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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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운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휘하에서 활약했다. 1543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1570년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임진왜란 발발 후 이순신을 도와 옥포 해전, 당포 해전, 한산도 대첩 등 주요 해전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부산포 해전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사후에는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충장(忠壯)의 시호를 받았다. 현재 해남과 고흥 등에 사당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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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3년 출생 - 호리오 요시하루
호리오 요시하루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아들의 활약으로 이즈모국 24만 석의 영지를 얻었으며 온화한 인품으로 존경받다가 1611년에 사망한 무장이다. - 1543년 출생 -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센고쿠 시대 말기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이자 에도 막부 초대 쇼군으로, 탁월한 정치력과 군사적 재능으로 혼란기를 극복하고 에도 막부를 건설하여 일본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다. - 1592년 사망 - 신립
조선 중기 무장 신립은 무과 급제 후 북방 방어에 공을 세웠으나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하여 자결하였고,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묘소는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 1592년 사망 - 나카가와 히데마사
나카가와 히데마사는 센고쿠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걸쳐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긴 무장으로, 아버지의 전사 후 가독을 이어 영주가 되었으며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 임진왜란 등에 참전하여 조선에서 전사했다. - 해남군 출신 - 임영득
임영득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고등고시 합격 후 해군 법무관으로 관료 생활을 시작, 무소속 및 민주정의당 국회의원과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변호사, 세무사로서 한국세무사회 회장과 대한양돈협회 회장을 지냈다. - 해남군 출신 - 박경두
박경두는 에페를 주 종목으로 하는 대한민국 펜싱 선수로, 아시아 선수권에서 개인전 1회 및 단체전 4회 우승, 세계 선수권 단체전에서 은메달 4개를 획득했으며, 도하 그랑프리 개인전과 헤이덴하임 월드컵 개인전에서 우승했다.
정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정운 |
한글 표기 | 정운 |
한자 표기 | 鄭運 |
히라가나 표기 | てい うん |
가타카나 표기 | チョン・ウン |
인물 정보 | |
생애 | 1543년 10월 7일 (음력 9월 10일) ~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
출생지 | 조선 전라도 영암군 옥천면 (現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 |
사망지 | 조선 부산포 앞바다 (現 부산광역시 앞바다) |
사망 원인 | 적의 포탄에 사망 |
국적 | 조선 |
자 | 창진(昌辰) |
시호 | 충장공(忠壯公) |
본관 | 하동 |
직업 | 무신, 군인 |
복무 | 조선군 |
복무 기간 | 1578년 ~ 1592년 |
최종 계급 | 녹도 만호 |
근무 | 웅천 현감, 녹도 만호, 우부장 |
기타 이력 | 1570년 (선조 3년) 식년무과 병과 급제 |
군사 경력 |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임진왜란 |
참전 전투 | 옥포 해전 당포 해전 한산도 대첩 부산포 해전 |
지휘 | 조선 수군 |
서훈 내역 | |
추증 | 북병사 추증 병조참판 추증 병조판서 겸 의금부훈련원사 추증 |
공신 | 선무원종공신 1등 추록 |
사당 |
2. 생애
1543년 조선 중종 38년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1]에서 훈련참군 정응정(應禎)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하동 정씨이며, 자는 창진(昌辰)이다. 출생지에 그를 기리는 "충신각"이 있다. 1570년 (선조 3년) 28세에 식년시 병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 금갑도수군권관 등을 거쳤다. 1583년 함경감사 정언신의 추천으로 웅천현감 등을 지냈으나, 강직한 성격으로 인해 미움을 받아 몇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했다.[2]
1591년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었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 원균이 구원을 요청했다.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군관 송희립과 함께 결사적으로 출전할 것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2]
