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발도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발도대는 1877년 사쓰마 반란 진압을 위해 일본 정부가 조직한 특수 부대이다. 다바루자카 전투에서 정부군이 고전하자, 검술에 능한 사무라이 출신 경찰관들을 중심으로 100여 명 규모로 편성되었다. 발도대는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검술의 부흥에 영향을 미쳤고, 군가와 행진곡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청일 전쟁 당시에도 발도대 파견이 제안되었으나, 군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세이난 전쟁 - 구마모토성
    구마모토성은 가토 기요마사가 1607년 완공한 대규모 평산성으로, 독특한 곡선형 돌담인 무샤가에시가 특징이며, 세이난 전쟁과 지진 피해 복구 작업을 거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고 일본 100대 명성으로 선정되었다.
  • 경시청 - 경시총감
    경시총감은 일본 도쿄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시청의 장으로, 국가공무원이며 경찰관 계급 최고위이고, 국가공안위원회의 임명에 따라 임면되며, 일본 경찰관 중 경찰청장관 다음으로 높은 서열을 가진다.
  • 경시청 - 특수급습부대
    특수급습부대는 일본의 대테러 특수부대로, SAP에서 기원하여 하이재킹, 중요 시설 점거 등 중대 테러 사건에 대응하며 기동대에서 선발된 대원들이 고강도 훈련과 해외 특수부대와의 교류를 통해 대테러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 일본 제국의 경찰 - 고스톱 사건
    고스톱 사건은 1933년 오사카에서 발생한 군부와 경찰 간의 충돌로 시작되어 군부의 권위주의적 경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 일본 제국의 경찰 - 경방단
    경방단은 일제강점기에 화재 예방 및 진압, 방공 등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로, 단 본부, 분단 등으로 구성되었고 갑종과 을종 제복이 있었으며, 단원은 공무원으로 인정되었다.
발도대
개요
도쿄 경시청 본부 건물
메이지 시대의 발도대
유형경찰 부대
창설메이지 시대
해체메이지 시대
역할시위 진압, 범죄 진압
규모수백 명
본부도쿄 경시청
지휘관가와지 도시요시
역사
배경사족 반란 진압 필요성 증대
경찰력 강화
창설 목적칼을 사용하는 무장 폭도 진압
치안 유지
주요 활동시위 진압
범죄자 체포
사족 반란 진압 작전 참여
해체 이유경찰 조직 재편 및 무기 현대화
조직
구성원경찰관
검도 유단자
사족 출신자
지휘 체계도쿄 경시청의 지휘를 받음
훈련검술 훈련, 체포술 훈련
장비
무기일본도
권총
경찰봉
복장경찰 제복, 칼집
영향
사회적 영향경찰력 강화에 기여
사족 반란 진압에 기여
경찰의 이미지 제고
문화적 영향발도대 (군가) 탄생
영화, 드라마, 소설 등 다양한 창작물에 등장
관련 정보
관련 인물가와지 도시요시
관련 사건사족 반란
관련 단체도쿄 경시청

2. 편성

다바루자카 전투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사쓰마군과의 백병전으로 인해 정부군의 피해가 커지자, 발도대 편성이 논의되었다. 당시 정부군은 징병령으로 모집된 평민 출신 병사가 많아 검술에 능한 사족 중심의 사쓰마군과의 근접 전투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사족 출신이 많은 경찰 지휘부는 검술에 능한 인원들로 구성된 별동대 창설을 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 육군 중장에게 제안했다. 특히 후방 지원 임무를 수행하던 별동 제3여단(통칭 '''경시대''') 소속의 사쓰마 출신 경찰 간부들이 이 제안을 주도했다. 징병제를 중시했던 야마가타는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전황 타개를 위해 결국 이를 승인하고 부대 이름을 직접 "'''발도대'''"(抜刀隊)로 명명했다.[9]

발도대는 주로 내무성 경시국 소속 경찰관(훗날의 경시청 경찰관)으로 이루어진 경시대에서 선발되었으며, 약 100명에서 110여 명 규모로 편성되었다. 부대 지휘에는 가와지 도시요시 경시총감 등이 관여했으며, 육군 군인들도 지휘관으로 참여했다. 발도대의 핵심 인력은 메이지 6년 정변 이후 사이고 다카모리와 결별하고 오쿠보 도시미치를 따라 도쿄 중앙 정부에 남은 사쓰마 번 출신들이었다.

