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지마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탄지마트는 19세기 오스만 제국이 서구 열강의 부상에 대응하기 위해 추진한 일련의 개혁 운동을 의미한다. 1839년 굴하네 칙령으로 시작되어 행정, 군사,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근대화를 시도했으며, 1856년 개혁 칙령을 통해 비무슬림의 권리를 확대했다. 중앙집권화 강화, 법 앞의 평등, 서구식 교육 도입 등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지만, 외채 증가, 내부 갈등 심화, 유럽 열강의 간섭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결국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막지 못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제국 해체로 이어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압뒬메지트 1세 - 크림 전쟁
크림 전쟁은 1853년부터 1856년까지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프랑스, 영국, 사르데냐 연합군 간에 벌어진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 쇠퇴, 러시아 남하 정책, 종교적 갈등이 원인이 되었으며, 1856년 파리 조약으로 러시아의 흑해 해군력 제한 등의 결과를 낳고 근대 간호 발전 등에 영향을 주었다. - 1839년 오스만 제국 - 제2차 이집트-튀르크 전쟁
1839년부터 1841년까지 오스만 제국과 이집트 간에 벌어진 제2차 이집트-튀르크 전쟁은 무함마드 알리의 독립 시도와 세력 확장이 원인이 되어 레반트 지역을 점령했으나, 열강의 개입과 런던 조약으로 이집트와 수단에 대한 세습 통치권을 인정받는 대신 시리아 등 영토를 상실하며 중동 지역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 1856년 오스만 제국 - 크림 전쟁
크림 전쟁은 1853년부터 1856년까지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프랑스, 영국, 사르데냐 연합군 간에 벌어진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 쇠퇴, 러시아 남하 정책, 종교적 갈등이 원인이 되었으며, 1856년 파리 조약으로 러시아의 흑해 해군력 제한 등의 결과를 낳고 근대 간호 발전 등에 영향을 주었다. - 1856년 오스만 제국 - 파리 조약 (1856년)
파리 조약(1856년)은 크림 전쟁을 종결시키고 오스만 제국을 유럽 열강의 일원으로 인정하며 흑해 비무장화, 다뉴브 강 자유 항행 보장, 러시아의 일부 영토 양도 및 기독교도 보호 권한 철회, 해양법 개정 등을 포함한 강화 조약이다.
탄지마트 | |
---|---|
탄지마트 | |
![]() | |
![]() | |
기본 정보 | |
명칭 | 탄지마트 |
로마자 표기 | Tanzimat |
오스만어 표기 | تَنْظِيمَات |
의미 | 재편성, 조직화 |
기간 | |
시작 | 1839년 |
종료 | 1876년 |
주요 개혁 | |
개혁 내용 | 행정 개혁 법률 개혁 군사 개혁 교육 개혁 경제 개혁 |
주요 인물 | |
술탄 | 압뒬메지트 1세 압뒬아지즈 |
주요 관리 | 무스타파 레시트 파샤 메흐메트 에민 알리 파샤 푸아트 파샤 |
배경 | |
배경 | 오스만 제국의 쇠퇴 및 서구 열강의 압력 |
주요 특징 | |
특징 |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 시도 서구식 개혁 도입 중앙 집권 강화 종교적, 민족적 갈등 심화 |
영향 | |
영향 | 오스만 제국의 사회, 문화, 정치에 큰 변화 초래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 심화 19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 쇠퇴 가속화 |
기타 | |
언어 | 프랑스어 (당시 교육받은 계층의 공통어) |
2. 배경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오스만 제국은 유럽 열강의 급격한 성장과 제국 내부의 여러 문제들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과거 강력했던 군사력은 약화되었고, 행정 체계는 비효율적이었으며, 제국 내 다양한 민족과 종교 집단 간의 갈등도 잠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국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위기감을 느낀 개혁 성향의 술탄과 관료들이 개혁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특히 마흐무트 2세(재위 1808~1839)는 예니체리 폐지와 같은 과감한 조치를 통해 개혁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그의 아들 압둘메지드 1세(재위 1839~1861) 시기에 이르러 본격적인 개혁 정책, 즉 탄지마트가 시작되었다. 이들 술탄 외에도, 기존의 낡은 종교 및 군사 제도로는 더 이상 제국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유럽식 교육을 받은 관료들이 개혁의 핵심 세력이었다.
개혁은 군사, 행정, 사법, 토지, 징병, 교육 등 국가 운영의 거의 모든 분야를 아울렀다. 군복 변경과 같은 상징적인 변화를 통해 관리들의 사고방식을 바꾸려는 시도도 있었으며, 많은 관리들이 서구식 복장을 착용하도록 권장되었다. 이러한 개혁들은 당시 성공적인 모델로 여겨졌던 유럽, 특히 프랑스의 제도와 법률(나폴레옹 법전 등)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는 프랑스 유학 경험이 있는 오스만 엘리트들이 늘어난 것과도 관련이 깊다. 개혁의 주요 목표는 강력한 중앙 집권적 관료 기구와 근대적인 군대를 확립하고, 정치 부패를 척결하여 서구 열강에 맞설 수 있는 국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또한, 토지 소유 계약 제도인 ''일티잠''의 폐지도 중요한 개혁 과제 중 하나였다.[5]
내부적으로는 밀레트 제도를 약화시켜 중앙 정부가 신민들을 직접 통제하고 통치의 정당성을 높이려 했다. 또한, 오스만주의라는 이념을 통해 제국 내 다양한 민족과 종교 집단("무슬림과 비무슬림, 터키인과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과 유대인, 쿠르드인과 아랍인")을 '오스만 신민'이라는 하나의 정체성 아래 통합하고자 했다. 이러한 정책은 1839년 굴하네 칙령 발표로 공식화되었는데, 이 칙령은 모든 오스만 신민이 종교나 민족에 관계없이 법 앞에서 평등함을 선언했다.[3] 이는 제국 내 비무슬림에게 더 많은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내부 통합을 강화하고,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유럽 열강이 제국 내정에 간섭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처럼 탄지마트는 오스만 제국이 직면한 내우외환의 위기 속에서 제국의 쇠퇴를 막고 근대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비록 여러 한계와 난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이는 서구 지역 이외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체계적인 근대화 시도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32]
2. 1. 유럽 열강의 부상
18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튀르키예 전쟁 등 유럽 열강과의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하면서 군사력과 정치 제도의 열세를 절감하게 되었다.[43][44] 설상가상으로 제국 내부에서는 "아얀"이라 불리는 지방 유력자들의 힘이 강해져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고,[43] 발칸 반도에서는 그리스,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 여러 민족의 독립 움직임이 거세졌다.[43]이러한 안팎의 위기 속에서 세림 3세는 니잠 제디드(新秩序, 신질서) 개혁을 통해 프랑스 군사 고문의 도움으로 신식 군대를 만들고 유럽에 상주 대사를 파견하는 등 국력 강화를 시도했다.[43] 그러나 예니체리를 비롯한 보수 세력의 저항과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 무함마드 알리의 이집트 장악, 발칸 반도의 반란 등으로 개혁은 좌절되었고 세림 3세는 결국 살해당했다.[43] 이후 개혁을 계승하려던 알렘다르 무스타파 파샤 역시 예니체리의 반발로 실패하고 목숨을 잃었다.[43]
마흐무트 2세는 강력한 의지로 개혁을 추진하여 1826년 오랜 군벌이었던 예니체리를 마침내 해체하고 군대 서구화, 정부 기구 근대화, 인재 양성 등에 힘썼다.[45] 하지만 그리스 독립 전쟁(1821-1829)에서 제국의 무력함이 드러났고, 진압을 도운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와의 갈등이 깊어졌다.[45][46] 무함마드 알리가 그리스 독립 전쟁 지원의 대가로 시리아 통치권을 요구하자 마흐무트 2세는 이를 거부했고, 이는 제1차 이집트-오스만 전쟁으로 이어졌다.[45] 이집트 군대가 아나톨리아까지 진격하자 다급해진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으로 1833년 퀴타히야 조약을 맺어 시리아를 이집트에 넘겨주어야 했다.[45] 또한, 이집트 문제에서 영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외무대신 무스타파 레시트 파샤는 1838년 영국과 불평등한 내용의 발리타 리마누 조약(오스만-영국 통상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이후 영국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맺는 유사한 조약들의 선례가 되었다.[36][37] 시리아를 둘러싼 갈등은 1839년 제2차 이집트-튀르크 전쟁으로 다시 불붙었고, 오스만 군대는 또다시 패배했다. 마흐무트 2세는 이 패전 소식이 수도에 닿기 직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32][36][45]

19세기 중반 유럽에서는 1848년 혁명의 여파로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었고, 이는 오스만 제국 내 발칸 반도에도 영향을 미쳐 1850년 불가리아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49]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 내 정교회 신자 보호를 명분으로 남하 정책을 추진했고, 이는 1853년 크림 전쟁으로 이어졌다.[49][50] 오스만 제국은 단독으로는 러시아에 열세였으나,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힘겨운 승리를 거두었다.[49] 그러나 전쟁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1854년 영국으로부터 처음으로 차관을 도입하면서 경제적으로 유럽 열강에 더욱 종속되는 결과를 낳았다.[41][49] 또한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지원을 빌미로 제국 내 비무슬림의 권리 보장을 포함한 추가적인 개혁을 압박했고, 이는 1856년 개혁칙령 발표로 이어졌다.[49][52] 같은 해 체결된 파리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흑해에서의 러시아 영향력을 배제하고 공식적으로 유럽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았지만,[41][49] 이는 동시에 제국이 유럽 열강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이처럼 19세기 오스만 제국은 유럽 열강의 군사적, 경제적 압박 속에서 점차 위상이 추락하고 있었다.
2. 2. 내부적 문제
18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은 여러 차례의 러시아-튀르키예 전쟁 등에서 패배하며 유럽 열강에 비해 군사력과 정치 제도가 뒤처져 있다는 인식이 제국 내부에 퍼지기 시작했다.[43][44] 이러한 외부적 위협과 더불어 제국 내부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중앙 정부의 통제력 약화였다. 제국 각지에서는 "아얀"이라 불리는 지방 유력자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중앙 정부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었다.[43] 마흐무트 2세와 같은 술탄들은 이들 아얀 세력을 억누르고 중앙 집권을 강화하려 노력했지만[34][35], 심지어 개혁파 관료였던 조차 아얀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그들의 조세 수탁권과 토지 소유 등 기득권을 인정하는 ''(세네디 잇티파크)을 맺어야 할 정도였다.[43] 이는 술탄 중심의 중앙 권력이 지방 세력에 의해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제국의 유럽 영토인 발칸 반도에서는 민족주의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그리스인, 불가리아인, 세르비아인 등 여러 민족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43] 1804년에는 발칸 반도의 슬라브계 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43] 1821년에는 그리스 독립 전쟁이 발발하여 결국 그리스가 독립하는 결과를 낳았다.[45][46] 1850년에는 불가리아에서 대규모 농민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49] 이러한 분리주의적 민족 운동은 다민족 국가인 오스만 제국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심각한 내부 불안 요인이었다.
군대의 문제 역시 심각했다. 오스만 제국의 전통적인 핵심 군대였던 예니체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군사적 효율성을 잃고 부패한 이익 집단으로 변질되었다.[4] 이들은 새로운 군사 기술 도입과 군대 개혁에 강력히 저항했으며, 세림 3세의 개혁 시도를 좌절시키고[43], 1808년에는 쿠데타를 일으켜 개혁을 추진하던 를 살해하기까지 했다.[43] 1821년 시작된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예니체리 군단은 무능함을 여실히 드러냈고, 이는 결국 마흐무트 2세가 1826년 예니체리를 무력으로 해산하는 결단을 내리게 만들었다.[45] 예니체리의 해체는 군대 현대화를 위한 필수적인 조치였으나, 오랜 기간 제국의 군사력의 중심이었던 조직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혼란을 피할 수 없었다.
