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사의 카롤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바사의 카롤라는 183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스웨덴 바사 공작 구스타프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1853년 작센의 알베르트 왕자와 결혼하여 작센 왕세자빈이 되었으며, 1873년 알베르트가 작센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다. 카롤라는 자선 사업에 헌신하여 '국가의 어머니'라는 칭송을 받았으며, 간호사 양성 및 여성 직업 교육을 지원했다. 1902년 남편과 사별한 후 1907년 드레스덴에서 사망했으며, 그녀의 이름을 딴 다양한 지명과 기념물이 존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홀슈타인고토르프가 - 아돌프 프레드리크
아돌프 프레드리크는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이자 1751년부터 1771년까지 스웨덴 국왕으로, 하타르나당과 뫼소르나당의 당파 싸움 속에서 왕권이 약화된 시기를 통치했으며, 정치적 무능력으로 평가받지만 과학과 예술에 관심을 가졌다. - 홀슈타인고토르프가 - 카를 프리드리히 폰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 폰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은 스웨덴에서 태어나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위를 계승했고, 러시아 여대공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며, 그의 아들은 훗날 러시아 차르가 되었다. - 스웨덴의 왕녀 - 스웨덴 공주 비르지타
스웨덴 공주 비르지타는 구스타프 6세 아돌프 국왕의 손녀이자 베스터보텐 공작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와 사코부르크고타 공주 시빌라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딸로, 체조 교사, 호엔촐레른 왕자와의 결혼, 왕실 활동, 골프, 자선 활동, 회고록 출판, 다큐멘터리 출연 등의 활동을 했으며, 스페인 마요르카에서 사망했다. - 스웨덴의 왕녀 - 외스테르예틀란드 여공작 에스텔 공주
2012년 빅토리아 왕세녀와 다니엘 왕자 사이에서 태어난 스웨덴의 외스테르예틀란드 여공작 에스텔 공주는 스웨덴 왕위 계승 서열 2위이며, 여성으로서 확정적인 왕위 계승권을 가진 최초의 인물로서 미래 스웨덴 여왕의 역할을 준비하고 있다. - 베틴가 - 아우구스트 3세
아우구스트 3세는 폴란드 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 작센 선제후였으며,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으로 왕위에 올라 예술과 건축을 후원했지만, 폴란드 문제에는 소극적이었고 통치 기간을 하인리히 폰 브륄에게 위임했다. - 베틴가 - 아우구스트 2세
아우구스트 2세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로서 1697년부터 1706년, 1709년부터 1733년까지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를 지냈으며, 폴란드 왕위를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 대북방 전쟁에 참여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러시아 영향력 아래 두었고 드레스덴을 문화 중심지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바사의 카롤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정식 이름 | 카롤리네 프리데리케 프란치스카 스테파니 아말리에 체칠리에 |
출생일 | 1833년 8월 5일 |
출생지 | 쇤브룬 궁, 오스트리아 제국, 빈 |
사망일 | 1907년 12월 15일 |
사망지 | 독일 제국, 작센 왕국, 드레스덴 |
매장지 | 독일 제국, 작센 왕국, 드레스덴, 카톨릭 궁정 교회 |
종교 | 개신교 → 로마 가톨릭교회 |
결혼 정보 | |
배우자 | 알베르트, 작센 왕 |
결혼일 | 1853년 6월 18일 |
결혼 장소 | 드레스덴 |
왕족 정보 | |
가문 | 홀슈타인-고토르프 가 |
아버지 | 스웨덴 왕세자 구스타프 |
어머니 | 루이제 폰 바덴 |
왕비 정보 | |
왕비 칭호 | 작센 왕비 |
재위 기간 | 1873년 10월 29일 - 1902년 6월 19일 |
서명 |
2. 스웨덴 왕족 시절 (1833년 ~ 1853년)
카롤라는 1833년 8월 5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쇤부른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스웨덴의 전 왕태자였던 바사 공작 구스타프이고, 어머니는 루이제 아말리에 폰 바덴 대공녀이다. 아버지는 1809년 스웨덴 쿠데타로 인해 스웨덴을 떠나 오스트리아 군인으로 복무했으며,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란츠 1세 황제로부터 바사 공작 칭호를 받았다. 카롤라는 스웨덴의 구스타프 4세 아돌프 국왕과 프레데리케 폰 바덴 대공녀의 손녀이기도 하다.
1850년대 초, 카롤라는 유럽에서 아름다운 왕녀 중 한 명으로 알려졌다. 당시 신부를 찾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황제가 그를 후보로 고려하기도 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혼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카롤라는 1852년 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했으며, 1853년 6월 18일 드레스덴에서 작센 왕국의 알베르트 왕자와 결혼하였다.
