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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교회 대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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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방교회 대분열은 1378년부터 1417년까지 로마와 아비뇽, 그리고 피사 세 곳에 교황이 존재했던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사건이다. 이는 교황의 권위가 쇠퇴하고, 각국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발생했다. 1378년 그레고리오 11세가 사망한 후, 로마 시민들의 압력으로 우르바노 6세가 선출되었으나, 그의 권위주의적 태도에 반발한 추기경들이 클레멘스 7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하면서 분열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유럽은 로마와 아비뇽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었고, 두 교황은 서로를 파문하며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후 콘스탄츠 공의회를 통해 세 명의 교황이 모두 폐위되고 마르티노 5세가 선출되면서 분열은 종식되었지만, 교회 권위의 약화와 공의회주의의 부상은 이후 종교 개혁의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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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교회 대분열
개요
14세기 교회 분열을 상징하는 그림
14세기 분열을 상징하는 그림
일부후기 중세의 위기
유형기독교 분열
원인1378년 추기경단의 두 교황 선출
1409년 피사 공의회의 세 번째 교황 선출
동기가톨릭 유럽의 국제적 경쟁
날짜1378년 9월 20일 – 1417년 11월 11일
위치유럽
결과콘스탄츠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 재통합
교전 세력
안정화교황 마르티노 5세의 임기와 그 후 몇 년간인 1417–1429년 동안

2. 역사적 배경

중세 후반, 십자군 전쟁의 실패와 봉건제의 쇠퇴 속에서 교황권은 점차 약화되고 세속 군주들의 권력은 강화되는 시대적 변화가 있었다. 특히 프랑스필리프 4세중앙집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성직자 과세 문제로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이 갈등은 1303년 프랑스 군대가 교황을 습격한 아나니 사건으로 이어졌고, 교황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보니파시오 8세 사후, 프랑스 왕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프랑스 출신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선출되었고, 1309년 교황청은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으로 이전되었다. 이후 약 70년간 이어진 아비뇽 유수 시대 동안 교황청은 프랑스 왕실의 통제 하에 놓이며 권위가 더욱 약화되었고, 교회 내 부패에 대한 비판도 높아졌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교황청을 로마로 다시 옮겼으나, 그의 사후 로마와 아비뇽에서 각각 다른 교황이 선출되면서 서방 교회는 약 40년간 두 명, 혹은 세 명의 교황이 동시에 존재하는 대분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2. 1. 시대적 변화

교황권은 카노사 굴욕(1077년)과 보름스 협약(1122년) 이후 점차 상승하여 인노첸시오 3세 때 절정에 달하였다.[9] 그러나 신의 이름으로 200년간 진행되었던 십자군 전쟁(1095년~1272년)이 별 소득 없이 종료되자 종교에 대한 회의감이 퍼져나갔다. 교회의 권위는 추락하고 있었으나, 교황은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을 하며 반성을 할 줄 몰랐다. 한편, 상공업 발달로 중산층 계급을 이룬 시민 세력의 사회적 지위는 향상되어 갔고, 토지를 기반으로 한 봉건 귀족들의 힘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

교회 중심의 봉건제가 와해되는 과도기가 시작되면서 각국의 왕과 영주들은 더 이상 교황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시민 세력과 협력하여 세력을 확장하며 새로운 시대적 흐름에 편승하였다. 영주들과 경쟁하며 중앙집권을 통한 국왕 중심의 새로운 국가체제 정비는 프랑스필리프 4세에게 시대적 사명이었다. 필리프 4세는 부르주아 또는 하위 귀족 출신의 지식인들을 등용하여 중앙집권적 관료제와 기구를 정비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좋은 결실을 거두기는 하였으나, 조직 확장으로 인해 왕실 재정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2. 2. 아나니 사건 (1303년)

아나니 사건 (1303년 9월 7일)


교황권은 카노사의 굴욕(1077년)과 보름스 협약(1122년) 이후 점차 강해져 인노첸시오 3세 때 최고조에 달했다.[9] 그러나 200년간 이어진 십자군 전쟁(1095-1272)이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면서 종교에 대한 회의감이 퍼져나갔다. 교회의 권위는 떨어지고 있었지만, 교황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과거의 방식만을 고집했다. 한편, 상공업 발달로 성장한 시민 계급의 사회적 지위는 높아졌고, 토지를 기반으로 한 봉건 귀족들의 힘은 약해지고 있었다.

교회 중심의 봉건제가 흔들리면서 각국의 왕들은 시민 세력과 손잡고 왕권을 강화하며 새로운 시대를 준비했다. 프랑스의 필리프 4세 역시 중앙집권을 통해 강력한 왕정 국가를 세우는 것을 시대적 과제로 여겼다. 그는 부르주아나 하위 귀족 출신 지식인들을 등용하여 중앙 관료제와 행정 기구를 정비했다. 이러한 노력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조직 확장으로 인해 왕실 재정이 어려워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필리프 4세는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려 했고, 이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의 정면 충돌로 이어졌다.[10] 잠시 교황의 양보로 갈등이 봉합되는 듯했으나, 곧 다시 불거져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달았다. 1303년 9월 7일, 필리프 4세가 보낸 군대가 이탈리아 아나니에 머물던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급습하여 체포하고 감금했다. 군인들은 교황에게 폭언을 퍼붓고 퇴위를 강요했다.[11] 이처럼 신속하게 작전이 이루어진 이유는 교황이 필리프 4세를 파문하려는 칙서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2] 교황이 파문이라는 영적 권위를 내세우자, 필리프 4세는 세속 군주로서 무력을 동원해 맞선 것이다.

기습 작전은 프랑스 귀족 '기욤 드 노가레'가 지휘했고, 로마의 토착 귀족 '시아라 콜로나'가 사병을 이끌고 합류했다. 시아라 콜로나는 교황을 사로잡은 뒤 뺨을 때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정확한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13] 다만 교황이 폭행을 당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노가레는 교황을 프랑스로 압송하여[12] 종교재판에 세우려 했고,[14] 콜로나는 즉시 처형을 주장했다.[15]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리는 동안 교황은 3일간 굶주린 채 독방에 갇혀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 아나니 시민들이 들고일어나 침입자들을 몰아내고 교황을 구출했다.[16] 그러나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교황은 한 달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결국 사망했다.[17] 카노사의 굴욕(1077년)이 세속 군주가 교황에게 굴욕을 당한 대표적인 사건이라면, '아나니 사건'은 반대로 교황이 세속 권력 앞에 굴욕을 겪은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2. 3. 아비뇽 유수 (1309년~1377년)

