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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리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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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리리쿰은 고대 로마 시대에 아드리아 해 동부 해안을 따라 존재했던 지역으로, 오늘날의 알바니아, 코소보,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에 걸쳐 있었다. 기원전 6세기부터 일리리아인들이 거주했으며, 로마는 세 차례의 일리리아 전쟁을 통해 이 지역을 점령했다. 일리리쿰은 로마의 속주가 되었으며, 달마티아와 판노니아로 분할되었다. 이후 일리리쿰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으로 일리리쿰 프라이펙투라로 재편되었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로마 제국 병력 공급원 역할을 했다. 7세기 초에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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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리쿰
개요
일리리쿰 속주
일리리쿰 속주
정식 명칭일리리쿰 속주
로마자 표기Provincia Illyricum
그리스어 표기'Ἐπαρχία Ἰλλυρίας (eparchía Illyrías)'
별칭마그눔 일리리쿰 (Magnum Illyricum)
관할 지역일리리아
수도살로나
존속 기간기원전 27년 - 서기 69/79년
소멸 원인베스파시아누스 황제 통치 기간 중 해체; 달마티아 및 판노니아 속주로 분할
역사
이전일리리아
이후달마티아 속주
판노니아

2. 명칭 및 어원

일리리아인이라는 용어는 기원전 6세기 후반부터 밀레투스의 헤카타이오스에 의해 이 지역의 거주민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3. 지리

일리리아 전쟁 이후의 로마령 일리리쿰


일리리아/달마티아는 오늘날 북부 알바니아의 드리니 강에서 이스트라 반도(크로아티아)와 북쪽의 사바 강까지 뻗어 있었으며, 대략 오늘날의 북부 알바니아, 코소보,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및 해안 크로아티아(달마티아)에 해당한다.[1][2][3]

일리리아는 오늘날 북부 알바니아의 드리론 강(드리니 강)에서 북쪽의 다뉴브 강까지 뻗어 있었다. 아드리아 해 동쪽 해안을 따라 645km 길이로 뻗어 있는 해안 평야, 폭이 약 150km인 디나르 알프스 산맥, 그리고 북서쪽의 이스트라 반도로 구성되었다. 해안에는 수많은 섬들이 있었지만 식수가 부족했다. 산들은 해안 쪽으로 경작되었지만 대부분 불모지였다. 물 부족과 열악하거나 건조한 토양으로 인해 일리리아의 많은 지역은 농업이 빈약했고, 이는 해적 행위 발생의 원인이 되었다. 일리리쿰 남부(알바니아 중부 및 남부) 내륙은 더 비옥했다. 일리리아에는 수십 개의 독립적인 부족과 부족 집단이 거주했으며, 그들 대부분은 일리리아인으로 분류되었다. 북쪽에는 켈트족 부족도 있었다.[1][2][3]

북쪽의 파노니아 평원(또는 카르파티아 평원)은 더 비옥했다. 그 부족들은 파노니아인으로 분류되었다. 고고학적 발견과 지명은 파노니아인들이 현재 오스트리아인 서쪽에 살았던 일리리아인 및 동부 켈트족과 문화적으로 달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기원전 4세기 초 이 지역 북부에 켈트족이 침입한 후 켈트화되었다. 이 지역의 일부 부족( 에라비스키, 스코르디스키, 코티니, 보이이, 아나르티이)는 켈트족이었다. 파노니아인들은 일리리아인들과 문화적 유사성을 보이기도 했다. 철광석 채굴과 생산은 로마 시대 이전 그들의 경제의 중요한 부분이었다.[4][5]

4. 역사적 배경

일리리쿰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역사에 등장하는 지역이다. 기원전 229년부터 기원전 168년까지 로마는 세 차례의 일리리아 전쟁을 치렀다.