2. 1. 어린 시절
카롤라는 1833년 8월 5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쇤부른궁 별관인 Kaiserstöcklde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스웨덴의 전 황태자이자 오스트리아 육군 원수였던 구스타프 바사 공자이고, 어머니는 루이제 아멜리에 공주였다. 그녀에게는 1832년에 태어나 사망한 오빠 루이 왕자가 있었기에, 카롤라는 부모 사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녀였다. 아버지 구스타프는 1809년 스웨덴 쿠데타로 망명하여 오스트리아 군인으로 복무했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란츠 1세 황제로부터 바사 공작 칭호를 받았다. 카롤라는 스웨덴의 구스타프 4세 아돌프 국왕과 프레데리케 폰 바덴 대공녀의 손녀이기도 하다. 카롤라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바사 왕조 출신은 아니었다. 그녀는 스웨덴 홀슈타인-고토르프 왕가의 일원이었던 아버지로부터 이 이름을 물려받았는데, 아버지는 더 이상 "스웨덴의 왕자" 칭호를 쓸 수 없게 되자 바사라는 별명과 함께 ''바사-홀슈타인-고토르프''라는 성을 사용했다. 카롤라도 이 성을 물려받았다.1833년 8월 7일 쇤부른 궁전에서 복음주의 세례를 받았으며, 전체 이름은 ''카롤린 프리데리케 프란치스카 스테파니 아멜리에 체칠리에''였지만 어머니는 그녀를 "카롤라"라고 불렀다. 대부모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와 그의 아내 카롤린 아우구스타 황후, 외할머니인 바덴의 스테파니 과부 여대공, 고모인 올덴부르크의 세실리아 여대공 등 왕족 대표들이었다. 그녀는 대부모, 할머니 프레데리카, 또 다른 고모 스웨덴의 아말리아 공주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1844년 여름 부모가 이혼하기 전까지, 카롤라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부모가 거주했던 남부 모라비아의 베베르지 성에서 보냈다. 그녀는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여겨졌으며, 엄격한 방식으로 교육받았지만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부모가 헤어진 후, 카롤라는 1846년 8월 어머니와 함께 모라베츠 성에 정착했다. 아말리에 폰 웅게른-슈테른베르크가 공주의 교육을 맡았다. 카롤라는 그림, 회화, 체스를 좋아했지만 음악에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직접 연극을 공연하는 것을 즐겼다. 모라베츠에서의 시골 생활은 대체로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이 시기에 젊은 공주는 가난하고 병든 아이들에게 깊은 연민을 느껴, 어머니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음식과 옷을 기증하기 시작했다. 이는 훗날 그녀가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한 자선 활동에 헌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어머니가 천식과 심장 질환으로 인해 온천 여행을 가거나 만하임, 카를스루에의 친척들을 방문하면서 종종 생활이 중단되기도 했다.
1848-1849년 이탈리아 독립 전쟁 동안에는 선물을 보내 헝가리 부상병을 지원했다. 어머니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어 모녀는 메라노, 베네치아, 볼차노, 바덴-바덴 등지의 온천을 자주 방문해야 했다. 1851년, 18세가 된 카롤라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 중 한 명으로 꼽혔으며, 유화 그리기에 몰두했다.
1852년, 카롤라는 아버지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아버지는 딸이 카를스루에에 있는 그의 여동생이자 카롤라의 고모인 바덴의 소피 여대공과 함께 종교 교육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마지못해 동의했다. 카롤라는 교육을 마친 후 어머니에게 돌아와 그 해 11월 4일, 모라베츠의 본당에서 가톨릭 신앙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2. 2. 가톨릭 개종과 결혼
카롤라는 1850년대 초반에 유럽에서 아름다운 왕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신부를 물색하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황제도 카롤라를 후보로 고려했다. 카롤라는 자신의 외할머니였던 스테파니 드 보아르네를 통해 보나파르트 가문과 인연이 있었다. 하지만 카롤라의 아버지였던 구스타프가 프랑스 제국의 위험성을 이유로 혼담에 반대했기 때문에 약혼은 성립하지 않았다.카롤라는 1852년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신교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했다.