그 후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을 만나 옥포 해전에서 왜선 30척을 격파하고, 노량진에서 적선 13척을 불살랐다.[3] 당포, 한산 등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고, 1592년 9월 부산포 해전에서 우부장(右部將)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절영도에서 적의 대조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정운의 사망으로 이순신은 오른팔을 잃은 셈이 되어 목을 놓아 울었다고 한다.[4]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정운이 전승무패의 부담을 안고 있는 이순신에게 적극적인 전투를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 1594년 정곤수가 선조에게 "정운이 '장수가 만일 출전하지 않는다면 필시 전라도는 수습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겁박하여 출전하게 하였다."라는 기록[5]이나, 1597년 선조 30년 김응남이 선조에게 "정운이 이순신이 나가 싸우려 하지 않는다 하여 참하려 했다"는 당쟁의 비방이 엿보이는 과장적인 기록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정운 장군이 부산포에서 순절하자 고향 해남에서는 최산수, 최정한, 양예용이 함께 유림 대표로 제문(祭文)을 지어 치제하였다. 선조는 1592년 대호군 정운을 북병사로 추증하였고, 1604년에는 병조참판, 1796년(정조 20)에는 병조판서 겸 의금부훈련원사로 추증되었다. 1605년 선무원종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6]
영암(현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의 충절사(忠節祠)와 흥양의 쌍충사(雙忠祠)에 제향되었다. 숙종 때 충절사라 사액하였으며, 정조 때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2. 1. 출생과 성장
1543년 조선 중종 38년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1]에서 훈련참군 정응정(應禎)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하동 정씨이며, 자는 창진(昌辰)이다. 출생지에 그를 기리는 "충신각"이 있다.2. 2. 무과 급제와 관직 생활
1570년 (선조 3년) 28세에 식년시 병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 금갑도수군권관 등을 거쳤다. 1583년 함경감사 정언신의 추천으로 웅천현감 등을 지냈으나, 강직한 성격으로 인해 미움을 받아 몇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했다.[2]1591년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었다.[3]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우수사 원균이 구원을 요청했고, 이에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 휘하에서 군관 송희립과 함께 결사적으로 출전할 것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후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을 만나 옥포 해전에서 왜선 30척을 격파하고, 노량진에서 적선 13척을 불살랐다.[3] 당포, 한산 등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4]
2. 3. 임진왜란 발발과 참전
1591년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었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 원균이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군관 송희립과 함께 결사적으로 출전할 것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2]그 후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을 만나 옥포 해전에서 왜선 30척을 격파하고, 노량진에서 적선 13척을 불살랐다.[3] 당포, 한산 등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1592년 9월 부산포 해전에서 우부장(右部將)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절영도에서 적의 대조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정운의 사망으로 이순신은 오른팔을 잃은 셈이 되어 목을 놓아 울었다고 한다.[4]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어떤 의도이건 간에 정운은 전승무패의 부담을 안고 있는 이순신에게 적극적인 전투를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 1594년 정곤수가 선조에게 "정운이 '장수가 만일 출전하지 않는다면 필시 전라도는 수습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겁박하여 출전하게 하였다."라는 대목[5]이나, 1597년 선조 30년 김응남이 선조에게 "정운이 이순신이 나가 싸우려 하지 않는다 하여 참하려 했다"는 당쟁의 비방이 엿보이는 과장적인 기록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1592년 주요 참전 해전은 다음과 같다.
2. 4. 주요 해전 참전과 전사
1591년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었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 원균이 구원을 요청했다.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군관 송희립과 함께 결사적으로 출전할 것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2]그 후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을 만나 옥포 해전에서 왜선 30척을 격파하고, 노량진에서 적선 13척을 불살랐다.[3] 당포, 한산 등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고, 1592년 9월 부산포 해전에서 우부장(右部將)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절영도에서 적의 대조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정운의 사망으로 이순신은 오른팔을 잃은 셈이 되어 목을 놓아 울었다고 한다.[4]
정운 장군이 부산포에서 순절하자 고향 해남에서는 최산수, 최정한, 양예용이 함께 유림대표로 제문(祭文)을 지어 치제하였다.
