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프로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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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의 국왕으로, 1713년부터 1740년까지 재위했다. 그는 브란덴부르크의 프리드리히 1세와 하노버의 조피 샤를로테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위그노 출신 가정교사에게 교육받았다. 그는 왕실 비용 절감, 세금 제도 개혁, 군사력 강화에 힘썼으며, 특히 "공무원 규정 교범" 제정, 칸톤 제도 도입 등을 통해 국가의 재정과 군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는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와의 갈등을 겪었으나, 말년에는 화해하고 아들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였다. 그의 통치는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며, 엄격한 통치 스타일과 군사력 강화에 대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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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프로이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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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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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프로이센의 왕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
재위 기간 | 1713년 2월 25일 – 1740년 5월 31일 |
배우자 |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 (1706년 11월 28일 결혼) |
선왕 | 프리드리히 1세 |
후왕 | 프리드리히 2세 |
왕가 | 호엔촐레른 |
아버지 | 프리드리히 1세 |
어머니 | 조피 샤를로테 |
출생일 | 1688년 8월 14일 |
출생지 | 베를린,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
사망일 | 1740년 5월 31일 |
사망지 | 포츠담 시립 궁전, 포츠담, 프로이센 왕국 |
매장지 | 프리덴스키르헤, 상수시 공원, 포츠담 |
종교 | 칼뱅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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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및 가족 | |
자녀 | 프리드리히 루이스 왕자 빌헬미네,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 변경백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자 프리드리히 2세 샤를로테 공주 프리데리케 루이제,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부인 필리피네 샤를로테,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부인 루이 왕자 조피 도로테아, 브란덴부르크-슈베트 변경백부인 루이세 울리카, 스웨덴 여왕 아우구스투스 빌헬름 왕자 안나 아말리아, 쿠에들린부르크 수녀원장 하인리히 왕자 아우구스투스 페르디난트 왕자 |
기타 | |
별칭 | 군인왕 |
2. 어린 시절
1688년 8월 14일, 훗날 프로이센 국왕이 되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와 그의 아내 소피아 샤를로테(하노버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대북방 전쟁 중 발생한 전염병으로 프로이센이 황폐화되면서, 국왕의 총애를 받던 장관들과 고위 관리들의 무능함과 부패가 드러났다. 궁정 내 당파에 속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공식 조사를 통해 바르텐베르크의 대규모 횡령과 착복이 드러난 후, 수상 요한 카지미어 콜베 폰 바르텐베르크와 그의 추종자들을 실각시켰다.[3] 그의 측근인 아우구스트 다비트 추 자인-빗겐슈타인-호헨슈타인은 슈판다우 요새에 투옥되어 7만 타르러의 벌금형을 받고 추방되었다.[3] 이 사건은 프리드리히 빌헬름에게 큰 영향을 미쳐 범죄, 부패, 낭비, 무능에 대한 반감을 갖게 하고 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였다. 또한 그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3] 그 이후로 프리드리히 1세는 아들에게 더 많은 권력을 위임하기 시작했다. 1706년 11월 28일, 왕세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외삼촌인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1세(후일 영국 국왕 조지 1세)의 딸이자 자신의 사촌인 소피아 도로테아와 결혼했다.
2. 1. 유년기 일화
