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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콘 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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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오콘 군상은 트로이의 목마가 그리스의 계략임을 폭로하려다 아테나 여신이 보낸 바다뱀에게 두 아들과 함께 살해당하는 라오콘의 이야기를 조각한 작품이다. 이 조각상은 기원전 160년에서 2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로도스 출신 조각가 아게산드로스, 아테노도로스, 폴리도로스가 제작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06년 발견된 후 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는 바티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플리니우스의 기록을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이후 조각의 예술성과 표현 방식에 대한 논쟁, 즉 '라오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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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콘 군상
라오콘 군상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 군상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 군상
라오콘 군상 3D 모델
라오콘 군상 3D 모델 (클릭하여 상호 작용)
작품 정보
원어 제목Gruppo del Laocoonte (이탈리아어)
종류대리석 조각
제작 시기기원전 160년 ~ 20년 (추정)
높이208cm
너비163cm
길이112cm
소장 정보
소장 위치바티칸 시국
소장 기관바티칸 미술관 피오-클레멘티노 미술관
설명
내용라오콘과 그의 아들들이 뱀에게 공격받는 모습을 묘사
참고트로이아 전쟁 신화 관련
관련 정보찰스 다윈,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서 언급

2. 역사

플리니우스는 자신의 백과사전인 『박물지』(XXXVI, 37)에서 그리스와 로마 석조 조각에 대해 언급하며, 황제 티투스의 궁전에 있던 라오콘 조각상은 다른 어떤 회화나 청동 조각보다 훌륭하며, 로도스 출신의 세 명의 예술가 아게산드로스, 폴리도로스, 아테노도로스가 협력하여 만들었다고 기록했다.[22] 일반적으로 이 기록이 현재 바티칸에 있는 작품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진다.[23] 플리니우스는 이 조각상이 티투스 황제의 궁전에 있었다고 언급했으며, 1506년까지 같은 자리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바티칸의 작품은 적어도 일곱 개의 맞물리는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플리니우스는 단일 대리석 조각으로 조각되었다고 주장하여 논란이 있다.[27][28]

조각상의 발견 지점을 보여주는 지도 "SERVIUS"의 R 근처, Sette Sale의 동쪽에 있다.


1506년 2월, 펠리체 데 프레디스의 포도밭에서 이 조각상이 발굴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포함한 궁정 예술가들을 현장으로 보냈다. 당시 현장에 함께 있었던 프란체스코 다 상갈로는 60년 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36]

>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로마에 갔을 때, 교황은 산타 마리아 마조레 근처 포도밭에서 매우 아름다운 조각상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 아버지는 즉시 '저것은 플리니우스가 언급한 라오콘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

율리우스 2세는 조각상을 구입하고 데 프레디스에게 보상했다. 1506년 8월, 조각상은 바티칸 박물관의 일부인 벨베데레 정원에 공개되었고, 바티칸 박물관은 이 사건을 그들의 역사의 시작으로 간주한다.[38] 1798년, 조각상은 프랑스로 옮겨졌지만, 1816년 로마로 반환되었다.[39]

조각상이 발견되었을 때, 라오콘의 오른팔과 아들들의 팔, 손 일부, 뱀의 여러 부분이 사라진 상태였다.[40] 예술가와 감정가들은 사라진 부분의 복원 형태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미켈란젤로는 라오콘의 오른팔이 어깨 뒤로 구부러져 있었을 것이라고 제안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팔을 뻗은 형태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조반니 안토니오 몬토르솔리는 라오콘의 뻗은 팔을 더욱 곧게 펴서 추가했다.[44] 1725–1727년에 아고스티노 코르나키니는 작은 아들의 팔에 부분을 추가했다.[44]

2010년 재부착된 팔


1906년, 루트비히 폴라크는 조각상이 발견된 곳 근처에서 대리석 팔 조각을 발견하고 바티칸 박물관에 기증했다. 1957년, 박물관은 이 팔이 원래 라오콘의 것이라고 결정하고 교체했다.[45] 1980년대에 조각상은 해체 및 재조립되었으며, 폴라크의 팔이 다시 통합되었다. 아들들의 팔과 손의 복원된 부분은 제거되었다.[46] 해체 과정에서 고대에는 세 인물의 더욱 콤팩트하고 입체적인 피라미드 형태의 구도가 사용되었거나 고려되었음을 시사하는 흔적들이 발견되었다.[47] 세이모어 하워드는 큰아들을 제단의 측면을 등지고 정면의 관람자를 바라보도록 회전시켜 "더 응집력 있고 바로크적인 느낌의 대각선으로 설정된 피라미드형 구도"를 제안했다.[48]

