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위천 에흐베르튀스 얀 브라우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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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위천 에흐베르튀스 얀 브라우어르(Luitzen Egbertus Jan Brouwer, 1881–1966)는 네덜란드의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위상수학 분야의 업적과 수학적 직관주의를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브라우어르는 고정점 정리, 차원 불변성 등 위상수학의 주요 정리를 증명했으며, 다비트 힐베르트의 형식주의에 반대하여 수학적 개념은 인간의 직관에 기반해야 한다는 직관주의를 주창했다. 그는 배중률을 거부하는 집합론과 함수론을 개발했으며, 1920년대 힐베르트와의 갈등으로 인해 수학 연보 편집자에서 해임되기도 했다. 말년에는 고립감과 편집증에 시달리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라위천 에흐베르튀스 얀 브라우어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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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츠엔 에흐베르튀스 얀 브라우어르
본명라이츠엔 에흐베르튀스 얀 브라우어르
출생1881년 2월 27일
출생지오베르스히
사망1966년 12월 2일
사망지블라리큄
국적네덜란드
학문 분야
분야수학
모교암스테르담 대학교
직장암스테르담 대학교
박사 학위 지도 교수디데리크 코르터베흐
박사 학위 학생아렌트 헤이팅, Frans Loonstra
학위 논문 제목수학의 기초에 관하여
학위 논문 URL수학의 기초에 관하여
학위 논문 년도1907년
영향이마누엘 칸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영향을 줌헤르만 바일, 미카엘 더밋,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주요 업적브라우어르-힐베르트 논쟁
브라우어르 부동점 정리
브라우어르-헤이팅-콜모고로프 해석
조르당-브라우어 분리 정리
클레이네-브라우어 순서
프라그먼-브라우어 정리
티체-우리손-브라우어 확장 정리
단체 근사 정리
막대 귀납법
연속 함수의 차수
분해 불가능성
분해 불가능 연속체
영역의 불변성
확산
털난 공 정리 증명
직관주의
알려진 것부동점 정리, 직관주의
수상
수상왕립 학회 외국인 회원
가족 관계
친척헨드릭 알베르튀스 브라우어르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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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881년 네덜란드의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난 브라우어르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오페르스히(현재는 로테르담의 일부)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897년 암스테르담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9세에 고등 시민 학교에 입학하여 당시 네덜란드 최연소 기록을 세웠다. 그는 KdV 방정식으로 유명한 디데릭 요하네스 코르터베흐, 헤리트 만누리에 등에게 수학을 배웠다.

브라우어르는 학부생 시절인 1904년 4차원 공간 상의 연속적 운동에 관한 결과를 발표하며 학문적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브라우어르 고정점 정리, 차수와 차원의 위상 불변량 등 위상수학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쌓아 당시 신생 학문이던 위상수학의 주요 개척자가 되었다. 1907년에 제출한 박사 논문에서는 힐베르트 제5 문제의 부분적 해결을 제시했다.

브라우어르는 다비트 힐베르트 등이 주도한 형식주의에 맞서 직관주의를 창시했다. 그는 수학적 구성주의의 한 형태인 직관주의를 통해 수학적 개념이 인간의 직관적 구성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5년 24세의 나이에 《삶, 예술, 신비주의》라는 책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학계에서 논쟁적인 인물이었다. 자신의 철학에 반하는 강의를 거부하고, 권위 있는 수학 저널인 《수학 연보》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1920년대 힐베르트와의 대립은 베를린 대학교와 괴팅겐 대학교 간의 대결로 이어졌고, 브라우어르가 자신을 독일 아리아 정신의 수호자로 칭하면서 이념 논쟁으로 번지기도 했다. 결국 브라우어르가 동유럽 출신 유대인의 논문 투고 금지를 주장하자 힐베르트는 그를 《수학 연보》 편집자 직위에서 해임했다.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 당시, 브라우어르는 유대인을 숨겨주는 등 나치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후 나치당과의 관계로 인해 교수직에서 잠시 배제되기도 했다.

