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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기초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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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쿠라기초 사고는 1951년 4월 24일, 일본 국철 게이힌 선 사쿠라기초역 구내에서 발생한 열차 화재 사고이다. 작업자의 실수로 인해 처진 전선에 열차의 팬터그래프가 얽히면서 단락이 발생, 화재로 이어져 106명이 사망하고 9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고 차량의 창문 구조, 자동문 고장, 변전소 차단기 작동 미흡 등 안전상의 문제와 미흡한 초기 대응이 피해를 키웠다. 사고 이후 국철은 차량 개조, 방화 대책 마련 등 안전 조치를 강화했고, 관련 책임자들은 기소되었다. 이 사고는 국철의 안전 불감증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켰으며, 국철 총재의 사임과 차량국장의 사직으로 이어지는 등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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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기초 사고
사고 개요
이름사쿠라기초 열차 화재
다른 이름사쿠라기초 사고 (ja)
image_fileSakuragicho Train Fire 1951.jpg
캡션화재 발생 직후의 현장 사진
발생일1951년 4월 24일
발생 시간13시 42분 (13시 45분경)
위치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나카구 사쿠라기초역
국가일본
노선게이힌 선 (당시 동해도 본선 지선)
운영 주체일본국유철도
사고 유형화재
원인가선 유지 보수 오류 (가선 및 팬터그래프 단락)
관련 열차 수1대 (5량 편성 중 2량)
인명 피해
사망자106명
부상자92명

2. 사고 개요

1951년 4월 24일 일본 국철 게이힌 도호쿠 선의 사쿠라기초역에서 발생한 열차 화재 사고이다. 이 사고로 106명이 사망하고 92명이 부상을 입는 등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사쿠라기초역 구내 상행선에서 가선 애자 교체 작업 중이던 작업원이 스패너를 떨어뜨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상행선 가선이 아래로 처졌고, 마침 아카바네 발 사쿠라기초 행 하행 1271B 열차(63계 5량 편성)가 상행선으로 진입하던 중 선두 차량의 팬터그래프가 처진 가선에 엉키면서 사고가 발생했다.

단락으로 발생한 불꽃이 차량 지붕의 가연성 도료에 옮겨붙어 화재가 발생했고, 변전소의 고속도 차단기가 즉시 작동하지 않아 약 5분간 전기가 계속 흘러 화재가 커졌다. 또한, 사고 차량의 창문은 3단 구조로 개구부 높이가 29cm에 불과해 탈출이 매우 어려웠으며, 자동문은 작동하지 않았고 비상용 도어 코크의 위치도 알려지지 않아 승객들이 탈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2. 1. 발생 경위

1951년 4월 24일 13시 38분경, 국철 게이힌 도호쿠 선 사쿠라기초 역 구내 상행선에서 가선 애자 교체 작업 중이던 작업원이 스패너를 떨어뜨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상행선 가선이 고정되지 않고 아래로 처졌다. 당시 아카바네 발 사쿠라기초 행 하행 1271B 열차(63계 5량 편성)가 하행선에서 포인트를 건너 상행선으로 진입하던 중이었다. 이 열차는 정해진 시간표보다 9분 늦게 운행되고 있었다.

처지고 있던 상행선 가선에 선두 차량의 팬터그래프가 엉켰다. 기관사는 즉시 팬터그래프를 내리려 했으나, 이미 파손된 팬터그래프는 차체와 접촉한 상태였다. 이로 인해 전류 단락이 발생하여 격렬한 불꽃이 튀었고, 지붕의 가연성 도료에 불이 붙으면서 목재 지붕에서부터 화재가 시작되었다.

사고 당시 사쿠라기초 역 부근 가선에 전기를 공급하던 곳은 요코하마 변전소와 쓰루미 궤전 구분소였다. 요코하마 변전소는 고속도 차단기가 작동하여 급전을 정지했지만, 쓰루미 궤전 구분소는 고속도 차단기가 작동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약 5분 동안 가선에 전기가 계속 흘러 화재를 더욱 키웠다.[5]

사고 차량의 창문은 3단 구조로, 개구부 높이가 29cm에 불과해 탈출이 매우 어려웠다. 자동문은 작동하지 않았고, 승무원과 역무원 모두 비상용 도어 코크의 위치를 몰라 문을 수동으로 열 수도 없었다. 기관사가 관통로를 통해 승객을 구출하려 했지만, 1량째 관통로는 탈출하려는 승객들의 압력으로 열리지 않았다. 결국 1량째 승객들은 창문을 깨는 것 외에는 탈출구가 없어 인명 피해가 커졌다.

