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제 울리케 폰 프로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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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제 울리케 폰 프로이센은 프로이센의 공주로, 스웨덴의 아돌프 프레드리크와 결혼하여 스웨덴 왕비가 되었으며, 이후 왕대비가 되었다. 그녀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딸이자 프리드리히 2세의 여동생으로, 스웨덴 왕세자빈 시절부터 정치에 관여하며 절대 군주제를 지향했다. 남편 아돌프 프레드리크가 스웨덴 국왕이 된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으나, 1756년 쿠데타 실패, 7년 전쟁에서의 패전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아들 구스타브 3세의 쿠데타를 지지했으나, 이후 아들과의 불화로 갈등을 겪었으며, 1782년 사망했다. 그녀는 구스타브 3세와 칼 13세를 포함한 다섯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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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제 울리케 폰 프로이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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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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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스웨덴 왕비 |
재위 기간 | 1751년 3월 25일 – 1771년 2월 12일 |
대관식 | 1751년 11월 26일 |
배우자 | 아돌프 프레드리크, 스웨덴 국왕 (1744년 결혼, 1771년 사망) |
자녀 | 구스타프 3세 칼 13세 프레드리크 아돌프, 외스테르예틀란드 공작 소피아 알베르티나, 케들린부르크 수도원장 |
가문 | 호엔촐레른 가문 |
아버지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
어머니 | 조피 도로테아 폰 하노버 |
출생일 | 1720년 7월 24일 |
출생지 | 베를린, 프로이센 왕국 |
사망일 | 1782년 7월 16일 |
사망지 | 스바르트셰, 스웨덴 |
매장지 | 리다르홀멘 교회 |
이름 | |
스웨덴어 | Lovisa Ulrika |
독일어 | Luise Ulrike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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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프로이센 왕국의 공주로 베를린에서 태어났으며, 프로이센 왕국의 부국강병을 이끈 프리드리히 2세의 여동생이다. 당시 스웨덴에서는 자녀가 없던 프레데리크 1세 국왕의 후계자를 찾는 과정에서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은 홀슈타인고트로프 가의 아돌프 프레드리크가 왕위 계승자로 결정되었다. 이후 프로이센과의 정치적 연대를 위해 루이제 울리케는 1744년 아돌프 프레드리크와 결혼하여 스웨덴으로 건너갔다.
결혼 선물로 받은 드로트닝홀름 궁전을 중심으로 계몽시대의 문화를 후원하며 초기에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점차 정치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1751년 남편 아돌프 프레드리크가 국왕으로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지만, 스웨덴 의회가 강한 권한을 가진 정치 현실에 불만을 품고 절대 군주제 복원을 위한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756년 발발한 7년 전쟁에서 스웨덴이 프로이센을 상대로 참전했으나 패전을 거듭하자, 루이제 울리케는 오빠인 프리드리히 2세와의 중재에 나서 1762년 함부르크 조약 체결에 기여했다. 정치적 좌절 속에서 아들 구스타브 3세에게 기대를 걸고 왕권 강화를 위한 교육에 힘썼다.
1771년 남편 아돌프 프레드리크가 사망하고 아들 구스타프 3세가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1772년 구스타프 3세가 쿠데타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자 이를 지지했으나, 이후 아들과의 정치적 견해 차이 및 왕세자의 적통성 문제에 대한 의혹 제기 등으로 인해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말년에는 고립된 생활을 하다가 1782년 스바르트셰궁에서 사망했으며, 유해는 스톡홀름의 리다르홀멘 교회에 안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 (1720-1744)
프로이센 왕국의 베를린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국왕과 조피 도로테아 폰 하노버 왕녀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형제자매로는 바이로이트의 빌헬미네, 훗날 프로이센 왕국의 부국강병을 이끈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왕), 남동생 프로이센의 아우구스투스 빌헬름 공, 여동생 프로이센의 조피 도르테아 공주 등이 있었다. 울리카라는 이름은 스웨덴의 울리카 엘레오노라 여왕이 그녀의 대모였기 때문에 받은 이름이다.[1] 그녀는 대모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한때 울리카 엘레오노라 여왕이 루이제 울리케의 아버지와 혼담이 오갔던 인연으로 미래에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아들과 결혼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1] 그러나 울리카 엘레오노라에게는 자녀가 없었다.루이제 울리케는 아름답고 지적이었으며, 격렬한 성격과 강한 의지를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1] 프랑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 출신 위그노 가정교사 마르트 드 루쿨(Marthe de Roucoulle)과 총독 마투린 베이시에르 라 크로즈(Maturin Veyssière La Croze)에게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 그녀의 지적 관심사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게 제지당하지 않았는데, 이는 아들들의 학문 탐구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아버지에게 특별히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1] 그녀는 오빠인 프리드리히 2세와 과학 및 문화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며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형제자매 중에서는 남동생 아우구스투스 빌헬름 공과 여동생 조피 도르테아 공주를 특히 아꼈다.[1] 어머니의 궁정에서는 볼테르를 소개받아 평생 서신을 교환했으며, 모페르튀와도 교류했다.
