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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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국진은 중국 원나라 말기 해적으로, 저장성 타이저우 출신이다. 그는 해적과 결탁했다는 모함으로 인해 반란을 일으켰고, 원 조정에 여러 차례 저항하며 세력을 키웠다. 방국진은 원나라 조정과 협력과 반란을 반복하며 절동 지역의 패주로 군림했고, 고려에도 사신을 보내 교류했다. 명나라 건국 후 주원장에게 항복하여 광서좌승상에 임명되었으나, 실제 부임하지 않고 남경에서 사망했다. 그는 뛰어난 행정 능력과 외교 수완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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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국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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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방국진 (方國珍) |
로마자 표기 | Bang Gukjin |
시대 | 원나라 말기 |
생애 | |
출생 | 1319년 |
사망 | 1374년 |
활동 시기 | 원나라 말기 ~ 명나라 초 |
활동 | |
주요 활동 | 원나라 말기 반란 지도자 |
초기 활동 | 해적 활동 |
세력 확장 | 저장성 지역 장악 |
투항 | 주원장에게 투항 |
가계 | |
형제 | 방국보(方國寶), 방국현(方國顯), 방국영(方國瑛) |
기타 | |
관련 인물 | 주원장 장사성 진우량 |
2. 생애
중국 저장성 타이저우(台州) 황옌구(黃岩) 출신으로, 일설에는 영해(寧海, 지금의 저장성 닝하이현) 사람이라고도 한다. 대대로 소금 장사를 하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힘이 세고 물에 능통했다.
원나라 말기인 지정(至正) 8년(1348년), 억울한 고발을 피해 바닷가 섬에서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해상 세력을 기반으로 원나라 조운선을 약탈하고 관군을 격파하며 세력을 키웠다. 원 조정은 토벌과 회유를 반복했으나, 방국진은 이를 이용해 더 높은 관직을 얻고 세력을 확장하여 1356년까지 저장성의 주요 해안 지역인 경원(慶元), 태주(台州), 온주(溫州)를 장악하고 절동(浙東)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중원의 패권 다툼에는 거리를 두면서 자신의 영역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주변의 장사성(張士誠)과는 경쟁과 협력을 반복했고, 새롭게 부상한 주원장(朱元璋)과는 외교적 교류와 신경전을 벌이며 원 조정과 주원장 사이에서 독자 생존을 모색했다. 또한 1358년부터 여러 차례 고려에 사신을 보내 교류하기도 했다.[1]
그러나 1363년 파양호 전투에서 진우량(陳友諒)이 주원장에게 패배하면서 세력 균형이 무너졌다. 결국 1367년 주원장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그해 12월 투항했다.[2] 주원장은 방국진의 해상 세력 등을 고려하여 비교적 관대하게 처분했다. 투항 후에는 주원장 부친의 휘를 피해 이름을 '곡정(谷貞)'으로 바꾸었다.
명나라 건국 후인 홍무 2년(1369년), 명목상의 관직과 식록을 받고 난징에서 지내다가 1374년 병사했다. 그는 원말 명초의 여러 군웅 가운데 유일하게 천수를 누렸는데, 이는 실리를 추구하며 여러 세력 사이에서 생존을 도모했던 그의 처세술 덕분으로 평가받는다.
2. 1. 초기 생애 및 반란
중국 절강(浙江) 태주(台州) 황암(黃岩) 출신으로, 일설에는 영해(寧海, 지금의 저장성 닝하이현) 사람이라고도 한다. 눈이 크고 힘이 세어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을 수 있을 정도였으며, 물에도 능숙했다. 집안은 대대로 소금 장사를 하였으나 가난했고,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의 가족이 밀수나 해적 행위에 연루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원 순제 지정(至正) 8년(1348년), 지주의 모함 혹은 해적과 결탁했다는 밀고를 받고 연안의 송문도(松門島)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동생 방국영(方國瑛)과 함께 반원의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해상 세력을 기반으로 물길로 운반되던 식량을 약탈하고 원 조정의 관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며 세력을 키웠다. 원 조정의 초기 토벌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고, 수도 대도(大都, 현재의 베이징)로 운송되던 식량 공급에 차질이 생기자 원 조정은 불안감을 느꼈다.