이누카이 쓰요시의 보도 등의 영향으로 보신 전쟁 당시 적군이었던 구 아이즈번 출신들이 사쓰마 번에 대한 복수심으로 발도대에 대거 지원했다는 인식이 퍼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며 실제로는 사쓰마 번 출신들이 주력이었다.[13]

2. 1. 편성 배경

다바루자카 전투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사쓰마군참호전과 백병전으로 인해 정부군(제국 육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정부군은 병력 수에서 사쓰마군을 압도했지만, 병사 대부분이 징병령으로 징집된 평민 출신이라 검술 훈련이 부족하여 사족 중심의 사쓰마군과의 근접 전투에 취약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사족 출신이 많았던 경찰 지휘부는 검술에 능한 인원들로 구성된 별동대 창설을 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 육군 중장에게 제안했다. 특히 사쓰마 출신으로 후방 지원을 담당하던 별동 제3여단(경시대) 소속의 가와바타 다네나가 대경부, 우에다 요시사다 대경부, 소노다 야스아키 중경부 등이 검술 능력이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투입할 것을 건의했다. 징병령의 주창자였던 야마가타는 처음에는 사족의 힘을 빌리는 것을 주저했으나, 전황 타개를 위해 결국 이를 승인하고 부대명을 직접 "'''발도대'''"(抜刀隊)로 명명했다.[9] 이에 따라 약 100명에서 110여 명 규모의 제1차 발도대가 편성되었다.

발도대는 내무성 경시국 직원(훗날의 경시청 경찰관)을 중심으로 편성된 별동 제3여단(경시대) 소속 부대였다. 초기 여단 지휘관은 가와지 도시요시 대경시(초대 경시총감)가 육군 소장 계급을 겸임하며 맡았으나, 세이난 전쟁 중인 1877년 6월 사임하고 후임으로 야마가타 이와오 육군 소장(대경시 겸임)이 취임했다. 비록 경찰관 주축 부대였지만, 참모장 나카무라 나오타케 육군 중좌[10]를 비롯해 지휘관 직책 다수는 육군 군인이 임명되었으며, 육군과 경찰 직책을 겸하는 경우도 상당수 존재했다.

발도대의 핵심 인력은 메이지 6년 정변 이후 사이고 다카모리와 결별하고 오쿠보 도시미치, 가와지 도시요시 등 도쿄 중앙 정부에 남은 사쓰마 출신들이었다. 이는 사쓰마 번 내부의 정치적 분열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편성은 다음과 같다.[11]

구분지휘관소속 및 출신병력
정면우에다 요시사다 (3등대경부)
소노다 야스아키 (2등중경부)
가고시마현 사족
가고시마현 사족
순사 40명
(오가타 유키노리 2등소경부, 오가타 유이치 2등소경부 포함)
배면가와바타 다네나가 (1등대경부)가고시마현 사족순사 30명
(나가야스 쓰네오 2등중경부, 우치무라 료조(나오요시) 2등중경부 포함)
측면구마모토 사네미치 (경부보)가고시마현 사족순사 10명
유군다무라 고로 (3등소경부)
가토 아이케이 (3등소경부)
후쿠시마현 사족→도쿄부 평민
아오모리현 사족
경부보 3명, 순사 20명



이누카이 쓰요시의 보도 등의 영향으로, 보신 전쟁 당시 적군이었던 구 아이즈 번 출신 사족들이 사쓰마 번에 대한 복수심으로 발도대에 대거 지원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실제 발도대의 주력은 사쓰마 번향사(外城士) 출신들이었다.[13] 예를 들어, 구 아이즈 번 가로였던 사가와 간베에 대경부는 발도대 소속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발도대가 편성되기 이전에 분고구 제1호 경시대 소속으로 전사했다. 물론 야마카와 히로시 육군 중좌나 시바 고로의 사례처럼 아이즈 번 출신 인사들이 사쓰마 번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것이 발도대의 주된 구성 배경은 아니었다.