1732년부터 여러 왕가와의 혼담이 오갔다. 영국의 웨일스 공 프리드리히 루이스,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 헤센-다름슈타트의 루트비히 9세 등이 후보로 거론되었으나,[1] 어느 것도 성사되지 못했다. 1743년에는 퀘들린부르크 수도원의 공동 보좌관으로 임명되어 장차 수녀원장이 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녀 자신은 이러한 미래에 만족하지 않았다.
한편, 스웨덴에서는 자녀가 없던 프레드리크 1세 국왕의 후계자를 정하는 문제가 논의되고 있었다. 당시 스웨덴은 헤센가 출신인 프레드리크 1세의 통치 하에 있었고, 러시아는 홀슈타인고트로프가 출신을, 덴마크는 자국의 올덴보르 왕조 출신을 스웨덴 왕위 계승자로 내세우려 했다. 스웨덴 의회는 고심 끝에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홀슈타인고트로프가의 아돌프 프레드리크를 왕위 계승자로 선출했다.
아돌프 프레드리크의 신붓감을 찾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덴마크의 루이세 공주가 거론되었으나, 스웨덴, 러시아, 프로이센 간의 삼각 동맹을 위한 왕가 간 결혼 계획으로 변경되었다.[1] 이에 따라 아돌프 프레드리크는 프로이센 왕가의 공주와, 러시아의 황태자(훗날 표트르 3세)는 프로이센이 추천한 안할트-체르프스트의 조피(훗날 예카테리나 2세)와 결혼하기로 합의되었다.[1] 프로이센에서는 루이제 울리케와 그녀의 여동생 프로이센의 안나 아말리아 공주가 후보로 올랐다. 베를린 주재 스웨덴 특사 칼 루덴셸드(Carl Rudenschöld)는 두 공주를 직접 만나본 후 루이제 울리케를 추천했다.[1] 프리드리히 2세는 개인적으로 동생 안나 아말리아를 스웨덴 왕비로 보내고 싶어 했다. 그는 스웨덴 대표들에게 안나 아말리아가 마음씨가 곱고 스웨덴에 더 적합한 반면, 루이제 울리케는 오만하고 성미가 급하며 음모를 꾸미는 기질이 있다고 평했다.[1] 이는 프리드리히 2세가 강한 의지를 지닌 루이제 울리케보다 안나 아말리아가 스웨덴에서 프로이센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더 용이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1] 그러나 아돌프 프레드리크와 상의한 스웨덴 측은 루이제 울리케를 선택했고, 프리드리히 2세는 1744년 3월 1일 이에 동의했다. 이후 루이제 울리케는 스웨덴에 대한 교육을 받았으며,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고, 6월 28일에는 루터교로 개종했다.