카노사의 굴욕(1077년)과 보름스 협약(1122년) 이후 점차 강해지던 교황권은 인노첸시오 3세 때 그 절정에 달했다.[9] 그러나 약 200년간 이어진 십자군 전쟁(1095-1272)이 큰 성과 없이 끝나면서 종교에 대한 회의감이 퍼져나갔고, 교회의 권위는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교황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과거의 방식만을 고집했다. 한편, 상공업의 발달로 성장한 시민 계급의 사회적 지위는 높아졌고, 토지를 기반으로 한 봉건 귀족들의 힘은 약화되었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봉건제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각국의 왕들은 더 이상 교황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시민 세력과 손잡고 권력을 강화하며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따랐다. 특히 프랑스의 필리프 4세는 귀족들과의 경쟁 속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제를 만드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그는 부르주아나 하급 귀족 출신의 지식인들을 등용하여 중앙 관료제를 정비했으며, 이러한 노력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조직 확장으로 인해 왕실 재정이 어려워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아나니 사건을 통해 교황권을 꺾은 필리프 4세는 교황보다 우위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보니파시오 8세의 뒤를 이은 베네딕토 11세가 8개월 만에 사망하자 콘클라베가 열렸지만, 추기경들이 필리프 4세와의 화해를 주장하는 친프랑스파와 복수를 외치는 반프랑스파로 나뉘어 1년 동안이나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지 못했다.[18] 결국 1305년에 이르러서야 친프랑스파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프랑스 출신의 베르트랑이 클레멘스 5세로 선출되었다. 새로운 교황은 프랑스 왕실의 지지를 받던 대주교 출신이었으며, 리옹에서 즉위식을 가졌다.[18]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 왕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로마로 가지 못하고 프랑스에 머물렀다. 1309년에는 필리프 4세의 요구에 따라 교황청을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으로 옮겼다. 이후 1377년까지 약 70년간 교황청은 아비뇽에 머물렀고, 이 기간 동안 선출된 7명의 교황은 모두 프랑스 출신이었다. 추기경단 역시 대부분 프랑스인으로 채워졌다. 아비뇽의 교황들은 프랑스 왕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교황권의 추가적인 쇠퇴를 가져왔다.

1309년부터 프랑스 영토 내 교황령 월경지였던 아비뇽에 자리 잡은 교황청은 아비뇽 유수 시대를 열었다. 이 시기 교황청은 강력한 프랑스의 영향력, 후원 권한을 늘리려는 시도, 수입 증대를 위한 노력 등으로 인해 부패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서방 기독교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외면받았다. 마지막 아비뇽 교황인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주변의 간청에 따라 1377년 1월 17일 교황청을 로마로 다시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로마로 돌아온 그레고리오 11세는 1378년 부활절 직후 다시 아비뇽으로 돌아갈 뜻을 밝혔다.

하지만 그레고리오 11세는 아비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378년 3월 27일 바티칸 궁전에서 사망했다. 로마 시민들은 로마 출신 교황을 선출시키기 위해 위협과 폭력을 사용하며 압력을 가했다. 70년 만에 로마로 돌아온 교황청을 다시는 아비뇽으로 보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결국 1378년 4월 8일, 추기경들은 로마 시민들의 압력 속에서 이탈리아 바리 출신의 대주교 바르톨로메오 프르냐노를 교황 우르바노 6세로 선출했다. 이로써 아비뇽 유수 시대는 막을 내린 것처럼 보였다.

2. 4. 교황청의 로마 귀환 (1377년)

교황 클레멘스 5세에 의해 1309년부터 시작된 아비뇽 유수 시대 동안 교황청은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에 머물렀다. 이 시기 교황청은 강력한 프랑스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 후원 권한 확장과 수입 증대 노력 등으로 인해 부패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서방 기독교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소외감을 안겨주었다.

아비뇽 시대의 마지막 교황인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재위 1370년~1378년)는 '교황의 자리는 로마'라는 신념을 가지고 교황청의 로마 귀환을 추진했다.[21] 그는 밀라노 비스콘티 가문의 팽창 정책에 맞서 전쟁을 벌였고, 피렌체와는 8성인 전쟁을 치렀다. 이 과정에서 교황령 군대가 볼로냐의 반란을 진압하며 체세나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비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레고리오 11세는 1376년 9월 아비뇽을 떠나, 1377년 1월 17일 로마의 바티칸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21] 이로써 70년 가까이 이어진 아비뇽 유수 시대는 표면적으로 막을 내린 듯 보였다.

그러나 로마에서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교황청의 재정과 행정 조직 대부분은 여전히 아비뇽에 남아 있었고, 피렌체와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또한 체세나 학살 사건으로 인해 로마인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교황은 아나니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결국 그레고리오 11세는 로마 귀환 결정을 번복하고 아비뇽으로 돌아갈 의사를 밝혔으나, 이를 실행에 옮기기 전인 1378년 3월 27일 바티칸 궁전에서 사망했다.

그레고리오 11세가 사망하자, 로마 시민들은 다시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돌아갈 것을 우려했다. 그들은 70년 만에 돌아온 교황청을 로마에 머물게 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로마 출신 또는 최소한 이탈리아 출신 교황을 선출하도록 콘클라베에 압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1378년 4월 8일, 추기경들은 바리대주교였던 바르톨로메오 프르냐노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하니, 그가 바로 교황 우르바노 6세이다.

처음에는 온화한 인물로 여겨졌던 우르바노 6세는 즉위 후 강압적인 태도로 추기경들을 대하기 시작했다. 특히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은 이에 크게 반발하여 로마를 떠났고, 일부 이탈리아 추기경들도 그들을 따랐다. 잠시 협상의 시도가 있었으나 결렬되었고, 결국 프랑스 추기경들은 1378년 9월 20일 폰디에서 독자적으로 콘클라베를 열어 프랑스 왕 샤를 5세의 조카인 로베르 드 주네브 추기경을 클레멘스 7세로 선출했다. 클레멘스 7세는 아비뇽으로 돌아가 교황청을 차렸다. 이로써 로마와 아비뇽에 두 명의 교황과 두 개의 추기경단이 들어서는 서방교회 대분열(1378년~1417년)이 시작되었다.

