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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니 여인들의 강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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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비니 여인들의 강간은 로마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사건으로, 로마의 초대 왕 로물루스가 인구 증가를 위해 사비니족 여성들을 납치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로마는 건국 초기 남성 위주의 사회였기에 인구 증가에 어려움을 겪었고, 주변 부족과의 통혼이 거절되자 넵투누스 축제를 열어 사비니족 여성들을 납치했다. 납치된 여성들은 로마인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고, 이후 사비니족과의 전쟁에서 여성들의 중재로 로마와 사비니족이 통합되어 하나의 국가를 이루었다. 이 사건은 예술 작품의 소재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폭력의 정당화, 여성의 역할, 갈등 해결과 통합의 중요성 등 다양한 측면에서 현대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2. 역사적 배경

Crate EnvironsRome Monarchie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에 따르면, 사비니 여성들의 납치 사건은 기원전 8세기 중반 로마 건국 직후, 로물루스와 그를 추종하는 남자들이 저질렀다고 한다. 당시 로마는 라틴족과 기타 이탈리아계 사람들, 특히 남성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다.[14]

로마가 성장하면서 로물루스는 도시 유지를 위해 여성 인구 확보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여성 부족으로 인해 로마는 한 세대 이상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원로원의 조언에 따라 로마인들은 주변 지역에 아내를 찾기 위해 나섰지만, 사비니족을 포함한 이웃 민족들은 로마와의 결혼을 거부했다. 이는 경쟁 사회의 출현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로마인들은 넵투누스 승마 축제 기간 동안 사비니 여성들을 납치할 계획을 세웠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카이니나, 크루스투미니, 안템나이 등 이웃 마을 사람들이 축제에 참석했고, 로물루스는 신호를 보내 사비니 여인들을 붙잡고 싸웠다.[15] 납치된 여성들은 대부분 처녀였으며, 유부녀인 헤르실리아는 로물루스의 아내가 되어 이후 로마와 사비니족 간의 전쟁을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16] 로물루스는 피랍자들에게 로마의 새 남편으로 받아들일 것을 간청했다.[17]

2. 1. 로마 건국과 인구 문제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로물루스가 로마를 세웠지만 초기에는 남성 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여성 인구가 부족하여 인구 증가와 사회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14] 로물루스는 인구를 늘리기 위해 "피난처"를 설치하여 범죄자, 부랑자, 채무자, 망명자, 도망 노예 등을 받아들여 시민으로 삼았으나,[14] 여성 부족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여, 로마는 한 세대 만에 멸망할 위기에 처했다.

로물루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 부족인 사비니족에게 결혼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사비니족은 로마의 평판을 불신했고, 로마가 성장하여 경쟁자가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에 로물루스는 넵투누스 축제를 열어 사비니족을 초대한 후, 신호에 맞춰 사비니족 여성들을 납치하는 계획을 세웠다.[15]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의 그림(1627년 - 1629년)


리비우스에 따르면, 카이니나, 크루스투미니, 안템나이 등 여러 도시의 사비니족 사람들이 축제에 참여했다.[15] 로물루스의 신호에 따라 로마 청년들은 사비니족 미혼 여성들을 공격하여 납치했다. 이 과정에서 뛰어난 외모의 여성들은 파트리키 유력자들에게 보내졌고, 나머지 여성들도 로마인들에게 강제로 빼앗겼다.[16]

발레리우스 안티아스는 납치된 여성의 수를 527명, 유바는 685명이라고 기록했다. 로물루스는 납치된 여성들에게 이 상황이 그들 부모의 탓이라고 주장하며, 결혼 후 안정된 생활과 시민권, 재산권을 보장하고 자유로운 아이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고 설득했다.[1] 결국 사비니족 여성들은 로마인과 강제로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고, 로마는 멸망 위기에서 벗어났다.[2][3]

2. 2. 사비니족과의 관계

로마는 인구 증가를 위해 "피난처"를 설치하여 범죄자, 부랑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시민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여성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근 사비니족에게 통혼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사비니족은 로마의 평판을 문제 삼고, 로마가 성장하여 경쟁자가 될 것을 우려하여 통혼을 거부했다. 로마에서 온 사절은 "여성용 피난처를 만들면 어울리는 여성이 모일 것이다"라는 조롱 섞인 답변을 들었다.[1]

3.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로마 건국 초기, 로물루스는 인구 부족 문제, 특히 여성 부족 문제에 직면했다.[14]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웃 사비니족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사비니족은 로마와의 경쟁을 우려하여 결혼을 거부했다.

이에 로물루스는 사비니족을 속여 여성들을 납치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넵투누스 승마 축제를 개최하여 주변 부족들을 초대한 뒤, 축제 도중 신호를 보내 사비니 여성들을 납치했다. 이 사건은 로마와 사비니족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납치된 여성의 수는 기록마다 다르지만, 로물루스는 이들을 설득하여 로마 시민으로 받아들이고, 로마의 성장에 기여하도록 만들었다.