2. 2. 스웨덴 왕세자빈 시절 (1744-1751)
1743년 스웨덴에서는 자녀가 없던 프레데리크 1세 국왕의 후계자를 정하는 문제가 논의되고 있었다. 스웨덴 의회는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아 홀슈타인고트로프 가 출신의 아돌프 프레드리크를 왕위 계승자로 결정했다. 아돌프 프레드리크의 신붓감으로는 프로이센의 공주인 루이제 울리케가 선택되었다.1744년 7월 17일, 루이제 울리케는 베를린에서 아돌프 프레드리크와 대리 결혼 방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을 대신하여 그녀가 아끼던 오빠 아우구스트 빌헬름이 대리인으로 참석했다. 이후 루이제 울리케는 스웨덴 특사 칼 구스타프 테신 백작 부부와 그의 조카이자 시녀로 임명된 샬로타 스파레 등과 함께 스웨덴령 포메라니아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스웨덴 총독과 고(故) 울리카 엘레오노라 여왕의 궁정 시녀장 헤드비그 엘리사베트 스트룀펠트 백작부인이 이끄는 스웨덴 측 수행원들과 합류했다. 그녀는 프로이센에서는 시녀 빌헬미네 폰 데어 크네제벡 등 소수의 인원만 데리고 왔다.
수행원은 뤼겐 섬을 출발하여 칼스크로나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왕세자 아돌프 프레드리크의 공식적인 환영을 받았다. 1744년 8월 18일, 스톡홀름 외곽의 드로트닝홀름궁에서 프레데리크 1세 국왕의 환영 아래 두 사람의 정식 결혼식이 다시 거행되었고, 이후 무도회와 궁정 연회가 열렸다. 드로트닝홀름 궁전은 프레드리크 1세가 이들 부부에게 선물한 여름 별장이었다. 루이제 울리케와 아돌프 프레드리크는 첫 만남부터 서로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으며, 개인적인 관계는 행복하고 조화로웠던 것으로 전해진다.[1] 아돌프 프레드리크는 내성적이고 온화하며 순종적인 성격이었는데, 루이제 울리케는 그가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며 그를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1] 루이제 울리케는 결혼 초기부터 정치에 관심을 보였으며, 아돌프 프레드리크에게 오빠 프리드리히 2세가 구상하는 스웨덴-러시아-프로이센 삼국 동맹 문제를 프로이센 특사에게 제기하도록 요청했고, 아돌프 프레드리크는 이에 동의했다.[1]

루이제 울리케는 왕위 계승 문제로 불안정했던 스웨덴 왕실에 희망을 주는 존재로 여겨져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745년 그녀가 첫 아들 구스타프(훗날 구스타브 3세)를 낳았을 때, 이는 50년 이상 왕가에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던 스웨덴에서 큰 경사였다. 그녀는 뛰어난 미모와 재치, 그리고 과학과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초기에 큰 인기를 얻었다. 칼 구스타프 테신은 그녀를 "천사의 모습 속에 깃든 지혜로운 신"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1] 그녀는 프랑스어가 모국어였지만, 칼 예스페르 벤젤리우스에게 스웨덴어를 배워 2년 만에 능숙하게 구사하게 되었다. 또한 스웨덴 문학을 공부하고 스웨덴어 서적을 수집했으며,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와 서신을 교환하고 자연 과학 표본 컬렉션을 만드는 등 스웨덴 문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의 오만하고 거만한 태도는 왕실 밖에서의 평판을 점차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루이제 울리케는 여름 별장인 드로트닝홀름궁을 중심으로 소위 "젊은 궁정(Jeune cour프랑스어)"을 형성하여, 소풍, 가면 무도회, 프랑스어 아마추어 극 공연 등을 즐기며 활기찬 궁정 문화를 이끌었다.[1] 이 시기 궁정 생활은 그녀를 스웨덴으로 호송해 왔고 왕세자빈 시절 내내 그녀의 총애를 받았던 칼 구스타프 테신이 주도했다.[1] 아돌프 프레드리크는 테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1] 루이제 울리케는 그를 궁정 원수로 임명하고 훗날 아들 구스타프 왕자의 총독으로 삼았다. 테신은 왕세자빈을 기쁘게 하기 위해 다양한 즐거움을 마련했으며,[1] 이 때문에 그가 루이제 울리케의 연인이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돌기도 했다.[1] 그러나 훗날 그녀의 아들 구스타브 3세는 테신 백작이 어머니를 흠모했지만, 그의 감정은 일방적이었으며 왕족으로서 어머니가 모든 신하에게 느끼는 "천성적인 경멸"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이러한 소문을 일축했다.[2] 그녀의 측근으로는 가장 총애했던 시녀 헨리카 율리아나 폰 리에벤, 지적인 카테린 샤를로테 데 라 가르디, 과학자 에바 에케블라드, 재치 있는 안데르스 요한 폰 횝켄 등이 있었다. 드로트닝홀름 궁전은 그녀의 살롱으로 변모했고, 정원과 극장이 건설되어 "북유럽의 베르사유"라고 불릴 정도로 화려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루이제 울리케 자신도 당시 궁정 음악가였던 요한 헬미크 루만의 영향을 받은 뛰어난 쳄발로 연주자였다.