2. 2. 편성 과정

다바루자카 전투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사쓰마군사족 중심 병력은 백병전에서 징병령에 의해 소집된 평민 위주의 정부군을 압도했다. 참호전 양상 속에서 정부군의 사상자가 속출하자, 사무라이 출신이 많았던 경찰 지휘부는 검술에 능한 인원들로 구성된 별동대 창설을 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 중장에게 제안했다.

당시 정부군의 예비 전력이자 후방 지원을 담당하던 '''별동 제3여단'''(통칭 '''경시대''')은 내무성 경시국 소속 경찰관(훗날의 경시청 경찰관)들로 구성되었으며, 사쓰마 출신 사족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 가와바타 다네나가 대경부, 우에다 요시사다 대경부, 소노다 야스아키 중경부(모두 사쓰마 출신) 등이 검술에 능한 자들을 선발하여 투입할 것을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건의했다. 징병령을 주도했던 야마가타는 사족 무사들의 힘을 빌리는 것을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결국 이를 수락하고 부대 이름을 직접 "'''발도대'''(抜刀隊)"로 명명했다.[9] 이렇게 약 110여 명으로 제1차 발도대가 편성되었다.

별동 제3여단(경시대)의 지휘관은 처음에는 가와지 도시요시 경시총감이 소장을 겸임하며 맡았으나, 1877년 6월 사임했다. 후임으로는 야마가타 이와오 육군 소장이 대경시를 겸임하여 취임했다. 경시대는 경찰관 중심 부대였지만, 참모장 나카무라 나오타케 중좌[10]를 비롯한 지휘관 다수가 육군 군인이었으며, 육군과 경찰 직책을 겸하는 인원도 많았다. 이는 메이지 6년 정변 당시 사이고 다카모리를 따라 낙향하지 않고 오쿠보 도시미치(내무경, 사쓰마 출신)와 함께 도쿄에 남았던 가와지 도시요시 등 사쓰마 출신 경찰 간부들이 발도대 편성의 주축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제1차 발도대의 편성은 다음과 같다.[11]

구분지휘관병력
정면우에다 요시사다 3등대경부(사쓰마), 소노다 야스아키 2등중경부(사쓰마)
(오가타 유키노리 2등소경부(사쓰마), 오가타 유이치 2등소경부(후쿠오카))
순사 40명
배면가와바타 다네나가 1등대경부(사쓰마)
(나가야스 쓰네오 2등중경부(사쓰마), 우치무라 나오요시 2등중경부(후쿠시마))
순사 30명
측면구마모토 사네미치 경부보(사쓰마)순사 10명
유군다무라 고로 3등소경부(후쿠시마→도쿄부 평민), 가토 아이케이 3등소경부(아오모리)
(외 경부보 3명)
순사 20명



이누카이 쓰요시 등의 보도 영향으로 발도대에 보신 전쟁 당시 적군이었던 구 아이즈번 출신 등 구 막부 측 인사들이 사쓰마에 대한 복수심으로 대거 지원했다는 인식이 퍼져 있으나[12],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는 사쓰마 번 향사(외성사) 출신자들이 발도대의 주력을 이루었다.[13] 이러한 오해는 발도대와 경시대를 혼동하거나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구 아이즈번 가로였던 사가와 간베에 대경부는 발도대 소속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분고 방면 제1호 경시대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발도대가 편성되기 이전에 전사했다.