  • 제1차 일리리아 전쟁(기원전 229-228년): 아드리아 해에서 일리리아 해적들이 로마의 이탈리아 동맹국 선박을 공격하고, 아르디아에오이(오늘날의 몬테네그로와 북부 알바니아에 거주)의 세력이 커지면서 발생했다. 강력한 함대를 보유한 아르디아에오이는 에피다무스(현대 두러스, 알바니아), 파로스(스타리 그라드, 크로아티아), 코르푸 섬을 침략하고, 엘리스와 펠로폰네소스의 메세니아, 로마의 무역 중심지였던 에피루스의 포이니케를 공격했다. 이탈리아 선박에 대한 수많은 공격으로 인해 로마는 개입하게 되었고,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시키고 아르디아에오이를 공격하여 평화 조건을 합의했다.[6]
  • 제2차 일리리아 전쟁(기원전 219-218년): 기원전 220년, 아르디아에오이가 서부, 남부 및 동남부의 그리스 해안을 공격하고, 남부 일리리아의 로마 동맹국을 공격하면서 발생, 로마가 승리하였다.
  • 제3차 일리리아 전쟁(기원전 168년):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171-168년) 동안 로마와 마케도니아 왕국 간의 전쟁에서 아르디아에오이는 로마에 맞서 싸웠지만 패배. 로마는 로마와 동맹을 맺었던 도시와 부족을 제외하고, 폐위된 왕에게 지불하던 세금의 절반에 해당하는 공물을 부과했다.[6]


일리리아 전쟁 이후에도 로마는 일리리쿰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군사 활동을 전개했다.

  • 기원전 156년: 달마타이가 로마의 일리리아 속주를 공격하여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가 원정을 시작했다.[7]
  • 기원전 155년: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이 달마타이를 제압했다.[8]
  • 기원전 135년: 아르디아이와 팔라리족이 로마의 일리리아를 습격했으나, 세르비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이들을 공격했다.[9]
  • 기원전 129년: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가 이아피데스와 전쟁을 벌여 정복했다.[9]
  • 기원전 119년: 루키우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쿠스는 달마타이족과 전쟁을 벌여 개선식을 거행했다.[7]
  • 기원전 115년: 마르쿠스 아에밀리우스 스카우루스는 카르니와 타우리시에 대항하여 작전을 수행했다.[12]
  • 기원전 113년: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는 킴브리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노레이아 전투에서 패배했다.[13][14]
  • 기원전 78년~기원전 76년: 가이우스 코스코니우스는 2년 동안 달마티아의 상당 부분을 제압하고 살로나를 점령했다.[15][16]


기원전 5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렉스 바티니아(lex Vatinia)에 따라 갈리아 키살피나와 일리리쿰의 프로콘술(총독)로 임명되어 5년간 아퀼레이아에 주둔한 세 개 군단을 지휘하게 되었다.[17]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의 프로콘술이 사망하자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해당 속주의 프로콘술 직위와 군단 지휘권도 5년 동안 부여했다. 기원전 54년, 카이사르는 피루스테족이 인근 지역을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리리쿰으로 가서 군대를 징집했다. 피루스테족은 보상을 제안했고, 카이사르는 인질을 요구하며 불응 시 전쟁을 벌이겠다고 경고했다. 피루스테족은 이에 응했고, 카이사르는 중재인을 통해 피해를 평가하고 처벌을 부과했다.[18]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에도 일리리쿰은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 기원전 50년: 달마타이족은 리부르니아인들에게서 프로모나를 빼앗았다.
  • 기원전 48년: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는 살로나(솔린)를 포위했지만 실패했고, 퀸투스 코르니피키우스는 일리리쿰을 방어하고 여러 산악 요새를 공격했다.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는 일리리쿰에서 패배하고 살로나로 후퇴했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병사를 잃고 병으로 사망했다.[21]
  • 기원전 48년: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는 옥타비우스를 격파하고 아드리아 해를 정리했다.[22]
  • 기원전 45년: 일리리아 사절단이 카이사르에게 동맹을 요청하자, 카이사르는 조공과 인질을 요구했다.
  •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일리리아인들은 바티니우스를 무시하고 그의 부관이 이끄는 5개 코호트를 격파했다. 바티니우스는 디라키움(두러스)으로 도망쳤다.[23]
  • 기원전 44년: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일리리쿰을 배정받았다. 그는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와 교전하여 승리했다.[24][25][26][27]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5년부터 기원전 33년까지 일리리쿰에서 군사 작전을 펼쳐 이 지역을 로마의 지배하에 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아피데스족, 세게스타니족, 달마티아인들을 차례로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이 과정에서 여러 도시가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며, 로마의 지배에 저항하는 부족들은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30][31][32][33][35][37]