지정 11년(1351년), 원의 강절행성(江浙行省) 수군을 대려양(大閭洋)에서 크게 무찔렀고, 육지에서는 절동도도원수(浙東道都元帥) 태불화(泰不華)의 군대를 격파하는 등 연이어 승리했다. 원 조정은 토벌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방국진에게 현위(縣尉) 등의 관직을 주며 회유하려 했으나, 방국진은 이를 받아들이는 척하다가 다시 반기를 드는 일을 반복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오히려 더 높은 관직을 제수받았다. 1351년 8월, 원의 대사도 다시테무르(達識帖睦邇)가 항복을 권유했지만, 이듬해 4월 태불화가 군대를 정비하자 방국진은 이를 속임수로 의심하고 다시 공격하여 태불화를 죽이고 6월에는 황암성을 점령했다.
이후 방국진은 원의 중서성(中書省)에 뇌물을 보내 시간을 벌면서 세력을 더욱 확장했다. 지정 14년(1354년) 9월에는 태주(台州)를 점령했고, 이듬해에는 온주(溫州)와 경원(慶元, 현재의 닝보)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1356년까지 그는 절강성의 주요 해안 지역인 경원, 태주, 온주 세 부(府)를 완전히 장악했으며, 당시 이 지역의 인구는 250만 명에 달했고 그의 함대는 1,000척이 넘었다고 전해진다. 마침내 원 조정으로부터 해도운량만호(海道運糧萬戶)라는 관직을 받고 경원으로 근거지를 옮겨, 절동(浙東)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 즉 패주(霸主)가 되었다. 그는 중원에서 벌어지는 패권 다툼에는 직접 개입하지 않고, 절동 지역에 머무르며 학교와 수로를 건설하고 법을 엄격히 집행하는 등 지역 안정에 힘썼다.
지정 16년(1356년), 장사성(張士誠)이 장강(양쯔강)을 건너 남하하여 소주(蘇州)를 점령하고 절동 지역까지 넘보자, 방국진은 원 조정으로부터 강절행성참지정사(江浙行省參知政事) 관직을 받고 군대를 일으켜 장사성을 공격했다. 곤산(昆山), 태창(太倉) 방면으로 진출하여 연전연승하며 장사성이 원 조정에 투항하도록 압박했다. 이에 원 조정은 방국진의 공을 인정하여 태위(太尉), 강절행성좌승상(江浙行省左丞相)으로 삼고 구국공(衢國公)에 봉하여 절동 지역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지정 26년(1366년) 9월에는 강절행성 좌승상이자 구국공에 올랐다.
지정 18년(1358년) 12월, 주원장(朱元璋)이 보낸 군대가 구주(衢州), 무주(婺州) 지역으로 남하하면서 방국진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등 처음으로 접촉했다. 한편, 방국진은 바다 건너 고려와도 교류를 시작했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따르면, 공민왕 7년(1358년) 4월과 8년(1359년) 8월에 태주에서 사자를 보내 고려에 방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때 고려 측 기록에는 방국진을 '명주사도(明州司徒)'라고 칭하고 있다.[1]
지정 19년(1359년) 3월, 방국진은 형식적으로 원 조정에 다시 투항하여 복건행성평장정사(福建行省平章政事)로 임명되었으나, 직인만 받고 실제 부임은 거부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다시 강절행성평장정사(江浙行省平章政事) 직책을 받고 원 조정에 계속해서 식량을 공급했다. 이는 원 조정과 점차 강성해지는 주원장 세력 사이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려는 그의 외교적 전략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후 주원장은 편지를 보내 방국진의 12가지 죄를 열거하며 꾸짖었고, 두 사람의 사이는 점차 악화되었다.
2. 2. 원나라와의 관계
원 순제 지정(至正) 8년(1348년), 저장성 연안의 송문도(松門島)에서 반원의 기치를 내걸고 병사를 일으켰다. 그는 초기 해상 운송 식량을 약탈하며 원 조정의 관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 지정 11년(1351년)에는 원의 강절행성(江浙行省) 수군을 대려양(大閭洋)에서 크게 무찔렀고, 육지에서도 절동도도원수(浙東道都元帥) 태불화(泰不華)의 군대를 격파하였다.원 조정은 처음에는 회유책을 시도했다. 지정 11년 8월, 대사도 다시테무르(達識帖睦邇)가 항복을 권유했으나, 이듬해 태불화가 군대를 재정비하자 방국진은 이를 기만으로 여기고 다시 반기를 들어 태불화를 공격해 죽였다. 이후 황암성을 점령하며 세력을 넓혔다.