2. 2. 피해 상황

사고로 인해 106명이 사망하고 92명이 중경상을 입는 대참사가 발생했다.[5] 선두 차량인 모하 63756은 전소되었고, 2량째인 사하 78144는 반소되었다.

사고 차량의 창문은 3단 구조로, 개구부 높이가 29cm에 불과하여 탈출이 매우 어려웠다. 자동문은 작동하지 않았고, 비상용 코크의 위치도 승무원이나 역무원이 알지 못해 문을 수동으로 열 수도 없었다. 기관사가 승객을 구출하려 했으나, 관통로는 바깥쪽에서 잠겨 있었고, 1량째는 승객들의 압력으로 열리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1량째 승객들은 창문을 깨는 것 외에는 탈출구가 없어 인명 피해가 커졌다. 요코하마 변전소는 고속도 차단기가 작동하여 급전을 정지했지만, 츠루미 변전소는 작동하지 않아 약 5분간 전기가 계속 흘러 화재를 키웠다.

2. 3. 초기 대응

1951년 4월 24일 13시 38분경, 사쿠라기초역 구내에서 가선 애자 교체 공사를 하던 작업원이 실수로 스패너를 떨어뜨려 가선이 처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작업원들은 상행선에만 열차 진입을 막고 하행선은 정상 운행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아카바네발 사쿠라기초행 하행 제1271B 전차(63계 5량 편성)가 상행선으로 진입하던 중, 처진 가선에 선두 차량의 팬터그래프가 얽혔다. 기관사는 팬터그래프를 내리려 했지만 파손되어, 전류 단락으로 발생한 불꽃이 가연성 도료에 옮겨붙어 화재가 발생했다.

사고 차량의 창문은 3단 구조로 개구부 높이가 29cm에 불과해 탈출이 어려웠다. 자동문은 작동하지 않았고, 승무원과 역무원은 비상용 도어 코크 위치를 몰라 수동으로 문을 열 수도 없었다. 기관사가 관통로를 통해 승객을 구출하려 했으나, 1량째 관통로는 승객들의 압력으로 열리지 않았다.

변전소의 고속도 차단기가 작동하지 않아 약 5분간 가선에 전기가 계속 흘러 화재를 키웠다. 2년 전 게이한 본선 코리엔역 부근에서 발생한 유사한 사고의 교훈은 활용되지 못했다.[5]

3. 피해 확대의 원인

63계 전차 (1947년경, 이케부쿠로)


사쿠라기초 사고의 피해가 커진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차량 자체의 문제: 사고 차량인 63계 전동차는 전시 설계로 제작되어 안전성이 떨어지는 부품을 사용하거나, 가연성 재료를 많이 사용하여 화재에 취약했다. 전기 배선은 절연 불량으로 합선 위험이 높았고, 창문은 3단 구조로 중간 부분이 고정되어 탈출이 어려웠다. 승강문은 도어콕 표시가 미비했고, 관통문은 안쪽으로 열리는 구조여서 탈출을 더욱 어렵게 했다.[13][14]

# 지상 설비의 문제: 쓰루미 급전 구분소(당시 명칭은 쓰루미 기전실)가 즉시 급전을 정지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요코하마 변전소는 사고 전류를 감지해 즉시 차단기를 개방했지만, 쓰루미 급전 구분소는 멀리 떨어져 있어 사고 전류를 감지하지 못하고 가와사키 변전소로부터 계속 급전되었다.[15]

# 안전 불감증 및 미흡한 대응: 당시 사쿠라기초역은 승강장 가장자리에 개찰구가 있어 승객이 선두 차량에 집중되어 희생자가 늘어났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하여 사쿠라기초 사고는 대형 참사로 이어졌다.

3. 1. 차량 결함



사쿠라기초 사고의 인명 피해를 확대시킨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사고 차량인 63계 전동차의 구조적 결함이었다. 63계는 전시 설계로 제작되어 안전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었으며, 특히 가연성 재료 사용, 창문 구조, 관통문 구조 등이 문제로 지적된다.