4. 1. 일리리아 전쟁

로마는 기원전 229년부터 기원전 168년까지 세 차례의 일리리아 전쟁을 치렀다. 제1차 일리리아 전쟁(기원전 229-228년)은 일리리아 해적들이 아드리아 해에서 로마의 이탈리아 동맹국 선박을 공격하고, 아르디아에오이(오늘날의 몬테네그로와 북부 알바니아에 거주하는 일리리아 부족)의 세력이 커지면서 발생했다. 강력한 함대를 보유한 아르디아에오이는 에피다무스(현대 두러스, 알바니아), 파로스(스타리 그라드, 크로아티아), 코르푸 섬을 침략하고, 엘리스와 펠로폰네소스의 메세니아, 로마의 무역 중심지였던 에피루스의 포이니케를 공격했다. 이탈리아 선박에 대한 수많은 공격으로 인해 로마는 개입하게 되었다. 로마는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시키고 아르디아에오이를 공격했다. 평화 조건이 합의되었다. 기원전 220년, 아르디아에오이는 서부, 남부 및 동남부의 그리스 해안을 공격했다. 그들은 이후 남부 일리리아의 로마 동맹국을 공격했다. 이것이 로마가 승리한 제2차 일리리아 전쟁(기원전 219-218년)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168년,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171-168년) 동안 로마와 마케도니아 왕국 간의 전쟁에서 아르디아에오이는 로마에 맞서 싸웠지만, 곧 패배했다(제3차 일리리아 전쟁, 기원전 168년). 로마는 로마와 동맹을 맺었던 도시와 부족을 제외하고, 폐위된 왕에게 지불하던 세금의 절반에 해당하는 공물을 부과했다.[6]

4. 2. 일리리아 전쟁 이후부터 로마 내전까지

기원전 156년, 달마타이는 로마의 일리리아 속주를 공격하고 로마 사절과의 면담을 거부했다. 이에 집정관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가 원정을 시작했다.[7] 피굴루스는 달마타이족에게 기습을 당해 델미니움 시로 몰아넣어졌으나, 불타는 발사체를 이용해 도시를 파괴하고 불태웠다.[7]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다음 해인 기원전 155년에 집정관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이 달마타이를 제압했다.[8]

기원전 135년, 아르디아이와 팔라리족이 로마의 일리리아를 습격했으나, 로마는 군대를 징집하여 이들을 사면시키고 배상을 요구했다. 일리리아의 반응이 느리자 집정관 세르비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이들을 공격했다.[9]

기원전 129년, 집정관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가 이아피데스와 전쟁을 벌여 정복한 것으로 보인다.[9] 그러나 리비우스에 따르면, 투디타누스는 처음에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도움으로 승리하여 개선식을 허가받았다.[10] 그는 아퀼레이아의 티마부스 강에게 헌사를 바치고, 사투르누스 시로 된 승리 비문을 새겼다.[11]

기원전 119년, 집정관 루키우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쿠스는 달마타이족과 전쟁을 벌여 개선식을 거행했다.[7] 그는 살로나에서 겨울을 보냈고, 아그노멘 달만티쿠스를 받았다. 이아피데스와 세게스타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9]

기원전 115년, 집정관 마르쿠스 아에밀리우스 스카우루스는 카르니와 타우리시에 대항하여 작전을 수행했다.[12]

기원전 113년, 집정관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는 킴브리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노레이아 전투에서 패배했다.[13][14]

기원전 78년~기원전 76년, 가이우스 코스코니우스는 2년 동안 달마티아의 상당 부분을 제압하고 살로나를 점령했다.[15][16]

4. 3. 카이사르의 통치

기원전 5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렉스 바티니아(lex Vatinia)에 따라 갈리아 키살피나와 일리리쿰의 프로콘술(총독)로 임명되어 5년간 아퀼레이아에 주둔한 세 개 군단을 지휘하게 되었다.[17]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의 프로콘술이 사망하자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해당 속주의 프로콘술 직위와 군단 지휘권도 5년 동안 부여했다.