이처럼 중앙 권력의 약화, 지방 세력의 발호, 제국 내 여러 민족의 분리주의 운동, 그리고 군대의 부패와 비효율성 등 뿌리 깊은 내부 문제들은 오스만 제국이 더 이상 기존 체제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이러한 내우외환 속에서 제국의 생존과 재건을 위해 탄지마트로 알려진 대대적인 개혁이 추진될 수밖에 없었다.
2. 3. 개혁의 필요성 대두
18세기 말부터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의 여러 차례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군사력과 정치 제도가 유럽 열강에 비해 뒤처졌다는 인식이 제국 내부에 퍼지기 시작했다.[43][44] 또한, 제국 각지에서는 지방 유력자인 "아얀"의 세력이 커져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고,[43] 발칸 반도에서는 그리스인, 불가리아인, 세르비아인 등이 민족주의에 영향을 받아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43]이러한 안팎의 위기 속에서 중앙 집권적 지배를 다시 확립하기 위한 개혁이 시도되었다.[43] 1792년 러시아에 패배하여 크림 반도를 잃은 세림 3세는 '니잠 제디드(Nizam-ı Cedid, 신질서)'라 불리는 개혁을 추진했다. 프랑스 군사 고문단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고, 육해군 기술학교를 세웠으며, 정보 수집을 위해 유럽 주요국에 상주 대사를 파견했다.[43] 하지만 아얀, 예니체리, 수구파 관료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게다가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이후 무함마드 알리가 이집트에서 사실상 독립하고, 1804년 발칸 반도에서 슬라브 민족들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외부 환경도 악화되었다.[43] 1806년 시작된 러시아와의 전쟁 중 수구파의 반란으로 세림 3세는 살해되고 무스타파 4세가 즉위했다.[43]
개혁파를 지지했던 아얀 알렘다르 무스타파 파샤는 무스타파 4세를 폐위시키고 마흐무트 2세를 술탄으로 옹립하여 세림 3세의 개혁 정책 계승을 선언했다.[43] 그는 아얀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1808년 주요 아얀들을 이스탄불로 불러 마흐무트 2세와 "동맹의 서약"(Sened-i İttifak)을 맺게 했다. 이 서약은 아얀들에게 병력 제공과 치안 유지, 술탄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대신, 조세 징수권과 토지 소유 등 기존의 특권을 인정하는 내용으로, 술탄의 절대 권력을 전제로 했던 오스만 제국 역사상 이례적인 것이었다.[43] 알렘다르는 니잠 제디드를 대신할 서구식 군대 '세크반-이 제디드'(Sekban-ı Cedid)를 창설하려 했으나,[43] 1808년 11월 예니체리의 반란으로 수구파가 다시 정권을 잡고 알렘다르는 살해되었다.[43]
1808년 즉위한 마흐무트 2세는 알렘다르 사후에도 강한 의지로 개혁을 추진했다.[43] 1821년 시작된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예니체리 군단의 무능함이 드러나자, 마흐무트 2세는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에게 진압을 요청했다. 그리스에 파견된 이집트의 서구식 군대는 큰 성과를 거두었고,[45][46] 이는 마흐무트 2세가 예니체리 해체를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에시킨지'(Eşkinci)라는 새로운 서구식 군대를 편성한 뒤, 1826년 예니체리 군단 본부를 공격하여 폐지를 선언했다(사건명: 길상 사건).[45]
마흐무트 2세는 예니체리 폐지 외에도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 군대를 서구식으로 개편하고, 정부 기구 근대화를 위해 외무성, 내무성, 재무성의 3개 부서를 신설했다.[34][35][45] 인재 양성을 위해 1833년 번역국을 설치하고 유럽 각국에 유학생을 파견했으며,[34][35][45] 중앙 집권 강화를 위해 지방 유력자인 아얀 세력을 억눌렀다.[34][35] 또한 인구 조사를 실시하고 최고 군사 회의와 최고 사법 심의회를 설치하여 법치 체제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45]
그러나 마흐무트 2세의 개혁은 국내의 반발과 함께 외부의 도전에도 직면했다. 특히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와의 관계 악화는 심각한 문제였다.[45] 무함마드 알리는 그리스 독립 전쟁 진압(결국 실패했지만)의 대가로 시리아 통치권을 요구했으나 마흐무트 2세가 거부하자, 무력으로 시리아를 점령하고 서아나톨리아까지 침공했다(제1차 이집트-튀르크 전쟁).[45] 궁지에 몰린 마흐무트 2세는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고,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 끝에 1833년 퀴타히야 조약이 체결되어 이집트에 시리아 지배권을 넘겨주었다.[45] 하지만 시리아를 둘러싼 갈등은 계속되어 1839년 6월 다시 양측이 충돌했고(제2차 이집트-튀르크 전쟁), 오스만 군대는 패배했다.[45] 마흐무트 2세는 이 패배 소식이 수도 이스탄불에 도착하기 직전인 1839년 7월 1일에 병으로 사망했다.[32][36][45] 그의 개혁 의지는 아들 압둘메지드 1세에게 이어져 탄지마트 시대를 열게 된다.
3. 전개
18세기 이후 러시아-튀르키예 전쟁 등에서 연이어 패배하며 군사력과 정치 제도의 열세를 절감한 오스만 제국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 열강의 부상에 맞서 국가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43][44] 국내적으로는 아얀(지방 유력자) 세력의 강화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고,[43] 발칸 반도에서는 민족주의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었다.[43]
이러한 상황에서 술탄 마흐무트 2세는 예니체리 폐지, 군대 서구화, 근대적 행정 기구 도입 등 중앙 집권 강화와 근대화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34][35]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압뒬메지트 1세는 1839년 11월 3일, 무스타파 레시트 파샤가 기초한 '''귤하네 칙령'''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개혁, 즉 탄지마트(تنظيمات|탄지마트ota, 재조직)를 시작했다.[32][36][38] 이는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등 국가적 위기 속에서 제국의 전면적인 개혁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었다.[32][36]
탄지마트 개혁은 행정, 군사, 재정, 사법, 교육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유럽의 제도를 모방하여 근대화를 추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32][39] 모든 신민의 법 앞의 평등, 생명과 재산의 안전 보장, 공정한 조세 및 징병 제도 확립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38] 개혁은 1856년 크림 전쟁 이후 발표된 개혁 칙령을 통해 비무슬림의 권리를 더욱 확대하는 방향으로 심화되었고,[49][52] 1876년에는 아시아 최초의 근대적 헌법 중 하나인 오스만 제국 헌법(미드하트 헌법) 제정으로 절정에 달했다.[32][62][63] 이 기간 동안 중앙 집권적인 관료 기구와 근대 군대가 확립되었고, 유럽식 법률과 교육 제도가 도입되었으며, 토지 소유 제도의 근대화도 시도되었다.[39][55]
그러나 탄지마트 개혁은 여러 한계에 부딪혔다. 개혁의 영향력이 제국 전역에 미치지 못했고, 중앙집권화에 대한 반발로 발칸 반도의 기독교 자치구들은 더 큰 자치권을 요구하거나 독립을 추구했다. 보수적인 울라마와 관료들의 저항도 계속되었다. 무엇보다 개혁 추진과 연이은 전쟁으로 인한 재정 부담은 막대한 대외 채무 누적으로 이어졌고, 이는 경제의 외세 의존도를 심화시켜 제국의 반식민지화를 촉진했다.[57][65] 결국 1875년 오스만 제국은 재정 파산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52][57][59][61]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패배는 제국의 위신을 더욱 실추시켰고, 발칸 반도의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전쟁 패배와 국내외의 혼란 속에서 술탄 압뒬하미트 2세는 1878년 미드하트 헌법을 정지시키고 의회를 해산하며 전제 정치로 회귀했다.[63]
비록 많은 한계를 드러내며 실패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탄지마트는 서구 이외 지역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체계적인 근대화 시도로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32] 이는 이후 청나라의 양무운동, 태국의 차크리 개혁, 일본의 메이지 유신 등 아시아 여러 국가의 근대화 개혁에 영향을 주었다.[32] 또한 탄지마트 시기에 형성된 근대적인 제도와 교육받은 엘리트층은 이후 청년 튀르크 혁명과 터키 공화국 수립의 기반이 되었다.[33][69]
3. 1. 귤하네 칙령 (1839)
1808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 즉위한 마흐무트 2세는 예니체리 폐지, 군대 서구화, 정부 기구 근대화(외무·내무·재무 3성 신설), 유럽 유학생 파견 등 제국의 중앙 집권과 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추진했다.[34][35] 그러나 시리아를 둘러싼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와의 제2차 이집트-튀르크 전쟁 중이던 1839년 7월, 오스만 군대가 이집트 군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이 수도 이스탄불에 도착하기 직전 병으로 사망했다.[32][36]
마흐무트 2세의 뒤를 이어 아들 압뒬메지트 1세가 새로운 술탄으로 즉위했다.[36] 이러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외무대신 무스타파 레시트 파샤는 이집트 문제 해결을 위해 유럽 열강,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지지를 얻고자 노력했다.[36][38] 그는 이미 1838년 영국과 발리타 리마누 조약(영토 통상 조약)을 체결하여 영국의 외교적 지원을 확보하려 한 바 있다.[36]

1839년 11월 3일, 압뒬메지트 1세는 무스타파 레시트 파샤가 기초한 귤하네 칙령(Gülhane Hatt-ı Şerifi|귤하네 하트-으 셰리피ota, 장미의 방 칙령)을 발표하여 탄지마트 개혁의 시작을 알렸다.[32][38] 칙령은 톱카프 궁전의 귤하네(장미 정원)에서 무스타파 레시트 파샤가 술탄 옆에서 제국 관료, 울라마(이슬람 법학자), 민간 대표, 외국 사절단 앞에서 낭독하는 형식으로 발표되었다.[38] 이 칙령은 오스만 제국의 전면적인 개혁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 것으로, 행정, 군사, 재정, 문화, 교육 등 다방면에 걸친 서구식 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했다.[32][38]
귤하네 칙령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38]
- 모든 제국 신민(무슬림, 비무슬림 구분 없이)의 생명, 명예, 재산의 안전 보장.
- 법 앞의 평등 원칙 확립.
- 공정한 조세 제도의 확립과 징세 방법 규정.
- 정규적인 징병 제도 확립 및 복무 기간 설정.
- 모든 재판의 공개 진행 및 법에 의하지 않은 처벌 금지.