물론 아이즈번 출신자들이 사쓰마번에 대해 적개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아이즈번 가로였던 야마카와 히로시 중좌는 서남 전쟁 출정 시 "사쓰마 병사들아, 동쪽 무사의 칼날이 무뎌졌는지 보아라"라는 노래를 지었고, 당시 육군 유년 학교 학생이었던 아이즈번 출신 시바 고로는 사이고 다카모리 토벌 명령이 내려지자 기쁨을 표하며 사이고의 자결과 오쿠보 도시미치 암살(기오이자카의 변)을 당연한 결과로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이 발도대의 주된 구성 배경이 된 것은 아니다.

2. 3. 부대 구성 (제1차 발도대)

다바루자카 전투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사쓰마군사족 중심으로 구성되어 백병전에 능숙했던 반면, 징병령에 따라 평민 위주로 구성된 제국 육군은 이들과의 백병전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사무라이 출신이 많았던 경찰 지휘부는 검술에 능한 인원들을 선발하여 별도의 부대를 창설할 것을 정토 참군 야마가타 아리토모 육군 중장에게 제안했다. 야마가타는 징병제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생각에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결국 이를 승인하고 약 110명 규모의 부대를 편성하여 직접 "'''발도대'''"(抜刀隊)라고 명명했다.[9]

발도대는 내무성 경시국 소속 경찰관(훗날의 경시청 경찰관)으로 구성된 '''경시대'''(警視隊) 중에서 선발되었으며, 제국 육군 예하 '''별동 제3여단'''의 일부로 편성되어 후방 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발도대 창설을 건의하고 초기 부대를 이끈 핵심 인물들은 경시대 소속의 가와바타 다네나가 대경부, 우에다 요시사다 대경부, 소노다 야스아키 중경부 등 사쓰마 번 출신 경찰 간부들이었다. 이들은 메이지 6년 정변 이후 사이고 다카모리를 따라 낙향하지 않고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도쿄에 남아 정부에 충성한 인물들이었다.

별동 제3여단(경시대)의 초기 지휘관은 가와지 도시요시 대경시(육군 소장 겸임)였으나, 서남 전쟁 중인 1877년 6월 사임하고 후임으로 야마가타 이와오 육군 소장(대경시 겸임)이 취임했다. 여단 참모장으로는 나카무라 나오타케 육군 중좌[10]가 임명되는 등, 지휘관 직책의 상당수는 육군 군인이 맡았으며, 육군 군인과 경찰관을 겸직하는 경우도 많았다.

제1차 발도대의 편성은 다음과 같다.[11]

구분지휘관병력
정면우에다 요시사다 3등대경부(가고시마현 사족), 소노다 야스아키 2등중경부(가고시마현 사족)
(오가타 유키노리 2등소경부(가고시마현 사족), 오가타 유이치 2등소경부(후쿠오카현 사족) 포함)
순사 40명
배면가와바타 다네나가 1등대경부(가고시마현 사족)
(나가야스 쓰네오 2등중경부(가고시마현 사족), 우치무라 료조(나오요시) 2등중경부(후쿠시마현 사족) 포함)
순사 30명
측면구마모토 사네미치 경부보(가고시마현 사족)순사 10명
유군다무라 고로 3등소경부(후쿠시마현 사족→도쿄부 평민), 가토 아이케이 3등소경부(아오모리현 사족)경부보 3명, 순사 20명



이누카이 쓰요시 등의 보도로 인해 발도대에 보신 전쟁 당시 적군이었던 구 아이즈번 출신자들이 사쓰마 번에 대한 원한을 풀기 위해 대거 참여했다는 오해가 많다[12]. 그러나 실제 발도대의 주력은 메이지 유신 이후 정부에 잔류한 오쿠보 도시미치 계열의 사쓰마 번 출신 경찰관들이었다.[13] 예를 들어, 구 아이즈번 가로였던 사가와 간베에 대경부는 발도대 소속으로 알려진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분고 지역 경시대 제1호대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발도대 편성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전사했다.