분열 시기 교황 및 대립 교황
주요 교회 회의로마 교황청아비뇽 교황청공의회파 (피사)
rowspan="4" style="height:120px;" |우르바노 6세 (1378-1389)클레멘스 7세 (1378-1394)rowspan="4" |
보니파시오 9세 (1389-1404)
베네딕토 13세 (1394-1417)
인노첸시오 7세 (1404-1406)
피사 공의회 (1409년)그레고리오 12세 (1406-1415)알렉산데르 5세 (1409-1410)
style="height:30px;" |
콘스탄츠 공의회 (1414-1418)요한 23세 (1410-1415)
style="height:10px;" |
마르티노 5세 (1417-1431) - 분열 종식


3. 서방 교회의 분열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교황청을 로마로 되돌리면서 아비뇽 유수 시대는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378년 그레고리우스 11세가 사망하자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추기경단은 프랑스인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로마 시민들은 이탈리아인 교황 선출을 강력히 원했다. 프랑스 추기경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가운데, 결국 이탈리아 출신의 우르바노 6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처음에는 온화한 인물로 여겨졌던 우르바노 6세는 즉위 후 추기경들을 강압적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프랑스 추기경들이 로마를 떠났고, 일부 이탈리아 추기경들도 그 뒤를 따랐다.

로마를 떠난 추기경들은 잠시 교황과의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프랑스 왕의 조카인 로베르 추기경을 새로운 교황 클레멘스 7세로 선출하고 아비뇽에 거점을 마련했다. 이로써 로마아비뇽에 두 명의 교황과 두 개의 추기경단이 동시에 존재하는 긴 '''교회 대분열'''(1378년~1417년)이 시작되었다.

아래는 서방교회 대분열 시기의 주요 교황 및 공의회를 나타낸 표이다.

'''서방교회 대분열 시기 교황 계보'''
주요 교회 회의로마 교황청아비뇽 교황청공의회파
rowspan="4" style="height:120px;" |우르바노 6세 (1378-1389)클레멘스 7세 (1378-1394)rowspan="4" |
보니파시오 9세 (1389-1404)
베네딕토 13세 (1394-1417)
인노첸시오 7세 (1404-1406)
피사 공의회 (1409년)그레고리오 12세 (1406-1415)알렉산데르 5세 (1409-1410)
style="height:30px;" |
콘스탄츠 공의회 (1414-1418)요한 23세 (1410-1415)
style="height:10px;" |
마르티노 5세 (1417-1431)


3. 1. 콘클라베 (1378년)

1377년 아비뇽 유수를 종식시키고 교황청의 로마 귀환을 실현시킨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이듬해 1378년 3월 27일 사망했다.[22] 그의 사망 후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가 열렸다.

당시 로마 시민들은 프랑스 출신 교황이 선출될 경우, 아비뇽 유수 시절처럼 교황청이 다시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놓이거나 아예 아비뇽으로 돌아갈 것을 심각하게 우려했다.[22] 이러한 우려 속에서 로마 시민들은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콘클라베에 참석한 추기경들에게 로마 출신 또는 최소한 이탈리아 출신 교황을 선출하라고 강하게 압박했다.[23] 당시 추기경단은 프랑스인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프랑스 추기경들 사이에서도 분열이 있었다.

지도: 서방 교회 대분열(1378-1417). 로마에 대한 충성(파란색), 아비뇽에 대한 충성(빨간색), 가변적 충성(주황색)을 보여준다. 이 구분은 피사 공의회 (1409)까지 유효하며, 세 번째 계승자를 만들었다.


로마 시민들의 압박과 시위가 폭동으로 번질 것을 염려한 추기경들은 결국 1378년 4월 8일, 이탈리아 바리대주교였던 바르톨로메오 프르냐노를 교황 우르바노 6세로 선출했다.[23] 이는 로마 시민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면서도, 프랑스 추기경들이 로마 출신 교황 선출을 피하려 한 타협의 결과였다. 로마 시민들은 비록 로마 출신은 아니지만 이탈리아인이 교황으로 선출된 것에 대해 아쉬움 속에서도 일단 수용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교황 우르바노 6세는 선출 초기의 온화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즉위 후 추기경들에게 매우 강압적이고 독선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의 이러한 모습에 실망하고 불만을 품은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이 먼저 로마를 떠났고, 일부 이탈리아 출신 추기경들도 뒤따랐다.

우르바노 6세를 선출했던 추기경들 다수는 그의 선출을 후회하며 로마를 떠나 아나니로 이동했고, 이후 폰디에 모였다. 1378년 9월 20일, 이들 13명의 추기경은 제네바 백작 로베르를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로 선출했다. 이들은 우르바노 6세의 선출이 로마 군중의 위협과 폭력 속에서 이루어졌으므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탈리아 내에서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어려워지자, 결국 아비뇽으로 돌아가 그곳에 다시 교황청을 열었다. 프랑스샤를 5세 국왕은 클레멘스 7세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으며, 이후 카스티야, 아라곤, 나바라, 스코틀랜드 등도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다.

이로써 로마교황 우르바노 6세아비뇽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중심으로 서방 기독교 세계가 둘로 나뉘는 서방교회 대분열(1378년~1417년)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교황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키고 유럽 사회에 큰 혼란을 야기했다.

3. 2. 새로운 교황 선출

교황 우르바노 6세는 취임 후 추기경들과 심각한 갈등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관료적이고 온화한 인물로 여겨졌으나, 즉위 후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돌변하여 폭언과 폭행을 일삼으며 추기경들에게 복종을 강요했다.[23] 교황청을 다시 아비뇽으로 옮기자는 제안에 격분하며 이탈리아인 추기경을 임명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다수의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은 로마 생활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신임 교황과 사사건건 충돌했다.

갈등이 지속되자 우르바노 6세를 선출했던 추기경들 대다수는 곧 자신들의 결정을 후회하며 아나니로 이동했다. 그들은 콘클라베가 외부의 부당한 간섭을 배제한다는 기본 정신을 거스르며, 로마 시민들의 강압과 폭력 위협 속에서 진행되었으므로 우르바노 6세의 선출은 무효라고 주장하였다.[24]

추기경들은 나폴리 조반나 1세 여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폰디로 장소를 옮긴 후, 1378년 9월 20일 제네바 백작 로베르 추기경을 새로운 교황 클레멘스 7세로 선출하였다.[25] 그러나 교황 우르바노 6세는 퇴위를 거부하며 새로 선출된 교황을 인정하지 않았다.

클레멘스 7세는 아나니에 머물 수 없게 되어 마리노 전투에서 패배한 후, 지지자인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가 통치하는 나폴리로 피신했다. 그러나 나폴리에서도 환영받지 못하자 결국 배를 타고 아비뇽으로 가서 그곳에 교황청을 다시 세웠다. 프랑스샤를 5세는 그의 강력한 보호자가 되었으며, 이후 카스티야 왕관, 아라곤 왕관, 나바라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등도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다. 이로써 로마와 아비뇽에 두 명의 교황과 두 개의 추기경단이 병립하는 '''서방교회 대분열'''(1378년~1417년)이 시작되었다.

