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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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징비록은 임진왜란 시기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이 전쟁의 경험을 기록한 책이다. 류성룡은 전쟁의 참혹함과 조정의 실책을 반성하고, 다시는 같은 비극을 겪지 않도록 교훈을 후세에 전하고자 징비록을 저술했다. 1604년에 초고가 완성되었으며, 임진왜란의 배경, 전개 과정, 주요 인물들의 일화 등을 담고 있다. 징비록은 조선과 일본에서 간행되었으며, 현대에도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연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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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비록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언어 | 한국어 |
| 원저자 | 류성룡 |
| 분야 | 역사 기록, 회고록 |
| 시대 | 조선 |
| 제목 정보 | |
| 한글 | 징비록 |
| 한자 | 懲毖錄 |
| 로마자 표기 | Jingbirok |
| 일본어 | 懲毖録 (ちょうひろく) |
| 문화재 정보 | |
| 지정 종류 | 국보 |
| 지정 번호 | 132 |
| 지정일 | 1969년 11월 12일 |
| 소장 | 한국국학진흥원 |
|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
| 내용 | |
| 주요 내용 | 임진왜란의 전개 과정과 교훈 |
| 기록 시기 | 류성룡 사후 |
| 간행 시기 | 광해군 때 |
2. 저술 배경 및 동기
懲毖錄중국어은 류성룡이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 도체찰사 등 요직을 맡아 국난 극복에 힘썼으나, 전쟁 발발을 예측하지 못하고 초기 대응에 미흡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책이다. 그는 전쟁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징비록》을 집필하며, 전쟁의 참혹한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후세에 전하고자 했다.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의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10]에서 징비라는 제목을 따왔으며,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친 전란의 원인, 전황 등을 기록했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류성룡은 조선 조정의 고관이었다.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추천하기도 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의지를 간파하지 못한 김성일을 지지했던 탓에 책임을 물어 한때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백의종군으로 왕의 곁을 지켰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다시 평안도 탐찰사, 삼도도체찰사 등 요직을 역임했다.
2. 1. 류성룡의 사상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학설에 따라 이기론(理氣論)을 펼치고 양명학을 비판했으며, 이황의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좇아 기(氣)는 이(理)가 아니면 생(生)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여 기보다 앞서 있는 실체로서의 이를 규정했다.[16]류성룡은 양명학의 핵심 이론인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과 치양지설(致良知說)이 ‘굽은 것을 바로 잡으려다 지나치게 곧아진(矯枉而過直)’ 폐단에 빠진 것으로 불교의 학설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하나에 치중됨이 없이 병진해야 한다는 지행병진설(知行竝進說)을 주장했다.[16]
그가 남긴 저작 중 『징비록』(懲毖錄)은 이러한 ‘알면 행하여야 한다’는 지행병진설이 잘 반영된 책으로 알려져 있다. 『징비록』은 참혹한 국난이었던 임진왜란에서의 아픈 경험을 거울삼아 다시 그러한 수난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하기 위하여 남긴 저술이다.[16]
2. 2. 저술 목적
류성룡은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의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10]에서 따온 '징비'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임진왜란의 전란사로서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7년간의 전란 원인과 전황 등을 기록한 《징비록》을 저술했다. 류성룡은 책의 첫 장에서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국토를 피폐하게 만든 참혹했던 전쟁을 회고하며, 다시는 같은 전란을 겪지 않도록 지난날 조정의 실책들을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며 후세에 길이 남길 쓰라린 반성의 기록으로 이 책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밝혔다.[16]류성룡은 《징비록》을 통해 임진왜란의 원인과 경과, 자신의 잘못과 조정의 실책, 백성들의 조정에 대한 비판 등을 담았다. 그는 조선이 "삼도가 함락되고, 사방이 붕괴되었다"고 기술하며,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나라는 나에게 중대한 임무를 맡겼으나, 나는 그에 부응하지 못했고, 나라가 겪은 고통은 위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이다. 이는 덮어둘 수도 없고, 죽음으로써 속죄할 수도 없다"고 적었다. 류성룡은 조선이 입은 재앙의 책임을 자신의 부족한 국방 강조에 돌리고, 후세가 자신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뼈아픈 교훈을 제대로 기록하여 남기고자 했다.[2]
임진왜란 당시 조선 조정의 측근에 있었던 류성룡은 은퇴 후 고향에 은거하며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그는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추천하기도 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의지를 간파하지 못한 김성일을 지지했던 탓에 책임을 물어 한때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이후 백의종군으로 왕의 곁을 지켰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다시 평안도 탐찰사, 삼도도체찰사 등 요직을 역임했다.