브라우어르는 말년에 학계에서 고립되었고, 근거 없는 재정적 걱정과 편집증에 시달렸다. 1966년, 그는 집 앞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1. 초기 생애와 교육

1881년 네덜란드의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암스테르담 근교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뛰어난 성적으로 14세에 학업을 마쳤다. 그러나 대학 입시에 필요한 그리스어라틴어를 공부하느라 2년이 더 지나서야 암스테르담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2.2. 학문적 업적과 직관주의

암스테르담 대학교에서 학부생이던 1904년에 4차원 공간 상의 연속적 운동에 관한 결과를 출판한 것을 시작으로, 브라우어르는 브라우어르 고정점 정리나 차수와 차원의 위상 불변량 등 위상수학에 관한 많은 업적을 쌓았다. 이로써 당시 새로운 학문이던 위상수학 분야의 주요 개척자가 되었다. 특히 중요한 업적으로는 고정점 정리, 차수의 위상적 불변성, 차원의 위상적 불변성 등이 있다.

브라우어르는 대수적 위상수학의 기초에서 단순 근사 정리를 증명하여, 단순 복합체를 충분히 세분화한 후 일반적인 연속 사상의 처리를 조합론적 용어로 줄이는 것을 정당화했다. 1912년에는 네덜란드 왕립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고, 1943년에는 미국 철학 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브라우어르는 다비트 힐베르트 등이 주도하던 형식주의에 도전하며 직관주의를 창시했다. 수학적 구성주의의 한 변형인 직관주의는 수학적 개념이 인간의 직관적인 구성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수학철학 사조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그는 자신의 철학적 신념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학 전반을 재구성하려는 독단적인 캠페인에 착수하였다.

1905년, 24세의 나이에 《삶, 예술, 신비주의》라는 짧은 논문에서 자신의 인생 철학을 표현하였으며, 박사 학위 논문에서는 논리의 기초에 관한 러셀푸앵카레의 논쟁에 참여하였다. 지도 교수 디데릭 코르터베흐의 조언에 따라 한동안 "일반적인" 수학 연구에 집중하였으나, 1912년 힐베르트의 도움으로 암스테르담 대학에서 안정적인 교수직을 얻게 된 후 다시 직관주의 프로젝트로 돌아갔다.

1908년 논문에서 모든 진술이 참이거나 거짓이라는 배중률의 원칙을 부정한 바 있는 브라우어르는, 이후 배중률을 사용하지 않는 집합론과 함수론을 개발하였고, 모든 실수가 소수 전개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집합의 구성에 있어 원소가 집합에 속하는지의 여부가 유한한 단계에 걸쳐 결정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이론 컴퓨터 과학의 기초가 되고 있다.

브라우어는 자신의 직관주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수학은 본질적으로 언어와 무관한 활동이다.
* 수학은 심적 구성 활동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 수학은 시간의 직관을 전제해야 한다.
* 수학적 구성은 논리에 선행한다.

브라우어는 수학을 심적 행위의 시스템으로 파악했지만, 언어적인 조작 가능성과 일치하는 필연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따라서 현대적인 관점과는 반대로, 수학의 무언어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는 수학의 가능성을 보증하는 것으로 시간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임마누엘 칸트시간의 직관에서 그 보증을 찾았다. 이 때문에 브라우어는 자신의 입장을 직관주의(intuitionism)라고 부르게 되었다.

2.3. 학계와의 갈등과 말년

다비트 힐베르트 등 수학계 주류의 형식주의에 도전하며 직관주의를 창시한 브라우어르는, 자신의 철학에 반하는 내용의 강의를 거부하고 당시 권위 있던 수학 저널인 《수학 연보》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다. 1920년대에 그와 힐베르트의 대립은 베를린 대학교와 괴팅겐 대학교 간의 갈등으로 번졌고, 브라우어르가 자신을 독일 아리아 정신의 수호자로 지칭하면서 이념 논쟁으로까지 번졌다. 결국 브라우어르가 동유럽 출신 유대인의 논문 투고 금지를 주장하자, 힐베르트는 그를 《수학 연보》 편집자 직위에서 해임하였다.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 시기, 브라우어르는 유대인을 숨겨주는 등 나치에 동조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전후에 나치당과의 관계로 인해 교수직에서 잠시 배제되기도 했다.

