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흐무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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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흐무트 2세는 1785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압뒬하미트 1세의 아들로 태어나 1808년 예니체리의 반란으로 폐위된 셀림 3세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는 즉위 후 예니체리와의 갈등을 겪으며 군사 개혁을 단행하여 예니체리를 폐지하고, 서구식 군사 제도를 도입했다. 또한 행정 및 사법 개혁, 사회 문화 개혁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를 추진했으나, 그리스 독립 전쟁, 오스만-사우디 전쟁, 이집트와의 갈등 등 대외적인 위기에 직면했다. 1839년 결핵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개혁은 이후 탄지마트 개혁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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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흐무트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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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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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오스만 칼리파 아미르 알무미닌 두 성지의 수호자 두 땅의 술탄, 두 바다의 칸 |
이름 | 마흐무트 한 빈 압뒬하미트 |
출생 | 1785년 7월 20일 |
출생지 | 톱카프 궁전, 콘스탄티노플, 오스만 제국 |
사망 | 1839년 7월 1일 |
사망지 | 콘스탄티노플, 오스만 제국 |
매장지 | 술탄 마흐무트 2세의 무덤, 파티흐, 이스탄불, 튀르키예 |
서명 유형 | 투그라 |
종교 | 수니 이슬람 |
통치 | |
국가 | 오스만 제국 (파디샤) |
재위 기간 | 1808년 7월 28일 - 1839년 7월 1일 |
이전 통치자 | 무스타파 4세 |
후임 통치자 | 압뒬메지트 1세 |
가족 | |
배우자 | 네브피단 카든 호샤르 카든 아슈브잔 카든 베즈미알렘 카든 페르테브니얄 카든 기타 |
자녀 | 살리하 술탄 미흐리마 술탄 압뒬메지트 1세 아티예 술탄 아딜레 술탄 압뒬아지즈 |
아버지 | 압뒬하미트 1세 |
어머니 | 나크시딜 술탄 |
왕조 | |
가문 | 오스만 왕조 |
2. 초기 생애와 즉위 과정
마흐무트 2세는 1785년 7월 20일 라마단 기간에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서 술탄 압뒬하미트 1세와 그의 일곱 번째 부인 낙쉬딜 카딘 사이에서 태어났다.[3] 그는 아버지의 막내아들이자 어머니의 둘째 아들이었으며, 어려서 두 형제를 잃었다.[3] 그의 어머니 낙쉬딜 술탄은 프랑스 출신이라는 설도 있었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코카서스 출신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아버지 압뒬하미트 1세가 사망하고 사촌 셀림 3세가 즉위한 후에도, 마흐무트는 비교적 자유로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궁정 학교인 셰흐자데간 학교에서 교육받으며 음악과 서예에 재능을 보였다. 특히 톱카프 궁전에서 음악 거장들을 모았던 셀림 3세의 영향으로 음악에 관심을 가졌고, 궁정 서예가 메흐메트 바스피 에펜디에게 서도를 배웠다.