3. 1. 넵투누스 축제

로물루스는 넵투누스에게 바치는 축제를 개최하여 주변 부족들을 초대했다. 카이니나, 크루스투미니, 안템나이 등 여러 도시의 사비니인들이 축제에 참여했다.[15]

3. 2. 납치 실행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에 따르면,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는 기원전 8세기 중반 로마 건국 직후, 로물루스와 그의 남성 추종자들이 저질렀다. 로마는 인구 부족으로 한 세대 이상 지속되지 못할 위기에 처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로물루스는 해왕성 승마 축제를 열어 이웃 부족들을 초대했다. 축제에는 카이니나, 크루스투미니, 안템나이 등 여러 도시의 사람들이 참석했고, 특히 사비니인들이 많이 참여했다. 축제 도중 로물루스는 신호를 보냈고, 로마 청년들은 사비니 미혼 여성들을 납치하여 사비니 남성들과 싸웠다.[15]

리비우스는 납치된 사비니 여성이 30명이었으며, 모두 처녀였다고 기록했다.[16] 그러나 납치된 여성의 수에 대한 기록은 다양하다. 발레리우스 안티아스는 527명, 유바는 685명으로 기록했다.

역사가기록된 납치된 여성의 수
리비우스30명
발레리우스 안티아스527명
유바685명



로물루스는 납치된 여성들에게 로마인과 결혼하여 시민권과 재산권을 갖고, 자유로운 사람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1]

3. 3. 납치 이후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에 따르면, 납치된 사비니 여성들은 로마인들의 새 남편이 될 것을 간청받았다.[17] 로물루스는 직접 여성들에게 찾아가, 이 상황은 주변 민족이 이민족 간의 결혼을 거부했기 때문이며 여성들의 부모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여성들에게 결혼 후의 안정된 생활, 시민권, 재산권을 약속하며, "인간에게 최고의 보물인 아이를 갖고 자유로운 사람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고 설득했다. 더불어 "부디 분노를 가라앉혀 주기를 바란다. 우연히 그 몸을 주게 된 상대에게 이제는 마음도 주기를 바란다. 불법 행위 후에, 잠시 후 화해가 생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녀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채워지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하며, 로마인의 아내가 되어 로마인의 아이를 낳아줄 것을 요청했다.[1] 결국, 귀향의 희망을 잃은 사비니 여성들은 로마인과 강제로 혼인 관계를 맺고 아이를 낳아, 로마가 한 세대 만에 멸망하는 위기를 피하게 되었다. 로물루스는 사비니 여성을 혹사하는 것은 금지했지만 귀향은 허락하지 않았고, 여성들은 계속해서 로마인들의 아이를 낳으며 로마의 발전에 봉사했다.[2][3]

4. 사비니족과의 전쟁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사건은 로마와 사비니족 간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사비니족은 호전적이고 자존심이 강했으며, 성벽이 없는 마을에 살면서 두려움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납치된 여성들 때문에 로마에 사절을 보내 여성들의 석방과 사과를 요구했지만, 로물루스는 "노예가 아닌 정식 결혼"이라며 거절했다.

이에 카이니나, 안템나이, 크루스투미니, 그리고 사비니족이 로마와 전쟁을 벌였다. 로마는 각 부족과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로물루스는 백성을 30개의 쿠리아(시민단)으로 나누었는데, 이 쿠리아의 이름은 납치된 사비니 여성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4. 1. 카이니나, 안템나이, 크루스투미니와의 전투

카이니나의 왕은 일어난 일에 분노하여 군대를 이끌고 로마 영토에 들어갔다. 로물루스와 로마군은 전투에서 카이니나 군을 만나 왕을 죽이고 군대를 패주시켰다. 로물루스는 카이니나를 공격하여 첫 번째 공격에서 함락시켰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유피테르 페레트리오스에게 신전을 헌납하고(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에서 헌납된 최초의 신전) 적 왕의 소유물을 전리품으로 바쳤다. 파스티 트리움팔레스에 따르면, 로물루스는 기원전 752년 3월 1일에 카이니나에 대한 승리를 축하했다.[4]

동시에 안템나이 군대가 로마 영토를 침공했다. 로마군은 보복했고, 안템나이는 전투에서 패배하고, 그들의 도시는 함락되었다. 파스티 트리움팔레스에 따르면 로물루스는 기원전 752년에 안템나이에 대한 두 번째 승리를 축하했다.

크루스투미니도 전쟁을 시작했지만, 그들 역시 패배하고 그들의 마을은 함락되었다.