2010년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조각상의 발견 지점은 콜로세움 옆 언덕 기슭에 있는 Sette Sale 남쪽 끝에서 약간 동쪽으로 확인되었다.[66]

2. 1.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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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의 사제 라오콘 이야기는 그리스 트로이 전쟁의 서사시 사이클에서 유래되었지만, 호메로스는 언급하지 않았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주제였으며 현재는 유실되었고, 다른 그리스 작가들도 언급했지만 뱀의 공격과 관련된 사건은 상당히 다르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나오지만(entry 라오콘에서 ''아이네이스'' 인용구 참조), 이 작품은 기원전 29년에서 19년 사이에 쓰여졌으며, 조각상보다 늦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 조각상을 베르길리우스가 묘사한 장면의 묘사로 본다.[13]

베르길리우스에 따르면 라오콘은 포세이돈의 사제였으며, 창으로 트로이의 목마를 찔러 그 계략을 폭로하려다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반면 소포클레스에 따르면 그는 독신이어야 했지만 결혼한 아폴론의 사제였다. 뱀은 두 아들만 죽였고, 라오콘 자신은 살아남아 고통을 겪었다.[14] 다른 버전에서는 그가 포세이돈 신전에서 아내와 성관계를 가졌거나 아내가 있는 상태에서 신전에서 제물을 바쳤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15] 이 두 번째 버전에서는 뱀은 포세이돈이 보냈고,[16] 첫 번째 버전에서는 포세이돈과 아테나, 또는 아폴론이 보냈으며, 트로이인들은 이 죽음을 목마가 신성한 물건이라는 증거로 해석했다. 두 버전은 다소 다른 교훈을 가지고 있다. 라오콘은 잘못을 저질러 처벌받았거나, 옳았기 때문에 처벌받았다.

뱀은 물고 조이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베르길리우스처럼 독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17] 피에트로 아레티노도 그렇게 생각하여 1537년에 이 조각상을 칭찬했다.

> ...두 뱀은 세 인물을 공격하면서 두려움, 고통, 죽음의 가장 인상적인 모습을 만들어낸다. 뱀에게 휘감긴 젊은이는 두려워하고, 뱀 이빨에 물린 노인은 고통스러워하며, 독을 받은 아이는 죽는다.[18]

이야기의 적어도 한 가지 그리스 버전에서는 맏아들이 도망칠 수 있었고, 구성도 그 가능성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인다.[19] 작품의 양식은 기원전 200년경 그리스 소아시아에서 발생한 헬레니즘 "페르가몬 바로크" 양식으로 여겨지며, 그 대표적인 오리지널 작품은 현재 베를린에 소장된 기원전 180~160년경의 페르가몬 제단이다.[20]

알키오네우스(?), 아테나, 가이아, 니케, 거인족과의 싸움 부조, 페르가몬 제단, 페르가몬 박물관, 베를린.


알키오네우스의 모습은 라오콘과 매우 유사한 자세와 상황(뱀 포함)으로 묘사되었지만, 그 양식은 제단보다 "원칙상 더 자유롭고 거칠다"는 평가를 받는다.[21]

라오콘 군상의 조각은 전체적으로 매우 훌륭하며, 고대 시대에 그룹의 수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구성이 매우 신중하게 계산되었다. 두 아들은 아버지에 비해 다소 작은 비율로 묘사되었지만, 이것은 중심 인물의 강렬함을 더한다. 사용된 섬세한 흰색 대리석은 종종 그리스산으로 여겨지지만, 분석을 통해 확인되지는 않았다.

