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츠 대성당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인츠 대성당은 독일 마인츠에 위치한 대성당으로, 975년 오토 왕조 양식으로 건축이 시작되었다. 2차 세계 대전 중 폭격을 입었지만, 여러 차례 개축과 복원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대관식이 거행되었으며, 1188년에는 프리드리히 1세가 제3차 십자군에 대한 지지를 발표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0세기 완공된 건축물 - 통군정
통군정은 압록강변 삼각산 정상에 위치한 관서팔경 중 하나로, 고려 시대 창건 추정, 조선 중종 때 재건되었으나 한국 전쟁으로 파괴 후 복원되었으며, 현재 북한 보물 제51호로 지정된 조선 초기 정자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유산이다. - 10세기 완공된 건축물 - 만월대
만월대는 고려 왕조가 건국될 때 건설된 궁궐로,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나 남북 공동 발굴 조사를 통해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현재 유네스코 세계 유산 등재를 위한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 독일의 로마 가톨릭 대성당 - 밤베르크 대성당
밤베르크 대성당은 독일 밤베르크에 위치한 로마 가톨릭 대성당으로, 1002년 건축을 시작해 1237년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완공되었으며, 하인리히 2세 부부의 묘와 교황 클레멘스 2세의 무덤이 있는 역사적 명소이다. - 독일의 로마 가톨릭 대성당 - 에르푸르트 대성당
에르푸르트 대성당은 독일 튀링겐주 에르푸르트에 위치한 고딕 양식의 대성당으로, 프랑크 왕국 시대부터 권력의 중심지였으며 742년 성 보니파시오가 교회를 세운 이후 로마네스크 바실리카를 거쳐 14세기와 15세기에 현재 모습으로 건축되었고 마르틴 루터가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거대한 종 "마리아 글로리오사"가 설치되어 있다.
마인츠 대성당 - [지명]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 | |
공식 명칭 | 성 마르티노 대성당 |
다른 이름 | 마인츠 돔, 마르틴스돔 |
위치 | 마인츠 |
국가 | 독일 |
종교 | |
종파 | 로마 가톨릭교회 |
교구 | 마인츠 교구 |
관구 |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 |
역사 | |
설립 연도 | 975년 또는 976년 경 |
설립자 | 빌리기스 |
봉헌일 | 1009년 8월 29일 (첫 번째) |
건축 | |
상태 | 대성당 |
건축 양식 | 원래는 로마네스크 건축 고딕 건축 (채플 및 종탑) 바로크 건축 (지붕) |
건축 기간 | 975년–1009년 |
크기 | |
수용량 | 알 수 없음 |
길이 | 알 수 없음 |
너비 | 알 수 없음 |
네이브 너비 | 알 수 없음 |
높이 | 알 수 없음 |
지름 | 알 수 없음 |
층수 | 알 수 없음 |
바닥 면적 | 알 수 없음 |
돔 개수 | 알 수 없음 |
돔 외부 높이 | 알 수 없음 |
돔 내부 높이 | 알 수 없음 |
돔 외부 지름 | 알 수 없음 |
돔 내부 지름 | 알 수 없음 |
첨탑 개수 | 알 수 없음 |
첨탑 높이 | 알 수 없음 |
기타 정보 | |
유물 | 빌리기스의 제의복 |
지정일 | 알 수 없음 |
주교 | 페터 콜그라프 |
오르간 연주자 | 다니엘 베크만 |
종 개수 | 9개 |
웹사이트 | 마인츠 대성당 웹사이트 |
2. 역사
975년 빌리기스 대주교는 오토 왕조 양식으로 새로운 대성당 건축을 명령했다. 이 대성당은 로마의 건물, 특히 당시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영향을 받아 지어졌다.[6]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의 폭격을 받았지만,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다.
