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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요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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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요시 씨는 겐지(源氏)의 후예로 아와(阿波)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친 무가(武家) 가문이다. 가마쿠라 시대부터 활동하며 무로마치 시대에는 호소카와 씨의 피관(被官)으로 성장했다. 미요시 유키나가와 호소카와 스미모토는 교토를 두고 다투었으며, 미요시 모토나가는 호소카와 하루모토를 보좌하며 세력을 키웠다. 미요시 나가요시는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며 센고쿠 시대를 대표하는 다이묘로 성장했지만, 그의 사후 가문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미요시 씨는 다양한 무사들을 배출했으며, 교토와 시코쿠, 긴키 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성들을 거점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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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요시씨
기본 정보
성씨 (일본어)미요시 씨 (三好氏, Miyoshi-shi)
미요시 씨의 문장
미요시 씨의 문장
가문 문양 이름 (일본어)산가이비시니 이쓰쓰 구기누키 (三階菱に五つ釘抜, Sanngai Bishi ni itutsu Kuginuki)
유래미나모토 씨(가와치 겐지) 오가사와라 씨
출신아와 국미요시 군
근거지시코쿠 동부
기나이
역사
창시자미요시 요시나가
해산 연도1582년
가문 구성원
주요 인물미요시 유키나가
미요시 모토나가
미요시 나가요시
미요시 짓큐
미요시 야스나가
미요시 나가야스
미요시 마사야스
미요시 히데요리
미요시 모토유키
분가아타케 씨
소가 씨
기타 정보
봉건 가문다이묘
본거지아와 국
멸망1582년

2. 역사

미요시 가문은 겐지(源氏)의 후예로, 세이와 겐지(清和源氏)의 분파인 가와치 겐지(河内源氏)의 명문 오가사와라 씨(小笠原氏)의 서류(庶流)를 자처했다.[23][3] 아와국 미요시군(三好郡)을 본거지로 삼아 미요시 씨(三好氏)를 칭했다.[23]

가마쿠라 시대 후기부터 아와 국에서 활동했으며, 난보쿠초 시대(南北朝時代)에는 남조 측에서 활약하다가 북조 측의 호소카와 씨(細川氏)와 대립하기도 했다.[4] 그러나 남조가 불리해지자 무로마치 막부 성립 이후에는 호소카와 씨를 따랐다.[4]

조로쿠 2년(1458년), 지용을 겸비한 무장으로 칭송받던 미요시 유키나가(三好之長)가 등장했다. 유키나가는 호소카와 나리유키에게 이름자 한 자를 받아 오닌의 난(応仁の乱)에 참가했다.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양자인 호소카와 스미모토를 지지하며 무공을 쌓아 기나이(畿内)에서도 큰 영향력을 가졌다.

1520년, 호소카와 스미모토와 미요시 유키나가는 호소카와 다카쿠니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여 유키나가는 참수되었고, 스미모토는 아와로 패주 후 병사했다.[5]

미요시 유키나가의 손자 미요시 모토나가는 호소카와 스미모토의 아들 호소카와 하루모토를 지지하며 호소카와 다카쿠니를 몰아내고 교토를 탈환했다. 그러나 1532년 호소카와 하루모토와의 갈등, 기자와 나가마사와의 대립, 그리고 잇코잇키의 공격으로 인해 사카이에서 자결했다.[5][24]

미요시 모토나가의 아들 나가요시(長慶)는 호소카와 하루모토에게 반기를 들고, 미요시 마사나가를 격파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나가요시는 아시카가 요시테루와 대립했으나, 화해하고 막부의 실권을 장악하여 '천하인'으로 불렸다. 구세력의 저항에 직면하여 요시테루와의 싸움을 멈추고 그를 지원, 요시테루 - 호소카와 우지쓰나 - 나가요시 순으로 통치하는 체제로 전환했다. 나가요시는 요시테루와 우지쓰나가 꼭두각시인 동안 실질적인 권력을 쥐었다.[6]

나가요시는 렌카(連歌)를 즐기고 선불교에 심취했으며, 겐지 이야기와 같은 고전을 가까이한 풍류를 아는 무사였다. 또한 기독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유능한 동생들을 각지에 배치하여 거대해진 세력을 통치했으며, 오닌의 난 이후 황폐해진 교토를 부흥시키고 사카이를 대규모 무역항으로 정비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다.[6][7]

그러나 하타케야마 다카마사, 롯카쿠 요시카타 등 옛 세력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구메다 전투에서 동생 미요시 요시카타를 잃었고, 아들 미요시 요시오키와 동생들(소고 가즈마사, 아타기 후유야스)마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결국 미요시 나가요시 자신도 1564년 4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7]

미요시 나가요시 사후, 그의 양자인 미요시 요시쓰구가 가문을 이었으나, 요시쓰구는 어렸기 때문에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미요시 산닌슈가 실권을 잡았다. 나가요시와 그의 동생들이 잇따라 사망하고, 히사히데와 산닌슈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미요시 가문은 쇠퇴했다.[7]

1568년, 오다 노부나가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교토로 진격했다. 미요시 가문은 롯카쿠 요시카타를 끌어들여 저항했으나 실패했고(간논지 성 전투), 미요시 요시쓰구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노부나가와 내통하여 미요시 산닌슈는 패주했다. 노부나가는 교토를 장악하고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15대 쇼군으로 취임시켰다.

1573년, 시노하라 나가후사는 주군 미요시 나가하루와 호소카와 사네유키에게 거성인 가미자쿠라성을 공격받아 자결했다. (가미자쿠라성의 전투) 이로 인해 미요시 가문은 통솔력은 물론 아와에서의 지지도 잃었다.[8]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사관한 미요시 가문 후손들로는 미요시 야스나가(三好康長), 소고 마사야스(十河存保), 미요시 유키노부(三好幸信) 등이 있다.