기원전 54년, 카이사르는 피루스테족이 인근 지역을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리리쿰으로 가서 군대를 징집했다. 피루스테족은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며 보상을 제안했고, 카이사르는 인질을 요구하며 불응 시 전쟁을 벌이겠다고 경고했다. 피루스테족은 이에 응했고, 카이사르는 중재인을 통해 피해를 평가하고 처벌을 부과했다.[18]

4. 4. 카이사르 내전 시기의 일리리쿰

기원전 50년, 달마타이족은 리부르니아인들에게서 프로모나를 빼앗았다. 리부르니아인들은 카이사르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달마타이족은 도시를 떠나라는 카이사르의 요청을 거부했다. 카이사르는 분견대를 파견했지만 패배했다. 당시 카이사르는 카이사르의 내전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 문제를 추궁하지 않았다.[19]

기원전 48년,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는 살로나(솔린)를 포위했지만 실패했다. 같은 해, 퀸투스 코르니피키우스는 일리리쿰을 방어하고 여러 산악 요새를 공격했다.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는 일리리쿰에서 패배하고 살로나로 후퇴했으며, 그 과정에서 2,000명의 병사를 잃었다. 그는 살로나에서 병으로 사망했다.[21] 아피아누스는 가비니우스가 15개 코호트 (약 7,800명)와 3,000명의 기병을 이끌었다고 기록했다.[19]

기원전 48년,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는 옥타비우스를 격파하고 아드리아 해를 정리했다.[22]

기원전 45년, 일리리아 사절단이 카이사르에게 동맹을 요청하자, 카이사르는 조공과 인질을 요구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일리리아인들은 바티니우스를 무시하고 그의 부관이 이끄는 5개 코호트를 격파했다. 바티니우스는 디라키움(두러스)으로 도망쳤다.[23]

기원전 44년,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일리리쿰을 배정받았다. 그는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와 교전하여 승리했다.[24][25][26][27]

4. 5. 옥타비아누스의 일리리쿰 군사 작전 (기원전 35-33년)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5년에 이아피데스족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아퀼레이아를 습격하고 테르게스투스를 약탈했으며, 전년도에 폴라를 파괴한 이아피데스족을 공격했다. 가파르고 험한 길을 행군하던 중, 숲에 숨어 있던 이아피데스족의 매복을 받았으나, 길 양쪽 능선을 점령한 병력 덕분에 격파했다. 테르포누스 마을을 점령한 후, 이아피데스족의 주요 도시인 메툴루스(오굴린 근처)로 진격하여 포위 공격을 시작했다. 메툴루스족은 3,000명의 병력으로 로마군에 저항했으나, 옥타비아누스의 끈질긴 공격과 결단력에 결국 항복했다. 이들은 인질 50명을 제공하고 로마군 주둔을 허용했다. 그러나 주둔군이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하자, 아내와 아이들을 의회실에 가두고 불을 지르도록 명령한 뒤 로마군을 공격했다. 결국 패배한 이들은 의회실에 불을 질렀고, 많은 여성들이 자결하거나 아이들과 함께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로써 도시는 완전히 불탔고, 나머지 이아피데스족은 항복하여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가 떠난 후 포세니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마르쿠스 헬비우스가 이들을 정복하고 반란 지도자들을 처형한 뒤 나머지를 노예로 팔았다.[30]

같은 해, 옥타비아누스는 세게스타니족을 공격했다. 세게스타니족은 두 번이나 로마군에게 패했음에도 반란을 일으켰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지배를 받지 않는 판노니아 영토를 통해 진군하여 세게스타를 포위했다. 세게스타는 사바 강과 도랑으로 튼튼하게 보호받고 있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30일간의 포위 끝에 도시를 점령하고 벌금을 부과했다. 그는 25개 코호트를 주둔시키고 로마로 돌아갔다.[31] 이후 세게스타는 시스키아로 불렸으며, 현재는 크로아티아시사크이다.

기원전 34년, 판노니아와 달마티아에서 새로 정복한 일부 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32] 옥타비아누스는 달마티아인들을 공격하여 프로모나(현대 크닌, 크로아티아 남쪽)를 점령했다. 달마티아인들은 기원전 48년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의 군대를 패주시킨 이후 계속 무기를 들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프로모나 주변에 성벽을 건설하고, 숲을 통해 가장 높은 언덕으로 병력을 보내 밤에 경비병을 제압했다. 새벽에 도시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구원군을 이끌고 온 테스티무스를 산으로 몰아냈다. 프로모나는 함락되었고, 테스티무스는 군대를 해산하고 흩어지라고 명령했다.[33]

같은 해, 옥타비아누스는 수노디움 마을을 점령하고 달마티아인들의 매복을 격퇴했다. 그는 나무를 베어내고 가는 길에 있는 모든 마을을 점령하고 불태웠다.[35]

