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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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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국은 169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에 의해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 공작이 선제후 지위에 오른 것으로 시작되었다. 하노버를 수도로, 독일 북부의 니더작센주 일대를 포함하며, 1714년 영국 국왕 조지 1세가 선제후를 겸하면서 영국과의 동군 연합을 이루었다. 1806년 신성 로마 제국 해체로 선제후 지위는 소멸되었으나, 조지 3세는 하노버 왕국으로 승격될 때까지 선제후 칭호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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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하노버 깃발 (1692년)
깃발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1세 루이의 문장 (1711-1714)
문장 (1708–1714)
공식 명칭 (독일어)Kurfürstentum Hannover
다른 명칭 (독일어)Kurfürstentum Braunschweig-Lüneburg (쿠어퓌르스텐툼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일반 명칭하노버
지위선제후국
제국신성 로마 제국
지위 설명국가 of the 신성 로마 제국 (1692–1806)
동군 연합 with Great Britain and Ireland and the United Kingdom (1714–1807)
1789년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국
1789년의 하노버 선제후국
수도하노버
공용어서부 저지 독일어
종교루터교
정치 체제공국
역사
성립선제후국으로 승격 (1692년)
획득뤼네부르크 및 삭스-라우엔부르크 (1705년)
공식 승인선제후국 공식 승인 (1708년)
동군 연합그레이트브리튼아일랜드와 동군 연합 (1714년)
획득브레멘-페르덴 (1715년)
합병베스트팔렌 왕국으로 합병 (1807년)
재건하노버 왕국으로 재건 (1814년)
이전 국가칼렌베르크 공국
이후 국가 (1807년)베스트팔렌 왕국
이후 국가 (1814년)하노버 왕국
통치자
직함선제후
통치자 1에른스트 아우구스트
통치 기간 11692–1698
통치자 2게오르크 1세 루이
통치 기간 21698–1727
통치자 3게오르크 2세 아우구스투스
통치 기간 31727–1760
통치자 4게오르크 3세 빌헬름 프리드리히
통치 기간 41760–1806
현재 국가
현재 국가독일

2. 정식 명칭

1692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는 9년 전쟁에서 도움을 준 것에 대한 보상으로,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칼렌베르크 공국 가문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 공작을 제국의 선제후 지위로 격상시켰다. 새로운 선제후 추가에 대한 반대가 있었고, 이 승격은 1708년 제국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공식화되었다. 칼렌베르크의 수도인 하노버는 구어체로 선제후국을 대표하게 되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전체 공작 왕조의 이름인 Kurfürstentum Braunschweig-Lüneburg|쿠어퓌르스텐툼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de를 사용했다.

3. 지리

선제후국은 독일 북부, 현재 독일 연방주인 니더작센주의 넓은 지역을 포함했다. 칼렌베르크 공국 외에도 이전의 괴팅겐 공국, 그루벤하겐 공국 및 이전 호야 백국의 영토도 포함했다.

1705년, 선제후 조지 1세 루이는 삼촌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게오르크 빌헬름이 사망하자 뤼네부르크 공국과 작센-라우엔부르크 공국을 상속받았다. 1715년, 덴마크-노르웨이 국왕 프레데리크 4세로부터 브레멘-페르덴 공국을 매입했으며(1719년 스톡홀름 조약으로 확인), 이로 인해 이전의 내륙 선제후국은 북해로의 접근성을 확보했다.[1]

1700년, 선제후국을 형성하는 영토는 제국 직속 신분의 다른 모든 개신교 영토와 마찬가지로,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개신교에서 개선된 달력이라 불렀던 그레고리력을 도입했다. 따라서 구식 달력으로 2월 18일 (구식) 다음은 3월 1일 (신식)이 되었다.[2]

4. 역사

169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는 대동맹 전쟁에서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칼렌베르크 공국 가문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 공작이 지원을 제공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제국의 선제후 지위로 격상시켰다. 새로운 선제후 추가에 대한 항의가 있었고, 이 지위는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아들인 게오르크 루이 때인 1708년이 되어서야 제국 의회의 승인을 받아 공식화되었다. 칼렌베르크의 수도인 하노버는 구어체로 선제후국을 대표하게 되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전체 공작 왕조의 이름인 ''Chur-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를 사용했다.

하노버는 1719년에 브레멘-페르덴을 획득했다.

선제후국은 법적으로 분할될 수 없었다. 즉, 영토를 추가할 수는 있었지만, 영토를 양도하거나 여러 상속인에게 분할될 수 없었으며, 상속은 남성 장자 상속을 따랐다. 선제후국에 할당된 영토에는 칼렌베르크, 그루벤하겐, 뤼네부르크 (당시 뤼네부르크는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형이 통치하고 있었음)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과 디프홀츠, 호야 백작령이 포함되었다.

4. 1. 영국과의 관계

1714년, 조지 루이는 그레이트브리튼아일랜드의 국왕이 되면서 선제후국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는 동군 연합으로 통치되었다. 1719년에는 스웨덴이 소유했던 브레멘과 페르덴을 사실상 구매하여 독일 내 선제후의 영토가 확장되었다.