2. 1. 건립 배경 및 초기 역사 (10세기-12세기)
975년 빌리기스 대주교는 오토 왕조 양식으로 새로운 대성당 건축을 명령했다. 그는 로마-독일 왕의 대관식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이 건물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대관 권한의 존재가 문제가 된 것은 990년대 무렵부터였고, 완성까지의 기간이 매우 짧다는 점에서 이 이론은 반박되기도 한다. 한편, 성 슈테판 교회의 봉헌은 997년으로 알려져 있으며, 같은 도시에 두 개의 대규모 교회 건설 현장이 동시에 건설될 가능성은 낮기 때문에, 건설이 시작된 것은 10세기 말이라고 여겨진다.[5]새로운 대성당은 교구 교회로서는 불필요했기에, 주로 신자에게 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오토 왕조 제국에서의 제국 대재상으로서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마인츠 대성당은 로마의 건물과 유사하며, 당시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영향을 받았다.[6]
2. 2. 빌리기스와 바르도의 서쪽 성가대석 (11세기)
당시 대부분의 대성당은 주요 성가대를 동쪽에 배치했다. 하지만 빌리기스는 로마의 대형 바실리카를 본떠서 주요 성가대를 서쪽에 배치하도록 대성당을 설계했다. 빌리기의 설계는 구 성 베드로 대성당과 매우 유사했다.[6]성가대는 1009년 화재로 심하게 훼손되었으며, 에르칸발트와 아리보 대주교 재임 기간 동안 그 상태로 유지되었다. 바르도 대주교 치세에 마침내 재건되었다. 그는 대성당의 나머지 부분이 완공되기도 전에 그곳에 자신의 전임자인 아리보를 매장했다. (빌리기의 유해는 때때로 알려진 것과 달리 마인츠 대성당에 있지 않으며, 그는 자신의 두 번째 건축 프로젝트인 성 슈테판 교회에 묻혔다.)[5]
2. 3. 하인리히 4세의 동쪽 성가대석 (11세기-12세기)
1100년,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옛 롬바르드 양식으로 재건축을 명령했다. 동쪽의 오래된 평평한 성가대석 끝은 넓은 압스로 대체되었으며, 짧은 기둥이 받치고 있는 좁은 아케이드가 있는 외부 갤러리는 반원형 벽을 넓은 가짜 아케이드와 양쪽에 있는 높은 필라스터로 장식했다. 새로운 성가대석은 삼랑식 지하 납골당을 갖추고 있었다. 손상된 사각형 탑은 팔각형 돔으로 대체되었고, 그 위에는 나중에 팔각형 탑이 추가되었다. 측면 계단 탑은 최초의 대성당에서 남아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하인리히가 몇 년 전에 슈파이어 대성당에서 감독한 개조 공사와 매우 유사했다.하인리히는 또한 동쪽의 트랜셉트를 높이고 기둥 수준에 개구부를 추가하는 등 몇 가지 사소한 변경을 수행했다. 이러한 기둥 수준의 문은 최초로 건설된 것 중 하나였다.
하인리히는 의도한 변경이 완료되기 전인 1106년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으로 대성당 개조 자금이 고갈되었고, 남은 공사는 중단되었다. 마인츠 대성당은 신성 로마 (독일) 제국의 세 개의 ''카이저돔''("황제의 대성당") 중 하나로, 보름스 대성당 및 슈파이어 대성당과 함께 꼽힌다.[5]
2. 4. 주랑의 발전 (12세기)
마인츠 대주교 아달베르트 1세 폰 자르브뤼켄(1110–1137)은 대성당 옆에 공식적인 궁정 예배당으로 고트하르트 예배당이라는 2층짜리 예배당을 지었다. 그는 또한 주랑의 주요 부분 개축을 명령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주랑과 새로운 예배당의 볼트 사이의 유사성 때문이다.개축 구상은 다시 로마네스크 양식의 슈파이어 대성당에서 가져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황제의 자금 지원 없이 건축가들은 헨리의 증축에 사용된 고급 사암을 구할 자원이 부족했다. 대신 석회암을 사용했다. 개축의 다른 측면들도 훨씬 저렴했으며, 슈파이어 대성당의 사치스러운 스타일은 대체로 피했다.