한편, 작센 왕국의 알베르트 왕자는 1850년부터 신부를 찾고 있었다. 1852년 11월, 알베르트 왕자는 사냥 여행을 구실로 모라베츠를 방문하여 카롤라를 만났고, 그녀의 우아함과 재치 있는 대화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1] 알베르트의 아버지이자 후계자가 같은 종교를 가진 이와 결혼하기를 원했던 요한 공자는 카롤라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 아들을 위해 카롤라의 손을 청했다. 알베르트는 카롤라에게 구애했던 나폴레옹 3세가 자신을 가로막을까 봐 염려했으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카를 공자 역시 카롤라의 손을 얻기 위한 경쟁자였다. 카롤라는 1852년 12월 5일 알베르트의 청혼을 수락하여 같은 날 공식적으로 약혼했다.

알베르트와 카롤라의 결혼 발표는 작센에서 처음에는 큰 지지를 얻지 못했는데, 이는 카롤라가 약혼 직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한 공자는 신부에 대한 일부의 부정적 시선보다는 아들의 행복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재정적인 이유로 결혼을 반대하는 의견도 일축했다. 1853년 1월, 카롤라는 어머니와 함께 브르노로 이사했고, 알베르트는 그곳을 자주 방문했다. 카롤라는 무도회, 연극 관람 등 사교 활동을 통해 엄격한 스페인식 의전이 적용되는 작센 왕가에서의 미래를 준비했다.
카롤라는 1853년 6월 18일 드레스덴에서 알베르트 왕자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6월 18일 정오경 대정원 궁전(Palais im Großen Gartende)에서 열렸고, 이후 요제프 디트리히 주교가 드레스덴 대성당에서 가톨릭 결혼식을 집전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3. 작센 왕세자빈 시절 (1854년 ~ 1873년)
1854년 8월 9일, 시아버지 요한이 작센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2세의 뒤를 이어 작센 국왕으로 즉위하면서[2] 남편 알베르트는 왕세자가 되었고, 카롤라는 작센의 왕세자빈이 되었다.
왕세자빈으로 지낸 1854년부터 1873년까지의 기간 동안, 카롤라는 작센 왕국 내외의 여러 공식 활동에 참여했으며, 특히 두 차례의 주요 전쟁(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겪으며 부상병 간호와 구호 활동에 적극적으로 헌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그녀의 자선 활동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3. 1. 평화로운 시기
1854년 3월, 카롤라는 모라베츠에서 병세가 위중했던 어머니 루이제 아말리에 폰 바덴 대공녀를 방문했지만, 어머니는 같은 해 7월 19일 폐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약 3주 뒤인 8월 9일에는 작센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2세 국왕이 티롤 여행 중 마차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2] 이에 따라 카롤라의 시아버지인 요한이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남편 알베르트는 왕세자가 되었다. 카롤라 역시 왕세자빈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왕세자빈이 된 후 몇 년 동안 카롤라와 알베르트 부부는 작센 국내는 물론 해외 여러 지역을 수개월에 걸쳐 여행했다. 주요 방문지로는 스위스, 이탈리아, 그리고 오스트리아 등이 있었다. 1855년 겨울부터는 어려운 형편에 처한 교사 미망인과 고아들을 지원하는 '작센 페스탈로치 협회'의 후원자로서 사회 활동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1859년에는 부부가 시골 지역인 슈트렐렌의 왕실 빌라로 거처를 옮겼다. 1860년 11월, 홍역을 앓고 회복한 뒤에는 피아노 연주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다시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점점 심해지는 근시 때문에 이전에 즐기던 승마는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3. 2.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
1866년 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독일 내 주도권을 둘러싼 전쟁의 기운이 감돌았다. 작센 군대는 5월 19일 알베르트 공의 지휘 아래 동원되었다. 작센 왕국은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프로이센은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 문제 등에서 자신들의 요구를 내세웠으나, 프랑크푸르트의 연방 의회는 이를 거부했다. 작센은 프로이센 주도의 새로운 동맹 참여를 거부하고 독일 연방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했다. 이에 프로이센은 1866년 6월 15일 작센에 선전포고를 했다.작센은 전쟁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군대를 보헤미아로 이동시켜 오스트리아 북부군에 합류시켰다. 카롤라와 알베르트는 프라하에 머물렀다. 알베르트는 군대를 지휘했고, 카롤라는 카를로보 남예스티의 병원에 있는 부상병들을 돌보는 데 헌신하기 시작했다. 프라하가 전쟁터가 될 위험에 처하자 부부는 레겐스부르크로 이동했고, 7월 3일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독일 연방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빈으로 피신했다.