3. 3. 양대 분열과 파문



아비뇽 유수 시대를 거치며 약화된 교황권은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로마 귀환으로 회복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1378년 그레고리오 11세가 사망한 후, 새로운 교황 선출 과정에서 교회가 다시 한번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당시 추기경단은 프랑스인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아비뇽 유수에 대한 반감으로 로마 시민들은 이탈리아인 교황 선출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러한 압력 속에서 나폴리 왕국 출신의 바리 대주교가 교황 우르바노 6세로 선출되었다. 처음에는 온화한 인물로 평가받았으나, 즉위 후 우르바노 6세는 추기경들을 강압적으로 대하며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특히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26]

이에 불만을 품은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은 로마를 떠나 아나니에 모였다. 이탈리아 출신 추기경 일부도 이에 동조했다. 이들은 로마 시민들의 폭동 위협 속에서 이루어진 선거는 무효라고 주장하며, 1378년 9월 20일 폰디에서 프랑스 왕 샤를 5세의 조카인 제네바 백작 로베르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가 바로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이다.

클레멘스 7세는 마리노 전투에서 패배한 후, 그의 지지자 중 한 명인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가 통치하는 나폴리로 피신했으나, 그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비바 파파 우르바노"(교황 우르바노 만세)와 "무오이아 란티크리스토"(적그리스도여 죽어라)라는 구호를 듣고 결국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겨 독자적인 교황청을 세웠다. 프랑스 왕 샤를 5세는 클레멘스 7세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우르바노 6세와 클레멘스 7세는 서로를 파문하며 정통성을 주장했고, 이는 서방 교회를 로마와 아비뇽으로 갈라놓는 서방 교회 대분열의 시작이었다.

유럽 각국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지지하는 교황을 달리했다. 신성 로마 제국, 헝가리, 보헤미아, 네덜란드, 잉글랜드 등은 로마의 우르바노 6세를 지지했다. 반면 프랑스, 스코틀랜드, 사보이, 오스트리아, 카스티야, 아라곤, 나바라, 라틴 동방의 상당 부분, 그리고 스코틀랜드 왕국 등은 아비뇽의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다. 후일 웨일스오와인 글린두르 반란 역시 아비뇽의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를 인정했다. 심지어 당시 존경받던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빈센트 페레르 같은 성직자들조차 각각 우르바노 6세와 클레멘스 7세를 지지하며 의견이 나뉘었다.

분열은 국가적, 파벌적 경쟁에 의해 더욱 격화되었고, 요한 호이징가가 언급했듯 광신적인 증오를 낳았다. 예를 들어, 브뤼허가 아비뇽파로 넘어가자 많은 우르바노파 시민들이 도시를 떠났고, 1382년에는 프랑스 왕실의 상징인 오리플람이 '불신자'로 여겨진 우르바노파 플랑드르인들을 상대로 사용되기도 했다.

분열은 두 교황이 사망한 후에도 후임자들이 선출되면서 계속되었다. 로마에서는 교황 보니파시오 9세(1389년 즉위)가 우르바노 6세를 계승했고, 아비뇽에서는 프랑스 왕 샤를 6세의 뜻과 달리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가 1394년 클레멘스 7세의 뒤를 이었다. 1404년 보니파시오 9세가 사망하자 로마 추기경들은 베네딕토 13세가 사임하면 새 교황을 선출하지 않겠다고 제안했으나, 베네딕토 13세 측이 이를 거부하자 로마 측은 교황 인노첸시오 7세를 선출했다. 인노첸시오 7세와의 협상 시도도 결렬되었고, 그는 1406년 사망했다. 로마 추기경들은 다시 교황 그레고리오 12세를 선출했다.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하자는 주장이 1378년부터 제기되었으나,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교회법상의 문제와 양측 교황의 비협조로 인해 쉽게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피에르 달리, 장 제르송과 같은 신학자들이 교회가 직접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고, 프란체스코 자바렐라는 황제에게 소집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3. 4. 정통 교황 병립 시대

1378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사망한 후, 로마에서는 콘클라베를 통해 이탈리아 출신의 우르바노 6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추기경단은 프랑스인이 다수였으나, 로마 시민들의 압력과 프랑스 추기경들 사이의 분열로 인해 이탈리아인 교황이 선출된 것이다. 그러나 우르바노 6세는 즉위 후 강압적인 태도로 추기경들과 갈등을 빚었고, 이에 불만을 품은 프랑스 추기경들은 로마를 떠나 아날니에 모여 우르바노 6세의 선출이 강압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라고 선언했다. 이어 그들은 폰디에서 프랑스 왕 샤를 5세의 지원을 받아 제네바 출신의 로베르 추기경을 클레멘스 7세로 선출하고 아비뇽에 교황청을 열었다.[26]

이로써 로마아비뇽에 두 명의 교황이 동시에 존재하는 서방교회 대분열(1378년~1417년) 시대가 시작되었다. 서유럽 국가들은 각자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지지하는 교황을 선택하며 둘로 나뉘었다.[27]

아비뇽 교황을 지지한 국가로마 교황을 지지한 국가
프랑스, 아라곤, 카스티야, 부르고뉴, 키프로스, 나폴리, 사보이아, 스코틀랜드덴마크, 잉글랜드, 플랑드르, 신성 로마 제국, 헝가리, 북부 이탈리아, 아일랜드[30], 노르웨이, 폴란드, 스웨덴



두 교황은 서로 자신이 정통 교황임을 주장하며 유럽 군주들과 주요 기관에 지지를 호소했고, 각자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성직자 임명권을 남용했다. 이로 인해 분열은 교구와 수도원, 심지어 가정에까지 확산되어 각 지역 교회에 두 명의 주교, 두 명의 수도원장, 두 명의 본당 신부가 존재하는 혼란이 발생했다.[29][28] 신자들 역시 지지하는 교황에 따라 나뉘었으며, 성직자들은 서로 상대방을 파문하며 유럽 사회 전체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론적으로는 서유럽의 모든 성직자와 신자가 파문 상태에 놓인 셈이었다.[28] 또한 두 개의 교황청을 운영하면서 재정 소요가 크게 늘어났고, 이는 고스란히 신자들의 부담 증가로 이어졌다.[29] 중세 역사가 요한 호이징가는 이 시기의 격렬한 당파 싸움이 광신적인 증오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브뤼허가 아비뇽파를 따르자 많은 우르바노파 시민들이 도시를 떠났고, 1382년에는 우르바노파가 아비뇽파 플랑드르인들을 불신자로 간주하며 오리플람(프랑스 왕의 군기)을 내걸고 공격하기도 했다.