스웨덴에 도착한 순간부터 루이제 울리케는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 그녀의 정치적 이상은 절대 군주제였으며,[1] 1719년 스웨덴 헌법에 따른 입헌 군주제와 의회 중심의 정치 체제에 처음부터 강한 불만을 품었다. 그녀는 법치주의 시스템 자체에도 회의적이었는데, 한때 음모를 의심하며 "법률은 매우 이상하다. 증거 없이 단순히 의심만으로 누군가를 체포하는 것을 감히 할 수 없다니, 이는 왕국보다 개인에게 더 이롭다"라고 쓰기도 했다.[1] 그녀는 칼 구스타프 테신의 정치적 능력을 높이 평가했으며, 그가 왕권 강화를 추구하는 자신의 생각에 동조한다고 판단했다. 1744년 크리스마스에는 테신에게 여신 디아나 형상의 램프를 선물하며 "오늘날의 정치 체제를 밝히기 위해 만들어졌다"라는 비문을 새겨 자신의 정치적 의도를 드러내기도 했다.[1]
루이제 울리케의 궁정 측근에는 모자당 동조자들이 많았다. 그녀가 총애한 헨리카 율리아나 폰 리에벤을 비롯해 클라에스 에케블라드, 한스 헨리크 폰 리에벤, 안데르스 요한 폰 횝켄 등 그녀의 개인적인 친구들 다수가 모자당 소속이거나 지지자였으며, 이를 통해 그녀는 모자당과 자연스럽게 동맹 관계를 형성했다.[1] 그녀는 뇌물을 통해 릭스다그(스웨덴 의회)의 투표에 영향을 미치려 시도했다.[1] 1746년 장남 구스타프를 낳은 후 왕세자 부부는 스웨덴 전역을 순회하는 공식 방문길에 올랐는데, 이 기간 동안 루이제 울리케는 모자당 의원들에게 뇌물을 주며 지지 세력을 확보하려 했다.[1] 모자당 의원 칼세니우스를 만났을 때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악당이지만, 그에게 뇌물을 주지 않고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마음속에 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라고 언급했다.[1] 실제로 칼세니우스는 이후 릭스다그 투표에서 루이제 울리케가 관심을 가진 사안에 대해 모자당과 함께 투표한 것으로 확인되었다.[1] 그녀의 궁극적인 목표는 헌법을 개정하여 스웨덴에 계몽 절대주의에 기반한 절대 군주제를 다시 도입하는 것이었다.[1] 그녀는 "단결"을 모토로 내건 ''L'Ordre de l'Harmonie''라는 모임을 창설하며 이러한 정치적 야심을 국제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1]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러시아와 영국의 반대에 부딪혔다.[1]
1748년 2월, 루이제 울리케는 절대 군주제 도입을 위한 첫 번째 쿠데타를 준비했다. 당시 프레데리크 1세 국왕은 병환 중이었고,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 중이었다. 그녀는 테신과 오빠 프리드리히 2세의 지원을 받아, 국왕이 사망할 경우 러시아가 즉각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을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헌법을 개정하기로 모자당과 합의했다.[1] 구체적으로는 릭스다그가 입법권은 유지하되, 군대, 재정, 외교 정책에 대한 권한은 군주에게 넘기는 방안이었다.[1] 그러나 국왕이 회복하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평화롭게 마무리되면서 쿠데타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1]
외교 정책에서 루이제 울리케는 철저히 프로이센의 입장을 대변했다. 오빠 프리드리히 2세는 그녀에게 스웨덴과 러시아의 동맹을 깨고 프로이센과의 동맹을 추진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그녀는 테신, 프로이센 대사, 그리고 모자당과 협력하여 남편 아돌프 프레드리크를 설득해 프로이센과의 동맹을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1745년에는 실패했지만, 1747년 의회는 결국 스웨덴-프로이센-프랑스 삼국 동맹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1]
왕세자빈 시절 루이제 울리케는 구스타프(1746년생), 칼(1748년생), 프레드리크 아돌프(1750년생) 등 여러 자녀를 낳으며 왕위 계승의 안정성을 확보했다. 그녀의 왕세자빈 시절은 1751년 3월 25일 남편 아돌프 프레드리크가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막을 내린다.
