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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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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사왕은 백제의 제15대 왕으로, 침류왕의 동생이다. 《삼국사기》에는 침류왕 사후 아들 아신왕이 어리자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서기》에는 찬탈설이 기록되어 있다.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하여 관방을 쌓고,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했으나, 광개토대왕의 즉위 이후 고구려에 밀려 한강 이북 지역을 상실했다. 진사왕은 사냥 중 사망했는데, 《일본서기》에는 일본과의 갈등으로 인해 암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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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왕
기본 정보
이름진사
칭호어라하
왕위 계승백제 국왕
재위 기간385년 11월 – 392년 11월
즉위385년 11월
이전 군주침류왕
다음 군주아신왕
본명부여진사/휘
출생일미상
사망일392년 11월
자녀부여진손
아버지근구수왕
어머니진애 부인
직업
종교불교
왕비해씨 부인
왕가부여
왕조백제
한국어 이름
한글진사왕
한자辰斯王
로마자 표기Jinsa-wang
매큔-라이샤워 표기Chinsa-wang
일본어 이름
가나しんしおう
가타카나チンサワン
로마자 표기Shinshiō
기타
목록제16대 백제 국왕
그림

2. 생애

진사왕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자 침류왕의 동생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385년 침류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인 진사가 왕위에 올랐다고 하며, 일본서기에는 진사가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백제는 근초고왕(346년~375년 재위) 말년부터 시작된 고구려의 공격으로 긴장된 상태에 있었으므로, 진사왕은 즉위 직후인 386년에 15세 이상의 주민을 동원하여 관방(關防)을 쌓게 했다.

389년 고구려 남쪽 변경을 공격했고, 390년에는 달솔 진가모를 시켜 고구려의 도곤성(都坤城)을 함락하고 200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391년 광개토대왕 즉위 후 백제는 수세에 몰렸다. 진사왕은 궁실을 중수하고 연못과 산을 쌓는 등 무리한 토목공사를 일으켜 국력을 낭비하였으며, 이로 인해 말갈과 고구려의 침입을 받았다. 391년 7월 광개토대왕이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북쪽 변경의 석현성(石峴城)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으나, 진사왕은 광개토대왕이 군사 작전에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맞서 싸우지 못했다. 10월에는 험준한 요새지인 관미성도 함락당했다.

392년 진사왕은 구원(狗原)에 사냥을 나갔다가 행궁(行宮)에서 죽었다. 《삼국사기》에는 진사왕이 구원까지 사냥을 나갔다가 다음 달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고, 구원의 행궁에서 승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진사왕이 피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정치 세력 간의 갈등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견해도 있다.[1]

2. 1. 즉위 배경

진사왕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자 침류왕의 동생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385년 11월, 침류왕이 죽었을 때 태자(후의 아신왕)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인 진사가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2]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진사가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 당시 백제는 근초고왕 (346년~375년 재위) 말년부터 시작된 고구려의 공격으로 긴장된 상태에 있었다.

2. 2. 고구려와의 갈등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자 침류왕의 동생인 진사왕은 386년 즉위 직후 15세 이상의 주민을 동원하여 관방(關防)을 쌓게 했다. 이는 근초고왕 재위 말년부터 시작된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한 긴장 상태 때문이었다.[1]

389년 고구려 남쪽 변경을 공격했고, 390년에는 달솔 진가모를 시켜 고구려의 도곤성(都坤城)을 함락하고 200명을 포로로 잡았다. 386년 봄에는 15세 이상의 국민을 동원하여 관방을 쌓아 북쪽의 고구려에 대비하고, 같은 해 여름에는 동진으로부터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에 책봉되어 “동진과 백제의 연합으로 고구려에 대항하려는 체제”를 갖추었다.[5]

그러나 391년 광개토대왕 즉위 후 백제는 수세에 몰렸다. 391년에 궁실을 중수하고 연못과 산을 쌓는 등 무리한 토목공사로 국력을 낭비하여 말갈과 고구려의 침입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광개토대왕이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북쪽 변경의 석현성(石峴城)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으나, 진사왕은 광개토대왕이 군사작전에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맞서 싸우지 못했다. 10월에는 험준한 요새지인 관미성도 함락당했다.[1]

390년 9월까지는 고구려에 대한 침략이 성공했으나, 391년 이후로는 고구려·예맥의 침입을 받아 패전을 거듭하였다. 특히 392년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4만의 군사를 이끌고 침략해 오자 한수(漢江) 이북의 여러 성들은 대부분 고구려에게 빼앗기게 되었다.[5]

2. 3. 내정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자 침류왕의 동생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침류왕이 죽었을 때 태자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인 진사가 즉위했다고 하며, 일본서기에는 진사가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되어 있다.[4] 당시 백제는 근초고왕(346년~375년) 말년부터 시작된 고구려의 공격으로 긴장된 상태에 있었으므로, 즉위 직후인 386년에 15세 이상의 주민을 동원하여 관방(關防)을 쌓게 했다.

391년 궁실을 중수하고 연못과 산을 쌓는 등 무리한 토목공사를 일으켜 국력을 낭비하였으며, 이로 인해 말갈과 고구려의 침입을 받았다.[4]

2. 4. 죽음

진사왕은 392년 구원(狗原)에서 사냥을 나갔다가 행궁(行宮)에서 죽었다.[1]삼국사기》에는 진사왕이 구원까지 사냥을 나갔다가 다음 달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고, 구원의 행궁에서 승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3]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진사왕이 피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정치 세력 간의 갈등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견해도 있다.[1]

2. 4. 1. 암살설 논란

침류왕의 아들 아신은 숙부인 진사왕이 부왕의 죽음에 관련된 것으로 보고 반기를 들었다. 한편 일본서기에 의하면 왜왕의 정책에 협조하지 않아, 왜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百濟(백제)의 辰斯王(진사왕)이 왕위에 있으면서 貴國(일본)의 天皇(천황)에게 예의를 잃었으므로, 紀角宿禰(기각숙례), 羽田矢代宿禰(우전시대숙례), 石川宿禰(석천숙례), 木菟宿禰(목면숙례)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책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百濟國(백제국)에서는 辰斯王(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고 한다.[3] 일본서기는 '기각숙례 등이 阿花(아화, 아신왕의 별칭)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고 적고 있다.[4]

3. 진사왕 대의 자연재해


  • 386년 가을 음력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이 피해를 입었다.[6]
  • 390년 가을 음력 7월에 살별이 북하(北河)에 나타났다.[7]
  • 392년 여름 음력 5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8]

4. 가계


  • 아버지: 근초고왕
  • 어머니: 아이부인(阿尒夫人) - 근초고왕의 재상 진고도(眞高道)의 딸.
  • 형: 침류왕
  • 왕비: 해씨(海氏)
  • 아들: 진손왕 - 일본에 정착하여 "신손왕(Shinson-Ō)"이라 불렸고, 스가노 씨의 시조가 되어 후지데라를 창건하였다.

5. 진사왕이 등장하는 작품

참조

[1] 서적 Nihon kodai shizoku jinmei jiten. https://www.worldcat[...] Yoshikawakobunkan
[2] 서적 日本書紀
[3] 서적 三国史記
[4] 서적 日本書紀
[5] 서적 古代東アジア史論集 吉川弘文館
[6] 서적 삼국사기
[7] 서적 삼국사기
[8] 서적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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