이후 로물루스는 로마 식민지 개척자들을 안템나이와 크루스투메리움으로 보냈고, 그 도시의 많은 시민들(특히 포로가 된 여성의 가족)도 로마로 이주했다.

4. 2. 사비니족과의 주요 전투

사비니족은 왕 티투스 타티우스에 이끌려 로마와 전쟁에 돌입했다. 이는 훨씬 더 중대한 일이었는데, 그들은 분노나 격정에 휩싸여 행동하는 일이 전혀 없었고, 개전까지 싸움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피톨리누스 요새를 지배하고 있던 스푸리우스 타르페이우스의 딸 타르페이아의 배신 덕분에, 타티우스의 로마 공격은 거의 성공할 뻔했다. 그녀는 "사비니족이 팔에 걸고 있는 것"을 보상으로 받는다는 약속으로 도시 성문을 그들을 위해 열었다. 그녀는 사비니족의 금 팔찌를 받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들이 던진 방패의 무게에 압사당하고, 타르페이아의 바위라고 후에 불린 바위에서 그 유해가 버려졌다.[1]

요새를 점령한 사비니 군을, 이번에는 로마군이 공격하는 측이 되었다. 로마군 측은 호스투스 호스틸리우스가 이끌었고, 사비니 군 측은 메테스 쿠르티우스가 이끌었다. 호스틸리우스가 패배하자, 로마 측은 총공세로 팔라티누스 궁전의 문까지 후퇴했다. 거기서 로물루스는 남자들을 모아 팔라티누스 언덕에 유피테르 (Jupiter Stator) 신전을 짓겠다고 약속하고, 로마인을 전투에 다시 참여시켰다.[1]

전투는 계속되었다. 메테스 쿠르티우스는 궁지에 몰려 전장에서 도망치고, 로마군이 우위를 점했다.[1]

이때, 여성들이 전장에 뛰어들어 양측을 화해시키려 했다.[1][3]

> (그녀들은) 머리를 흩뜨리고, 넝마 조각의 옷을 입고 투사체가 오가는 가운데로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양측 군대 사이의 틈새를 뛰어다니며 더 이상의 전투를 멈추게 하려 했고, 한쪽 진영에 있는 아버지와 다른 쪽 진영에 있는 남편에게 의붓아버지 또는 의붓아들의 피로 그 손을 더럽혀 자손에게 부친 살해의 오명을 남겨 저주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간청하며, 양측 군대의 격정을 진정시키려 했다. "만약"이라고 그녀들은 말한다. "당신들이 이 친족 관계, 결혼의 유대감을 참을 수 없다면, 그 분노를 우리에게 쏟아주세요. 전쟁의 원인은 우리이고, 남편과 아버지를 다치게 하고 죽인 것은 우리입니다. 우리로서는 당신들 중 한쪽을 잃고 고아가 되거나 미망인으로 살아남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1]

> "우리가 전에도 비참한 불행을 겪었고, 지금 또 그것을 겪고 있는 것은, 어떤 끔찍한 일, 어떤 괴로운 일을 당신들에게 가했기 때문입니까. 전에는 지금의 남편들에게 억지로 무법하게 약탈당했습니다. 게다가 약탈당한 채 형제들에게도 아버지들에게도 친척들에게도 이렇게 오랫동안 방치된 탓에, 지금은 가장 증오하는 적과 굳건한 유대로 맺어져, 한때 폭력을 휘두르고 무법 행위를 한 그 사람들이 싸울 때 두려워하고 죽으면 슬퍼하게 되었습니다. 당신들은, 우리가 처녀인 동안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 부정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여기를 공격해 온 것이 아닙니다. 이제 와서는, 당신들은 남편으로부터 아내를, 아이로부터 어머니를 떼어놓을 뿐입니다. 당신들은 지금 우리 비참한 여자들을 돕고 있지만, 그런 원조는, 지금까지 당신들의 무관심과 배신보다 더 비참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로부터 이렇게 사랑을 받아왔지만, 당신들로부터 이렇게 연민을 받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다른 이유로 싸운 것이라면, 우리를 통해 이미 장인이 되었고, 지금은 할아버지가 되어 친척이 되었으니, 싸움을 멈춰야 했습니다. 만약 전쟁이 우리 때문이라면, 우리를 장인과 아이들과 함께 데려가 우리에게 아버지와 친척을 돌려주세요. 아이와 남편을 빼앗지 말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 번 우리가 전쟁 포로가 되지 않도록" [3]

이리하여 휴전 맹세가 맺어졌고, 쌍방의 지휘자가 회담에 모여 동맹이 맺어졌다. 사비니족은 로마인과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데 합의했고, 로마는 영토 확장에 성공했다. 5년 후에 죽을 때까지 사비니 왕 티투스 타티우스가 로물루스와 함께 로마를 다스리게 되었다.[1]

