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프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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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빌리 프리치는 독일의 배우로, 무성 영화 시대부터 1930년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까지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며 활동했다. 1901년 카토비체에서 태어나 1919년 도이체스 테아터 연극학교에 입학하여 배우 경력을 시작했으며, 1920년 영화 데뷔 이후 무성 코미디와 스릴러, SF 영화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했다. 1929년 유성 영화에 출연하며 릴리안 하비와 함께 뮤지컬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인기를 얻었으며, 나치 시대에도 활동을 이어갔다. 전쟁 후 함부르크로 이주하여 영화에 출연했으며, 1964년 마지막 영화를 촬영한 후 1973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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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프리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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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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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빌헬름 에곤 프리츠 프리치 |
직업 | 배우 |
출생일 | 1901년 1월 27일 |
출생지 | 카토비체, 독일 제국 |
사망일 | 1973년 7월 13일 |
사망지 | 함부르크, 서독 |
활동 기간 | 1921–1964 |
배우자 | 디나 그레이스 (1963년 사망) |
자녀 | 토마스 프리치 |
2. 생애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독일의 대표적인 배우 중 한 명으로, 무성 영화 시대부터 활동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특히 1930년대에는 동료 배우이자 아내였던 릴리안 하비와 함께 여러 작품에 출연하며 독일 영화계의 최고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배우 경력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부터 나치 독일 시대를 거쳐 전후까지 이어졌으며, 1973년 함부르크의 한 병원에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3].
2. 1. 초기 생애 (1901-1919)
그는 프로이센 왕국 슐레지엔의 카토비체에서 공장 주인의 외아들 빌헬름 에곤 프리츠 프리치로 태어났다. 1912년 아버지의 파산 이후 가족은 베를린으로 이사했으며, 그곳에서 아버지는 지멘스-슈케르트 사의 직원으로 일했다. 어린 빌리는 원래 정비공 견습을 계획했지만, 곧 그로세스 샤우슈필하우스 극장에서 엑스트라로 일하기 시작했다.2. 2.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1919-1932)
1919년부터 그는 막스 라인하르트가 운영하는 도이체스 테아터 연극학교에 다니며 연기 경력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작은 역할을 맡았으며, 때로는 마를레네 디트리히와 함께 봄의 깨어남 같은 작품에 보조 출연하기도 했다. 1920년 영화 ''미스 비너스''에서 조연으로 스크린에 데뷔했고, 3년 뒤인 1923년에는 ''그의 신비로운 모험''에서 처음으로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다.1925년, 루드비히 베르거 감독의 무성 영화 ''왈츠의 꿈''에서 주연을 맡으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성공으로 미국의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로부터 계약 제안을 받았으나, 영어 실력 부족을 이유로 거절했다. 이후 독일 최대 영화사 UFA와 계약하고, ''정숙한 수잔''(1926), ''마지막 왈츠''(1927), ''헝가리 랩소디''(1928), ''그녀의 어두운 비밀''(1929) 등 다수의 무성 코미디 영화에서 젊은 연인 역할로 인기를 끌었다. 프리치는 코미디 외에도 프리츠 랑 감독의 스릴러 영화 ''스파이''(1928)와 SF 영화 ''달의 여인''(1929)에 출연하여 진지한 연기를 선보였고, 이 작품들 역시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929년, 독일 최초의 토키 중 하나인 ''멜로디 데스 헤르젠(마음의 멜로디)''에 출연하며 "나는 말을 사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어요!"라는 대사로 유성 영화 시대를 열었다. 그 직후, 1920년대 중반에 두 차례 함께 작업했던 배우 릴리안 하비와 다시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함께 출연한 뮤지컬 로맨틱 코미디 ''사랑의 왈츠''(1930)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제작자 에리히 포머는 이들을 "완벽한 커플"로 내세워 후속작들을 기획했다. 그리하여 하비와 프리치는 UFA의 대표작인 ''주유소 세 사람''(1930), 에릭 차렐 감독의 ''콩그레스 댄스''(1931), ''금발의 꿈''(1932) 등에 연이어 출연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동시에 카테 폰 나지와도 여러 작품에서 호흡을 맞췄는데, 빌리 와일더의 각본 데뷔작인 ''그녀의 은총은 명령한다''(1931)와 ''나는 낮에, 당신은 밤에''(1932) 등이 대표적이다. 당시 독일 영화는 종종 여러 언어 버전으로 제작되었는데, 프리치는 주로 독일어 버전에 출연했으며, 그의 영화가 더빙되지 않을 경우 프랑스 배우 앙리 가라가 그를 대체하기도 했다. 그의 뮤지컬 코미디 영화에서 프리치는 뛰어난 노래 실력도 선보였다. 베르너 R. 하이만이나 프리드리히 홀랜더가 작곡한 영화 삽입곡들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 프리치는 독일에서 가장 높은 출연료를 받는 배우 중 한 명이었고, 가는 곳마다 수많은 팬들을 몰고 다녔다. 그의 인기를 반영하듯, 1931년에는 그를 위한 팜 코트 음악인 ''나는 빌리 프리치와 사랑에 빠졌어요''(Ich bin in Willy Fritsch verliebtdeu)가 작곡되기도 했다.[1] 같은 해 프리드리히 홀랜더는 베를린의 유명한 팅겔 탕겔 극장 개관을 위해 프리치를 위한 쿠플레 ''15 3/4세 소녀의 기도 - 왜 빌리 프리치는 저렇게 잘생겼을까?''(Gebet einer 15 3/4-Jährigen - Warum ist der Willy Fritsch so schön?deu)를 헌정했다.