고향인 빈에서 카롤라는 최대 5,000명에 달하는 부상병들을 돌보는 데 전념했다. 그녀는 부상병들의 식사와 의료 지원을 직접 챙기고, 의료 장비를 기증했으며, 중상자들 곁에서 하루에 몇 시간씩 머물며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책과 게임을 나눠주고, 부상병들이 가족과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10월 21일, 베를린에서 프로이센과 작센 간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자 카롤라와 알베르트는 11월에 드레스덴으로 돌아왔다.
3. 3. 자선 활동의 시작
전쟁의 경험에 충격을 받은 카롤라는 귀국 후, 몇 년 전에 협상되었던 제네바 협약의 형성에 기여하고자 부상자 간호에 대한 헌신을 더욱 강화했다. 1867년 9월 14일, 카롤라는 마리 지몬과 함께 남편 알베르트의 이름을 딴 알베르트 협회(Albertvereinde)를 설립했다.이 협회는 1869년부터 주로 간호사 훈련에 전념했으며, 이를 통해 초교파 자매 공동체인 '알베르티네스'가 탄생했다. 알베르티네스의 교육은 중심 교육기관 역할을 한 요한슈타트(Johannstadtde)의 "카롤라 하우스"(Carolahausde)와 라이프치거 토어(Leipziger Torde)의 이전 게이트 하우스(Torhäuserde)에서 카롤라의 후원 아래 이루어졌다. 이들은 지역 병원에서도 활동했다. 또한, 훈련받은 간호사들은 1877년부터 1878년까지 이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하는 군 병원에도 파견되었다.
3. 4.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년 여름,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분쟁으로 북독일 연방(작센은 1866년부터 회원국)과 프랑스 제2 제국 사이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했다. 7월 16일, 프로이센의 동맹국으로서 작센의 왕세자였던 알베르트는 작센 군대를 동원하여 라인 전선으로 이동했다.남편이 전선으로 떠난 후, 카롤라는 드레스덴에 남아 프린츠-막스-팔레에서 작센의 모든 여성 간호 업무를 총괄했다. 그녀는 자신이 설립한 알베르트 협회뿐만 아니라, 부상병 간호 국제 협회, 작센 주립 군사 협회, 작센 야전 디아코니아 협회, 징집된 병사 가족 지원 협회 등 여러 단체와 협력하여 활동했다. 카롤라의 주요 임무는 알베르티네(알베르트 협회 회원)와 여집사들을 자택이나 전선 병원에 배치하고, 드레스덴의 세 병원에 음식, 붕대, 의류 등을 배급하는 것이었다. 또한, 드레스덴에서만 최대 18,000명에 달하는 프랑스 전쟁 포로를 지원하는 일도 맡았다.
이전 독일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카롤라는 라이프치히, 부르첸, 그로센하인, 치타우, 바우첸, 켐니츠 등 여러 도시의 병원을 직접 방문하여 부상병들을 위로하고 지원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러한 적극적인 활동은 일부 군의관들로부터 조롱을 받거나 지나치게 간섭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북독일 연방과 동맹국들이 프랑스에 승리한 후, 요한 국왕은 전쟁 중 카롤라의 헌신적인 자선 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1871년 3월 15일 그녀에게 지도니아 훈장을 수여했다. 또한 스페인 왕실로부터 마리아 루이사 여왕 훈장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후 카롤라는 남편 알베르트가 머물던 콩피에뉴의 군사 본부로 이동하여 콩피에뉴 성의 옛 황실 아파트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남편과 함께 여러 지역을 방문하고 리셉션을 열었다. 1871년 5월, 파리 코뮌 진압을 위해 독일군이 다시 개입하자 카롤라는 드레스덴으로 돌아왔다. 프랑스 정부가 안정된 후인 1871년 6월, 알베르트 왕세자도 드레스덴으로 복귀했다.
4. 작센 왕비 시절 (1873년 ~ 1902년)
1873년 10월 29일, 남편 알베르트가 작센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카롤라도 작센의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1902년 6월 19일 알베르트 국왕이 사망할 때까지 약 29년간 왕비로 지냈다.
4. 1. 왕비 즉위와 외교 활동
1873년 10월 29일에 남편 알베르트가 작센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카롤라도 작센의 왕비가 되었다. 이전의 독일 제국 통일로 인해 외교 정책 권한이 줄어든 상황에서, 새 국왕 부부는 특히 제국 통합 초기에 작센 왕국을 대표하는 역할에 집중했다. 초기 활동 중 하나로 왕국 내 광범위한 시찰과 다른 공국 및 해외 순방을 진행했다.1874년, 왕실 부부는 기존의 타셴베르크궁(Taschenbergpalais)에서 드레스덴의 레지덴츠슐로스(Residenzschloss)로 거처를 옮겼고, 카롤라는 게오르겐바우(Georgenbau) 별관에 자신의 공간을 마련했다. 같은 해,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드레스덴을 방문하여 왕실 부부에게 경의를 표했다. 1877년 8월 4일, 카롤라의 아버지 구스타프가 드레스덴 필니츠 성 단지 내 리버사이드 궁전(Wasserpalais|바서팔레de)에서 사망했다. 이곳은 그가 마지막 몇 년 동안 거주했던 곳이다.