새로운 사비니인 거주자들은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거주했다.[5]

4. 3.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이 시점에서 사비니 여인들이 개입했다.[1]

> (그녀들은) 머리를 흩뜨리고, 넝마 조각의 옷을 입고 투사체가 오가는 가운데로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양측 군대 사이의 틈새를 뛰어다니며 더 이상의 전투를 멈추게 하려 했고, 한쪽 진영에 있는 아버지와 다른 쪽 진영에 있는 남편에게 의붓아버지 또는 의붓아들의 피로 그 손을 더럽혀 자손에게 부친 살해의 오명을 남겨 저주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간청하며, 양측 군대의 격정을 진정시키려 했다. "만약"이라고 그녀들은 말한다. "당신들이 이 친족 관계, 결혼의 유대감을 참을 수 없다면, 그 분노를 우리에게 쏟아주세요. 전쟁의 원인은 우리이고, 남편과 아버지를 다치게 하고 죽인 것은 우리입니다. 우리로서는 당신들 중 한쪽을 잃고 고아가 되거나 미망인으로 살아남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1]

> "우리가 전에도 비참한 불행을 겪었고, 지금 또 그것을 겪고 있는 것은, 어떤 끔찍한 일, 어떤 괴로운 일을 당신들에게 가했기 때문입니까? 전에는 지금의 남편들에게 억지로 무법하게 약탈당했습니다. 게다가 약탈당한 채 형제들에게도 아버지들에게도 친척들에게도 이렇게 오랫동안 방치된 탓에, 지금은 가장 증오하는 적과 굳건한 유대로 맺어져, 한때 폭력을 휘두르고 무법 행위를 한 그 사람들이 싸울 때 두려워하고 죽으면 슬퍼하게 되었습니다. 당신들은, 우리가 처녀인 동안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 부정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여기를 공격해 온 것이 아닙니다. 이제 와서는, 당신들은 남편으로부터 아내를, 아이로부터 어머니를 떼어놓을 뿐입니다. 당신들은 지금 우리 비참한 여자들을 돕고 있지만, 그런 원조는, 지금까지 당신들의 무관심과 배신보다 더 비참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로부터 이렇게 사랑을 받아왔지만, 당신들로부터 이렇게 연민을 받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다른 이유로 싸운 것이라면, 우리를 통해 이미 장인이 되었고, 지금은 할아버지가 되어 친척이 되었으니, 싸움을 멈춰야 했습니다. 만약 전쟁이 우리 때문이라면, 우리를 장인과 아이들과 함께 데려가 우리에게 아버지와 친척을 돌려주세요. 아이와 남편을 빼앗지 말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 번 우리가 전쟁 포로가 되지 않도록" [3]

전투는 끝났고, 사비니들은 로마인들과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기로 동의했다. 티투스 타티우스는 5년 후 타티우스가 죽을 때까지 로물루스와 공동으로 통치했다.

로마의 새로운 사비니 주민들은 전투에서 점령한 카피톨리노 언덕에 정착했다.[5]

5. 로마와 사비니의 통합

사비니 여인들은 전장에 뛰어들어 양측 군대에 "시아버지와 사위로서 서로 불경한 혈통으로 서로를 더럽히지 말고, 자손과 손자 손녀를 살육으로 더럽히지 않도록 하십시오. 서로 원한을 품지 말고, 우리 결혼에 대한 원망을 우리에게 돌려주세요. 우리는 전쟁의 원인이요, 남편과 부모에게 상처와 유혈을 일으킨 근원입니다. 당신들 중 한 사람도 없이, 과부나 고아로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습니다."[1]라며 평화를 호소했다. 이들의 중재로 전투는 끝났고, 사비니족과 로마인들은 평화 협정을 맺고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었다.[1][3]

5. 1. 공동 통치

사비니족은 로마인과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 데 합의했고, 로마는 영토 확장에 성공했다. 티투스 타티우스로물루스와 함께 로마를 공동 통치했으나, 5년 후 사망했다.[1][3][5]

5. 2. 사회 통합

새로운 사비니인 거주자들은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거주했다[5]。 로물루스는 백성을 30개의 쿠리아(시민단)로 나누었는데, 이 쿠리아의 이름은 납치된 사비니 여성들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6. 역사적 해석

사비니 여성들의 납치 동기는 고대 자료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리비우스는 로마의 인구 증가를 위한 것이었으며, 납치 과정에서 직접적인 성폭행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할리카르나서스의 디오니시우스는 사비니와의 동맹 확보를 위한 시도였다고 주장한다. 키케로는 리비우스의 견해에 동의하며, 이 사건이 "새로운 국가를 강화"하기 위한 계획이었다고 본다. 반면, 오비드는 로마 남성들의 성적 욕망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해석한다.[18]