3. 전과

다바루자카 전투에서 정부군이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사무라이 중심의 반군에게 고전하자, 검술에 능한 경찰관들을 중심으로 발도대가 창설되었다. 발도대는 1877년 3월 14일 새벽, 다바루자카 고지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반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큰 전과를 올렸다. 이는 다바루자카 공략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옛 아이즈번 출신 대원들이 보신 전쟁의 원한을 외치며 분전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14]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발도대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이틀간의 격전 끝에 투입된 100명의 대원 중 25명이 사망하고 54명이 부상당했으며, 일부 분대는 전멸하기도 했다.

비록 이 구식 무기로 여겨지던 시기였으나, 발도대의 이러한 활약은 막부 말기 이후 쇠퇴하던 겐주츠(검술)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일본 경찰의 아버지"로 불리는 가와지 도시요시는 이를 계기로 검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경찰 조직 내 검술 훈련 도입을 추진했다.

3. 1. 전투 경과

다바루자카 전투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반군은 참호를 이용한 방어전을 펼쳤고, 정부군은 며칠 동안 이어진 포위 공격에도 불구하고 큰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사무라이 중심의 반군이 벌이는 백병전에서 정부군은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는 정부군의 주력이 칼싸움 경험이 거의 없는 징집된 농민과 도시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숙련된 사이고 군 사무라이와의 칼싸움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사무라이 출신이 많았던 경찰 지휘부는 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검술에 능한 인원들로 구성된 별동대, 즉 발도대(抜刀隊) 창설을 제안했다. 야마가타는 이를 승인했고, 곧 100명의 검객으로 이루어진 부대가 조직되었다.

1877년 3월 14일 새벽, 발도대는 지휘부의 명령에 따라 다바루자카 고지를 기습 공격했다. 이 공격은 큰 전과를 거두어 다바루자카 공략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기세를 타고 너무 깊숙이 진격한 탓에 발도대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어, 일부 분대는 전멸하기도 했다. 이틀간 이어진 치열한 전투 끝에 발도대는 사쓰마 반군과의 교전에서 사망 25명, 부상 54명이라는 큰 손실을 기록했다.

전투 중, 옛 아이즈번 출신 대원들이 보신 전쟁 당시 조정의 적으로 몰렸던 원한을 갚기 위해 "보신의 원수, 보신의 원수"라고 외치며 돌격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는 당시 우편보치신문 기자였던 이누카이 쓰요시가 보도한 내용이다.

> 14일, 다바루자카의 싸움에서 우리가 진격하여 적의 보루(砦)에 육박하여 거의 이를 함락하려 할 때, 잔병 13명이 굳게 지키며 물러서지 않자, 이때 옛 아이즈번의 모(某) 순사(발도대원 중 한 명)가 몸을 던져 분투하여 곧바로 적 13명을 베었다. 그 싸움에서 큰 소리로 외치기를, 보신의 복수, 보신의 복수라고. 이는 다소 소설가의 말과 같지만, 결코 허설(虛說)이 아니다. 이 회인(會人, 아이즈 사람)은 약간의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다만 이 이야기는 공식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으며, 이누카이 기자 본인도 현장을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 전해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일각에서는 이 외침의 주인공이 당시 발도대 분대장으로 활약했던 전 아이즈번 무사 다무라 고로 삼등소경부라는 설도 제기되지만[14], 실제 기록상 다무라의 분대는 예비대 성격의 "유군(遊軍)"이었고, 발도대의 주력 부대를 지휘한 것은 가고시마현 출신 사족이었다. 따라서 다바루자카에서의 발도대 전투는 실제로는 "사쓰마 출신의 정부군 경찰관들이 사쓰마 출신의 사이고 군을 공격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에 이미 은 구식 무기로 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발도대의 활약은 막부 말기 패배 이후 잊혀가던 검술(겐주츠, 剣術)에 대한 일본 사회의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검술 부활 움직임을 주도한 인물은 "일본 경찰의 아버지"라 불리는 가와지 도시요시였다. 그는 《격검재흥론(撃剣再興論)》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검술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이에 따라 1879년부터 경시청은 경찰관들에게 검술을 가르치기 위해 전문 강사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3. 2. 전투의 의의

