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티야 사이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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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티야 사이 바바는 1926년 인도에서 태어나, 자신이 쉬르디 사이 바바의 환생이라고 주장하며 종교적 가르침을 전파했다. 그는 1960년대부터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의 신봉자를 얻었으며, 인도 전 대통령과 총리 등이 그를 예방하기도 했다. 사티야 사이 바바는 교육, 의료, 식수 지원 등 다양한 사회 봉사 활동을 펼쳤으며, 2011년 사망 후에도 그의 가르침과 단체는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기적과 관련하여 진위 논란이 있었으며, 성추행 의혹과 재정 운영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한국과의 관계는 그의 가르침과 활동이 일부 알려지고, 관련 상품이 판매되는 등으로 나타난다.

사티야 사이바바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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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티야 사이 바바
출생명라트나카람 사티야나라야나 라주
출생일1926년 11월 23일
출생지푸타파르티, 마드라스 관구, 영국령 인도 (현재의 안드라프라데시주, 인도)
사망일2011년 4월 24일
사망지푸타파르티, 안드라프라데시주, 인도
국적인도
종교힌두교
종파사티야 사이 바바 운동
철학사랑하라, 봉사하라. 항상 도우라, 절대 해치지 마라.
기관
설립자스리 사티야 사이 국제 기구
스리 사티야 사이 중앙 신탁
주요 활동
영향사랑을 베풀고, 모든 사람을 도우며,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철학을 전파함.
업적스리 사티야 사이 국제 기구 설립
스리 사티야 사이 중앙 신탁 설립
다양한 사회 봉사 활동 (무료 병원, 학교, 식수 공급 프로젝트 등)
사회 활동
교육스리 사티야 사이 고등 학습 연구소(Sri Sathya Sai Institute of Higher Learning (SSSIHL)) 설립. Sri Sathya Sai Vidya Vahini 설립
의료스리 사티야 사이 종합 병원(Sri Sathya Sai General Hospital) 및 스리 사티야 사이 고등 의학 연구소(Sri Sathya Sai Institute of Higher Medical Sciences) 설립하여 무료 의료 서비스 제공
식수 공급https://www.srisathyasai.org/pages/sai-anantapur.html를 통해 식수 공급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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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사티야 사이 바바는 1926년 11월 23일 남인도 안드라프라데시 주 푸타파르티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티야 나라야나 라주'라는 이름을 받았다. 1940년 5월 23일, 14세에 쉬르디 사이 바바의 환생이자 시바샤크티의 화신임을 선언하고, '사티야 사이 바바'로 불리게 되었다. '사아바 바바'는 "거룩한 아버지"라는 뜻이다.

1940년 10월 20일 집을 나와 설법을 시작하면서 불치병을 고치는 등 기적을 행하여 인도 전역에 이름을 알렸다. 1960년대 말에는 전 세계에 수백만 명의 신봉자를 갖게 되었고, 그의 가르침을 담은 책들이 출판되어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었다.

1990년대에는 샹카르 다얄 샤르마 전 인도 대통령, 나라심하 라오 전 인도 총리 등이 그를 방문했다. 일본에서는 아오야마 케이슈가 사티야 사이 바바를 소개해 인기를 얻었고, 하야시바 나오코 기사 실종 사건을 계기로 일본 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1994년, 사티야 사이 바바는 안드라프라데시 주 아난타푸르 지역 주민 300만 명에게 식수를 공급하는 "은혜의 물" 프로젝트를 10개월 만에 완수했다. 1999년에는 이 업적을 기념하는 우표가 발행되었다.