1807년, 예니체리의 반란으로 셀림 3세가 폐위되고, 이복형 무스타파 4세가 즉위했다. 1808년 7월, 개혁파 알렘다르 무스타파 파샤가 봉기하여 이스탄불에 입성, 무스타파 4세를 폐위시키면서 마흐무트 2세가 즉위하게 되었다.[4]
즉위 과정에서 무스타파 4세는 셀림 3세와 마흐무트 2세를 살해하려 했으나, 마흐무트는 어머니와 조지아 출신 노예 제브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4] 19세기 오스만 역사가 아흐메드 제브데트 파샤의 기록에 따르면, 제브리는 암살자들이 마흐무트가 머물던 하렘 방에 접근했을 때 재를 뿌려 잠시 그들을 막았고, 그 틈을 타 마흐무트는 창문을 통해 탈출하여 하렘 지붕으로 올라갔다.[4] 이후 셋째 궁정 지붕으로 이동한 마흐무트는 다른 시종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탈출했다.[4] 이 반란을 주도한 알렘다르 무스타파 파샤는 마흐무트 2세의 대재상이 되었다.[4] 제브리 칼파는 용기와 충성에 대한 보상으로 황실 하렘의 최고 재무관인 ''하즈네다르 우스타''로 임명되었다.[4]
2. 1. 예니체리와의 갈등
마흐무트 2세는 즉위 후 예니체리를 비롯한 보수 세력과의 갈등 속에서 통치해야 했다. 알렘다르 무스타파 파샤는 대재상에 취임하여 서구화 개혁을 추진했으나, 11월에 예니체리의 반란으로 살해당했다. 이복 형 무스타파 4세의 죽음으로, 마흐무트 2세는 오스만 왕가의 유일한 남성 후계자가 되어 제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니체리의 압력으로 오랫동안 정치적 어려움을 겪었다.마흐무트 2세는 예니체리 군사령관에 자신의 지지자들을 배치하고 반개혁파를 지방으로 좌천시키는 등 점진적으로 예니체리의 세력을 약화시켜 나갔다. 1826년, 마흐무트 2세는 예니체리 군단을 파괴했다.[9][10] 예니체리가 군사 개혁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자, 마흐무트 2세는 예니체리의 병영에 발포하여 이들을 분쇄하고, 잔해를 소각하였다.[9][10]
6월 14일, 예니체리는 반란을 일으켰지만, 울라마는 반란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의견을 냈고,시민들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반란군은 신식 장비를 갖춘 포병대에 의해 괴멸되었고, 6월 15일 진압되었다. 마흐무트 2세는 예니체리 폐지를 포고했고, 200년 이상 제국의 실권을 쥐고 있던 예니체리는 역사의 막을 내렸다.
3. 개혁 정치
재상은 1807년 무스타파 4세를 권좌에 앉힌 보수적인 쿠데타로 중단되었던 개혁을 재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무스타파 4세는 1808년 반란 중에 살해되었고, 마흐무트 2세는 일시적으로 개혁을 포기했다.
1839년, 그는 죽기 직전에 탄지마트 개혁 시대를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각료 회의 또는 '메클리스-이 부켈라'(Meclis-i Vukela)를 도입하는 것이 포함되었다.[11] 탄지마트는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의 시작을 알렸고, 유럽식 의상, 건축, 법률, 제도 조직, 토지 개혁과 같은 제국의 사회적, 법적 측면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전통의 측면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궁술 스포츠를 부활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궁술 명장 무스타파 카니에게 튀르키예 활의 역사, 제작 및 사용에 관한 책을 쓰도록 명령했는데, 이 책에서 현재 튀르키예 궁술에 대해 알려진 대부분의 내용이 나온다.[12]
마흐무트 2세는 1839년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술탄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그의 아들 압뒬메지트 1세가 그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며 귈하네 칙령을 통해 전반적인 개편(탄지마트)을 할 의사를 발표했다.
마흐무트 2세는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지방에서 반독립 군주처럼 행동하는 지방 명사들에게 압력을 가하여 정부의 통제하에 두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마흐무트는 궁정의 보수파와 지방 명사를 배제하고 집권화를 추진한다는 목적은 일치했다. 1813년에는 징세 청부제로 계약할 수 있는 대상을 지방 행정관으로 제한했으며, 1838년에는 관직자의 봉급에 징세 청부 권한을 부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마흐무트 2세는 동맹 관계를 무너뜨리고, 당주가 사망했을 때 재산을 몰수하고, 군대를 동원해 토벌하거나, 대세력의 지방 명사에게 소세력의 지방 명사를 여러 명 토벌하게 하는 등, 강력한 지방 명사는 임지를 바꾸어 세력을 약화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지방 명사의 힘을 깎아나갔다. 그 결과 제국의 중추인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반도에서는 10년 정도의 기간 동안 대부분의 지방 명사가 중앙 정부에 굴복했다.
이처럼 알렘다르의 죽음 이후 10여 년에 걸쳐 마흐무트 2세는 점차 황제 전제 정치와 중앙 집권화를 향해 실력을 축적해 나갔다.