63계는 가연성 도료나 합판을 천장 내장재로 사용하는 등 연소성이 높은 재료를 많이 사용해 화재에 취약했다.[6][7] 전기 배선 역시 절연 상태가 좋지 않아 합선 사고의 위험이 높았고, 실제로 사고 이전부터 소규모 발연·발화 사고가 잦았다.

창문은 3단 구조로 중간 부분이 고정되어 비상시 탈출구 역할을 하기 어려웠다. 승강문은 도어콕 표시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비상시에 승객들이 문을 열기 어려웠다. 관통문 또한 안쪽으로 열리는 구조여서 초만원 상태에서 승객들의 압력으로 인해 열리지 않아 탈출을 더욱 어렵게 했다.[13][14]

이러한 차량 결함은 승객들의 탈출을 어렵게 만들어 인명 피해를 키우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3. 1. 1. 전시 설계의 문제점

사고 차량인 63계 전동차는 중요한 안전 부품을 생략하거나 조악한 대용품을 사용한 이른바 전시 설계로 제조된 차량이었다. 가연성 재료가 많았던 점은 전시 전의 전차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이지만, 63계에서는 가연성 도료나 합판 천장 내장재 등 연소성이 높은 재료가 다용되어 불연 구조는 전시 차량보다 열악했다.[6][7]

게다가 63계는 전기 배선 절연의 질이 열악한 설계로, 전류 단락 사고 시 필요한 보안 장치의 일부도 생략되었다. 이로 인해 차체에 가선 전류가 흘렀을 경우 발화하기 쉬운 구조였다. 실제로 본 사고 이전부터 소규모 발연·발화 사고를 일상적으로 일으켰으며, 심한 경우에는 차체가 전소되어 사고 폐차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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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의 경우 63계는 통풍 개선과 유리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삼단식으로 되어 있었고, 중간이 고정되어 있어 탈출이 불가능했다. 63계 이전의 차량처럼 2단식이거나, 삼단식이어도 중간도 가동하는 구조였다면 개구부가 커서 탈출이 가능하여 희생자 수가 줄어들었을 것이라는 것이 공통된 시각이다.

차량의 처면에 있는 관통문도 미닫이가 아닌 안쪽으로 열리는 구조였다. 당시 전차에는 객차와 같은 호로가 달린 관통 통로가 설치되지 않았고, 승객이 이곳을 통과하는 것은 상정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초만원 승객의 압력으로 문을 열 수 없어 탈출이 불가능했다.

3. 1. 2. 전기 배선 문제

63계 전동차는 전시 설계로 제작되어 안전 부품이 생략되거나 조악한 대용품이 사용되었다. 특히 전기 배선은 절연 피복과 방호 강관으로 덮여 있어야 했지만, 절연체(애자) 지지의 노출 전선으로 되어 있거나 실내 배선이 보호 덮개 없이 노출되어 있었다. 이러한 설계 결함으로 전류 합선 사고 시 필요한 보안 장치도 일부 생략되어 차체에 가선 전류가 흐르면 발화하기 쉬운 구조였다.[6][7]

이러한 문제점은 사고 이전부터 소규모 발연·발화 사고를 빈번하게 일으켰고, 심한 경우에는 차체가 전소되어 폐차되는 경우도 있었다.

3. 1. 3. 창문 구조 문제



63계 전동차는 창문이 3단 구조로, 중간 부분이 고정되어 있어 탈출이 불가능했다. 63계 이전의 차량처럼 2단식이거나, 3단식이라도 중간 부분이 움직이는 구조였다면 개구부가 커서 탈출이 가능하여 희생자가 줄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6][7]

63계 전동차는 전시 설계로 제작되어, 유리 부족을 보충하고 통풍을 개선하기 위해 창문을 3단으로 설계했다. 그러나 이 구조는 결과적으로 승객들의 탈출을 어렵게 만들었다.

3. 1. 4. 관통문 문제

사고 차량의 관통문은 미닫이가 아닌 안쪽으로 열리는 구조였다.[13] 당시에는 단거리 수송 수단인 전동차에 객차와 같은 황포함의 관통 통로는 설치되지 않았고, 승객이 관통로를 지나다니는 것은 고려되지 않았다.[14] 이 때문에 초만원인 승객들의 압력으로 문을 열 수 없어, 탈출이 불가능했다.