1990년대 말부터 데이비드 베일리 등에 의해 비방을 받으며 신봉자가 감소하기도 했으나, 2001년 이후 활동이 재조명되면서 다시 신봉자가 늘었다. 무료 병원, 학교, 수도 시설 공급 등 사회 봉사 사업이 높이 평가받았다. 2001년 유엔 해비타트는 사티야 사이 바바의 휴먼 밸류 교육을 아프리카 물 교육에 도입했고, 2004년에는 아시아 개발 은행과 함께 아시아 태평양 지역 물 교육에 도입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2001년, 마이클 노벨이 위성 라디오 방송국 '사이 글로벌 하모니'를 기증했다. 2000년대에는 아브둘 칼람 전 인도 대통령, 만모한 싱 전 인도 총리 등 인도 각 주의 요인들이 그를 방문했다.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아칸소주 리틀록에서는 '사티야 사이 바바의 날'이 제정되기도 했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등 여러 지방 자치 단체는 '휴먼 밸류의 날'을 제정하여 사티야 사이 바바의 교육법을 권장하고 있다. 1969년에 시작된 '발비카스 교실'은 100개국 이상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영국 리시 수낙 총리도 참여했다.

2002년, 첸나이 시민을 위한 갠가 프로젝트를 시작하여 2004년에 완성했다. 2003년2006년에는 아브둘 칼람 대통령이 사티야 사이 바바 관련 시설에서 강연했다. 2007년에는 첸나이에서 사티야 사이 바바에게 감사를 표하는 시민 대회가 열렸다.

사티야 사이 바바 관련 상품이 판매되고 있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을 이용한 상업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2007년 제17대 까르마파가 그의 아슈람을 방문하여 만트라를 바쳤다. 2008년에는 약 3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호마 공양이 개최되었다.

2011년 3월, 호흡기 질환으로 입원하여 치료를 받다가 4월 24일 심폐 부전으로 85세에 사망했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고, 만모한 싱 총리, 소니아 간디 등 많은 인사가 참석했다. 프라티바 파틸 대통령, 만모한 싱 총리, 제14대 달라이 라마 등이 추도사를 발표했다.

사티야 사이 바바는 인도 전통 문화를 존중하고 실천했으며, 사티야 사이 오가니제이션에 따르면 예언대로 인도력 95세에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2013년, 그의 사회 공헌을 기리는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다.

2.1. 어린 시절

사티야나라야나 라주는 1926년 11월 23일, 텔루구어를 사용하는 바트라주 가문에서 태어났다. 영국령 인도 제국 시대 마드라스 관구푸타파르티(현재 인도 안드라프라데시 주)에서 아버지 페다벤카마 라주 라트나카람과 어머니 이스와라암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어머니는 그의 출생이 기적적인 출생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부모의 다섯 자녀 중 넷째였다.

사티야 사이 바바의 형제자매로는 형 라트나카람 세사마 라주(1911–1985), 누나 벤카마(1918–1993)와 파르바타마(1920–1998), 남동생 자나키라마이야(1931–2003)가 있었다.

어린 시절 사티야는 비상하게 영리하고 자선심이 깊었지만, 학업에는 그다지 열중하지 않았으며, 그의 관심사는 더 영적인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헌신적인 음악, 춤, 연극에 매우 뛰어났다. 어린 나이부터 그는 허공에서 음식이나 과자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2.2. 쉬르디 사이 바바의 환생 선언

1940년 5월 23일, 14세의 사티야는 집안 사람들을 불러 모아 설탕 사탕(프라사드)과 꽃을 마술로 만들어 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정신 조종에 걸렸다고 생각하여 막대기로 위협하며 정체를 밝히라고 했다. 이때 어린 사티야는 "나는 사이 바바이다"라고 대답하며, 쉬르디의 사이 바바의 환생임을 선언했다. 이 선언을 기점으로 그는 '사티야 사이 바바'로 알려지게 되었다.

사티야 사이 바바가 쉬르디 사이 바바의 환생임을 선언한 직후, 14세의 사티야 사이 바바
사티야 사이 바바가 쉬르디 사이 바바의 환생임을 선언한 직후, 14세의 사티야 사이 바바


몇 달 후인 1940년 10월 20일, 사티야 사이 바바는 "나는 다르마(정직의 원칙)를 재확립하고, 신에 대한 사랑과 동료 인간에 대한 봉사를 촉진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왔다"고 선언했다.