플리니우스는 자신의 백과사전인 『박물지』(XXXVI, 37)에서 그리스와 로마 석조 조각에 대한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 매우 뛰어난 여러 작품의 경우, 그 작품에 참여한 예술가의 수가 각 예술가의 명성에 상당한 장애가 되었으며, 개인이 모든 명성을 독차지할 수 없고, 여러 예술가의 이름을 적절한 비율로 배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예를 들어 황제 티투스의 궁전에 있는 라오콘 조각상이 그러한데, 이는 회화나 [청동] 조각술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훌륭하다고 여겨질 수 있다. 이 조각상은 주된 인물과 아이들, 그리고 놀라운 굴곡을 가진 뱀까지 단일 석재로 조각되었다. 이 그룹은 로도스 출신인 세 명의 가장 저명한 예술가, 아게산드로스, 폴리도로스, 아테노도로스가 협력하여 만들었다.[22]

일반적으로 이것이 현재 바티칸에 있는 작품과 동일한 작품으로 받아들여진다.[23] 현재 세 명의 로도스 출신이 기원전 200년경에 만들어진 청동 조각을 베낀 조각가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24][25] 플리니우스가 이 문제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그가 이를 원본으로 여긴다"는 것을 암시하는 방식으로 주목할 만하다.[26] 플리니우스는 이 조각이 황제 티투스의 궁전에 있었다고 언급했으며, 1506년까지 같은 자리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바티칸의 작품은 적어도 일곱 개의 맞물리는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단일 대리석 조각으로 조각되었다고 주장한다.[27][28] 위에 "협력하여"로 번역된 구절(''de consilii sententia'')은 일부 학자들에 의해 예술가들의 작업 방식보다는 그들의 의뢰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나이젤 스피비의 번역에 따르면 "[예술가들이] 의회의 요청에 따라 그룹을 디자인했다..."인데, 스피비는 이 의뢰가 티투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다른 '학자'들과 함께 플리니우스가 조언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29]

세 예술가의 이름(아테노도로스, 아게산드로스, 폴리도로스)은 다른 순서로,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스페르롱가에 있는 티베리우스의 별장 조각 중 하나에 새겨져 있다(그가 소유하기 전일 수 있지만).[30] 하지만 세 명의 거장이 모두 동일 인물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31] 스타일은 대체로 비슷하지만, 두 그룹의 제작 방식의 많은 측면은 매우 다르며, 라오콘 그룹이 훨씬 더 높은 품질과 마감을 보인다.[32]

일부 학자들은 로도스의 린도스에서 발견된 명예 비문이 아게산드로스와 아테노도로스를 사제로 기록하여 기원전 42년 이후의 시기로 추정하여, 기원전 42년에서 20년 사이를 라오콘 그룹의 제작 시기로 여겼다.[24] 그러나 예술가들의 아버지 이름도 함께 기록된 스페르롱가 비문을 통해 적어도 아게산드로스는 린도스에 기록된 동명의 사제와는 다른 인물이며, 매우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로도스 사람들의 습관대로, 가족 작업장(유망한 젊은 조각가들의 입양을 포함했을 가능성이 높음) 내에서 이름이 대대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33] 총 8개의 아테노도로스의 "서명"(또는 라벨)이 조각이나 받침대에서 발견되며, 이 중 5개는 이탈리아에서 발견되었다. 스페르롱가에서 발견된 것을 포함한 일부에서는 그의 아버지를 아게산드로스로 기록하고 있다.[34] 이 모든 문제는 학문적 논쟁의 대상이다.

라오콘 이야기는 현재는 현존하지 않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의 주제였다고 다른 그리스 작가들이 기록해두고 있다. 라오콘은 을 던져 트로이의 목마가 그리스 군의 계략임을 폭로하려 했지만, 여신 아테나에 의해 보내진 바다뱀에게 습격당해 두 아들과 함께 살해당했다.[70] 그리고 트로이 사람들은 이 목마가 성스러운 것이라고 믿었다. 이 일련의 이야기를 소재로 쓰인 유명한 책으로는 고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가 있는데, 아마도 그 집필 이전에 이 조각상이 제작되었을 것이다.

『라오콘 군상』의 제작 연도에 대해서는 기원전 160년부터 기원전 20년까지 다양한 견해가 있다. 로도스 섬의 린도스에서 출토된 비문에서는 조각상 제작자로 추정되는 아게산드로스, 아테노도로스의 이름이 기원전 42년 이후에 기재되어 있다. 이 때문에 기원전 42년부터 기원전 20년경에 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작품이 오리지널 조각상인지, 다른 조각상의 모방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제작자로 추정되는 세 명의 로도스 출신들은 모방을 전문으로 한 조각가로, 기원전 200년에 페르가몬 왕국에서 제작된 동상이 오리지널이라는 의견도 있다.[71] 플리니우스는 저서 『박물지』 (XXXVI, 37)에서 『라오콘 군상』이 로마 황제 티투스의 궁전에 놓여 있었다고 적고 있다. 한 덩어리의 대리석에서 조각되었다고도 적고 있지만, 후년에 발굴된 이 조각상은 7개의 파츠가 조합되어 만들어졌다.[72][73]