2. 1. 미요시 가문의 기원과 초기 활동

미요시 가문은 겐지(源氏)의 후예로, 세이와 겐지(清和源氏)의 분파인 가와치 겐지(河内源氏)의 명문 오가사와라 씨(小笠原氏)의 서류(庶流)를 자처했다.[23][3] 아와국 미요시군(三好郡)을 본거지로 삼아 미요시 씨(三好氏)를 칭했다.[23] 다만, 이요국(伊予国)이나 구메(久米)의 지명과 관련하여 일족이 구메 씨(久米氏)를 칭했기 때문에, 고대 구미노 구니노미야쓰코(久味国造)의 후손인 구메노 아타이(久米直)에서 갈라져 나온 씨족으로 보는 설도 있다.[23]

가마쿠라 시대 후기부터 아와 국에서 활동했으며, 난보쿠초 시대(南北朝時代)에는 남조 측에서 활약하다가 북조 측의 호소카와 씨(細川氏)와 대립하기도 했다.[4] 그러나 남조가 불리해지자 무로마치 막부 성립 이후에는 호소카와 씨를 따랐다.[4] 아와에서는 호소카와 씨의 서류 중 하나인 아와 호소카와 가가 대대로 슈고(守護)를 맡았고, 미요시 씨는 그 피관(被官)으로써 세력을 떨쳤다.

사료에 처음 등장하는 미요시 씨는 '''미요시 시키부쇼유'''이다. 그는 간쇼 6년 (1465년)에 호소카와 나리유키의 봉공인으로서 이름이 보인다. 본래 시키부쇼유는 미요시 노나가의 아버지 미요시 나가유키(미요시 요시나가의 아들)로 비정되었지만, 최근에는 미요시군미마군 계 미요시 씨 (미요시 나가요시의 계통)와는 다른 적류로 여겨지고 있다.[11]

2. 2. 미요시 유키나가와 호소카와 스미모토

조로쿠 2년(1458년), 지용을 겸비한 무장으로 칭송받던 미요시 유키나가(三好之長)가 등장했다. 유키나가는 아와 호소카와 가문의 호소카와 나리유키에게 이름자 한 자를 받아 오닌의 난(応仁の乱)에 동군(東軍)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호소카와 가쓰모토의 아들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양자로 아와 호소카와 가문의 호소카와 스미모토가 입적되자, 그를 지지하며 각지를 전전하면서 무공을 쌓아 기나이(畿内)에서도 큰 영향력을 가졌다. 유키나가는 호소카와 경조가(細川京兆家)의 직속 신하로 편성되었지만, 아와 호소카와 가문과의 주종관계는 계속 유지되었다.[24]

무로마치 시대에 미요시 유키나가(三好之長)는 호소카와 씨를 섬기며 호소카와 스미모토를 지지했고, 긴키 지방과 시코쿠에서 군공을 세워 영향력을 얻었다.

1520년 1월, 호소카와 스미모토와 미요시 유키나가는 호소카와 다카쿠니의 영지인 셋쓰 고시미즈 성을 함락하고 교토를 탈환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도지인 전투에서 패배하여 유키나가는 참수되었고, 스미모토는 아와로 패주했다. 같은 해 6월, 스미모토도 아와에서 병사했다.[5]

2. 2. 1. 메이오 정변

호소카와 마사모토(細川政元)는 당시 실력자로, 제10대 쇼군(将軍)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稙)를 추방하였다. 이 사건은 메이오 정변(明応の政変)이라고 불리며, 마사모토는 제11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즈미(足利義澄)를 옹립한 뒤 '반(半) 쇼군'이라고까지 불릴 정도였다.[24]

2. 2. 2. 호소카와 다카쿠니, 오우치 요시오키와의 전투

에이쇼 4년(1507년), 호소카와 스미유키와 고자이 모토나가는 호소카와 마사모토를 살해하고 호소카와 교초 가문의 가독을 강탈한다(에이쇼의 혼란). 그 후 방해가 되는 같은 양자인 호소카와 스미모토를 미요시 유키나가와 함께 습격하여 오미로 쫓아냈다. 하지만 스미유키는 동족인 호소카와 다카쿠니, 호소카와 나오하루, 호소카와 마사카타 등의 반격으로 토벌되었다. 유키나가 등은 오미에서 교토로 귀환하여 스미모토와 함께 권세를 장악했다.[24]

1520년(영정 17년) 1월, 호소카와 스미모토와 미요시 유키나가는 호소카와 다카쿠니의 영지인 셋쓰로 침공하여 시모다나카 성의 성주 이케다 노부마사의 협력을 받아 와바야시 마사요리가 농성하는 고시미즈 성을 함락했다. 10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도 스미모토와 통했기 때문에 호소카와 다카쿠니는 단독으로 오미 사카모토로 도망쳤고, 미요시 유키나가는 교토를 탈환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호소카와 다카쿠니는 롯카쿠 사다요리 (오미)와 나이토 사다마사 (탄바)의 원군을 얻어 상락전을 시작했다. 스미모토와 유키나가는 군사를 모으지 못했고, 유키나가는 도지인 전투에서 패배하여 붙잡혀 참수되었으며, 셋쓰 이타미 성에 있던 스미모토도 아와로 패주했다. 같은 해 6월, 호소카와 스미모토도 아와에서 병사했다. 롯카쿠 사다요리는 상락을 달성했고, 후에 칸레이다이에 임명되었다.[5]

2. 2. 3. 호소카와 다카쿠니, 롯카쿠 사다요리와의 전투

에이쇼 4년(1507년),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암살당하고 호소카와 가문 내에서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에이쇼의 착란) 마사모토의 양자였던 호소카와 스미유키와 그의 집사 고자이 모토나가는 또 다른 양자인 호소카와 스미모토와 미요시 유키나가를 오미 국으로 몰아냈다. 그러나 스미유키는 호소카와 다카쿠니를 비롯한 다른 호소카와 가문 사람들의 반격으로 죽었다.[24]

유키나가는 스미모토와 함께 교토로 돌아와 권력을 잡았다.

