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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페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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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 페니체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있는 오페라 극장으로, "불사조"라는 뜻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1773년, 1836년, 1996년 세 차례의 화재를 겪고 재건되었다. 1792년 완공 이후 이탈리아와 유럽에서 예술적 수준을 인정받았으며, 베네치아의 주요 오페라 극장으로 자리 잡았다. 주세페 베르디, 조아키노 안토니오 로시니 등 유명 작곡가들의 오페라 초연 무대로도 유명하다. 현재는 19세기 양식으로 재건되어 오페라, 콘서트, 발레 등 다양한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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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페니체 - [경기장/극장]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주소베네치아
일반 정보
이름페니체 극장
극장 정보
종류가극장
위치베네치아
국가이탈리아
수용 인원1126명
웹사이트공식 웹사이트
역사
개장1792년
재개장1837년
2003년
건축
건축가잔안토니오 셀바
Tommaso Meduna와 Giovanni Battista Meduna
알도 로시
소유 및 운영
소유주베네치아 시
운영자베네치아 시

2. 극장 명칭의 유래

feniceit는 이탈리아어로 불사조를 의미하며(영어의 phoenix에 해당), 1773년 화재로 소실된 베네치아의 다른 극장의 후계자임을 자부하며 붙여진 이름이다.[1] 이후 이 극장 자체가 1836년1996년 두 차례에 걸쳐 화재로 전소되었지만, 매번 재건되어 "불사조"라는 이름에 걸맞은 역사를 보여주었다.[1]

3. 연혁

17세기 베네치아오페라가 크게 번성하여 최소 16개의 극장이 경쟁하던 곳이었다. 1630년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빼앗긴 프로세르피나』(Proserpina Rapita)가 베네치아 총독 모체니고 단드로의 저택에서 공연되었다는 기록은 베네치아에서 가장 오래된 오페라 공연 기록이다.

1774년, 40년 이상 베네치아의 대표적인 오페라 극장이었던 산 베네데토 극장이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후 극장 재건 과정에서 토지 소유주 베니엘 가문과 극장 운영 측 사이에 법적 분쟁이 발생하여 베니엘 가문에 유리한 판결이 내려졌다. 그 결과 극장 운영 측은 산 베네데토 극장을 떠나 새로운 극장을 건설하게 되었다.

18세기 말, 베네치아에는 7개의 극장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큰 극장은 산 베네데토 극장이었다. 1755년 그리마니 가문이 건립한 이 극장은 귀족 객석 소유자 협회에 할당되었으나, 1787년 법적 분쟁으로 인해 베니에르 가문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협회는 이전 극장보다 더 크고 화려한 극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불운 이후 협회의 재생을 상징하기 위해 극장 이름을 "라 페니체"로 정했다. 1790년 부지를 매입하고 극장 설계를 위한 공모전을 열어 지안난토니오 셀바(Giannantonio Selva)의 작품을 선정, 1791년 공사를 시작하여 1792년 4월에 완공되었다.

초대 극장 내부, 1829년


라 페니체는 예술적 수준과 건물의 화려함으로 이탈리아와 유럽의 주요 오페라 극장 중 하나로 빠르게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1836년 12월 13일, 오스트리아산 난방 장치로 인한 화재로 전소되었다.

협회는 즉각적인 재건을 결정하고, 지암바티스타 메두나와 그의 형 토마소 메두나에게 공사를 맡겼다. 1837년 12월 26일, 새로운 스타일로 재탄생한 극장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1935년 극장 지분이 베네치아 시(Comune di Venezia)에 양도되어 공공 재산으로 바뀌었고, 1937-38년에 대규모 보수 및 개조 공사가 이루어졌다. 1996년 1월 29일, 보수 공사 중 방화로 인해 두 번째 화재가 발생했다. 알도 로시(Aldo Rossi)의 설계에 따라 재건되어 2003년 12월 14일에 재개장했다.