3. 2. 지상 설비 문제

사쿠라기초 사고 당시 국철의 지상 설비는 여러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사고 발생 및 피해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고 당시, 사쿠라기초역 부근의 가선에 전기를 공급하던 요코하마 변전소는 고속도 차단기가 작동하여 급전을 정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쓰루미 궤전 구분소의 고속도 차단기는 작동하지 않아, 약 5분 동안 더 멀리 떨어진 가와사키 변전소에서 가선에 전기가 계속 흘렀다.[15] 이로 인해 파손된 팬터그래프에서 튄 불꽃이 차량 지붕의 가연성 도료에 옮겨붙어 화재가 발생했고, 전력 공급이 즉시 차단되지 않아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1949년 9월 27일게이한 본선 코리엔역 부근에서 발생한 전류 단락으로 인한 화재 사고에서도 자동문은 열리지 않았고, 승객은 창문을 깨고 탈출해야 했다.[5] 이 사고와 본 사고는 상황이 매우 유사했지만, 그 교훈은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3. 2. 1. 변전소 차단기 문제

요코하마 변전소는 사고 전류를 감지하여 즉시 차단기가 작동해 전력 공급을 중단했다. 그러나 더 멀리 있던 쓰루미 변전소의 차단기는 사고 전류를 감지하지 못하여 가와사키 변전소로부터 누전이 계속되었다.[15]

사고 이전에 발생한 시오도메 변전소 화재 복구를 위해 차단기 4기 중 2기가 제거되어 누전 회로가 T형이 되었기 때문에, 요코하마 변전소의 차단기가 작동했음에도 가와사키 변전소로부터의 전력 공급을 막을 수 없었다. 당시 변전소는 연락 차단 장치나 원격 제어 장치가 없는 유인 운전이었고, 사고 발생 시 인접 변전소의 차단은 전화 연락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류 변화율(I)을 바탕으로 사고 전류를 검출하는 직류 누전선 고장 선택 장치가 개발되었다.[16]

3. 2. 2. 전력 공급 시스템 문제

당시 전력 공급 시스템은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고, 이는 사고 피해를 키운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사고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요코하마 변전소는 사고 전류를 감지하여 즉시 전력 공급을 차단했다. 그러나 더 멀리 떨어진 츠루미 변전소의 차단기는 사고 전류를 감지하지 못해 가와사키 변전소로부터의 누전이 계속되었다.[15]

일반적으로 요코하마 변전소의 차단기가 작동하면 먼 곳으로부터의 누전은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고 이전에 발생한 시오도메 변전소 화재 복구를 위해 차단기 4기 중 2기가 제거되어 누전 회로가 T형으로 변경되었고, 이 때문에 가와사키 변전소로부터의 전력 공급을 막을 수 없었다. 당시 변전소는 연락 차단 장치나 원격 제어 장치가 없는 유인 운전이었고, 사고 발생 시 인접 변전소와의 차단은 전화 연락에 의존했다.[16]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사고 이후 전류 변화율(I)을 기반으로 사고 전류를 감지하는 직류 누전선 고장 선택 장치가 개발되었다.[16]

3. 3. 안전 불감증과 미흡한 대응

사고 차량인 63계 전동차는 전시 설계로 제작되어 안전 부품이 생략되거나 조잡한 부품이 사용되었고, 가연성 재료가 많이 사용되어 화재에 취약했다. 특히 전기 배선 절연 불량으로 합선 사고 시 보안 기기가 작동하지 않아 차체에 전류가 흐르면 발화하기 쉬운 구조였다. 실제로 사고 이전에도 소규모 발화 사고가 빈번했고, 심한 경우 차체가 전소되기도 했다.

63계 전동차의 창문은 3단 구조로 중간이 고정되어 탈출이 어려웠고, 출입문은 강철문이었지만 비상용 도어 코크 표시가 미비하여 비상시 탈출이 어려웠다. 또한 차량 간 관통문도 안쪽으로 열리는 구조여서 승객의 압력으로 열리지 않아 탈출이 불가능했다.

