 왕국이 탄생했다.[9] 로마 역사가 유스티누스와 폼페이우스 트로구스는 디오도토스가 제국의 혼란을 틈타 스스로 왕을 칭하고 독립했으며, 다른 동방 지역들도 이를 따랐다고 기록했다.[9]
디오도토스가 정확히 언제 독립을 선언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여러 견해가 존재하며 논쟁이 진행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독립 시기 논쟁 참고)
제한적인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이 시기 박트리아 지역에서 특별한 단절이나 파괴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의 독립 과정이 비교적 평화롭게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5]
독립 후 디오도토스 1세는 자신이 통치하는 영토를 여러 사트라피(속주)로 나누어 각각 사트라프를 임명하여 관리했다. 이 중 아스피오누스와 투리바(아마도 타푸리아)는 새로 독립한 파르티아와의 국경 지역에 설치되었다.[18] 고고학자들은 사르에 폴의 옘시 테페, 수르한다리야 강 계곡의 달베르진 테페, 코파르니혼 강 계곡의 코바디안 등을 잠재적인 사트라피의 중심지로 보고 있다. 디오도토스 자신과 중앙 조폐소의 위치가 아이 카눔이었는지 박트라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19]
새롭게 세워진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상당한 번영을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유스티누스는 이를 "박트리아의 천 개 도시의 매우 번영한 제국"이라고 묘사했으며,[20]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박트리아를 독립시킨 그리스인들이 그 비옥함 덕분에 강력해져 아리아나[29]와 인도까지 지배했으며, 알렉산더보다 더 많은 부족을 정복했다고 기록했다.[30]
디오도토스 1세는 통치 기간 동안 동쪽에서 새롭게 등장한 파르티아에 대해 지속적으로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유스티누스는 파르티아의 아르사케스 1세가 서쪽의 셀레우코스 제국과 동쪽의 디오도토스 1세 사이에서 불안정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고 언급했다.[10]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파르티아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박트리아와 셀레우코스 영토 사이의 교역과 인적 교류는 계속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디오도토스 1세는 기원전 235년경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디오도토스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21]
3. 1. 독립 시기 논쟁
디오도토스 1세가 언제 셀레우코스 제국에서 분리되어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세웠는지 정확한 시점은 불분명하다. 로마 역사가 유스티누스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기록했다. "박트리아의 천 개 도시 총독이었던 디오도토스는[9] 배신하여 스스로 왕이라고 선언했다. 오리엔트의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의 예를 따랐고 마케도니아인[즉, 셀레우코스]으로부터 독립했다."[9]독립 시기에 대한 문헌 증거는 다양하며 해석의 여지가 있다.
- 유스티누스는 박트리아의 독립이 파르니족의 파르티아 정복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고 했지만, 파르티아 정복 시기를 셀레우코스 2세 (기원전 246-225년 재위) 통치 중인 기원전 256년으로 기록하여 혼란을 준다.[10]
- 스트라본은 아르사케스가 파르티아 정복 전에 박트리아에 근거지를 두었으며, 디오도토스가 그를 몰아내고 파르니족에 맞서 적대 관계를 유지했다고 전한다.[11]
-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파르티아 반란을 셀레우코스 2세 통치 시기로 본다.[12]
- 아리아누스의 소실된 『파르티아 역사』는 파르티아인에게 전복된 셀레우코스 사트라프가 안티오코스 2세(기원전 261-246년 재위)에 의해 임명되었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13]
- 아피아누스는 파르티아 반란이 3차 시리아 전쟁 중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셀레우코스 영토를 정복한 직후인 기원전 246년에 일어났다고 본다.[14]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세운 아둘리스 비문은 그가 박트리아를 정복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과장일 가능성이 높지만 당시 박트리아가 여전히 셀레우코스 제국의 일부였음을 시사할 수 있다.[15]
이러한 다양한 증거를 바탕으로 학자들 사이에서는 디오도토스의 독립 시기를 안티오코스 2세 통치 기간인 기원전 255년경으로 보는 '고대 연대기'와 셀레우코스 2세 통치 시작 시점인 기원전 245년경으로 보는 '저대 연대기'로 나뉘어 논쟁이 진행 중이다.[16]
일부 학자들은 현재의 증거만으로는 이 논쟁을 명확히 해결하기 어렵다고 보기도 한다. 프랭크 홀트(Frank Holt)는 독립이 특정 시점의 단일 사건이라기보다는, 디오도토스를 비롯한 동부 사트라프들이 점진적으로 자율성을 확보해 나간 과정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 과정이 기원전 250년대에 시작되어 셀레우코스 2세 통치 기간에 완료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17] 반면, 옌스 야콥손(Jens Jakobsson)은 3차 시리아 전쟁(기원전 246-241년)의 혼란 속에서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등 셀레우코스 제국의 핵심 영토를 위협하던 기원전 246년 또는 245년에 디오도토스가 급작스럽게 독립을 선언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제한적인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이 시기 박트리아 지역에서 특별한 단절이나 파괴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의 독립 과정이 비교적 평화롭게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5] 아이 카눔 유적지에서 발굴된 안티오코스 1세의 동전이 안티오코스 2세의 동전보다 60배 이상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안티오코스 2세 통치 초기에 이미 박트리아가 셀레우코스 중앙 정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났거나, 혹은 안티오코스 1세의 동전이 그의 사후에도 계속 유통되었음을 시사할 수 있다.