이 칙령은 1789년 프랑스 인권 선언의 영향을 받아 작성되었으며, 모든 신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고 법치주의 원칙을 도입하려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32][38] 특히 술탄 스스로도 "법"을 준수할 것을 선언함으로써, 술탄의 절대 권력 위에 "법의 힘"이 존재함을 인정한 것은 획기적인 변화였다.[32][38] 또한, 무슬림과 비무슬림(딤미) 간의 법적 평등을 선언한 것은 기독교도 소수 민족 보호를 명분으로 한 서구 열강의 내정 간섭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32] 다만, 칙령 내용 중 일부는 이미 마흐무트 2세 시기에 추진되었던 개혁을 재확인하는 것이었으며,[32][38] '법'을 지칭할 때 샤리아(이슬람법)와 카눈(세속법)을 구분하여 사용하는 등, 샤리아를 중시하는 울라마와 보수 세력을 의식한 측면도 있었다.[38]
칙령 발표 이후, 탄지마트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중심 기관으로 최고 사법 심의회(Meclis-i Vâlâ-yı Ahkâm-ı Adliyye|메즐리스-이 발라-이 아흐캄-으 아들리예ota)가 조직되어 새로운 법률 제정과 검토를 담당하게 되었다.[38] 1840년에는 형법 공포, 인구 조사 실시, 징세 도급제(일티잠) 폐지 시도(곧 실패하고 부활), 주 의회 설치, 지방관 봉급제 실시, 뇌물 금지 등의 초기 개혁 조치가 시행되었다.[47]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보수 세력의 반발과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히며 순탄하게 진행되지는 못했다.[47]
3. 2. 초기 개혁 (1839-1856)
1808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 즉위한 마흐무트 2세는 예니체리 폐지, 군대 서구화, 정부 기구 근대화, 유학생 파견 등 중앙 집권 강화를 목표로 개혁을 추진했다.[34][35] 그러나 제2차 이집트-튀르크 전쟁 중 병으로 쓰러졌다.[32][36]마흐무트 2세의 뒤를 이어 아들 아브뒬메지트 1세가 즉위했다.[36] 국난 속에서 외무대신 무스타파 레시트 파샤는 영국의 외교적 지원을 얻기 위해 노력했으며,[36] 1838년 영국과 발리타 리마누 조약을 체결했다.[36][37]
1839년 11월 3일, 아브뒬메지트 1세는 무스타파 레시트 파샤가 기초한 '''귤하네 칙령'''(장미의 방 칙령, Hatt-ı Şerifota)을 선포하며 탄지마트 개혁의 시작을 알렸다.[32][38] 이 칙령은 톱카프 궁전의 귤하네(장미 정원)에서 선포되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38] 칙령은 무슬림과 비무슬림(짐미) 구분 없이 모든 제국 신민의 생명, 명예, 재산의 안전 보장과 법 앞의 평등을 약속했으며,[32][38] 공개 재판 원칙과 술탄 자신도 법을 준수할 것을 선언하여 술탄의 권력 위에 '법의 힘'이 존재함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32][38] 이는 기독교도 소수 민족에 대한 처우를 빌미로 한 서구 열강의 내정 간섭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32] 칙령은 샤리아(이슬람법)와 카누운(세속법)을 신중히 구분하며 보수파에 대한 배려도 보였다.[38] 탄지마트 개혁의 중심 기관으로 최고 사법 심의회가 조직되어 새로운 법 제정 및 검토를 담당하게 되었다.[38]
귤하네 칙령 이후 다음과 같은 개혁 조치들이 시행되었다:[13][14]
- 통상농업부 설립 (1839)
- 최초의 오스만 제국 지폐 발행 (1840)
- 우편부 및 최초의 우체국 설립 (1840)[15][16]
- 재정 시스템 개편 (1840)
- 민법 및 형법 개편 (1840)
- 교육평의회 (Meclis-i Maarif-i Umumiyeota) 설립 (1841)
- 징병, 징집 및 복무 기간을 규정한 군대 개편 (1843–44)
- 오스만 제국 국가 의례 및 오스만 제국 국기 재설계 (1844)
- 최초의 전국 인구 조사 (남성 시민 대상) (1844)
- 최초의 전국 신분증 (Mecidiyeota 신분증, 비공식 명칭 kafa kağıdıota) (1844)
- 공공 교육 평의회 (1845) 및 교육부 (Mekatib-i Umumiye Nezaretiota, 1847, 이후 Maarif Nezaretiota, 1857) 설립
- 칼데아 가톨릭 밀레트 설립 (1846)
- 이스탄불 노예 시장 폐지 (1847)[17]
- 페르시아만 노예 무역 탄압 (1847)[18]
- 프로테스탄트 밀레트 설립 (1847)
- 최초의 전신망 (1847–1855) 및 철도망 건설 시작 (1856)
- 최초의 근대 대학교 (darülfünunota, 1848), 학원 (1848) 및 교원 양성학교 (darülmualliminota, 1848) 설립
- 보건부 (Tıbbiye Nezaretiota, 1850) 설립
- 상법 및 무역법 공포 (1850)
- 과학 아카데미 (Encümen-i Danişota) 설립 (1851)
- 최초의 증기선 회사 Şirket-i Hayriyeota 설립 (1851)
- 형법 개정 (1851)
- 체르케스 및 조지아 노예 무역 금지 (1854–1855)[19]
- 최고 사법령 평의회 (Meclis-i Vâlâ-yı Ahkâm-ı Adliyyeota)의 입법 기능이 개혁 평의회 (Meclis-i Âli-i Tanzimatota)로 이관 (1854)
- 현대 콘스탄티노플 시정부 (Şehremanetiota, 1854) 및 도시계획 평의회 (İntizam-ı Şehir Komisyonuota, 1855) 설립
- 모든 종교 시민에게 완전한 법적 평등을 약속하는 1856년 황제 개혁 칙령 (1856)
- 오스만 은행 설립 (원래 1856년 Bank-ı Osmanîota로 설립, 1863년 Bank-ı Osmanî-i Şahaneota로 재편)[20] 및 오스만 증권 거래소 (Dersaadet Tahvilat Borsasıota, 1866년 설립)[21]
1840년에는 형법 공포, 인구 조사, 일르티잠(징세 도급제) 폐지와 징세관 임명, 주의회 설치, 지방관의 봉급제 실시, 뇌물 금지 등의 개혁이 실시되었다.[47] 그러나 일르티잠 제도는 명망가들의 반대와 징세관 부족으로 인해 곧 부활했다.[47]
개혁파의 중심 인물이었던 무스타파 레시트 파샤는 1841년 외무대신에서 물러나 프랑스 대사로 갔다가 1846년 다시 대신으로 복귀하여 개혁을 이끌었다. 그는 공무원법 제정, 일반 교육 심의회 설치(이후 문부성 개편), 혼합 법원 설치, 농업학교 및 사범학교 개설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개혁을 추진했다.[47] 그는 여러 차례 해임과 재임을 반복하며 탄지마트 개혁을 이끌었고, 알리 파샤, 푸아트 파샤, 미드하트 파샤 등 유능한 인재를 발탁했다. 초기 탄지마트는 인사 이동에 따라 부침을 겪었으나, 점차 중앙 정부의 영향력이 지방으로 확대되며 개혁 노선이 정착되어 갔다.[47]
1848년 혁명의 여파로 오스만 제국에는 헝가리, 폴란드 등지에서 망명자들이 유입되었고, 오스만 정부는 러시아의 망명자 인도 요구를 거부하여 유럽 자유주의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49] 그러나 혁명의 영향은 발칸 반도의 불가리아에서 1850년 농민 반란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농민들은 귤하네 칙령의 약속을 믿고 봉건적 의무를 거부했으나, 중앙 정부는 무슬림 지주 계급에 의존하는 통치 구조 때문에 칙령의 방침을 관철하기 어려웠다.[49]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 내 정교회 신자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진격시켜 1853년 크림 전쟁이 발발했다. 오스만 제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으로 1856년 파리 조약을 통해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 1854년 영국으로부터 처음으로 차관을 도입하게 되었다.[41][49] 또한, 열강의 지지를 얻기 위해 비무슬림의 권리를 더욱 확대하는 개혁 칙령(Hatt-ı Hümâyûn)을 1856년 2월에 발표했다.[49][52] 이 칙령은 영국, 프랑스 총영사와의 협의를 거쳐 알리 파샤와 영국 대사 스트래트포드 캐닝 주도로 기초되었다.[41][49] 칙령은 비무슬림의 공직 참여, 신앙의 자유, 공립학교 입학 허가, 병역 의무 부과, 차별 용어 사용 금지 등을 명시했다.[49] 그러나 비무슬림 권리 보장에 초점을 맞춘 내용은 일부 무슬림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54] 칙령은 또한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권 부여, 국가 예산 제시, 은행 설립, 운하 및 도로 건설 등 경제 및 사회 기반 시설 구축에 관한 내용도 포함했다. 이를 바탕으로 1856년 영국 자본으로 오스만 은행이 설립되었다.[41] 이 칙령 발표와 파리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되었다.[41][49]
3. 3. 개혁 칙령 (1856)

크림 전쟁(1853년-1856년) 이후, 오스만 제국은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열강의 지원에 크게 의존해야 했다. 전쟁 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어 1854년 영국으로부터 처음으로 차관을 도입했으며[41][49], 열강의 지속적인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비무슬림 권리 보장을 포함한 개혁 추진을 약속할 필요가 있었다.[52]
이러한 배경 속에서 1856년 2월, 압뒬메지트 1세 술탄은 개혁 칙령(Hatt-ı Hümâyûn)을 발표했다.[49][52] 이 칙령은 크림 전쟁 종결을 위한 파리 조약 체결 직전에 발표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알리 파샤와 영국 대사 스트래트포드 캐닝 등이 중심이 되어 이스탄불에서 영국 및 프랑스 총영사와의 협의를 거쳐 기초되었다.[41][49]
개혁 칙령은 1839년 귤하네 칙령에서 천명된 개혁 약속, 특히 제국 내 비무슬림 신민의 지위와 권리에 대한 내용을 구체화하고 이행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이는 크림 전쟁 전후로 심화된 제국 내 종교적 긴장을 완화하고, 종교 문제를 명분으로 삼는 유럽 열강의 내정 간섭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포함하고 있었다.[49] 또한, 제국 내 다양한 밀레트(종교 공동체) 간의 갈등을 조정할 필요성도 반영되었다.[49]
칙령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49]
- 무슬림과 비무슬림 신민 간의 완전한 법적 평등 보장
- 비무슬림의 모든 공직 임명 허용
- 신앙의 자유 보장 및 개종 강요 금지
- 비무슬림 공동체(밀레트) 대표의 권리 재규정
- 비무슬림의 공립학교 입학 허용
- 지방 의회 대표 선출 방식 개선 및 비무슬림 대표의 최고 사법 심의회 참여 보장
- 비무슬림에 대한 차별적 용어 사용 금지
- 비무슬림의 병역 의무 부과 (기존의 지즈야 면제 관행과 변화)
- 비무슬림 공동체의 학교 설립 및 독자적 교육 과정 편성 자율권 인정
- 혼합 재판소(무슬림과 비무슬림 간 소송 담당)에서 비무슬림의 증인 자격 인정
이 외에도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권 허용, 국가 예산 공개, 은행 설립(1856년 영국 자본으로 오스만 은행 설립[41]), 운하 및 도로 건설 등 경제 및 사회 인프라 관련 내용도 포함되었다.[49]
그러나 칙령의 내용이 비무슬림의 권리 보장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무스타파 레시트 파샤를 포함한 일부 개혁파 내부에서조차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일부 무슬림 사이에서는 이를 "특권 칙령"이라 부르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54]