3. 내용 구성 및 분석
懲毖錄중국어은 류성룡이 임진왜란 7년 동안의 상황을 기록한 책이다. 시경의 구절 "예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10]에서 제목을 따왔는데, 이는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발발 전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추천하는 등 국방력 강화에 힘썼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의지를 간파하지 못한 김성일을 지지하여 한때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이후 백의종군하여 공을 세워 다시 요직을 역임했다.
懲毖錄중국어 초고는 1604년에 완성되었으며, 1633년에는 류성룡의 서애집|西厓集한국어과 합쳐져 2권으로 널리 읽혔고, 1647년에는 단독 1권으로 간행되었다. 1695년에는 일본 교토에서 훈독을 붙여 간행되면서 일본에도 알려지게 되었고, 1712년 조선에서는 일본으로의 서적 수출을 금지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懲毖錄중국어은 임진왜란의 전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전쟁 발발 전 조선 조정의 상황, 명나라의 동태, 일본과의 협상 등을 다루고 있다. 특히,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이 첫 번째 공성전에서 전사했다는 사실 등 조선 측의 상황이 일본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3. 1. 16권본 구성
- 제1권~제2권: 총론으로, 1586년부터 1598년까지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과 일본 사이의 사건들을 연표로 기록하고 있다.[3]
- 제3권~제5권: 『선폭집』(芹曝集)으로 첩지(牒旨)와 계사(啓辭) 등 임진왜란의 배경을 다루고 있다.
- 제6권~제14권: 『진사록』(辰巳錄)으로, 류성룡이 영의정으로 재직 시 작성한 문서, 명령, 선포문 등을 기록하고 있다.[3]
- 제15권~제16권: 『군문등록』(軍門謄錄)으로, 1595년부터 1598년까지 전쟁과 관련된 기록과 류성룡의 서신을 담고 있다.
- 녹후잡기(録後雑記): 전쟁 중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3]
3. 2. 주요 내용
- 1586년, 쓰시마 도주 귤강광(유즈야 야스히로)이 히데요시의 서신을 갖고 조선을 방문했을 때, 조선군 병사들이 들고 선 창을 보고 "당신네들의 창은 참 짧군요 그래"하고 비웃었다.[11]
- 1591년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의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은 일본을 시찰하고 나서 선조에게 일본의 사정을 보고했는데, 황윤길이 "반드시 병란의 화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한 것과 달리 김성일은 "신은 왜국에서 그런 징후는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12]
- 1592년 4월 15일, 조선을 침공한 왜군이 동래로 쳐들어갔을 때, 부사 송상현이 분전하다 죽었다. 송상현은 왜병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도 마다한 채 죽는 것을 택했고, 왜인들은 그러한 송상현의 절의에 감탄하며 그의 시신을 관에 넣어 정중히 매장하고 그의 무덤에 묘표까지 세워 주었다고 한다.[13]
- 명의 심유경과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서로 친한 사이로, 사사건건 서로 감싸주었고, 임시변통의 조치로 전쟁을 멈추려 했다.[14]
- 1598년 10월, 노량 앞바다에서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해 벌어진 해전에서 통제사 이순신이 날아오는 탄환에 맞고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기 직전, "싸움이 아직 다급한 판인데 내가 죽었다고 알리지 마라"는 말을 남겼다.[15]
- 왜군은 조선에서 수많은 살략을 자행하였고, 이는 《징비록》 속에 고스란히 묘사되었다. 1597년에 벌어진 정유재란에서 전공을 증명하기 위해 잡은 포로나 시신의 목에서 코를 베어내는 장면도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징비록의 주제가 왜군의 실태보다도 조선군의 허약하기 짝이 없는 국방의식에 대한 비판에 무게가 실려있는 만큼, 주된 내용은 왜군에 대응하는 조선측의 허술함 또한 비판하고 있다.
4. 간행 및 번역
《징비록》은 1598년 류성룡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안동으로 낙향한 후부터 집필이 시작되어 1604년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1633년 류성룡의 아들 류진이 아버지의 문집 《서애집》과 합본된 형태로 징비록을 간행하였고, 1647년 다시 독립된 16권 7책으로 간행되었다.[17]
《징비록》은 오래된 간본으로 「16권본」과 「2권본」 두 가지가 있는데, 「16권본」이 먼저 나왔다. 「16권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 제1권~제2권 : 총론(総論)
- 제3권~제5권 : 《근포집》(芹曝集) - 답(剳) ・ 계사(啓辞)
- 제6권~제14권 : 《진사록》(辰巳録) - 치계(馳啓) ・ 복명(復命)
- 제15권~제16권 : 《군문등록》(軍門謄録) - 계초(啓草) ・ 문리(文移)
- 《녹후잡기》(録後雑記)
《징비록》은 조선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널리 읽혔다. 1695년 일본에서는 징비록 2권본이 간행되었으며, 이를 통해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측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조선의 무장 김시민이 실은 제1차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사실도 이때 알려졌다. 1712년 조선 조정은 《징비록》이 일본에서 간행된 것에 대해 조선의 정보가 유출될까 우려하여 금단하기도 했다.