군사면에서 6월 16일에는 예니체리 폐지를 공포함과 동시에, 전부터 선언했던 "무함마드 상승군"이라고 명명한 신식 군대를 설립했다. 유럽의 병제에 따라 무함마드 상승군의 총사령관으로 세라스케르 직이 신설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에서 처음으로 육군이 일원적인 지휘 체계로 통합되었다. 군대를 확대하기 위해 1834년에 널리 국민으로부터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육군사관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오랫동안 형식화되었지만 여전히 존속하고 있던 티마르 제도를 정식으로 폐지하고, 티마르 제도로 유지되던 재지 기병 시파히를 해체하여 육군 기병대에 통합했다. 나바리노 해전에서의 패배 후에는 더 강력한 군함 건조에 전념했다.
정치 면에서는 군주의 대리인으로서 막대한 권력을 휘둘러 온 대재상의 권한 축소를 꾀했다. 그전까지의 대재상은 막대한 권한을 행사하여 국정의 실질적인 최고 책임자였으며, 전시 중에는 스스로 전선에 나가 최고 사령관 역할을 수행했지만, 대재상부는 분할되어 외무 대신, 내무 대신, 재무 대신, 사법 대신 등의 대신직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대재상이 주최해 온 제국의 최고 의사 결정 기관인 어전 회의(디와누 휘마윤)는 각의로 개편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전통적인 정치 체제는 서양식 내각 제도로 접근해 갔다. 마흐무트 2세 말년인 1838년에는 대재상의 관명도 총리 대신(수상)으로 변경되었다. 반동 세력에 의해 폐지되었던 대사관 제도도 부활시켰다.
수도에서는 모스크의 메크데브에서 대행되던 초등 교육의 의무화를 시도했다. 또한 중등 교육을 위한 서양식 중학교로 리세가 개설되었다. 또한, 일반 관료의 양성과 임용을 도모하는 마흐무트 2세 학교도 설립되었다.
보수파의 아성이었던 종교 세력에 대해서는 예니체리 폐지와 전후하여 이슬람 신비주의의 베크타시 교단을 폐쇄시키거나, 종교 관계자의 경제적 기반인 와크프(기증 재산)를 정부의 관리 하에 둠으로써 종교 세력의 힘을 약화시켰다. 오스만 제국의 종무 행정에서 최고의 지위에 있던 셰이흐 율 이슬람도 지금까지의 초연한 지위를 개정하여 "원로부"라고 불리는 종무 행정의 최고 관청의 장관으로 임명되고, 각의 멤버에 더해지는 등 정부 기구 안으로 편입되었다.
1833년에는 그리스 독립 전쟁의 발발로 인해 지금까지 제국의 통역관을 맡아 왔던 그리스인을 등용할 수 없게 된 구멍을 메우기 위해 번역국이 설립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젊은 관료 중에서 서양의 언어에 능통하며, 통역관·외교관으로서 활약할 수 있는 인재가 육성되었다.
또한, 종래의 도제적인 가내 교육과 종교 세력에 의한 학교 교육이 대세를 이루고 있던 교육 분야도 근대화가 이루어졌으며, 군의학교, 음악학교, 사관학교 등의 근대적 교육 기관이 창설되었다. 그들의 우수한 인재들은 서양으로 유학에 파견되어 차세대 엘리트 개혁 관료층을 형성하게 된다.
문화적으로도, 무함마드 상승군에서 채용되었던 서양식 제복과 터키 모자가 1829년에 종교 관계 분야를 관장해 온 울라마를 제외한 모든 문관에게도 채용되어 오스만 제국의 복제에 양장이 도입되었다.
이 외에도, 마흐무트 2세 시대의 중요한 개혁으로, 상설 대사관 설치, 관보 창간, 우편 제도 창설 등이 있다.
지역별로 인구 조사도 실시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지역의 구역마다 정, 부의 장이 임명(혹은 선출)되었고, 납세자의 전국 조사도 이루어졌다. 주민 등록, 통행 증명서 발행, 세금 할당이 이루어졌으며, 1834년에 일부 지역에서 자산과 수입 조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 외에도 토지와 가축에 부과되던 할라지를 폐지하고, 재판의 상소 제도를 도입했다. 마흐무트는 이슬람교에서 혐오하던 음주에 관해서도 완화하는 칙령을 내려, 이 이후 상류 계급에서는 음주가 평연하게 행해지게 되었다.