2. 3. 스웨덴 왕비 시절 (1751-1771)
1751년 3월 25일, 프레드리크 1세가 사망하고 남편 아돌프 프레드리크가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루이제 울리케도 스웨덴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루이제 울리케는 의회가 주도권을 쥐고 있던 스웨덴의 정치 현실에 불만을 품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계몽군주로서의 이상을 실현하기를 기대했지만, 선량하지만 군주로서의 위엄이 부족했던 아돌프 프레드리크는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어려웠다. 이로 인해 부부 관계에서도 루이제 울리케가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왕비가 된 루이제 울리케는 미모와 재능을 바탕으로 스웨덴에 계몽시대의 분위기를 가져왔다. 결혼 선물로 받은 스톡홀름 교외의 드로트닝홀름 궁전은 그녀의 살롱으로 변모했으며, 정원과 극장이 건설되어 "북유럽의 베르사유"라고 불리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의회 중심 체제에 만족하지 못하고 왕권 강화를 추구했다. 관료와 귀족 등 왕당파 동조자들을 모아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음모가 발각되어 관련자들이 처형되는 실패를 겪었다. 이 사건으로 국왕 부부는 의회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았고, 루이제 울리케는 큰 굴욕을 맛보았다.
1756년에 발발한 7년 전쟁에서 스웨덴은 반(反) 프로이센 진영에 가담하여 참전했다. 이는 대북방 전쟁에서 빼앗긴 포메라니아를 되찾으려는 목적과 더불어, 프로이센 국왕이자 루이제 울리케의 오빠인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징벌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그러나 스웨덴군은 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연이어 패배하며 서포메라니아 북부의 뤼겐 섬까지 밀려났다. 전쟁이 프로이센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결국 스웨덴 의회는 루이제 울리케에게 오빠 프리드리히 2세와의 화해를 주선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녀의 중재를 통해 1762년 5월, 스웨덴은 영토 변경 없이 프로이센과 평화 조약(함부르크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정치적 좌절 속에서도 루이제 울리케는 스웨덴의 부흥에 대한 희망을 아들 구스타프에게 걸고 그의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그녀는 당시 부패한 의회가 국정을 좌우하고 스웨덴이 유럽 열강의 괴뢰와 같은 상태에 빠진 현실을 개탄하며, 아들이 강력한 왕권을 통해 조국을 부흥시키기를 강하게 염원했다. 구스타프는 이러한 어머니의 강한 영향 아래 성장했으며, 정치뿐 아니라 계몽 사상 역시 어머니로부터 계승했다. 훗날 구스타프 시대가 "로코코 시대"로 불리게 된 문화적 기반 역시 루이제 울리케가 닦은 것이었다.
루이제 울리케의 왕비 시절은 남편 아돌프 프레드리크가 1771년 2월 12일에 사망하면서 막을 내렸다.