테오도어 몸젠은 이 이야기가 기원전 4세기 후반 삼니움 전쟁 이후 삼니움족이 로마에 통합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이 이야기는 기원전 89년 사회 전쟁 시기에 다시 주목받았는데, 이는 로마와 이탈리아 동맹국 간의 갈등 속에서 로마의 폭력성과 사비니족과의 평화적 통합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19]

6. 1. 리비우스의 견해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는 사비니 여성들의 납치가 로마의 인구를 늘리기 위한 것이었으며, 납치 동안 직접적인 성폭행은 발생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로물루스는 사비니 여성들에게 시민권과 재산권, 그리고 자유로운 선택을 제공했다고 한다.[18]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물루스는 사비니 여성들에게 직접 찾아가, 이 모든 것이 이웃과의 통혼(결혼)을 거부하는 부모의 자존심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여성들에게 명예로운 결혼 생활을 약속하고, 모든 재산과 시민권을 공유하며, 자유인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이는 인간 본성에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덧붙였다.[1]

로물루스는 여성들에게 "결혼하면 그 후의 생활은 안정되고, 시민권과 재산권을 남편과 함께 갖게 되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 최고의 보물인 아이를 갖고 자유로운 사람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부디 분노를 가라앉혀 주기를 바란다. 우연히 그 몸을 주게 된 상대에게 이제는 마음도 주기를 바란다. 불법 행위 후에, 잠시 후 화해가 생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녀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채워지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하며, 로마인의 아내가 되어 로마인의 아이를 낳아줄 것을 요청했다.[1]

결국, 로물루스는 사비니족의 여성 해방 요구를 거부했다. 귀향의 희망을 잃은 사비니족 여성들은 로마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사비니족 여성들은 강제로 혼인 관계를 맺게 되었고, 로마인의 아이를 낳았다. 로마는 한 세대로 국가가 멸망하는 위기를 회피했다. 로물루스의 배려로, 사비니족 여성들은 그 후에도 로마에 머물게 되었다. 약속에 따라 사비니족 여성을 혹사하는 것은 금지되었지만 귀향은 인정되지 않았고, 계속해서 로마인들에 의해 아이를 낳게 되어 로마의 발전에 기여했다.[2][3]

6. 2. 다른 역사가들의 견해

할리카르나서스의 디오니시우스는 이 사건이 사비니와의 동맹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였다고 주장한다.[18] 키케로는 축제에서 사비니 여성을 납치하려는 계획이 "새로운 국가를 강화"하고 "그의 왕국과 사람들의 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행해진 것이라는 리비우스의 견해를 반복한다.[18] 오비드는 이 사건을 로마 남성들이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18]

6. 3. 테오도어 몸젠의 견해

테오도어 몸젠은 이 이야기가 기원전 4세기 후반 삼니움 전쟁 이후 삼니움 사람들이 로마에 동화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 퍼졌다고 보았다. 그는 전쟁과 동맹, 그리고 이와 비슷한 사건을 먼 과거로 보냈다고 주장했다. 이 이야기는 기원전 89년, 이 사건을 묘사한 주화가 주조되면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이는 로마와 이탈리아 동맹국 간의 지위, 그리고 로마 시민권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갈등이 있었던 사회 전쟁 동안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가 이웃 국가들과 충돌하게 된 과거 이야기는 로마의 잔혹한 폭력성을 보여주지만, 사비니족이 로마와의 통일에 항복한 후 궁극적으로 전쟁을 피했다는 점에서 당시 로마가 전달하고자 했던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을 것이다.[19]

7. 예술 작품에서의 묘사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사건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바로크, 신고전주의,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이 주제는 가족과 문화의 연속성을 위한 결혼의 중요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르네상스 시대에 인기가 있었다. 또한 극단적인 포즈로 여성과 남성 인물을 묘사하는 기술을 예술가가 보여줄 수 있는 전투 주제였으며, 신약성경의 무고한 자들의 학살과 비슷한 기회를 제공했다. 15세기 이탈리아 카소니와 이후 더 큰 그림에 정기적으로 묘사되었다.

7. 1. 르네상스 및 바로크 시대

이 주제는 가족과 문화의 연속성을 위한 결혼의 중요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르네상스 시대에 인기가 있었다. 이는 또한 성적인 주제의 이점을 더하여 극단적인 포즈로 여성과 남성 인물을 묘사하는 기술을 예술가가 보여줄 수 있는 전투 주제의 예이기도 했다. 15세기 이탈리아 카소니와 나중에 더 큰 그림에 정기적으로 묘사되었다. 신약성경의 무고한 자들의 학살이라는 주제와 비슷한 기회가 주어졌다.[6]

잠볼로냐는 단일 대리석 블록으로 조각된 3명의 인물(여자를 공중으로 들어올리는 남자와 웅크리고 있는 두 번째 남자)으로 이 주제의 표현을 조각했다. 이 조각품은 잠볼로냐의 걸작으로 간주된다. 원래는 복잡한 조각 그룹을 만드는 예술가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주제인 전설적인 사비니족의 강간은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가 칙령을 내린 후에 발명해야 했다.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로자 데이 란치에 공개 전시된다.