방국진은 원 조정과의 관계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중서성(中書省)에 뇌물을 보내 시간을 벌기도 했고, 지정 14년(1354년) 태주(台州)를 점령하고 이듬해 온주(溫州), 경원(慶元)까지 함락시킨 뒤에는 원 조정으로부터 해도운량만호(海道運糧萬戶)라는 관직을 받아 경원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를 통해 절동(浙東)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으나, 중원의 패권 다툼에는 거리를 두며 자신의 영역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지정 16년(1356년), 남하한 장사성(張士誠)이 소주(蘇州)를 점령하고 절동 지역을 위협하자, 방국진은 원으로부터 강절행성참지정사(江浙行省參知政事) 관직을 받고 장사성을 공격했다. 그는 연전연승하며 장사성이 원 조정에 투항하도록 압박했고, 이 공로로 원 조정으로부터 태위(太尉), 강절행성좌승상(江浙行省左丞相)으로 임명되고 구국공(衢國公)의 지위를 받아 절동 지역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주원장(朱元璋) 세력이 부상하면서 상황은 복잡해졌다. 지정 18년(1358년) 주원장의 군대가 남하하자, 이듬해 방국진은 형식적으로 주원장에게 투항하는 한편, 원 조정으로부터 복건행성평장정사(福建行省平章政事) 직책을 제수받았다. 실제 부임은 거부했지만, 같은 해 10월 다시 원 조정으로부터 강절행성평장정사(江浙行省平章政事) 직책을 받고 원에 식량을 계속 공급하며 양측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이 시기 방국진은 고려와도 교류했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따르면, 1358년과 1359년, 그리고 1364년과 1365년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으며, 특히 《옥해》, 《통지》 같은 서적을 보내기도 했다.[1] 이는 당시 방국진의 독자적인 세력과 외교 활동을 보여준다.
지정 22년(1362년)에는 원의 코케 테무르(擴廓帖木兒)나 복건(福建)의 진우정(陳友定)과 연대하여 주원장에 맞서려 했으나, 이듬해 진우량(陳友諒)이 파양호 전투에서 주원장에게 패배하면서 방국진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결국 지정 27년(1367년) 주원장이 보낸 군대의 공격을 받아 조아강(曹娥江) 해전에서 패배하고 주산(舟山)으로 물러났다가 12월에 투항했다.[2] 그는 모든 책임을 조카 방명선(方明善)에게 떠넘기려 했으나, 주원장은 그의 변덕스러움을 질책하고 남은 부하들과 관리들을 안휘(安徽)로 이주시켰다. 투항 후 방국진은 주원장 부친의 이름 '세진(世珍)'을 피해 이름을 '곡정(谷貞)'으로 바꾸었다.
이처럼 방국진은 원나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반란을 일으켜 독자적인 해상 세력을 구축하고, 원 조정과 다른 군웅들 사이에서 복잡한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려 했다. 그는 여러 차례 원 조정의 관직을 받으면서도 실질적인 독립성을 유지했고, 필요에 따라 원 조정과 협력하거나 대립하는 실리적인 외교를 펼쳤다. 하지만 결국 새롭게 부상한 주원장의 세력에 밀려 투항하게 되었다.
2. 3. 장사성, 주원장과의 관계
1356년 장사성(張士誠)이 장강을 넘어 남하하여 소주(蘇州)를 점령하고 절동 지역 침공을 시도하자, 방국진은 원 조정으로부터 강절행성참지정사(江浙行省參知政事) 관직을 받고 군사를 일으켜 장사성과 싸웠다. 그는 곤산(昆山), 태창(太倉) 방면으로 진출하여 연이어 승리하며 장사성이 원 조정에 투항하도록 압박했다. 그러나 1357년부터는 이전의 적대 관계에도 불구하고, 방국진의 함대는 장사성이 1363년 원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할 때까지 대도(大都)로 11만 탄(擔)의 곡물을 수송하는 것을 도왔다.한편, 1358년 12월에는 주원장(朱元璋)의 군대가 남하하여 방국진에게 투항을 권유했다. 방국진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듬해 3월 원 조정에 명목상 투항하여 복건행성평장정사(福建行省平章政事) 직책을 받았다(실제 부임은 거부). 이후 주원장은 사람을 보내 방국진의 12가지 죄를 열거하며 꾸짖는 편지를 보냈고,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방국진은 1362년 원의 코케 테무르(擴廓帖木兒)나 복건(福建)의 진우정(陳友定)과 동맹을 맺어 주원장에 대항했다.