1727년 조지 루이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조지 2세 아우구스투스가 그 뒤를 이었다.[1] 1728년, 신성 로마 황제 카를 6세는 조지 2세에게 반환된 작센-라우엔부르크를 공식적으로 봉토 수여했는데, 작센-라우엔부르크는 1689년부터 하노버 및 이전의 뤼네부르크 중 하나와 사실상 동군 연합으로 통치되고 있었다.[1]

1731년, 하노버는 하델른을 획득했다.[2] 조지 2세 아우구스투스는 카를 6세를 설득하여 브레멘 공작령과 페르덴 공작령(통칭 브레멘-페르덴 공작령)을 봉토로 수여받는 데 1733년까지 걸렸다.[2] 두 번의 봉토 수여 시, 조지 2세 아우구스투스는 브레멘-페르덴과 하델른의 신분의 기존 특권과 헌법을 존중하겠다고 맹세했으며, 이는 정부에 신분의 참여에 대한 400년 된 전통을 확인하는 것이었다.[2]

선제후국의 수도인 하노버에서 하노버 추밀원(선제후 정부)은 동군 연합으로 통치되는 제국 영지를 담당하는 새로운 부서를 설치했다.[3] 이 부서는 브레멘-페르덴, 하델른, 라우엔부르크, 벤트하임 부서라고 불렸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제후는 대부분의 시간을 잉글랜드에서 보냈다.[3] 선제후국과의 직접적인 연락은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 위치한 독일 재무처를 통해 유지되었다.[3]

4. 2. 7년 전쟁

프렌치-인디언 전쟁(1754년~1763년) 동안, 영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프랑스의 하노버 침공을 두려워했다. 조지 2세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동맹을 맺어 북아메리카의 분쟁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오스트리아 간의 세 번째 슐레지엔 전쟁, 또는 7년 전쟁(1756년~1763년)을 연결했다.[1]

1757년 여름, 프랑스는 하노버를 침공하여 하스텐베크 전투에서 윌리엄 공작이 이끄는 영국-하노버 군대를 격파하고, 그와 그의 군대를 외딴 브레멘-페르덴으로 몰아냈다. 그곳의 옛 ''제벤'' Kloster Zeven|클로스터 제벤|lt=''수도원''de에서 9월 18일에 항복했다(클로스터-제벤 협약). 그러나 조지 2세는 이 협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음 해, 영국군은 프로이센, 헤세-카셀 방백령,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국 군대의 지원을 받아 점령군을 다시 몰아냈다. 하노버는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영향을 받지 않았다.[1]

4. 3. 프랑스 혁명 전쟁

프랑스 혁명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 평화가 지속되었다.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1792–1797)에서 영국, 하노버를 비롯한 다른 동맹국들이 연합을 형성했지만, 프랑스 제1 공화국이 자국 영토를 포함하여 여러 전선에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하노버 영토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영국군의 지휘 아래 저지대 국가에서 프랑스와 싸우는 16,000명의 하노버 군인을 모집하기 위해 징병이 이루어졌다. 1795년, 신성 로마 제국은 하노버를 포함한 중립을 선언했지만, 프랑스와의 평화 조약은 1799년에 실패할 때까지 협상 중이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바젤 조약(1795)을 통해 프랑스와의 전쟁을 종결했는데, 이 조약은 프로이센이 마인강 북쪽의 모든 신성 로마 제국 영토(하노버, 브레멘-페르덴, 작센-라우엔부르크를 포함한 영국의 대륙 영토)의 중립을 보장하도록 규정했다.[1] 이를 위해 하노버는 무장 중립을 유지하는 소위 경계선 군대에 병력을 제공해야 했다.[1]

4. 4. 나폴레옹 시대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1799–1802) 동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프로이센에게 유럽 대륙 내 영국의 영토를 점령하라고 촉구했다. 1801년, 프로이센군 24,000명이 하노버를 기습 침공하여 저항 없이 항복을 받아냈다.[1] 프로이센군은 4월에 브레멘-페르덴의 수도 슈타데에 도착하여 10월까지 머물렀다.[1] 영국은 처음에는 프로이센의 적대 행위를 무시했지만, 프로이센이 덴마크-노르웨이러시아 제국을 포함한 친프랑스 무장 중립 세력에 가담하자, 영국은 프로이센 선박을 나포하기 시작했다.[1] 코펜하겐 해전 (1801년) 이후, 동맹은 붕괴되었고 프로이센은 군대를 철수했다.[1]

1803년 2월 25일 독일 제국 개편의 일환으로, 선제후국은 1662년부터 하노버 왕가의 지배자들이 번갈아 통치해 온 오스나브뤼크 주교령을 동군 연합으로 받았다.[2]