브라우어르는 생애 후반에 학계에서 고립되었고, 근거 없는 재정적 걱정과 편집증에 사로잡혀 말년을 보냈다. 1966년, 그는 집 앞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한편, 그의 제자 아런트 헤이팅은 직관주의 수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네덜란드의 수학자이자 수학 역사가인 바르털 레인더르트 판데르바르던은 브라우어르의 강의에 참여한 뒤, "그는 직관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옳지 않다는 이유로 더 이상 위상수학에서의 결과를 확신하지 못하는 모양이었고, 자신의 철학에 따라 스스로의 최대 업적을 포함한 모든 과거의 결과들을 거짓으로 판단하였다."라고 회고하였다.

3. 주요 업적

브라우어는 위상수학과 수학기초론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경력 초기에 위상수학 분야에서 고정점 정리, 차원의 위상적 불변성, 차원의 위상적 불변성 과 같은 여러 정리를 증명했다. 또한 대수적 위상수학의 기초에서 단순 근사 정리를 증명했다.

데이비드 힐베르트 등이 제시한 형식주의에 반대하며, 직관주의를 확립했다. 직관주의는 구성 수학의 한 종류이며, 수학의 기초에 대한 철학이다.

3.1. 위상수학

브라우어는 경력 초기에 위상수학 분야에서 여러 중요한 정리를 증명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고정점 정리, 차원의 위상적 불변성, 그리고 차원의 위상적 불변성이다. 이 중 브라우어 고정점 정리는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며, 차수의 위상적 불변성의 귀결이다. 차원의 위상적 불변성은 증명이 가장 어려운 정리로 알려져 있다.

브라우어는 대수적 위상수학의 기초가 되는 단순 근사 정리를 증명하여, 단순 복합체를 충분히 세분화하면 연속 사상을 조합론적으로 다룰 수 있음을 보였다.

3.2. 직관주의 수학

브라우어는 데이비드 힐베르트와 그의 협력자들이 제기한 형식주의에 반대하는 직관주의를 설립했다. 직관주의는 구성 수학의 한 종류로, 수학의 기초에 대한 철학이다.

직관주의는 추종자들이 배중률을 수학적 추론에서 일반적인 공리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갖는다. 비록 배중률이 몇몇 특수한 경우에는 정리로 증명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인정되지 않는다.

브라우어는 기호학 그룹의 회원이었다. 이 그룹은 빅토리아 레이디 웰비를 중심으로 기호학의 초기 역사의 일부를 형성했다. 브라우어의 직관주의의 원래 의미는 그 그룹의 지적 환경과 분리될 수 없을 것이다.

브라우어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모든 개념이 근본적으로 감각적 직관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신념을 충족시키기 위해 수학적 실천을 처음부터 재구성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1908년, 브라우어는 '논리의 원칙의 신뢰성'이라는 논문에서 고전 논리의 규칙이 절대적인 타당성을 갖는다는 믿음에 도전했다.

이후 브라우어는 자신의 논쟁적인 아이디어를 잠시 감추고 수학적 기량을 증명하는 데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1910년까지 그는 고정점 정리를 포함한 몇 개의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다. 형식주의자인 힐베르트는 브라우어를 존경했고, 그가 암스테르담 대학교에서 정규적인 학문적 임명을 받는 데 도움을 주었다(1912). 그 후 브라우어는 자신의 혁명적인 프로젝트인 '직관주의'로 돌아갈 자유를 느꼈다.

1920년경부터 브라우어는 고전 수학적 실천에 대한 비판을 시작했다. 브라우어의 기본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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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내용
1수학은 본질적으로 언어와 무관한 활동이다.
2수학은 심적 구성 활동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3수학은 시간의 직관을 전제해야 한다.
4수학적 구성은 논리에 선행한다.


브라우어는 수학을 심적 행위의 시스템으로 파악했지만, 언어적인 조작 가능성과 일치하는 필연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따라서 현대적인 관점과는 반대로, 수학의 무언어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또한, 수학의 가능성을 보증하는 것으로 시간만을 필요로 하고 공간은 필요없다고 생각하여, 그 보증을 임마누엘 칸트시간의 직관에 두었다. 그 때문에, 브라우어는 자신의 입장을 직관주의(intuitionism)라고 표방하게 되었다.