방국진과 주원장은 이전부터 빈번한 외교적 교류를 가졌다. 때로는 서로 선물을 거절하는 등 긴장 관계를 보이기도 했다. 1361년 방국진이 금과 옥으로 장식된 안장을 선물로 보냈으나, 주원장은 "현재 도처에 어려움이 많으니, 시대는 유능한 사람과 곡식, 베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귀중한 장난감은 가치가 없다"며 거절한 일화가 있다. 주원장은 방국진이 코케 테무르, 진우정, 그리고 원나라와 협력하는 것을 비난하기도 했다. 방국진의 회피적인 태도에 주원장은 1360년 "우리는 방국진을 당분간 내버려둘 것이다. 내가 소주를 정복한 후에도 그가 우리에게 복종하려 한다면 이미 너무 늦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전략적인 인내심을 보이기도 했다.
1363년 남방의 강력한 세력이었던 진우량(陳友諒)이 파양호 전투에서 주원장에게 패배하자 방국진은 큰 위협을 느꼈다. 파양호 전투 이후, 방국진은 승리한 주원장(당시 오왕(吳王))에게 만약 항주를 장사성에게서 먼저 점령한다면 항복하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주원장은 1366년 12월 항주를 함락시켰으나 방국진은 즉시 항복하지 않았다.
1367년 9월, 주원장이 소주를 함락시키고 장사성을 처형하자 강남 지역에는 방국진만이 주원장의 경쟁자로 남게 되었다. 주원장은 곧바로 주량조(朱亮祖), 탕화(湯和), 오정(吳禎), 요영충(廖永忠) 등을 보내 방국진에 대한 수륙 양면 공격을 개시했다. 10월과 11월에 걸쳐 주원장의 군대는 태주(台州)와 온주(溫州)를 점령했고, 탕화가 이끄는 함대는 방국진의 수군을 조아강(曹娥江)에서 격파하고 명주(寧波)에서 몰아냈다. 결국 방국진은 1367년 12월, 명(明) 건국 직전에 부득이하게 주원장에게 투항했다.[2]
주원장은 방국진의 항복을 비교적 관대하게 받아들였는데, 이는 방국진이 주원장의 정통성을 비교적 일찍 인정했고, 지역 정치에 다소 수동적이었으며, 주원장이 남중국 해안을 장악하는 데 방국진의 함대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항복 후 방국진은 주원장의 아버지 이름 '세진(世珍)'과 자신의 이름 '국진(國珍)'의 '진(珍)' 자가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곡정(谷貞)'으로 바꾸었다. 그는 자선대부(資善大夫), 광서행성 좌승상 등 명목상의 관직과 식록을 받고 남경(南京)에 하사받은 저택에서 지내다 1374년 그곳에서 자연사했다. 방국진은 주원장과 경쟁했던 여러 군웅 가운데 유일하게 천수를 누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방국진의 세력이 정리되면서 주원장은 북벌에 집중하여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고 명나라를 건국하며 중국 통일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방국진 자신은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천하 패권을 노리기보다는 주원장, 장사성 등 여러 세력과 결정적인 적대 관계를 피하면서 실리를 추구하는 전략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2. 4. 고려와의 관계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방국진과 고려의 교류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 공민왕 7년(1358년) 4월과 이듬해인 공민왕 8년(1359년) 8월, 방국진은 태주(台州)에서 고려에 사자를 보내 방물을 바쳤다.이후 고려가 홍건적의 난을 겪고 난 뒤인 1364년 6월과 1365년 8월, 10월에도 방국진은 명주(明州)에서 사자를 보내 침향, 활과 화살(궁시), 그리고 《옥해》(玉海), 《통지》(通志)와 같은 서적을 바쳤다.[1] 이 시기 기록에서 방국진은 '명주사도(明州司徒)'라는 칭호로 불렸다. 중국의 군벌이 고려에 사신을 보낸 것은 장사성(張士誠)에 이어 방국진이 두 번째였다.