2. 3. 미요시 모토나가와 호소카와 하루모토

미요시 유키나가의 손자 미요시 모토나가는 호소카와 스미모토의 아들 호소카와 하루모토를 지지하며 호소카와 다카쿠니를 몰아내고 교토를 탈환했다. 그러나 1532년 호소카와 하루모토와의 갈등, 기자와 나가마사와의 대립, 그리고 잇코잇키의 공격으로 인해 사카이의 겐폰지에서 자결했다.[5][24]

2. 3. 1. 호소카와 다카쿠니, 우라가미 무라무네, 아사쿠라 소테키와의 전투

1526년에 호소카와 다카쿠니가 가신 고자이 모토모리(香西元盛)를 살해하고 호소카와 집안에 내분이 일어나자, 미요시 유키나가의 손자 미요시 모토나가는 호소카와 스미모토의 아들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함께 아시카가 요시쓰나(사카이 공방)를 옹립하고 1527년에 가쓰라가와 전투에서 다카쿠니를 쳐부수고 교토를 탈환하였다.[24] 아시카가 요시하루는 호소카와 다카쿠니와 함께 오미로 달아났다.

1527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와 호소카와 다카쿠니는 아사쿠라 소테키(에치젠)의 지원을 받아 교토 상경을 완수하였다. (가와카쓰데라구치 전투) 그러나 이듬해 1528년 불화로 인해 아사쿠라 소테키가 에치젠으로 돌아가 버리고 교토는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미요시 모토나가가 탈환하였다.[24] 1529년에는 새로이 동료가 된 야나기모토 가타하루 등과 사이가 악화되어 아와에 틀어박혀버렸다.

1530년에 야나기모토 가타하루가 하리마 출전 도중에 진중에서 암살되고, 아시카가 요시하루와 호소카와 다카쿠니는 우라가미 무라무네나 기타바타케 하루토모(이세)와 제휴, 교토 상경에 성공하였다.

1531년, 호소카와 하루모토는 사카이 구보후(堺公方府)의 방위를 위해 미요시 모토나가를 불러들였고, 우라가미 무라무네의 군세를 저지시키는데 성공, 셋쓰 나카지마(中嶋)에서 전선은 교착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갑자기 우라가미 씨의 주력인 아카마쓰 마사노리(赤松政祐)가 호소카와 하루모토측에 내응해 호소카와 다카쿠니 · 우라가미 무라무네 군을 배후에서 공격했고, 호소카와 다카쿠니와 우라가미 무라무네는 전투에서 패배, 전사하고 말았다. 이를 오모노 쿠즈레라고 부른다.[24]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미요시 모토나가는 교토를 탈환하였다.

1532년, 호소카와 하루모토아시카가 요시하루와 화해를 추진하였고, 아시카가 요시쓰나를 비호해왔던 미요시 모토나가는 이간질을 시작하였다. 하타케야마 요시타카 (하타케야마 소슈 가)의 가신이었던 기자와 나가마사가 요시타카를 제치고 호소카와 하루모토에게 접근하였고 모토나가의 종삼촌인 미요시 마사나가도 호소카와 하루모토에게 동조하였다. 잇코잇키가 배후에서 모토나가를 습격해, 하타케야마 요시타카를 자결로 몰아갔고, 나아가 미요시 씨의 근거지였던 법화종(法華宗) 사찰 이즈미 겐혼지(和泉顕本寺)도 습격, 모토나가도 자결로 내몰리고 만다. (이이모리 산성 전투)[5]

2. 3. 2. 기자와 나가마사, 미요시 마사나가와의 전투

미요시 모토나가(三好元長)는 호소카와 하루모토를 도와 간레이가 되도록 하였고, 호소카와 가문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하루모토는 모토나가의 힘을 경계하여, 기자와 나가마사와 모토나가를 시기한 미요시 마사나가 등의 모함을 받아들였다. 1532년, 호케 종파를 후원하던 미요시 모토나가를 미워한 잇코잇키의 도움을 받아 하루모토는 사카이의 겐폰지에서 모토나가를 공격하여 자결하게 하였다. 이 사건으로 미요시 가문은 일시적으로 쇠퇴하였다.[5]

이 사건에 앞서, 1531년에는 오모노 붕괴라고 불리는 전투가 있었다. 호소카와 하루모토는 사카이 공방을 지키기 위해 미요시 모토나가를 불러들였고, 우라가미 무라무네의 군대를 막는 데 성공하여 셋쓰 나카지마에서 전선이 교착되었다. 그러나 아카마쓰 마사스케가 하루모토 측에 가담하여 호소카와 다카쿠니와 우라가미 무라무네 군을 뒤에서 공격했고, 다카쿠니와 무라무네는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하였다. 이로써 하루모토와 모토나가는 교토를 되찾았다.