2. 2. 제작 시기 논란

『라오콘 군상』의 제작 연도에 대해서는 기원전 160년부터 기원전 20년까지 다양한 견해가 있다. 로도스 섬 린도스에서 출토된 비문에는 조각상 제작자로 추정되는 아게산드로스, 아테노도로스의 이름이 기원전 42년 이후에 기재되어 있어, 기원전 42년부터 기원전 20년경에 제작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 작품이 원본 조각상인지, 다른 조각상의 모방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제작자로 추정되는 세 명의 로도스 출신들은 모방을 전문으로 한 조각가로, 기원전 200년에 페르가몬 왕국에서 제작된 동상이 원본이라는 의견도 있다.[71] 플리니우스는 저서 『박물지』에서 『라오콘 군상』이 로마 황제 티투스의 궁전에 놓여 있었다고 적고 있다. 플리니우스는 한 덩어리의 대리석으로 조각되었다고도 적고 있지만, 후년에 발굴된 이 조각상은 7개의 파츠가 조합되어 만들어졌다.[72][73]

2. 3. 발견과 복원

1506년 2월, 펠리체 데 프레디스의 포도밭에서 라오콘 군상이 발굴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포함한 궁정 예술가들을 현장으로 보냈다. 미켈란젤로와 함께 현장에 있었던 줄리아노 다 상갈로의 아들 프란체스코 다 상갈로는 60년 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36]

>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로마에 갔을 때, 교황은 산타 마리아 마조레 근처 포도밭에서 매우 아름다운 조각상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 아버지는 즉시 "저것은 플리니우스가 언급한 라오콘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

율리우스 2세는 조각상을 구입하고 데 프레디스에게 보상을 했다. 8월까지 조각상은 바티칸 박물관의 일부인 벨베데레 정원에 공개되었고, 바티칸 박물관은 이 사건을 그들의 역사의 시작으로 간주한다.[38]

1798년, 프랑스에 의해 조각상은 프랑스로 옮겨졌지만, 1816년 로마로 반환되었다.[39]

조각상이 발견되었을 때, 라오콘의 오른팔과 아들들의 팔, 손 일부, 뱀의 여러 부분이 사라진 상태였다.[40] 예술가와 감정가들은 사라진 부분의 복원 형태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미켈란젤로는 라오콘의 오른팔이 어깨 뒤로 구부러져 있었을 것이라고 제안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팔을 뻗은 형태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다.[42]

바사리에 따르면, 1510년경 브라만테는 조각가들에게 대체 오른팔을 만드는 비공식적인 경연 대회를 열었고, 라파엘로가 심사했다. 자코포 산소비노가 우승했지만, 뻗은 팔은 1532년까지 원래 조각상에 부착되지 않았다. 조반니 안토니오 몬토르솔리는 라오콘의 뻗은 팔을 더욱 곧게 펴서 추가했다.[44] 1725–1727년에 아고스티노 코르나키니는 작은 아들의 팔에 부분을 추가했다.[44]

1906년, 루트비히 폴라크는 조각상이 발견된 곳 근처에서 대리석 팔 조각을 발견하고 바티칸 박물관에 기증했다. 1957년, 박물관은 이 팔이 원래 라오콘의 것이라고 결정하고 교체했다.[45] 1980년대에 조각상은 해체 및 재조립되었으며, 폴라크의 팔이 다시 통합되었다. 아들들의 팔과 손의 복원된 부분은 제거되었다.[46] 해체 과정에서 고대에는 세 인물의 더욱 콤팩트하고 입체적인 피라미드 형태의 구도가 사용되었거나 고려되었음을 시사하는 흔적들이 발견되었다.[47]

세이모어 하워드는 큰아들을 제단의 측면을 등지고 정면의 관람자를 바라보도록 회전시켜 "더 응집력 있고 바로크적인 느낌의 대각선으로 설정된 피라미드형 구도"를 제안했다.[48]