개혁 칙령 발표와 파리 조약 체결을 통해 오스만 제국은 공식적으로 유럽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계기를 마련했으며[41][49], 이는 탄지마트 개혁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 추진은 유럽 열강의 영향력 증대와 차관 의존 심화라는 문제점을 동시에 안고 있었다.[41]
3. 4. 후기 개혁 (1856-1876)
크림 전쟁 (1853-1856) 이후, 오스만 제국은 열강의 지지를 확보하고 제국 내 비무슬림 신민들의 불만을 완화하기 위해 개혁을 더욱 심화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전쟁 중 재정난으로 1854년 영국으로부터 처음으로 차관을 도입한[41][49] 오스만 제국은, 전쟁 종결을 앞둔 1856년 2월, 개혁칙령(하트-으 휴마윤)을 발표했다.[49][52] 이 칙령은 이스탄불 주재 영국 및 프랑스 총영사와의 협의를 거쳐 작성되었으며, 오스만 측에서는 알리 파샤가, 영국 측에서는 스트랫퍼드 캐닝 대사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41][49]개혁칙령은 귤하네 칙령의 원칙을 재확인하면서 비무슬림 신민의 권리를 더욱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모든 공직 참여 허용, 신앙의 자유 보장, 비무슬림 공동체 대표의 권리 재규정, 공립학교 입학 허가, 지방 의회 대표 선출 방식 개선, 최고 사법 심의회 참여 보장, 차별 용어 사용 금지, 병역 의무 부과 (대신 면제세 납부 가능), 비무슬림 공동체의 학교 설립 및 교육 과정 편성 자율권 인정, 혼합 재판소에서 비무슬림의 증인 인정 등이 포함되었다.[49] 또한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권 부여, 국가 예산 공개, 은행 설립, 운하 및 도로 건설, 서구식 교육 제도와 과학 기술 도입, 유럽 자본 유치 등 경제 및 사회 전반의 근대화 계획도 담고 있었다.[49]
그러나 이 칙령은 비무슬림의 권리 보장에 내용이 집중되어 있어, 기초 단계부터 무스타파 레시트 파샤 등 일부의 비판을 받았으며, 일부 무슬림 사이에서는 “특권 칙령”이라 불리며 반감을 사기도 했다.[5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칙령 발표와 파리 조약 체결을 통해 오스만 제국은 공식적으로 유럽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되었다.[41][49] 또한 칙령에 따라 1856년 영국 자본을 중심으로 오스만 은행이 설립되었고,[41][20] 1866년에는 오스만 증권 거래소(Dersaadet Tahvilat Borsası)가 문을 열었다.[21]
개혁칙령 발표 이후 탄지마트 후기 개혁은 알리 파샤와 푸앗 파샤가 주도했다. 이들은 모두 무스타파 레시트 파샤에게 발탁된 인물들이었다.[49] 이 시기에는 법률, 교육, 토지 제도 등 여러 분야에서 개혁이 심화되었다.[55]
- 법률 정비: 1858년에는 서구 형법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형법이 공포되었고, 이는 1928년까지 유지되었다. 1861년에는 프랑스 법을 모델로 한 신상법이, 1863년에는 해상 상법이 제정되었다. 이러한 법률들은 샤리아(이슬람법)와 유럽 근대법 사이의 절충을 시도했으나, 두 법체계가 병존하는 이원적 사법 시스템은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49][33] 1864년에는 세속적인 니자미예 법원이 설립되었고, 1868년에는 최고 사법령 평의회(Meclis-i Vâlâ-yı Ahkâm-ı Adliyye)가 국무원(Danıştay, 법안 심의 및 행정 재판 담당)과 사법 평의회(Divan-ı Ahkâmı Adliye, 최고 상소 및 파기 법원)로 분리되었다. 1870년부터 1876년까지는 아흐메트 제브데트 파샤 주도로 샤리아에 기반한 민법전인 메젤레가 편찬되어 공포되었다.[49][59][60]
- 교육 개혁: 근대적 지식과 기술을 갖춘 인재 양성을 위해 서구식 교육 기관 설립이 추진되었다. 1859년에는 고급 관료 양성을 위한 공무원 학교(Mekteb-i Mülkiye-i Şahane)가,[49] 1868년에는 프랑스식 중등 교육기관인 갈라타사라이 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49] 이 학교들에서는 프랑스어와 튀르키예어 교육이 강조되었고, 종교나 민족에 관계없이 입학이 허용되어 세속적이고 국제적인 감각을 지닌 엘리트 양성에 기여했다.[49][55]
- 토지 제도 개혁: 1858년 오스만 토지법이 제정되어 기존의 국유지 원칙을 수정하고 근대적인 사적 토지 소유권 확립의 기반을 마련했다.[55][57]
- 기타 개혁: 1858년 동성애가 비범죄화되었고,[13] 1864년에는 주령법을 통해 지방 행정 제도가 개편되었으며, 같은 해 언론 및 저널리즘 규정법(Matbuat Nizamnamesi)이 공포되었다.[13] 1869년에는 종교와 민족에 관계없이 모든 신민에게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하는 국적법이 제정되어 오스만주의 이념을 강화하고 조약의 특권을 약화시키려 시도했다.[13]

그러나 푸앗 파샤(1869년)와 알리 파샤(1871년)가 연이어 사망하면서 개혁의 추진 동력은 약화되었다.[57] 술탄 압뒬라지즈의 전제 강화와 낭비는 개혁 노선에 부담을 주었다.[58]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재정 악화였다. 크림 전쟁 이후 시작된 외채는 계속 누적되었고, 개혁 추진 비용과 술탄의 사치, 연이은 전쟁 수행 등으로 재정 부담은 가중되었다.[41][57] 무역 구조 역시 서구 열강에 대한 원자재 공급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경제적 종속이 심화되었다.[57] 결국 1875년, 오스만 제국은 유럽 금융 공황과 농작물 흉작의 여파로 외채 이자 지불 불능을 선언하며 사실상 국가 부도 상태에 빠졌다.[52][57][59][61]
재정 파탄과 술탄의 전제 정치에 대한 불만은 신오스만인과 같은 지식인 그룹을 중심으로 입헌주의 운동을 촉발했다.[63] 1876년 5월, 미드하트 파샤를 비롯한 개혁파 관료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술탄 압뒬라지즈를 폐위시키고 무라트 5세를 즉위시켰으나, 정신 질환 문제로 곧 압뒬하미트 2세가 새로운 술탄이 되었다.[63] 미드하트 파샤는 압뒬하미트 2세 즉위 후 대재상에 임명되어 나므크 케말 등과 함께 헌법 제정 작업을 주도했다.[63] 압뒬하미트 2세는 자신의 권한을 제약하는 조항에 반대하며 술탄에게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인물을 추방할 권한을 부여하는 조항 삽입을 요구했고, 미드하트 파샤는 헌법 공포를 위해 이를 수용했다.[63]
1876년 12월 23일, 오스만 제국 최초의 헌법인 오스만 제국 헌법(일명 미드하트 헌법)이 공포되었다.[62][63] 이 헌법은 오스만 제국을 입헌군주제 국가로 규정하고, 양원제 의회 설치, 모든 신민의 법 앞의 평등 등을 명시한 자유주의적 성격의 헌법이었다.[33][62][63] 이는 아시아 최초의 근대적 헌법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로써 탄지마트 개혁은 외형상 입헌 정치의 도입이라는 정점에 도달했다.
4. 주요 개혁 내용
1839년 11월 3일, 압둘 메지드 1세 술탄은 귤하네 칙령(Hatt-ı Şerif of Gülhane)을 발표하여 탄지마트 개혁의 시작을 알렸다. 이 칙령은 오스만 제국의 모든 신민에게 인종과 종교에 관계없이 생명, 명예, 재산의 안전 보장, 공정한 조세 제도 확립, 정규적인 징병 제도 운영, 공개 재판 원칙 등을 약속하며 제국의 근대화를 향한 의지를 천명했다.[32][38] 칙령 서문에서는 과거 제국의 영광이 법 준수에서 비롯되었으나, 근래의 혼란으로 쇠퇴했음을 지적하며 새로운 제도를 통한 부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탄지마트 개혁은 크게 중앙집권 강화, 서구화, 오스만주의 이념 확립을 목표로 추진되었다.[39] 이를 위해 행정, 군사, 재정, 법률, 교육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개혁 조치가 시행되었다.
- '''정치 및 행정''': 술탄의 권한 일부를 의회에 이양하고 법치주의를 지향했으며, 중앙 관료제를 정비하고 지방 행정 제도를 개편하여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자세한 내용은 #정치 및 행정 참조)
- '''군사''': 전통적인 군사 제도를 폐지하고 프로이센식 군복과 징병제를 도입하여 근대적인 상비군을 육성하고, 모든 신민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하여 오스만주의 이념을 실현하고자 했다. (자세한 내용은 #군사 참조)
- '''법률''': 프랑스 법을 모델로 상법, 형법 등 근대 법률을 도입하고 관련 재판소를 설치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샤리아(이슬람법) 법정과의 병존으로 사법 체계의 이원화와 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33] (자세한 내용은 #사법 제도의 변화 참조)
- '''경제''': 조세 제도 개편 및 징세 청부제 폐지를 시도하고, 근대적 지폐 발행, 은행 설립 등 금융 시스템을 도입했다. 하지만 크림 전쟁 이후 외채 의존 심화로 재정난과 경제적 종속이 심화되었다.[41][57] (자세한 내용은 #경제 참조)
- '''사회 및 교육''': 귤하네 칙령과 개혁 칙령을 통해 법 앞의 평등 원칙을 선언하고 비무슬림의 권리를 신장시키려 했다. 전통적 마드라사 교육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유럽식 학교 제도를 도입하고 다양한 근대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새로운 엘리트층을 양성하고자 했다.[49] (자세한 내용은 #사회 및 문화, #교육 참조)
이러한 개혁들은 오스만 제국을 근대 국가로 변모시키려는 중요한 시도였으나,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한계, 보수 세력의 반발, 재정 문제 해결 실패, 열강의 간섭 심화 등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1876년 미드하트 헌법 제정으로 개혁은 정점에 달했지만, 곧 압둘 하미드 2세의 전제 정치로 회귀하면서 좌절되었다.[33][63]
4. 1. 정치 및 행정
탄지마트 개혁은 오스만 제국의 정치 및 행정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였다. 1808년 즉위한 마흐무트 2세는 예니체리 폐지, 군대 서구화, 중앙 정부 기구(외무·내무·재무 3성) 신설, 번역국 설치 및 유학생 파견, 지방 유력자인 아얀 세력 억제 등 중앙 집권 강화를 위한 개혁을 추진하며 탄지마트의 기반을 마련했다.[34][35] 하지만 제2차 이집트-튀르크 전쟁 중이던 1839년 마흐무트 2세가 사망하고 아들 압둘 메지드 1세가 즉위하면서 본격적인 개혁이 시작되었다.[32][36]
=== 귤하네 칙령과 법치주의 확립 ===
1839년 11월 3일, 술탄 압둘 메지드 1세는 외무대신 무스타파 레시트 파샤가 기초한 귤하네 칙령(탄지마트 칙령)을 공포하며 개혁의 시작을 알렸다.[32][38] 이 칙령은 톱카프 궁전의 귤하네(장미 정원)에서 선포되어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38] 칙령은 오스만 제국을 구성하는 여러 주에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여 훌륭한 통치를 실현하고자 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술탄의 권한 일부를 의회에 넘기고, 의회는 술탄의 승인을 얻어 법을 제정한다.
