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 크라우시
1. 개요
릴리 크라우시는 1903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이다. 코다이, 바르토크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20세에 빈 음악원 교수가 되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전문가로 명성을 얻었으며, 바이올리니스트 시몬 골드베르크와 실내악 연주로 국제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40년대에는 전쟁 포로로 수용소 생활을 겪었으며, 이후 뉴질랜드에서 활동을 재개했다. 텍사스 크리스찬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198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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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계 헝가리인 -
요세프 도브로프스키
요세프 도브로프스키는 헝가리 왕국 출신의 체코 문헌학자, 역사학자, 가톨릭 사제로, 체코어와 슬라브어 연구를 통해 체코 민족 부흥 운동에 기여했으며 특히 고대 교회 슬라브어에 대한 연구로 체코 슬라브학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
체코계 헝가리인 -
아서 쾨슬러
아서 쾨슬러는 헝가리 출신의 작가이자 언론인으로, 소설 《한낮의 어둠》으로 유명하며 공산주의, 반공산주의 등 다양한 사상에 관여했고, 말년에 파킨슨병과 백혈병으로 고통받다 아내와 함께 자살했다. -
헝가리의 피아노 연주자 -
프란츠 리스트
프란츠 리스트는 19세기 헝가리 출신의 "피아노의 왕"이라 불린 천재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혁신적인 기법과 화려한 연주, 교향시 창시, 표제음악 발전, 바그너 지원, 종교 음악 작곡, 후진 양성 등 음악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헝가리의 피아노 연주자 -
조르주 치프라
조르주 치프라는 헝가리 태생의 프랑스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헝가리 혁명 이후 서유럽으로 망명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리스트 해석에 독보적이었고 음악계 발전에도 기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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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악기)
공은 금속으로 제작된 타악기로, 다양한 문화권에서 의식, 신호, 음악 연주 등에 사용되며, 형태와 용도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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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회의
국무회의는 대한민국 대통령을 의장으로, 예산, 법률안, 외교, 군사 등 국정 현안을 심의하는 중요한 기관이며,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으로 구성되고, 정례회의는 매주 1회, 임시회의는 필요에 따라 소집된다.
2. 생애
릴리 크라우시는 1903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 등에서 졸탄 코다이, 벨라 바르토크, 아르투르 슈나벨 등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에게 사사하며 피아니스트로서의 기초를 쌓았다. 특히 모차르트와 베토벤 음악 해석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전문가로 인정받았으며, 바이올리니스트 시몬 골드베르크와의 협연은 그녀의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30년대 유럽,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세계 각지를 순회하며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40년 아시아 순회공연 중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자바에서 1943년 6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군에 의해 가족과 함께 포로가 되어 강제 수용소에 갇히는 고초를 겪었다.
전쟁이 끝난 후 뉴질랜드에 정착하여 시민권을 취득하고 연주 및 교육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967년부터 1983년까지 텍사스주 포트워스의 텍사스 크리스찬 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1982년에는 팔로마 오셰아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말년에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애슈빌에 정착했으며, 1986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1930년 10월 31일, 부유한 광산 기술자이자 철학자인 오토 만들(1889–1956)과 결혼하여 슬하에 두 자녀(루스와 마이클)를 두었다. 남편 만들은 유대인이었으나 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크라우시의 음악 경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사업을 매각하기도 했다.
2.1. 초기 생애 및 교육
릴리 크라우시는 1903년 3월 4일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체코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동화된 유대계 헝가리 가문 출신이었다.
6세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8세에 첫 피아노 제자를 두었으며, 같은 해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에 입학했다. 입학 시험에서 뛰어난 재능으로 주목받았으며, 음악원에서 코다이 졸탄에게 음악 이론을, 벨러 바르토크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17세에 최우수 성적으로 음악원을 졸업했다.
졸업 후 빈 음악원에 진학하여, Severin Eisenberger영어(테오도르 레셰티츠키 문하)와 에두아르트 슈토이어만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아이젠베르거에게서는 보통 3년 걸리는 과정을 1년 만에 마쳤고, 슈토이어만에게서는 현대 음악을 배웠다. 1923년, 20세의 젊은 나이에 빈 음악원의 정교수로 임용되었다.
이후 빈에서 부유한 광산 기술자이자 철학자인 Otto Mandl독일어을 만나 1930년 10월 31일에 결혼했다. 같은 해, 남편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아르투르 슈나벨에게 사사했다. 슈나벨은 그녀가 고전주의 음악 전통에 더욱 집중하도록 이끌었다.
