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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티니아누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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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아들로, 375년 4세의 나이에 서방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투스로 선포되었다. 그는 형 그라티아누스와 함께 제국을 통치했으나, 그라티아누스가 암살된 후에는 마그누스 막시무스와의 권력 다툼, 아리우스파와의 종교적 갈등, 그리고 프랑크족 군사령관 아르보가스트와의 대립을 겪었다. 392년 비엔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으며, 그의 죽음은 자살 또는 암살로 추정된다. 그의 통치는 세습 제도의 문제점을 보여주며, 어린 황제가 강력한 장군과 관리에게 휘둘리는 5세기의 전조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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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티니아누스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흰색 조각상
아프로디시아스에서 발견된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대리석 조각상
이름발렌티니아누스
로마자 표기Ballentinianuseu
전체 이름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플라비우스 발렌티니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통치
직위로마 황제
통치 시기 (서방)375년 11월 22일 – 392년 5월 15일 (388년 8월 28일부터 수석 통치자)
이전 통치자발렌티니아누스 1세
다음 통치자에우게니우스와 테오도시우스 1세
공동 통치자발렌스 (동방, 375–378)
그라티아누스 (375–383)
테오도시우스 1세 (동방, 379–392)
아르카디우스 (동방, 383–392)
마그누스 막시무스 (383–388)
빅토르 (384–388)
개인 정보
출생371년, 트레베리, 갈리아 벨기카, 서로마 제국
사망392년 5월 15일 (21세), 비엔, 비엔넨시스, 서로마 제국
가족발렌티니아누스 가문
아버지발렌티니아누스 1세
어머니유스티나
종교아리우스 기독교

2. 초기 생애와 즉위 (371–375)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유스티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367년부터 아버지와 함께 제국을 다스리던 이복 형 그라티아누스가 있었다. 또한, 갈라, 그라타, 유스타라는 세 명의 누이가 있었다.

375년, 아버지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판노니아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하던 중 사망했다. 당시 일리리쿰에 주둔하던 로마 군단은 불안정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때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네 살이었으며, 어머니 유스티나와 함께 시르미움 또는 카르눈툼 근처의 황실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아버지의 공동 황제였던 형 그라티아누스는 멀리 트리어에 있었고, 동방의 황제인 삼촌 발렌스 역시 현장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발렌티니아누스 1세 휘하의 주요 장군들과 관리들, 특히 프랑크족 출신의 메로바우데스와 페트로니우스 프로부스, 그리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외삼촌인 케레알리스 등은 그라티아누스나 발렌스와 상의 없이 독자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어린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375년 11월 22일 아킨쿰에서 '아우구스투스'(황제)로 선포하고 군단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하여 사태를 수습했다.[16]

군 지휘관들이 어린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황제로 추대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군대와 프랑크족 장군 메로바우데스는 그라티아누스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 불안감을 느꼈을 수 있다. 둘째, 당장 군 지휘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어린 황제를 내세움으로써 군대의 분열을 막으려 했을 수 있다.[3] 셋째, 세바스티아누스나 테오도시우스 백작과 같이 유능한 군 지휘관이나 관리들이 황제가 되거나 독자적인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을 수 있다. 실제로 세바스티아누스는 곧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발령받았고, 테오도시우스 백작은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즉위한 지 1년 안에 처형되었다.

3. 밀라노에서의 통치 (375–387)

그라티아누스는 이복 형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지지하는 장군들을 받아들였고, 어린 동생을 직접 가르치는 것을 즐겼다고 전해진다.[4] 역사가 조시무스에 따르면, 그라티아누스는 갈리아, 히스파니아, 브리타니아를 포함한 알프스 북쪽 지역을 다스렸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이탈리아, 일리리쿰 관구 일부, 북아프리카를 통치하기로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라티아누스와 그의 궁정이 일리리쿰을 포함한 서방 제국 전체를 관리했으며,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자신의 이름으로 법령을 발표하는 등 실질적인 통치에서 소외되었다.[5]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솔리두스


378년, 삼촌인 동방 황제 발렌스가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고트족에게 패배하여 사망하자, 그라티아누스는 유능한 장군이었던 테오도시우스 1세를 새로운 동방의 황제로 임명했다.