주세페 베르디와 페니체 극장의 관계는 1844년 ''에르나니'' 초연으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아틸라'',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시몬 보카네그라''의 초연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문을 닫기도 했지만, 다시 문을 열어 세계 최고의 가수와 지휘자들을 불러모았다. 193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시작된 국제 현대 음악제를 통해 스트라빈스키, 브리튼 등 여러 작곡가들이 페니체를 위해 작곡했다.

3. 1. 전사(前史): 베네치아의 오페라 극장

17세기에는 최소 16개의 극장이 경쟁할 정도로 번성했던 베네치아와 오페라의 관계는 깊다. 1630년 몬테베르디의 『빼앗긴 프로세르피나』(Proserpina Rapita)가 베네치아 총독 모체니고 단드로의 저택에서 공연되었다는 기록이 베네치아에서 가장 오래된 오페라 공연 기록이다.

1774년, 40년 이상 베네치아의 대표적인 오페라 극장이었던 산 베네데토 극장이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후 극장 재건 과정에서 토지 소유주 베니엘 가문과 극장 운영 측 사이에 법적 분쟁이 발생하여 베니엘 가문에 유리한 판결이 내려졌다. 그 결과 극장 운영 측은 산 베네데토 극장을 떠나 도보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인근 지역 캄포 산 판틴에 새로운 극장을 건설하게 되었다.

3. 2. 페니체 극장의 역사

18세기 말, 베네치아에는 7개의 극장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큰 극장은 산 베네데토 극장이었다. 1755년 그리마니 가문이 건립한 이 극장은 귀족 객석 소유자 협회에 할당되었으나, 1787년 법적 분쟁으로 인해 베니에르 가문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협회는 이전 극장보다 더 크고 화려한 극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불운 이후 협회의 재생을 상징하기 위해 극장 이름을 "라 페니체"로 정했다. 1790년 부지를 매입하고 극장 설계를 위한 공모전을 열어 지안난토니오 셀바(Giannantonio Selva)의 작품을 선정, 1791년 공사를 시작하여 1792년 4월에 완공되었다.

라 페니체는 예술적 수준과 건물의 화려함으로 이탈리아와 유럽의 주요 오페라 극장 중 하나로 빠르게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1836년 12월 13일, 오스트리아산 난방 장치로 인한 화재로 전소되었다. 화재 진압에는 3일 밤낮이 걸렸고, 18일 후에도 잔해 속에서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협회는 즉각적인 재건을 결정하고, 지암바티스타 메두나와 그의 형 토마소 메두나에게 공사를 맡겼다. 1837년 2월 공사를 시작하여 같은 해 12월 26일, 새로운 스타일로 재탄생한 극장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1935년 극장 지분이 베네치아 시(Comune di Venezia)에 양도되어 사유 재산에서 공공 재산으로 바뀌었고, 1937-38년에 대규모 보수 및 개조 공사가 이루어졌다. 1996년 1월 29일, 보수 공사 중 방화로 인해 건물과 살레 아폴리네 대부분이 전소되는 두 번째 화재가 발생했다. 알도 로시(Aldo Rossi)의 설계에 따라 재건되어 2003년 12월 14일에 재개장했다.

주세페 베르디와 페니체 극장의 관계는 1844년 ''에르나니'' 초연으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아틸라'',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시몬 보카네그라''의 초연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문을 닫기도 했지만, 다시 문을 열어 세계 최고의 가수와 지휘자들을 불러모았다. 193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시작된 국제 현대 음악제를 통해 스트라빈스키, 브리튼 등 여러 작곡가들이 페니체를 위해 작곡했다.

3. 2. 1. 극장 창건 (1792년)

1789년 건축 설계 공모(콘페티션)를 통해 산 베네데토 극장의 후계 극장으로 건립되었다. 공모에는 곤돌라(부유층) 또는 도보로만 접근이 가능한 베네치아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여, “정문은 메누오 운하에 면하고, 대형 곤돌라 이용을 고려하여 너비는 최소 6미터를 확보할 것” 등 세세한 조건이 붙어 있었다. 또한 커피 등 기호품 판매에 할애할 공간 확보, 화재 예방·연소 방지 설비에 대한 고려 등도 조건에 명시되어 있었다.[1]