4. 1. 조선
1633년(인조 11년), 류성룡의 아들 류진이 《징비록》과 《서애집》(西厓集)을 합본하여 간행하였다. 1647년(인조 25년), 경상도 관찰사 조수익이 《징비록》을 독립된 16권 7책으로 간행하였다.[17] 1936년, 조선사편수회에서 류성룡의 자필본을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 제11집에 《초본징비록(草本懲毖錄)》이라는 제목으로 영인, 간행하였다.4. 2. 일본
1695년 일본 교토의 야마토야(大和屋)에서 야마토야 이베에(大和屋伊兵衛)가 《징비록》 「2권본」에 일본어 훈독을 달아 간행하였다.[4][1] 이를 통해 일본은 임진왜란(분로쿠 ・ 게이초의 역) 당시 조선 측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에게 「모쿠소」(조선의 지방관 명칭)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조선의 무장 김시민이 실은 제1차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사실도 《징비록》의 일본 간행을 통해 알려지게 된 것이었다.1712년(숙종 38년), 조선 조정은 《징비록》이 일본에서 간행된 것에 대해 조선의 정보가 유출될까 우려하여 서적 수출을 금지하기도 했다.
4. 3. 현대의 번역
징비록은 현대에 들어서도 한국어, 일본어, 영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5. 역사적 의의 및 영향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직접 겪은 유성룡이 쓴 기록으로, 임진왜란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징비록은 단순한 역사 기록을 넘어, 전쟁의 참상을 통해 얻은 교훈을 후세에 전하고, 국가 운영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10] 유성룡은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추천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김성일을 지지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이후 백의종군하며 삼도도체찰사 등 요직을 역임한 유성룡은 은퇴 후 고향에서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5. 1. 임진왜란 연구
유성룡이 저술한 《징비록》은 임진왜란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활용된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이어진 일본의 침략 전조, 조선 조정의 대응, 명나라의 동태, 그리고 일본, 조선, 명나라 간의 협상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인 유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조정의 고위 관료였기 때문에, 그의 기록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징비록》에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여러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586년, 종의지의 가신 유곡강광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을 가지고 조선을 방문했을 때, 조선군의 창을 보고 "너희들의 창 자루가, 참으로 짧구나"라고 비웃었다.[11]
- 1591년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 정사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보고했지만, 부사 김성일은 "왜국(倭国)에서 그러한 징후를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상반된 보고를 했다.[12]
- 1592년 4월 15일, 일본군은 동래부를 공격하여 송상현이 지키는 성을 함락시켰다. 송상현은 일본군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죽음을 택했다. 일본군은 송상현의 용기를 칭찬하며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 묘표를 세워 기렸다.[13]
-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는 서로 친밀하게 지내며, 전쟁을 임시변통으로 수습하려 했다.[14]
- 1598년 10월, 이순신은 왜군과의 해전에서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순신은 죽기 직전 "싸움이 바로 긴박하다. 그대들은 내 죽음을 주위에 알리지 마라…"라는 유언을 남겼다.[15]
5. 2. 후대에 미친 영향
의 제목은 詩經중국어 주송 소비편의 첫머리에 있는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구절[10]에서 따온 것이다.6. 징비록과 관련된 문화 콘텐츠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다룬 다양한 문화 콘텐츠의 중요한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Jingbirok (The Book of Correction)
http://jikimi.cha.go[...]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ROK
2016-01-18
[2]
웹사이트
'Jingbirok' records 7-yr invasion
http://www.korea.net[...]
Korea.net
2015-08-15
[3]
문서
Jin-Sa Records (辰巳錄)
[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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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웹사이트
Online version of the 1913 Chinese edition
http://dl.ndl.go.jp/[...]
[6]
웹사이트
Online version of the 1876 Japanese edition
http://dl.ndl.go.jp/[...]
[7]
웹사이트
Online version of the 1894 Japanese edition
http://dl.ndl.go.jp/[...]
[8]
웹사이트
Online version of the 1921 Japanese edition
http://dl.ndl.go.jp/[...]
[9]
웹사이트
NCID:BN05109352
http://ci.nii.ac.jp/[...]
[10]
웹사이트
http://mokusai.web.i[...]
[11]
서적
懲毖録
1979
[12]
서적
懲毖録
1979
[13]
서적
懲毖録
1979
[14]
서적
懲毖録
1979
[15]
서적
懲毖録
1979
[16]
간행물
문화원형백과 전통민속마을
한국콘텐츠진흥원
2008
[17]
웹사이트
http://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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