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강 레이더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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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볼프강 레이더먼은 독일 뮌헨 출신의 미국 애니메이터, 영화 감독, 프로듀서이다. 추이나드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후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에 입사하여,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 《피노키오》, 《환타지아》 등 초기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의 애니메이터로 활동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후 디즈니로 복귀하여 《신데렐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피터 팬》 등에서 연출 애니메이터로 참여했다. 1963년 《아더왕의 검》을 시작으로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의 단독 감독을 맡아, 《정글북》, 《아리스토캣》, 《로빈 후드》, 《생쥐 구조대》 등을 연출하며 디즈니 애니메이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85년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1989년 디즈니 레전드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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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프강 레이더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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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볼프강 라이트만 |
| 다른 이름 | 울리 라이트만 울리 라이트만 |
| 출생지 |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뮌헨 |
| 사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뱅크 |
| 국적 | 독일 |
| 직업 | 애니메이터 영화 감독 영화 프로듀서 |
| 활동 기간 | 1933년 – 1981년 |
| 배우자 | 제이니 마리 맥밀런 (1946년 결혼, 1985년 사망) |
| 자녀 | 3명 (브루스 라이트만 포함) |
| 고용주 |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
| 학력 | 패서디나 주니어 칼리지 슈이나드 예술학교 |
| 알려진 업적 | 디즈니의 아홉 노인 중 한 명 |
2. 경력
볼프강 레이더먼은 추이나드 미술학교(Chouinard Art Institute) 재학 중 강사 필립 L. 다이크의 눈에 띄어 월트 디즈니에게 소개되었고, 1933년 5월 21일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에 합류했다.[1][2] 초기에는 실리 심포니(Silly Symphonies) 시리즈와 같은 단편 애니메이션 작업에 참여했으며,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 ''피노키오''(1940), ''환타지아''(1940), ''덤보''(1941) 등 디즈니 초기 장편 애니메이션의 주요 장면에 애니메이터로 참여했다.[3]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미국 육군 항공대에 입대하여 아프리카, 중국, 인도, 남태평양 등지에서 복무했으며, 수훈 비행 십자 훈장(Distinguished Flying Cross)을 받고 소장(Major (United States)) 계급으로 1946년 2월 제대했다.[2] 1947년 4월 디즈니 스튜디오에 복귀하여 ''이카보드와 토드 경의 모험(The Adventures of Ichabod and Mr. Toad)''(1949) 등의 작품에 참여했고, ''신데렐라''(1950),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951), ''피터 팬''(1953), ''레이디와 트램프''(1955) 등에서 중요한 시퀀스의 애니메이션 작업을 맡았다.[3]
1950년대 후반부터는 연출에도 참여하여 ''잠자는 숲속의 공주''(1959)와 ''101마리 달마시안''(1961)의 특정 시퀀스를 감독했다.[3] 이후 ''아더왕의 검''(1963)을 통해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초로 단독 감독을 맡게 되었다.[4]