조각상이 발견된 장소는 오피아 언덕에 있는 "펠리체 데 프레디스의 포도원"으로 알려져 있었다. 2010년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발견 지점은 콜로세움 옆 언덕 기슭에 있는 Sette Sale 남쪽 끝에서 약간 동쪽으로 확인되었다.[66]

3. 예술적 특징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은 에세이 ''라오콘: 회화와 시의 한계에 대한 에세이''에서 베르길리우스의 시와 조각을 비교하며 시각 예술과 문학 예술의 차이를 논했다. 레싱은 예술가들이 희생자들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아름다움을 유지하며 표현해야 했다고 주장했다.[59]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예술 작품이 자연처럼 무한히 열려 있지만, 완전히 이해되거나 말로 표현될 수 없다고 보았다.[60] 윌리엄 블레이크는 이 조각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원본의 복사본으로 보며, 고전 예술이 창조적 상상력을 파괴한다고 비판했다.[61]

존 러스킨은 조각상의 "혐오스러운 경련"을 미켈란젤로의 작품과 비교하며 숭고함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인체 해부학은 정교하지만 뱀의 묘사가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하며, 뱀이 무는 대신 몸을 꼬아 상대를 제압하는 습성을 언급했다.[63]

이후 어빙 배빗(1910년), 클레멘트 그린버그(1940년), 헨리 무어 연구소(2007년)는 '라오콘'이라는 개념을 차용하거나 전시회 제목으로 사용했다.[64]

3. 1. 구성

플리니우스는 ''라오콘''을 "회화와 조각의 예술이 만들어낸 모든 것보다 더 훌륭한 작품"이라고 묘사했으며,[57] 이는 이 조각이 모든 예술 작품 중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는 주장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요한 요아힘 빈켈만은 죽음과 실패의 장면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감탄하는 역설에 대해 썼다.[58] 이 논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의 에세이 ''라오콘: 회화와 시의 한계에 대한 에세이''이다. 레싱은 조각 작품과 베르길리우스의 시를 비교하여 시각 예술과 문학 예술의 차이점을 탐구했다. 그는 예술가들이 희생자들의 육체적 고통을 현실적으로 묘사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 고통을 표현해야 했다.[59]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그의 에세이 ''라오콘에 관하여''에서 "진정한 예술 작품은 자연의 작품처럼 마음 앞에서 무한히 열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살펴보고, 감명을 받고, 그것은 효과를 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완전히 이해될 수 없으며, 그 본질, 그 가치는 말로 표현될 수 없다"라고 썼다.[60]

이 논쟁에 대한 가장 특이한 개입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주석이 달린 판화 ''라오콘''(
블레이크의 ''라오콘'' 판화
)으로, 여러 언어로, 여러 방향으로 쓰여진 낙서와 같은 해설이 이미지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블레이크는 이 조각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원본의 평범한 복사본으로 제시하며, "여호와와 그의 두 아들 사탄과 아담은 솔로몬 성전의 케루빔을 세 명의 로도스인들이 복사하여 자연적 사실 또는 일리움의 역사에 적용한 것"이라고 묘사했다.[61] 이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예술의 모방이 창조적 상상력을 파괴하며, 고전 조각이 유대-기독교 영적 예술과 대조되는 평범한 자연주의를 나타낸다는 블레이크의 이론을 반영한다.

''라오콘''의 중심 인물은 미국 원주민 호라티오 그린ough의 ''구출''(1837–1850)에 느슨하게 영감을 주었으며, 이 조각상은 100년 이상 미국 국회의사당 동쪽 정면 앞에 서 있었다.[62] 찰스 디킨스의 1843년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에베니저 스크루지는 크리스마스 아침에 옷을 서두르면서 "양말로 완벽한 라오콘을 만들었다"라고 스스로 묘사한다.