로마의 우르바노 6세는 아비뇽의 클레멘스 7세를 지지한 나폴리조반나 1세 여왕을 1380년 파문하고, 그녀의 사촌인 두라초의 카를로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31] 그러나 카를로는 조반나 1세를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뒤 우르바노 6세에게 등을 돌렸고, 둘 사이의 갈등 끝에 우르바노 6세는 제노바로 피신해야 했다. 그는 1389년 로마에서 독살된 것으로 추정된다.[32]

아비뇽의 클레멘스 7세는 1384년 이탈리아 원정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는 1389년 우르바노 6세가 사망하자 로마 추기경들에게 자신을 교황으로 추대하여 분열을 종식시키자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클레멘스 7세는 1394년 아비뇽에서 사망했으며, 사치스러운 생활로 비판받았다.

우르바노 6세가 1389년에 사망하자 로마의 추기경들은 보니파시오 9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했다. 클레멘스 7세가 1394년에 사망하자 아비뇽의 추기경들은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뜻에 반하여 베네딕토 13세를 선출했다. 아비뇽 추기경들은 선거 전 누가 선출되든 분열 종식을 위해 노력하고 필요시 자진 사임하겠다고 서약했으나, 베네딕토 13세는 즉위 후 이를 거부했다.[33] 베네딕토 13세는 프랑스 교회를 장악하려다 파리 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성직자들의 반발을 샀고, 이는 프랑스 교회의 갈리카니즘(교황권으로부터 프랑스 교회의 독립을 주장하는 사상) 경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404년 로마 교황 보니파시오 9세가 사망했을 때, 로마 추기경들은 베네딕토 13세가 사임한다면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베네딕토 13세의 사절이 이를 거부하자 로마 측은 인노첸시오 7세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인노첸시오 7세와 베네딕토 13세 간의 논의가 있었지만 중단되었고, 베네딕토 13세는 인노첸시오 7세를 파문하고 1405년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려 했으나 프랑스의 지원을 받지 못해 실패했다. 인노첸시오 7세는 1406년 사망했고, 로마 추기경들은 그레고리오 12세를 선출했다.

분열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베네딕토 13세는 유럽 군주들의 지지 철회 등 어려움을 겪자 결국 로마 교황과의 협상에 나섰다. 새로운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와 베네딕토 13세는 1406년 12월 각자 교황직에서 물러나기로 합의했으나, 세부 사항 조율 과정에서 서로 불신하며 회동 직전 합의가 결렬되었다.[35]

분열 해결을 위한 공의회 소집 요구는 1378년부터 있었지만,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교회법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피에르 다이이나 장 제르송 같은 신학자들이 교회가 직접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개발했고, 프란체스코 자바렐라는 황제가 공의회를 소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1409년, 양측 교황에 불만을 품은 추기경들이 주도하여 피사 공의회가 열렸다. 공의회는 1409년 6월 5일 로마의 그레고리오 12세와 아비뇽의 베네딕토 13세를 모두 폐위시키고 새로운 교황으로 밀라노 대주교였던 알렉산데르 5세를 선출했다. 그러나 기존의 두 교황이 퇴위를 거부하면서 이제는 로마, 아비뇽, 피사에 각각 교황이 존재하는, 세 명의 교황이 난립하는 더욱 혼란스러운 상황이 초래되었다. 알렉산데르 5세는 1410년 사망했고, 발다사레 코사요한 23세로서 피사 교황직을 계승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묻힌 교황들을 기념하는 명판. 알렉산데르 6세, 7세, 8세는 피사 교황 알렉산데르 5세가 정통으로 여겨지던 시기에 번호가 매겨졌으나, 요한 23세(1958년 즉위)는 피사 교황 요한 23세의 서수를 재사용했다.


이후 수 세기 동안 가톨릭 교회 내에서 어느 교황 계보를 정통으로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혼란이 있었다. 한때는 1409년부터 1415년까지 피사 교황(알렉산데르 5세, 요한 23세)을 정통으로 간주하기도 했으며(알렉산데르 6세, 7세, 8세의 서수 부여 방식에 영향을 미침), 1860년 ''교황 연감''은 피사 교황들을 정식 교황으로 등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58년 안젤로 론칼리피사 교황 요한 23세의 서수를 재사용하면서 피사 교황들은 공식적으로 대립교황으로 분류되었다. 론칼리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22명의 요한"을 언급했으나[2] (실제로는 대립 교황과 번호 오류로 인해 20명), 그의 결정은 사실상 피사 교황들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현재 가톨릭 교회는 분열 기간 동안 로마 교황 계보만을 정통으로 소급 인정하고 있으며, 현대판 ''교황 연감''은 그레고리오 12세의 재위를 1415년까지로 연장하고 피사 교황들을 대립교황으로 명시한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6세부터 8세까지의 서수는 변경되지 않아 번호 순서에 공백이 남아 있다.

신학자 존 F. 브로데릭(1987)은 이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1378년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는 교황 선출 이후 40년 동안 세 개의 경쟁 교황 계보의 타당성은 여전히 의문의 대상이다. 이것은 사도좌에 대한 로마, 아비뇽, 피사 측의 주장자들이 만든 추기경들의 자격에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마침내 분열은 문제에 대한 결정적인 해결 없이 회복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가 세 명의 주장자 중 누가 정당한 사람인지 선언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퇴위나 폐위를 강요함으로써 그들을 모두 제거한 다음, 모든 측면에서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교황을 선택하기 위한 새로운 방식을 설정함으로써 서방 교회의 분열을 종식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교회는 이 혼란스러운 시대의 교황 계승에 대해 어떤 공식적이고 권위 있는 발표도 한 적이 없다. 마르티노 5세나 그의 후계자들도 마찬가지다. 현대 학자들은 그 해답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지만, 로마 계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아래는 서방교회 대분열 시기의 주요 교황 및 공의회를 나타낸 표이다.

'''서방교회 대분열 시기 교황 계보'''
주요 교회 회의로마 교황청 (정통)아비뇽 교황청 (대립교황)피사 교황청 (대립교황)
rowspan="4" style="height:120px;" |우르바노 6세 (1378-1389)클레멘스 7세 (1378-1394)rowspan="4" |
보니파시오 9세 (1389-1404)
베네딕토 13세 (1394-1417)*
인노첸시오 7세 (1404-1406)
피사 공의회 (1409년)그레고리오 12세 (1406-1415)알렉산데르 5세 (1409-1410)
style="height:30px;" |
콘스탄츠 공의회 (1414-1418)요한 23세 (1410-1415)
style="height:10px;" |
마르티노 5세 (1417-1431)
* 베네딕토 13세는 1417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폐위되었으나, 사망(1423년) 시까지 교황직을 주장했다.