이탈리아 전역에서 많은 건축가가 참가했고, 28개의 설계안이 경합을 벌였다. 팸플릿이 난무하는 등 열띤 경쟁 끝에, 심사위원회는 피에트로 비안키의 안을 퇴짜놓고, 신고전주의 양식 건물을 제안한 지안난토니오 셀바의 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1][2] 하지만 이는 베네치아 대중의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셀바를 조롱하는 욕설이나 소네트(시) 등이 기록에 남아 있을 정도였다. 예를 들어 셀바는 극장 파사드에 "SOCIETAS"(공동으로, 라는 의미)라는 명문을 새겼는데, 이를 반대파는 "'''S'''ine '''O'''rdine '''C'''um '''I'''rregularitate '''E'''rexit '''T'''heatrum '''A'''ntonius '''S'''elva"(방법도 질서도 없이, 안토니우스 세르바가 이 극장을 지었다)라고 바꿔 읽어 비꼬았다.

1792년 4월에 완공되어, 5월 16일에 파이지엘로의 오페라 아그리젠토의 놀이로 개관했다. 화가 프란체스코 폰타네지의 디자인으로 아름다운 내장과, "로열 박스"와 같은 것을 없애고 174개의 모든 박스석이 거의 동일한 크기로 만들어진 구조가 특징적이었다. 이러한 "평등주의"적 접근에 당시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베네치아가 나폴레옹 지배하에 놓인 1808년에는 셀바의 손으로 로열 박스가 임시로 증설되었다.[1]

페니체 극장은 초창기부터 베네치아 또는 널리 유럽에 있어 중심적인 오페라 극장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3. 2. 2. 1836년 화재와 재건

1836년 12월 13일 밤, 라 페니체는 최근 설치된 오스트리아산 난방 장치로 인한 화재로 전소되었다. 신문들은 화재 진압에 3일 밤낮이 걸렸고, 18일 후에도 잔해 속에서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고 보도했다.[3] 화재는 건물 전체를 집어삼켰고, 로비와 살레 아폴리네(Sale Apollinee)만이 살아남았다.

협회는 즉각적인 재건을 결정했다. 지암바티스타 메두나 건축가와 그의 형인 토마소 메두나 기술자가 공사를 진행했으며, 트랑퀼로 오르시(Tranquillo Orsi)가 장식을 담당했다. 공사는 1837년 2월에 시작되었고, 공연은 산 루카(San Luca) 극장(현재 골도니 극장)이었던 아폴로 극장(Teatro Apollo)에서 임시로 진행되었다.

극장은 불과 1년 만에 재건되었다. 외관은 지안난토니오 셀바(Giannantonio Selva)의 원 설계를 충실히 재현했지만, 기능적으로는 오페라 공연에 특화하는 등의 변경이 있었다. 또한, 메누오 운하에 면한 정문에는 골도니와 셀바를 기리는 부조가 새겨졌다. 1837년 12월 26일, 재건 후 첫 공연은 주세페 릴로의 『라벤나의 로스무다』(Rosmunda in Ravenna)였다.[3]

1854년과 1936년에 대대적인 개수가 이루어졌다. 재건 후에도 라 페니체는 이탈리아 주요 오페라 극장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했으며, 주세페 베르디의 중기 걸작인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등의 초연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3. 2. 3. 1996년 화재와 재건

1996년 1월 29일, 보수 공사 중이던 페니체 극장은 화재로 전소되었다. 원인은 보수 작업 지연으로 위약금 지불을 요구받았던 전기 공사업자의 방화였다.[5] 2001년 3월, 용의자 두 명에게 각각 징역 7년과 6년의 실형이 선고되었다.[6]

재건된 극장 내부 (2005년 촬영)


재건 공사는 예산, 재건 방법 문제, 소실 이전 자료 부족 등 여러 어려움으로 인해 2001년에야 시작되었다. 화재 현장에 남은 샹들리에 등 재활용, 유물 복원,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 『여름의 폭풍』(1954년) 영상 참고 등 여러 방법을 동원했다.

