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룩셈부르크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룩셈부르크가는 1247년 룩셈부르크 백작 앙리 5세가 룩셈부르크 백국을 상속받으면서 시작되었다. 림부르크아를롱 가문의 분가 출신으로, 1308년 하인리히 7세가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되면서 독일에서 유력한 세력이 되었다. 얀, 카를 4세로 이어지며 보헤미아 왕국을 획득하고 영토를 확장했으나, 이후 쇠퇴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계승되었다. 룩셈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보헤미아, 헝가리 왕을 배출했으며, 프랑스 왕과도 혈연 관계를 맺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가톨릭교도 가문 - 나사우가
    나사우 가문은 11세기 초 나사우 성에서 기원한 독일 귀족 가문으로, 라우렌부르크 백작을 시조로 하여 나사우 백작령을 건설하고 발람 계열과 오토 계열로 나뉘어 오라녜-나사우 가문은 네덜란드 왕실, 발람 계열은 룩셈부르크 대공가의 기원이 되었다.
  • 가톨릭교도 가문 - 케네디가
    케네디가는 아일랜드계 미국 가문으로, 조셉 P. 케네디 시니어의 사업 성공과 존 F. 케네디, 로버트 F. 케네디, 에드워드 M. 케네디 등 정치 거물들의 활약으로 미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암살과 채파퀴딕 사건 등 비극과 논란 또한 끊이지 않았으며 현재까지도 미국 사회에 지속적인 유산을 남기고 있다.
  • 룩셈부르크가 - 바츨라프 4세
    바츨라프 4세는 카를 4세의 아들로 보헤미아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왕이었으나, 귀족과의 갈등, 전쟁, 종교적 분열로 불안정한 통치를 했고 얀 후스 처형 후 보헤미아는 후스 전쟁에 돌입했으며 그는 혼란 속에서 사망했지만 체코 내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 룩셈부르크가 - 이트카 체스케 왕녀
    이트카 체스케 왕녀는 보헤미아 국왕 얀의 딸로, 프랑스 왕 샤를 5세의 어머니이며, 노르망디 공작 장과 결혼하여 10명의 자녀를 낳고 예술 후원자로 활동하다가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 룩셈부르크의 역사 -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는 1482년부터 1795년까지 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부르고뉴 공작령 상속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았으나 스페인의 가톨릭 박해와 전제정치로 80년 전쟁을 겪으며 북부 7개 주는 독립하고 남부 지역은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 룩셈부르크의 역사 - 나사우 공국
    나사우 공국은 1806년 나사우-우징겐 공국과 나사우-바일부르크 공국이 합쳐져 형성되었으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가 프로이센에 합병되어 소멸되었고, 공작 아돌프는 룩셈부르크 대공으로 추대되어 그의 자손이 현재까지 대공위를 계승하고 있다.
룩셈부르크가 - [인물]에 관한 문서
가문 정보
이름룩셈부르크 가문
원어 이름Maison de Luxembourg (프랑스어)
현지 이름 (룩셈부르크어)D'Lëtzebuerger Haus
현지 이름 (독일어)Haus Luxemburg
유형왕가
문장COA Luxembourg with crest.svg
가문림부르크 가문
국가신성 로마 제국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프랑스 왕국
룩셈부르크
창립일1247년 2월 12일
설립자룩셈부르크 백작 앙리 5세
해체일1451년 8월 2일
폐위일1443년
분가룩셈부르크-브리엔(1648년 절멸)
마지막 통치자룩셈부르크의 엘리자베트
작위신성 로마 황제 (선출)
보헤미아 왕
헝가리 왕
크로아티아 왕
룩셈부르크 백작/공작
기타 작위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모라비아 변경백
괴를리츠 공작
티롤 백작
수아송 백작
리니 백작
생폴 백작
브리엔 백작
콘베르사노 백작
훈장용의 기사단
모토(정보 없음)
가보(정보 없음)
영지(정보 없음)

2. 역사

963년 아르덴 백작지크프리트가 룩셈부르크 성을 본거지로 정했고, 그의 후손이 11세기신성 로마 황제로부터 룩셈부르크 백작위를 받았다. 룩셈부르크 백작은 프랑스에도 가까웠기 때문에 프랑스 왕의 봉신이기도 했다. 1081년 룩셈부르크 백작가 출신 잘름 백작 헤르만이 황제 하인리히 4세의 대립왕으로 선출되었다.