그러나 브라우어는 1920년대 후반 수학 연보의 편집 정책을 놓고 힐베르트와 매우 공개적이고 굴욕적인 논쟁에 휘말렸다. 아브라함 프랭켈에 따르면, 브라우어는 게르만 아리아주의를 옹호했으며, 힐베르트는 브라우어가 오스트유덴의 기고에 반대하자 그를 수학 연보 편집 위원회에서 제거했다.

브라우어는 말년에 비교적 고립되었다. 직관주의의 발전은 그의 제자 아렌트 헤이팅이 이어받았다. 바르텔 렌데르트 판 데르 바에르덴은 브라우어가 후년에 진행한 강의에 참석했고, 브라우어가 자신의 위상수학적 결과가 직관주의 관점에서 옳지 않다고 판단하여 더 이상 확신하지 못하고, 자신의 철학에 따르면 잘못된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4. 철학 및 사상

브라우어르는 네덜란드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나, 1897년 암스테르담 대학교에서 수학을 공부하면서 철학신비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졌다. 이는 훗날 그의 직관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브라우어르는 당시 주류였던 형식주의에 반대하며 직관주의를 주창했다. 구성 수학의 한 종류인 직관주의는 수학의 기초에 대한 철학으로, 배중률을 보편적인 공리로 인정하지 않는다.

1905년, 24세의 브라우어는 "생명, 예술, 신비주의"라는 짧은 논문에서 자신의 인생 철학을 표현했는데, 이는 마틴 데이비스에게 "낭만적 비관주의"로 묘사되기도 했다.(Davis (2002), p. 94).

1907년 박사 논문 『수학의 기초에 관하여』에서 브라우어르는 힐베르트 제5 문제에 대한 부분적 해결을 제시하는 한편, 자신의 직관주의적 관점을 드러냈다. 그는 수학이 수학자의 심적 구성 활동이며, 수, 함수, 집합 등은 심적 구성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논리주의나 형식주의는 수학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1920년경부터 브라우어르는 고전 수학에 대한 비판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수학을 언어와 무관한 심적 구성 활동으로 보았으며, 시간의 직관을 전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수학적 구성은 논리에 선행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유로 자신의 입장을 직관주의라 칭했다.

4.1.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영향

칸트는 시간을 순수 직관의 형태로 보았고, 이러한 개념은 브라우어르의 직관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 브라우어르는 수학이 시간의 직관을 전제해야 하며, 수학적 구성은 논리에 선행한다고 주장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모든 개념이 근본적으로 감각적 직관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브라우어르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브라우어르는 자신의 철학적 신념을 바탕으로 수학적 실천을 재구성하고자 했다.

4.2. 기호학 그룹과의 관계

브라우어는 기호학 그룹의 일원이었다. 이 그룹은 빅토리아 레이디 웰비를 중심으로 기호학의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브라우어의 직관주의는 이 그룹의 지적 환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4.3. 생명, 예술, 신비주의

네덜란드 개신교 부모에게서 태어난 브라우어는 1905년, 24세 때 쓴 짧은 논문 "생명, 예술, 신비주의"에서 자신의 인생 철학을 표현했다. 이 논문은 수학자 마틴 데이비스에 의해 "낭만적 비관주의에 젖어있다"고 묘사되었다(Davis (2002), p. 94).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브라우어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그가 모든 개념이 근본적으로 감각적 직관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1907년에 제출된 그의 박사 논문 『수학의 기초에 관하여(On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에는 그의 직관주의로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담겨 있었다.

5. 브라우어르의 직관주의

브라우어르는 네덜란드 개신교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데이비드 힐베르트를 비롯하여 파울 베르나이스, 빌헬름 아커만, 존 폰 노이만 등 그의 협력자들이 제기한 형식주의에 맞서, 직관주의를 설립했다. 직관주의는 구성 수학의 한 종류이며, 수학의 기초에 대한 철학이다.