존 러스킨은 이 조각을 싫어했고, 그 "혐오스러운 경련"을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모서리 펜던티브에 있는 '구리 뱀' 프레스코''와 비교했다. ''구리 뱀'' 프레스코는 불타는 뱀 등 민수기에 나오는 뱀과 싸우는 인물들을 포함하고 있다.[63] 러스킨은 "라오콘의 보잘것없는 선과 혐오스러운 고문"과 미켈란젤로의 "두려움과 고요함"을 대조하며, "다르단 사제의 학살"에는 숭고함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63] 또한 그는 복원된 인물의 신중하게 연구된 인체 해부학과 뱀의 설득력 없는 묘사를 대조하며 자연주의적 근거로 구성에 대해 공격했다.[63]

1910년 비평가 어빙 배빗은 20세기 초의 현대 문화를 주제로 한 에세이에 ''새로운 라오콘: 예술의 혼란에 관한 에세이''라는 제목을 사용했다. 1940년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자신의 에세이 ''더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에서 이 개념을 적용하여 추상 예술이 이제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평가하는 이상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2007년 헨리 무어 연구소에서 열린 전시회[64]는 조각 작품의 영향을 받은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면서 이 제목을 다시 사용했다.

3. 2. 해부학적 묘사

''라오콘''의 중심 인물은 미국 원주민을 묘사한 호라티오 그리너의 ''구출''(1837–1850)에 느슨하게나마 영감을 주었다.[62] 찰스 디킨스의 1843년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에베니저 스크루지는 크리스마스 아침에 옷을 서두르면서 "양말로 완벽한 라오콘을 만들었다"라고 스스로 묘사하기도 했다.

존 러스킨은 이 조각을 싫어했고, 그 "혐오스러운 경련"을 미켈란젤로의 작품과 비교했는데, 시스티나 예배당의 모서리 펜던티브에 있는 ''구리 뱀''의 프레스코도 뱀과 싸우는 인물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라오콘의 보잘것없는 선과 혐오스러운 고문"과 미켈란젤로의 "두려움과 고요함"을 대조하여 "다르단 사제의 학살"은 숭고함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63] 또한 그는 복원된 인물의 신중하게 연구된 인체 해부학과 뱀의 설득력 없는 묘사를 대조하며 자연주의적 근거로 구성에 대해 공격했다.[63]

John Ruskin영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라오콘에 인체에 대한 지식이 있을지라도, 뱀의 습성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다. 주요 인물의 옆구리에 뱀의 머리를 고정시킨 것은 선의 구성에서 빈약할 뿐만 아니라 자연에도 맞지 않다. 큰 뱀은 물고 싶어하지 않고, 잡고 싶어하며, 따라서 항상 최선을 다해 잡을 수 있는 곳, 즉 사지나 목을 잡는다. 그것은 한 번에 영원히 잡고, 코일을 감기 전에 잡고, 채찍이 단단한 물체 주위를 휘감는 것만큼 보이지 않게 빠르게 희생자 주위에 몸을 꼬고, 그런 다음 턱이나 몸을 움직이지 않고 꼭 잡고 있다. 만약 먹잇감에게 싸울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턱으로 잡는 것을 놓지 않고 다른 코일을 감는다. 만약 라오콘이 머리가 달린 테이프 조각 대신 진짜 뱀과 관련이 있었다면, 그는 여전히 잡혀 있었을 것이고, 팔다리를 휘두르지 못했을 것이다.

4. 영향

유인원으로 묘사된 ''라오콘''의 티치아노 풍자화


브라질 이비라푸에라 공원에 있는 복제품


''라오콘'' 군상의 발견은 이탈리아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바로크 시대까지 이탈리아 예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조각상은 옛 거장 판화와 작은 모형으로 빠르게 묘사되어 유럽 전역에 알려졌다. 티치아노는 1520년경부터 주형이나 복제품을 접한 것으로 보이며, 그의 작품에서 이 인물들의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520년부터 1522년까지 제작된 ''아베롤디 제단화''에는 두 개의 흔적이 나타난다.[53] 티치아노의 그림을 모방한 것으로 추정되는 목판화는 인간 대신 세 마리의 유인원을 묘사하여 이 조각상을 풍자했다. 이는 반디넬리 복제품의 어색함에 대한 풍자이거나, 인간과 유인원 해부학의 유사성에 대한 당시 논쟁에 대한 논평으로 해석되었다.[54] 또한, 이 목판화는 ''라오콘 군상''의 진위성에 대한 당시의 의구심을 반영하여 만들어진 르네상스 이미지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다. 조각상의 '유인원화'는 고대 예술에서 황소를 제압하기 위해 다리를 들고 있는 전통적인 제물 자세로 묘사된 트로이 사제의 부정확한 자세를 언급하는 것이라고 한다.[55] 루벤스가 로마에서 그린 이 조각상의 그림은 15점 이상 남아 있으며, 앤트워프 대성당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와 같은 그의 주요 작품에서도 이 인물들의 영향을 볼 수 있다.[56]

이 조각상의 복제품은 여러 개가 있는데, 로도스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 궁전에 있는 유명한 복제품도 있다. 많은 복제품이 팔을 쭉 뻗은 자세를 보여주고 있지만, 로도스에 있는 복제품은 수정되었다.