다바루자카 전투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반군은 참호전을 벌였고, 정부군은 며칠간 포위 공격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정부군은 근접전에서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는 군대의 대부분이 칼싸움 경험이 없는 징집된 평민이었기 때문이다. 사무라이 출신 반군과의 칼싸움에서 이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사무라이 출신이 많았던 경찰 지휘부는 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검술에 능한 인원들로 구성된 별동대, 즉 발도대의 창설을 제안했고 야마가타는 이를 승인하여 100명 규모의 부대가 모집되었다.

1877년 3월 14일 새벽, 발도대는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큰 전과를 올렸고, 이는 다바루자카 공략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틀간의 격전 끝에 사쓰마 반군을 격퇴하는 데 기여했으나, 기세를 타고 너무 깊이 진격한 탓에 발도대 역시 25명 사망, 54명 부상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일부 분대는 전멸하기도 했다.

이 전투에서 구 아이즈번 무사 출신 대원들이 보신 전쟁의 패배에 대한 복수심으로 "보신의 원수, 보신의 원수"라고 외치며 돌격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는 당시 우편보치신문 기자였던 이누카이 쓰요시가 보도한 내용이다.

14일, 다바루자카의 싸움에서 우리가 진격하여 적의 보루(토리데)에 육박하여 거의 이를 함락하려 할 때, 잔병 13명이 굳게 지키며 물러서지 않자, 이때 옛 아이즈번의 모(순사대 중)가 몸을 던져 분투하여 곧바로 적 13명을 베었다. 그 싸움에서 큰 소리로 외치기를, '보신의 원수, 보신의 원수'라고. 이는 다소 소설가의 말과 같지만, 결코 허설이 아니다. 이 회인은 약간의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외침에 대한 내용은 공식 기록에는 없으며, 이누카이 역시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 전해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보도한 것이다. 이 외침의 주인공으로 발도대 분대장이었던 전 아이즈번 무사 다무라 고로 삼등소경부가 거론되기도 하지만[14], 실제 발도대 본대를 지휘한 것은 가고시마현 출신 사족이었다. 따라서 다바루자카 전투에서 발도대의 싸움은 "사쓰마 사람(정부군 측 경찰관 중심)이 사쓰마의 적(사이고 군 사쓰마 사족 중심)을 치는" 성격이 강했다.

19세기 말 칼은 이미 구식 무기로 여겨졌지만, 발도대의 활약은 막부 말기 패배 이후 잊혀가던 겐주츠(검술)에 대한 일본 사회의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일본 경찰의 아버지"로 불리는 가와지 도시요시는 검술 부활을 강력히 주장하며 '검술 부흥에 대한 질문'(撃剣再興論|게키켄 사이코론일본어)이라는 글을 발표했고, 1879년부터 경찰은 검술 훈련을 위해 전문 강사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3. 3. "보신의 원수" 일화

3월 14일 새벽, 발도대는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다바루자카 공략에 큰 공을 세웠으나, 너무 깊이 진격한 탓에 상당한 손실을 입었고 전멸한 분대도 있었다.

이 전투에서 구 아이즈번 무사 출신 대원들이 보신 전쟁에서의 패배에 대한 복수심으로 "보신의 원수, 보신의 원수"라고 외치며 돌격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는 당시 우편보치신문 기자였던 이누카이 쓰요시가 보도하면서 알려졌으며, 그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 14일, 다바루자카 전투에서 아군이 적의 보루(토리데)에 육박하여 함락 직전에 이르렀을 때, 잔병 13명이 완강히 저항했다. 이때 옛 아이즈번 출신의 한 순사(순사대 중 한 명)가 몸을 던져 분투하며 적 13명을 베었다. 그는 싸우면서 큰 소리로 "보신의 복수, 보신의 복수"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는 다소 소설처럼 들릴 수 있으나, 결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며, 해당 순사는 약간의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공식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으며, 이누카이 본인도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 전해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이 외침의 주인공이 전투 당시 발도대 분대장으로 활약했던 전 아이즈번 무사 다무라 고로 삼등소경부라는 설도 있다.[14] 하지만 다무라는 발도대 본대가 아닌 "유군" 소속이었고, 실제 발도대 본대는 가고시마현 출신 사족이 지휘했다. 따라서 다바루자카 전투에서 발도대의 싸움은 실제로는 "사쓰마 출신 관군 경찰관 중심 부대가 사이고 군사쓰마 사족을 공격한" 구도였다.