영국이 동맹국 없이 프랑스에 선전 포고(1803년 5월 18일)를 한 후, 프랑스 군대는 5월 26일 하노버를 침공했다.[3] 아르텐부르크 협약 (1803년 7월 5일)에 따라, 하노버는 군사적 패배를 확인하고, 하노버군은 무장 해제되었으며, 말과 탄약은 프랑스에 넘겨졌다.[3] 하노버 추밀원은 프리드리히 프란츠 디테리히 폰 브레머 장관이 하노버의 지분을 주장하며 엘베 강을 건너 영국과 하노버가 동군 연합으로 다스리던 작센라우엔부르크로 피신했고, 곧 프랑스는 작센라우엔부르크도 점령했다.[3]

1805년 가을,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1805)의 시작과 함께, 프랑스 점령군은 오스트리아 제국을 상대로 한 작전을 위해 하노버를 떠났다.[4] 영국, 스웨덴 및 러시아 연합군이 하노버 원정으로 하노버를 점령했다.[4] 12월에, 1804년부터 프랑스의 새로운 정부였던 프랑스 제1제국은 더 이상 보유하지 않던 하노버를 프로이센에 양도했고, 프로이센은 1806년 초에 하노버를 점령했다.[4]

1806년 8월 6일,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어 황제를 선출하는 선제후의 기능이 폐지되었다.[5]

1807년 틸지트 조약에 따라, 나폴레옹의 형제인 제롬 보나파르트가 통치하는 새로운 베스트팔렌 왕국이 설립되었고, 이전 헤세-카셀 선제후국,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령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및 이전 프로이센 영토가 포함되었다. 1810년 초에 하노버 본토와 브레멘-페르덴은 베스트팔렌에 합병되었지만 작센라우엔부르크는 제외되었다. 대륙 봉쇄령을 시행하기 위해, 프랑스 제국은 1810년 말에 대륙의 모든 북해 해안(덴마크까지)과 브레멘-페르덴 및 작센라우엔부르크와 하노버 본토의 일부 인접 지역을 포함하여 항해 가능한 강 유역을 병합했다.

그러나 조지 3세 정부는 프랑스 병합을 인정하지 않았고, 전 기간 동안 프랑스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였으며, 하노버 장관들은 런던에서 계속 활동했다. 하노버 추밀원은 오스트리아 및 프로이센과 같은 국가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자체 외교부를 유지했다. 하노버군은 해산되었지만, 많은 장교와 병사들이 잉글랜드로 가서 왕립 독일 군단을 결성했다. 이는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에 대항하여 지속적으로 싸운 유일한 독일군이었다.

프랑스의 지배는 1813년 11월까지 지속되었고,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연합군이 영토를 점령하면서 하노버 해방이 이루어져 베스트팔렌의 나폴레옹 괴뢰 국가와 라인 동맹 전체가 종식되었고, 하노버 왕가의 통치가 복원되었다. 이전 선제후국은 1814년 빈 회의에서 확인된 하노버 왕국이 되었다.

5. 하노버 선제후

하노버 가문의 선제후국은 법적으로 분할될 수 없었다. 즉, 영토를 추가할 수는 있었지만, 이전의 규칙처럼 영토를 양도하거나 여러 상속자에게 분할할 수 없었다. 이는 때때로 많은 수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으로 이어졌다. 상속은 남성 장자 상속을 따라야 했다. 이는 당시 공작 가문에 유효했던 살리카 법에 위배되었기에, 황제의 승인이 필요했고, 레오폴트 1세 황제가 1692년에 이를 승인했다.

하노버 선제후 목록
선제후재위 기간상속비고
조지 1세 루이
게오르크 루드비히
1708년–1727년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의 아들1714년에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아일랜드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1719년에 브레멘-페르덴을 획득했다.
조지 2세 아우구스투스
게오르크 2세 아우구스트
1727년–1760년조지 1세의 아들1731년에 하델른 지역을 획득했다.
조지 3세 윌리엄 프레데릭
게오르크 3세 빌헬름 프리드리히
1760년–1806년조지 2세의 손자1801년에 아일랜드와의 연합법에 의해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1803년에 오스나브뤼크 주교령을 획득했다.
1801~1813년의 다양한 점령과 합병으로 인해 사실상 권력을 잃었다가 회복되었다: 잃음 (1801년 초), 회복 (1801년 4월), 잃음 (1803년 5월), 회복 (1805년 가을), 잃음 (1806년 초), 그리고 회복 (1813년 10월).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로 선제후 칭호가 무효화되었지만, 조지 3세는 이 해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1814년 초에 하노버 국왕으로 선포되었으며, 1814~1815년 빈 회의 동안 널리 인정받았다.


참조

[1] 웹사이트 Hannover und die englische Thronfolge http://hsozkult.gesc[...] H-Soz-Kult 2020-03-20
[2] 서적 Histoire de la formation territoriale des États de l'Europe centrale
[3] 서적 Hanover and the British Empire, 1700–1837 https://books.google[...] Boydell & Brewer
[4] 서적 Hannover in der britischen Politik (1792–1815): dynastische Verbindung als Element aussenpolitischer Entscheidungsprozesse https://books.google[...] LIT Verlag Münster
[5]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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