4. 1. 르네상스 미술

1506년 2월, 로마의 포도밭에서 라오콘 군상이 발굴되자,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포함한 예술가들을 파견하여 조사하게 했다.[36] 이 조각상은 곧바로 고전 조각의 걸작으로 평가받았고, 1506년 3월 율리우스 2세는 이 조각상을 구입하여 바티칸 박물관에 전시했다.[38]

미켈란젤로는 이 조각상의 거대한 규모와 헬레니즘 양식, 특히 남성 인물 묘사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라오콘 군상과 벨베데레 토르소의 영향은 미켈란젤로의 후기 조각품인 반역하는 노예와 죽어가는 노예 등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50] 시스티나 성당 천장의 여러 누드와 하만의 모습도 이 조각상에서 영향을 받았다.[50] 라파엘로는 라파엘의 방의 파르나소스에서 호메로스의 얼굴에 라오콘의 얼굴을 사용했다.[51]

피렌체 조각가 바초 반디넬리교황 레오 10세의 의뢰를 받아 라오콘 군상의 복제품을 만들었다. 반디넬리의 복제품은 여러 차례 다시 복제되었으며, 그중 하나는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52] 프랑수아 1세를 위해 프리마티초의 감독하에 만들어진 청동 복제품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라오콘 군상은 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파리로 옮겨져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었고, 프랑스 신고전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1816년 나폴레옹 몰락 후, 이 조각상은 바티칸으로 반환되었다.[39]

4. 2. 바로크 미술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의 거대한 규모와 관능적인 헬레니즘 미학, 특히 남성 인물 묘사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라오콘''과 벨베데레 토르소의 영향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무덤을 위해 제작된 미켈란젤로의 후기 조각품 ''반역하는 노예''와 ''죽어가는 노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의 여러 ''누드''와 하만의 모습도 이 조각상에서 영향을 받았다.[50] 피렌체 조각가 바초 반디넬리는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 레오 10세의 의뢰를 받아 복제품을 만들었는데, 이 버전은 작은 청동상으로 자주 복제되어 배포되었다. 교황은 이 복제품이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내기에는 너무 훌륭하다고 판단하여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했다.[52] 프리마티초의 감독 하에 원본에서 몰드를 떠 퐁텐블로 성에서 프랑수아 1세를 위해 제작된 청동 주조품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5. 라오콘 논쟁

플리니우스는 《라오콘 군상》을 "모든 그림과 조각 작품 중에서 가장 호평받는 작품"이라고 언급하며[79], 이 조각이 모든 예술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전통적인 주장을 불러일으켰다. 18세기 독일 미술사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은 혐오스러워야 할 쇠약과 죽음의 순간을 포착한 이 조각에 대한 찬양의 모순을 글로 썼다.

이 논쟁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의 저서 『라오콘: 회화와 시의 한계에 대한 에세이』이다. 레싱은 이 책에서 조각과 베르길리우스의 시를 비교하며 시각 예술과 언어 예술의 차이점을 논했다. 그는 예술가들이 라오콘의 육체적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없었던 이유는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 너무 격렬하여 눈에 보이는 것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대신,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 고통을 표현해야 했다고 덧붙였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에세이 ''라오콘에 관하여''에서 "진정한 예술 작품은 자연의 작품처럼 마음 앞에서 무한히 열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살펴보고, 감명을 받고, 그것은 효과를 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완전히 이해될 수 없으며, 그 본질, 그 가치는 말로 표현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60]

이 논쟁에 대한 가장 특이한 개입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주석이 달린 판화 ''라오콘''이었다.

''라오콘''의 중심 인물은 호라티오 그린ough의 구출''(1837–1850)에 영감을 주었으며, 이 조각상은 100년 이상 미국 국회의사당 동쪽 정면 앞에 서 있었다.[62]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1843) 마지막 부분에서, 에베니저 스크루지는 크리스마스 아침에 옷을 서두르면서 "양말로 완벽한 라오콘을 만들었다"라고 묘사한다.