중앙 주랑은 28m로 지어졌는데, 슈파이어 대성당의 33m보다 5m 짧았다. 맹아치가 슈파이어 대성당처럼 창문을 둘러싸도록 의도된 것으로 보이지만, 지붕의 높이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 결과 아치가 창문 전에 끝나면서 세 개의 레벨 효과가 나타났는데, 이는 건축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기법이었다.
주랑은 12세기 내내 추가로 개축되었다. 결국 전체 외부 벽 구조가 교체되었다. 1200년경에는 천장이 당시로서는 비교적 새로운 기법인 리브 볼트로 교체되었다.
2. 5. 추가 개축 (12세기-13세기)
12세기 무렵, 빌리기스가 건축한 이후 비교적 변함없이 유지되어 온 마인츠 대성당 서쪽 부분을 개축하기로 결정했다. 이전에 수행된 동쪽의 개축이 고(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이루어진 것과 대조적으로, 이 새로운 변화는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진행되었다. 새로운 볼트가 추가되어 트란셉트의 남쪽과 북쪽 부분을 덮었다. 트란셉트와 본당을 구분하는 벽에는 큰 창문이 추가되었다. 트란셉트와 본당을 연결하는 큰 돔은 프리즈와 기둥으로 장식되었다.작은 측면 탑을 지지하기 위해 세 개의 작은 앱스와 두 개의 매우 큰 기둥이 추가되었다. 페디먼트가 성가대석의 세 면에 추가되었다. 전반적으로 대성당의 서쪽 부분은 새롭게 개축된 동쪽 부분에 맞춰 광범위하게 장식되었다.
3. 로마네스크 이후의 건축 및 개축
마인츠 대성당 서쪽 부분 개축 시기부터 고딕 양식과 바로크 양식 등 새로운 건축 양식이 도입되었다.
3. 1. 고딕 양식의 추가 (13세기-15세기)
마인츠 대성당에 로마네스크 양식 이후 처음으로 추가된 부분은 서쪽의 성가대 칸막이였다. 이 작업은 서쪽을 개축할 때 고딕 양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사례를 따라, 그 후 몇 세기 동안 교차 지점이 고딕 양식으로 대대적으로 개축되었다.1279년부터 대성당에는 크고 장식적인 창문이 있는 고딕 양식의 예배당이 건설되었다. 1418년에는 나사우 예배당이 건설되었는데, 이는 중앙 본당에 있는 독립된 묘지 예배당으로, 나사우의 요한 2세 대주교의 요청에 의해 지어졌다. 이 예배당의 건축은 마데른 게르테너의 작품으로 여겨지며, 그는 또한 교차 지점 서쪽 날개 입구 홀에 세워진 기념 예배당도 담당했다.
이 기간 동안 탑도 개축되었다. 1361년 동쪽 탑과 1418년 서쪽 탑에 교차 지점에 있는 두 탑에 종탑이 추가되었다. 이 탑들은 고딕 양식의 피라미드형 지붕으로 덮였다. (이 탑들은 너무 무거워서 1430년에 세워진 기둥으로 동쪽 탑을 지탱해야 했다.)
수도원이 대대적으로 개축되었고, ''성모 교회''(Liebfrauenkirche)는 이 시기에 완전히 교체되었으며, 이는 건물에 대한 마지막 고딕 양식의 개축이었다. 그러나 동쪽 탑의 지붕은 무게 문제로 인해 1579년에 더 평평한 지붕으로 교체되었다. 그 후, 거의 2세기 동안 대성당에 큰 변화는 없었다.
3. 2. 바로크 양식의 추가 (18세기)
1767년 서쪽 십자탑에 번개가 떨어져 지붕이 파괴되었다. 1769년 엔지니어 프란츠 이그나츠 미하엘 노이만은 탑에 새로운 다층 지붕을 설계했다. 서쪽 날개의 모든 탑은 이 새로운 바로크 양식의 석조 디자인으로 지붕이 덮였지만, 이전 양식도 보존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예배당의 박공 꼭대기는 항아리 모양의 구조물로 교체되었다. 이 시기에 유명한 풍향계인 '돔스기켈'도 추가되었다.대성당 내부는 하얗게 칠해졌다. 1769년 서쪽 성가대석 지붕에는 성 마르틴과 거지 조각상이 세워졌다.