지상에서는 츠루미 변전소가 즉시 전력 공급을 중단하지 않아 피해를 키웠다. 요코하마 변전소는 사고를 감지해 즉시 차단했지만, 츠루미 변전소는 사고 전류를 감지하지 못하고 가와사키 변전소로부터의 누전이 계속되었다. 이는 시오도메 변전소 화재 복구로 인해 차단기 일부가 제거되어 누전 회로가 T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변전소는 전화 연락에 의존해 인접 변전소 차단이 이루어졌고, 이 사고를 계기로 전류 변화율(I)을 바탕으로 사고 전류를 검출하는 직류 누전선 고장 선택 장치가 개발되었다.[16]

사쿠라기초역 승강장 가장자리에 개찰구가 있어 승객이 선두차에 집중된 것도 희생자가 늘어난 요인 중 하나였다.

사고 당시, 전기 공사 작업원의 실수로 스패너를 떨어뜨려 가선이 단선되었고, 작업원들은 상행선에만 열차 진입을 막고 하행선은 정상 운행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로 인해 하행선으로 진입한 열차가 처진 가선에 팬터그래프가 얽혀 파손되고, 차체와 접촉하여 전류 단락이 발생했다.

변전소 차단기가 작동하지 않아 전류가 계속 흘러 팬터그래프에서 튄 불꽃이 선두 차량 지붕의 가연성 도료에 옮겨붙어 화재가 발생했다. 가선 전류는 약 5분간 계속 흘렀고, 선두 차량은 전소, 2량째 차량도 연소되었다. 운전사는 3량째 이후 차량을 분리했지만, 1량째 승객 대부분은 탈출하지 못했다.

창문은 3단 구조로 개구부 폭이 좁아 탈출이 어려웠고, 자동문은 전류 단락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비상용 도어 코크는 위치를 알 수 없어 사용되지 못했고, 관통문은 안쪽으로 열리는 구조에 잠겨 있어 탈출이 불가능했다. 결국 1량째 승객은 창문을 깨는 것 외에는 탈출 방법이 없었다.

요코하마 변전소는 고속도 차단기가 작동해 급전을 정지했지만, 쓰루미 궤전 구분소는 작동하지 않아 약 5분간 가와사키 변전소에서 전기가 계속 흘러 불길을 키웠다.

1949년 게이한 본선 코리엔역 부근 화재 사고에서도 자동문이 열리지 않아 승객이 창문을 깨고 탈출해야 했지만[5], 이 교훈은 활용되지 못했다.

4. 사고 후의 대책

사쿠라기초 사고 이후, 일본국유철도(현 JR)는 재발 방지를 위해 즉각적인 조치, 차량 개조, 제도 개선 등 다양한 안전 대책을 시행했다.

사고 직후, 국철은 모든 전동차에 비상 코크 위치를 표시하고, 차내에 안내문을 부착했다. 전시 설계된 전동차에 대해서는 방화 도료 도포, 팬터그래프 절연 강화, 관통로 설치 등의 응급 개조를 실시했다. 이후 차내 천장 강판화, 관통로 확장, 삼단창 개폐 방식 개선 등 체질 개선 공사를 통해 800량에 달하는 차량을 개조했다.

사고 조사 보고서에 따라 객차 방화 성능 개선, 객차 간 통로 설치, 비상시 수동 조작 스위치(비상 코크) 표시 강화(빨간색 표지판 부착)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또한, 장기적으로 전금속 차체 도입이 추진되어 1955년 나하 10형 객차를 시작으로, 이후 전동차에도 전금속 차체가 적용되었다.

이 사고로 시마 히데오 철도 차량 부서 책임자가 사임했으나, 1955년 일본국유철도에 복귀하여 신칸센 개발에 참여했다.[2]

4. 1. 즉각적인 조치

당시 국철은 사고 며칠 후 전차량의 차체에 비상 코크 위치를 "▽" 표시로 표기하고, 차내에도 코크 위치를 적은 가리판 인쇄 벽보를 붙이는 등 빠른 대책을 강구했다.[10][11] 그리고 전시 설계된 전동차에 대해 우선 차내 방화 도료 도포, 팬터그래프 절연 강화, 차단부의 관통로와 관통망 설치 등 응급 개조를 1951년 내에 완료했다. 이후 차내 천정의 강판화, 관통로 확장, 삼단창의 전면 가동화 등 철저한 체질 개선 공사를 실시하여 800량에 달하는 대상 차량의 체질 개선 공사는 불과 2년 후에 완료되었다. 이러한 일은 이 사고가 사회에 끼친 여파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사 보고서 결과에 따라 모든 해당 객차의 방화 성능이 개선되었고 객차 간 통로가 설치되었다. 전동식 문에는 승객 좌석 아래에 수동 조작 스위치가 있었지만, 이에 대한 표시는 미흡했다. 보고서 결과에 따라 빨간색 표지판이 부착되었다.