극장은 2003년 12월 14일, 리카르도 무티 지휘의 콘서트 형식 연주회로 재개장했다. 첫 곡은 베토벤의 서곡 "헌당식" Op.124였다. 오페라 상연은 2004년 11월, 이 극장에서 초연되었던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로 재개되었다.

재건 비용은 9000만유로였다. 2001년과 2005년 페니체 극장의 일본 순회 공연이 비용 충당에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3. 2. 4. 현재

2015년 페니체 극장 내부


여러 차례 지연 끝에 2001년 본격적인 재건축이 시작되었다. 200명의 미장이, 예술가, 목수 및 기타 장인들로 구성된 팀은 650일 만에 약 9000만유로의 비용으로 옛 극장의 분위기를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질리언 프라이스(Gillian Price)는 "이번에는 고(故) 이탈리아 건축가 알도 로시(Aldo Rossi)의 탁월한 프로젝트와 '원래 있던 모습 그대로, 원래 있던 자리에'라는 모토 덕분에 추가적인 연습 공간과 최첨단 무대 장비를 갖추게 되었고, 좌석 수도 840석에서 1000석으로 늘어났다."라고 언급했다.[7]

장식 세부 사항


페니체 극장은 19세기 스타일로 재건되었으며, 건축가 알도 로시(Aldo Rossi)의 설계를 기반으로 했다. 그는 극장 설계의 세부 사항을 얻기 위해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 감독의 영화 ''센소''(1954)의 오프닝 장면에 사용된 스틸 사진을 참고했다. 페니체 극장은 2003년 12월 14일 베토벤, 바그너, 스트라빈스키의 개막 콘서트로 재개장했다. 첫 번째 공연 오페라는 2004년 11월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였다.

재건된 페니체 극장에 대한 비평가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일 템포(Il Tempo)''지의 음악 평론가인 엔리코 카발로티(Enrico Cavalotti)는 만족스러워했다. 그는 색깔이 다소 밝다고 생각했지만 음향은 좋고 압축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라 레푸블리카(La Repubblica)''지의 동료 디노 빌라티코(Dino Villatico)는 새로운 홀의 음향이 공명이 부족하고 색깔이 지나치게 밝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것을 "키치(kitsch), 과거의 가짜 모방"이라고 평가하며 "도시는 완전히 새로운 극장을 건설할 용기를 가져야 했다. 베네치아는 혁신적인 과거를 무시함으로써 배신했다"고 말했다.

4.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된 주요 오페라



1930년부터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 현대 음악제의 장소가 되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벤저민 브리튼과 같은 작곡가들의 작품이 초연되었다.[3]

5. 건축적 특징

1789년 건축 설계 공모를 통해 장안토니오 세르바의 설계안이 당선되었으나, 베네치아 대중의 비난을 받았다. 세르바가 극장 파사드에 새긴 "SOCIETAS"라는 문구는 "'''S'''ine '''O'''rdine '''C'''um '''I'''rregularitate '''E'''rexit '''T'''heatrum '''A'''ntonius '''S'''elva"(방법도 질서도 없이, 안토니우스 세르바가 이 극장을 지었다)라고 재해석되어 조롱받았다.

1792년 4월, 약 1500석 규모의 극장이 완공되었다. 모든 박스석이 거의 동일한 크기로 만들어진 점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평등주의"적 접근으로 해석된다. 1808년 나폴레옹 통치 하에 세르바는 로열 박스를 임시 증설했다.

1836년 화재 후 극장은 1년 만에 재건되었다. 외관은 세르바의 원 설계를 충실히 재현했지만, 오페라 공연에 특화하는 등 기능적인 변경이 있었다. 메누오 운하에 면한 정문에는 골도니와 세르바를 기리는 부조가 새겨졌다. 1854년과 1936년에 대대적인 개수가 이루어졌다.

1996년 화재 이후 2001년부터 재건 공사가 시작되었다. 자료 부족으로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 <여름의 폭풍> (1954년) 영상을 참고하기도 했다. 재건된 극장은 "내장이 너무 밝다", "음향이 저하되었다"는 비판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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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2월 14일 재개장 기념 콘서트에서는 베토벤의 서곡 "헌당식" Op.124가 연주되었다. 2004년 11월에는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로 오페라 상연이 재개되었다. 재건 비용은 9000만유로였으며, 2001년2005년 페니체 극장의 일본 순회 공연이 비용 충당에 기여했다.