3. 2. 독립의 배경

디오도토스 1세는 어느 시점에 셀레우코스 제국에서 분리되어 오늘날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으로 알려진 독립 왕국을 세웠다. 로마 역사가 유스티누스는 이 사건을 간략하게 기록했다.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디오도토스,[9] 박트리아의 천 개 도시 총독은 배신하여 스스로 왕이라고 선언했다. 오리엔트의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의 예를 따랐고 마케도니아인[즉, 셀레우코스]으로부터 독립했다."
디오도토스가 독립을 선언한 정확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며, 여러 문헌 증거를 바탕으로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 유스티누스는 디오도토스의 반란이 파르니족의 파르티아 정복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고 기록했지만, 파르티아 정복의 연대 자체도 불분명하여 셀레우코스 2세 (기원전 246-225년 재위) 통치 기간으로 보기도 한다.[10]
- 스트라본은 아르사케스 1세가 파르티아를 정복하기 전에 박트리아에 근거지를 두었으나, 디오도토스가 그를 몰아내고 적대 관계를 유지했다고 주장했다.[11]
-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파르티아 반란을 셀레우코스 (아마도 2세)의 통치 기간에 위치시킨다.[12]
- 아리아누스의 소실된 『파르티아 역사』에서는 파르티아인에게 전복된 셀레우코스 사트라프가 안티오코스 2세에 의해 임명되었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13]
- 아피아누스는 파르티아 반란이 제3차 시리아 전쟁 중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시리아와 바빌론을 정복한 직후인 기원전 246년에 일어났다고 구체적으로 명시했다.[14] 아둘리스 비문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박트리아를 정복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과장일 가능성이 높지만 박트리아가 이 시점까지 셀레우코스 제국의 일부였음을 시사할 수 있다.[15]
이러한 다양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일부 학자들은 디오도토스의 독립 시기를 안티오코스 2세 통치 기간인 기원전 255년경으로 보는 '고대 연대기'를 지지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셀레우코스 2세 통치 시작 무렵인 기원전 245년경으로 보는 '저대 연대기'를 주장한다.[16] 프랭크 홀트와 같은 학자는 디오도토스와 다른 동부 사트라프들의 분리가 단일 사건이 아니라, 기원전 250년대에 시작되어 셀레우코스 2세 통치 기간에 완료된 점진적인 자율성 획득 과정이었을 수 있다고 본다.[17] 반면, 옌스 야콥손은 제3차 시리아 전쟁(기원전 246년 발발)의 혼란 속에서 디오도토스가 기원전 246년 또는 245년에 갑작스럽게 독립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등 셀레우코스 핵심 영토를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내부 상황 역시 디오도토스의 독립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안티오코스 2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인 셀레우코스 2세와 안티오코스 히에락스 사이에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폼페이우스 트로구스는 이 형제간의 다툼으로 인해 셀레우코스 제국이 동방 속주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고, 이것이 디오도토스를 포함한 여러 총독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더해 제3차 시리아 전쟁으로 제국 서방의 핵심 영토마저 위협받는 상황은 중앙 정부의 권위를 더욱 약화시켰다.