기원전 33년, 옥타비아누스는 세토비아를 포위하고 달마티아인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굶주림에 지친 달마티아인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하고, 아이들 700명과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에게서 빼앗은 로마 군단의 깃발을 넘겨주었다. 또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대 이후 밀린 조공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데르바니족 및 다른 부족들의 항복도 받아냈으나, 질병으로 인해 일부 부족에게는 접근하지 못했다. 이들은 인질을 넘겨주지 않았고 조약도 맺지 않았다.[35]

아피아누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옥시에이족, 페르토네아테족, 바티아테족 등 여러 부족들을 정복했다고 기록했다. 알프스에 살던 두 이아피데 부족인 몬티니족과 아벤데아테족은 옥타비아누스가 접근하자 항복했다. 그는 숲으로 도망친 이아피데스 중 가장 크고 호전적인 아레피니족의 도시를 점령하고 항복을 받아냈다. 또한 멜리테와 멜라이나 코르키라 섬을 점령하고 해적질을 일삼던 정착지를 파괴했으며, 젊은이들을 처형하고 나머지를 노예로 팔았다. 해적질을 한 리부르니아인들의 배도 빼앗았다.[37]

5. 로마 속주

기원전 31년,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하여 로마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고, 초대 로마 황제가 되는 정부 개혁을 단행했다. 기원전 27년, 일리리쿰은 공식적인 행정 단위로서 속주가 되었다. 제국은 원로원 속주와 황제 속주로 나뉘었는데, 처음에는 일리리쿰이 원로원 속주였으나, 속주 내 반란으로 인해 강력한 군대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드러나 기원전 11년에 황제 속주가 되었다.[38]

일리리쿰의 행정 조직은 아우구스투스 통치 말기와 티베리우스 통치 초기에 이루어졌다. 해안 지역은 스카르도나(스크라딘), 살로나, 나로나(메트코비치 근처)라는 도시 이름을 따서 세 개의 '사법 관할 구역(conventus juridicus)'으로 세분되었다.


  • '살로나 관할 구역'은 5개의 '자치 도시(civitates)'와 927개의 '데쿠리아'로 세분되었다.
  • '나로나 관할 구역'은 13개의 '자치 도시'와 540개의 '데쿠리아'로 세분되었다.
  • '스카르도나 관할 구역'은 14개의 '자치 도시'로 세분되었다.


더 도시화된 해안 지역에서는 도시들이 '자치시(municipia)'(자율 통치 도시) 또는 '식민시(coloniae)'(이탈리아 정착지)로 조직되었으며 자체 의회를 가지고 있었다. 일부 지역 사회는 특권을 누렸다. 도시화가 덜 된 내륙 지역에서는 행정이 '자치 도시'에만 의존했다.[38] 판노니아는 14개의 자치 도시로 세분되었다.[39]

달마티아는 로마에게 전략적, 경제적으로 중요했다. 달마티아 해안을 따라 여러 개의 중요한 상업 항구가 있었고, 달마티아 광산이 있었으며,[40] 살로나에는 제국 관청이 있었다. 두러스(현대 알바니아의 두러스)와 브린디시는 로마에서 동부 지중해로, 또는 그 반대로 여행하기 위해 아드리아 해를 건너는 데 사용되는 항구였다. 두러스는 동쪽의 비잔티움으로 향하는 로마 가도인 에그나티아 가도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자다르, 살로나(스플리트 외곽), 나로나(메트코비치 근처) 및 에피다우루스(두브로브니크 근처)와 같은 곳에 중요한 로마 공동체가 있었다.[41]

로마의 일리리쿰 속주는 달마티아와 판노니아로 구성되었다.

5. 1. 판노니아 전쟁 (기원전 14-10년)

기원전 14년부터 기원전 10년까지 남부 판노니아와 북부 달마티아에서 일련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로마 작가들은 이를 벨룸 판노미쿰(판노니아 전쟁)이라고 불렀다.[42] 이 사건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 카시우스 디오의 간략한 기록과 다른 저자들의 언급에서 비롯된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판노니아 전쟁이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마르쿠스 비니키우스에 의해 시작되었고, 티베리우스가 이를 종식시켰다고 기록했다.[43] 플로루스는 사바 강과 드라바 강 사이에 살던 판노니아인에 대한 비니키우스의 승리를 언급했다.[44] 카시우스 디오는 기원전 14년 판노니아인들의 반란이 신속하게 진압되었으며, 기원전 13년 말에 아우구스투스가 가장 중요한 동맹인 아그리파에게 최고 사령관을 주고 판노니아로 보냈다고 언급했다(이는 문제가 심각했음을 시사한다). 아그리파는 협상과 개인적인 영향력을 통해 상황을 해결했다.[45] 아그리파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브레우치족은 그와 맺었던 조약을 지키기를 거부했다. 티베리우스는 판노니아에서 지휘를 맡았고, 최근 로마에 정복된 스코르디스키의 도움을 받아 판노니아인을 격파했다.[46] 수에토니우스는 이어서 티베리우스가 달마티아인과 브레우치를 복종시켰다고 덧붙였다.[47]