벤베누토 첼리니페르세우스 동상 맞은편에 제안된 조각 장소는 그룹이 안드로메다 강간과 같은 이전 작품과 관련된 주제를 설명해야 한다는 주장을 촉발했다. 프로세르피나헬레네의 각각의 강간도 가능한 주제로 제기되었다. 결국 조각품이 사비니 처녀 중 하나로 확인되기로 결정되었다.

작품은 OPVS IOANNIS BOLONII FLANDRI MDLXXXII ("플랑드르의 불로뉴의 요하네스 작품, 1582")에 서명했다. 나폴리의 카포디몬테 국립 박물관에 2명의 인물만 있는 초기 준비 청동이 있다. 그런 다음 잠볼로냐는 이번에는 세 번째 그림으로 계획을 수정하여 현재 런던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 있는 두 가지 밀랍 모형을 사용한다. 1582년에 완성된 완성된 조각에 대한 예술가의 본격적인 젯소피렌체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여자와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는 고대 조각 라오콘 군상의 인물을 참조한다.

잠볼로냐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제작되고 다른 사람들이 모방한 조각품의 청동 축소는 19세기까지 감정가 컬렉션의 필수품이었다.

로자 데이 란치의 잠볼로냐 작, ''사비니 여인들의 강간''


니콜라 푸생은 이 주제의 두 가지 주요 버전을 제작했다. 그의 초기 버전은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라는 제목이었고, 1633-1634년 경에 완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그림은 로물루스가 로마인들에게 납치 신호를 보내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더메트(Met)에 따르면 푸생의 작업 주제는 포즈와 제스처에 대한 이해와 로마 건축에 대한 지식을 강조할 수 있게 해주었다.[20] 이 버전의 그림은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푸생의 두 번째 버전인 ''사비니 여인들의 강간''은 본질적으로 그의 원본 작품을 재창조한 것으로 1637-1638년경에 완성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의 건축적 배경은 원작보다 더 발전되어 있다. 이 그림은 현재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21] 루브르 박물관에 따르면 한 주제에 대해 여러 버전을 그리는 것은 푸생의 경력 전반에 걸쳐 드문 일이 아니었다.

니콜라 푸생 작,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1634–1635)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니콜라 푸생 작, ''사비니 여인들의 강간'', 로마, 1637–38 (루브르 박물관)


페테르 파울 루벤스는 1635-40년경에 ''사비니 여인들의 강간'' 버전을 그렸다. 현재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22] 그림은 로물루스가 로마인들에게 사비니 여인들을 납치하라는 신호를 보낸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루벤스는 납치의 폭력성을 강조하고, 가슴이 노출된 여성과 여성의 치마를 들어올리는 군인을 묘사함으로써 그것을 성화한다.[23]

요한 하인리히 쇤펠트는 1630년대 후반에 ''사비니 여인들의 강간''이라는 제목의 이 주제의 버전을 그렸다. 그의 작품은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르미타시 미술관에 있다.[24]

자크 스텔라는 17세기 중반에 〈''사비니의 강간''〉이라는 제목의 사비니 여인들의 강간을 그렸다. 스텔라의 장면 묘사는 니콜라 푸생의 작품과 매우 흡사하여 그의 죽음 이후 그의 버전은 푸생으로 오인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현재 프린스턴 대학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25]

자크 스텔라, ''사비니 여인들의 강간'', 17세기 중반, 프린스턴 대학교 미술관

7. 2. 신고전주의 시대

자크 루이 다비드는 사비니 여인들의 개입이라는 작품을 통해 프랑스 혁명 이후 화해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26]

이 그림은 로물루스의 아내 헤르실리아(사비니족의 족장 티투스 타티우스의 딸)가 남편과 아버지 사이를 돌진하고, 그 사이에 아기를 두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활력이 넘치는 로물루스는 반쯤 물러난 타티우스를 창으로 공격할 준비를 하지만 주저한다. 다른 병사들은 이미 칼집을 내고 있다.[26]

배경에 있는 바위 노두는 ‘타르페아 절벽’이다.

사비니 여인들의 개입 (1799년).