같은 시기 파르티아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유목 민족인 다헤족의 지도자 아르사케스 1세가 파르티아 지역에 침입하여 당시 총독이었던 안드라고라스를 몰아내고 파르티아 왕국을 세웠다. 이 사건 역시 셀레우코스 제국의 동방 지배력이 약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디오도토스의 독립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 디오도토스는 새로 건국된 파르티아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10][11]
고고학적 증거는 이 시기 박트리아에서 큰 혼란이나 파괴의 흔적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셀레우코스 통치에서 독립으로의 전환이 비교적 평화롭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15] 아이 카눔 유적에서 발굴된 동전을 보면, 안티오코스 1세 시대의 동전이 안티오코스 2세 시대의 동전보다 60배 이상 많이 발견되는데, 이는 박트리아가 안티오코스 2세 통치 초기에 이미 셀레우코스 중앙 정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거나, 혹은 안티오코스 1세의 동전이 그의 사후에도 계속 유통되었음을 의미할 수 있다.
4.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통치
디오도토스 1세는 특정 시점에 셀레우코스 제국에서 분리되어 오늘날 학계에서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으로 알려진 독립 왕국을 세웠다. 로마 역사가 유스티누스는 이 과정을 간략하게 언급하며, 디오도토스가 박트리아의 총독으로서 스스로 왕을 칭하고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 독립했음을 기록했다.[9] 폼페이우스 트로구스는 셀레우코스 2세와 안티오코스 히에락스 형제간의 왕위 다툼으로 인한 혼란기에 디오도토스가 독립했다고 전한다.
독립의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안티오코스 2세의 통치 말기인 기원전 255년경으로 보는 견해(고대 연대기)와 셀레우코스 2세 통치 초기인 기원전 245년경으로 보는 견해(저대 연대기)가 대립하고 있다.[16]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단일 사건이 아니라 점진적인 자율성 확립 과정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17] 제한적인 고고학적 증거는 이 시기 급격한 단절이나 파괴의 흔적을 보여주지 않아, 독립 과정이 비교적 평화롭게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5]
독립 후 디오도토스는 스스로 왕위에 올라 왕국 체제를 정비했다. 그는 자신이 통제하는 영토를 여러 사트라피로 나누어 다스렸으며,[18] 아이 카눔 또는 박트라를 주요 거점으로 삼았을 것으로 보인다.[19] 이러한 과정을 통해 디오도토스 1세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4. 1. 왕국 통치와 정책
디오도토스는 특정 시점에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오늘날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으로 알려진 왕국을 세웠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 유스티누스는 이 과정을 기록하며, 디오도토스가 안티오코스 2세 사후 셀레우코스 2세와 안티오코스 히에락스 형제간의 왕위 계승 분쟁으로 인한 혼란기에 독립했다고 설명한다.
> 디오도토스,[9] 박트리아의 천 개 도시 총독은 배신하여 스스로 왕이라고 선언했다. 오리엔트의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의 예를 따랐고 마케도니아인[즉, 셀레우코스]으로부터 독립했다.[9]
> — 유스티누스, 『폼페이우스 트로구스의 요약』 41.4
폼페이우스 트로구스의 기록 역시 유사한 내용을 전한다.
> 셀레우코스와 안티오코스 형제가 왕권을 다투며 반역자들을 방치했기 때문에, "천 개의 도시"(박트리아)의 총독이었던 디오도토스도 이에 편승하여 이반하고, 영민들에게 자신을 왕이라고 부르도록 명령했다. 이로 인해 전 오리엔트의 여러 민족이 마케도니아로부터 이반하게 되었다.