1966년 월트 디즈니가 사망한 후, 레이더먼은 디즈니의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을 이끄는 핵심 인물이 되었다.[4] 그는 ''정글북''(1967), ''아리스토캣(The Aristocats)''(1970), ''로빈 후드''(1973), ''생쥐 구조대(The Rescuers)''(1977) 등 여러 작품을 감독하며 스튜디오의 명맥을 이었다.[1] 또한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곰돌이 푸와 폭풍우 치는 날(Winnie the Pooh and the Blustery Day)''(1968) 등 단편 작업도 감독했다. 이 시기 그는 제작비 절감을 위해 이전 작품의 애니메이션을 재활용하는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는 효율성을 위한 선택이었으나 스튜디오 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5][6][7]
''생쥐 구조대(The Rescuers)''(1977) 이후 차기작 ''토드와 코퍼''(1981)를 준비하던 중 공동 감독 아트 스티븐스(Art Stevens)와의 창작 관련 갈등으로 1979년 프로젝트에서 하차했다.[8] 이후 몇몇 미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1980년에는 메리 스튜어트의 소설 ''The Little Broomstick''(메리와 마녀의 꽃 원작)의 애니메이션화를 기획했으나 당시 경영진의 결정으로 무산되었다.[10] 결국 레이더먼은 1981년 디즈니를 떠나 은퇴했다.[2]
2. 1. 초기 경력 (1933년 ~ 1941년)
볼프강 레이더먼은 추이나드 미술학교(Chouinard Art Institute)에서 공부하던 중, 드로잉 및 회화 강사였던 필립 L. 다이크의 주목을 받았다. 다이크는 레이더먼의 그림에 감명받아 이를 월트 디즈니에게 보여주었고, 그 결과 레이더먼은 스튜디오에 초대받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 수채화가로 일하기를 희망했으나, 월트 디즈니는 그에게 애니메이터가 될 것을 제안했다.[1] 레이더먼은 1933년 5월 21일에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에 입사했으며,[2] 그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실리 심포니(Silly Symphonies) 시리즈의 단편 만화 ''귀여운 아기 토끼들''(Funny Little Bunnies, 1933)에서 애니메이터로 참여한 것이었다.이후 ''밴드 콘서트''(The Band Concert, 1935), ''음악의 세계''(Music Land, 1935), ''엘머 코끼리''(Elmer Elephant, 1936) 등 여러 디즈니 단편 영화 작업에 참여했다.[3] 장편 영화 작업으로는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 1937)에서 마법의 거울 속 노예 장면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그의 다음 주요 작업에는 ''피노키오''(Pinocchio, 1940)의 괴물 고래 몬스트로 장면, ''환타지아''(Fantasia, 1940)에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의 "봄의 제전" 부분에 등장하는 공룡 싸움 장면, 그리고 ''덤보''(Dumbo, 1941)에서 티모시 Q. 마우스의 여러 장면을 애니메이션화하는 것이 포함되었다.[3]
2. 2. 디즈니 복귀 및 애니메이션 감독 데뷔 (1947년 ~ 1963년)
제2차 세계 대전 복무를 마치고 1947년 4월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에 다시 합류했다.[2] 복귀 후 첫 작업으로 ''이카보드와 토드 경의 모험''(1949)의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 부분에서 머리 없는 기수가 추격하는 장면을 애니메이션화했다.[3]레이더먼은 자신이 ''신데렐라''(1950) 제작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략적인 스토리보드를 본 후 월트 디즈니의 사무실에 찾아가 "정말 멋지다. 꼭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며 제작을 독려했다고 회상했다.[3] ''신데렐라''에서는 생쥐 자크와 거스가 열쇠를 신데렐라에게 전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면의 연출 애니메이터를 맡았다.[3]
이후 여러 작품에서 주요 장면의 애니메이션을 담당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951)에서는 몸이 커진 앨리스 때문에 하얀 토끼의 집이 부서지는 장면을, ''피터 팬''(1953)에서는 후크 선장이 악어에게 쫓겨 도망치는 장면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3] ''레이디와 트램프''(1955)에서는 뒷골목 개들의 싸움 장면과 주인공 트램프가 아기 방에서 시궁쥐와 싸우는 클라이맥스 장면을 담당했다.[3]
1950년대 후반부터는 연출 역할도 맡기 시작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1959)에서는 악당 말레피센트가 드래곤으로 변신하여 필립 왕자와 싸우는 절정 장면의 시퀀스 감독을 맡았다. 다음 작품인 ''101마리 달마시안''(1961)에서는 개들이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 "황혼의 짖는 소리" 시퀀스를 연출했다.[3]