4. 그 후

다바루자카 전투에서의 발도대의 활약은 메이지 유신 이후 실용성이 낮아져 버려졌던 검술(일본어: 剣術|겐주쓰일본어)에 대한 일본 사회의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일본 경찰의 아버지"로 불리는 가와지 도시요시는 이러한 검술 부흥 움직임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격검 부흥론'(撃剣再興論|게키켄 사이코론일본어)을 통해 검술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이는 이후 경찰 조직 내 검술 훈련 도입으로 이어졌다.

4. 1. 검술의 부흥과 경찰 검도

다바루자카 전투에서 정부군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반군의 참호전과 근접 공격에 고전했다. 정부군의 다수는 칼싸움 경험이 없는 징집된 평민이었기에 사무라이 출신 반군과의 백병전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사무라이 출신이 많았던 경찰 지휘부는 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검술에 능한 인원들로 구성된 별동대, 즉 발도대의 창설을 제안했다. 야마가타는 이를 승인했고, 100명의 검객으로 구성된 부대가 조직되었다.

1877년 3월 14일, 발도대는 다바루자카 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틀간의 격전 끝에 사쓰마 반군을 격퇴하는 데 기여했으나, 발도대 역시 25명 사망, 54명 부상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칼이 시대에 뒤떨어진 무기로 여겨지던 19세기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발도대의 활약은 메이지 유신 이후 쇠퇴했던 검술(剣術|겐주쓰일본어)과 일본도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검술 부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일본 경찰의 아버지'라 불리는 가와지 도시요시 대경시였다. 그는 '격검 부흥론'(撃剣再興論|게키켄 사이코론일본어)이라는 글을 통해 경찰 조직 내 검술 훈련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주장에 힘입어 1879년(메이지 12년), 경시청 내에 격검 세화계가 설치되었고, 경찰관들에게 검술을 지도할 교관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초기 교관으로는 카지카와 요시마사, 우에다 우마노스케, 헤미 소스케 등이 채용되었다.[15] 이후 신카이 타다아츠, 시모에 히데타로, 토쿠노 세키시로, 미츠하시 칸이치로, 사카베 다이사쿠, 시바타 모리오와 같은 유명 검객들이 잇따라 채용되어 경시류 검술의 체계를 정립했다.

또한, 야요이 신사에서 대규모 격검 대회(경시청 무술 대회)가 정기적으로 개최되면서 경시청은 당대 검객들의 중요한 활동 무대가 되었다. 제4대 전일본검도연맹 회장을 지낸 쇼지 무네미츠는 당시 경시청을 "전국 검도계의 대전당"과 같았다고 평가하며, 검객을 지망하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경시청에서 수련을 거쳐야 했고, 후대의 유명 검객들인 코노 사사부로, 나이토 타카하루, 가와사키 젠자부로, 다카하시 큐타로, 몬나 타다시 등도 젊은 시절 경시청에서 막부 말 시대 명검객들의 지도를 받으며 기량을 닦았다고 언급했다.

현재까지도 경찰 검도는 일본 검도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검도 특별 훈련원으로 선발된 경찰관들은 전일본 검도 선수권 대회와 세계 검도 선수권 대회 등 국내외 대회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다.