2.3. 활동

사티야 사이바바는 인도 전역과 전 세계를 순회하며 가르침을 전파하고, 추종자들과 교류했다. 1968년 6월 29일에는 유일한 해외 순방으로 케냐우간다를 방문했다. 1957년에는 북인도 순례를 떠나 델리, 스리나가르, 카슈미르, 리시케시의 사원을 방문했다.

푸타파르티에 프라산티 닐라얌 아쉬람을 건설하고, 학교, 병원, 식수 공급 시설 등 다양한 사회 복지 사업을 추진했다. 그의 가르침은 서적과 강연집으로 출판되어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1944년, 사이 바바의 신자들을 위한 만디르가 푸타파르티 마을 근처에 지어졌고, 현재는 "구 만디르"라고 불린다. 현재의 아쉬람인 프라산티 닐라얌의 건설은 1948년에 시작되어 1950년에 완공되었다. 1954년에는 푸타파르티에 무료 종합병원을 건설했고, 곧이어 1957년에는 아쉬람 내에 의료 병원을 건설했다.

푸르나찬드라 강당은 1973년에 지어졌으며, 다사라 기간 동안 문화 프로그램, 컨퍼런스 및 야그나가 열린다. 사이 쿨완트 홀은 1995년 7월 9일에 개관되었으며, 사이 바바가 안치된 곳이다.

푸타파르티 주변 지역에는 대학교, 전문 병원, 박물관, 천문관, 기차역, 스타디움, 공항, 실내 스포츠 경기장 등이 있다.

1950년대부터 남인도를 중심으로 각종 인프라 정비에 착수했다. 각 프로젝트의 재원은 인도 국내외의 부유층을 중심으로 한 프로젝트별 기부금에 의존하고 있다. 주요 활동 내역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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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내용
1966년사티야 사이 바알 비카스 프로그램(어린이 개화 교실) 개강
1968년사티야 사이 대학교 아난타푸르교(여자 학교) 개설
1969년사티야 사이 대학교 브린더반교(남자 학교) 개설
1972년이슈와란마 여자 고등학교 개설
1981년사티야 사이 초·중·고등학교 개설
1981년사티야 사이 대학교 프라샨티 닐라얌교(남자 학교) 개설
2000년사티야 사이 밀프리 음악 대학 개설
2010년인도 농촌 지역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 무료 배포 프로젝트, [http://www.srisathyasaividyavahini.org 『슈리 사티야 사이 비디야 바히니 프로젝트』] 시동.
1995년
(착공)
슈리 사티야 사이 "은혜의 물 프로젝트"
2002년슈리 사티야 사이 디나 자노다하라나 파타캄 설립 (빈곤자와 고아에 대한 지원)
2001년구자라트 지진 피해자에 대한 구호 활동
2004년타밀나두 주 쓰나미 피해자에 대한 구호 활동
카두고디, 벵갈루루, 아난타푸르에 양로원(브리다슈라마) 개설 (고령자에 대한 지원)
2005년이슈와람마 여성 복지 트러스트 설립 (불우한 모자(母子)에 대한 지원)
1956년
10월 4일
프라샨티 닐라얌에 슈리 사티야 사이 종합 병원 개설
1991년
11월 22일
푸타파르티에 슈리 사티야 사이 고도 전문 병원 개설
2001년
1월 19일
방갈로르에 슈리 사티야 사이 고도 전문 병원 개설


사티야 사이 바바는 달마(올바른 행위)와 베다를 부흥시키기 위해 강림했다고 말하며, 16세까지는 바랄리라(성스러운 희롱)를, 17세부터 32세까지는 마히마(기적)을, 그 후는 인류의 교화를 주로 행하며, 세계를 사티야(진리), 달마(정의), 샨티(평안), 프레마(사랑), 아힘사(비폭력)에 따라 이끌어 간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비부티(성스러운 재)나 반지, 시계, 목걸이, 팔찌 등을 출현시키는 기적을 행했다. 일부에서는 마술이라고 지적했지만, 사이바바 자신은 이것을 부정하고 창조의 행위라고 말했다. 신봉자들은 사이 바바에 의한 다양한 기적을 보고했으며, 이러한 기적은 사이 바바의 편재성을 강조하는 '명함'과 같다고 말했다.