''아더왕의 검''(1963)을 시작으로, 레이더먼은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 역사상 처음으로 단독 감독을 맡게 되었다.[4] 이는 이전까지 여러 명의 감독이 한 작품을 공동으로 연출하던 디즈니의 일반적인 관행과는 다른 결정이었다. 동료 애니메이터 워드 킴볼은 레이더먼이 업무에 매우 적합했고 어떤 프로젝트든 "미소를 지으며" 기꺼이 맡으려는 긍정적인 태도를 가졌기 때문에 단독 감독이 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4] 애니메이터 밥 칼슨 역시 월트 디즈니가 영화 제작을 시작하기 전 레이더먼의 의사 결정을 신뢰했다고 언급했다.[4]
2. 3. 디즈니 애니메이션 황금기를 이끌다 (1963년 ~ 1977년)
`아더왕의 검(The Sword in the Stone)`(1963)을 시작으로, 레이더먼은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의 최초 단독 감독이 되었다. 이는 한 편의 영화에 여러 감독을 두던 기존 방식과는 다른 시도였다. 동료 애니메이터 워드 킴볼(Ward Kimball)은 레이더먼의 성실함과 어떤 프로젝트든 기꺼이 맡는 태도 덕분이라고 보았으며, 애니메이터 밥 칼슨은 월트 디즈니가 영화 제작 결정 과정에서 레이더먼을 신뢰했다고 언급했다.1966년 월트 디즈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후, 레이더먼은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의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을 이끄는 역할을 이어받았다.[4] 그의 지휘 아래 디즈니 악당 묘사는 이전보다 다소 부드러워졌고, 이후 20년간 등장한 악당들은 무섭기보다는 희극적이거나 동정적으로 묘사되는 경향을 보였다.[4] 레이더먼은 가족 친화적인 작품 제작에 집중하며 스튜디오의 수익성을 유지하는 데 힘썼다.[4] 안드레아스 데자(Andreas Deja)에 따르면, 레이더먼은 "우리가 아이들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4]
이 시기 레이더먼은 `정글북(The Jungle Book)`(1967), `아리스토캣(The Aristocats)`(1970), `로빈 후드(Robin Hood)`(1973), `생쥐 구조대(The Rescuers)`(1977)와 같은 장편 애니메이션을 연출했다.[1] 또한, `곰돌이 푸와 꿀나무(Winnie the Pooh and the Honey Tree)`(1966)와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곰돌이 푸와 폭풍우 치는 날(Winnie the Pooh and the Blustery Day)`(1968) 등 여러 단편 애니메이션도 감독했다.
`정글북(The Jungle Book)`(1967)을 연출할 당시 레이더먼은 제작비 절감을 위한 방침을 따랐다. 이는 월트 디즈니가 "비용을 낮게 유지하라, 왜냐하면 [장편 만화]는 스스로 가격이 매겨져 사업에서 밀려날 것이기 때문"이라고 조언했기 때문이라고 회상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이전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가져온 장면을 재활용하거나 제한적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관행이 시간과 제작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이루어졌다고 추측했지만, 애니메이터 플로이드 노먼(Floyd Norman)은 캐릭터 애니메이터가 오리지널 드로잉을 만드는 것이 실제로 더 쉽고 시간이 덜 걸리는 노동 집약적인 작업이었다고 설명했다.[5][6] 그럼에도 레이더먼의 애니메이션 재활용 사용은 스튜디오 내에서 논란이 되었고, 애니메이터 밀트 카일(Milt Kahl)은 이 방식에 대해 "저는—`백설 공주`의 애니메이션이 `생쥐 구조대`에 사용되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저를 죽이고, 눈물이 나도록 부끄럽게 만듭니다."라며 혐오감을 드러냈다.[7] 기술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이 방식은 로토스코핑과는 다르다.
`생쥐 구조대(The Rescuers)`(1977) 제작 이후, 1977년 봄에 공동 감독 아트 스티븐스(Art Stevens)와의 창작 관련 의견 충돌로 인해 차기작 제작에서 하차하게 되었다.[8]
2. 4. 은퇴 및 사망 (1977년 ~ 1985년)
레이더먼은 ''생쥐 구조대(The Rescuers)''(1977)를 연출한 후,[1] 본래 ''토드와 코퍼(The Fox and the Hound)''(1981)의 연출을 맡을 예정이었다.[8] 그러나 1977년 봄부터 시작된 공동 감독 아트 스티븐스(Art Stevens)와의 창작 관련 갈등으로 인해, 1979년에 결국 해당 프로젝트에서 하차했다.이후 레이더먼은 벤 루시엔 버먼(Ben Lucien Burman)의 책 시리즈에 기반한 ''Catfish Bend''나 아티스트 멜 쇼(Mel Shaw)와 공동으로 개발하던 ''환타지아(Fantasia)''(1940)의 후속작 ''Musicana'' 등 개발되지 않은 여러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로 이동했다.[9] 1980년에는 메리 스튜어트(Mary Stewart)의 아동 소설 ''The Little Broomstick''(메리와 마녀의 꽃의 원작)의 각색 작업을 진행했다.[10] 하지만 당시 로널드 W. 밀러 사장이 이끌던 스튜디오 경영진은 ''타란의 대모험(The Black Cauldron)''(1985)과 같은 더욱 야심 찬 프로젝트를 선호했기 때문에 해당 기획은 무산되었다.[10] 이로 인해 레이더먼은 1981년 디즈니에서 은퇴했다.