1878년, 카롤라와 알베르트는 은혼식을 기념했다. 이 행사에는 프로이센 왕가가 참석했는데, 이는 작센과 프로이센 간의 화해를 진전시키고 작센 왕국이 독일 제국에 더욱 통합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러한 기념일은 국민들에게 알베르트 국왕을 국가의 교육적, 정치적 아버지로, 카롤라 왕비를 나라를 돌보는 자애로운 어머니로 제시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후 10년 동안 다양한 외교 활동이 이어졌다. 1880년에는 이탈리아 왕가가 방문했고, 1883년에는 포르투갈의 페르난두 2세 국왕과 루마니아의 카롤 1세 국왕이, 1886년에는 포르투갈의 루이스 1세 국왕이 작센을 찾았다. 1897년에는 시암(현재의 태국)의 출라롱콘 국왕이 방문했다.
1884년 5월 29일, 카롤라와 그녀의 사촌이자 당시 스웨덴의 왕세자비였던 바덴의 빅토리아를 통해, 폐위된 홀슈타인고토르프 왕가의 스웨덴 분가와 새로운 스웨덴 베르나도트 왕가 사이에 공식적인 화해가 이루어졌다. 이 일환으로 카롤라의 할아버지인 구스타브 4세 아돌프 국왕, 아버지 바사 공작 구스타프, 그리고 어린 남동생 루이 공자의 유해가 스톡홀름으로 옮겨져 리다르홀멘 교회의 왕실 묘지에 안장되었다. 1888년, 카롤라와 알베르트 국왕은 스웨덴을 공식 방문했다.
작센의 왕비로서 카롤라는 정치 활동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고 남편 알베르트에게 맡겼으며, 대신 "그의 정치적 어색함을 그녀의 상냥한 태도로 보상했다"고 평가받는다. 1898년, 왕실 부부는 통치 25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했다. 알베르트 국왕이 말년에 건강이 악화되자, 카롤라는 남편을 간호하며 점점 더 많은 대표 역할을 수행했다. 알베르트 국왕은 1902년 6월 19일 시빌렌오르트(Sybillenort, 현재 폴란드 슈초드레)에서 사망했고, 왕위는 그의 동생 게오르크 공자가 계승했다.
4. 2. 자선 활동의 확장

카롤라가 왕비가 되면서 작센 왕국의 사회 복지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특히 수도인 드레스덴에서는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노동 인구가 증가했고, 이에 따른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복지 기관 설립의 필요성이 커졌다.[3]
이러한 배경 속에서 카롤라는 적극적인 자선 활동에 나섰다. 1876년에는 간호사 양성과 환자 치료를 위한 '카롤라 하우스' 건립의 첫 삽을 떴고, 이 건물은 2년 뒤 완공되었다. 같은 해, 카롤라는 기존에 자신이 설립했던 네 개의 자선 단체를 통합하여 'Johannes-Verein|요하네스 페라인deu'(요하네스 협회)을 설립했다. 이 협회에는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돕기 위해 재봉틀 구입을 지원하던 로이브니츠-노이오스트라의 재봉틀 구입 협회, 어려운 처지의 과부와 고아를 돕는 페스탈로치 협회, 60세 이상 여성 하인을 위한 가정 봉사소, 드레스덴 노이슈타트와 안톤슈타트 지역 아동의 건강한 성장을 지원하는 아동 고용 협회가 포함되었다. 또한, 사립 Heilstatte Loschwitz|하일슈테테 로슈비츠deu(로슈비츠 요양원)도 인수하여 운영했다.[4] 카롤라의 지시에 따라 요하네스 협회는 드레스덴에 6채의 집을 지어 144가구의 저소득층 가족에게 거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특히 당시 심각한 질병이었던 결핵 환자 치료를 위한 폐 요양원의 설립과 운영에도 힘썼다.[3]
카롤라의 지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의 후원으로 드레스덴 여성 협회가 설립되어 노인과 병든 빈민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5개의 Kindergarten|킨더가르텐deu(유치원)과 3개의 Kinderkrippe|킨더크리페deu(탁아소)를 운영했다. 또한, 가톨릭 자선 단체인 Verein der Heiligen Elisabeth Dresden zur Armenpflege|페라인 데어 하일리겐 엘리자베트 드레스덴 추어 아르멘플레게deu(가난한 이들을 위한 드레스덴 성 엘리자베스 협회)와 Vincentiusverein für Armenförderung|빈첸티우스페라인 퓌어 아르멘푀르더룽deu(빈곤 구제를 위한 빈첸티우스 협회)도 그녀의 지원 아래 활동했다. 이 외에도 노인과 병자를 돌보는 니더포이리츠의 구스타프하임, 필니츠의 회복 시설, 신체적 어려움이 있는 아동을 위한 교육 기관인 트라헨베르게의 보호소(오늘날 드레스덴 직업 훈련 센터의 전신), 프리드리히슈타트, 라이프치거 포어슈타트, Löbtau 지역의 인민 부엌과 아동을 위한 무료 급식소(Suppenanstalten|주펜안슈탈텐deu) 설립 등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졌다.[3]