기원전 11년에 티베리우스는 달마티아인과 판노니아인을 모두 격파했다. 기원전 11/10년 겨울에 다키아인들이 얼어붙은 다뉴브 강을 건너 판노니아를 약탈했다. 일부 달마티아 공동체는 공물 지불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갈리아에 있던 티베리우스는 이에 맞서기 위해 돌아와야 했다. 기원전 10년에는 판노니아와 달마티아에서 반복적인 봉기가 있었고, 티베리우스는 이를 진압했다.[48]

카시우스 디오는 이 모든 갈등을 반란이라고 칭했다.

5. 2. 바토니아 전쟁 (서기 6-9년)

바토(다에시시아테)와 바토(브레우키)가 이끈 대규모 반란은 로마에 큰 위협이 되었다. 로마인들은 두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이 전쟁을 바토니아 전쟁이라고 불렀다. 서기 6년, 로마는 게르마니아의 마르코만니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면서 일리리쿰의 원주민들에게 보조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 병력이 모이자 다에시시아테의 바토는 반란을 일으켰고,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달마티아의 여러 부족에서 온 사람들을 거느렸다. 반란군은 로마군을 패배시키고 로마 속주 마케도니아(그리스)를 점령하는 등 큰 피해를 입혔다.[51][52]

티베리우스 (훗날 황제가 됨)는 반란군을 상대하기 위해 대반란 작전을 수행하며 게릴라전을 벌였다. 서기 7년, 게르마니쿠스가 자유민과 해방 노예로 구성된 군대와 함께 일리리쿰으로 파견되었다. 로마군은 여러 부대로 나뉘어 반란군을 상대했고,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가 이끄는 군대는 반란군에게 거의 패배할 뻔했지만, 결국 승리했다.[53][54][55]

서기 8년, 브레우키족의 바토가 처형되고 판노니아에서 강도질이 발생했다.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는 브레우키를 정복하고 다른 부족들을 항복시켰다. 서기 9년, 전쟁은 달마티아로 제한되었고,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은 지역 주민들을 격파하고 티베리우스와 합류했다. 티베리우스는 다에시시아테족의 바토를 체포하면서 전쟁을 종식시켰다. 바토는 로마인들이 양떼의 보호자로 늑대를 보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말했다.[58][59][60]

5. 3. 속주 분할과 이후 해체

벨레우스 파테르쿨루스는 가이우스 비비우스 포스투무스를 서기 9년에 바토니아 전쟁 말기에 달마티아의 군 사령관으로 언급했는데, 이는 일리리쿰 속주가 달마티아와 판노니아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가장 초기의 기록이다.[61] 공식적으로 일리리쿰 속주는 상부(수페리우스) 일리리쿰과 하부(인페리우스) 일리리쿰으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에피다우루스(두브로브니크 근처의 차프타트)에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를 기리는 기념비의 비문 사본에 따르면, 돌라벨라는 아우구스투스의 죽음 직전에 일리리쿰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이 동상은 상부 일리리쿰의 도시들에 의해 세워졌다.[62] 하지만, 아직까지 하부 일리리쿰을 증명하는 비문은 발견되지 않았다. 달마티아는 상부 일리리쿰이라고 불렸다. 달마티아와 판노니아라는 이름이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지만, 상부 일리리쿰(달마티아)과 하부 일리리쿰(판노니아)이 두 지역의 공식 명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속주 총독은 달마티아의 살로나에 거주하며 상부 일리리쿰을 통치했다. 하부 일리리쿰은 군사 지구였으며, 군 사령관이 이 지역과 세 개의 군단을 담당했으며, 부총독과 같은 행정적 기능을 수행했다.[63]

사도 바울은 서기 57–58년 겨울에 기록한 로마서에서 일리리쿰을 지금까지의 선교 여행의 서쪽 끝 지점으로 언급했다.[64][65]