대공위 시대 이후, 독일 제후들은 황제 권력 강화를 원치 않아 합스부르크 가문이나 나사우 가문에서 황제를 선출했다. 1308년 제국 제후이자 프랑스 왕 봉신이었던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7세가 옹립된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러나 하인리히 7세는 뛰어난 인물로, 1309년 스위스 일부를 영유했고, 이듬해 아들 요한과 보헤미아 왕바츨라프 3세의 여동생 엘리슈카의 혼인을 통해 보헤미아 왕위를 획득하는 등 자가 영토를 단기간에 확대했다. 동생 발두인은 1307년 선제후 중 한 명인 트리어 대주교가 되어 형 하인리히와 손자 카를의 황제 선출에 기여했다. 이로써 룩셈부르크 가는 독일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이 되었다.

보헤미아 왕 요한은 황제로 선출되지는 않았지만 명장으로 알려졌으며, 아들 카를 4세는 1346년 황제로 선출되어 보헤미아 왕과 룩셈부르크 백작도 계승했다. 카를 4세는 금인칙서를 발포하여 제국 혼란을 수습하고 자가 세력 확대와 제위 세습화에 힘썼다. 룩셈부르크 백작위는 카를 4세로부터 동생 벤첼 1세에게 양도된 후, 1354년 룩셈부르크 공작으로 격상되었고, 카를의 아들 벤첼 (2세)에게 계승되었다.

카를 4세 이후 두 아들 벤첼, 지기스문트가 황제, 보헤미아 왕, 룩셈부르크 공작,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를 계승했다. 그러나 이들은 평범한 인물이었고, 무리한 확대 정책으로 독일과 보헤미아 제후들의 반발을 초래했으며, 일족 내 대립으로 권력을 잃어갔다. 지기스문트는 헝가리 왕위를 획득하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위를 호엔촐레른 가문에게 양도했다. 벤첼, 지기스문트 모두 남자 후손이 없었고, 요프스트 등 방계에도 남자 후계자가 없어 룩셈부르크 가는 단절되었고, 이 가문이 소유했던 영토와 지위 대부분은 지기스문트의 사위 알브레히트 2세 등을 거쳐 합스부르크 가문이 획득했다. 룩셈부르크 공작령도 엘리자베트 폰 게를리츠로부터 부르고뉴 필리프 선량공에게 넘어간 후,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단절과 함께 합스부르크 가문이 계승했다.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6세 (하인리히 7세의 아버지)의 동생 발레랑 1세를 조상으로 하는 분가 (룩셈부르크-리니 가문)는 본가 단절 후에도 존속했으며, 이 가문 출신 리니 백작 장 2세 드 룩상부르는 잔 다르크를 체포 감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지막 당주인 생폴 백작 피에르 2세 드 룩상부르가 남자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함으로써 룩셈부르크 가는 완전히 단절되었지만, 혼인 관계를 통해 분가는 여전히 존속, 17세기 프랑수아 앙리 드 몽모랑시는 룩셈부르크-피네 가문의 여성과 결혼하여 룩셈부르크-피네-몽모랑시 가문을 창설, 자손은 몽모랑시 공작도 계승하여 20세기까지 이어졌다.