4. 2. 군가 및 행진곡 제정

1882년, 도쿄 대학 교수 토야마 마사카즈가 시집 『신체시초』에 발도대의 분전을 소재로 한 "발도대의 시"를 발표했다. 이 시에 프랑스 군악대 출신 고용 외국인 Charles Leroux|샤를 르루fra작곡하여, 1885년에 '''군가발도대」'''가 발표되었다. 또한 이 군가 "발도대"를 기반으로, 군가 "부상가"의 선율을 조합하여 1886년에 이른바 "'''육군 분열 행진곡'''"이 작곡되었고, 제국 육군의 공식 행진곡으로 채택되었다.

현재도 육상자위대경시청을 포함한 도도부현 경찰의 공식 행진곡으로 계승되고 있다. 육상자위대는 관열식 등에서 육상자위대 음악대에 의해 연주되고, 경찰은 기동대 관열식이나 시열식 등에서 경찰 음악대에 의해 연주된다.

4. 3. 청일 전쟁 당시 일화

1894년 (메이지 27년)에 발발한 청일 전쟁은 일본이 처음으로 경험한 본격적인 대외 전쟁이었다. 이 시기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의용병 지원 열기가 높았으며, 경시청 내부에서도 전쟁에 기여하고자 하는 목소리가 커졌다.[16]

당시 경시총감이었던 소노다 야스카타는 과거 서남 전쟁 당시 발도대가 편성되었던 사례를 참고하여, 발도대를 다시 조직해 전선에 파견하겠다는 내용의 건의서를 마련했다. 그는 제2부장(보안부) 모리타 시게키치를 사자로 삼아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에게 이 건의서를 전달했다.[16]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자신은 군사 문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며, 육군 참모차장인 가와카미 소로쿠에게 제출하도록 지시했다.

모리타로부터 건의서를 건네받은 가와카미 참모차장은 이를 강하게 비판하며 거절했다. 그는 "경시청 놈들은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건가. 바보 같은 놈들, 일본에 군제가 시행된 지 벌써 20년도 넘었다. 일본 군대는 그런 유치한 조직이 아니다. 발도대 따위는 필요 없다. 돌아가서 소노다에게 그렇게 전하라"고 격한 어조로 말했다.[16] 이로써 청일 전쟁 당시 발도대를 파견하려던 경시청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참조

[1] 서적 歴史の意外な「ウラ事情」: あの事件・あの人物の“驚きの事実” PHP研究所
[2] 서적 Between Homeland and Nation: Aizu in Early Modern and Modern Japan Harvard University
[3] 뉴스 Learn samurai spirit through kendo The Jakarta Post 2000-04-23
[4] 서적 Armed martial arts of Japan: swordsmanship and archery Yale University Press
[5] 서적 Challenging Past And Present: The Metamorphosis of Nineteenth-Century Japanese Art University of Hawaii Press
[6] 문서 警視庁武道九十年史 警視庁警務部教養課
[7] 서적 Comparative Literature - East and West: Traditions and Trends : Selected Conference Papers University of Hawaii Press
[8] 웹사이트 近代日本警察の生みの親・川路利良 https://www.sankei.c[...] 産経ニュース 2018-07-27
[9] 서적 西南戦争警視隊戦記 サンケイ新聞データシステム刊
[10] 웹사이트 3月28日 陸軍少将 高島靹之助他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9081315600、本営通牒 明治10年2月20日~10年9月31日(防衛省防衛研究所) 2020-02-23
[11] 문서 内務省警視局職員録 明治10年5月改正 "[https://dl.ndl.go.[...]
[12] 서적 堂々日本史 第15巻 KTC中央出版
[13] 서적 西南戦争 西郷隆盛と日本最後の内戦 中央公論新社
[14] 서적 新説 西南戦争 七草社
[15] 웹사이트 赳太郎と善三郎 http://www.mugairyu-[...] 無外流兵法譚 2011-11-11
[16] 문서 警視庁史 明治編 警視庁史編さん委員会
[17] 웹인용 近代日本警察の生みの親・川路利良 https://www.sankei.c[...] 産経ニュース 2018-07-2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