2. 4. 미요시 나가요시와 호소카와 하루모토

미요시 모토나가의 아들 나가요시(長慶)는 호소카와 하루모토에게 반기를 들고, 미요시 마사나가를 격파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미요시 종가는 모토나가의 적남인 나가요시가 이었으나, 나가요시는 당시 10세로 어렸기 때문에 미요시 씨는 일시 후퇴하였다. 이후 교로쿠・덴분의 난의 혼란을 틈타 아와 공방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아시카가 요시하루와 화목하던 하루모토가 정권을 잡고, 하루모토의 측근으로 미요시 마사나가, 기자와 나가마사 등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나가요시는 성장하여 지용을 겸비한 무장으로 자랐고, 1539년 미요시 종가의 본거지를 아와국에서 셋쓰국 고시미즈성으로 옮겼다. 1549년 유사 나가노리의 원군을 얻은 나가요시는 호소카와 다카쿠니의 양자 우지쓰나를 옹립해 하루모토에게 반기를 들었고, 하루모토를 군사적으로 지지하던 미요시 마사나가를 셋쓰 에구치에서 쳐부수었다(에구치 전투).

이후 나가요시는 아시카가 요시테루와 대립했으나, 화해하고 막부의 실권을 장악하여 '천하인'으로 불렸다. 구세력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여 요시테루와의 싸움을 멈추고 그를 지원, 요시테루 - 우지쓰나 - 나가요시 순으로 통치하는 체제로 전환했다. 나가요시는 요시테루와 우지쓰나가 꼭두각시인 동안 실질적인 권력을 쥐었다.[6]

2. 4. 1. 기자와 나가마사, 미요시 마사나가와의 싸움

미요시 나가요시는 아버지 모토나가의 원수인 기자와 나가마사, 미요시 마사나가를 격파하기 위해 여러 전투를 벌였다.

나가요시는 성장하여 지용을 겸비한 무장이 되었고, 가와치 슈고다이로 기나이에 강한 세력을 떨치고 있던 유사 나가노리의 딸을 측실로 맞이했다. 1539년 미요시 종가의 본거지를 아와국에서 셋쓰국 고시미즈 성으로 옮겼다.

셋쓰에서 힘을 키운 나가요시는 시코쿠의 동생 미요시 짓큐, 아타기 후유야스, 소고 가즈마사 등과 협력하여, 1542년 아버지의 원수 세력들을 차례대로 격파하였다. 이 전투가 다이헤이지 전투이다.

1549년 나가요시는 유사 나가노리의 원군을 얻은 가운데 호소카와 다카쿠니의 양자 우지쓰나를 옹립해 호소카와 하루모토에게 반기를 들었고, 하루모토의 세력을 군사적인 측면에서 지지하고 있던 미요시 마사나가를 셋쓰의 에구치에서 쳐부수었다. 이 전투가 에구치 전투이다. 이 결과 아시카가 요시하루호소카와 하루모토오쓰로 달아나고 정권이 붕괴되었으며, 나가요시는 센고쿠 다이묘로써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6]

2. 4. 2. 호소카와 하루모토, 롯카쿠 사다요시와의 싸움

미요시 나가요시는 아버지보다 더 용감하고 지략이 풍부했다. 나가요시는 처음에는 호소카와 하루모토를 충실히 섬기는 가신이었다. 그러나 가와치 국의 ''슈고다이''였고 긴키 지방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유사 나가노리의 딸과 결혼하면서, 영향력이 아와 국뿐만 아니라 셋쓰 국까지 뻗어 있었다. 형제인 미요시 요시카타(아와), 소고 가즈마사(사누키), 아타기 후유야스와 협력하여 타이헤이-지 절 전투에서 아버지의 적인 기자와 나가마사와 미요시 나가마사 군대를 물리쳤다.[6]

1549년, 나가요시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시작했다. 장인의 지원을 받아 호소카와 다카쿠니의 아들 우지쓰나를 옹립하고 호소카와 하루모토에게 반기를 들었다. 하루모토를 군사적으로 지원하던 미요시 나가마사를 셋쓰 에나미에서 격파했다(에구치 전투). 나가요시의 힘을 두려워한 하루모토는 오쓰로 도망쳤고, 하루모토 정권은 붕괴되었다. 그 결과, 나가요시는 센고쿠 시대다이묘로 명성을 얻었다.[6]

나가요시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와도 싸워 그를 오미 국으로 몰아냈다. 그는 긴키 지방(셋쓰, 가와치, 야마토 국, 탄바 국, 야마시로 국, 이즈미 국)과 시코쿠(아와, 사누키, 아와지 국)의 총 9개 국과 하리마 국, 이요 국, 도사 국의 일부를 통치하는 ''다이다이묘''(더 큰 영지를 가진 다이묘)로 성장했다.[6]

2. 5. 미요시 정권

미요시 나가요시는 아버지 모토나가를 이어 미요시 종가를 이었으나, 당시 10세의 어린 나이였기에 미요시 씨는 일시적으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나가요시는 성장하여 지용을 겸비한 무장이 되었고, 가와치 국의 슈고다이이자 기나이에 강력한 세력을 가진 유사 나가노리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며 세력을 키웠다. 1539년에는 미요시 종가의 본거지를 아와 국에서 셋쓰 고시미즈 성으로 옮겼다.