현재도 세계 각지에서 사이 바바의 사진에서 비부티(성스러운 재)가 계속 나오고 있는 곳이나 암리타(감로)가 계속 흐르고 있는 곳이 있다. 비부티는 힌두교도들이 이마에 바르는 신성한 재로, 세속적인 것의 최종적인 종착지를 상기시키는 의미를 가진다.

2.4. 말년과 죽음

Sathya Sai Baba영어2011년 3월 말 호흡기 질환 등으로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4월 4일 일시적으로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이후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다시 위독해져, 4월 24일 입원 중이던 병원에서 심폐 부전으로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국장(State funeral)으로 치러졌으며, 시신은 매장되었다. 장례식에는 만모한 싱 총리, 소니아 간디 등 인도의 주요 정치 인사들이 참석하여 애도를 표했다. 프라티바 파틸 인도 대통령과 만모한 싱 총리, 제14대 달라이 라마 등도 추도 성명을 발표했다.

사티야 사이 오가니제이션에 따르면, 사티야 사이 바바는 생전에 자신이 예언한 대로 인도력(음력)으로 95세에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2013년 11월 23일, 인도 통신 정보 기술부 우정 총국은 사티야 사이 바바의 사회 공헌을 기리기 위해 그의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3. 가르침

사티야 사이바바는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를 섬기라", "언제나 돕고, 결코 해치지 말라"는 어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가르침은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사랑, 봉사, 진리, 정의, 평화, 비폭력 등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의 헌신자들은 프라샨티 닐라얌에서 매일 아침과 오후에 예정된 사이 바바의 다르샨을 헌신의 한 형태로 여기며 영적인 혜택을 얻고자 했다. 사이 바바는 사람들과 교류하고, 편지를 받거나, 그룹이나 개인을 인터뷰에 불렀다. 헌신자들은 인터뷰를 갖는 것을 큰 특권으로 여겼다.

국제적으로 그의 헌신자들은 매일 또는 매주 일요일이나 목요일 등에 모여 사트상, 영적 담론, 찬송가, 기도, 영적 명상, 지역 사회 봉사(세바), 그리고 "인간 가치 교육"(SSEHV), 즉 "발 비카스"(어린이의 개화)에 참여한다.

헌신자들은 여전히 사이 쿨완트 홀(프라샨티 닐라얌)에 있는, 꽃으로 장식된 흰색 대리석 건물인 그의 마하사마디 사원에서 사이 바바의 디비야 다르샨을 받는다.

사이 바바는 영적 및 도덕적 이유로 락토-채식주의자였으며 그의 추종자들도 그 식단을 따랐다. 그는 "육식을 하면 인간에게 동물적인 특성이 길러지고 악마적인 수준으로 떨어진다. 소가 인간의 음식으로 도살되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라고 말했다. 사이 바바와 많은 헌신자들은 공장식 축산을 비윤리적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쉬르디의 사이 바바는 이슬람과 힌두교의 가르침을 결합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아메리카 대학교의 찰스 S. J. 화이트는 1972년에 사티야 사이 바바의 경우 "뚜렷한 이슬람의 영향은 없다"고 언급했다. 하버드 국제 리뷰의 스테파니 탈링스는 사이 바바의 추종자들이 모든 종교, 민족 및 사회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나온다고 언급했다.

4. 조직 및 활동

인도 우표에 담긴 사티야 사이 바바
인도 우표에 담긴 사티야 사이 바바


스리 사티야 사이 국제 기구는 1960년대 사티야 사이 바바에 의해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스리 사티야 사이 세바 사미티"라고 불렸으며, "구성원들이 영적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봉사 활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설립되었다. 2020년, 스리 사티야 사이 센트럴 트러스트는 유엔 경제 사회 이사회로부터 특별 협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국제적으로 그의 헌신자들은 매일 또는 매주 일요일이나 목요일, 또는 둘 다에 모여 사트상, 영적 담론, 찬송가, 기도, 영적 명상, 지역 사회 봉사(세바), 그리고 "인간 가치 교육"(SSEHV), 즉 "발 비카스"(어린이의 개화)에 참여한다.