이처럼, 마흐무트 2세는 다양한 개혁을 전제적으로 실시하여 오스만 제국 근대화의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그 급속한 서구화 개혁은 많은 무슬림(이슬람교도) 국민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마흐무트 2세는 "이교도의 황제"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3. 1. 군사 개혁
1826년, 마흐무트 2세는 오랜 기간 제국의 실권을 쥐고 있던 예니체리 군단을 전격적으로 폐지했다.[9][10] 6월 14일 예니체리가 반란을 일으키자, 마흐무트 2세는 울라마로부터 반란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의견을 받아내고, 신식 장비를 갖춘 포병대를 동원하여 진압했다. 6월 15일까지 반란군을 진압하고, 이를 기회로 예니체리 폐지를 포고했다. 이후 '무함마드 상승군'이라는 새로운 군대를 창설하여 유럽식 군사 제도를 도입했다.[9][10] 새로운 군대는 주로 루멜리아와 소아시아의 터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로부터 모집되었다. 무함마드 상승군의 총사령관으로 세라스케르 직이 신설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에서 처음으로 육군이 일원적인 지휘 체계로 통합되었다.1834년에는 군사 인재 양성을 위해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유명무실해진 티마르 제도를 폐지하고, 재지 기병 시파히를 해체하여 육군 기병대에 통합함으로써 군사력을 강화했다.
1827년 나바리노 해전에서 영국-프랑스-러시아 연합 함대에 패배한 후, 마흐무트 2세는 해군력 강화에 힘썼다. 1828년에 오스만 해군 최초의 증기선을 도입하고, 1829년에는 콘스탄티노플 골든 혼에 있는 제국 해군 무기고에서 당대 세계 최대 규모의 전열함 마흐무디예를 건조했다. 마흐무디예는 3개의 갑판에 128문의 대포를 장착하고 1,280명의 선원을 태웠다.
thumb(1829), 콘스탄티노플의 골든 혼에 있는 제국 해군 무기고에서 건조되었으며, 수년간 세계에서 가장 큰 군함이었다.]]
3. 2. 행정 및 사법 개혁
마흐무트 2세는 중앙 집권화를 강화하고 행정 및 사법 제도를 근대화하기 위한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다. 우선 대재상의 권한을 축소하고, 서구식 내각 제도를 도입하여 정부 조직을 개편했다.[11] 1838년에는 대재상의 관명을 총리 대신(수상)으로 변경하였다. 또한, 종교 세력의 경제적 기반인 바크프(vakıf)를 정부 관리하에 두고(에브카프부(Ministry of Evkaf) 참조), 셰이흐 율 이슬람의 지위를 개정하여 종교 세력을 정부 기구 안으로 편입시켰다.1833년에는 번역국을 설치하여 서양 언어에 능통한 관료를 양성하고, 교육 제도를 근대화하여 군의학교, 음악학교, 사관학교 등 근대적 교육 기관을 설립했다. 이 외에도 관보를 창간하고 우편 제도를 창설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추진했다.
1834년 2월 22일자 칙령을 통해 공무원의 지방 순회 시 주민들에게 부과되던 과도한 요금을 폐지하고, 정기적인 세금 징수 외의 모든 금전 징수를 불법화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자 했다. 또한 하라치(인두세) 징수 방식을 개혁하고, 지방의 카디, 무슬림 총독, 라야의 아얀(지방 수장)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세금을 징수하도록 하여 세금 징수의 투명성을 높이고 부정부패를 방지하고자 했다.
마흐무트 2세는 재판의 상소 제도를 도입하고, 오랫동안 형식화되었지만 여전히 존속하고 있던 티마르 제도를 정식으로 폐지하였다. 또한, 지역별로 인구 조사를 실시하여 지역 구역마다 정, 부의 장을 임명(혹은 선출)하고, 납세자의 전국 조사를 통해 주민 등록, 통행 증명서 발행, 세금 할당을 실시했다.