# 모든 신민의 생명, 명예, 재산의 안전을 법으로 보장한다 (법 앞의 평등).
# 조세 제도를 확립하고 징수 절차를 규정한다.
# 공개 재판 없이 처벌받지 않는다.
# 군대 징집 규정과 복무 기간을 설정한다.
귤하네 칙령은 무슬림과 비무슬림(짐미) 구분 없이 모든 제국 신민에게 법 앞의 평등을 보장하고, 생명, 명예, 재산권을 보호하며, 재판 공개와 술탄 자신도 법을 준수할 것을 선언함으로써 법치주의 원칙을 도입하고 술탄의 절대 권력을 제한하려는 의지를 보였다.[32][38] 이는 프랑스 인권 선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되며, 기독교도 소수 민족 보호를 명분으로 한 서구 열강의 내정 간섭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32] 칙령 발표 이후 탄지마트의 중심 기관으로 최고 사법 심의회(Meclis-i Vâlâ-yı Ahkâm-ı Adliyye)가 조직되어 새로운 법률 제정과 검토를 담당했다.[38]
=== 중앙집권 강화와 관료제 정비 ===
탄지마트 개혁의 핵심 목표 중 하나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중앙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효율적인 관료제를 구축하려 했다.[39] 1840년에는 인구 조사 실시, 일티잠(징세 도급제) 폐지(비록 곧 부활했지만), 징세관 임명, 지방관 봉급제 실시, 뇌물 금지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47] 1846년에는 공무원법이 제정되었고, 능력 중심의 인재 등용이 강조되어 무스타파 레시트 파샤는 알리 파샤, 푸앗 파샤, 미드하트 파샤와 같은 유능한 인재들을 발탁하여 개혁을 이끌었다.[47][69] 이들은 출신 배경보다는 능력을 인정받아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70]
또한 근대적 교육을 받은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1859년 문관 양성 학교(Mülkiye), 1868년 갈라타사라이 고등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이 학교들은 프랑스어와 터키어 교육을 중시하고 민족이나 종교에 차별 없이 학생을 받아들여 세속적이고 유럽적인 교양을 갖춘 엘리트 관료층과 지도자층을 배출하는 데 기여했다.[49][55] 1860년에는 오스만 제국 내무부가 신설되어 기존에 대비지르가 맡았던 내부 안보 임무를 이관받았다.
=== 지방 행정 개편 ===
중앙집권 강화는 지방 행정 개편과 병행되었다. 1840년 개혁으로 주(州) 의회가 설치되고 지방관에게 봉급제가 실시되어, 이들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를 억제하고 중앙 정부의 통제를 강화하려 했다.[47] 1864년에는 주령법(Vilayet Law)이 제정되어 지방 행정 구역과 제도를 더욱 체계적으로 개편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전통적으로 강한 세력을 누렸던 지방 총독이나 아얀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키고 중앙 정부의 영향력을 지방까지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32] 1856년 개혁 칙령에서는 지방 의회에서 무슬림과 비무슬림 대표를 선출하는 방식을 개선하도록 규정하기도 했다.[49]
=== 사법 제도의 변화 ===
법률 및 사법 분야에서도 서구화가 추진되었다. 프랑스 법을 모델로 한 새로운 상법과 형법이 도입되었다.[49] 1840년 형법 공포를 시작으로 1851년과 1858년에 개정 및 새로운 형법이 공포되었으며, 상법 분야에서도 1850년 상법 및 무역법, 1861년 혼합 상법, 1863년 해상 상법 등이 제정되었다.[49]
사법 기구도 개편되어, 귤하네 칙령 이후 최고 사법 심의회가 법률 제정 및 검토를 주도했으며, 1847년에는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의 민사·상사 소송을 다루는 혼합 법원이 설치되었다.[47][49] 1864년에는 세속적인 니자미예 법원이 설립되었다. 사법 기구의 기능 분화도 이루어져, 1854년 최고 사법령 평의회의 입법 기능이 개혁 평의회(''Meclis-i Âli-i Tanzimat'')로 이관되었고, 1868년에는 최고 사법령 평의회가 법안 초안 작성을 담당하는 국무원(Danıştay)과 최고 항소 법원 역할을 하는 사법 평의회(''Divan-ı Ahkâmı Adliye'')로 분리되었다.[33]
한편, 전통적인 샤리아(이슬람법)를 근대 법체계에 통합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1870년부터 1876년까지 편찬된 메젤레(Mecelle)는 하나피 학파의 샤리아를 성문화한 민법전으로, 이러한 시도의 대표적인 결과물이다.[49][59][60] 하지만 샤리아 법정과 유럽식 법정이 병존하는 사법 이원 체제는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33]
=== 입헌 정치 시도와 좌절 ===
탄지마트 후기, 재정 파탄과 술탄 압둘 아지즈의 전제 정치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서 '젊은 오스만인'들을 중심으로 입헌 운동이 일어났다.[57][63] 1875년 오스만 제국이 외채 이자 지불 불능을 선언하며 사실상 파산하자 개혁의 한계가 드러났고, 이는 1876년 5월 압둘 아지즈를 폐위시킨 쿠데타로 이어졌다.[52][57][59][61][63]
새로 즉위한 압둘 하미드 2세 치하에서 개혁파 관료 미드하트 파샤 주도로 제헌 작업이 진행되어, 1876년 12월 23일 오스만 제국 최초의 헌법인 오스만 제국 헌법(미드하트 헌법)이 공포되었다.[62][63] 이 헌법은 오스만 제국을 서구식 법치 국가로 선언하고, 제국 의회 설치와 모든 신민의 완전한 평등을 규정하는 등 입헌 군주제를 지향했다.[62][63] 1877년 3월에는 의회가 소집되어 제1차 입헌 시대가 시작되었다.[63]
그러나 의회가 정부 비판에 나서자 압둘 하미드 2세는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패배를 빌미로 1878년 2월 헌법을 정지시키고 의회를 폐쇄하며 전제 정치로 회귀했다.[63] 이로써 탄지마트 개혁의 정점이었던 입헌 정치 시도는 좌절되었고, 미드하트 파샤 등 개혁파는 추방되었다.[63]
=== 평가 ===
탄지마트 개혁은 오스만 제국의 정치 및 행정 시스템을 근대화하려는 중요한 시도였다. 중앙집권 강화, 근대적 관료제 및 군대 확립, 법치주의 도입 시도, 지방 세력 약화를 통한 제국 재통합 노력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39][65] 특히 능력 중심의 인재 등용은 새로운 엘리트층을 양성하는 데 기여했다.[69]
하지만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본질적 한계와 함께 재정 문제 해결 실패, 서구 열강에 대한 경제적 종속 심화, 샤리아와 근대법 사이의 갈등, 최종적인 입헌 정치 좌절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33][41][62]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지마트 시대에 이루어진 제도적 변화와 인적 자원 양성은 이후 청년 튀르크 혁명과 터키 공화국 수립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33]
4. 2. 군사
탄지마트 개혁 이전, 술탄 마흐무트 2세는 1826년 예니체리 군단을 폐지하고 군대의 서구화를 추진하며 개혁의 기반을 마련했다.[34][35] 본격적인 탄지마트 개혁이 시작되면서 군사 부문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1839년 발표된 귤하네 칙령은 군대의 징집에 대한 정식 규정과 근무 기간 설정을 개혁의 주요 과제 중 하나로 명시했다.[32][38]이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중앙집권제 강화를 목표로 군사 제도를 개편했다. 전통적인 튀르크식 군복 대신 프로이센과 유사한 형태의 서구식 군복을 도입했으며, 근대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여 제국 내 모든 신민에게 인종과 종교에 관계없이 병역의 의무를 부과했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신민이라면 누구나 동등하게 국가에 봉사해야 한다는 오스만주의 이념을 반영한 조치였다. 1843년부터 1844년 사이에는 징병, 징집 절차 및 복무 기간을 명확히 규정하는 등 군대를 보다 체계적으로 개편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13][14] 이후 1856년 개혁 칙령에서는 비무슬림 신민의 병역 의무가 다시 한번 명확히 규정되었다.[49] 이러한 군사 개혁은 근대적인 상비군을 육성하고 제국의 국방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4. 3. 경제
1839년 귤하네 칙령은 모든 신민의 생명, 명예와 함께 재산의 안전 보장을 약속하고, 조세 제도의 확립과 공정한 징수를 규정하며 경제 개혁의 방향을 제시했다.[32][38] 이는 탄지마트 개혁 과정에서 다양한 경제 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탄지마트 시대의 주요 경제 개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도 | 내용 | 비고 |
---|---|---|
1838 | 발리타 리마누 조약 체결 | 영국과의 통상 조약. 아시아 국가 대상 불평등 조약의 선례가 됨.[36][37] |
1839 | 귤하네 칙령 발표 | 재산권 보장, 조세 제도 확립 명시[32][38] |
1839 | 통상농업부 설립 | [13][14] |
1840 | 최초의 오스만 제국 지폐 발행 | 통화 개혁의 일환[13][14] |
1840 | 재정 시스템 개편 | [13][14] |
1840 | 일티잠(Iltizam, 징세 청부제) 폐지 시도 | 징세관 부족 및 기득권층 반발로 실패 후 부활[47] |
1840년대 초 | 민간 은행 업무 허가 | 이스탄불 갈라타 지구 80여 명 허가, 1850년대 중반 18명으로 통합[40] |
1850 | 상법 및 무역법 공포 | [13][14] |
1851 | 증기선 회사 Şirket-i Hayriye|쉬르케티 하이리예ota 설립 | 최초의 증기 통근선 운항[13][14] |
1854 | 최초의 외국 차관 도입 | 크림 전쟁 중 영국으로부터 도입[41][49] |
1856 | 오스만 은행 설립 | 영국 자본(카몬도 가문 등) 주도 설립. 제국 재정에 영향력 행사.[20][41][42] |
1856 | 철도망 건설 시작 | [13][14] |
1858 | 토지법 공포 | 근대적 사적 토지 소유권 확립 기초 마련 시도[13][14][55][57] |
1861 | 프랑스식 혼합 상법 공포 | [49] |
1863 | 프랑스식 해상 상법 공포 | [49] |
1866 | 오스만 증권 거래소 설립 | Dersaadet Tahvilat Borsası|데르사데트 타흐빌라트 보르사스ota[21] |
1867 | 와크프(Waqf, 이슬람 종교 기부 재산) 재편 | [13][14] |
1867 |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 규제 완화 | 카피툴레이션 약화 시도의 일환[13][14] |
개혁 초기에는 조세 제도를 정비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징세 청부업자인 뮐테짐(Mültezim) 등 기득권 세력의 반발과 행정력 부족으로 일티잠 제도는 곧 부활하는 등 한계를 보였다.[47] 또한, 술탄 압둘 메지드 1세는 관영 공장 설립 등 산업 육성을 시도했으나, 막대한 재정 투입에도 불구하고 효율성이 낮아 유럽 투기 자본이나 제국 내 소수 민족 상인들에게만 이익이 돌아가 무슬림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65]
특히 크림 전쟁을 계기로 1854년 영국으로부터 처음 차관을 도입한 이후, 오스만 제국은 개혁과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재정을 점차 외국 자본에 의존하게 되었다.[41][49] 이는 이스미르-아이든 간 철도 부설권과 같은 주요 이권이 외국에 넘어가는 결과를 낳았고,[41] 무역 구조 역시 서구 열강에 원자재를 공급하는 형태로 고착화되면서 농업의 단일 작물 재배 경향이 심화되는 등 경제적 종속이 가속화되었다.[57]
결국, 누적된 외채 부담과 1873년 세계 금융 위기, 농산물 흉작 등이 겹치면서 오스만 제국은 1875년 외채 이자 지불 불능을 선언하며 사실상 국가 부도 상태에 이르렀다.[52][57][59][61] 이는 탄지마트 개혁이 재정 및 경제 분야에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었다.[62] 이후 1881년에는 채권국들의 압력으로 오스만 제국의 재정을 관리하는 오스만 공채 관리국이 설립되어 외세의 경제적 간섭은 더욱 심화되었다.[41]
4. 4. 사회 및 문화


탄지마트 개혁은 오스만 제국의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신분 제도와 종교의 자유, 교육, 법률 등 다양한 영역에서 근대화를 추구하며 서구식 제도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 신분제 개혁과 평등 ===
1839년 귤하네 칙령은 무슬림과 비무슬림(짐미)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제국 신민의 생명, 명예, 재산의 안전을 보장하고 법 앞의 평등을 선언했다.[32][38] 이는 전통적인 샤리아(이슬람법) 체제 하에서의 차별적 공존 원칙을 폐기하는 획기적인 조치였다. 비록 샤리아와 카눈(세속법)을 병존시키는 등 보수 세력에 대한 고려도 있었지만[38], 모든 신민을 법적으로 평등한 존재로 규정하려는 방향성을 제시했다.