5. 1. 외관 (Façade)

1792년 건축가 지안난토니오 셀바(Giannantonio Selva)의 설계로 지어진 페니체 극장의 정면은 1836년과 1996년 두 차례의 화재에도 불구하고 온전하게 남아있는 유일한 부분이다.

도시의 다른 극장들이 골목길이나 작은 광장과 같은 외딴곳에 입구가 있는 것과 달리, 페니체 극장은 캄포 산 판틴(Campo San Fantin)이라는 열린 공간에 면한 베네치아의 유일한 역사적 극장이다. 또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주랑을 정면에 갖춘 유일한 극장이기도 하다. 이 주랑에는 1837년 지암바티스타 메두나(Giovanni Battista Meduna)가 디자인한, 불꽃에서 일어나는 불사조를 묘사한 극장의 상징이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정면에는 비극과 무용의 뮤즈인 멜포메네와 터프시코레를 나타내는 두 개의 조각상이 벽감에 있다. 그 위에는 도메니코 파디가(Domenico Fadiga)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희극비극의 가면이 있다.

오페라하우스 입구를 장식했던 최초의 조각상들은 테라코타바로크 양식으로 조각되었으며, 주세페 베르나르디(Giuseppe Bernardi) 또는 그의 조카인 조반니 페라리(Giovanni Ferrari) 중 한 사람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모두 카노바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1875년 이 조각상들은 심하게 부식되었고, 복원하더라도 정면의 고전 양식과 조화되지 않는다고 판단되어 교체되었다. 아우구스토 벤베누티(Augusto Benvenuti)가 쿠스토자(Custoza) 석재로 제작한 두 개의 새로운 조각상은 건물에 더 잘 어울리는 새로운 스타일로 제작되었다. 1876년 극장 운영진이 벤베누티에게 이 조각상들을 매각한 후 원래 조각상들의 흔적은 모두 사라졌다.

1837년 재건 이후 두 개의 기념비적인 비석이 입구 현관에 세워졌다. 오른쪽에 있는 비석은 1837년 안토니오 지아카렐리(Antonio Giaccarelli)가 지암바티스타 메두나(Giambattista Meduna)의 디자인으로 조각한 것으로, 건축가 지안난토니오 셀바(Giannantonio Selva)를 기리는 내용이다. 왼쪽에 있는 비석은 극작가 카를로 골도니를 기리는 것으로, 루이지 잔도메네기(Luigi Zandomeneghi)의 작품이며, 1830년 12월 26일에 헌정되었던 아트리움에서 옮겨왔다. 지암바티스타 메두나(Giambattista Meduna)의 디자인으로 제작된 새로운 오페라하우스 간판(금색과 파란색)도 1837년 입구 위에 설치되었다.[1]

5. 2. 로비 (Foyer)

1836년 12월 화재 당시, 지안난토니오 셀바(Giannantonio Selva)가 설계한 라 페니체 극장의 입구는 무사했다. 1937년 에우제니오 미오치(Eugenio Miozzi)가 감독한 개선 공사로 로비가 확장되었다.

이때 로비 오른쪽 벽 일부를 철거하여 왼쪽과 대칭적인 모습이 되도록 만들었다. 1935년 객석 소유주들이 베네치아 시에 극장 지분을 양도한 것을 기념하는 명판이 로비 오른쪽 날개에 부착되었다.[3]

1996년 1월 29일 화재 이후 복원 공사 덕분에 로비와 윗층의 아폴로 홀(Sale Apollinee)은 바닥과 관람석 계단 벽 붕괴를 부분적으로 견뎌냈다. 따라서 극장 입구는 건물 원래 요소(장식 일부, 기둥 대부분, 바닥, 관람석 계단 등)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3]

라 페니체 극장의 로비 일부

5. 3. 객석 (House)