3. 사생활
독일 제국 뮌헨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파사데나 주니어 칼리지를 다녔고, 잠시 더글러스 항공에서 제도사로 일하다가 1933년 추이나드 아트 인스티튜트를 졸업했다.
공군에서 제대한 후, 1946년 11월 자니 마리 맥밀란과 결혼했다. 레이더먼에게는 세 아들—브루스, 리처드, 로버트—이 있었는데, 이들은 디즈니 캐릭터의 목소리를 맡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영화 《정글북》의 모글리, 《곰돌이 푸와 꿀나무》의 크리스토퍼 로빈, 그리고 《바위 속의 검》의 워트 (아서 왕) 역할이 있다.
레이더먼은 1985년 5월 22일, 캘리포니아주 버뱅크에 있는 자택 근처에서 발생한 단독 차량 사고로 사망했다. 사후 1989년 디즈니 레전드로 추서되었다.[11][12]
4. 유산 및 평가
레이더먼의 세 아들—브루스, 리처드, 로버트—은 디즈니 캐릭터의 목소리를 맡았는데, 이는 영화 정글북의 모글리, 곰돌이 푸와 꿀나무의 크리스토퍼 로빈, 그리고 바위 속의 검의 워트 등이 있다.
레이더먼은 1985년 5월 22일, 캘리포니아주 버뱅크에 있는 자택 근처에서 단독 차량 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사후 1989년 디즈니 레전드로 추서되었다.[11][12]
5. 작품 목록
| 연도 | 제목 | 제작 | 배역 | 비고 |
|---|---|---|---|---|
| 1937 |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 | 애니메이터 | Woolie Reitherman으로 크레딧에 기재 | |
| 1940 | 피노키오 | 애니메이션 감독 | Woolie Reitherman으로 크레딧에 기재 | |
| 환타지아 | 애니메이션 감독 - "봄의 제전" 부분 | |||
| 1941 | 마음씨 착한 용 | 애니메이터 | ||
| 덤보 | 애니메이션 감독 | Woolie Reitherman으로 크레딧에 기재 | ||
| 1943 | 안녕 친구들 | 애니메이터 | Wooly Reitherman으로 크레딧에 기재 | |
| 1947 | 즐겁고 자유롭게 | 연출 애니메이터 | ||
| 1949 | 이카보드와 토드 경의 모험 | |||
| 구피의 체조 (단편) | 애니메이터 | |||
| 테니스 라켓 (단편) | ||||
| 1950 | 신데렐라 | 연출 애니메이터 | ||
| 1951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
| 1953 | 피터 팬 | |||
| 벤과 나 (단편) | 애니메이터 | |||
| 1955 | 레이디와 트램프 | 연출 애니메이터 | ||
| 1957 | 거위 엄마에 대한 진실 (다큐멘터리 단편) | 감독 | ||
| 1959 | 잠자는 숲속의 공주 | 시퀀스 감독 | ||
| 도널드 덕의 수학 나라 (단편) | 원제: Donald in Mathmagic Land | |||
| 1960 | 골리앗 2세 (단편) | 감독 | 원제: Goliath II | |
| 1961 | 101마리 강아지 | 원제: One Hundred and One Dalmatians | ||
| 아쿠아매니아 (단편) | 원제: Aquamania | |||
| 1963 | 아더왕의 검 | |||
| 1966 | 곰돌이 푸 - 곰돌이 푸와 꿀 나무 (단편) | 원제: Winnie the Pooh and the Honey Tree | ||
| 1967 | 정글북 | |||
| 1968 | 곰돌이 푸 - 곰돌이 푸와 폭풍우 치던 날 (단편) | 원제: Winnie the Pooh and the Blustery Day | ||
| 1970 | 아리스토캣 | 감독 및 제작 | ||
| 1973 | 로빈 후드 | |||
| 1974 | 곰돌이 푸 - 티거와 함께 (단편) | 제작 | 원제: Winnie the Pooh and Tigger Too | |
| 1977 | 곰돌이 푸의 모험 | 감독 및 제작 | ||
| 생쥐 구조대 | ||||
| 1981 | 토드와 코퍼 | 공동 제작 | 마지막 크레딧, 원제: The Fox and the Hound | |
| 1982 | 디즈니의 마법 세계 (TV 시리즈) | 제작 - 1 에피소드 | 원제: Walt Disney's Wonderful World of Color | |
| 1984 | DTV: 골든 올디스 (단편) | 감독 | ||