1856년 개혁 칙령은 이러한 평등 원칙을 더욱 구체화했다.[49][52] 이 칙령은 비무슬림 신민이 모든 공직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신앙의 자유, 비무슬림 공동체 대표의 권리 재규정, 공립학교 입학 허가, 지방 의회에서의 동등한 대표 선출, 최고 사법 심의회 참여, 비무슬림에 대한 차별 용어 사용 금지, 병역 의무 부과(기존의 지즈야 면제 대신), 공동체 학교 설립 및 교육 과정 편성 승인, 혼합 재판소에서의 증언 인정 등을 명시했다.[49] 이는 비무슬림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제국 내 통합을 강화하려는 의도였으나, 한편으로는 서구 열강의 내정 간섭을 막으려는 목적도 있었다.[32]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인 평등 조치는 일부 무슬림들에게는 '특권 칙령'으로 여겨져 반발을 사기도 했다.[54]
1869년에는 종교나 민족에 관계없이 모든 제국 거주민에게 공통된 오스만 시민권을 부여하는 국적법이 제정되어, 법 앞의 평등 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오스만주의 이념을 강화하고자 했다.
=== 종교 정책 변화 ===
탄지마트 시대에는 전통적인 밀레트 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기존의 종교 공동체 자치 시스템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공동체를 인정하고 각 밀레트의 법적 지위를 재정비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 칼데아 가톨릭 밀레트 설립 (1846)
- 프로테스탄트 밀레트 설립 (1847)
- 불가리아 가톨릭 밀레트 설립 (1860)
- 오스만 제국 내 그리스인 밀레트를 위한 기본법 공포 (1862)
- 아르메니아 밀레트를 위한 헌법 및 아르메니아 국민 의회 공포 (1863)
- 오스만 제국 유대인 밀레트를 위한 헌법과 유대인 국민 의회 공포 (1865)
- 불가리아 총대주교청 및 불가리아 밀레트 설립 (1872)
- 시리아 정교회 밀레트 설립 (1873)
개혁 칙령(1856)은 신앙의 자유를 명시하고, 공식적으로는 이슬람으로의 강제 개종을 금지하며 배교자 처형을 불법화하려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무슬림에 대한 관용은 제한적이었으며, '종교의 자유'는 주로 '자신의 종교를 방어할 자유'로 해석되었다.[23] 1866년에는 수피 수도회에 대한 통치권이 울레마에게 이양되면서 셰이흐위슬람 산하 셰이크 의회가 설립되기도 했다.
=== 노예제 폐지 노력 ===
탄지마트 기간 동안 노예 무역과 노예제를 폐지하려는 점진적인 조치들이 취해졌다.
- 이스탄불 노예 시장 폐지 (1847)[17]
- 페르시아만에서의 노예 무역 탄압 (1847)[18]
- 체르케스와 조지아 노예 무역 금지 (1854–1855)[19]
- 흑인 노예 무역 금지 (1857)[22]
=== 교육 개혁 ===
전통적인 이슬람 성원 부설 신학교인 마드라사 중심의 교육에서 벗어나 유럽식 세속 교육 제도를 도입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1845년 내각 내 교육 전담 부서가 설치되었고, 기술 교육이 강조되면서 실업 학교가 증가했다.
- 교육평의회() 설립 (1841)
- 공공 교육 평의회 (1845) 및 교육부 (''Mekatib-i Umumiye Nezareti'', 1847, 이후 Maârif-i Umûmiye Nezâreti, 1857) 설립
- 최초의 근대 대학교 (, 1848), 학원 (1848) 및 교원 양성학교 (, 1848) 설립
- 과학 아카데미 () 설립 (1851)
- 공무원 학교 및 경제 정치 과학 학교 () 설립 (1859)
- 갈라타사라이 고등학교 설립 (1868): 프랑스어와 튀르키예어를 중시하고, 민족이나 종교에 따른 차별 없이 세속적인 교육을 제공하여 유럽적 교양을 갖춘 엘리트 관료 및 지도자 양성에 기여했다.[49][55]
=== 법률 및 사법 개혁 ===
프랑스 법을 모델로 한 새로운 법률 체계 도입이 추진되었다.
- 민법 및 형법 개편 (1840)
- 상법 및 무역법 공포 (1850)
- 형법 개정 (1851)
- 서구식 형법 공포 (1858, 1928년까지 유지됨)
- 프랑스식 혼합 상법 공포 (1861)
- 프랑스식 해상 상법 공포 (1863)
- 세속적인 니자미예 법원 설립 (1864)
- 메젤레(민법전) 발행 (1869–1876): 샤리아를 근대법 체계에 맞게 성문화하려는 시도였다.[49][59][60]
이 과정에서 샤리아 법정과 유럽식 법정이 병존하는 이원적 사법 체제가 형성되었고, 이는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33] 또한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의 민사 및 상사 소송을 다루는 혼합 법원이 1847년에 설치되었다.
=== 언론 및 출판 ===
=== 기타 사회 변화 ===
- 최초의 전국 신분증 (공식 명칭 신분증, 비공식 명칭 ) 발급 (1844)
- 동성애 비범죄화 (1858)
- 조약 개정을 통해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 허용 (1867)
탄지마트 개혁은 사회 전반에 걸쳐 서구화를 추진하며 근대 국가로 나아가려는 노력이었지만, 급격한 변화는 기존 질서와의 충돌과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 특히 비무슬림 권리 확대는 일부 무슬림의 반발을 샀고[54], 이는 민족 간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65] 또한, 개혁 과정에서 능력 중심의 인재 등용이 이루어져 새로운 엘리트층이 형성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69]
4. 5. 교육
탄지마트 개혁은 교육 분야에서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전통적인 이슬람 성원 부설 신학교인 마드라사 중심의 교육 체계에서 벗어나, 유럽의 세속적인 학교 제도를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32][38] 이는 마흐무트 2세 시기부터 시작된 인재 양성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마흐무트 2세는 번역국을 설치하고 유학생을 유럽으로 파견하여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도록 지원했다.[34][35]탄지마트 시대에 들어서면서 교육 개혁은 더욱 본격화되었다. 1841년에는 교육 관련 정책을 심의하기 위한 교육평의회(Meclis-i Maarif-i Umumiyeota)가 설립되었고,[47] 1845년에는 공공 교육 평의회가, 1847년에는 내각 내에 교육을 전담하는 부서인 교육부(Mekatib-i Umumiye Nezaretiota, 1857년 Maarif Nezaretiota로 변경)가 설치되었다.[47] 특히 기술 교육이 강조되면서 농업학교(1847년)[47]를 비롯한 실업 학교들이 늘어났다.
근대적인 고등 교육기관 설립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1848년에는 최초의 근대식 대학교(Darülfünunota)와 학원, 그리고 교사 양성을 위한 교원 양성 학교(Darülmualliminota)/사범학교가 문을 열었다.[47] 이후 1859년에는 고급 관료를 양성하기 위한 문관 양성 학교(Mülkiyeota, 현 앙카라 대학교 정치학부의 전신)가 설립되었고,[49] 1868년에는 프랑스식 교육을 모델로 한 갈라타사라이 고등학교가 세워졌다.[49]
1856년 발표된 개혁칙령은 교육 기회 확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비무슬림 신민들의 공립학교 입학이 허가되었고, 비무슬림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학교를 설립하고 독자적인 교육 과정을 운영하는 것이 인정되었다.[49]
새롭게 설립된 학교들은 세속적인 교육을 지향했으며, 외국어로는 프랑스어, 국어로는 터키어 교육을 중시했다. 입학에 있어 민족이나 종교에 따른 차별을 두지 않았으며, 이를 통해 유럽적인 교양과 세계 시민적 사고를 갖춘 새로운 관료층과 지도자층을 양성하고자 했다.[49][55] 이러한 교육 개혁은 출신이나 가문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는 인재 등용 문화를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갖춘 엘리트 계층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69]
5. 탄지마트 개혁의 한계와 문제점
탄지마트 개혁은 오스만 제국을 근대화하려는 야심 찬 시도였으나, 여러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전반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많은 한계와 문제점을 드러냈다.[23][62]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개혁의 영향력이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지 못했다는 점이다.[23] 또한, 개혁 과정에서 추진된 중앙집권화 정책은 발칸반도의 기독교 자치구 등 여러 지역 세력의 반발을 샀고,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23]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보수주의자들의 저항 역시 개혁 추진의 큰 장애물이었다.[23] 유럽식 법률 도입 과정에서 기존의 샤리아(이슬람법) 법정과 새로운 법정이 병존하면서 법 체계의 이원화로 인한 사회적 혼란도 발생했다.[33]
재정 및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실패는 더욱 두드러졌다.[62] 크림 전쟁을 비롯한 연이은 전쟁 수행과 근대화 정책 추진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은 유럽 열강으로부터의 대외 채무에 의존하게 만들었다.[57][41] 이는 결국 1875년 국가 부도 사태로 이어졌고[52][57][59][61], 1881년에는 외채 관리를 위한 오스만 공채 관리국이 설립되어 제국의 재정 주권이 크게 훼손되었다.[41] 무역 구조 역시 서구 열강에 대한 원자재 공급 기지로 변질되면서 경제적 종속이 심화되었고, 제국의 반(半)식민지화가 촉진되었다.[57] 관영 공장 설립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65], 비효율적인 운영과 외국 투기 자본 및 특정 상인 계층에게만 이익이 돌아가는 문제[65], 일부 술탄의 낭비[41] 등은 재정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1877년 러시아-튀르키예 전쟁에서의 패배는 발칸반도의 여러 민족이 독립하면서 제국의 영토를 크게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았다.[65] 또한, 탄지마트 개혁 자체가 열강의 외압을 배경으로 시작된 "상부로부터의 개혁"이라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33][41] 이러한 내외부적 문제점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오스만 제국은 점차 주권을 상실하고 국제 사회에서 "유럽의 병자"로 불리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41]
5. 1. 내부적 저항
탄지마트 개혁은 오스만 제국 내부의 다양한 세력으로부터 상당한 저항에 부딪혔다. 개혁의 급진성과 중앙집권화 경향은 기존 질서에 익숙했던 보수 세력과 자치권을 우려한 소수 민족 집단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우선, 개혁 정책 자체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방해가 상당했다.[23] 특히 1856년 오스만 개혁칙령은 비무슬림의 권리를 명확히 규정하고 차별 용어 사용 금지, 공직 참여 허용 등을 담고 있었는데, 이는 일부 무슬림들에게 지나치게 비무슬림에게 특혜를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특권 칙령"이라 불리며 비판받았다.[54][49] 무슬림들의 반발은 외국 자본 배척보다는 이슬람 신비주의 교단의 영향을 받아 제국 내 소수 민족에 대한 적대감으로 표출되는 경향을 보였다.[65]
발칸반도의 기독교도 자치구들은 중앙집권화 강화가 자신들의 자치권을 더욱 제약할 것이라 우려하여 개혁을 지지하지 않았다.[23] 오히려 귤하네 칙령 발표 이후 일부 지역에서는 독립을 추구하는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23] 1848년 혁명의 여파로 유럽 전역에서 민족주의가 고조되면서 오스만 제국 내 민족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대표적으로 1850년 불가리아에서는 귤하네 칙령의 약속을 믿고 봉건적 의무를 거부한 농민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중앙 정부는 무슬림 지주 계급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칙령의 내용을 관철하기 어려웠고, 반란 진압에도 어려움을 겪었다.[49][50] 또한, 제국 내 다민족 공동체(밀레트) 내부의 심각한 대립 역시 개혁 추진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인이었다.[49]