2.2. 결혼과 국제적 활동
크라우시는 빈에서 부유한 광산 기술자이자 철학자인 오토 만들(1889–1956)을 만나 1930년 10월 31일에 결혼했다. 만들은 크라우시의 피아니스트 경력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사업을 정리했고, 같은 해 크라우시는 남편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아르투르 슈나벨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곧 크라우시는 모차르트와 베토벤 음악의 전문가로 명성을 얻었다. 특히 바이올리니스트 시몬 골드베르크와 함께한 실내악 연주 및 음반 녹음은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그녀의 국제적인 경력을 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30년대에는 유럽,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지를 순회하며 연주 여행을 다녔다.
2.3. 제2차 세계대전과 수용소 생활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릴리 크라우시는 1940년 아시아 순회공연을 시작했다. 그러나 자바에 머무르던 중 1943년 6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군에 의해 가족과 함께 포로로 잡혀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이 수용소 생활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2.4. 전후 활동 및 교육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극동 각국을 순회하며 독주자로서 활약하였다. 이 시기 모차르트와 슈베르트의 작품, 특히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가장조>, <동내림 나장조> 등을 많이 연주하였다.
전쟁 후 그녀는 뉴질랜드에 정착하여 뉴질랜드 시민권을 취득했으며, 그곳에서 연주와 교육 활동을 재개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1950년대 초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앙리 테미앙카와 함께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을 연주했다.
1966년-1967년 시즌에는 뉴욕에서 9일에 걸쳐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전 27곡을 연주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1967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텍사스주 포트워스에 있는 텍사스 크리스찬 대학교(TCU)의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로 초빙되었고, 1983년까지 그곳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1982년에는 팔로마 오셰아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같은 해 펜실베이니아주에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0번을 연주한 것이 그녀의 마지막 콘서트가 되었다. 이후 노스캐롤라이나주 애슈빌에 정착하여 1986년 11월 6일 사망했다.
3. 평가
스티브 H. 로버슨에 따르면, 릴리 크라우시는 "1986년 사망에 이르기까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녀는 특히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루트비히 판 베토벤 해석의 전문가로 알려졌으며, 바이올리니스트 시몬 골드베르크와의 초기 협연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데 기여했다.
스티브 H. 로버슨은 또한 크라우시에 대해 "하이든, 슈베르트, 특히 모차르트의 제일인자로서 알려져 있으며, 항상 모차르트의 이름과 함께 언급되었다"고 평가했다. 오카모토 미노루 역시 "크라우시는 모차르트의 스페셜리스트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피아니스트이다"라고 언급하며 그녀의 모차르트 해석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음악적 평가 외에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했던 크라우스를 직접 만난 요시다 히데카즈는 그녀의 인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크라우스는 몸에 밴 분위기, 말투, 몸가짐 등 유럽 귀족은 이런 사람이 아닐까 하는 기품을 갖춘 숙녀였다. 머리가 매우 좋고, 화제가 풍부하며 사교성이 높고, 훌륭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4. 출신 배경 논란
릴리 크라우스는 부다페스트에서 체코 출신 아버지와 동화된 유대계 헝가리 가문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출신 배경, 특히 부모의 종교에 대해서는 논란이 존재한다.
2000년에 출간된 스티브 H. 로버슨(Steve H. Roberson)의 전기 릴리 크라우스: 헝가리 피아니스트, 텍사스 교사, 그리고 특별한 인물에는 크라우스의 부모가 모두 유대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명확한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일본의 작가 다고 기로가 로버슨에게 직접 문의하자, 로버슨은 "만년의 크라우스가 자신의 딸에게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자신의 부모는 모두 유대인이었다'고 고백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고 답했다. 다고 기로가 미국에 거주하던 크라우스의 딸에게 확인했을 때도, 딸은 로버슨의 설명과 같은 취지로 답했다.
그러나 다고 기로는 이러한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크라우스가 제2차 세계 대전 후인 1948년, 고향 부다페스트를 방문하여 어머니 및 이복 누이와 재회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었다. 크라우스의 아버지는 전처와의 사이에서 딸(크라우스의 이복 누이)을 두었고, 이후 크라우스의 어머니와 재혼했으며, 홀로코스트가 시작되기 전인 1930년대 중반에 사망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영향 아래 있던 헝가리에서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가혹하고 철저한 유대인 말살 정책(홀로코스트)이 시행되었다. 다고는 이러한 상황에서 만약 크라우스의 부모가 모두 유대인이었다면, 어머니와 이복 누이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크라우스 자신은 생전 인터뷰에서 자신이 가톨릭 가정에서 자랐으며, 유대인인 오토 만델과 결혼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