4. 19세기 재건
마인츠 대교구는 18세기 말에 큰 피해를 입었다. 1792년 프랑스 혁명군에 의한 침공 이후, 마인츠는 프로이센 군대의 공격을 받았고, 1793년 포위전으로 마인츠 공화국이 멸망했다. 이 공격으로 대성당의 상당 부분이 손상되었는데, 특히 동쪽 날개, 회랑, 그리고 1803년에 철거된 ''리프라우엔키르헤''가 피해를 입었다.[1] 대성당은 수년 동안 군대 캠프로 사용되었고, 그 결과 대성당의 많은 문화재가 팔리고, 나무로 된 내부는 난방을 위해 불태워졌다.
요제프 루트비히 콜마르 주교(1802–1818)는 나폴레옹의 지원을 받아 복원 작업을 시작했다.[1] 이 작업은 1813년 프랑스 군대의 주둔 필요로 인해 중단되었고, 대성당은 1814년에 처음으로 교회로 사용되었다.[1] 1831년까지 복구 작업은 대부분 완료되었다.[1] 건물의 주요 변화는 건축가 게오르크 몰러가 건설한 주 동쪽 탑의 철제 돔이었다.[1] 그러나 이 돔은 너무 무거워서 1870년에 철거되었다.[1]
그 후, 피에르 카위퍼스가 장기간의 복원 작업을 시작했다.[1] 동쪽 십자 탑의 지지 기둥이 제거되었는데, 무거운 종탑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 동쪽 성가대석의 지하 묘지가 재건되었지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건설한 원래 사양대로는 아니었다.[1] 이러한 재건 공사의 결론으로, 1875년에 동쪽 십자 탑 대신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의 탑이 세워졌다.[1]
이 시기에 대성당은 다시 칠해졌다.[1] 필리프 파이트의 작품을 포함한 크고 화려한 나사렛 운동의 벽화가 대성당 내부를 장식하기 위해 그려졌다.[1]
5. 20세기 복원
1900년대에 마인츠 대성당의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한 보존 노력이 시작되었다. 지하 수위가 낮아지면서 나무로 된 하부 구조가 썩기 시작했고, 기초가 무너지기 시작하여 교체해야 했다. 1909년부터 오래된 기초 보강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1916년에 중단되었다.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새로운 기초로 완전히 보강되었다. 콘크리트와 강철은 탑과 주 아치를 고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 붉은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바닥이 건설되었다. 건축가 파울 마이어-슈페어는 내부 벽을 다채로운 사암으로 수정하고, 파이트의 그림 대부분을 제거하여 원래 빌리키스-바르도 시대의 건축과 유사한 모습을 복원하는 시스템을 설계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지속적인 복원 노력을 견디지 못했고, 1959년까지 대부분의 색상이 사라졌다.
5. 1. 제2차 세계 대전 피해와 복구
제2차 세계 대전 중 마인츠는 연합군의 폭격 대상이 되었다. 대성당은 1942년 8월에 여러 번 공격을 받았다. 지붕 대부분이 불탔고, 회랑의 최상층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아치는 공격을 견뎌내고 온전하게 유지되었다. 손상된 부분은 가능한 한 정통적으로 복원되었으며, 이 과정은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또한 대성당의 유리의 많은 부분이 교체되었다.[2]5. 2. 20세기 후반 및 21세기 복원 노력
1900년대에 대성당의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한 보존 노력이 시작되었다. 지하 수위가 낮아지면서 나무로 된 하부 구조가 썩기 시작했고, 기초가 무너지기 시작하여 교체해야 했다. 1909년부터 오래된 기초에 보강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1916년에 공사가 중단되었다. 1924년에서 1928년 사이에 기초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새로운 기초로 완전히 보강되었다. 콘크리트와 강철은 탑과 주 아치를 고정하는 데 사용되었다.이 시기에 붉은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바닥이 건설되었다. 건축가 파울 마이어-슈페어는 내부 벽을 다채로운 사암으로 수정하고, 파이트의 그림 대부분을 제거하여 원래 빌리키스-바르도 시대의 건축과 유사한 모습을 복원하는 시스템을 설계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지속적인 복원 노력을 견디지 못했고, 1959년까지 대부분의 색상이 사라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마인츠는 여러 차례 연합군의 폭격 대상이 되었다. 대성당은 1942년 8월에 여러 번 공격을 받았다. 지붕 대부분이 불탔고, 회랑의 최상층이 파괴되었으나 아치는 공격을 견뎌내고 온전하게 유지되었다. 손상된 부분은 가능한 한 정통적으로 복원되었으며, 이 과정은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또한 대성당의 유리의 많은 부분이 교체되었다.