나가요시는 시코쿠에 있던 동생 미요시 요시카타, 아와지 국의 아타케 후유야스, 사누키 국의 소고 가즈마사 등과 협력하여 아버지의 원수 세력들을 차례로 격파하고, 호소카와 하루모토 가문 내에서 아버지 이상의 세력을 쌓아올렸다. 1549년에는 유사 나가노리의 지원을 받아 호소카와 다카쿠니의 양자인 호소카와 우지쓰나를 옹립하고 하루모토에게 반기를 들었다. 셋쓰 에구치 전투에서 하루모토를 지지하던 미요시 마사나가를 격파하고,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와 하루모토는 오쓰로 달아나면서 하루모토 정권은 붕괴되었다. 이로써 나가요시는 센고쿠 다이묘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나가요시는 아시카가 요시테루와도 싸워 그를 오미 국으로 몰아내고, 기나이 지역(셋쓰, 가와치, 야마토 국, 단바 국, 야마시로 국, 이즈미 국)과 시코쿠(아와, 사누키, 아와지 국)의 9개 국과 하리마 국, 이요 국, 도사 국의 일부를 통치하는 거대 다이묘로 성장했다.

나가요시는 교토로 상경하여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며 최초의 ''천하인''으로 불렸고, 미요시 정권을 수립하려 했다. 그러나 구세력의 저항에 직면하여 요시테루와 화해하고, 요시테루를 지원하며 요시테루 - 우지쓰나 - 나가요시 순으로 통치하는 체제로 전환했다. 실질적인 권력은 나가요시가 쥐고 있었다.[6]

나가요시는 렌카(連歌)를 즐기고 선불교에 심취했으며, 겐지 이야기와 같은 고전을 가까이한 풍류를 아는 무사였다. 또한 기독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고, 불교(종파에 관계없이), 신토, 그리스도교 등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여 불교 내부의 대립(법화종과 일향종)도 잠잠해졌다. 유능한 동생들을 각지에 배치하여 거대해진 세력을 통치했으며, 오닌의 난 이후 황폐해진 교토를 부흥시키고 사카이를 대규모 무역항으로 정비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다.[6][7]

그러나 하타케야마 다카마사, 롯카쿠 요시카타 등 옛 세력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구메다 전투에서 동생 미요시 요시카타를 잃었고, 아들 미요시 요시오키와 동생들(소고 가즈마사, 아타기 후유야스)마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결국 미요시 나가요시 자신도 1564년 4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7]

2. 5. 1. 아시카가 요시테루, 롯카쿠 사다요리와의 화해

덴분 21년(1552년) 1월, 미요시 나가요시는 호소카와 우지쓰나를 간레이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아시카가 요시테루와 화해하고 요시테루는 교토로 돌아왔다. 이듬해 덴분 22년(1553년) 요시테루는 하루모토와 협력하여 나가요시와의 전투를 시도하였으나 패하고 다시금 오미구키로 달아났고 이후 5년 동안을 이 땅에서 보냈다. 망명 중이던 덴분 23년(1554년) 2월 12일에 이름을 요시테루로 바꾸었다.[1]

에이로쿠 원년(1558년) 나가요시는 아시카가 요시테루와 화해하고 막부 상반중으로써 제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추대, 요시테루 - 호소카와 우지야스 - 미요시 나가요시라는 체제로 이행하였다. 그러나 실권은 여전히 나가요시가 쥐고 있었고 나가요시는 이후 제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추대한 오다 노부나가와 마찬가지로、상락해 머무르고 있던 무로마치 쇼군의 역할인 기나이 지역의 지배와 지방 다이묘의 통제를 직접적으로 맡은, 센고쿠 시대 최초의 천하인이라 불리게 된다.[1]

2. 5. 2. 미요시 정권의 거점


  • 미요시 당주
  • * 미요시 나가요시 - (아와 시바후성 → 셋쓰 코시미즈성 → 셋쓰 아쿠타가와야마성 → 가와치 이모리야마성)
  • * 미요시 요시오키 - (셋쓰 아쿠타가와야마성)
  • * 미요시 요시쓰구 - (가와치 이모리야마성 → 가와치 타카야성 → 가와치 와카에성)
  • 친족의 거점
  • * 미요시 지카히사 - (아와 쇼즈이성 → 가와치 타카야성)
  • * 소고 카즈토미 - (사누키 소고성 성주)
  • * 아타기 후유야스 - (아와지 스모토성 성주)
  • 정권 붕괴 후
  • * 미요시 나가하루 - (아와 쇼즈이성 성주)
  • * 소고 마사야스 - (아와 쇼즈이성→소고성→히키타성)
  • 인척 일족의 거점
  • * 유사 나가노리 - (가와치 와카에성 성주)
  • * 하타노 히데타다 - (단바 야가미성)
  • 정치적 숙적들의 거점
  • * 키자와 나가마사 - (가와치 이모리야마성, 야마토 시키산성) - 1542년 전사
  • * 미요시 마사나가 - (셋쓰 에나미성) - 1549년 전사
  • * 벳쇼 나리하루 - (하리마 미키성 성주) - 1555년 항복
  • * 하타케야마 타카마사 - (가와치 타카야성) - 1560년 성 함락
  • * 롯카쿠 요시카타 - (오미 칸논지성)

2. 5. 3. 다카모리와 일족의 죽음

미요시 나가요시는 렌카(連歌)를 즐기고 선불교에 심취했으며, 겐지 이야기와 같은 고전을 가까이한 풍류를 아는 무사였다. 또한 기독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고, 불교(종파에 관계없이), 신토, 그리스도교 등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여 불교 내부의 대립(법화종과 일향종)도 잠잠해졌다. 유능한 동생들을 각지에 배치하여 거대해진 세력을 통치했으며, 오닌의 난 이후 황폐해진 교토를 부흥시키고 사카이를 대규모 무역항으로 정비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다.[6][7]

그러나 하타케야마 다카마사, 롯카쿠 요시카타 등 옛 세력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구메다 전투(지금의 기시와다 시)에서 동생 짓큐를 잃었고, 아들 요시오키와 동생들(소고 가즈마사, 아타기 후유야스)마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결국 미요시 나가요시 자신도 1564년 4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7]