피에르 2세의 딸 마리 드 룩셈부르는 부르봉 가문 분가 방돔 백작 프랑수아에게 시집갔는데, 프랑스 왕 앙리 4세는 그 증손자이다. 앙리 4세는 보헤미아 왕 요한의 딸 본느가 프랑스 왕 장 2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 (샤를 5세, 카를로스 악인왕의 왕비 잔)를 통해 룩셈부르크 가문 본류와도 혈연관계가 있다. 그 후손 파르마 공자펠릭스는 룩셈부르크 대공녀 샤를로트와 결혼하여 현재 룩셈부르크 대공가에 이르고 있다.

2. 1. 기원과 초기 룩셈부르크 백작

룩셈부르크 왕가는 본래 룩셈부르크 백작들의 직계 후손은 아니지만, 그 친척인 림부르크아를롱 가문의 분가 출신이다. 1247년, 림부르크 공작 발레란 3세의 막내 아들 앙리 5세는 어머니 에르메장드가 사망하면서 룩셈부르크 백국을 상속받아 룩셈부르크 백작이 되었다. 앙리 5세의 외증조모는 아르덴가의 분가이자 10세기 말부터 룩셈부르크를 다스렸던 본래의 룩셈부르크가 출신이었다.[2]

앙리 5세의 아버지 쪽 가계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대인물비고
1지그프리드998년 사망, 아르덴 백작, "루실린부르흐" 통치자
2프리드리히 1세1019년 사망, 룩셈부르크와 살름 백작
3프리드리히, 하로렌 공작1065년 사망, 림부르크 백작
4유타
5헨리 1세, 림부르크 백작1106년 사망, 하로렌 공작
6왈레란 파가누스, 림부르크 공작1139년 사망
7헨리 3세, 림부르크 공작1221년 사망,
8왈레란 3세, 림부르크 공작1226년 사망, --
9헨리 5세1281년 사망, 룩셈부르크, 아를롱, 나뮈르 백작,


2. 2. 룩셈부르크 가문의 분가와 발전

룩셈부르크 왕가는 본래 룩셈부르크 백작의 직계 후손이 아니라, 림부르크아를롱 가문의 분가 출신이다. 1247년, 림부르크 공작 발레란 3세의 막내 아들 앙리가 어머니 에르메장드의 사망으로 룩셈부르크 백국을 상속받아 룩셈부르크 백작 앙리 5세가 되었다. 앙리 5세의 외증조모는 10세기 말부터 룩셈부르크를 다스렸던 아르덴가의 분가 출신이었다.

1288년 보링겐 전투에서 앙리 5세의 손자 하인리히 7세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합스부르크가 출신 독일의 왕 알브레히트 1세가 살해된 후 불가피했으며, 하인리히는 형제인 트리어 대주교 룩셈부르크의 보두앵의 지지로 발루아 백작 샤를을 이겼다. 1310년 하인리히는 아들 프르셰미슬 왕조보헤미아의 엘리자베트의 혼인을 통해 룩셈부르크가가 보헤미아 왕국을 획득, 합스부르크가비텔스바흐가와 효과적으로 경쟁하게 했다. 1313년 하인리히 7세는 신성 로마 황제 즉위 1년 후 이탈리아 원정 중 사망했다.[1]

선제후들은 룩셈부르크가의 부상에 동요하여 하인리히의 후계자 얀의 권리를 무시하고, 비텔스바흐가 출신 루트비히가 제국 통치권을 차지했다. 얀은 실레지아의 피아스트가 공작들을 봉신화했다. 1346년 그의 아들 카를 4세가 신성 로마 황제가 되었고, 1356년 금인칙서는 수 세기간 제국 헌법 역할을 했다. 카를은 브라반트, 림부르크를 획득하고, 보헤미아 왕국 휘하로 루사티아 변경백국과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을 획득했다.[2]

룩셈부르크가의 쇠퇴는 카를의 아들 바츨라프 4세 시기에 시작되었는데, 그는 비텔스바흐가 출신 루프레히트를 왕으로 선정한 선제후들에 의해 1400년에 폐위되었다. 1410년 바츨라프의 형제 지기스문트가 통치권을 되찾아 룩셈부르크가의 지배를 안정시키고 1417년 서방교회 대분열을 종결시켰으나, 1437년 그가 죽으면서 룩셈부르크가 직계는 단절된다. 그의 사위인 합스부르크가알브레히트 5세가 이었다. 합스부르크가는 1780년 마리아 테레지아 사망까지 신성 로마 제국을 지배했다.