카롤라의 자선 활동은 드레스덴을 넘어 작센 왕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슈바르첸베르크에는 기술 및 가정 경제 학교가, 라이프치히에는 여성을 위한 기술 및 직업 학교를 갖춘 카롤라 협회가 설립되었다. 작센 왕국 밖에서도 Dobrodzień의 병원, Słabowo|스와보보pol의 어린이집, 모라베츠와 만하임의 Louisenhäuser|루이젠호이저deu(루이제 하우스) 등이 카롤라의 후원을 받았다.
카롤라의 이러한 헌신적인 자선 활동은 당시 귀족 여성에게 기대되던 전통적인 역할과 부합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공적인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작센 왕국을 비롯한 독일 제국 내 여러 국가에서 사회 복지 및 재단 시스템이 발전하면서 귀족 및 중산층 여성들에게 새로운 활동 무대가 열렸다. 카롤라 여왕은 아우구스타 빅토리아 황후와 함께 '국가의 어머니'로서 여성 복지 분야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가는 카롤라 여왕의 사회적 헌신을 남편 알베르트 국왕의 군사적 업적과 동일시하며 제국 건설이라는 공동의 목표에 여성이 기여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데 활용하기도 했다. 이는 남성 중심의 국가 개념을 강화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여성의 사회 참여를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카롤라의 노력은 단순히 사회 문제 해결에만 기여한 것이 아니었다. 간호사, 가사 전문가, 재봉사 등 여성들을 위한 직업 훈련을 통해 여성들에게 새로운 경제 활동의 기회를 제공했으며, 이는 여성들의 삶의 질 향상과 직업적 독립, 나아가 여성 해방에도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4. 3. 개인적인 삶과 궁정 생활
카롤라와 남편 알베르트의 49년간의 결혼 생활은 많은 왕족 가문과 달리 사랑에 기반한 결합이었으며, 부부는 평생 조화롭게 서로를 보완하며 지냈다.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는데, 카롤라는 임신을 위해 온천에 머물거나 치유의 샘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1881년과 1889년에는 매일 가톨릭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바트 엠스를 방문했다.[5] 카롤라는 자선 활동에 있어 항상 남편의 지지를 받았다.1859년부터 부부는 주로 궁정에서 벗어난 Striesen|슈트리젠de의 별장에서 사적인 시간을 보냈고, 성은 궁정에 머물 때만 사용했다. 때때로 카롤라가 남편에게 선물한 레헤펠트 사냥 별장(Jagdschloss Rehefeld|야크트슐로스 레헤펠트de)[6]이나 Sybillenort|지빌렌오르트de 성을 이용하기도 했다. 알베르트와 카롤라는 여행과 자연 탐험을 즐겼다.
1873년 10월 29일 알베르트가 국왕으로 즉위한 후, 작센 왕국은 독일 제국의 일부로서 외교 정책 권한을 상당 부분 잃었다. 이에 새로운 국왕 부부는 작센을 제국에 통합하는 초기에 대표적인 역할에 집중하여 왕국 전역 시찰과 해외 방문 등의 활동을 펼쳤다. 1874년 왕실 부부는 Taschenbergpalais|타셴베르크팔레de에서 드레스덴의 Residenzschloss|레지덴츠슐로스de로 이사했으며, 카롤라는 Georgenbau|게오르겐바우de 별관에 자신의 공간을 마련했다. 같은 해 러시아 제국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방문하여 부부에게 경의를 표했다.