> — 폼페이우스 트로구스, 『필리포스 연대기』
독립 후 디오도토스는 스스로 왕을 칭하고, 통치 영역을 여러 사트라피로 나누어 각 지역에 총독(사트라프)을 임명하여 다스렸다. 특히 파르티아와의 국경에는 아스피오누스와 투리바(아마도 타푸리아)라는 두 개의 사트라피를 두어 군사적 요충지로 삼았다.[18] 고고학자들은 사르에 폴의 옘시 테페, 수르한다리야 강 계곡의 달베르진 테페, 코파르니혼 강 계곡의 코바디안 등을 다른 사트라피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있는 유적으로 보고 있다. 디오도토스 자신과 주요 조폐소의 위치가 아이 카눔이었는지, 전통적인 중심지 박트라였는지는 불분명하다.[19]
독립 이후에도 디오도토스는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지는 않았다. 그가 발행한 초기 동전에는 여전히 셀레우코스 군주인 안티오코스의 이름(ΒΑΣΙΛΕΩΣ ΑΝΤΙΟΧΟΥ, 안티오코스 왕)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면서도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관계에서 모호성을 유지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디오도토스가 세운 왕국은 상당한 번영을 누린 것으로 기록된다. 유스티누스는 이를 "박트리아의 천 개 도시의 매우 번영한 제국"이라 칭했으며,[20] 지리학자 스트라본 역시 박트리아의 풍요로움과 강력한 세력을 강조했다.
> 박트리아를 이반시킨 그리스인들은 그 비옥한 국토를 바탕으로 크게 세력을 확장하여 아리아네[29] 지방과 인도인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아르테미타의 아폴로도로스 (Apollodorus of Artemita)[30]가 말한 바이고, 정복한 부족의 수는 알렉산드로스 시대보다 많았다... 그들의 도시는 박트라 (자리아스파라고도 불리며, 같은 이름을 가진 강이 흘러 옥수스로 흘러 들어간다)와 다랍사, 그리고 여러 다른 도시였다.
> — 스트라본, 『지리지』 11.11.1
디오도토스는 통치 기간 동안 파르티아에 대해 적대 정책을 유지했다. 유스티누스는 파르티아의 아르사케스 1세가 서쪽의 셀레우코스와 동쪽의 디오도토스로부터 압박받는 불안정한 상황이었다고 기록했다.[10] 과거에는 파르티아의 성장이 박트리아를 셀레우코스 제국 및 그리스 문화권과의 교류로부터 단절시켰다고 여겨졌으나, 최근의 고고학적 증거는 상품과 인적 교류가 계속되었음을 시사한다.
디오도토스는 기원전 235년경 사망했으며, 아마도 자연사로 추정된다. 그의 아들 디오도토스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21] 디오도토스 2세는 아버지와 달리 파르티아와 평화 조약을 맺고, 셀레우코스 2세가 파르티아를 공격했을 때(기원전 228년경) 아르사케스를 지원했다.[10] 그러나 디오도토스 2세는 이후 에우티데무스 1세에게 살해당했고, 에우티데무스 1세는 에우티데미드 왕조를 창건했다.[22][23]
4. 2. 파르티아와의 관계
유목 민족 다헤족의 수장 아르사케스 1세는 파르티아에 침입하여 그곳의 총독 안드라고라스를 몰아내고 파르티아 왕국을 세웠다. 이후 히르카니아 왕국까지 점령하며 세력을 넓혔다.디오도토스 1세는 통치 기간 동안 파르티아에 계속 적대적이었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 스트라본은 디오도토스 1세가 아르사케스를 박트리아에서 몰아냈고 파르티아에 맞서 적대 행위를 유지했다고 말한다.[11] 유스티누스는 아르사케스가 서쪽의 셀레우코스와 동쪽의 디오도토스로부터 위협받는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다고 강조했다.[10] 디오도토스 1세는 파르티아와의 경계에 아스피오누스와 투리바(아마도 타푸리아) 두 개의 사트라피를 세웠다.[18]
과거에는 파르티아의 등장이 박트리아를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향력과 헬레니즘 문화로부터 완전히 차단했다고 여겨졌으나, 고고학적 증거는 상품과 사람들이 박트리아와 셀레우코스 영토 사이를 계속 이동했음을 분명히 한다.