이러한 개혁은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지만, 급속한 서구화 정책은 많은 무슬림(이슬람교도)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3. 3. 사회 문화 개혁
마흐무트 2세는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를 위해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개혁을 단행했다.[14] 1829년에는 종교 관계자를 제외한 모든 문관에게 서구식 복장과 터키 모자를 착용하도록 하여 복식 개혁을 실시했다.[16][17][18] 이는 전통적인 복식에서 벗어나 서구식 복식을 도입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조치였다. 왼쪽 이미지는 1826년 의복 개혁 이전의 마흐무트 2세의 모습이고, 오른쪽은 의복 개혁 이후의 모습이다.또한, 이슬람교에서 금기시되던 음주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여 상류층을 중심으로 음주 문화를 확산시켰다.
이 외에도, 마흐무트 2세 시대의 중요한 개혁으로, 상설 대사관 설치, 관보 창간, 우편 제도 창설 등이 있다. 지역별로 인구 조사가 실시되었고, 이를 계기로 지역의 구역마다 정, 부의 장이 임명(혹은 선출)되었다. 또한 납세자의 전국 조사도 이루어졌으며, 1834년에 일부 지역에서 자산과 수입 조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 외에도 토지와 가축에 부과되던 할라지를 폐지하고, 재판의 상소 제도를 도입했다.
이러한 급속한 서구화 개혁은 많은 무슬림들의 반감을 샀고, 마흐무트 2세는 "이교도의 황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4. 대외 관계 및 위기
마흐무트 2세가 추진한 다양한 개혁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 시대에 제국이 안고 있던 심각한 내우외환은 그의 만년의 대외 관계를 매우 어려운 것으로 만들었다.
마흐무트 2세의 전제 체제화는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방에서 군사력을 대행했던 아야안과 육군력을 담당해 온 예니체리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일시적인 군사력의 약화를 초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21년에 왈라키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봉기가 발생했다. (왈라키아 봉기) 이 봉기는 곧 진압되었지만, 이에 호응하듯 3월에 그리스인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가 야시에서 봉기했고, 여기에 그리스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 이후 그리스에는 입실란티스나 발칸 반도의 여러 민족, 코사크 등이 집결했다. 오스만 측도 반격하여 6월에 드라가차니 전투에서 독립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이윽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독립군에게 점령당하고, 크레타 섬에서도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마흐무트 2세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지하드를 선언하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그리고리오스 5세를 처형했다. 오스만 측은 철저한 섬멸전을 펼쳤지만, 이에 맞서는 그리스 측은 게릴라 전법으로 반격했고, 게다가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의용군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집결하여 전역으로 퍼진 봉기를 진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1822년에는 반란군에게 해상전에서 패배했고, 게다가 중앙 정부가 그리스에 생기면서 반독립화되어 있었다.
궁지에 몰린 마흐무트 2세는 1824년에 독자적인 서구화 정책을 추진하던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에게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크레타 섬, 그리고 시리아의 3개 총독 지위를 그에게 주는 것을 조건으로 원군 파견을 요청했다. 이듬해 파견된 무함마드 알리의 아들 이브라힘 파샤는 잇따라 반란군을 격파해 나갔고, 크레타 섬마저 점령했다. 오스만 측은 더욱 북쪽의 방비를 굳히기 위해 1826년에 불리한 조건으로 아케르만 조약을 체결하고, 러시아와 협조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그러나 1827년에는 러시아가 그리스 지원을 재개하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 연합 함대에 나바리노 해전에서 패배했다. 이때 함대의 8할 가까이를 잃고 6,000명이 전사했다. 1828년에는 러시아가 정식으로 선전 포고를 했다. 마흐무트는 이집트에 다시 2만 명의 원군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고, 제국 제2의 수도인 아드리아노플을 점령당했다. 결국 이듬해 아드리아노플 조약에서 그리스의 자치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 런던 의정서에서 완전 독립을 인정했다.
같은 해에는 제국의 서북단에 위치한 세르비아 공국의 자치를 승인받았고, 1830년에 제국 남서단의 알제리가 프랑스에 의해 점령당했다.