이후 사고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비가 쓰루미구 소지사에 세워졌다.[3]

4. 2. 차량 개조

사쿠라기초 사고 이후, 일본국유철도는 전시 설계된 차량에 대한 대대적인 개조 작업을 실시했다. 사고 직후 응급 조치로 시작된 개조는 이후 차량의 전반적인 구조 개선으로 이어졌다.

사고 발생 직후, 국철은 모든 모하 63형 전동차 차체에 비상 코크 위치를 "▽" 표시로 알리고, 차내 좌석 아래에도 코크 위치를 알리는 가리판 인쇄 벽보를 부착했다.[9] 또한, 전시 설계된 전동차를 대상으로 차내 방화 도료 도포, 팬터그래프 절연 강화, 차량 간 관통로 및 덮개 설치 등의 응급 개조를 1951년까지 완료했다.

이러한 초기 대응에 이어, 보다 근본적인 차량 구조 개선이 이루어졌다.

4. 2. 1. 체질 개선 공사

당시 국철은 사고 며칠 후 전 차량의 차체에 비상 코크 위치를 표시하고, 차내에도 코크 위치를 적은 벽보를 붙이는 등 빠른 대책을 강구했다. 그리고 전시에 설계된 전동차에 대해 우선 차내 방화 도료 도포, 팬터그래프의 절연 강화, 차단부의 관통로와 관통망 설치 등 응급 개조를 1951년 내에 완료하였다. 이후 차내 천장의 강판화, 관통로 확장, 삼단창의 전면 가동화 등 철저한 체질 개선 공사를 실시하여 800량에 달하는 대상 차량의 체질 개선 공사는 불과 2년 후에 완료되었다. 이러한 일은 이 사고가 사회에 끼친 여파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체질 개선 공사로 모하 63형 전동차는 모하 73형(제어차), 모하 72형(중간차) 등으로 형식을 고쳐 국철 말기까지 사용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국철 72계 전동차#개조 내용을 참조해야 한다.

조사 보고서 결과에 따라 모든 해당 객차의 방화 성능이 개선되었고 객차 간 통로가 설치되었다. 전동식 문에는 승객 좌석 아래에 수동 조작 스위치가 있었지만, 이에 대한 표시는 미흡했다. 보고서 결과에 따라 빨간색 표지판이 부착되었다.

또한, 근본적인 방화 대책 및 체질 개선을 실시한다는 관점에서 세미 모노코크 구조 채용에 의한 전금속 차체 도입이 추진되어, 1955년에 나하 10형 객차가 제조되었고, 다음 해에는 전동차에서도 모하 72형·쿠하 79형의 920번대가 제조되어, 그 이후에는 목재 등의 가연물을 거의 폐지한 전금속 차체로 제조하게 되었다.

4. 3. 제도 개선

사고 조사 보고서에 따라 모든 해당 객차의 방화 성능이 개선되었고, 객차 간 통로가 설치되었다. 전동식 문에는 승객 좌석 아래에 수동 조작 스위치가 있었으나, 이에 대한 표시는 미흡하여 빨간색 표지판이 부착되었다.[2]

이 사고로 1951년 철도 차량 부서 책임자였던 시마 히데오가 사임했다. 이후 시마는 1955년 일본국유철도에 고용되어 일본 최초의 "고속 열차"(신칸센)를 설계하고 건설했다.[2]

5. 재판

사고 관련 책임자들은 기소되었다. 스패너를 떨어뜨린 작업원 3명, 사쿠라기초역 신호 담당, 전차 운전사 등 총 5명에게 금고 6개월 - 1년 10개월의 실형 판결이 선고되었다.