일리리쿰 속주는 결국 해체되어 달마티아(남부 지역)와 판노니아(북부 및 다뉴브 지역)의 두 개의 작은 속주로 대체되었다. 이 시기는 불분명하나, 샤셸-코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통치(서기 79–89년) 동안 이루어졌다는 견해를 지지한다.[63] 코바츠는 서기 54년에서 68년 사이에 세워진 네로의 동상 기단에 있는 비문이 판노니아에 주둔한 군단의 퇴역 군인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을 증명하며, 이것이 적어도 네로 통치 이후부터 별도의 판노니아가 존재했다는 최초의 비문학적 증거라고 주장한다.[66][67] 하지만, 샤셸-코스는 클라우디우스 통치(서기 43–51년) 하에서 일리리쿰 총독을 증명하는 비문과 1990년대 후반에 발표된 군사 외교 문서에서 서기 61년 7월에 판노니아 지역의 보조 부대가 일리리쿰에 주둔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베스파시아누스 시기 속주 분할설을 지지한다.[68][69]

6.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 일리리쿰 프라이펙투라

293년, 로마 제국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의 행정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사두정치를 창설했다.[70] 이는 두 명의 선임 황제(아우구스투스)와 두 명의 부제(카이사르)가 함께 통치하는 제도였다. 제국은 4개의 프라이펙투라로 분할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일리리쿰이었다.

일리리쿰 프라이펙투라는 판노니아 관구(서부 헝가리, 사바 강을 따라 크로아티아 북부, 세르비아 북부의 보이보디나), 다키아 관구(불가리아 서부, 중부 및 북부, 세르비아 중부 및 남부,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북부 및 북마케도니아 북부), 마케도니아 관구(그리스)를 포함했다. 따라서 그리스를 제외한 발칸 반도 전체와 크레타에게해 북부 및 남서부의 그리스 섬, 노리쿰을 아우르게 되었다.[70]

판노니아 관구는 다시 판노니아 프리마, 세쿤다, 사비아, 발레리아, 달마티아, 노리쿰 리펜세(다뉴브 강 북부), 노리쿰 메디테라네움(남부) 속주로 세분되었다.[70]

일리리쿰 프라이펙투라의 수도는 시르미움(현재 세르비아 북부 스렘스카 미트로비차)이었으며, 사두정치 하에서 갈레리우스가 수장이었다. 이 프라이펙투라는 7세기 초까지 존속했다.[70]

7. 군사적 중요성

판노니아는 제국 전체에 매우 가치 있는 군사력 공급원이었다. 3세기부터 6세기까지 가장 유용한 병력 중 일부는 판노니아, 달마티아, 모에시아, 로마 트라키아에서 모집되었다. 로마 장군 스틸리코는 이러한 이유로 이 지역을 서 로마의 통제하에 두려고 시도했다.[71] 다뉴브강을 따라 위치한 판노니아와 발칸반도의 다른 지역들은 이 강 건너편으로부터 제국에 가해지는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다. 따라서 판노니아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팻 서던은 일리리쿰이 제국을 결속시켰다고 본다.[72] 후기 로마 제국 시대에 일리리쿰의 관구청 군대는 사령관인 ''마기스터 밀리툼 페르 일리리쿰''을 두고 있었으며, 이는 나이수스(니시, 남부 세르비아)에 기반을 두었다.[73] 존 버리는 "일리리쿰의 중요성은 그 수입이 아니라 병력에 있었다"라고 썼다.[74] 이 지역의 토착민들은 뛰어난 군사적 기량으로 유명했으며, 로마군에게 중요해졌다.

3세기 위기 동안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재위 268–270), 퀸틸루스(재위 270), 아우렐리아누스(재위 270–275)와 프로부스(재위 276–282)는 시르미움(스렘스카 미트로비차, 세르비아)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역사가들에 의해 파노니아 황제라고 불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는 살로나(솔린,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났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콘스탄티우스 3세(421년)는 나이수스(니시, 세르비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모에시아 수페리오르에서 태어났다. 비잔틴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재위 491–518)는 디라키움(두러스, 알바니아)에서 태어났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565)는 오늘날 북마케도니아스코페에서 남동쪽으로 20km 떨어진 다르다니아 속주 다키아 관구에 위치한 타우레시움에서 태어났다.[75]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 제국의 마지막 라틴 황제였다. 그 이후 모든 황제는 그리스인이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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