1878년에는 은혼식을 기념했는데, 프로이센 왕가의 참여는 작센과 프로이센 간의 화해를 돕고 작센의 제국 통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러한 기념일은 알베르트를 국가의 아버지로, 카롤라를 나라를 돌보는 자애로운 어머니로 국민에게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후 10년간 이탈리아 왕가(1880년), 포르투갈의 페르난두 2세 국왕과 루마니아의 카롤 1세 국왕(1883년), 포르투갈의 루이스 1세 국왕(1886년), 시암(태국)의 출라롱콘 국왕(1897년) 등 다양한 외국 귀빈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작센의 왕비로서 카롤라는 정치 활동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고 남편에게 맡겼으며, "그의 정치적 어색함을 그녀의 상냥한 태도로 보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898년 왕실 부부는 통치 25주년을 기념했다. 알베르트가 말년에 병들기 시작하자, 카롤라는 그의 공무를 대행하는 일이 잦아졌고 남편을 헌신적으로 간호했다. 알베르트는 1902년 6월 19일 Sybillenort|지빌렌오르트de(현재 폴란드 슈초드레)에서 사망했다.
궁정 생활은 정해진 연례 일정에 따라 진행되었다. 연말에는 왕실 부부가 신년 축하와 축복을 받기 위해 드레스덴 성에 머물렀다. 연초에는 궁정 축제 기간이 이어져 궁정 무도회에는 최대 900명, 실내 무도회에는 최대 300명이 참석했다. 4월에는 슈트리젠의 영지로 이동했고, 6월부터 9월까지는 필니츠 성에서 지내며 모리츠부르크, 바트 샨다우, 타란트 숲 등지로 자연 및 사냥 여행을 떠났다. 매우 더운 여름에는 레헤펠트나 지빌렌오르트 성(알베르트가 1884년 친척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빌헬름으로부터 상속받음)에 머물기도 했다. 10월에는 다시 슈트리젠의 빌라로 돌아와 겨울까지 고위 공무원, 장군, 외국 손님들을 위한 만찬을 주최했다.
5. 작센 왕대비 시절 (1902년 ~ 1907년)
카롤라는 1902년 6월 19일 남편 알베르트 국왕과 사별하면서 왕비 자리에서 물러나 왕대비가 되었다. 그녀의 왕대비 시절은 1907년 12월 15일 드레스덴에서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5. 1. 남편과의 사별과 은퇴
카롤라는 1902년 6월 19일에 남편인 알베르트 국왕과 사별했다. 이후 1907년 12월 15일에 드레스덴에서 사망했다. 카롤라와 알베르트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작센 왕국의 왕위는 알베르트의 동생인 게오르크가 승계했다.
5. 2. 죽음과 유산
카롤라는 1902년 6월 19일에 남편 알베르트 국왕과 사별했다. 남편이 사망한 후 카롤라는 평생 동안 상복이나 수수한 중산층 의복을 입었다. 그녀는 새로운 국왕이 된 시동생 게오르크가 왕궁에서 계속 거주하도록 제안했지만 이를 거절했다. 대신 카롤라는 슈레흘렌에 있는 자신의 별장으로 물러났고, 가끔씩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말년에 카롤라는 눈에 띄게 노쇠했으며, 하인들에게는 까다롭지 않지만 때로는 인색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녀는 여러 해에 걸쳐 총 140페이지에 달하는 유언장을 작성했으며, 이를 통해 개인과 자선 단체에 총 783000DEM를 남겼다. 하인들에 따르면, 카롤라는 죽음을 준비하며 자신의 무상함을 상기시키기 위해 죽은 친척들의 임종 사진을 액자에 넣어 침실에 많이 두었다고 한다.
카롤라는 1907년 12월 15일에 드레스덴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카롤라와 알베르트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작센 왕국의 왕위는 알베르트의 동생인 게오르크가 승계했다.
6. 유산과 평가
남편 알베르트 국왕이 사망한 후 카롤라는 평생 동안 상복이나 수수한 중산층 의복을 입었다. 국왕 게오르크가 왕궁에 계속 거주하도록 제안했지만 거절하고, 슈레흘렌에 있는 자신의 별장으로 물러나 가끔씩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말년에 그녀는 하인들에게 까다롭지 않았으나 때로는 인색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여러 해에 걸쳐 총 140페이지에 달하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 유언장을 통해 개인과 자선 단체에 총 을 유증했다.