5. 1. 기소 및 재판 과정

사고 관련 책임자들은 기소되었다. 스패너를 떨어뜨린 작업원 3명, 사쿠라기초역 신호 담당, 전차 운전사 등 총 5명에게 금고 6개월 - 1년 10개월의 실형 판결이 선고되었다.

5. 2. 판결 내용

사고 관계 책임자들은 기소되었다. 스패너를 떨어뜨린 작업원 3명, 사쿠라기초역 신호 담당, 전차 운전사 등 총 5명에게 금고 6개월 - 1년 10개월의 실형 판결이 선고되었다.[1]

6. 사회적 영향

사쿠라기초 사고는 단순한 철도 사고를 넘어, 당시 일본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3대 괴사건 등으로 인해 이미 국철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던 상황에서, 이 사고는 국민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언론은 국철을 맹렬히 비난했고, 정계에서도 야당을 중심으로 요시다 내각을 타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결국 제2대 국철 총재였던 가가야마 유키오는 사고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6. 1. 국철에 대한 비판

3대 괴사건 등으로 잦은 사고를 일으키던 국철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이 사고를 계기로 폭발하면서 언론의 맹비난을 받았다. 당시 아사히 신문에 연재되던 '사자에상'에서도 이 사건을 소재로 다루기도 했다. 80계 전동차 개발에 참여했던 시마 히데오는 이 사고의 책임을 지고 국철 차량국장에서 사직했고, 이후 소고 신지의 요청으로 복귀하는 1955년까지 철도 기술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쓰루미구조동종 대본산소지사에는 사고의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6. 1. 1. 국철 경영에 대한 비판

국철은 1949년에 프로야구 구단 '국철 스왈로스'(현재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를 창단했고, 이후에도 80계 전동차, 70계 전동차 등의 신형 차량을 투입하고, 특별 급행 열차, 식당차, 침대차 등 전시 중에 폐지된 열차 서비스의 부활을 도모하는 등 부흥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일어난 사고였기에 국철 안팎에서의 충격은 컸고, 언론으로부터 "프로 야구에 참전할 시간이 있으면, 결함 전차의 정비를 먼저 하라"는 등의 비난을 받았다.

3대 괴사건을 비롯해 잦은 사고를 일으키던 국철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이 사고를 계기로 폭발했고, 매스컴은 국철을 맹비난했다. 또한, 정계에서도 야당이 국철의 태만으로 발생한 것이라며 당시 요시다 내각을 타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제2대 국철 총재였던 가가야마 유키오는 사고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게 되었다.

6. 2. 정계의 반응

1949년 국철 총재였던 가가야마 유키오는 사고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1] 정계에서도 야당이 국철의 태만으로 발생한 것이라며 당시 요시다 내각을 타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1]

6. 3. 가가야마 유키오 총재 사임

제2대 국철 총재였던 가가야마 유키오는 사쿠라기초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1]

국철은 1949년 프로 야구단 '국철 스왈로스'(현재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를 창단했다. 이후 80계 전동차, 70계 전동차 등 신형 차량을 투입하고, 특별 급행 열차, 식당차, 침대차 등 전쟁 중 폐지된 열차 서비스를 부활시키는 등 부흥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발생한 사고였기에 국철 내부의 충격은 컸으며, 언론에서는 "프로 야구에 참가할 틈이 있으면 결함 전동차 정비를 먼저 실시하라!"는 등 거센 비판을 받았다.[1]

시마 히데오는 80계 전동차 개발팀의 일원으로, 당시 국철 차량국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이 사고의 책임을 지고 사직했으며, 이후 소고 신지의 요청으로 복귀하는 1955년까지 철도 기술직에서 물러나 있었다.[1]

당시 아사히 신문에서 연재되던 사자에상에서도 이 사건을 소재로 한 회가 있었다.[1]

6. 4. 시마 히데오의 사임과 복귀

국철 80계 전동차를 개발한 팀의 일원이었던 시마 히데오는 당시 국철 차량국장을 맡고 있었으나, 이 사고의 책임을 지고 사직했다. 이후 1955년 소고 신지의 요청으로 복귀하기 전까지 철도 기술직에서 물러나 있었다.[2]

시마는 이후 일본국유철도에 고용되어 일본 최초의 고속 열차인 신칸센을 설계하고 건설하는 데 참여했다.[2]