7. 3. 현대

파블로 피카소는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을 바탕으로 〈사비니 여인들의 강간〉(1962-63)을 여러 버전으로 제작했는데, 그 중 하나는 보스턴 미술관에 있다. 이 작품들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결합하여, 헤르실리아와 그녀의 아이를 무시하고 짓밟는 잔인한 로물루스타티우스를 묘사하고 있다.[29][7]

7. 4. 문학과 영화

스티븐 빈센트 베네는 이 전설을 패러디한 단편 소설 "The Sobbin' Women"을 썼다. 이를 원작으로 하여 제작된 영화가 《일곱 신부에게》이다. 이 영화는 어설프고 성실한 시골뜨기 7형제가 주인공으로, 그 중 장남이 결혼한 것을 계기로 동생들이 용기를 얻어 상대를 찾는 이야기이다. 전설과 마찬가지로 결국 딸들을 납치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분개했던 딸들도 결혼에 납득한다.

사키의 단편 ''The Schartz-Metterklume Method''에는 칼로타 부인이 이 이야기를 흉내 내는 장면이 나온다.[8]

1961년에는 프랑스,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합작으로 이 전설을 소재로 한 영화 "''Il Ratto delle Sabine''"이 제작되었다 (감독은 리차드 포티어). 이 작품은 미국에서 "''Romulus and the Sabines''"라는 제목으로 공개되었다.[9]

1962년에는 스페인에서 "검과 샌들" 영화로 이 전설을 소재로 한 작품이 제작되었다 (감독은 알베르트 구트). 이 영화는 미국에서 "''The Rape of the Sabine Women''"과 "''The Shame of the Sabine Women''"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되었다.[10]

2005년에는 ''The Rape of the Sabine Women''이라는 제목의 대사 없는 예술 영화가 제작되었다.[11]

8. 현대적 의의 및 교훈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사건은 폭력, 갈등, 화해, 통합이라는 복잡한 주제를 다루며,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여러 교훈을 제공한다.

로물루스와 초기 로마인들은 여성 부족으로 인구 증가에 어려움을 겪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 부족인 사비니족의 여인들을 납치했다.[14][15][16][17] 이 사건은 로마와 사비니 간의 전쟁으로 이어졌지만, 결국 사비니 여인들의 용감한 중재로 두 부족은 평화롭게 통합되었다.

8. 1. 폭력의 정당화 문제

로마의 이러한 행동은 목적을 위해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윤리적 질문을 제기한다. 로물루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로마 건국 직후 도시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사비니 여인들을 납치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는 인구 중 여성이 부족하여 도시가 한 세대 이상 지속되지 못할 것을 우려했다.[14] 이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인들은 주변 지역으로 가서 아내를 찾았으나, 사비니인을 포함한 이웃 민족들은 경쟁 사회의 출현을 두려워하여 로마인과의 결혼을 거부했다. 결국 로마인들은 해왕성 승마 축제 기간 동안 사비니 여성들을 납치하는 계획을 세웠고, 축제에 참석한 사비니 여성 30명을 납치했다.[15] 납치된 여성들은 로물루스의 아내가 된 헤르실리아를 제외하고 모두 처녀였다.[16]

8. 2. 여성의 역할과 주체성

사비니 여인들은 납치와 강제 결혼의 피해자였지만, 동시에 전쟁을 종식시키고 두 사회를 통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여성의 역할과 주체성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킨다. 특히, 로물루스의 아내가 된 헤르실리아는 로마인과 사비니족 사이의 전쟁을 중재하고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6]

8. 3. 갈등 해결과 통합의 중요성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와 로마-사비니 통합은 갈등 해결과 사회 통합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로마 건국 초기, 로물루스와 로마인들은 여성 부족으로 인해 인구 증가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인들은 주변 부족인 사비니족의 여인들을 납치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14][15][16][17]

이에 분노한 사비니족은 로마와 전쟁을 벌였지만, 이미 로마인들의 아내와 어머니가 된 사비니 여인들이 용감하게 전장에 뛰어들어 양측을 설득했다.[1]

> (그녀들은) 머리를 흩뜨리고, 넝마 조각의 옷을 입고 투사체가 오가는 가운데로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양측 군대 사이의 틈새를 뛰어다니며 더 이상의 전투를 멈추게 하려 했고, 한쪽 진영에 있는 아버지와 다른 쪽 진영에 있는 남편에게 의붓아버지 또는 의붓아들의 피로 그 손을 더럽혀 자손에게 부친 살해의 오명을 남겨 저주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간청하며, 양측 군대의 격정을 진정시키려 했다. "만약"이라고 그녀들은 말한다. "당신들이 이 친족 관계, 결혼의 유대감을 참을 수 없다면, 그 분노를 우리에게 쏟아주세요. 전쟁의 원인은 우리이고, 남편과 아버지를 다치게 하고 죽인 것은 우리입니다. 우리로서는 당신들 중 한쪽을 잃고 고아가 되거나 미망인으로 살아남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1]