한편, 지정 23년(1363년) 남방의 강력한 세력이었던 진우량(陳友諒)이 파양호(鄱陽湖)에서 주원장(朱元璋)에게 패배하자, 방국진은 위협을 느끼고 고려에 원조를 요청하려 하기도 했다.
2. 5. 주원장에 대한 협력과 갈등
1358년 12월, 주원장이 보낸 군대가 구주(衢州)와 무주(婺州) 지역으로 남하하며 방국진에게 투항을 권유했다. 그러나 이듬해 3월 방국진은 원 조정에 투항하여 복건행성평장정사(福建行省平章政事) 직위를 받았고, 10월에는 다시 강절행성평장정사(江浙行省平章政事)에 임명되어 원 조정을 계속 지원했다. 이에 주원장은 사신을 보내 방국진의 12가지 죄를 지적하며 꾸짖었고, 둘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외교적 교류가 빈번했다. 1361년 방국진은 금과 옥으로 장식된 안장을 선물로 보냈으나, 주원장은 "현재 도처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시대는 유능한 사람을 필요로 하며, 곡식과 베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귀중한 장난감은 가치가 없습니다."라며 거절했다. 주원장은 방국진이 원나라의 코케 테무르, 진우정 등과 협력하는 것을 비판했다. 방국진의 이러한 회피적인 태도에 주원장은 1360년 "우리는 [방국진]을 당분간 내버려둘 것이다. 내가 소주를 정복한 후에도 그가 우리에게 복종하려 한다면 이미 너무 늦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전략적인 인내심을 보였다.
1362년 방국진은 원의 코케 테무르, 복건(福建)의 진우정 등과 연합하여 주원장에게 맞섰다. 그러나 1363년 파양호 전투에서 주원장이 남방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진우량을 격파하자, 방국진은 큰 위협을 느꼈다. 파양호 전투 이후, 방국진은 승리한 주원장(당시 오왕)에게 만약 장사성으로부터 항주를 먼저 점령한다면 항복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1366년 12월 주원장이 실제로 항주를 함락시킨 뒤에도 방국진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결국 1367년 9월, 주원장은 주량조(朱亮祖), 탕화, 오정(吳禎), 요영충(廖永忠) 등을 보내 절동(浙東) 지역 공략에 나섰다. 10월과 11월, 주원장의 군대는 태주(台州)와 온주(溫州)를 점령하고, 탕화의 함대는 조아강(曹娥江)에서 방국진의 수군을 격파하며 그를 영파(寧波)에서 몰아냈다. 방국진은 주산(舟山)으로 물러나 저항했으나, 12월 결국 주원장에게 투항했다.[2]
항복 과정에서 방국진은 부하 첨정(詹鼎)의 계책에 따라 모든 죄를 자신의 당질인 방명선(方明善)에게 떠넘기려 했다. 주원장은 그의 변덕스러움을 꾸짖었지만, 그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나머지 부하들과 관리들을 안휘 제주(滁州)로 이주시켰다. 방국진은 투항 후 주원장의 아버지 이름인 '세진(世珍)'과 주원장의 자(字) '국서(國瑞)'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 '국진(國珍)'을 동음이의어인 '곡정(谷貞)'으로 바꾸었다.
주원장은 방국진을 비교적 관대하게 대우했는데, 이는 방국진이 비교적 일찍 주원장의 정통성을 인정했고, 지역 정치에 소극적이었으며, 주원장이 남중국 해안을 장악하는 데 그의 함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368년 남경으로 압송된 후에도 좋은 대우를 받았으며, 명 홍무 2년(1369년)에는 자선대부(資善大夫), 광서좌승상(廣西左丞相)이라는 명목상의 관직과 함께 남경에 저택을 하사받았다. 그는 1374년 남경에서 자연사했으며, 주원장과 경쟁했던 군웅들 가운데 유일하게 천수를 누렸다.