디오도토스 1세는 기원전 235년경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디오도토스 2세가 왕위를 이었다.[21] 새로운 왕 디오도토스 2세는 파르티아와 평화를 맺고 동맹을 맺었다.[10] 셀레우코스 2세가 기원전 228년경 그를 공격했을 때 아르사케스를 지원했다.[10]
4. 3. 번영과 쇠퇴
로마 역사가 유스티누스는 디오도토스 1세가 통치한 왕국을 "박트리아의 천 개 도시의 매우 번영한 제국"[20]이라고 묘사했다. 지리학자 스트라본 역시 박트리아를 차지한 그리스인들이 국토의 비옥함을 바탕으로 강성해져 아리아나와 인도까지 지배하게 되었으며, 아르테미타의 아폴로도로스를 인용하여 이들이 알렉산더보다 더 많은 부족을 정복했다고 기록했다.[30]디오도토스 1세는 셀레우코스 2세의 통치 기간인 기원전 235년경 사망했으며, 아마도 자연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디오도토스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21] 디오도토스 2세는 아버지와 달리 파르티아와 평화 조약을 맺었고, 셀레우코스 2세가 기원전 228년경 파르티아를 공격했을 때 아르사케스를 지원하기도 했다.[10] 그러나 디오도토스 2세는 이후 에우티데무스에게 살해당했으며,[22][23] 에우티데무스는 에우티데미드 왕조를 열었다.
5. 주화 발행
디오도토스는 권력을 잡기 전, 아이 카눔[24] 또는 박트라의 주조소에서 셀레우코스 제국 군주 안티오코스 2세의 이름으로 기존 셀레우코스 도안의 주화를 발행했다. 여기에는 금 스타테르, 은 테트라드라크마, 드라크마, 헤미드라크마 및 일부 청동 주화가 포함되었으나, 대량 주조는 아니었다.[25]
사트라프 시기부터 디오도토스는 자신만의 새로운 주화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주로 은 테트라드라크마와 소수의 금 스타테르가 발행되었는데, 앞면에는 디아뎀을 두른 자신의 초상으로 추정되는 모습을, 뒷면에는 전통적인 아폴론 대신 제우스를 새겼다. 초기 주화에는 여전히 ΒΑΣΙΛΕΩΣ ΑΝΤΙΟΧΟΥgrc ('안티오코스 왕의')라는 문구를 사용하여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25]
주화 발행 후반기에는 뒷면에 승리를 상징하는 화환이 추가되었는데, 이는 파르티아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고 그에게 '소테르'(구원자) 칭호가 붙게 된 배경으로 해석된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바실레우스(왕)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가능성도 있다.[25]
이 새로운 주화는 기원전 250년경부터 두 곳의 주조소에서 발행된 것으로 보이며, 디오도토스 1세 사후에는 아들 디오도토스 2세가 ΔΙΟΔΟΤΟΥgrc ('디오도토스의')라는 문구를 새긴 주화를 발행하며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다.[25]
디오도토스는 금화와 은화 외에 청동 주화('G 시리즈')도 발행했다. '더블'(약 8.4g, 지름 20mm-24mm)과 '싱글'(약 4.2g, 지름 14mm–18mm) 두 종류가 있었으며,[26] 앞면에는 페타소스를 쓴 헤르메스의 머리가, 뒷면에는 두 개의 케두케우스가 교차하는 모습이 새겨졌다. 초기에는 ΒΑΣΙΛΕΩΣ ΑΝΤΙΟΧΟΥgrc 문구가 사용되었으나, 나중에는 ΔΙΟΔΟΤΟΥgrc ('디오도토스의', 'H 시리즈') 문구로 변경되었다. 이 청동 주화들은 아이 카눔 유적에서 다수 발견되었다.[27] 후대 왕인 아가토클레스와 안티마쿠스는 디오도토스 1세를 기리는 기념 주화를 발행하기도 했다.[25]
5. 1. 주화의 도상과 의미


디오도토스가 권력을 잡기 전부터 박트리아 지역의 아이 카눔[24] 또는 박트라에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이름으로 주화를 만드는 주조소가 있었다. 이 주화들의 앞면에는 당시 셀레우코스 왕의 초상이, 뒷면에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호신인 아폴론이 옴팔로스에 앉아 있는 모습이 새겨졌다. 사트라프로서 디오도토스는 안티오코스 2세의 이름으로 이러한 주화들을 계속 발행했다. 여기에는 금 스타테르, 은 테트라드라크마, 드라크마, 헤미드라크마 및 일부 청동 주화가 포함되었으나, 대량으로 발행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25]