> "우리가 전에도 비참한 불행을 겪었고, 지금 또 그것을 겪고 있는 것은, 어떤 끔찍한 일, 어떤 괴로운 일을 당신들에게 가했기 때문입니까. 전에는 지금의 남편들에게 억지로 무법하게 약탈당했습니다. 게다가 약탈당한 채 형제들에게도 아버지들에게도 친척들에게도 이렇게 오랫동안 방치된 탓에, 지금은 가장 증오하는 적과 굳건한 유대로 맺어져, 한때 폭력을 휘두르고 무법 행위를 한 그 사람들이 싸울 때 두려워하고 죽으면 슬퍼하게 되었습니다. 당신들은, 우리가 처녀인 동안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 부정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여기를 공격해 온 것이 아닙니다. 이제 와서는, 당신들은 남편으로부터 아내를, 아이로부터 어머니를 떼어놓을 뿐입니다. 당신들은 지금 우리 비참한 여자들을 돕고 있지만, 그런 원조는, 지금까지 당신들의 무관심과 배신보다 더 비참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로부터 이렇게 사랑을 받아왔지만, 당신들로부터 이렇게 연민을 받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다른 이유로 싸운 것이라면, 우리를 통해 이미 장인이 되었고, 지금은 할아버지가 되어 친척이 되었으니, 싸움을 멈춰야 했습니다. 만약 전쟁이 우리 때문이라면, 우리를 장인과 아이들과 함께 데려가 우리에게 아버지와 친척을 돌려주세요. 아이와 남편을 빼앗지 말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 번 우리가 전쟁 포로가 되지 않도록" [3]

결국, 사비니 여인들의 간절한 호소에 감동한 로마인과 사비니족은 평화 협정을 맺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로 합의했다. 사비니족은 로마와 통합되었고, 로마는 영토를 확장했다. 사비니 왕 티투스 타티우스는 로물루스와 함께 로마를 공동 통치하게 되었다.[5] 로마의 인구는 2배가 되었고 로물루스는 백성을 30개의 쿠리아(시민단)로 나누었다. 이 쿠리아의 이름은 납치된 사비니 여성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참조

[1] 웹사이트 Livy: The Rape of the Sabines http://home.flash.ne[...]
[2] 서적 ローマ建国史
[3] 서적 対比列伝
[4] 서적 ローマ建国史
[5] 서적 ローマ建国史
[6] 서적 The English Mannerist Poets and the Visual Arts 1998
[7] 웹사이트 La tomba del principe sabino — Glossario http://www.principis[...]
[8] 웹사이트 Beasts and Super-Beasts: Beasts http://www.readbooko[...]
[9] IMDb Il Ratto delle Sabine
[10] IMDb The Rape of the Sabine Women
[11] 뉴스 The Rape of the Sabine Women: Present at an Empire’s Corrupted Birth http://www.nytimes.c[...] New York Times 2007-02-21
[12] 서적 In Search of the Indo-Europeans Thames & Hudson 2005
[13] 저널 Rape and consequences in the Latin declamations http://journals.co.z[...] 2016-11-26
[14] 서적 Ancient Roman Civilization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15] 웹인용 Titus Livius (Livy), The History of Rome, Book 1, chapter pr https://www.perseus.[...] 2020-02-07
[16] 웹인용 Plutarch • Life of Romulus https://penelope.uch[...] 2020-03-07
[17] 서적 Ab Urbe Condita http://www.gutenberg[...]
[18] 저널 Livy's Sabine Women and the Ideal of Concordia 1995
[19] 저널 The Abduction of the Sabine Women in Context: The Iconography on Late Antique Contorniate Medallions https://www.jstor.or[...] 2021-06-19
[20] 웹인용 The Abduction of the Sabine Women https://www.metmuseu[...]
[21] 인용 The Rape of the Sabine Women https://www.louvre.f[...] 2020-03-07
[22] 웹인용 Peter Paul Rubens {{!}} The Rape of the Sabine Women {{!}} NG38 {{!}} National Gallery, London https://www.national[...] 2020-02-11
[23] 웹인용 Peter Paul Rubens {{!}} The Rape of the Sabine Women {{!}} NG38 {{!}} National Gallery, London https://www.national[...] 2020-02-12
[24] 웹인용 The Rape of the Sabine Women https://www.hermitag[...] 1630s
[25] 웹인용 The Rape of the Sabines (y1967-102) https://artmuseum.pr[...] 2020-03-21
[26] 인용 The Intervention of the Sabine Women https://www.louvre.f[...] 2020-02-11
[27] 웹인용 The Rape of the Sabines – Edgar Degas – www.edgar-degas.org http://www.edgar-deg[...] 2016-03-26
[28] 웹인용 The Rape of the Sabines (after Poussin) – Browse by Title – Norton Simon Museum https://www.nortonsi[...] 2016-03-26
[29] 웹사이트 La tomba del principe sabino – Glossario http://www.princip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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