2. 3.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배출과 전성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 재위 당시 영토


룩셈부르크 왕가는 림부르크아를롱 가문의 분가 출신으로, 1247년 앙리 5세가 룩셈부르크 백작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1288년 보링겐 전투에서 앙리 6세가 사망한 후, 그의 손자 하인리히 7세가 1308년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합스부르크가 출신 알브레히트 1세가 살해된 후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하인리히 7세는 트리어 대주교인 동생 룩셈부르크의 보두앵의 지지를 받아 발루아 백작 샤를을 꺾고 왕위에 올랐다.

하인리히 7세는 1310년 아들 보헤미아 왕국엘리자베트와 결혼시켜 룩셈부르크 가가 보헤미아 왕국을 획득하게 함으로써 합스부르크 가 및 비텔스바흐가와 효과적으로 경쟁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하인리히 7세는 1313년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한 지 1년 만에 이탈리아 원정 중 사망하였다.

룩셈부르크 가의 부상에 동요한 선제후들은 하인리히 7세의 후계자인 얀의 권리를 무시하고, 비텔스바흐 가 출신 루트비히 4세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얀은 보헤미아 통치에 집중하며 1327년부터 1335년까지 실레지아 공작들을 봉신화하였다. 1346년 그의 아들 카를 4세가 신성 로마 황제에 올랐고, 1356년 금인칙서를 반포하여 제국의 헌법 기틀을 마련하였다. 카를 4세는 브라반트, 림부르크, 루사티아 변경백국,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등을 획득하며 룩셈부르크 가의 세력을 확장했다.

2. 4. 쇠퇴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의 계승

룩셈부르크 왕가는 본래 룩셈부르크 백작들의 직계 후손이 아니라, 림부르크아를롱 가문의 분가 출신이다. 1247년 림부르크 공작 발레란 3세의 막내 아들 앙리가 어머니 에르메장드의 사망으로 룩셈부르크 백국을 상속받아 룩셈부르크 백작 앙리 5세가 되었다. 앙리 5세의 외증조모는 아르덴가의 분가이자 10세기 말부터 룩셈부르크를 다스렸던 본래의 룩셈부르크가 출신이었다.[1]

1288년 보링겐 전투에서 앙리 6세가 사망하면서, 앙리 5세의 손자 하인리히 7세가 1308년에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이 선출은 합스부르크가 출신 독일의 왕 알브레히트 1세가 살해당한 후 불가피했으며, 형제인 트리어 대주교 룩셈부르크의 보두앵의 지지를 받은 하인리히는 발루아 백작 샤를에 승리했다. 하인리히는 1310년에 아들 프르셰미슬 왕조의 후계자인 보헤미아의 엘리자베트 간의 혼인을 주선하여, 룩셈부르크가가 보헤미아 왕국을 획득하고 합스부르크가 및 비텔스바흐가와 효과적으로 힘을 겨룰 수 있게 하였다. 1313년, 로마에서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한 지 1년 후, 하인리히 7세는 이탈리아 원정 중 사망했다.[1]

룩셈부르크가의 부상에 동요한 선제후들은 하인리히의 후계자인 얀(장) 국왕이 제기한 권리들을 무시했고, 제국 통치권은 비텔스바흐가 출신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가 차지하였다. 얀은 보헤미아 통치권을 안정시키는 데 집중했고, 1327년부터 1335년에 걸쳐 인접한 실레지아의 피아스트가 공작들을 봉신화하였다. 1346년, 그의 아들 카를 4세가 신성 로마 황제 제위에 올랐다. 카를이 반포한 1356년 금인칙서는 수 세기간 제국의 헌법 역할을 했다. 카를은 1373년에 서쪽에서 브라반트와 림부르크를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보헤미아 왕국 휘하로 과거의 루사티아 변경백국과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을 획득했다.[1]