4. 분열의 종식

서방교회 대분열의 장기화는 교회의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시도되었다. 초기에는 양측 교황의 동반 사임이나 중재를 통한 해결책이 모색되었으나, 교황들의 비협조로 인해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교회의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공의회 개최가 부상했다.

1409년 이탈리아 피사에서 피사 공의회가 열렸다. 공의회는 로마와 아비뇽의 두 교황을 모두 폐위하고 새로운 교황 알렉산데르 5세를 선출했지만, 폐위된 교황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세 명의 교황이 난립하는 '교황 삼두 정치'라는 더 큰 혼란을 초래했다.[38]

이 극심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이 공의회는 교회의 최고 권위가 교황이 아닌 공의회 자체에 있음을 선언하는 교령 Haec sancta를 발표하고, 기존의 세 교황을 모두 정리하는 절차를 밟았다.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2세는 자진 사임했고, 피사 교황 요한 23세는 폐위되었으며, 사퇴를 거부한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파문되었다. 마침내 1417년 11월, 공의회는 교황 마르티노 5세를 유일한 교황으로 선출함으로써 40년간 지속된 서방교회 대분열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비록 파문된 베네딕토 13세의 잔존 세력이 잠시 명맥을 유지했으나, 1429년 그의 후계자가 마르티노 5세에게 순종하면서 분열의 시대는 완전히 종식되었다.

4. 1. 파리대학의 제안 (1394년)

1394년 파리대학은 서방교회 대분열 사태 해결을 위해 세 가지 방안을 제안했다.[36] 첫째는 양측 교황이 자발적으로 동시에 사임하는 것이고, 둘째는 독립된 교회재판소에서 어느 한쪽 교황을 폐위시키는 것이며, 셋째는 공의회를 열어 해결책을 찾는 것이었다. 그동안 양보와 절충을 통해 교회 분열을 수습하고 일치를 이루려는 노력이 계속되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교황들은 서로 상대방의 사임만을 주장했기 때문에, 동반 사임이나 중재를 통한 해결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아비뇽로마추기경들은 서로 경쟁하는 대신, 파리대학이 제시한 마지막 방법인 공의회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1408년 6월 리보르노에서 만나 다음 해인 1409년 3월 피사에서 공의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35]

4. 2. 피사 공의회 (1409년)

교황 분열이 장기화되면서, 교황 인노첸시오 7세교황 그레고리오 12세가 로마에서,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가 아비뇽에서 각각 교황좌를 주장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양측 교황 모두 분열 해결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에 실망한 로마와 아비뇽 양측의 추기경들은 독자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섰다.[35] 이 과정에서 교회의 최고 권위가 교황 개인이 아닌 공의회에 있다는 공의회주의 사상이 힘을 얻었다.

추기경들은 1409년 이탈리아 피사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분열을 종식시키고자 했다. 양측 교황에게 공의회 참석을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35] 하지만 유럽의 군주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어서, 1409년 3월 23일 시작된 피사 공의회에는 4명의 대주교, 24명의 추기경, 80명의 주교, 102명의 주교 대표단, 수도원장, 그리고 저명한 신학자들이 참석했다.[37]

공의회는 10주 이상, 15차례의 회기를 거쳐 진행되었다. 1409년 6월 5일 열린 제15차 회기에서 공의회는 로마의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와 아비뇽의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 모두를 분열을 조장하고, 이단적이며, 위증과 스캔들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폐위를 선언하고 교황좌가 비었음을 선포했다. 이어 6월 26일, 추기경들은 새로운 교황으로 밀라노 대주교였던 피에트로 필라르기 추기경을 선출하니, 그가 바로 대립 교황 알렉산데르 5세이다.[38]

그러나 폐위된 그레고리오 12세와 베네딕토 13세는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레고리오 12세는 치비달레 델 프리울리에서, 베네딕토 13세는 페르피냥에서 각각 자신들을 지지하는 공의회를 열었다. 이로 인해 로마, 아비뇽, 피사에 각각 교황이 존재하는, 역사상 유례없는 세 명의 교황이 동시에 존재하는 교황 삼두 정치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38] 알렉산데르 5세는 즉위 1년 만인 1410년에 사망했고, 대립 교황 요한 23세가 그 뒤를 이었으나, 그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 결국 피사 공의회는 분열을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4. 3. 콘스탄츠 공의회 (1414년~1418년)

지기스문트 황제. 그는 교회 대분열 해소에 적극적이었다. 그림의 독수리 문장은 각각 독일 왕권(단두)과 황제권(쌍두)을 상징하며, 쌍두 독수리의 광륜은 제국의 신성함을 나타낸다.


3명의 교황이 동시에 존재하는 서방교회 대분열의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의 요청을 요한 23세(교황 알렉산데르 5세의 후임)가 수용하여 독일 콘스탄츠에서 공의회가 열렸다.[39]콘스탄츠 공의회는 1414년 11월 5일에 시작하여 1418년 4월 22일까지 이어졌으며, 300명이 넘는 주교, 100명 이상의 대수도원장, 그리고 수많은 고위 성직자, 신학자, 교회법학자, 군주들이 참석했다.[40]

교황 분열을 해결하기 위한 공의회 소집 제안은 1378년부터 있었으나,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교회법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피에르 달리와 장 제르송 같은 신학자들은 교회가 직접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고, 프란체스코 자바렐라는 황제만이 공의회를 소집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며 공의회 개최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다.

공의회를 소집했던 요한 23세는 회의 분위기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1415년 3월 20일 콘스탄츠를 탈출했다.[41] 이로 인해 공의회는 소집권자를 잃는 위기를 맞았지만, 지기스문트 황제가 회의를 주도하며 계속 진행되었다. 공의회는 1415년 4월 6일, 교황을 폐위할 권한을 가진 교회의 최고 통치 기구임을 선언하는 교령 ''Haec sancta''를 발표하여 정당성을 확보했다. 신학자 장 제르송의 조언을 받은 공의회는 이를 통해 교황권보다 공의회의 권위가 우위에 있음을 명확히 했다.

공의회에서는 잉글랜드프랑스백년 전쟁으로 대립하던 상황을 고려하여, 출신 국가별 단위(나치오, ''natio'')에 따라 투표하는 이례적인 방식을 채택했다. 처음에는 잉글랜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4개 단위로 시작했으나, 1417년부터는 스페인과 추기경단이 추가되어 총 6개의 투표 단위가 되었다.