프랭크 홀트의 해석에 따르면, 디오도토스는 여전히 사트라프였을 때 새로운 디자인의 주화를 도입했다. 은 테트라드라크마가 다수 발행되었고, 나중에는 소수의 금 스타테르도 만들어졌다. 이 주화들의 앞면에는 남성의 머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디오도토스 본인으로 추정된다. 그는 머리 주위에 디아뎀(왕권을 상징하는 머리띠)을 두르고 있는데, 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부터 헬레니즘 왕국의 표준적인 상징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초상화가 점차 나이 든 모습으로 변하는 것으로 보아, 디오도토스의 실제 모습을 담으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주화 뒷면에는 기존의 아폴론 대신 제우스가 번개를 던지려는 모습이 묘사되었다. 제우스를 선택한 것은 그리스어로 '제우스의 선물'을 의미하는 디오도토스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거나, 혹은 셀레우코스 1세가 발행했던 초기 주화 디자인을 따른 것일 수 있다. 이 주화 뒷면의 문구는 여전히 ΒΑΣΙΛΕΩΣ ΑΝΤΙΟΧΟΥ|바실레오스 안티오쿠grc ('안티오코스 왕의')로 남아 있었다. 이는 디오도토스가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면서도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에 대해서는 모호한 입장을 취했음을 보여준다.[25] 한편, 옌스 야콥슨은 이 주화들이 디오도토스의 손자이자 아들인 젊은 왕 안티오코스 니카토르의 것이며, 그의 통치 시기를 기원전 220년경으로 추정하는 다른 해석을 제시하기도 한다.
디오도토스가 발행한 주화 시리즈 후반부에는 뒷면의 제우스 왼쪽에 작은 화환이 추가된다. 화환은 고대 그리스에서 승리를 상징하는 표시였다. 프랭크 홀트는 이 화환이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것이며, 이 승리가 디오도토스에게 '소테르'(구원자)라는 칭호를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나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1세 소테르와 같은 다른 헬레니즘 군주들도 강력한 외부 세력의 위협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여 이 칭호를 사용했는데, 디오도토스 역시 비슷한 이유로 '소테르' 칭호를 얻었을 수 있다. 이러한 군사적 성공은 디오도토스가 바실레우스(왕)라는 공식 칭호를 사용하는 명분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25]
이 새로운 형태의 주화가 정확히 언제부터 발행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프랭크 홀트는 기원전 250년경으로 추정한다. 주화는 두 곳의 주조소에서 동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한 곳('A 시리즈')에서는 더 나이 든 모습의 초상을, 다른 곳('C 및 E 시리즈')에서는 더 젊은 모습의 초상을 사용했다. 'A & C 시리즈'는 아이 카눔 또는 박트라 주조소에서, 'E 시리즈'는 아직 위치가 확인되지 않은 곳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홀트는 젊은 초상이 디오도토스 1세와 함께 공동 통치했을 가능성이 있는 아들 디오도토스 2세를 묘사한 것일 수 있다고 제안한다. 잠시 주화 발행이 중단된 후, 두 주조소 모두 젊은 초상과 함께 ΔΙΟΔΟΤΟΥ|디오도투grc ('디오도토스의', D 및 F 시리즈)라는 문구가 새겨진 주화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홀트는 이 중단기가 디오도토스 1세의 사망과 디오도토스 2세의 즉위를 나타낸다고 해석한다.[25]
디오도토스 2세 통치 후반에는 '이상화된' 모습의 디오도토스 1세를 묘사한 일부 테트라드라크마 주화('B 시리즈')가 발행되기도 했다. 또한 후대의 그레코-박트리아 왕인 아가토클레스와 안티마쿠스는 디오도토스 1세를 기리기 위해 기념 주화를 발행했다. 이 주화들은 디오도토스 1세가 발행했던 테트라드라크마의 원래 디자인을 따르면서도, 앞면에 ΔΙΟΔΟΤΟΥ ΣΩΤΗΡΟΣ|디오도투 소테로스grc ('디오도토스 소테르의')라는 문구를 넣어 그를 명확히 식별했다.[25]
디오도토스는 청동 주화('G 시리즈')도 발행했다. 이 주화는 두 가지 액면가로 나뉘었는데, '더블'(약 8.4g, 지름 20mm-24mm)과 '싱글'(약 4.2g, 지름 14mm–18mm)이었으며, 은 드라크마의 1/48 가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26] 모든 청동 주화의 앞면에는 페타소스 모자를 쓴 헤르메스의 머리가, 뒷면에는 헤르메스의 상징인 날개 달린 지팡이, 즉 케두케우스 두 개가 서로 교차하는 모습과 함께 ΒΑΣΙΛΕΩΣ ΑΝΤΙΟΧΟΥ|바실레오스 안티오쿠grc ('안티오코스 왕의')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금화 및 은화와 마찬가지로 발행이 잠시 중단된 후, 청동 주화에도 ΔΙΟΔΟΤΟΥ|디오도투grc ('디오도토스의', 'H 시리즈')라는 문구가 사용되었다. 이 청동 주화들은 특히 아이 카눔 유적지에서 많이 발견되었다.[27]
5. 2. 주화 발행의 의의