룩셈부르크가의 쇠퇴는 카를의 아들 바츨라프 시기에 일어났는데, 그는 비텔스바흐가 출신의 팔츠 선제후 루프레히트를 왕으로 선정한 선제후들에 의해 1400년에 폐위당했다. 1410년, 바츨라프의 형제 지기스문트가 통치권을 되찾아 룩셈부르크가의 지배를 안정시키고 1417년 서방교회 대분열을 종결시켰으나, 1437년에 그가 죽으면서 룩셈부르크가 직계는 단절되었다. 그의 자리는 사위인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 대공 알브레히트 5세가 이어받았다. 합스부르크가는 최종적으로 룩셈부르크가에 승리하고, 1780년 마리아 테레지아의 죽음으로 직계가 단절될 때까지 신성 로마 제국을 지배했다.[1]

3. 주요 인물

이름생몰년기타
하인리히 7세1275년 ~ 1313년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룩셈부르크 백작
발두인1285년경–1354년트리어 대주교, 부르고뉴 왕국의 대재상(1307년~1354년). 하인리히 7세의 동생.
1296년 ~ 1346년보헤미아의 국왕,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7세의 아들.
마리 드 뤽상부르1304년 - 1324년프랑스 왕 샤를 4세의 왕비. 요한의 여동생.
베아트릭스1305년 - 1319년헝가리 왕 카로이 1세의 왕비. 요한의 여동생.
본 드 뤽상부르1315년 ~ 1349년프랑스 왕 장 2세의 왕비. 요한의 딸.
카를 4세1316년 ~ 1378년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보헤미아의 국왕, 룩셈부르크 백작. 요한의 아들.
요한 하인리히1322년 - 1375년티롤 백작, 모라바 변경백. 요한의 아들, 카를 4세의 이복 동생.
벤체슬라우스 1세1337년 ~ 1383년룩셈부르크의 공작, 브라반트 공작. 요한의 아들, 카를 4세의 이복 동생.
요스트1351년–1411년모라바 변경백,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룩셈부르크 공작, 로마 왕. 요한 하인리히의 아들.
요한 소비에슬라프1352년–1380년모라비아의 젊은 변경백. 요한 하인리히의 차남.
프로코프1358년경–1405년모라바 변경백(1375년~1405년). 요한 하인리히의 아들.
벤체슬라우스 2세1361년 - 1419년독일의 왕, 보헤미아의 국왕,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룩셈부르크 공작. 카를 4세의 아들.
1366년 - 1394년잉글랜드 왕 리처드 2세의 왕비. 카를 4세의 딸, 벤체슬라우스의 이복 여동생.
지기스문트1368년 - 1437년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보헤미아의 국왕, 헝가리의 국왕,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룩셈부르크 공작. 카를 4세의 아들, 앤의 친동생.
요한 폰 괴를리츠1370년 - 1396년괴를리츠 공작. 카를 4세의 아들, 지기스문트의 친동생.
엘리자베트 폰 괴를리츠1390년 - 1451년룩셈부르크 여공작. 요한 폰 괴를리츠의 딸.
엘리자베트 폰 룩셈부르크1409년 - 1442년신성 로마 황제 알브레히트 2세의 왕비. 지기스문트의 딸.
룩셈부르크의 게오르크1457년 사망프로코프의 사생아. 룩셈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알려진 구성원.


4. 룩셈부르크 가계도



참조

[1] 백과사전 Sigismund (Holy Roman emperor) https://www.britanni[...] 2014-03-29
[2] 간행물 Généalogie de la Maison d'Ardenne 198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