| 1985 | The Walt Disney Comedy and Magic Revue (비디오 단편) | 감독 - 아카이브 영상 |
5. 1. 장편 애니메이션
볼프강 레이더먼은 추이나드 미술학교 재학 중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에 발탁되어 1933년 5월 21일 입사했다.[1][2] 초기에는 실리 심포니 시리즈 등 단편 애니메이션 작업에 참여했으나, 곧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그의 첫 장편 참여는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로, 마법 거울 속 노예 장면의 애니메이션을 담당했다. 이후 피노키오(1940)에서는 거대한 고래 몬스트로를, 환타지아(1940)에서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에 맞춰 공룡들이 싸우는 장면을, 덤보(1941)에서는 생쥐 티모시의 여러 장면을 작업하며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다.[3]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후 1947년 4월 스튜디오에 복귀한 레이더먼은 이카보드와 토드 경의 모험(1949) 중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 파트에서 머리 없는 기수가 등장하는 추격 장면을 애니메이션화했다. 그는 신데렐라(1950) 제작에도 기여했는데, 스토리보드를 보고 월트 디즈니에게 제작을 적극 권유했다고 회상했다. 이 작품에서는 생쥐 자크와 거스가 신데렐라에게 열쇠를 가져다주는 장면의 연출 애니메이터를 맡았다. 이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951)에서는 몸이 커진 앨리스 때문에 하얀 토끼의 집이 부서지는 장면을, 피터 팬(1953)에서는 후크 선장이 악어에게 쫓기는 장면을, 레이디와 트램프(1955)에서는 뒷골목 개들의 싸움과 트램프가 아기 방에서 쥐와 싸우는 장면 등을 담당하며 꾸준히 역량을 발휘했다.[3]
1950년대 후반부터는 연출 역할이 커졌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1959)에서는 말레피센트가 용으로 변신해 필립 왕자와 싸우는 클라이맥스 장면의 시퀀스 감독을 맡았고, 101마리 달마시안(1961)에서는 개들이 서로 소식을 전하는 "황혼의 짖는 소리" 시퀀스를 연출했다.
아더왕의 검(1963)을 시작으로 레이더먼은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에서 최초로 단독 감독을 맡게 되었다. 이는 여러 감독이 협업하던 기존 방식과 다른 파격적인 결정이었는데, 동료 애니메이터 워드 킴볼은 레이더먼의 뛰어난 업무 능력과 어떤 프로젝트든 기꺼이 맡는 긍정적인 태도 덕분이라고 평가했다. 애니메이터 밥 칼슨 역시 월트 디즈니가 레이더먼의 판단을 신뢰했다고 언급했다.
1966년 월트 디즈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후, 레이더먼은 사실상 스튜디오의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을 이끄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4] 그의 지휘 아래 제작된 작품들은 악당 캐릭터가 이전보다 덜 위협적이고 코믹하거나 동정적으로 묘사되는 경향을 보였으며, 스튜디오는 철저히 가족 친화적인 노선을 유지하며 수익성을 확보하는 데 집중했다.[4] 안드레아스 데자에 따르면 레이더먼은 "아이들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강조했다고 한다.[4] 이 시기 그는 정글북(1967), 아리스토캣(1970), 로빈 후드(1973), 생쥐 구조대(1977) 등을 감독했다.[1] 또한 그는 ''골리앗 2(Goliath II)''(1960)와 최초의 두 편의 ''곰돌이 푸'' 단편, ''곰돌이 푸와 꿀나무(Winnie the Pooh and the Honey Tree)''(1966) 및 ''곰돌이 푸와 폭풍우 치는 날(Winnie the Pooh and the Blustery Day)''(1968)과 같은 여러 애니메이션 단편을 연출했는데, 후자는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다.