그리고 1831년, 그리스 독립 전쟁 참전으로 큰 희생을 치른 무함마드 알리가 참전에 즈음하여 마흐무트 2세로부터 약속받았던 시리아 총독직을 받지 못한 것에 항의하여 이집트군을 시리아에 무력 침공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제1차 이집트-오스만 전쟁) 단독으로 무함마드 알리를 쓰러뜨릴 수 없었던 마흐무트 2세는, 그리스·세르비아 문제로 압박을 받아온 상대인 러시아에 의존하여 이집트 문제를 열강의 개입으로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러시아의 지원을 얻기 위해 웅카르-이스켈레시 조약으로 터키 해협을 러시아에 개방했다.
1833년, 퀴타히야 조약을 체결하여 제1차 이집트-오스만 전쟁은 무함마드 알리에게 시리아 총독직을 수여하는 것으로 결착되었지만, 보복을 꾀하는 마흐무트 2세와 오스만 제국 정부로부터의 자립과 시리아 방면에서의 권익 확대를 노리는 무함마드 알리 사이의 대립 관계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재충돌의 긴장이 고조된 1838년, 마흐무트 2세는 이집트 문제에 대한 영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영국의 이익에 대폭 양보하여 전매제 폐지와 저율의 고정 관세를 정하고, 오스만 제국의 관세 자주권을 상실시키는 불평등 조약을 맺는 길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영국의 지지는 얻었지만, 마흐무트 2세의 붕어 후 제국이 반식민지화로 향하는 직접적인 계기는 이 시점에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영국의 지지를 얻은 마흐무트 2세는 1839년 4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이집트와 교전을 시작하여, 무함마드 알리가 지배하는 북 시리아의 요충 알레포에 오스만 제국군을 향하게 했다. (제2차 이집트-오스만 전쟁) 6월 24일, 오스만 제국군은 이집트군에게 격파당했고, 제2차 이집트-오스만 전쟁 또한 무함마드 알리의 우세로 진행되려 했다. 이 비보가 전해지기 전에 마흐무트는 붕어했다.
이 전쟁은 최종적으로 영국의 개입으로 1840년 7월 오스만 제국 측의 우세로 결착되었지만, 무함마드 알리에게 이집트의 세습권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관세 자주권이 없는 불평등 조약이 이집트에도 적용되게 되어, 이집트에게도 일련의 사건은 반식민지화의 계기가 되어 갔다.
마흐무트 2세와 무함마드 알리의 격돌과 그 결과는, 마흐무트 2세의 개혁이 동시대 이집트에서 무함마드 알리에 의한 개혁에 비해 충분한 결과를 남기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4. 1. 러시아-튀르크 전쟁 (1806년-1812년)
마흐무트 2세 즉위 후에도 러시아와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1810년, 러시아군은 실리스트레 요새를 다시 포위공격했다. 그러나 1811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러시아 제국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오스만 제국에 대한 러시아의 압박은 줄어들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시작하면서 오스만 제국에 동참을 제안했지만, 영국과 오스만 제국을 제외한 유럽 전체를 침략했던 나폴레옹을 신뢰할 수 없었던 마흐무트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1812년 5월 28일, 부쿠레슈티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몰다비아 동쪽 절반(베사라비아)을 러시아에 할양하고 프루트 강을 국경으로 삼게 되었다. 비록 그 지역을 보호하기로 약속했지만, 베사라비아를 할양한 것이였다. 러시아는 하부 다뉴브 지역의 새로운 강국이 되었고, 경제, 외교, 군사적으로 이익이 되는 국경을 확보했다. 트란스카우카시아에서 오스만 제국은 포티, 아나파, 아할칼라키 등 이전에 잃었던 영토 대부분을 회복했다. 러시아는 압하지야 해안의 수후미를 유지했다. 그 대가로 술탄은 1810년 러시아의 이메레티 왕국 병합을 인정했다. 이 조약은 나폴레옹의 침공 13일 전인 6월 11일,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 의해 승인되었다.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했던 오스만 제국이었지만, 당시 유럽의 공법은 오스만 제국에 적용되지 않았고, 빈 회의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1809년에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재개되었고, 오스만 제국은 같은 해 영국과 비밀 동맹을 맺었지만, 1812년 패배하여 러시아와 부쿠레슈티 조약을 체결하고 베사라비아를 할양했다. 부쿠레슈티 조약에는 세르비아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조항이 있었으나 실행되지 않았고, 1815년 제2차 세르비아 봉기가 발발하여 2년 후 세르비아 자치 공국을 승인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의 영토 대부분은 명목상 유지되었고, 유럽 열강의 의도에 따라 전후 빈 체제의 일원이 되었다.