카롤라는 오랫동안 당뇨병을 앓았으며, 이는 방광과 신장의 점진적인 감염으로 이어졌다. 주치의는 생명을 위협하는 비뇨기 기능 장애와 심각한 요독증을 진단했고, 카롤라는 1907년 12월 15일 오전 3시 30분경, 74세의 나이로 왕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별장에서 사망했다. 장례 미사 후 시신은 별장의 온실에 공개적으로 안치되어 수천 명이 조문했으며, 이후 관은 드레스덴의 모든 종이 울리는 가운데 가톨릭 궁정 교회로 옮겨져 다음 날 남편 알베르트 국왕의 옆, 드레스덴 대성당의 새 지하 묘지에 묻혔다. 독일 전역에서 작센 궁정에 조문 메시지가 전달되었고, 일간지에는 고인이 된 여왕에 대한 부고와 찬사가 실렸다.
작센 주 의회는 카롤라를 기리기 위해 Königin Carola-Stiftung|쾨니긴 카롤라-슈티프퉁de 재단을 설립했으며, 이 재단은 제2차 세계 대전 말까지 존속했다.
작센의 마지막 왕비였던 카롤라를 기리기 위해 많은 장소와 기관, 상징물 등에 그녀의 이름이 붙여졌다.
- 드레스덴 지역:
- Carola Allee|카롤라 알레de (오늘날의 슈타우펜베르크 알레, 1879년 헌정)
- 프리니츠 강 위의 Carolabrücke|카롤라 다리de
- 엘베 강 위의 Carolabrücke 및 그에 따른 Carolaplatz
- 그로세 가르텐의 Carolasee와 카롤라슐뢰스첸 레스토랑
- 명예 및 군사 관련:
- 제2 왕립 작센 후사르 연대 제19연대 (1891년 명예 명칭 부여)
- Carola-Medaille (1892년 9월 알베르트 왕이 제정): 도움이 되는 자선 활동에 수여
- 브뤼셀 ''명예 훈장'' 및 ''그랑프리 훈장'' (1897년): 소녀 교육 공로 인정
- 기관 및 시설:
- 라이프치히의 Carola-Theater (1887년)
- Königin-Carola-Gymnasium (1902년 건설)
- 순양함 프리깃 SMS 카롤라 (1879년 취역)
- 아우어바흐 마을의 폐결핵 요양소 Carolagrün[9]
- 오늘날의 프라이탈에 있는 Königin-Carola-Schacht
- 타라스프의 치유 온천[8]
- 지명 및 자연물:
- 부카 섬의 만 퀸 카롤라 항구 (Queen Carola Harbour)[7]
- 아펜슈타인의 가장 높은 지점이자 작센 스위스 후면의 전망대 Carolafelsen|카롤라펠젠de
- 브라이텐브룬 시정촌의 Carolathal 지역
- 기타:
- 장미 품종 "Reine Carola de Saxe|렌 카롤라 드 삭스프랑스어" (작센의 카롤라 여왕):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그녀의 보살핌을 받은 프랑스 병사가 명명[3]
- 극락조의 일종인 카롤라 파로티아 (''Parotia carolae'', 1894년 명명)
오늘날, 카롤라의 인물은 다른 역사적 인물들과 함께, 1857년 여름에 머물렀던 프랑켄 마을 바트 보클레트의 바로크 정원을 정기적으로 거닐며 Rondo historica|론도 히스토리카de 행사의 일부로 재현되고 있다.
참조
[1]
서적
Dynastie und Prestige. Die Heiratspolitik der Wettiner
Böhlau Verlag
[2]
서적
Ludovika. Sisis Mutter und ihr Jahrhundert
August Dreesbach Verlag
[3]
서적
Gelebte Liebe wurde ihre Antwort. Auf den Spuren großer Frauen (Teil drei): Königin Carola von Sachsen.
Tag des Herrn.
[4]
웹사이트
Heilstatte Loschwitz
http://www.dresdner-[...]
2022-07-26
[5]
서적
Zur Kur nach Ems. Ein Beitrag zur Geschichte der Badereise von 1830 bis 1914
Franz Steiner Verlag
[6]
서적
König Albert und Sachsenland. Eine Festschrift zum 70. Geburtstage und 25jährigen Regierungsjubiläum des Monarchen
https://digital.slub[...]
[7]
서적
Die deutschen Kriegsschiffe. Biographien – ein Spiegel der Marinegeschichte von 1815 bis zur Gegenwart
Mundus Verlag
[8]
웹사이트
1864-2014 150 Jahre GrandHotel Kurhaus Tarasp (Scuol Palace)
http://www.waldhaus-[...]
2022-07-26
[9]
서적
Heimatkunde und Geschichte von Schönheide, Schönheiderhammer und Neuheide
http://digital.slub-[...]
Stopp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