나가요시 사후, 미요시 가문 출신의 양자인 미요시 요시쓰구가 가문을 계승했다. 그러나 요시쓰구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가로(수석 가신)였던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미요시 산닌슈(미요시 가문의 세 명의 수석 가신)가 실권을 잡았다. 나가요시와 그의 동생들의 연이은 죽음, 그리고 히사히데와 산닌슈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미요시 가문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7]

2. 6. 미요시 나가요시 사후의 미요시 가문

미요시 나가요시 사후, 그의 양자인 미요시 요시쓰구가 가문을 이었으나, 요시쓰구는 어렸기 때문에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미요시 산닌슈가 실권을 잡았다. 나가요시와 그의 동생들이 잇따라 사망하고, 히사히데와 산닌슈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미요시 가문은 쇠퇴했다.[7]

2. 6. 1. 쇼군 암살

나가요시 사후, 미요시 가문의 가독은 나가요시의 조카이자 양자인 미요시 요시쓰구(소고 가즈마사의 아들)가 이었다. 그러나 요시쓰구는 나이가 어려, 미요시 정권은 요시쓰구의 후견인이었던 미요시 나가야스, 미요시 마사야스, 이와나리 도모미치 등 미요시 산닌슈(三好三人衆)와 마쓰나가 히사히데에 의한 연립 정권이 수립되었다.

한편, 나가요시의 꼭두각시로써 군림하고 있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나가요시의 죽음을 호기로 보고, 이전부터 친밀한 관계에 있던 우에스기 겐신, 다케다 신겐, 아사쿠라 요시카게 등 여러 다이묘들에게 교토 상경을 명하여 막부 재건을 목표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 나갔다. 이러한 요시테루의 활동에 위기감을 느낀 미요시 산닌슈는 결국 에이로쿠 8년 5월 19일, 쿠데타를 일으켜 쇼군 요시테루를 니조성에서 암살했다(에이로쿠의 변).

2. 6. 2. 내분, 정권 붕괴

에이로쿠의 변 이후, 미요시 산닌슈는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세력을 경계하여, 1565년 12월 쓰쓰이 준케이 등과 손잡고 히사히데를 공격했다(쓰쓰이 성 전투). 이로 인해 양측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히사히데의 동생 나가요리는 하기노 나오마사에게 패배하여 단바를 잃었다.

한편,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동생 가쿠케이(覚慶)는 1566년 환속하여 '''아시카가 요시아키'''로 개명하고 사바노카미에 임명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미요시 산닌슈는 아시카가 요시쓰나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쇼군 후보로 옹립, 1567년 요시히데도 사바노카미에 서임되었다.

1566년 9월, 미요시 산닌슈는 미요시 요시쓰구를 옹립하고 미요시 나가하루, 시노하라 나가후사, 미요시 쇼간, 호소카와 사네유키, 아시카가 요시히데 등과 함께 히사히데에 대항하여 우세를 점했다. 그러나 1567년 4월, 요시쓰구가 히사히데에게 투항하면서 전세가 불리해졌다(도다이지 대불전 전투). 시노하라 나가후사는 고시미즈 성을 거점으로 각지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루이스 프로이스는 그의 저서 『프로이스 일본사』에서 "아와 국에서 절대적 권력을 가진 집정"이라고 기록했다.

1568년 2월, 아시카가 요시히데가 제14대 쇼군에 취임했다.

2. 6. 3. 오다 노부나가와의 전쟁

1568년 9월, 오다 노부나가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교토로 진격했다. 미요시 가문은 롯카쿠 요시카타를 끌어들여 저항했으나 실패했고(간논지 성 전투), 미요시 요시쓰구마쓰나가 히사히데는 노부나가와 내통하여 미요시 산닌슈는 패주했다. 시노하라 나가후사도 고시미즈 성을 버리고 아와로 물러났다. 노부나가는 교토를 장악하고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15대 쇼군으로 취임시켰다.

1569년 1월, 미요시 산닌슈 중 한 명인 미요시 쇼간은 아와에서 상륙해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급습했으나 실패했다. 이를 혼고쿠지의 변이라고 한다.

1570년 7월, 미요시 산닌슈와 미요시 쇼간 등은 다시 아와에서 상륙하여 노다·후쿠시마에서 노부나가와 격돌했다. 혼간지의 도움으로 노부나가는 격퇴되었고, 오미에서도 전란이 일어났다. 그해 9월, 노부나가는 철퇴했다. 비슷한 시기, 시노하라 나가후사는 아와·사누키 군사 2만을 이끌고 셋쓰로 상륙하여 셋쓰, 이즈미를 석권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오기마치 천황에게 강화를 요청하여 11월 30일에 대화가 시작되었고, 12월 14일에 화친이 성립되었다. 아자이 나가마사, 아사쿠라 요시카게, 롯카쿠 요시카타와 함께 나가후사도 아와로 군사를 물렸다.

1571년 5월, 시노하라 나가후사는 우라가미 무네카게의 요청으로 비젠 고지마 군에 상륙하여 혼타 성 전투를 벌였다. 9월에는 셋쓰로 상륙, 아라키 무라시게, 나카가와 기요히데, 미요시 요시쓰구,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함께 와다 씨의 다카쓰키 성을 포위하여 시라이가와라 전투를 벌였다.

1572년 무렵, 아시카가 요시아키와도 반(反) 오다 노부나가 노선이 일치했다. 1573년 무렵에는 미요시 가문의 세력 범위가 요도 고성이 있는 야마시로까지 이르렀다.