개혁 후반기에는 술탄 압둘 아지즈의 전제 정치와 낭비에 대한 반발로 '젊은 오스만인'과 같은 지식인 그룹을 중심으로 반전제 운동이 일어났고, 이는 1876년 미드하트 파샤 등이 주도한 쿠데타와 오스만 제국 헌법 제정으로 이어졌다.[63] 그러나 어렵게 제정된 헌법과 의회는 러시아-튀르크 전쟁 패배와 압둘 하미드 2세의 권력 강화 속에서 1878년 결국 정지되고, 제국은 다시 30년간의 전제 정치 시대로 회귀하게 된다.[63] 이는 개혁에 대한 최고 권력층의 저항이자 탄지마트 개혁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5. 2. 외부적 요인
탄지마트 개혁은 오스만 제국 내부의 필요성뿐만 아니라, 외부 세력, 특히 유럽 열강과의 관계 속에서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외부 요인은 개혁 초기부터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마흐무트 2세 사후 압뒬메지트 1세가 즉위했을 때, 제국은 제2차 이집트-튀르크 전쟁의 패배라는 국난에 처해 있었다.[32][36] 외무대신 무스타파 레시트 파샤는 이집트 문제 해결과 영국의 외교적 지원 확보를 위해 노력했으며, 그 결과 1838년 영국과 발리타 리마누 조약(오스만-영국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36] 이는 오스만 제국의 경제적 자주성을 약화시키는 불평등 조약의 성격을 지녔으며, 이후 영국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체결하는 통상 조약의 선례가 되었다는 점에서 제국에 대한 외부 간섭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37]
크림 전쟁(1853년-1856년)은 외부 요인이 개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사례이다.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맞서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을 지원했지만[49][50], 전쟁 수행을 위한 막대한 비용은 제국의 재정을 압박했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1854년 영국으로부터 처음으로 차관을 도입하게 되었고, 이는 이후 외채 의존 심화의 시작점이 되었다.[41][49] 전쟁 중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은 비무슬림의 권리 확대를 포함한 추가적인 개혁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1856년 개혁칙령 발표로 이어졌다.[52] 이 칙령은 이스탄불 주재 영국 및 프랑스 총영사와의 협의를 거쳐 기초되었으며[49], 이는 특히 후기 탄지마트 개혁이 제국 내부의 자발성보다는 열강의 강제에 의해 추진되는 경향이 강해졌음을 보여준다.[53]
개혁 추진과 연이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재정은 점차 외채에 의존하게 되었고, 이는 제국의 경제적 예속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무역 확대는 오스만 경제를 서구 열강에 대한 원자재 공급지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고, 농업의 단일 작물 재배 경향이 심화되면서 제국의 반(半)식민지화가 촉진되었다.[57] 결과적으로 제국의 경제 구조는 외부 요인에 더욱 취약해졌고, 1875년 서구 금융 공황과 농작물 흉작이 겹치면서 오스만 제국은 외채 이자 지불 불능을 선언하며 사실상 파산 상태에 이르렀다.[52][57][59][61]
1877년 러시아-튀르키예 전쟁에서의 패배는 발칸반도의 여러 민족이 독립하는 결과를 낳아 제국의 영토를 더욱 축소시켰다.[65] 누적된 대외 채무 문제는 결국 1881년 '오스만 공채 관리국' 설립으로 이어져 제국의 재정이 사실상 외국 자본의 관리하에 놓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더 큰 외압을 불러오는 악순환으로 이어졌고, 오스만 제국은 국제 사회에서 "유럽의 병자"로 불리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41] 외채 도입은 이스미르-아이든 간 철도 부설권과 같은 이권을 외국에 넘겨주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41] 이처럼 탄지마트 시기 동안 유럽 열강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간섭과 압력은 개혁의 방향과 성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제국의 주권 상실과 경제적 종속을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6. 오스만 제국 헌법 (미드하트 헌법, 1876)
1871년 알리 파샤 사후 개혁의 흐름은 침체되었으나[57], 샤리아와 유럽 근대법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1868년 프랑스의 국무원(Conseil d'État)을 모델로 한 국가 평의회(Danıştay)가 설립되었고,[33] 1870년부터 편찬을 시작하여 1876년에 완성된 근대 민법전인 메젤레(Mecelle)는 샤리아를 성문화한 중요한 결실이었다.[49][59][60]
그러나 계속된 전쟁 수행과 '상부로부터의 개혁'은 유럽 열강으로부터의 많은 차관 도입을 필요로 했다. 이는 오스만 경제의 서구 열강에 대한 원자재 공급 기지화를 심화시키고 농업의 단일 경작화를 초래하여 제국의 반식민지화를 촉진했다.[57] 결국 서구 금융 공황과 농산물 흉작의 영향으로 1875년 오스만 제국은 외채 이자 지불 불능을 선언하며 사실상 파산 상태에 이르렀다.[52][57][59][61] 탄지마트 개혁이 재정 및 경제 면에서는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이 드러난 것이다.[62]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61년부터 술탄의 지위에 있던 압둘 아지즈의 낭비와 전제 정치에 대한 반발로, 신 오스만인(Young Ottomans)이라 불리는 젊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반전제 운동이 일어났다.[63] 1876년 5월 30일, 미드하트 파샤 등 개혁파 관료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압둘 아지즈를 폐위시켰다.[63] 그의 조카 무라트 5세가 잠시 즉위했으나 정신 질환을 이유로 3개월 만에 폐위되었고, 8월 31일 동생인 압둘 하미드 2세가 새로운 술탄으로 즉위했다.[63][64]
압둘 아지즈에 의해 좌천되었던 미드하트 파샤는 복권되어 국가 평의회 의장을 거쳐 제헌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나므크 케말 등 '신 오스만인'들과 함께 헌법 초안 작성에 착수했다.[63] 1876년 12월 17일 미드하트 파샤는 대재상에 임명되었으나, 헌법 제정 과정에서 압둘 하미드 2세는 자신의 권한을 제약하는 조항에 반대하며 술탄이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고 판단하는 인물을 추방할 수 있는 권한 조항(헌법 제113조) 삽입을 강하게 요구했다.[63] 나므크 케말 등은 이 조항에 반대했지만, 헌법 공포를 서두른 미드하트 파샤는 결국 술탄의 요구를 수용하는 타협을 했다.[63] 그 결과 1876년 12월 23일, 총 119조로 구성된 오스만 제국 최초의 헌법, 통칭 미드하트 헌법(오스만 제국 헌법)이 공포되었다.[62][63]
헌법은 오스만 제국이 서구식 법치 국가임을 선언하고, 양원제 제국 의회 설치, 신민의 기본권 보장, 무슬림과 비무슬림 신민의 완전한 평등 등을 명시했다.[62][63] 이 헌법은 1875년 프랑스 공화국 헌법, 1831년 벨기에 헌법, 영국 헌법 등을 참고하여 제정된 자유주의적 입헌 군주제 헌법으로,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앞서 의회 개설을 규정하는 등 획기적인 시도였다.[33][63]
이듬해인 1877년 3월 19일에는 선거를 통해 구성된 하원과 술탄이 임명한 상원으로 이루어진 제국 의회가 소집되었다.[63] 그러나 의회가 정부 고관의 부정부패와 술탄 측근의 비리를 추궁하기 시작하자 압둘 하미드 2세는 의회에 불만을 품었다. 결국 러시아-튀르키예 전쟁에서의 패배를 빌미로 1878년 2월 14일, 헌법 효력을 정지시키고 의회를 폐쇄하며 약 30년간 이어지는 전제 정치를 시작했다.[63] 헌법 제정의 주역이었던 미드하트 파샤 역시 자신이 수용했던 헌법 제113조에 의해 추방당하는 운명을 맞았다.[63]
미드하트 헌법은 세계사적으로 볼 때 획기적인 성격을 지녔지만, 러시아-튀르키예 전쟁 패배, 압둘 하미드 2세의 전제 정치 부활, 그리고 당시 국정 현실과의 괴리 등으로 인해 제정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정지될 수밖에 없었다.[33] 이는 수도 엘리트 중심의 입헌 운동 기반이 취약했으며, "상부로부터의 개혁"이라는 탄지마트 자체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33][68] 그러나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오스만 제국 역사상 최초로 선출된 대표들이 국정을 논의했다는 점은 큰 의미를 지닌다.[33] 미드하트 헌법은 이후 압둘 하미드 2세의 전제 정치에 저항하는 세력의 상징이 되었으며, 1908년 청년 투르크 혁명으로 극적인 부활을 이루어 오스만 제국 및 이후 터키 공화국의 역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33]
7. 탄지마트의 결과와 영향
오스만 제국의 탄지마트 개혁은 1839년 귤하네 칙령 선포를 시작으로[32][38] 행정, 군사, 재정, 교육 등 다방면에 걸쳐 유럽식 근대화를 추진한 시도였다. 이 개혁을 통해 중앙집권적 관료제와 근대 군대가 확립되었고[39], 서구식 교육이 도입되었으며[69], 1876년에는 아시아 최초의 근대 헌법인 오스만 제국 헌법이 제정되는 등[33][63] 외형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근대화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32]
그러나 탄지마트는 여러 요인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개혁은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지 못했고, 중앙집권화에 대한 발칸반도 등지의 반발과 보수 세력의 저항에 부딪혔다. 특히 재정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는데, 연이은 전쟁 비용과 개혁 자금 마련을 위한 과도한 외채 도입은[41] 결국 1875년 국가 부도 사태로 이어졌고[52][57][59][61], 이는 오스만 공채 관리국 설립을 통해 열강의 경제적·정치적 간섭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41]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병자'로 불리며 주권을 크게 상실했다.[41]
사회적으로는 비무슬림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기존 질서에 익숙했던 다수 무슬림의 반감을 샀고[25], 이는 오히려 민족 및 종교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27] 샤리아(이슬람법)와 유럽식 법의 이원적 적용은 혼란을 야기했으며[33], 개혁이 실제로는 무슬림의 우위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비판도 있다.[24]
개혁의 정점이었던 미드하트 헌법은 1878년 압둘 하미드 2세에 의해 정지되고 의회가 해산되면서[63] 전제 정치로 회귀했다. 이는 개혁이 광범위한 사회적 지지 없이 소수 엘리트에 의해 주도된 '위로부터의 개혁'의 한계를 보여준다.[33][68] 결국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패배와 발칸반도 영토 상실은[65] 탄지마트가 제국의 근본적인 쇠퇴를 막지 못했음을 입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지마트 시기의 제도 정비와 인재 양성은 이후 터키 공화국을 포함한 후계 국가들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으며[69], 1908년 청년 튀르크 혁명으로 미드하트 헌법이 부활하는 등[33] 장기적인 유산을 남겼다.