1905년, 24세의 브라우어는 짧은 논문 "생명, 예술, 신비주의"에서 그의 인생 철학을 표현했는데, 이 논문은 수학자 마틴 데이비스에 의해 "낭만적 비관주의에 젖어있다"고 묘사되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브라우어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그가 모든 개념이 근본적으로 감각적 직관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1897년 암스테르담 대학교에서 수학을 배울 무렵부터 철학·신비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것이 후의 직관주의 수학에 영향을 주게 된다. 1907년에 제출된 박사 논문 『수학의 기초에 관하여』에서는 힐베르트 제5 문제의 부분적 해결을 제시했지만, 처음에는 이 논문에 그 특유의 철학을 개진한 부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지도교수의 지시에 따라 이 철학적 부분은 대폭 삭감되었지만, 그의 직관주의로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주장은 남겨졌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신념을 충족시키기 위해 수학적 실천을 처음부터 재구성하는 자부심에 찬 캠페인에 착수"했다. 그의 논문 지도 교수는 그의 2장을 "그대로, ... 수학이 아니고 수학의 기초와 아무 관련이 없는 일종의 비관주의와 신비주의적 태도로 뒤섞여 있어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8년에 브라우어는 '논리의 원칙의 신뢰성'이라는 논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본질적으로 전해져 내려온 고전 논리의 규칙이 적용되는 대상과 무관하게 절대적인 타당성을 갖는다는 믿음에 도전했다.

"그의 논문을 완성한 후, 브라우어는 잠정적으로 그의 논쟁적인 아이디어를 감추고 그의 수학적 기량을 증명하는 데 집중하기로 의식적인 결정을 내렸다".

5.1. 직관주의의 기본 원리

브라우어르는 수학을 언어와 무관한 심적 구성 활동으로 보았다. 그는 수학이 시간의 직관을 전제로 하며, 수학적 구성은 논리에 선행한다고 주장했다. 브라우어르는 수학을 심적 행위의 시스템으로 파악했지만, 언어적 조작 가능성과 일치하는 필연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수학의 무언어성을 강조했으며, 수학의 가능성을 보증하는 것은 시간뿐이라고 생각했다. 브라우어르는 이러한 보증을 칸트시간의 직관에서 찾았고, 자신의 입장을 직관주의라고 불렀다.

5.2. 직관주의와 형식주의의 비교

데이비드 힐베르트를 비롯하여 파울 베르나이스, 빌헬름 아커만, 존 폰 노이만 등 그의 협력자들이 제기한 형식주의에 맞서, 브라우어르는 직관주의를 설립했다. 직관주의는 구성 수학의 한 종류이며, 수학의 기초에 대한 철학이다.

브라우어르는 빅토리아 레이디 웰비를 중심으로 기호학의 초기 역사의 일부를 형성했던 기호학 그룹의 회원이었다. 그의 직관주의의 원래 의미는 그 그룹의 지적 환경과 완전히 분리될 수 없을 것이다.

1905년, 24세의 브라우어르는 짧은 논문 "생명, 예술, 신비주의"에서 자신의 인생 철학을 표현했는데, 이 논문은 수학자 마틴 데이비스에 의해 "낭만적 비관주의에 젖어있다"고 묘사되었다(Davis (2002), p. 94).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브라우어르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그가 모든 개념이 근본적으로 감각적 직관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1920년경부터 브라우어르는 고전 수학적 실천에 대한 비판을 시작했다. 그 출발점이 되는 브라우어르의 기본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

* 수학은 본질적으로 언어와 무관한 활동이다.
* 수학은 심적 구성 활동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 수학은 시간의 직관을 전제해야 한다.
* 수학적 구성은 논리에 선행한다.

브라우어르는 수학을 심적 행위의 시스템으로 파악했지만, 언어적인 조작 가능성과 일치하는 필연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따라서 현대적인 관점과는 반대로, 수학의 무언어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또한, 그 심적 행위인 수학의 가능성을 보증하는 것으로 필요한 것은 시간뿐이며 공간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 브라우어르는, 그 보증을 임마누엘 칸트시간의 직관에 구했다. 그 때문에, 브라우어르는 자신의 입장을 직관주의(intuitionism)라고 표방하게 되었다.