1996년 화재로 객석 5단과 무대, 천장이 완전히 파괴되어 원래 건물의 외벽만 남았다.[7]

재건은 건축가 알도 로시(Aldo Rossi)의 설계를 기반으로, 1902년 붕괴된 산 마르코 종탑 재건에 적용되었던 "원래대로, 원래 있던 자리에"라는 모토를 준수하여 원본과 동일하게 10년에 걸쳐 진행되었다.[7] 1836년 첫 번째 화재 이후 메두나 형제가 작성한 포괄적인 재건 보고서와 극장 역사 기록 보관소에 소장된 방대한 사진 자료를 참고하여 로코코 양식의 건물 내부 장식을 재현했다.

공사 속도를 높이기 위해 극장 내 석조 및 목재 골조 공사는 24시간, 7일 내내 진행되었고, 장식 요소들은 여러 외부 작업장에서 제작되어 구조 공사 완료 후 바로 설치되었다.

19세기 당시와 동일한 재료가 사용되었다. 왕실석과 입구의 모든 장식, 천장(소피토네)의 cornice를 구성하는 22개의 네레이드(Nereid)상, 왕실석의 네 개의 푸티(putti)에는 파피에마셰, 목재, 석고가 사용되었다.

최상의 음향 효과를 위해 원래 건물처럼 목재를 주로 사용하고, 특정 기술적 해결책을 재현했다. 목재 건물의 큰 공명상자는 석조 및 철근 콘크리트 바닥의 보호막으로 둘러싸였다.

현장에서 부분적으로 제작된 유일한 장식 요소는 천장으로, 원래 디자인을 재현하여 둥근 천장 착시 효과를 준다. 여기에는 여러 여성 인물(일부는 악기를 들고 있다)과 은총, 음악, 춤, 새벽을 상징하는 젊은 처녀들이 그려져 있다.

샹들리에는 1854년 메두나 형제가 리버풀 장인들에게 의뢰한 금빛 청동 영국산 원본을 재현한 것이다. 객석 벽등 팔도 남은 단 하나의 예시를 따라 만들어졌다.

1854년부터 시작된 건물 장식의 주요 테마는 파피에마셰 장식에 묘사된 아칸서스 잎 숲의 재현으로, 석영 기법으로 작업하고 마노로 광택 처리된 23캐럿 금박으로 장식되었다.

객석 외부 그림에는 악기를 든 천사나 장난스러운 천사들이 있고, 1층에는 고전 시인들의 프로필, 2층에는 역사, 시, 철학, 희극, 비극, 음악을 나타내는 여섯 가지 우화가 있다. 3층에는 건물에서 공연된 가장 중요한 14개 오페라 제목과 저자 명판을 든 푸티들이 있다.

개별 객석 내부 색상은 원래 베이지색에서 파란색이 감도는 녹색 파스텔 색상으로 변경되었다.

라 페니체 극장 무대에서 바라본 모습


현재 오케스트라석 출입구는 1937년 미오지(Miozzi) 엔지니어가 설계했으며, 양쪽에 두 개의 석고 카리아티드(caryatids)로 장식되어 있다. 원래 건물에는 현재 출입구 오른쪽 첫 번째 부분 섹션에 작은 출입구 두 개가 있었는데, 1930년대 후반까지 1층 세 개 객석이 차지하고 있었다.

오케스트라 피트는 이동식 플랫폼을 갖추고 있어, 필요 없을 때는 플랫폼을 오케스트라석 수준으로 올려 앞쪽에 몇 줄의 추가 좌석을 추가할 수 있다. 수용 인원은 104석 증가하여 총 1,126석이 된다. 이동식 플랫폼은 무대 확장을 위해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무대 수준까지 올릴 수도 있다.

커튼은 진한 녹색 방염 합성 벨벳에 금박 가죽 꽃 1,100개로 장식되어 역사적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재현되었다.