2. 4. 왕대비 시절 (1771-1782)
1771년 2월 12일, 남편 아돌프 프레드리크 국왕이 사망하고 아들 구스타브 3세가 스웨덴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루이제 울리케는 왕대비가 되었다. 당시 루이제 울리케는 스웨덴에서 인기가 매우 낮았다. 구스타프 3세는 파리에서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얼마나 사랑받지 못하는지 알고 있다"며 왕대비를 보호하라는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1772년, 구스타프 3세는 쿠데타를 일으켜 귀족들을 몰아내고 왕권을 강화하며 절대 군주제를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루이제 울리케가 과거 1756년에 시도했으나 실패했던 것이었다. 루이제 울리케는 아들의 성공에 크게 만족하며 쿠데타를 축하하는 편지에서 "그래요, 당신은 내 아들이고 그럴 자격이 있어요"라고 말했다. 쿠데타 당시 딸과 함께 베를린에 있던 루이제 울리케는 이후 스웨덴령 포메라니아에서 새 헌법에 대한 충성 맹세를 받았으며, 오빠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주변국들의 침공 가능성을 경고하자 포메라니아 지방을 자신의 피로 지키겠다고 답하기도 했다.
그러나 루이제 울리케는 왕대비의 지위에 만족하지 못하고 왕좌 뒤의 실권자가 되기를 원했다. 아들 구스타프 3세가 독립적으로 통치하려 하자 모자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1] 1772년, 구스타프 3세는 어머니가 차남 칼 왕자를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필리핀과 결혼시키려던 계획을 막았고, 1774년 칼 왕자는 대신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헤드비히 엘리자베스 샬롯과 결혼했다.[1] 구스타프 3세는 어머니의 빚을 갚아주는 대신, 그녀가 프레드릭스호프 궁전에 별도의 궁정을 차려 지내도록 했다.[1] 1777년에는 드로트닝홀름 궁전을 아들 구스타브 3세에게 팔아야 했다.
1777년부터 1778년 사이, 루이제 울리케와 구스타프 3세의 갈등은 왕세자의 적통성에 관한 대규모 스캔들로 폭발했다. 1777년, 루이제 울리케를 방문한 두 아들 칼 왕자와 프레드릭 아돌프 왕자는 궁정 여성 대부분에게 정부가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고, 루이제 울리케가 왕비 소피아 막달레나는 예외일 것이라 말하자 왕비와 프레드릭 뭉크 백작 사이의 불륜 소문을 언급했다.[1] 격분한 루이제 울리케는 칼 왕자에게 진실을 조사하라 명했고, 이 과정에서 이야기가 퍼져나가며 모자간의 큰 갈등이 시작되었다. 1778년 왕세자(구스타브 4세 아돌프)가 태어나자 뭉크 백작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루이제 울리케는 구스타프 3세가 왕비를 다른 남자와 동침시켜 아들을 얻었다고 비난했다. 이 스캔들로 인해 구스타프 3세는 어머니를 포메라니아로 추방하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루이제 울리케가 가장 아꼈던 막내 자녀들인 소피아 알베르티나 공주와 프레드릭 아돌프 왕자는 어머니의 편에 섰다. 결국 루이제 울리케는 자신의 비난을 철회한다는 공식 성명을 발표해야 했고, 이 성명에는 왕실 부부를 제외한 모든 성인 왕족과 6명의 의원이 서명했다. 이 사건 이후 구스타프 3세와의 관계는 그녀가 죽을 때까지 회복되지 못했다.
루이제 울리케는 1782년 7월 16일 스바르트셰에서 사망했으며, 유해는 스톡홀름의 리다르홀멘 교회에 안장되었다.
3. 자녀
루이제 울리케는 남편 아돌프 프레드리크와의 사이에서 5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 중 두 아들은 스웨덴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름 | 생몰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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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 1745년 | |
구스타브 3세 | 1746년 ~ 1792년 | 스웨덴 국왕 |
칼 13세 | 1748년 ~ 1818년 | 스웨덴 국왕 |
프레드리크 아돌프 | 1750년 ~ 1803년 | 외스테르예틀란드 공작 |
소피아 알베르티나 | 1753년 ~ 1829년 | 퀘들린부르크 여수도원장 |
4. 가계
프리드리히 1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루이제 헨리에테
조피 샤를로테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조피
조피 도로테아
조지 1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조피
조피 도로테아
게오르크 빌헬름
엘레오노레 돌브루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