6. 5. 대중 매체의 보도

1949년 국철프로 야구 구단 '국철 스왈로스'(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전신)를 창단하고, 80계 전동차, 70계 전동차 등 신형 차량을 투입하거나 특별 급행 열차, 식당차, 침대차 등 전쟁 중 폐지되었던 열차 서비스를 부활시키는 등 부흥에 힘쓰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발생한 사쿠라기초 사고는 국철 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언론은 "프로 야구에 참가할 여유가 있으면 결함 전동차 정비부터 하라!"는 등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1]

3대 괴사건을 비롯해 잦은 사고를 일으키던 국철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이 사고를 계기로 폭발했고, 매스컴은 국철을 맹렬히 비난했다. 또한, 정계에서도 야당이 국철의 태만으로 인해 사고가 발생했다며 당시 요시다 내각을 타도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1]

6. 5. 1. '사자에상'의 풍자

아사히 신문에 연재되던 만화 사자에상에서도 이 사고를 소재로 한 회차가 있었다.[1]

7. 추모

사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시설 및 추모 활동에 대한 내용은 현재 원본 자료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8. 한국의 유사 사고 사례

사쿠라기초 사고와 직접적으로 유사한 한국 내 사고 사례는 현재까지 보고된 바 없다.

참조

[1] 논문 Japanese Railway Safety and the Technology of the Day http://www.jrtr.net/[...] 2008-08-03
[2] 뉴스 Hideo Shima, a Designer of Japan's Bullet Train, Is Dead at 96 https://www.nytimes.[...] 1998-03-20
[3] 웹사이트 http://www.city.yoko[...] 2012-12-16
[4] 서적 『鉄道終戦処理史』 日本国有鉄道
[5] 뉴스 〝焔の満員電車〟走る 旧京阪線香里園で 百丗五名が重軽傷 毎日新聞阪神版 1949-09-28
[6] 서적 戦後日本共産党私記 文春文庫
[7] 간행물 東海道新幹線 安全への道程 鉄道ジャーナル社 2014
[8] 논문 桜木町事故は何を残したか? 鉄道現業社
[9] 서적 続・事故の鉄道史 日本経済評論社
[10] 서적 超!探求読本 誰も書かなかった東武鉄道 河出書房新社 2021
[11] 간행물 私鉄車両めぐり37 小田急電鉄 鉄道ピクトリアル アーカイブスセレクション第1号, 電気車研究会 2002
[12] 문서 14系客車
[13] 문서 처면(집을 수 있는)과는 차량 양단의 면.
[14] 문서 전쟁 전부터 차량간 관통로의 사양은 도쿄와 오사카에서 여러가지가 있었다. 관통로에 대해서는 도쿄가 막없음· 내여닫이 문에 대해서는 오사카에서 막첨부·미닫이가 되고 있었다. 이것은 경합 사철 측에 기인하는 것으로 간사이의 사철은 전쟁 전 이미 신게이한 전철 P-6형 전동차로 대표된 국철의 객차형 열차 같은 수준의 호화 차량을 투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철은 사철과의 경쟁을 감안하여 조금이라도 이 사양에 가까이 하고 싶었기 때문에 관통막 등의 장비를 실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수도권에서 직접 경합하는 게이오 전철이나 게이힌 전기 철도](현재의 게이힌 급행 전철]]) 모두 궤도선([[노면 전차]])에서 출발한 노선으로 차량 설비도 궤도선 차량의 관통로에 준하는 정도의 것이었다.
[15] 문서 '집전'이란 전동차에 전력을 공급하는 것.
[16] 문서 다만 당시 국철에 대해 급전담당 부서에서는 실제의 승무 담당을 그대로 두어 운전시각표나 차량의 배전에 대한 지시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일본국유철도 101계 전동차|101계]]의 전전동차화 계획도 급전측의 반대로 좌절하였다.) 한편 급전측의 문제로 인해 전철의 운행에 지장을 초래하는 일을 급전측의 '수치'라고 생각하는 풍조가 있었다. 이 때문에 인위적으로 급전속행이 판단된 것은 아니었는가 하는 설도 있다. '철도 픽토리얼' 2005년 1월(통산 756)호 특집 '일본국유철도 1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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