5. 4. 로열 박스 (Royal box)

라 페니체 극장, 왕실석


극장 내 최고의 자리는 극장의 역사뿐 아니라 베네치아 도시의 정치적, 역사적 사건과도 관련된 고난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왕실석은 잔난토니오 셀바(Giannantonio Selva)가 처음 라 페니체를 설계할 때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 극장에는 크기가 같은 객석들만 있었다. 베네치아는 1797년 5월 프랑스 제1제정에 독립을 잃었고, 1797년 캄포포르미오 조약 이후 8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넘겨졌으며, 1805년 다시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최초의 제국 로지아(loggia)는 1807년에 나폴레옹 황제를 위해 임시로 지어졌다. 나폴레옹은 1807년 12월 1일 화요일 라우로 코르니아니 알가로티(Lauro Corniani Algarotti)의 칸타타 ''Il Giudizio di Giove'' 공연을 관람할 예정이었다. 건설을 위해 2층과 3층의 중앙 객석 3개를 철거해야 했다.

1808년 건축가 잔난토니오 셀바는 주세페 보르사토(Giuseppe Borsato)의 도움을 받아 장식한 최종 모델을 만들었다. 이것은 1836년 12월 라 페니체를 강타한 화재로 파괴되었고, 1837년 메두나(Meduna) 형제가 주세페 보르사토의 도움을 받아 극장 나머지 부분과 함께 재건되었으며, 보르사토는 장식의 화려함을 더했다. 1815년 빈 회의 이후 베네치아는 다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848년 3월 말, 봉기와 베네치아 공화국의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독립 선언 이후 로지아는 철거되어 소위 "공화국" 극장의 원래 객석이 복원되었다. 19세기 초까지 극장 중앙에 있던 여섯 개의 객석이 재건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황실 정부가 돌아와 1849년 8월 22일 원래 형태로 로지아를 재건할 것을 명령했다. 장식은 다시 주세페 보르사토에게 맡겨졌고, 70세가 넘은 그는 이전보다 더 화려한 디자인으로 재작업했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었고, 그의 객석은 1850년 1월 그의 미망인 마리아 보나데이 보르사토(Maria Bonadei Borsato)의 참석하에 공개되었다. 제국 로지아는 1866년 베네토가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되면서 마침내 왕실석이 되었다.

이탈리아 왕실의 상징은 여전히 객석 내부 측벽에 새겨져 있다. 외부 처마 장식의 꼭대기에는 세 번째 사보이아 문장이 있었지만, 1946년 6월 2일 국민투표에서 공화국의 승리 이후 제거되고 베네치아의 상징인 산 마르코의 사자로 대체되었다.

벽 모서리에는 상아색으로 칠한 나무 풋티(putti)가 네 개의 금박 나무 촛대에 놓여 있다. 종이 마셰로 장식된 나무 천장에는 화가 레오나르도 가바그닌(Leonardo Gavagnin)의 원작 ''과학과 예술의 신격화'' 그림의 복제품이 있다. 왕실석은 또한 손님들에게 독립된 출입구를 갖춘 개인실을 제공한다.

5. 5. 살레 아폴리네 (Sale Apollinee)

살레 아폴리네(Sale Apollinee)는 뮤즈의 아버지이자 음악 등 예술의 수호신인 아폴론에게 헌정된 공간으로, 1937년부터 현재와 같은 5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방들은 현재 1층 박스석과 객석을 이용하는 관객들이 중간 휴식 시간에 사용한다. 원래는 극장 공연이 없을 때에도 사용되었으며, 낮에는 바가 문을 열고 한 방에는 당구대가 있었다.

정문 꼭대기에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에게 헌정하는 의미로 태양 상징이 있다. 아폴론 방은 발레 공연장으로 여겨졌는데, 이는 루이 14세가 발레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루이 14세는 밤의 왕궁 발레에서 춤을 추었고, 마지막 작품에서는 금빛 광선의 킬트를 입은 아폴론으로 등장하여 태양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1996년 대화재 때 극장은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살레 아폴리네는 약 5분의 1이 살아남았다. 복원 작업은 역사적인 부분과 최근 추가된 부분의 차이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살아남은 파편들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천장 처마돌림띠(cornice)와 벽에 남아 있는 장식용 스투코의 원래 부분은 색이 더 어두운데, 이는 화재의 흔적이다. 일부 문의 대리석 프레임은 다른 색의 새로운 대리석으로 수리되었고, 마리아 몰리브란 전용 방에는 전형적인 베네치아 테라조와 혼합된 새로운 바닥이 남아 있다.