레이더먼은 제작 비용 절감을 중시했는데, 이는 월트 디즈니로부터 직접 받은 지침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과거 작품의 애니메이션 장면을 재활용하는 기법(애니메이션 데이터베이스, 제한적 애니메이션)이 자주 사용되었다. 이는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기 위한 방편으로 알려졌지만, 애니메이터 플로이드 노먼은 오히려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더 노동 집약적인 작업이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5][6] 그럼에도 이 방식은 스튜디오 내에서 논란을 낳았으며, 특히 애니메이터 밀트 카일은 이러한 재활용에 대해 "백설 공주의 애니메이션이 생쥐 구조대에 쓰이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부끄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라며 강하게 비판했다.[7] 이 애니메이션 프로세스는 기술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로토스코핑과는 다르다.
생쥐 구조대(1977) 이후 레이더먼은 처음에 겨울왕국의 전설(1981)을 연출할 예정이었지만,[8] 공동 감독 아트 스티븐스와의 창작 갈등으로 인해 1979년에 프로젝트에서 제외되었다. 레이더먼은 이후 벤 루시엔 버먼의 책 시리즈를 기반으로 한 '캣피시 벤드'(Catfish Bend)와, 아티스트 멜 쇼와 함께 공동 개발한 환타지아(1940)의 후속 프로젝트인 '뮤지카나'(Musicana)와 같은 개발되지 않은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로 이동했다.[9] 1980년, 그는 메리 스튜어트의 어린이 소설 ''The Little Broomstick''을 각색했지만, 스튜디오가 검은 솥(1985)과 같은 야심찬 영화를 원했기 때문에 작업이 중단되었다.[10] 이듬해 그는 은퇴했다.
5. 2. 단편 애니메이션
레이더먼은 1933년 5월 21일에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에 고용되었고,[2] 그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실리 심포니(Silly Symphonies) 만화인 ''귀여운 아기 토끼들(Funny Little Bunnies)''(1933)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하는 것이었다. 레이더먼은 ''밴드 콘서트(The Band Concert)''(1935), ''음악의 세계(Music Land)''(1935), ''엘머 코끼리(Elmer Elephant)''(1936)을 포함한 여러 디즈니 단편 영화에서 계속 작업했다.[3]또한 그는 ''골리앗 2(Goliath II)''(1960)와 최초의 두 편의 ''곰돌이 푸'' 단편, ''곰돌이 푸와 꿀나무(Winnie the Pooh and the Honey Tree)''(1966) 및 ''곰돌이 푸와 폭풍우 치는 날(Winnie the Pooh and the Blustery Day)''(1968)과 같은 여러 애니메이션 단편을 연출했다. 이 중 ''곰돌이 푸와 폭풍우 치는 날''은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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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The Disney Days of Reitherman
https://www.newspape[...]
Los Angeles Times
1981-08-10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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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mont Kids Media Nordic
[3]
웹사이트
Who Were Walt Disney's Nine Old Men?
https://www.wdw-maga[...]
2022-09-15
[4]
논문
Drawing the Line: ''Directing at Disney'', the new book by Pete Docter and Don Peri, sheds light on Walt Disney and his complicated relationships with the largely unknown directors of classic Disney Animation
Walt Disney Company
2024-Fall
[5]
웹사이트
The Real Truth About Disney's "Recycled Animation"
https://medium.com/d[...]
2016-10-30
[6]
간행물
This video shows just how often Disney recycled animation
https://ew.com/artic[...]
2016-10-30
[7]
인터뷰
Milt Kahl
http://www.michaelba[...]
2018-09-25
[8]
뉴스
Disney Incubating New Artists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18-09-26
[9]
뉴스
Disney Films: Chasing the Changing Times
https://www.newspape[...]
Los Angeles Times
1980-10-26
[10]
뉴스
Where Disney failed, Studio Ponoc succeeds with its debut animated feature, "Mary and the Witch's Flower"
https://www.huffingt[...]
The Huffington Post
2018-09-26
[11]
웹사이트
Wolfgang Reitherman
https://d23.com/walt[...]
2016-01-21
[12]
뉴스
Wolfgang Reitherman, 75: Disney Animator Dies in Car Crash
https://www.latimes.[...]
2016-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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