2. 6. 4. 본국 아와, 사누키의 붕괴

겐키 4년(1573년) 5월, 시노하라 나가후사는 주군 미요시 나가하루와 호소카와 사네유키에게 거성인 가미자쿠라성을 공격받아 7월에 자결했다. (가미자쿠라성의 전투) 이로 인해 미요시 가문은 통솔력은 물론 아와에서의 지지도 잃었다. 지배하에 있던 사누키의 고쿠진인 가가와 씨, 코자이 씨를 비롯해 본국 아와의 고쿠진들까지 미요시 씨를 등지게 되었다.[8]

본국 아와의 원군을 얻을 수 없게 된 미요시 삼인중, 미요시 쇼간, 미요시 요시쓰구,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기나이에서 고립되었다. 미요시 삼인중은 오다 노부나가에게 계속 저항했으나, 덴쇼 원년(1573년) 말까지 차례로 패하고 흩어졌다. (제2차 요도 고성의 전투)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당주 미요시 요시쓰구도 같은 해 11월에 노부나가에게 공격받았다. (와카에성의 전투) 덴쇼 2년(1574년) 1월,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항복하고, 덴쇼 3년(1575년) 4월에는 혼간지의 지원을 받던 신보리성(셋쓰)의 소고 이치코와 코자이 나가노부가 패사하고, 다카야성(가와치)의 미요시 쇼간도 항복하여(다카야성의 전투) 미요시 씨는 미요시 나가요시가 쌓아 올렸던 기나이에서의 세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그 뒤 기나이에서 완전히 철수한 아와 미요시 씨 당주 미요시 나가하루는 덴쇼 5년(1577년)에 초소카베 모토치카의 조력을 얻은 호소카와 사네유키와 아와 아라타노에서 싸워 전사하고, 나가하루의 죽음으로 아와에 남아 있던 아와 미요시 씨는 멸망하였다. 남아있던 미요시 일족은 사누키의 소고 마사야스뿐이었다. 같은 해 5월에 소고 마사야스가 아와 쇼즈이성에 들어왔고, 동시에 미요시의 옛 영지였던 아와, 사누키를 영유하는 것도 조소카베씨에게 아와 일부를 침략당하였다. 거의 미요시 단독으로는 맞설 수 없을 정도로 세력을 떨치고 있던 조소카베 씨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마사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항복, 오다 정권 산하의 다이묘가 되었다.[4]

2. 7. 그 뒤의 미요시 가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사관한 미요시 가문 후손들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 '''미요시 야스나가(三好康長)'''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 되어 가와치 국 일부의 영지를 받았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의 조카를 양자로 맞았으나, 훗날 양자 관계가 해소되어 이후 소식은 알 수 없게 되었다. 야스나가의 가신들은 와카에 8인중(若江八人衆)으로서 야스나가의 양자가 된 히데요시의 양자 도요토미 히데쓰구(秀次)에게 출사하였다.

  • '''미요시 요시스케(三好義資)'''


미요시 요시오키의 적남으로, 미요시 야스나가의 조카인 히라타 무라아키(横田村詮)를 의지해 미코(米子)로 옮겨갔다. 그러나 미코 소동(米子騒動)으로 히라타 일족이 멸망당하고 요시스케의 아들 요시쓰구(義紹)도 이 전투 와중에 전사하였다. 살아남은 요시쓰구의 장남 요시노부는 성을 이나다(稲田)로 바꾸고 귀농했으며, 둘째 아들 나가마사(長政)는 성을 바꾸고 조닌(町人)이 되었다.

  • '''소고 마사야스(十河存保)'''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이후에 "미요시 요시카타(三好義堅)"로 이름을 바꾸고 미요시 씨를 계승할 의사를 표명하였으나[25] 조소카베 모토치카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1584년 6월에 소고 성(十河城)과 도라마루 성(虎丸城)은 함락, 마사야스는 오사카(大坂)의 하시바 히데요시를 의지해 내려갔다(제2차 소고 성 전투). 훗날 도요토미 씨(豊臣氏)에 의한 시코쿠 공격 이후의 국분(国分) 과정에서 사누키 국내에 영지를 받고 "소고 씨(十河氏)"의 이름으로 존속하게 되었는데 이는 동시에 히데요시의 방침에 의한 것으로 "미요시 씨"의 계승권을 부정한다는 것이었다.[26] 그 지위도 도요토미 씨 휘하의 센고쿠 히데히사(仙石秀久)의 기기(寄騎)라는 취급이었다. 그 뒤 마사야스는 1586년규슈 헤쓰기가와 전투(戸次川の戦い)에서 센고쿠 씨를 따라 종군하였으나 전사하고 개역당하였다. 마사야스의 적남 소고 지주마루(十河千松丸)는 사누키의 영지를 받은 이코마 지카마사(生駒親正)에게 길러졌으나 히데요시를 알현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1615년에 마사야스의 아들 소고 마사히데(十河存英)는 오사카 여름의 진(大坂夏の陣)에서 전사하였다.

  • '''미요시 후사카즈(三好房一)'''


야스나가의 가신으로 히데요시에게 출사하여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이후에는 에도 막부(江戸幕府)의 하타모토(旗本)가 되어 2,300석을 영지로 거느렸으나 후사가 없어서 폐절되었다.