디오도토스가 권력을 잡기 전부터 이미 아이 카눔[24] 또는 박트라에 박트리아 주조소가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셀레우코스 왕의 이름으로 왕실 주화를 주조했다. 앞면에는 당시 셀레우코스 왕의 초상이, 뒷면에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호신인 아폴론이 옴팔로스에 앉아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사트라프였던 디오도토스는 안티오코스 2세의 이름으로 이러한 동전을 계속 발행했다. 여기에는 금 스타테르, 은 테트라드라크마, 드라크마, 헤미드라크마 및 일부 청동 주화가 포함되었다. 이 중 어느 것도 대량으로 발행된 것 같지는 않다.[25]
프랭크 홀트의 해석에 따르면, 디오도토스는 여전히 사트라프였을 때 새로운 주화를 도입했는데, 여기에는 다수의 은 테트라드라크마와 나중에 소수의 금 스타테르가 포함되었다. 이 동전의 앞면에는 남성 인물, 아마도 디오도토스 본인의 머리가 새겨져 있는데, 머리 주위에 천을 두르고 뒤로 두 줄을 늘어뜨린 디아뎀을 착용하고 있었다. 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부터 헬레니즘 왕국의 표준 상징이었다. 이 이미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늙어가는 모습인데, 이는 디오도토스의 사실적인 초상화를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동전의 뒷면에는 셀레우코스 신 아폴론 대신 제우스가 번개를 던질 준비를 하는 모습이 묘사되었다. 제우스를 선택한 것은 그리스어로 '제우스의 선물'을 의미하는 디오도토스 자신을 나타내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 또는 셀레우코스 1세가 주조한 초기 동전을 참조한 것일 수도 있다. 이 동전 뒷면의 문구는 여전히 ΒΑΣΙΛΕΩΣ ΑΝΤΙΟΧΟΥ|바실레오스 안티오코우grc ('안티오코스 왕의')이다. 따라서 이 주화는 디오도토스의 권위를 명확히 선포했지만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의 독립 정도에 대해서는 모호함을 유지하며, 점진적인 독립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여겨진다.[25] 옌스 야콥슨은 이것이 디오도토스의 손자이자 아들인 젊은 왕 안티오코스 니카토르의 주화이며, 그의 통치를 기원전 220년대경으로 추정하는 다른 해석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 시리즈의 후반부 주화에는 제우스의 왼쪽에 작은 화환이 나타난다. 화환은 그리스의 승리 상징이었다. 프랭크 홀트는 이것이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것이며, 이 승리가 디오도토스에게 '소테르'(구원자)라는 칭호를 안겨준 배경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와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1세 소테르와 같은 다른 헬레니즘 군주들도 외부 세력의 위협에 맞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이 칭호를 사용했다. 디오도토스 역시 이러한 전례를 따라 '소테르' 칭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디오도토스 1세가 왕(바실레우스)의 칭호를 공식적으로 채택하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이는 아탈로스 1세의 경우와 유사하다.[25]
이 새로운 유형의 주화가 처음 발행된 정확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프랭크 홀트는 기원전 250년경으로 추정한다. 이 주화는 두 개의 주조소에서 동시에 주조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더 나이 든 모습의 초상('A 시리즈')을, 다른 하나는 더 젊은 모습의 초상('C 및 E 시리즈')을 사용했다. 'A & C 시리즈'의 주조소는 일반적으로 아이 카눔 또는 박트라 주조소로 여겨지며, 'E 시리즈' 주조소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다. 홀트는 더 젊은 초상이 디오도토스 1세와 함께 공동 통치했을 가능성이 있는 디오도토스 2세를 묘사한 것이라고 제안한다. 잠시 주화 발행이 중단된 후, 두 주조소 모두 더 젊은 초상과 함께 ΔΙΟΔΟΤΟΥ|디오도토우grc ('디오도토스의', D 및 F 시리즈)라는 명문이 새겨진 동전을 생산한다. 홀트는 이 중단기가 디오도토스 1세의 사망과 디오도토스 2세의 단독 즉위를 나타낸다고 본다.[25] 이는 주화 명문에서 '안티오코스 왕의' 대신 '디오도토스의'를 사용함으로써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음을 시사한다.