7. 1. 긍정적 측면
탄지마트 개혁은 오스만 제국의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고 행정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1808년 즉위한 마흐무트 2세는 개혁의 기반을 닦았다. 그는 군대 서구화를 추진하고, 외무·내무·재무 3개의 성을 신설하여 정부 기구를 근대화했으며, 번역국 설치와 유학생 파견을 통해 인재 양성에 힘썼다. 또한 지방의 반독립적 세력인 "아얀"을 억제하여 중앙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했다.[34][35]
1839년, 마흐무트 2세의 뒤를 이은 아브뒬메지트 1세는 귤하네 칙령(탄지마트 칙령)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개혁의 시작을 알렸다.[32][38] 이 칙령은 백성의 생명, 명예, 재산의 안전 보장, 조세 제도의 확립, 공정한 공개 재판 원칙, 군대 징집 및 복무 기간 규정 등을 주요 내용으로 삼았다. 이를 통해 제국은 행정, 군사, 재정, 문화, 교육 등 다방면에 걸쳐 서구식 체제로의 전환을 추진했다.[32][38]
탄지마트 개혁을 통해 오스만 제국은 중앙집권적인 관료 기구와 근대적인 군대를 확립해 나갔다.[39] 최고·고등 사법 심의 회의와 주 의회 설립은 지방 총독이나 아얀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키고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32] 또한, 서구식 학교가 설립되어 근대적 지식과 기술을 갖춘 새로운 엘리트층이 양성되었다.[69] 탄지마트 시대에 교육받은 인물 중에는 이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거나 발전한 국가들의 주요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능력 중심의 인재 등용이 이루어져 출신이나 가문에 얽매이지 않고 유능한 인물이 발탁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69]
법률 분야에서도 유럽 여러 나라의 법을 모델로 한 입법 작업이 진행되었고, 관련 법정들이 설치되었다. 비록 샤리아(이슬람법) 법정과의 병존으로 인한 이원 체제의 혼란이 있었지만[33], 이는 근대적인 법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였다. 경제적으로는 조세 수탁 제도인 일티자무(Iltizam영어)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근대적 은행 제도를 도입하여 1856년에는 오스만 은행Ottoman Bank영어이 설립되었다.[41][42] 또한, 전통적인 길드를 현대적인 공장으로 대체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졌다.

개혁은 1876년 오스만 제국 헌법(일명 미드하트 헌법)의 제정으로 정점에 달했다. 미드하트 파샤 등이 주도하여 제정한 이 헌법은 오스만 제국이 서구식 법치국가임을 선언하고, 제국 의회 설치,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완전한 평등을 명시했다.[62][63] 이는 아시아 최초의 근대적 헌법으로 평가받으며[33][63], 비록 압둘 하미드 2세에 의해 곧 정지되었으나[63], 1908년 청년 튀르크 혁명으로 부활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33]
탄지마트는 서구 지역 이외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체계적인 근대화 시도로서, 청나라의 양무운동, 태국의 차크리 개혁, 일본의 메이지 유신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개혁 운동에 선구적인 영향을 미쳤다.[32] 비록 여러 한계점을 안고 있었으나, 제국의 재통합을 추진하고 근대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65]
7. 2. 부정적 측면
탄지마트 개혁은 여러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개혁의 영향력이 오스만 제국 전역에 미치지 못했고, 중앙집권화에 반발한 발칸반도의 기독교 자치구들이 자치권을 요구하는 등 내부적인 저항에 부딪혔다. 보수 세력의 반발 역시 개혁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었다.재정 및 경제적인 측면에서 탄지마트는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냈다. 연이은 전쟁 수행과 '위로부터의 개혁' 추진은 유럽 열강으로부터 막대한 차관 도입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41] 무역 구조가 서구 열강에 대한 원자재 공급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농업의 단일 경작화가 심화되었고, 이는 오스만 경제의 반식민지화를 촉진하는 결과를 낳았다.[57] 제국 경제는 유럽의 경제 상황과 농산물 수확량에 크게 좌우되었으며, 결국 1875년 서구 금융 공황과 흉작의 여파로 외채 이자 지불 불능을 선언하며 사실상 파산 상태에 이르렀다.[52][57][59][61] 1854년부터 심화된 외채 의존은 이스미르-아이든 간 철도 부설권을 외국 자본에 넘겨주는 등[41] 경제적 종속을 심화시켰다. 크림 전쟁을 비롯한 계속된 전쟁 비용 역시 외채 부담을 가중시켰다.[41] 이러한 재정 위기는 1881년 오스만 공채 관리국 설립으로 이어져 열강의 재정 간섭을 공식화했고, 제국의 주권은 더욱 훼손되었다.[41]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병자"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경제적 파탄이 자리 잡고 있었다.[41]
개혁 과정에서 사회 내부의 갈등 또한 첨예화되었다. 많은 무슬림들은 개혁을 이슬람 세계에 대한 외세의 영향력 확대로 간주하며 반감을 가졌다.[25] 이는 개혁 추진에 상당한 어려움을 야기했다. 특히 비무슬림에게 무슬림과 동등한 법적 지위를 부여하려는 시도는 기존 질서에 익숙했던 딤미 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으로, 일부에서는 이를 하미디안 학살이나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과 같은 후일의 민족 탄압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하기도 한다. 이는 상층부에서 강행된 개혁이 사회 전반의 가치관과 충돌하면서 발생한 반작용이라는 시각이다.[27] 레바논 산악 지방에서는 개혁이 의도와 달리 마론파와 드루즈파 간의 종교-민족적 갈등을 촉발하기도 했다.[28] 팔레스타인에서는 1858년 오스만 토지법과 같은 토지 개혁이 현지 펠라힌(농민)들의 불신과 문맹 문제와 맞물려, 지방 유력자들이나 부유층이 토지를 편법으로 등록하고 이를 유대인 이민자들에게 판매하는 결과를 낳아 토지 상실과 민족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29] 또한, 유럽식 법체계 도입과 기존 샤리아(이슬람법) 법정의 병존은 법 적용의 혼란을 야기했다.[33] 역사학자 한스-루카스 키저는 탄지마트가 표면적으로는 평등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무슬림의 우위를 유지하는 이중적인 측면이 있었다고 지적했으며,[24] 일부 연구는 오히려 이 시기 비무슬림의 법적 권리 주장이 약화되어 토지 몰수와 이주가 발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24] 무슬림들의 반발은 종종 외국 자본이 아닌 제국 내 소수 민족을 향했으며,[65] 크레타섬에서의 그리스인 탄압이나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지속적인 억압과 학살은 이러한 갈등의 비극적인 단면을 보여준다.[66]
개혁 과정은 유럽 열강의 간섭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크림 전쟁 이후 열강과의 협상 과정에서 제국의 자율성은 약화되었으며, 1856년 개혁 칙령에서는 열강이 제국 내 소수 민족 공동체에 대해 더 강력한 자치권을 요구하는 등 내정 간섭이 노골화되었다. 이는 모든 신민의 평등을 추구했던 오스만 정부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이었다. 레바논 산악 지방의 분쟁에서는 프랑스가 마론파를, 영국이 드루즈파를 각각 비호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려 경쟁하는 등[28] 열강은 제국 내 민족·종교 집단을 이용해 자국의 이익을 추구했다. 앞서 언급된 외채 문제와 오스만 공채 관리국 설립은 열강의 경제적, 정치적 압력을 더욱 강화시켜 제국의 주권을 잠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41]
궁극적으로 탄지마트 개혁은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본질적인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열강의 외압 속에서 시작되었고, 사회 전반의 지지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33] 미드하트 헌법 제정과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동력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결국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의 패배는 발칸반도 대부분 지역의 상실로 이어졌고, 제국의 영토는 크게 축소되었다. 이는 탄지마트 개혁이 제국의 근본적인 쇠퇴를 막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결과였다.[65]
참조
[1]
서적
The First Ottoman Experiment in Democracy
https://menadoc.bibl[...]
Orient-Institut Istanbul
[2]
웹사이트
Tanzimat Reforms
https://rpl.hds.harv[...]
2024-05-23
[3]
학술지
The Invention of Tradition as Public Image in the Late Ottoman Empire, 1808 to 1908
1993-01
[4]
학술지
The Ottoman Tanzimat and the Constitution
https://www.jstor.or[...]
2018-04
[5]
학술지
Peasant Protest in the Late Ottoman Empire: Moral Economy, Revolt, and the Tanzimat Reforms
https://shibbolethsp[...]
2012-08
[6]
서적
The Modernist World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7-05-06
[7]
서적
The Making of the Modern Near East 1792–1923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7-05-06
[8]
서적
The Young Turks in Opposition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7-05-06
[9]
서적
The Syrian Land: Processes of Integration and Fragmentation : Bilād Al-Shām from the 18th to the 20th Century
https://books.google[...]
Franz Steiner
2017-05-06
[10]
서적
Introduction to the Modern Economic History of the Middle East
https://books.google[...]
Brill Archive
2013-06-09
[11]
서적
Osman's Dream: The Story of the Ottoman Empire 1300-1923
https://books.google[...]
John Murray
2013-06-11
[12]
서적
The A to Z of the Ottoman Empire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13-06-09
[13]
잡지
Sultan Abdülmecid
http://www.ntvtarih.[...]
2011-07
[14]
서적
Istanbul im 19. Jahrhundert. Die Modernisierungsbestrebungen in der osmanischen Hauptstadt – lokale Faktoren und globale Einflüsse
[15]
웹사이트
PTT Chronology
http://www.ptt.gov.t[...]
PTT Genel Müdürlüğü
2013-02-11
[16]
웹사이트
History of the Turkish Postal Service
http://www.ptt.gov.t[...]
Ptt.gov.tr
2011-11-06
[17]
서적
The Palgrave Handbook of Global Slavery Throughout History
Springer International Publishing
[18]
서적
The Palgrave Handbook of Global Slavery Throughout History
Springer International Publishing
[19]
서적
The Palgrave Handbook of Global Slavery Throughout History
Springer International Publishing
[20]
웹사이트
History of the Ottoman Bank
http://www.obarsiv.c[...]
[21]
웹사이트
History of the Istanbul Stock Exchange
http://www.imkb.gov.[...]
[22]
서적
The Palgrave Handbook of Global Slavery Throughout History
Springer International Publishing
[23]
학술지
There Is No Compulsion in Religion': On Conversion and Apostasy in the Late Ottoman Empire: 1839–1856
2003-07
[24]
학술지
review of This Is a Man's World?: On Fathers and Architects: Talaat Pasha father of modern Turkey, architect of genocide, by Hans-Lukas Kieser,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8
2019
[25]
서적
Essays in Ottoman and Turkish History, 1774–1923 – The Impact of the West
University of Texas Press
[26]
웹사이트
The Tanzimat: Secular reforms in the Ottoman Empire
http://faith-matters[...]
Faith Matters
[27]
학술지
Elusive Equality: The Armenian Genocide and the Failure of Ottoman Legal Reform
2010-05-05
[28]
학술지
Corrupting the Sublime Sultanate: The Revolt of Tanyus Shahin in Nineteenth-Century Ottoman Lebanon
2000
[29]
서적
Land, Labor and the Origins of the Israeli-Palestinian Conflict 1882–1914
Cambridge University Press
[30]
서적
The Armenian People from Ancient to Modern Times
[31]
간행물
山内(1996)p.164
[32]
간행물
山内(1996)pp.163-165
[33]
학술지
トルコの政教分離に関する憲法学的考察 : 国家の非宗教性と宗教的中立性の観点から
https://doi.org/10.1[...]
甲南大学法学会
[34]
간행물
新井(2009)pp.42-43
[35]
간행물
新井(2009)pp.86-88
[36]
서적
[37]
서적
[38]
서적
[39]
서적
[40]
서적
The Ottoman Empire and the World Econom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41]
서적
[42]
서적
[43]
서적
[44]
서적
[45]
서적
[46]
서적
[47]
서적
[48]
서적
[49]
서적
[50]
서적
[51]
서적
[52]
서적
[53]
서적
[54]
서적
[55]
서적
[56]
서적
[57]
서적
[58]
서적
[59]
서적
[60]
서적
[61]
서적
[62]
서적
[63]
서적
[64]
서적
[65]
서적
[66]
서적
[67]
서적
[68]
서적
[69]
서적
[70]
서적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