어린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밀라노의 궁정에서 어머니 유스티나 황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유스티나는 아리우스파 신앙을 지지했기 때문에, 발렌티니아누스 2세 역시 아리우스파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는 당시 밀라노의 주교이자 니케아파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암브로시우스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6][3]

383년, 브리타니아 주둔 군대의 사령관이었던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켜 갈리아히스파니아를 장악했다. 그라티아누스는 막시무스를 피해 도망치다가 결국 살해당했다. 그라티아누스의 죽음으로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밀라노의 궁정은 갑작스럽게 제국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한동안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궁정은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중재를 통해 찬탈자 막시무스와 타협을 시도했고, 동방의 테오도시우스 1세 역시 막시무스를 서방의 공동 황제로 인정했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로마에서 이교 사원들이 약탈당하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황제의 태도에 힘입어, 384년 로마 원로원의 이교도 의원들은 로마 도시 장관이었던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를 중심으로 그라티아누스가 382년에 원로원에서 철거했던 승리의 제단을 다시 세워달라고 청원했다. 하지만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이 요청을 거부하며, 심마쿠스가 내세웠던 로마의 전통적인 이교 의식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암브로시우스 주교 역시 승리의 제단 복원을 반대하는 데 참여했지만,[7] 제단 철거 자체는 자신의 결정이 아니었다고 밝혔다.[8]

385년에는 종교적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황실(어머니 유스티나, 발렌티니아누스 2세, 그리고 궁정 내 아리우스파 관리들)이 부활절 예배를 위해 포르티안 바실리카를 넘겨달라고 요구하자, 암브로시우스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암브로시우스는 유스티나가 어린 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신이 지지하는 니케아파를 억압하려 한다고 비판했다.[9] 그러나 유스티나뿐만 아니라 황실 고위 관리들도 암브로시우스의 주장에 반대하며 바실리카 인도를 요구했다.[9] 암브로시우스가 처벌받을 위기에 처하자, 그의 지지자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암브로시우스는 고트족 군대의 진입을 막으며 바실리카를 지켰다. 티라니우스 루피누스에 따르면, 암브로시우스는 바실리카 지하에서 고대 순교자들의 유해를 발견하여 지지자들의 사기를 높였다고 한다. 이후 마그누스 막시무스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이러한 종교적 갈등을 이용하여 그를 신을 거스르는 음모를 꾸몄다고 비난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10][11]

386년부터 387년 사이, 마그누스 막시무스는 결국 알프스 산맥을 넘어 포 강 유역으로 진군하여 밀라노를 위협했다. 위기에 처한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어머니 유스티나는 테살로니카로 도망쳐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테오도시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누이인 갈라와 결혼하는 조건으로[6] 어린 황제를 돕기로 결정하고, 388년 서쪽으로 군대를 진군시켜 막시무스를 격파했다.

4. 비엔에서의 통치 (388–392)

막시무스가 패배한 후, 발렌티니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개선 축하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4] 그와 그의 측근들은 갈리아의 비엔에 자리를 잡았다.[5] 그의 어머니 유스티나는 이미 사망했고, 비엔은 암브로시우스의 영향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테오도시우스에 대한 찬사에서 웅변가 파카투스는 제국이 그의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에게 속한다고 주장하면서, 새로 복위된 발렌티니아누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4]

테오도시우스는 391년까지 밀라노에 머물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서방의 중요한 관직에 임명했다.[5][12] 테오도시우스가 발행한 주화에서는 발렌티니아누스가 아르카디우스와 마찬가지로 테오도시우스의 젊은 동료로 묘사되었다.[5][3] 일부 현대 학자들은 테오도시우스가 자신의 아들들에게 제위를 계승시키려 했기 때문에 발렌티니아누스가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본다.[5][6][3]