미요시 마사나가의 계통으로, 도쿠가와 씨(徳川氏)에 출사해 그 자손도 하타모토로서 존속했다. 그의 형인 미요시 산닌슈(三好三人衆) 중 한 명인 미요시 소이(三好宗渭)는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기나이에서 쫓겨난 뒤의 동향을 알 수는 없지만 미요시 요시쓰구의 누이동생의 아들(친아버지는 다라오 쓰나토모多羅尾綱知)에 해당하는 미요시 이카쓰(三好生勝)를 길렀다고 전하고 있다. 이카쓰는 오다 노부나가에 이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출사한 뒤에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의 가신이 되어 그 자손은 아자이 씨(浅野氏)에 출사해 히로시마 번(広島藩)의 번사로써 막부 말기까지 존속하였다. 이밖에도 다이묘 가문에 출사하여 살아남은 서출 계통의 미요시 후손도 존재하고 있다.

  • '''미요시 요시카네(義兼)와 미요시 요시시게(義茂) 형제'''


가가와 현(香川県)의 전승에 따르면, 본류인 미요시 요시쓰구의 적남 요시카네와 차남 요시시게 형제는 사누키 국 이부키 섬(伊吹島)으로 달아나서 그곳에 토착하였다고 한다. 이코마 씨(生駒氏)가 사누키를 다스리던 시대에 요시카네의 손자 요시키요(義浄)는 이코마 씨로부터 만도코로(政所)가 발급한 오스미쓰키(お墨付き)을 받았고 이후 대대로 사쿠고에몬(作右衛門)이라는 이름을 써 왔다고 한다. 이부키 섬의 이부키 하치만 신사(伊吹八幡神社)에는 오늘날에도 80기(騎)까지 줄어든 요시카네 주종(主従)이 이부키 섬에 와서 신궁에 맹서의 글을 바쳐 올리는 모습을 그린 에마(絵馬)가 남아 있다.

  • '''미요시 나가모토(三好長元)'''


요시쓰구의 셋째 아들로, 그 아들 미요시 나가쓰구(三好長継)는 미요시 나가야스(三好長逸)의 딸을 계실로 맞이하였다. 나가쓰구와 나가야스의 딸 사이에 태어난 미요시 와카사노카미(三好若狭守)는 사에키 번(佐伯藩) 번주 모리 다카마사(毛利高政)에게 출사해 모리라는 묘지(名字)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받고 그 중신이 되었다. 와카사노카미의 자손은 사에키 번사 미요시 씨로써 이어졌다. 다만 연대적으로는 맞지 않는 부분도 있어서 나가모토는 요시쓰구의 셋째 아들이 아니라 미요시 집안 서류 일족 사람으로 보는 설도 있다.

  • '''후료인(品量院)'''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의 다섯째 아들 마쓰다이라 나오모토(松平直基)의 어머니로, "미요시 에치고노카미 나가토라(三好越後守長虎)"라는 자의 딸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에치고노카미 나가토라가 나가야스의 아들 나가토라(長虎)와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있으나 알 수 없다.

  • '''미요시 유키노부(三好幸信)'''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 료세이인(隆清院)은 미요시 야스나가(三好康長)의 양자가 되기도 했던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의 딸이다. 사나다 성(真田姓)을 쓰는 것을 꺼려서 외할아버지인 히데쓰구의 옛 성인 미요시 씨를 칭한 것으로 미요시 사지로(三好左次郎)라 하였다. 그 뒤 이와시로 노부타카(岩城宣隆)에게 출사하여 미요시 사마노스케 유키노부(三好左馬之介幸信)라 칭하였다.

3. 주요 인물

4. 미요시 가문의 주요 성


  • 아쿠타가와야마성
  • 이이모리야마성
  • 쇼즈이성
  • 기시와다성
  • 시기산성
  • 다키야마성
  • 쇼류지성

참조

[1] 웹사이트 武家家伝_三好氏 http://www2.harimaya[...] .harimaya.com null
[2] 문서 Matsunaga clan#Yamato Matsunaga clan
[3] 웹사이트 Miyoshi clan roots https://japanese-wik[...] 2020-12-02
[4] 웹사이트 Emergence of the Miyoshi https://japanese-wik[...] 2020-12-02
[5] 웹사이트 Miyoshi clan https://japanese-wik[...] 2020-12-02
[6] 웹사이트 Golden Age of the Miyoshi https://japanese-wik[...] 2020-12-02
[7] 웹사이트 Decline of the Miyoshi clan https://japanese-wik[...] 2020-12-02
[8] 웹사이트 Downfall of the Miyoshi https://japanese-wik[...] 2020-12-02
[9] 웹사이트 Miyoshi after the collapse of the clan https://japanese-wik[...] 2020-12-02
[10] 문서 2017-03
[11] 서적 三好長慶 ミネルヴァ書房 2014
[12] 논문 細川澄元陣営の再編と上洛戦 吉川弘文館 2016
[13] 간행물 地下家伝 第27-33 (日本古典全集 ; 第6期) https://dl.ndl.go.jp[...] 日本古典全集刊行会 1937
[14] 문서
[15] 논문 三好氏の権力基盤と阿波国人 清文堂 2006
[16] 웹사이트 「最初の天下人」三好長慶の子孫健在 広島藩の要職歴任 信長や秀吉の文書守る https://www.topics.o[...] 徳島新聞 2021-12-18
[17] 간행물 地下家伝 第27-33 附録1・目録1 (日本古典全集 ; 第6期) https://dl.ndl.go.jp[...] 日本古典全集刊行会 1937
[18] 문서 寛政重修諸家譜
[19] 문서
[20] 문서
[21] 문서
[22] 문서
[23] 웹사이트 三好氏の動向と系譜 http://wwr2.ucom.ne.[...] 2002
[24] 논문 細川澄元陣営の再編と上洛戦 吉川弘文館 2016
[25] 문서
[26] 논문 三好氏の権力基盤と阿波国人 清文堂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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