브란덴부르크의 프리드리히 3세와 하노버의 조피 샤를로테의 아들로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조부 대선제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사망하고 몇 달 후에 태어났다고 한다.어린 시절, 그는 프리드리히의 이상하고 충동적인 행동에 종종 겁을 먹었던 위그노 가정 교사 마르테 드 루쿨에 의해 자랐다.[2] 훗날 국왕이 된 그는 한번 은 구두 죔쇠를 삼키고 뱉는 것을 거부하였다. 또 다른 경우에는, 만약 자신의 가정 교사가 그의 길을 가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3층 건물에서 뛰어내리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교련하고 싶었던 생도들의 일단을 형성하는 데 돈을 모으는 것을 즐겼다. 그의 모친도 그에게 잘해주었고 뭘 하든지 전혀 그를 멈추지 않았다.
1689년부터 1692년까지는 할머니인 하노버 선제후비 소피아에게 양육되었고, 그 후 도나 백작 알렉산더와 위그노의 Pierre Rebeur|장 필립 로뷔르프랑스어 등에게 교육을 받았다. 1698년 10세 생일에는 아버지로부터 Königs Wusterhausen|쾨니히스 뷔스터하우젠영어의 영지를 하사받았고, 1701년 프리드리히 1세의 즉위와 함께 오라니엔 공이 되었다.
3. 초기 경력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의 방만한 재정 운영으로 인해 국가 재정이 파탄난 상태에서 왕위에 올랐다.[4] 프리드리히 1세는 베를린 궁전, 샤를로텐부르크 궁전 등 호화로운 건축물을 건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여 국가 재정을 악화시켰다.
1713년 왕위에 오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아버지의 "삼백작 내각"을 해산하고, 재정 개혁과 경제 발전에 힘썼다. 그는 검소한 생활을 하며 왕실 재정을 절약하고, 궁전의 많은 공간을 행정 및 군사적 용도로 활용했다. 정원을 열병장으로, 궁전 방들을 회의장으로 바꾸는 등 실용적인 면모를 보였다.
프로이센 식민 사업에 관심을 가졌으나, 브란덴부르크 아프리카 회사의 헌장을 폐지하고, 1721년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에 식민지를 매각했다.[9][10] 이는 해군력 유지보다 육군 강화에 집중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1732년에는 페스트로 인구가 감소한 동프로이센에 잘츠부르크 프로테스탄트들을 초청하여 정착시켰다.[11] 그는 직접 이주민들을 환영하고 함께 찬송가를 부르는 등 종교적 관용을 보여주었다. 1733년에는 네덜란드 장인들을 초청하여 포츠담에 네덜란드 지구를 건설하기도 했다.
표트르 대제와 동맹을 맺고 대북방전쟁에 개입하여 발트해 연안의 영토를 확보하려 했다. 또한, 안할트데사우 공 레오폴트 1세의 도움을 받아 군사 제도 개혁을 단행, 칸톤 제도를 도입하고 철제 장전봉을 도입하여 프로이센 군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러한 군사적 강화는 훗날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가 프로이센을 강대국으로 발돋움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그는 효율적인 통치자였지만, 포르피린증으로 인한 건강 문제와 프랑스에 대한 강한 반감(프랑스 혐오증)을 가지고 있었다.[12]
3. 1.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13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년 ~ 1744년)이 진행 중인 가운데 왕위에 올랐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 전쟁과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즉위는 꽤 어려운 상황이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뛰어난 업무 능력으로 30,000명 이상의 군인으로 구성된 강력한 군대를 건설하는 데 기여했다. 초기에는 훈련이 부족했지만, 군사 훈련에 대한 그의 꾸준한 노력으로 군대는 80,000명 이상의 숙련되고 잘 갖춰진 정예 군단으로 변화했다.[5][6]4. 군림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즉위 후 아버지의 부패한 "삼백작 내각"을 해산하고, 파탄난 재정을 재정비하며, 광대한 영토의 경제 발전을 촉진하고, 유럽에서 가장 크고 잘 훈련된 군대 중 하나를 건설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는 1713년 3만 8천 명이었던 프로이센 군대를 1740년에는 8만 명으로 확장했는데,[5] 이는 프로이센 남성 25명 중 1명이 군 복무를 했음을 의미한다.[6]
그는 왕실 프로이센 군대 확장에 국가 수입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왕은 군대 육성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이 군대는 거의 실전을 치르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참전한 유일한 전쟁은 대북방 전쟁이었다. 1714년에 실질적으로 참전하여(1715년에 선전포고) 슈트랄준트를 함락시키고, 체류하고 있던 스웨덴 왕 칼 12세를 독일에서 몰아냈다. 스웨덴군과 싸운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은 승리했고, 1720년 스톡홀름 조약을 통해 옛 폼머른, 슈체친, 우제돔 섬 등의 영토를 획득했다. 이로써 북독일에서의 권익 확대에 성공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스웨덴의 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일소하고, 발트해 지역에서의 세력 구도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1730년 하반기까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완비되고 강력한 군대와 완전한 재정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국왕의 성질과 종종 용서하지 않는 성격은 모두에게 미움을 받았다. 그는 종종 자신의 시종들과,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자녀들을 육체적으로 때렸다고 한다.[12]