존 러스킨은 이 조각을 싫어했고, 그 "혐오스러운 경련"을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있는 ''구리 뱀'' 프레스코와 비교했다. 그는 "라오콘의 보잘것없는 선과 혐오스러운 고문"과 미켈란젤로의 "두려움과 고요함"을 대조하며, "다르단 사제의 학살"에는 숭고함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63] 또한, 러스킨은 복원된 인물의 인체 해부학과 뱀의 묘사를 대조하며 자연주의적 근거로 구성에 대해 비판했다.[63]

1910년 비평가 어빙 배빗은 20세기 초 현대 문화를 주제로 한 에세이에 ''새로운 라오콘: 예술의 혼란에 관한 에세이''라는 제목을 사용했다. 1940년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에세이 ''더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에서 이 개념을 적용하여 추상 예술이 이제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평가하는 이상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2007년 헨리 무어 연구소에서 열린 전시회[64]는 조각 작품의 영향을 받은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면서 이 제목을 다시 사용했다.

5. 1. 블레이크의 비판

영국의 판화가이자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라오콘 군상》 주위에 다양한 방향과 여러 언어로 쓰인 문장들로 둘러싼 판화를 제작했다. 블레이크는 《라오콘 군상》을 이스라엘 왕국의 원본을 복사한 형편없는 조각이라고 주장하며, "세 명의 로도스인이 솔로몬 성전의 야훼와 그의 두 아들인 사탄아담의 조각을 복사했다"고 썼다[80]。 그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모방은 창조 활동에 해로울 뿐이며, 유대교와 기독교의 정신을 배경으로 한 예술과 비교할 때 고대 조각은 진부한 사실주의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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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Beard, 209
[3] 문서 The [[Capitoline Wolf]] was until recently thought to be the same statue praised by Pliny, but modern tests suggest it is medieval.
[4] 서적 Spivey, 25
[5] 서적 Spivey, 28–29
[6] 서적 The Expression of the Emotions in Man and Animals https://brocku.ca/Me[...] D. Appleton & Company 1872
[7] 서적 Spivey, 25 (Darwin), 121–122
[8] 서적 Boardman, 199
[9] 서적 Clark, 219–221 was an early proponent of this view; see also Barkan, caption opp. p 1, Janson etc
[10] 서적 Boardman, 199 says "about 200 BC"; Spivey, 26, 36, feels it may have been commissioned by Titus.
[11] 서적 Howard, 422
[12] 서적 Howard, throughout; "Chronology", and several discussions in the other sources
[13] 서적 Boardman, 199, also ''Sperlonga und Vergil'' by Roland Hampe; but see Smith, 109 for the opposite view.
[14] 서적 Smith, 109
[15] 서적 Stewart, 85, this last in the commentary on Virgil of [[Maurus Servius Honoratus]], citing [[Euphorion of Chalcis]]
[16] 서적 William Smith,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Taylor and Walton 1846
[17] 문서 The Greeks were familiar with constricting snakes, and the small boa ''[[Eryx jaculus]]'' is still native to Greece. But the danger to Ancient Greeks from venomous snakes was far greater
[18] 서적 Farinella, 16
[19] 서적 Stewart, 78
[20] 서적 Boardman, 164–166, 197–199; Clark, 216–219; Cook, 153
[21] 서적 Cook, 153
[22] 웹사이트 English text at Tufts https://www.perseus.[...]
[23] 서적 As Beard, 210, a sceptic, complains; see "Chronology" at January 1506 for dissidents
[24] 간행물 "Hagesander, Athanodorus and Polydorus"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25] 서적 Boardman, 199; Smith, 109–110
[26] 서적 Isager, 173
[27] 서적 Howard 417–418 and figure 1 has the fullest account used of the complicated situation here; with the damages and after the various restorations he lists 14 parts (417, note 4) when the group was last dismantled. See also [[Richard Brilliant]], ''My Laocoön – Alternative Claims in the Interpretation of Artwork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0, p. 29.
[28] 간행물 [[Oxford Classical Dictionary]] [[Oxford University Press]]
[29] 서적 Spivey, 26; see also Isager, 173, who translates it "by decision of the [imperial] council".
[30] 서적 Rice, 239, with photo on 238
[31] 문서 See Rice or [[Agesa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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