2. 6. 명나라 건국 이후
1367년 말, 주원장은 항주를 점령한 뒤에도 항복하지 않은 방국진에 대한 수륙 양면 공격을 개시했다. 주량조(朱亮祖)가 이끄는 군대는 10월과 11월에 각각 태주와 온주를 함락시켰고, 탕화(湯和)의 함대는 닝보에서 방국진을 몰아냈다. 결국 방국진은 1367년 12월, 명나라 건국 직전에 주원장에게 투항했다.[2]항복 조건은 비교적 유리했는데, 이는 방국진이 일찍이 주원장의 정통성을 인정했고 지역 정치에 소극적이었으며, 주원장이 남중국 해안 정복을 위해 그의 함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항복 후 방국진은 자신의 이름 '국진(國珍)'이 주원장의 자(字)인 '국서(國瑞)'와 주원장 아버지의 휘(諱)인 '세진(世珍)'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동음이의어인 '곡정(谷貞)'으로 개명했다.
명나라 홍무 2년(1369년), 방곡정은 자선대부(資善大夫) 및 광서행성(廣西行省) 좌승상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는 실제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봉록만 받는 명목상의 지위였다. 그는 난징에 저택을 하사받아 거주했으며, 홍무 7년(1374년) 3월 남경(당시 응천부)에서 자연사했다.
방국진은 원나라 말기 주원장, 진우량, 장사성 등과 경쟁했던 여러 군웅 가운데 유일하게 천수를 누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는 그가 천하를 차지하려는 큰 야심보다는 주변 세력들과의 결정적인 적대 관계를 피하고 실리적인 외교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보존하려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3. 사망
홍무 7년(1374년) 3월에 남경(응천부)에서 향년 56세로 자연사했다.[2] 이는 주원장과 대립했던 여러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천수를 누린 사례로 평가된다.
사후 남경 동쪽 20리 떨어진 옥산(玉山) 벌판에 안장되었다. 홍무제는 그를 위해 직접 제사를 지냈으며, 한림학사 송렴에게 명하여 《고 자선대부 광시 등행중서성좌승상 방공 신도비명》(故資善大夫廣西等行中書省左丞方公神道碑銘)을 짓도록 했다.
그의 아들 방례(方禮)는 광양위지휘첨사(廣洋衛指揮僉事) 벼슬에 이르렀고, 다른 아들 방관(方關)은 호분위천호소진무(虎賁衛千戶所鎭撫)로 임명되었다. 방관의 동생 방행(方行)은 자가 명민(明敏)이었으며, 시에 능하여 학사 송렴으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했다.
4. 평가
프레더릭 W. 모트는 방국진의 행정 및 외교적 수완을 높이 평가하며, 그가 가진 항해술과 조직 능력을 바탕으로 산적 출신이라는 한계를 넘어 지역 지도자로 성장했다고 보았다. 모트는 방국진이 원나라 말기 혼란 속에서 독립적인 세력으로 자리 잡았으며, 장사성과 비교했을 때 훨씬 적은 자원으로 더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분석했다.
방국진은 소금 밀매업자 출신으로, 1348년 원나라의 탄압을 피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여러 차례 원나라 토벌군을 격파하며 세력을 키웠고, 원 조정은 토벌의 어려움을 느끼고 회유책으로 관직을 제수했다. 방국진은 이를 받아들이면서도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했고, 필요할 때는 다시 반기를 드는 실리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며 그는 1366년에는 강절행성 좌승상이자 구국공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는 천하를 차지하려는 큰 야심을 품기보다는, 주원장, 진우량, 코코 테무르 등 당대의 여러 군웅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결정적인 충돌을 피하려 노력했다. 이는 혼란한 시기에 자신의 세력을 보존하고 생존하기 위한 현실적인 전략으로 평가받는다.
1367년, 주원장이 장사성을 격파하고 강남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자, 방국진은 대항할 수 없음을 깨닫고 주원장의 부하 탕화에게 항복했다. 항복 후에는 주원장 집안과의 이름 중복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이름을 '곡정(谷貞)'으로 바꾸는 등 처세에 능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명나라로부터 명목상의 직위인 광서행성 좌승상에 임명되었고, 1374년 수도 응천부에서 사망했다. 원말 명초의 여러 영웅호걸 중 유일하게 천수를 누린 인물이었다.
결론적으로 방국진은 비록 군벌이었지만, 외세인 원나라에 저항하고 변화하는 정세 속에서 유연하게 대처하며 자신의 세력을 보존하고 생존하는 데 성공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그의 행보는 혼란기에 실리적인 판단과 외교적 수완을 통해 생존을 도모한 현실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참조
[1]
서적
고려사
1364-06-23
[2]
서적
명나라 역대황제평전
주류성출판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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