테오도시우스가 동방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을 때, 그의 신뢰를 받는 장군인 프랑크족 출신 아르보가스트가 서방 속주(아프리카 제외)의 군사령관이자 발렌티니아누스의 보호자로 임명되었다.[5] 아르보가스트는 발렌티니아누스의 이름으로 통치했지만, 실제로는 테오도시우스에게만 충성했다.[6] 그는 라인강 전선에서 군사적 성공을 거두는 동안, 어린 황제 발렌티니아누스는 비엔에 사실상 갇혀 지냈다.[5][6] 이는 어린 나이에 군사 활동을 했던 아버지 발렌티니아누스 1세나 이복형 그라티아누스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6] 아르보가스트의 영향력은 매우 강해서, 뇌물 수수 혐의를 받던 발렌티니아누스의 친구 하르모니우스를 황제 앞에서 살해하기도 했다.[3][6]

발렌티니아누스는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품고 테오도시우스와 암브로시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처지를 호소했다.[3][6] 그는 과거 지지했던 아리우스주의를 명백히 버리고, 암브로시우스를 비엔으로 초청하여 세례를 받으려 했다.[6]

갈등은 아르보가스트가 황제가 이교도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갈리아 군대를 이탈리아로 이동시키는 것을 막으면서 극에 달했다.[5] 이에 발렌티니아누스는 공식적으로 아르보가스트를 해임하려 했으나, 아르보가스트는 "나를 임명한 것은 당신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명령서를 찢어버리고 이를 무시했다.[6] 이 사건으로 실제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지가 명확히 드러났다.

5. 죽음

테오도시우스 1세의 미소리움에 있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 서기 388년


392년 5월 15일,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비엔의 거주지에서 목을 매단 채 발견되었다. 아르보가스트는 황제의 죽음이 자살이라고 주장했다.[13] 그러나 많은 자료에서는 아르보가스트가 그를 살해했다고 보고 있으며, 고대 기록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일부 현대 학자들은 자살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맥에보이(McEvoy), 윌리엄스(Williams), 프리엘(Friell) 등은 아르보가스트가 당시 자신의 상황을 바꿀 이유가 거의 없었다고 주장하며, 맥린(McLynn)은 황제의 죽음으로 이득을 볼 사람이 없었다고 지적한다.

암브로시우스의 찬가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죽음에 대한 유일한 동시대 서방 기록이다.[13] 암브로시우스가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기독교적 미덕의 모범으로 묘사했기 때문에, 그의 찬가는 황제 죽음의 원인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인다. 만약 살해당한 것이라면,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암브로시우스가 위선적인 태도를 보인 셈이 된다.[14]

젊은 황제의 시신은 암브로시우스에 의해 밀라노로 운구되었고, 장례 행렬에는 그의 누이 유스타와 그라타가 함께하며 애도했다. 그는 형 그라티아누스 옆, 아마도 밀라노의 산 로렌초 부속 예배당에 있는 포르피리 석관에 안치되었다. 그는 사후 ''Divae Memoriae Valentinianus|신성한 기억의 발렌티니아누스la''로 신격화되었다.[15]

처음에 아르보가스트는 자신이 모시던 황제의 죽음에 놀란 듯, 테오도시우스의 아들 아르카디우스를 서방 황제로 인정했다. 그러나 3개월 동안 테오도시우스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자, 아르보가스트는 황실 관리였던 에우게니우스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했다. 테오도시우스는 처음에는 에우게니우스 정권을 용인하는 듯했으나, 393년 1월 자신의 여덟 살 된 아들 호노리우스를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로 선포했다. 결국 내전이 발발했고, 394년 테오도시우스는 프리지두스 전투에서 에우게니우스와 아르보가스트를 격파했다.[12]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죽음을 둘러싸고 자살설과 아르보가스트에 의한 암살설 등 다양한 추측이 당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8세기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아르보가스트의 음모에 의한 살해를 주장했다. 반면, 브라이언 크로크(Brian Croke)나 존 프레데릭 매튜스(John Frederick Matthews) 같은 현대 역사가들은 테오도시우스가 처음에는 아르보가스트를 비난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암살 혐의는 이후 테오도시우스 측이 정치적 대립 과정에서 만들어낸 주장일 수 있다고 본다. 제럴드 프리엘(Gerard Friell)은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자신의 불안정한 처지에 대한 고민과 굴욕감으로 인해 우울증을 겪고 자살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동시대 역사가 티란니우스 루피누스(Tyrannius Rufinus)는 황제의 죽음에 대해 진실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명확한 증거가 부족한 상황을 반영한다.