회의는 순탄치 않았다. 얀 후스와 같은 인물들에 대한 이단 문제 처리, 교회 개혁을 둘러싼 급진파와 보수파의 대립, 각국 대표단 사이의 이해관계 충돌, 신학자들 간의 이론적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공의회에 새로운 교황을 선출할 권한이 있는지에 대한 문제도 큰 논란거리였다.

긴 논쟁과 정치적 공방 끝에 공의회는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의 자진 사임을 받아내고, 피사 교황 요한 23세를 폐위시켰다. 사퇴를 완강히 거부하던 아비뇽의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는 1417년 7월 27일 파문되었고, 모든 지지 기반을 잃었다. 마침내 1417년 11월, 공의회는 로마의 명문가 출신 추기경 오도네 콜론나를 새로운 교황 마르티노 5세(재위 1417~1431)로 선출했다. 이로써 40년간 지속된 서방교회 대분열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하지만 파문당한 베네딕토 13세는 아라곤의 마르티노 왕의 보호 아래 여전히 교황직을 주장하다 1423년 사망했다. 그를 따르던 소수의 추기경들이 클레멘스 8세를 후임으로 선출했으나, 클레멘스 8세는 1429년 결국 마르티노 5세에게 순종하며 사임함으로써 아비뇽 유수 시대부터 이어진 교황 분열의 잔재는 완전히 사라졌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교회 대분열을 성공적으로 종식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국가별 단위 투표 방식이 채택되는 등, 보편적인 교회 안에서도 각국의 이해관계와 국민성이 점차 중요해지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는 세속 권력이 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공의회의 권위가 교황권보다 우위에 있다는 공의회주의 사상은 교황권의 통일이 이루어지자 급격히 힘을 잃었으며, 세속 정치의 의회 제도처럼 명확한 제도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5. 영향

서방교회 대분열은 콘스탄츠 공의회를 통해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선출되면서 일단락되었지만[39][40][41], 교회와 사회 전반에 걸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분열 기간 동안 교회의 권위는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내부 규율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16세기 종교 개혁이 발생하는 중요한 배경 중 하나로 작용했다.

대분열은 성직자 사회뿐만 아니라 서유럽 사회 전체에 파문을 일으켰다. 역사가 요한 호이징가는 당시 사회상을 분석하며, 브뤼헤와 같은 도시가 지지하는 교황을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바꾸자, 로마 교황을 따르던 많은 주민들이 도시를 떠나 인근의 로마 교황 지지 도시로 이주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또한 프랑스 왕의 신하이자 저술가였던 피에르 살몽이 위트레흐트에 방문했을 때, 그가 아비뇽 교황 지지자로 여겨져 부활절 미사를 집전해 줄 사제를 찾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고 기록했다.

호이징가는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어진 이러한 당파적 대립의 근본 원인을 경제적 이해관계보다는 민중의 심성에 존재하는 "복수심"과 같은 뿌리 깊은 감정에서 찾았다. 한편, 이러한 혼란과 대립 속에서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였던 네덜란드 지역에서는 점차 민족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으며, 이는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 등 외래 지배 세력과의 갈등을 통해 국민 감정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5. 1. 공의회 수위설

콘스탄츠 공의회를 통해 3명의 교황이 모두 폐위되고 새로운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선출되면서 서방 교회의 대분열 사태가 해결되자, 공의회의 권위가 교황권보다 우위에 있다는 공의회 수위설(공의회 지상주의)이 힘을 얻게 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제4회기(1414년 3월 30일)와 제5회기(1414년 4월 6일)에서 공의회 지상주의와 관련된 주요 내용을 결정하였다. 이는 공의회의 권위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부여받기 때문에 교황보다 우위에 있으며, 따라서 교황이라 할지라도 신앙, 교회 재일치, 교회 개혁 문제에 관해서는 공의회의 결정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42]

이 결정에 따라 공의회에서는 교황의 성직매매와 같은 부정과 비리를 논의하고 처벌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심지어 교황을 폐위시킬 수도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공의회 수위설은 16세기 종교 개혁을 불러온 직접적인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43]

교회 분열 상황 속에서 공의회주의는 더욱 힘을 받았다. 이 개혁 운동은 일반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월하며 교회의 문제를 해결할 최종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장 게르송과 같은 이론가들은 사제들과 교회 자체가 교황 권력의 근원이므로, 교회가 교황을 바로잡고, 처벌하며, 필요하다면 폐위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교황권 강화를 추구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1460년 1월 18일, 교황 비오 2세는 교황의 판결에 대해 일반 공의회에 상소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칙서 《Execrabilis》를 발표하여 공의회주의를 억제하고자 했다.

서방교회 대분열은 교회 내 규율을 현저히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많은 학자들은 이 분열이 교회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는 능력을 약화시켰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교회 내 불화와 단결력 상실은 결국 16세기 종교 개혁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5. 2. 교황 수위권과 공의회

교황 수위권교황 레오 1세(재위 440~461) 때 이론적 기반이 마련되었다.[44] 이후 여러 교황의 노력을 통해 로마 주교로서 교황의 위상은 점차 높아졌다. 800년 샤를 대제가 황제로 즉위했을 때, 교황 레오 3세에 대한 로마 귀족들의 고발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지상의 누가 심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45][46] 하인리히 4세에게 카노사의 굴욕을 안겨준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1075년 교황 훈령(Dictatus papae)을 통해 '교황은 누구에게도 심판받지 않는다', '로마 교회는 오류를 범한 적이 없으며 영원히 오류가 없을 것이다', '교황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는 내용을 명시하며 교황 수위권을 강화했다.[47] 이는 교황권 지상주의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서방교회 대분열로 세 명의 교황이 동시에 존재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자, 교황의 권위는 크게 흔들렸고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공의회주의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공의회주의는 교회의 최고 권위가 교황 개인이 아닌 전체 교회를 대표하는 공의회에 있으며, 따라서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상이다. 장 게르송과 같은 신학자들은 사제들과 교회 자체가 교황 권력의 원천이므로, 교회가 교황을 바로잡고, 벌하며, 필요하다면 폐위시킬 수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공의회주의의 영향 아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의 요청과 요한 23세(재위 1410~15)의 수용으로 1414년 독일 콘스탄츠에서 공의회가 소집되었다.[39] 1414년 11월 5일부터 1418년 4월 22일까지 열린 콘스탄츠 공의회에는 300명 이상의 주교, 100명 이상의 대수도원장, 그리고 수많은 고위 성직자, 신학자, 교회법학자, 군주들이 참석했다.[40] 공의회를 소집했던 요한 23세는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1415년 3월 20일 도주했으나,[41] 지기스문트 황제가 공의회를 계속 이끌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역사적인 결정을 내려 당시 난립했던 세 명의 교황, 즉 로마의 그레고리오 12세, 아비뇽의 베네딕토 13세, 그리고 피사의 요한 23세를 모두 폐위시켰다. 그리고 1417년 11월, 로마의 명문가 출신 추기경 오도네 콜론나를 새로운 교황 마르티노 5세(재위 1417~31)로 선출하여 40년간 지속된 서방교회 대분열을 종식시켰다. 이 과정에서 공의회는 교황권보다 공의회의 권위가 우위에 있다는 '공의회 수위설'을 채택했는데, 이는 그레고리오 7세 이후 강화된 교황 수위설을 정면으로 뒤집는 결정이었다. 물론 콘스탄츠 공의회 이전에도 1046년 하인리히 3세 황제가 시노드(교회 회의)를 통해 두 명의 교황 후보자와 한 명의 교황을 폐위시킨 선례가 있기는 했다.[48]