직관주의는 때때로 (단순하게) 추종자들이 배중률을 수학적 추론에서 일반적인 공리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특징지어진다. 비록 이는 몇몇 특수한 경우에 정리로 증명될 수 있지만 말이다.

5.3. 직관주의의 영향

브라우어는 직관주의를 설립했는데, 이는 데이비드 힐베르트와 그의 협력자들인 파울 베르나이스, 빌헬름 아커만, 존 폰 노이만 등이 제기한 당시 지배적이었던 형식주의에 대한 대안이었다. 직관주의는 구성 수학의 한 종류로, 수학의 기초에 대한 철학이다.

직관주의는 추종자들이 배중률을 수학적 추론에서 일반적인 공리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갖는다. 비록 배중률이 몇몇 특수한 경우에는 정리로 증명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인정되지 않는다.

브라우어는 기호학 그룹의 회원이었다. 이 그룹은 빅토리아 레이디 웰비를 중심으로 기호학의 초기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브라우어의 직관주의의 원래 의미는 이 그룹의 지적 환경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다.

브라우어는 수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 수학은 본질적으로 언어와 무관한 활동이다.
* 수학은 심적 구성 활동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 수학은 시간의 직관을 전제해야 한다.
* 수학적 구성은 논리에 선행한다.

브라우어는 수학을 심적 행위의 시스템으로 파악했지만 언어적인 조작 가능성과 일치하는 필연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수학의 무언어성을 강조하였으며, 그 심적 행위인 수학의 가능성을 보증하는 것으로 시간만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임마누엘 칸트의 '시간의 직관'에 그 보증을 구했고, 자신의 입장을 '직관주의'(intuitionism)라고 칭했다.

브라우어는 말년에 상대적으로 고립된 생활을 했다. 직관주의의 발전은 그의 제자인 아렌트 헤이팅이 이어받았다. 바르텔 렌데르트 판 데르 바에르덴은 브라우어가 말년에 진행한 강의에 참석했는데, 브라우어는 자신의 위상수학적 결과가 직관주의의 관점에서 옳지 않다고 판단하여 더 이상 확신하지 못했고, 자신의 철학에 따라 이전에 했던 모든 것을 잘못된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6. 저작 목록

브라우어르의 Collected Works영어는 두 권으로 출판되었다.

* 제1권 (1975), 암스테르담: 노스-홀랜드.
* 제2권 (1976), 암스테르담: 노스-홀랜드.

1907년에 제출된 박사 논문 ‘수학의 기초에 관하여(On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에서는 힐베르트 제5 문제의 부분적 해결을 제시했다.

6.1. 영어 번역본

장 반 헤이에노르트의 수학 논리 소스북, 1879-1931(1967년 3판, 1976년 수정판)에는 다음과 같은 브라우어르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 1923년: "수학, 특히 함수 이론에서 배제된 중간 법칙의 의미에 관하여." (두 개의 부록과 정정 사항 포함)
* 1927년: "함수의 정의 영역에 관하여."
* 1927년: "형식주의에 대한 직관주의적 고찰."

에발트, 윌리엄 B. 편집의 칸트에서 힐베르트까지: 수학 기초 소스북(1996)에는 다음과 같은 브라우어르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 1928년: "수학, 과학 및 언어."
* 1928년: "연속체의 구조."
* 1952년: "직관주의의 역사적 배경, 원리 및 방법."

브라우어르의 전집은 두 권으로 출판되었다.

* 제1권 (1975), 암스테르담: 노스-홀랜드.
* 제2권 (1976), 암스테르담: 노스-홀랜드.

브라우어르의 "생명, 예술, 그리고 신비주의"는 W. P. 반 스티히트가 번역하여 노트르담 형식 논리 저널에 수록되었다(1996).

6.2. 기타 저작

1907년에 제출된 박사 논문 ‘수학의 기초에 관하여(On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에서는 힐베르트 제5 문제의 부분적 해결을 제시했지만, 처음에는 이 논문에 그 특유의 철학을 개진한 부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코르테베흐의 지시에 따라 이 철학적 부분은 대폭 삭감되었지만, 그의 직관주의로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주장은 남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