매우 효율적인 통치자였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항상 격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사소한 자극에도 종종 하인(심지어 자신의 자녀들까지)을 지팡이로 구타했다. 그의 폭력적이고 가혹한 성격은 유전적인 포르피린증으로 인해 악화되었는데, 이로 인해 통풍, 비만, 그리고 잦은 심한 위통을 겪었다.[12] 그는 또한 프랑스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어서 프랑스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격렬하게 화를 내곤 했지만, 이것이 그가 프랑스 위그노 난민들의 프로이센 이주를 장려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이러한 일련의 성공은 훗날 프리드리히 2세의 패업을 크게 뒷받침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4. 1. 공무원 규정 교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의 모든 공무원에게 명확한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 "공무원 규정 교범"을 제정하고 시행했다. 이 교범은 35개 장, 297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모든 공무원이 따라야 할 세부적인 지침을 담고 있었다.[8]예를 들어, 장관이나 의원이 위원회 회의에 불참하면 봉급의 6개월분을 삭감당했고, 두 번 이상 불참하면 왕실에서 해고되었다.[8] 이처럼 엄격한 규정을 통해 공무원들의 기강을 확립하고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했다.
4. 2. 대북방 전쟁 참전
1715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스웨덴에 대항하는 대북방 전쟁에 참전하였다. 그는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를 지지하여 발트해 연안을 포함한 스웨덴령 포메라니아의 일부를 얻었으나,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 군대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11]4. 3. 경제 정책
젊은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왕국의 재정과 군사력 향상을 위해 왕실 비용을 절감하고 검소하게 생활했으며, 내각에서 도입한 세금을 납부했다.[4] 그는 농업을 장려하고, 습지를 개간하며, 곡물 저장, 학교와 병원 설립, 연간 세금 이행을 장려했다.[7]1723년에는 모든 재정 요청을 승인하는 "일반 금융 이사회"를 도입하여 귀족과 소작농 소유 토지에 대한 세금 징수를 효율화하고, 고급 식품 및 주식 제품에 소비세를 부과하여 국가 연간 수입을 250% 증가시켰다.[8]
1732년에는 잘츠부르크의 개신교도들을 동프로이센에 초청하여 1709년 흑사병으로 인구가 감소한 지역을 재건했다. 약 20,000명의 개신교도들이 프로이센 위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독일로 이주했다.[11]
1733년에는 네덜란드 장인들을 초청하여 포츠담에 네덜란드 지구를 건설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 식민 사업에도 관심을 가졌다. 1717년에는 브란덴부르크 아프리카 회사 헌장을 폐지하고, 1721년에는 브란덴부르크 골드 코스트를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에 7200두카트를 받고 매각했다.[9][10]
4. 4. 군사 제도 개혁: 칸톤 제도
1733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각 구획의 소작농과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해당 연대 아래 군대에 모집될 수 있도록 허용한 칸톤 제도를 도입하였다.[7] 이 제도는 국왕의 군림 말기에 군대를 2배로 늘리는 데 기여했다. 칸톤 제도는 지역별로 편성된 연대에 대한 인원 공급을 안정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5. 가족, 개인 생활과 유산
프로이센 왕자
1708년 5월 13일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 공녀

1758년 10월 14일
프로이센 왕자

1711년 7월 21일
프로이센 국왕

1786년 8월 17일
프로이센 공주

1714년 6월 10일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공녀

1784년 2월 4일
브런스비크-볼펜뷔텔 공작부인

1801년 2월 17일
프로이센 왕자

1719년 8월 31일
브란덴부르크-슈베트 공녀
프로이센 공주

1765년 11월 13일
스웨덴 왕비

1782년 7월 2일
프로이센 왕자

1758년 6월 12일

1787년 3월 30일
프로이센 왕자

1802년 8월 3일
프로이센 왕자

1813년 5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