디오도토스 2세 통치 후반부에는 '이상화된' 모습의 디오도토스 1세를 묘사한 몇 개의 테트라드라크마 동전('B 시리즈')이 발행되었다. 이는 디오도토스 1세가 왕국의 창시자로서 존경받았음을 보여준다. 또한 디오도토스 1세는 후대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왕들인 아가토클레스와 안티마코스 1세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발행한 기념 주화에도 등장한다. 이 동전들은 디오도토스 1세가 발행했던 테트라드라크마의 원래 디자인을 모방했지만, 앞면에는 왕을 ΔΙΟΔΟΤΟΥ ΣΩΤΗΡΟΣ|디오도토우 소테로스grc ('디오도토스 소테르의')로 명확히 밝히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25] 이는 디오도토스 1세가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정통성과 독립의 상징으로 후대에 인식되었음을 의미한다.
디오도토스는 또한 청동 주화('G 시리즈')를 발행했다. 이 주화는 두 가지 액면가로 구성되었다. '더블'(약 8.4g, 지름 20mm-24mm)과 '싱글'(약 4.2g, 지름 14mm-18mm)로, 은 드라크마의 1/48 가치였을 수 있다.[26] 모든 액면가의 앞면에는 페타소스 모자를 쓴 헤르메스의 머리가, 뒷면에는 헤르메스의 상징인 날개 달린 지팡이, 즉 두 개의 케두케우스가 서로 교차하는 모습과 함께 ΒΑΣΙΛΕΩΣ ΑΝΤΙΟΧΟΥ|바실레오스 안티오코우grc ('안티오코스 왕의')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은화 및 금화 발행과 유사하게 잠시 중단된 후, 청동화 역시 ΔΙΟΔΟΤΟΥ|디오도토우grc ('디오도토스의', 'H 시리즈')라는 명문과 함께 발행되었다. 이 청동화는 아이 카눔 발굴 현장에서 매우 많은 수가 발견되어 당시 널리 유통되었음을 알 수 있다.[27]
6. 가족 관계
디오도토스 1세에게 확인된 유일한 자녀는 아들이자 후계자인 디오도토스 2세 테오스이다. 안티오코스 1세 니카토르 역시 그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역사학자 타른은 후대의 박트리아 주화를 근거로, 디오도토스 1세에게 딸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타른에 따르면 이 딸은 에우튀데모스 1세와 결혼했으며, 남편이 디오도토스 1세를 살해하고 왕위를 차지하는 과정에 관여했을 수 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아들인 데메트리오스 1세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섭정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딸의 존재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없으며, 타른의 가계 재구성은 추측에 의존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2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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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Strabo, Geography, Book 11, chapter 11, section 1
http://www.perseus.t[...]
2021-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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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chiv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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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9]
문서
Justin's text actually reads 'Theodotus'
[10]
문서
Epitome of Pompeius Trogus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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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bo 1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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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mianus Marcellinus 23.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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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FGrH F3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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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Syriaca 65
[15]
간행물
[16]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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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18]
문서
Strabo 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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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tra
[20]
웹사이트
Justin, 41.1
https://web.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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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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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ybius 1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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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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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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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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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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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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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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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29]
문서
アリアナ
[30]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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