2. 5. 당쟁 속의 정운
鄭運|정운중국어은 강직한 성격으로 정의를 지켰기 때문에 미움을 받아 몇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했다.[2] 1591년 녹도만호가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 원균이 구원을 요청한다. 이에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 휘하에서 군관 송희립과 함께 결사적으로 출전할 것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정운이 전승무패의 부담을 안고 있는 이순신에게 적극적인 전투를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 1594년 정곤수가 선조에게 "정운이 '장수가 만일 출전하지 않는다면 필시 전라도는 수습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겁박하여 출전하게 하였다."라는 기록[5]이나, 1597년 선조 30년 김응남이 선조에게 "정운이 이순신이 나가 싸우려 하지 않는다 하여 참하려 했다"는 당쟁의 비방이 엿보이는 과장적인 기록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2. 6. 사후 추증과 평가
1592년 부산포 해전에서 우부장(右部將)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절영도에서 적의 대조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정운의 사망으로 오른팔을 잃은 셈이 되어 목을 놓아 울었다고 한다.[4]정운 장군이 부산포에서 순절하자 고향 해남에서는 최산수, 최정한, 양예용이 함께 유림 대표로 제문(祭文)을 지어 치제하였다. 선조는 1592년 대호군 정운을 북병사로 추증하였고, 1604년에는 병조참판, 1796년(정조 20)에는 병조판서 겸 의금부훈련원사로 추증되었다. 1605년 선무원종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6]
영암(현 해남 옥천면 대산리)의 충절사(忠節祠)와 흥양의 쌍충사(雙忠祠)에 제향되었다. 숙종 때 충절사라 사액하였으며, 정조 때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어떤 의도였든 정운은 전승무패의 부담을 안고 있던 이순신에게 적극적인 전투를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 1594년 정곤수가 선조에게 "정운이 '장수가 만일 출전하지 않는다면 필시 전라도는 수습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겁박하여 출전하게 하였다."라고 말한 것이나,[5] 1597년 선조 30년에 김응남이 선조에게 "정운이 이순신이 나가 싸우려 하지 않는다 하여 참하려 했다"는, 당쟁의 비방이 섞인 과장된 기록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3. 추모와 기념
정운은 전사 후 선무원종공신 1등에 추록되었으며, 이대원(李大源)과 함께 쌍충사(雙忠祠)에 배향되었다.[8]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는 정운공순의비(鄭運公殉義碑)가 세워져 있다.[8] 그 외 충신각(忠臣閣), 순의비(殉義碑), 묘비(墓石碑) 등이 있다.
3. 1. 사당 및 기념비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2202번지에 있는 흥양 쌍충사(雙忠祠)에는 이대원(李大源)과 함께 정운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8]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산144번지에는 경상남도 시도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된 정운공순의비(鄭運公殉義碑)가 있다. 이 비는 녹도만호 정운 장군을 기리는 추모비이다. 1798년 (정조 22년) 정운 장군의 8대손 정혁이 다대첨사로 있을 때 세운 것으로, 비문은 이조판서 민종현이 짓고, 훈련대장 서유대가 썼다. 비각은 1974년에 부산시에서 지었고, 1972년 6월 26일에 지정되었다.[8]
명칭 | 위치 |
---|---|
충신각(忠臣閣) |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 (출생지) |
쌍충사(双忠祠) |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이대원 장군과 합사) |
순의비(殉義碑)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산144 |
묘비(墓石碑) |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평활리 삼산면 |
3. 2. 관련 서적
- 鄭忠壯公實記중국어
: 녹도만호 정운의 실기로 2권 2책의 목판활자인쇄본이다. 8대손 정희(鄭熺)가 1866년(고종 3)에 편찬, 간행하였다. 2권에 수록된 鳴寃疏중국어는 정운의 아들 정지언(鄭之彦)이 올린 상소로, 부친이 전장에서 세운 공이 적지 않은데도 녹훈 대상에서 누락되었음을 원통히 여겨 이를 바로잡아 줄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저자미상의 辨白沙諸將士論중국어은 영남이 위태로웠을 때 이순신을 설득하여 군사를 일으키게 한 사람이 순천부사 권준과 광양현감 어영담이었다는 백사(이항복)의 말을 반박하는 글이다. 이 글에서는 그 공은 녹도만호 정운과 공군관 송희립의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권준은 오히려 관곡을 빼돌리려 하다가 들킨 인물로 남의 공을 가로챘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9]
3. 3. 관련 작품
3. 4. 함선
정운은 대한민국 해군의 장보고급 잠수함 7번함이다.참조
[1]
뉴스
불멸의 정운장군 어디에 묻혔을까
http://www.hnews.co.[...]
해남신문
[2]
인물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3]
웹인용
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2009-02-14
[4]
웹인용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2009-02-14
[5]
웹인용
조선왕조실록, 선조 27년,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2009-02-14
[6]
웹인용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2009-02-14
[7]
서적
이충무공전서
[8]
웹인용
시도기념물, 정운공순의비
http://www.cha.go.kr[...]
조선왕조실록
2009-02-14
[9]
웹사이트
https://kjg.snu.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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