1975년, 대성당 건설 시작 1000주년을 맞아 대성당 외부는 마인츠의 역사적인 건물과 일치하도록 붉은색으로 칠해졌고, 광범위한 청소 및 복원 노력이 완료되었다.
2001년, 대성당 내부와 외부를 모두 복원하기 위한 새로운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는 10년에서 15년 정도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2004년, 유명한 유리 예술가 요하네스 슈라이터의 대형 창문 2개가 설치되었다.[2]
6. 황제와 대성당
마인츠가 대주교 관할 지역이었을 때, 마인츠 대성당은 대교구의 공식적인 자리였다. 1184년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대성당에서 자신의 아들들의 작위를 축하했으며, 같은 해 마라우에에서 열린 오순절 제국 의회는 중세 시대 최고의 축제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3]
6. 1. 대관식
중세 시대 동안 독일 왕(과 여왕)을 대관할 권리는 마인츠 대주교에게 주어졌다. 마인츠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면 군주에게 독일 왕국이 주어졌고, 로마에서 거행하면 신성 로마 제국이 주어졌지만 (명목상의 차이만 있었다). 대성당이 여러 번 손상되었기 때문에 많은 대관식이 이곳에서 열리지 못했다.[3]다음 군주들이 마인츠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3]
군주 | 대관식 날짜 | 대관 집전자 |
---|---|---|
콘라트 2세 | 1024년 9월 8일 | 아리보 대주교 |
아그네스 드 푸아티에 | 1043년 | 바르도 대주교 |
라인펠덴의 루돌프 (대립왕) | 1077년 3월 26일 또는 4월 7일 | 지크프리트 1세 (마인츠 대주교) |
마틸다 황후 | 1110년 7월 25일 | 쾰른의 프리드리히 1세 대주교 |
필리프 폰 슈바벤 | 1198년 9월 8일 | 타렌테즈의 아이모 주교 |
프리드리히 2세 (신성 로마 황제) | 1212년 12월 9일 | 에프슈타인의 지크프리트 2세 |
하인리히 라스페 | 1246년 5월 22일 | 에프슈타인의 지크프리트 3세 (마인츠 대주교) |
6. 2. 십자군 선포
프리드리히 1세는 1188년 3월 27일 ''Curia Christi''에서 마인츠 대성당에서 제3차 십자군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3]7. 매장된 인물
- 바르도
- 베질로
- 마리아누스 스코투스
- 베르톨트 폰 헤네베르크
참조
[1]
서적
Mainz Die Geschichte der Stadt (The history of the town)
Verlag Philipp von Zabern
[2]
서적
Johannes Schreiter. Glasbilder. Collagen. Zeichnungen, 1995–2012
Kunstverlag Josef Fink
[3]
간행물
The emperors and the pillars of their power
http://www.kaiser202[...]
General Directorate for Cultural Heritage Rhineland-Palatinate
[4]
웹사이트
ドイツ三大聖堂のひとつがある美しい街マインツ
https://tripnote.jp/[...]
2023-08-14
[5]
서적
Mainz Die Geschichte der Stadt (The history of the town)
Verlag Philipp von Zabern
[6]
웹사이트
マインツの旅~ドイツ三大大聖堂とシャガールのステンドグラスに会いに~
https://tabizine.jp/[...]
2023-08-1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