4. 2. 오스만-사우디 전쟁
마흐무트 2세 치세 초기에, 그의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 파샤는 오스만-사우디 전쟁에서 승리하여 메디나(1812년)와 메카(1813년)의 성지들을 제1 사우디 국가로부터 탈환했다.[6]압둘라 빈 사우드와 제1 사우디 국가는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들이 메카와 메디나의 성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고, 그의 추종자들은 또한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하산 이븐 알리, 후세인 이븐 알리의 무덤을 훼손했다. 압둘라 빈 사우드와 그의 추종자 두 명은 성지들과 모스크에 저지른 범죄로 인해 공개 참수형에 처해졌다.[6]
마흐무트는 즉위 3년 전부터 시작된 와하브 왕국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즉시 성지 탈환을 위한 군대를 파견하고,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에게도 원군을 요청했다. 당시 성지를 점령하고 있던 와하브파는 성지 순례단을 습격하여 금품을 빼앗고, 와하브파로 개종할 것인지 죽음을 택할 것인지 선택하게 했다. 성지 순례 루트를 확보하는 것은 칼리프의 역할이었기 때문에 마흐무트는 술탄으로서, 그리고 칼리프로서의 위신을 걸고 진압에 나섰다. 1812년에 메디나를 탈환하고 1813년에 메카를 탈환하여, 1817년까지 와하브 왕국의 주요 도시를 점령, 이듬해 와하브 왕국을 멸망시켰다. 국왕 압둘라 빈 사우드는 이스탄불로 보내져 그곳에서 처형되었다.
4. 3. 그리스 독립 전쟁 (1821년-1829년)
1821년 왈라키아 봉기가 일어났지만 곧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리스인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가 야시에서 봉기하여 그리스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 오스만 제국은 드라가차니 전투에서 독립군을 격파했지만,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독립군에게 점령당하고 크레타 섬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마흐무트 2세는 지하드를 선언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그리고리오스 5세를 처형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했다.[7] 오스만 제국군은 철저한 섬멸전을 펼쳤지만, 그리스 측은 게릴라 전법으로 반격했고, 유럽 각국에서 의용군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집결하여 전역으로 퍼진 봉기를 진압하지 못했다.
궁지에 몰린 마흐무트 2세는 1824년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에게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크레타 섬, 시리아의 3개 총독 지위를 주는 조건으로 원군 파견을 요청했다. 1825년 파견된 무함마드 알리의 아들 이브라힘 파샤는 반란군을 잇따라 격파하고 크레타 섬을 점령했다. 오스만 제국은 1826년 아케르만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와 협조 관계를 맺으려 했다. 그러나 1827년 나바리노 해전에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연합 함대에 패배하여 함대의 8할 가까이를 잃고 6,000명이 전사했다.[8] 1828년 러시아가 정식으로 선전 포고를 하고, 오스만 제국은 제2의 수도인 아드리아노플을 점령당했다. 결국 1829년 아드리아노플 조약에서 그리스의 자치를 인정하고, 1832년 콘스탄티노플 조약에서 그리스의 완전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8]
4. 4. 오스만-가자르 전쟁