6.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죽음에 대한 논쟁

392년 5월 15일, 발렌티니아누스는 비엔의 거주지에서 목을 매단 채 발견되었다. 아르보가스트는 황제의 죽음이 자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많은 자료들은 아르보가스트가 그를 살해했다고 믿고 있으며, 고대 기록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일부 현대 학자들은 자살설에 무게를 두고 있다. 맥에보이, 윌리엄스, 프리엘 등은 아르보가스트가 당시 자신의 상황을 바꿀 이유가 거의 없었다고 주장했으며, 맥린은 황제의 죽음으로 인해 이득을 본 사람이 없다고 지적했다.

암브로시우스의 찬가는 발렌티니아누스의 죽음에 대한 유일한 동시대 서방측 자료이다.[13] 이 찬가는 황제의 죽음 원인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보이는데, 이는 암브로시우스가 발렌티니아누스를 기독교적 미덕의 모범으로 묘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예상 가능한 부분이다. 만약 그의 죽음이 명백한 타살이었다면, 암브로시우스가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침묵하거나 모호하게 표현한 것은 위선으로 비춰질 수 있다.[14]

18세기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아르보가스트의 음모로 살해되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브라이언 크로크나 존 프레데릭 매튜스와 같은 현대 역사가들은 테오도시우스가 처음에는 아르보가스트를 비난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들은 암살 혐의가 이후 테오도시우스와 아르보가스트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테오도시우스 측이 정치적 선전 목적으로 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제럴드 프리엘은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자신의 불안정한 지위와 권력의 부재로 인한 굴욕감 속에서 우울증을 겪다 자살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죽음에 관한 가장 신뢰도 높은 자료로 평가받는 동시대 역사가 Tyrannius Rufinus|티라니우스 루피누스la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황제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결정적인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7. 의의

콘스탄티누스 1세와 그의 아들들이 부활시킨 세습 제도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 때까지 유지되었으나, 3세기 위기 이후 제국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것은 직접 원정을 지휘하는 강력한 황제들이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즉위한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통치는 이러한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어머니 유스티나, 공동 황제들, 그리고 메로바우데스, 알보가스트와 같은 강력한 군 지휘관 등 여러 세력 사이에서 실권 없는 허수아비 역할에 머물렀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황제의 권위 약화를 초래했으며, 그의 통치는 강력한 장군과 관료들이 어린 황제들을 내세워 제국을 좌지우지했던 5세기의 혼란을 예고하는 전조와 같았다. 이러한 사례로는 이후 등장하는 호노리우스, 아르카디우스, 테오도시우스 2세, 발렌티니아누스 3세, 그리고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등이 있다.

참조

[1] 서적 The Learned Collector: Mythological Statuettes and Classical Taste in Late Antique Gaul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 웹사이트 Togate portrait statue of emperor ( Arcadius or Valentinian II). Aphrodisias (Caria). 388-392. http://laststatues.c[...] 2012
[3] 웹사이트 Valentinian II (375–392 A.D.) http://www.roman-emp[...]
[4] 논문 Res Gestae
[5] 논문 "The Accession of Theodosius I."
[6] 간행물 Valentinian I. s.v. Valetinian II.
[7] 문서 Epistolae
[8] 문서 Epistolae
[9] 문서 Epistolae
[10] 간행물 Ecclesiastical History
[11] 문서 Collectio Avellana
[12] 웹사이트 Eugenius (392–394 A.D.) http://www.roman-emp[...]
[13] 문서 De obitu Valentiniani consolatio
[14] 서적 Political Letters and Speeches Liverpool University Press
[15] 서적 Römische Kaisertabelle: Grundzüge einer römischen Kaiserchronologie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6] 문서 尚樹1999
[17] 문서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18]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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