2. 3. 나치 시대 (1933-1945)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후에도 프리치는 독일에서 배우 경력을 이어갔다. 1930년대 중반에는 라인홀트 쉰첼 감독의 암피트리온(1935)이나, 프랭크 카프라의 영화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을 독일식으로 각색한 파울 마틴 감독의 행운의 아이들(1936)과 같은 매우 성공적인 코미디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1930년대 말에는 릴리안 하비와 함께 일곱 대의 채찍(1937)과 여자는 운전할 때(1939) 두 편의 코미디 영화에 출연했으며, 이후 하비는 프랑스로 이민을 갔다. 1940년에는 독일 최초의 컬러 영화인 여자는 외교에 더 능숙하다의 주연을 맡기도 했다.프리치는 압력에 못 이겨 NSDAP에 가입했지만, 정치색이 짙은 활동은 피하려 노력했다. 1944년 비행사 영화 Junge Adler|융에 아들러deu에 출연한 것을 제외하고는 나치 선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을 피했으며, 이 영화 출연으로 인해 괴벨스의 갓 기프트 명단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그는 빌리 포르스트가 감독한 비엔나의 피(1942)나 에리히 케스트너가 각본을 쓴 잘츠부르크 코미디(1943)와 같은 오스트리아 색채의 코미디 영화에 주로 출연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유지했다. 당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신뢰 부족"이라는 이유로 게슈타포의 감시를 받기도 했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명성을 잃지 않고 히틀러 시대를 헤쳐나갔다.
2. 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1973)
전쟁 후, 그는 함부르크로 이주하여 활동을 이어갔다. 힐데가르트 네프와 함께 출연한 ''제목 없는 영화(Film ohne Titel)'' (1948)를 시작으로, 젊은 로미 슈나이더와 호흡을 맞춘 ''그린 히스(The Heath Is Green)'' (1951)와 ''하얀 라일락이 다시 필 때(When the White Lilacs Bloom Again)'' (1953) 등 여러 독일 흥행 영화에 출연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1958년에는 독일어 영화 ''Mit Eva fing die Sünde ande''에 출연했는데, 이 작품은 훗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추가 장면을 촬영하고 각색하여 그의 감독 데뷔작인 ''벨보이와 플레이걸(The Bellboy And The Playgirls)'' (1962)로 재탄생하기도 했다.
프리치의 마지막 영화 출연작은 1964년 작품인 ''나는 아버지에게서 배웠다(Das hab' ich von Papa gelernt)''이다. 이 영화는 악셀 폰 암베서가 감독을 맡았으며, 그의 아들인 배우 토마스와 함께 출연했다.
2. 5. 사망
1973년 함부르크의 한 병원에서 심장 마비(심장병)로 사망했다[3]. 당시 나이는 72세였으며, 함부르크 오스도르프 묘지에 묻혔다.3. 주요 작품
빌리 프리치는 무성 영화와 유성 영화 시대를 아우르며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였다. 그의 상세한 출연 작품 목록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1. 무성 영화
- ''미스 비너스''(Miss Venus, 1921)
- ''레이드''(Raid, 1921)
- ''Die kleine Midinette''(1921)
- ''젤브스턴''(Gelbstern, 1921)
- ''데어 헤이라트슈빈들러''(Der Heiratsschwindler, 1922)
- ''데어 블린데 파사지어''(Der blinde Passagier, 1922)
- ''할리히 호게''(Hallig Hooge, 1923)
- ''그의 신비한 모험''(His Mysterious Adventure, 1923)
- ''디 파르트 인스 글뤼크''(Die Fahrt ins Glück, 1923)
- ''어머니와 아이''(Mother and Child, 1924)
- ''단두대''(Guillotine, 1924)
- ''사랑의 급행 열차''(Express Train of Love, 1925)
- ''텍사스에서 온 농부''(The Farmer from Texas, 1925)
- ''댄싱 매드''(Dancing Mad, 1925)
- ''왈츠의 꿈''(A Waltz Dream, 1925)
- ''후원자와 함께 온 소녀''(The Girl with a Patron, 1925)
- ''이브의 구애''(The Wooing of Eve, 1926)
- ''왕자와 무용수''(The Prince and the Dancer, 1926)
- ''복서의 신부''(The Boxer's Bride, 1926)
- ''순수한 수잔''(Chaste Susanne, 1926)
- ''여섯 자매''(A Sister of Six, 1926)
- ''마지막 왈츠''(The Last Waltz, 1927)
- ''그의 고귀하신 은퇴''(His Late Excellency, 1927)
- ''옷장 속의 여자''(The Woman in the Cupboard, 1927)
- ''유죄''(Guilty, 1928)
- ''스파이''(Spies, 1928)
- ''사랑하기 때문에''(Because I Love You, 1928)
- ''함부르크의 부두''(Docks of Hamburg, 1928)
- ''헝가리 랩소디''(Hungarian Rhapsody, 1928)
- ''그녀의 어두운 비밀''(Her Dark Secret, 1929)
- ''달의 여인''(Woman in the Moon, 1929)
3. 2. 유성 영화
- 닥스 오브 함부르크 (1928)
- 달의 여인 (1929)
- ''마음의 멜로디'' (1929)
- ''사랑의 왈츠'' (1930)