가자르 왕조는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했지만, 가자르 측이 적대적인 부족을 보호하거나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이유로 1821년에 동아나톨리아와 바그다드를 침공했다. 바그다드는 사수했지만 에르주룸에서 가자르 왕조와 충돌하여 패배했고, 1823년에는 제1차 에르주룸 조약을 체결하여 강화했다. 조약 내용은 80년 이상 전에 체결된 쾨르덴 조약의 국경선으로 할 것, 페르시아인의 성지 순례를 허가할 것, 3년마다 양국이 사절을 파견하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1830년대부터 국경 분쟁이 다시 일어나 일촉즉발의 상태에 이르렀지만, 영국과 러시아의 중재로 전쟁은 회피되었다. 마흐무트 2세 사후인 1847년에 제2차 에르주룸 조약을 체결하였고, 내용은 국경 분쟁 지역을 양국이 절반으로 나누고, 그를 위한 국경 위원회를 설치하는 것 등이었다. 국경을 결정하는 작업은 오랜 시간을 거쳐 1914년에 완료되었다.4. 5. 이집트와의 갈등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마흐무트 2세는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에게 원군 파견을 요청했다. 이듬해 파견된 무함마드 알리의 아들 이브라힘 파샤는 잇따라 반란군을 격파해 나갔다. 그러나 전쟁 후 무함마드 알리가 약속받았던 시리아 총독직을 받지 못하자, 1831년 이집트군을 시리아에 무력 침공시켜 제1차 이집트-오스만 전쟁이 발발했다.마흐무트 2세는 러시아의 지원을 얻기 위해 웅카르-이스켈레시 조약으로 터키 해협을 러시아에 개방했다. 1833년 퀴타히야 조약을 통해 무함마드 알리에게 시리아 총독직을 수여하며 전쟁은 일단락되었지만, 양측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1838년 마흐무트 2세는 이집트 문제에 대한 영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영국의 이익에 대폭 양보하여 전매제 폐지와 저율의 고정 관세를 정하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 1839년 4월, 마흐무트 2세는 이집트와 교전을 시작하여 제2차 이집트-오스만 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 6월 24일, 오스만 제국군은 이집트군에게 격파당했고, 이 비보가 전해지기 전에 마흐무트는 붕어했다.
이 전쟁은 최종적으로 영국의 개입으로 1840년 7월 오스만 제국 측의 우세로 결착되었지만, 무함마드 알리에게 이집트의 세습권이 인정되었다.
5. 죽음과 유산
마흐무트 2세는 제2차 이집트-오스만 전쟁 중에 건강이 악화되었다. 1839년, 탄지마트의 준비를 시작하여 귈하네 칙령의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지만, 6월 30일 결핵 악화로 인해 이스탄불에서 붕어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조문객들이 몰려들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뒤를 이어 장남인 압뒬메지트 1세가 즉위했다.
마흐무트 2세는 개인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통치 기간 동안 제국의 군사적 쇠퇴를 막을 수는 없었다. 특히 그리스 독립 전쟁으로 그리스가 독립하고, 무함마드 알리가 이집트의 자치권을 확대하면서 제국의 위상이 크게 실추되었다. 그러나 그가 추진한 근대화 개혁은 제국 존속의 기반이 되었으며, 이후 탄지마트 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다.
6. 가족 관계
마흐무트 2세는 많은 부인을 두었으며, 슬하에 여러 명의 아들과 딸을 두었다.[21][22][23][24][25][26][27][28][29][30][31][32][33] 그 중 베즈미아렘 카든(1807 – 1853년 5월 2일)은 압뒬메지트 1세의 어머니로, 조지아 출신이며, 에스마 술탄에게 교육을 받았다.[45] 처음에는 첩이 된 후 궁전의 하맘에서 일했으며, 1832년부터 제3 카든, 그 후 제2 카든이 되었다. 페르테브니얄 카든(1812 – 1883년 2월 5일)은 압뒬라지즈의 어머니이다.[47]
성년까지 생존한 아들은 압뒬메지트 1세[46]와 압뒬라지즈[48] 두 명뿐이었다.[34][35][23][36][37][38][39] 딸 중에서는 살리하 술탄, 미흐리마 술탄, 아딜레 술탄 등이 알려져 있다.[40]
마흐무트 2세의 부인 중에는 파트마 카든, 알리제나브 카든, 하지예 페르테브피얄레 네브피단 카든, 딜세자 카든, 미슬리나야브 카든, 카메리 카든, 에브리레파르 카든, 아슈브잔 카딘, 부슬라트 카든, 제르니가르 카든, 누르타브 카든, 하지예 호쉬야르 카든, 페르비즈페케크 카든, 훸니멜렉 하님, 티리알 하님, 레브리즈페렉 하님, 베르디제난 하님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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