살레 아폴리네는 원본을 바탕으로 재건되었지만, 새로운 덮개와 가구 등에서는 극장보다 더 넓은 범위의 선택이 허용되었다.

5. 5. 1. 살라 단테 (Sala Dante)

이 방은 단테 알리기에리 탄생 600주년을 기념하여 1865년에 문을 열었다. 이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화가 자코모 카사(Giacomo Casa)는 장식 천장틀 안에 이탈리아가 위대한 시인에게 관을 씌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형 작품과 신곡의 장면 여섯 개를 담은 템페라 벽화 여섯 점을 그렸다. 1867년 안토니오 에르몰라오 파올레티(Antonio Ermolao Paoletti)의 다른 템페라 작품으로 그중 두 점이 교체되었다.

1976년 9월, 살라 구이디(Sala Guidi)로 이름이 바뀐 이 방의 벽과 천장은 베네치아 화가 비르질리오 구이디(Virgilio Guidi)의 작품으로 장식되었는데, 이는 단테의 장면들을 덮었다. 그러나 1996년 화재로 이 그림들이 소실되어 카사의 원래 장식 일부가 드러났으며, 현재는 그 이해를 돕기 위해 시노피아(sinopia)로 보완되었다.

5. 5. 2. 살라 그란데 (Sala Grande)

Sala Grandeit (살라 그란데) 또는 무도장은 입구 정면 중앙의 세 개의 창문으로 밝혀지는 5개의 Sale Apollineeit (살레 아폴리네) 중 가장 큰 방이다.

살라 그란데는 무도회, 실내악 연주회, 회의, 출판 기념회, 리허설 장소(라 페니체에 특별한 공간이 마련되기 전)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6] 1935년에는 이사회 회의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1996년 1월 29일 밤 화재로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원래 모델을 충실히 재건축되었다.[6]

포이에 위 바닥은 화재 후 붕괴되었고 모서리 부분만 남았다. 현재 바닥은 단풍나무, 올리브나무, 체리나무 등 다양한 종류의 나무를 사용하여 특징적인 꽃무늬를 재현하는 등 원래 모델을 충실히 재현하였다. 벽 색상 또한 원래와 같다. 상층부 세 개의 문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갤러리가 방 상단 둘레를 따라 이어진다.[6]

6. 새로운 방 (New rooms)

"있는 그대로, 있던 그곳에"라는 모토는 1996년 화재 이전과 같이 오페라 하우스를 재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7]

하지만 이 원칙은 역사적, 예술적 중요성이 특별한 공간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범주에 속하지 않는 건물 부분을 재설계할 기회를 얻어 세 개의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다.[7]

7. 소설 속 페니체 극장

도나 레온의 데뷔 소설이자, 과르도 브루네티 형사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 라 페니체에서의 죽음(1992)은 라 페니체 극장에서 열린 트라비아타 공연 중 유명한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청산가리 중독으로 사망하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소설 속 여러 장면에서 세 번째 화재 이전 당시의 라 페니체 극장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참조

[1] 서적 Beauvert 1995
[2] 서적 Romanelli 1997
[3] 웹사이트 La Fenice's website account of the Meduna brothers' design http://www.teatrolaf[...]
[4] 간행물 Acoustics of the Former Teatro La Fenice in Venice http://www.aes.org/e[...] 1997-12
[5] 뉴스 Two jailed for Venice opera arson http://news.bbc.co.u[...] 2001-03-30
[6] 웹사이트 Opera Chic: La Fenice's Pyromaniac Is Free To Set Big Stuff on Fire Again http://operachic.typ[...] 2018-05-13
[7] 뉴스 La Fenice Reopens on 12 November http://www.operatoda[...] 2004-11-12
[8] 웹사이트 Penguin Reading Guides http://www.us.peng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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