- ''호커스포커스'' (1930)
- ''주유소의 세 사람'' (1930)
- ''도둑'' (1930)
- ''그녀의 은총이 명한다'' (1931)
- ''비밀 정보국에서'' (1931)
- ''콩그레스 댄스'' (1931)
- ''로니'' (1931)
- ''뻔뻔한 악마'' (1932)
- ''미친 생각'' (1932)
- ''금발의 꿈'' (1932)
- ''나는 낮에, 당신은 밤에'' (1932)
- ''카이로의 계절'' (1933)
- ''왈츠 전쟁'' (1933)
- ''Des jungen Dessauers große Liebe'' (1933)
- ''Die Töchter Ihrer Exzellenz'' (1934)
- ''섬'' (1934)
- ''프린체신 투란도트'' (1934)
- ''암피트리온'' (1935)
- ''검은 장미'' (1935)
- 글룩스킨더 (1936)
- ''보카치오'' (1936)
- ''행운의 아이들'' (1936)
- ''조국 없는 사람들'' (1937)
- ''일곱 번의 따귀'' (1937)
- ''Gewitterflug zu Claudia'' (1937)
- ''부모 사이'' (1938)
- ''어젯밤의 소녀'' (1938)
- ''실크 실로'' (1938)
- ''프로이센의 사랑 이야기'' (1938)
- ''바퀴의 여성'' (1939)
- ''Die Geliebte'' (1939)
- ''Streit um den Knaben Jo'' (1939)
- ''Die unvollkommene Liebe'' (1940)
- ''Die keusche Geliebte'' (1940)
- ''Das leichte Mädchen'' (1940)
- ''Dreimal Hochzeit'' (1941)
- ''여자가 더 나은 외교관이다'' (1941)
- ''Leichte Muse'' (1941)
- 빈 기질 (1942)
- ''비엔나의 피'' (1942)
- ''바쿠 공격'' (1942)
- ''사랑하는 세상'' (1942)
- ''잘츠부르크 코미디'' (1943)
- ''Liebesgeschichten'' (1943)
- ''Die Gattin'' (1943)
- ''Junge Adler'' (1944)
- ''박쥐'' (1944–1946)
- ''제목 없는 영화'' (1948)
- ''피날레'' (1948)
- ''안녕 - 당신은 당신의 아내를 잊었어요''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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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의 그림자''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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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아름다워야 한다'' (1951)
- ''일곱 베일의 마야''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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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튀니스 기밀''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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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연인'' (1960)
- ''Wenn die Heide blüht''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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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벨라 섬'' (1961)
- ''Der Himmel kann warten'' (TV, 1962)
- ''Jazz und Jux in Heidelberg / Verliebt in Heidelberg'' (1963)
- ''Rauf und runter'' (TV, 1964)
- ''아버지에게 배웠다'' (1964)
4. 대중문화 속 빌리 프리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2009년 영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는 빌리 프리치가 릴리안 하비와 함께 1936년 영화 ''행복한 아이들''에서 부른 듀엣곡 "Ich wollt' ich wär ein Huhn|나는 닭이었으면 좋겠네de"이 사용되었다. 이 노래는 극 중 지하실 장면 "라 루이지애나"와 확장된 장면 "괴벨스와의 점심 식사"에서 축음기를 통해 흘러나온다.
영화 속에서 나치 독일의 선전 장관이었던 요제프 괴벨스(실베스터 그로스 분)는 비공개 상영회를 열기로 결정한 후 이 노래의 일부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상영회가 끝난 후, 영화관 주인 쇼산나 드레퓌스(멜라니 로랑 분)가 가명 "엠마뉴엘 미미외"로 영화 속 릴리안 하비를 좋아한다고 말하자, 괴벨스는 이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자신의 앞에서 그녀의 이름을 다시는 언급하지 말라고 강하게 말한다.
한편, 코미디언 하모니스트가 부른 버전의 "Ich wollt' ich wär ein Huhnde" 역시 오늘날까지 독일에서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참조
[1]
간행물
Ufaton Berlin 19794
1931-07-22
[2]
서적
Ein Feuerwerk an Charme. Willy Fritsch.
[3]
뉴스
訃報欄
朝日新聞
1973-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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