콘스탄츠 공의회 이후에도 교황권과 공의회주의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1431년 개최된 바젤 공의회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참석률 저조를 이유로 일방적으로 공의회 장소를 볼로냐로 옮기려 하자,[49] 이에 강력히 반발하며 공의회 지상주의를 재확인하고 대립 교황을 선출하는 등 교황과 정면으로 맞섰다. 그러나 에우제니오 4세는 1439년 페라라를 거쳐 피렌체에서 공의회를 다시 소집하여, 동방 정교회와의 교회 통합 논의를 통해 교황 수위권을 인정받는 성과를 거두었다.[50]피렌체 공의회의 결정은 공의회 수위설을 약화시키고 다시 교황권의 우위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교황들은 공의회 소집을 점점 더 꺼리게 되었다. 1460년 교황 비오 2세는 교황의 결정에 불복하여 공의회에 상소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칙서 《엑세크라빌리스》(Execrabilis)를 발표했다. 교황 바오로 2세(1464~71)와 교황 식스토 4세(1471~84)는 교황 선출 당시 공의회 소집을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다.[51][52] 교황 율리오 2세 역시 공의회 소집 약속 이행을 미루다가,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적대적인 프랑스 추기경들과 함께 1511년 피사에서 공의회를 열자 이에 맞서기 위해 1512년 로마에서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개최했다.[51] 이 라테라노 공의회에서는 공의회 지상주의를 공식적으로 단죄했다.

이처럼 교황들이 공의회주의 세력의 성장을 두려워하며 공의회 개최를 기피한 것은 결과적으로 16세기 종교 개혁의 불길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53]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1517년)한 이후 교회 개혁을 위한 공의회 개최 요구는 꾸준히 있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523~34)에게 여러 차례 공의회 소집을 촉구했다.[54] 그러나 교황은 이를 정치적 압력으로 여기고 교황권이 공의회에 종속될 것을 우려하여 계속 회피했다. 결국 종교 개혁에 따른 교회 분열을 수습하기 위한 트리엔트 공의회는 1545년에야 열렸으며, 이때는 이미 개신교 세력이 크게 확장된 후였고 개신교도들은 공의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서방교회 대분열과 그 과정에서 나타난 교황과 공의회의 갈등은 교회의 권위와 규율을 약화시켰고, 이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5. 3. 콘클라베

원래 교황 선출권은 평신도와 성직자에게 있었으나, 1059년 추기경단에게 선출권이 넘어가면서[55] 외부의 부당한 간섭을 막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추기경들 사이의 파벌 다툼으로 이어져 대립 교황이 등장하는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체 투표수의 3분의 2 이상을 얻어야 교황으로 선출되도록 최소 득표 기준을 정했지만, 이번에는 선출 과정이 길어져 교황 자리가 오랫동안 비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13세기에 도입된 것이 바로 콘클라베 방식이다. 콘클라베는 교황 선거인단인 추기경들을 외부 세계와 완전히 격리된 상태에서 선거를 치르게 하는 제도이다. 특히 서방 교회 대분열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교황 선출 과정에서 로마 시민들이 가한 부당한 압력이었던 만큼[23], 콘클라베를 통해 외부의 어떠한 압력이나 간섭도 배제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 강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6. 각국의 지지



교황 우르바노 6세를 선출했던 추기경 대다수는 곧 자신의 결정에 후회하며 아나니로 이동했다. 폰디에서 회합한 13명의 추기경들은 1378년 9월 20일 제네바 백작 로베르를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로 선출했다. 추기경들은 우르바노 6세의 선출이 로마 군중들의 폭동에 대한 공포로 인해 무효라고 주장했다. 아나니에 머물 수 없게 된 클레멘스 7세는 마리노 전투에서 패배한 후, 그의 지지자 중 한 명인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가 통치하는 나폴리로 도망쳤다. 조반나 여왕의 웅대한 영접에도 불구하고, 클레멘스는 군중들로부터 "비바 파파 우르바노"(교황 우르바노 만세)와 "무오이아 란티크리스토"(적그리스도여 죽어라)라는 구호를 들었고, 이는 그가 떠나도록 설득했다. 그는 배를 타고 아비뇽으로 가서 그곳에 교황청을 재건했다. 로마 교황의 선택에 미리 불쾌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이는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곧 그의 가장 큰 보호자가 되었다. 프랑스 외에도 클레멘스는 결국 카스티야 왕관, 아라곤 왕관, 나바라 왕국, 라틴 동방의 상당 부분, 그리고 스코틀랜드 왕국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수년 후, 웨일스오와인 글린두르의 글린두르 반란 역시 아비뇽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를 인정했다.

유럽 주요 국가들은 지지하는 교황에 따라 분열되었다. 각 교황청에 대한 지지 세력은 다음과 같다.

교황청별 주요 지지 세력
교황청아비뇽 교황로마 교황피사 교황 (1409년부터)
지지 세력|||



룩셈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황제와 제국 대부분, 헝가리, 보헤미아, 네덜란드 제국, 잉글랜드는 우르바노 6세를 지지했다. 반면 프랑스, 스코틀랜드, 사보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는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다.

당시 도덕적으로 존경받고 교회에 대한 신뢰가 높았던 성직자들 사이에서도 양쪽 교황의 정당성에 대한 의견이 갈렸다. 예를 들어, 성 카타리나는 우르바노 6세를 지지했고, 빈센트 페레르는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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