사티야 사이 국제 기구에 따르면 114개국에 약 1,200개의 사티야 사이 바바 센터가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활동적인 사이 바바 추종자 수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추정치는 6백만에서 거의 1억 명까지 다양하다. 인도 자체에서 사이 바바는 주로 "가장 부유하고, 교육을 받았으며, 서구 사상에 노출된" 사회의 상류층과 도시 지역에서 추종자를 얻었다.

헌신자들은 여전히 사이 쿨완트 홀(프라샨티 닐라얌)에 있는, 꽃으로 장식된 흰색 대리석 건물인 그의 마하사마디 사원에서 사이 바바의 디비야 다르샨을 받는다. 그는 그곳에서 안장되었다.

사티야 사이 바바는 영적 및 도덕적 이유로 락토-채식주의자였으며 그의 추종자들도 그 식단을 따랐다. 그는 "육식을 하면 인간에게 동물적인 특성이 길러지고 악마적인 수준으로 떨어진다. 소가 인간의 음식으로 도살되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라고 말했다.

4.1. 교육 봉사

사티야 사이바바는 교육 분야에서 헌신적인 봉사 활동을 펼쳤다. 그는 스리 사티야 사이 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무상으로 교육을 제공했다. 특히 어린이들의 인성 함양을 위해 '발 비카스'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가치관 교육에도 힘썼다.

4.2. 사회 봉사

사티야 사이바바는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를 섬기라", "언제나 돕고, 결코 해치지 말라"라는 어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영적 및 도덕적 이유로 락토-채식주의자였으며, 그의 추종자들도 이 식단을 따랐다.

1999년 11월 23일, 인도 정부는 사이바바가 농촌에 안전한 식수를 제공하는 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기념 우표와 우편 엽서를 발행했다. 2007년 1월, 첸나이 시민 회의는 사이바바가 크리슈나 강에서 첸나이 시로 물을 끌어오는 2 규모의 물 공급 프로젝트에 감사를 표하는 행사를 열었다.

사티야 사이 국제 기구는 1960년대에 설립되었으며, 2020년 유엔 경제 사회 이사회로부터 특별 협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사티야 사이 국제 기구에 따르면 114개국에 약 1,200개의 사티야 사이바바 센터가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사티야 사이바바는 인도 및 해외에 많은 학교와 대학, 병원 및 기타 자선 단체를 설립했다. 그는 1954년 푸타파르티에 종합 병원을 설립했고, 1972년에는 자선 단체인 스리 사티야 사이 센트럴 트러스트를 시작했으며, 1991년에는 스리 사티야 사이 고등 의학 연구소를 완공했다.

1995년에 시작된 아난타푸르 식수 사업은 사이바바가 착수한 많은 식수 사업 중 첫 번째였다. 그 외에도 메다크 & 마부브나가르 식수 사업(2001년), 2002년 첸나이 식수 사업, 2007년에 완료된 동부 및 서부 고다바리 식수 사업 등이 있었다. 2005년에는 불우한 여성을 지원하는 이슈와람마 여성 복지 트러스트를 설립했다.

사이바바가 세상을 떠난 후, 비베크 쿠마르는 "그가 실행한 일들은 인류에 대한 그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교육, 의료, 식수를 꿈도 꾸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무료로 제공했다."라고 썼다.

그가 진행한 주요 사회 봉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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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 종류내용완공/설립 연도
병원푸타파르티에 종합 병원 설립1954년
자선 단체스리 사티야 사이 센트럴 트러스트 설립1972년
의료스리 사티야 사이 고등 의학 연구소 완공1991년
식수아난타푸르 식수 사업1995년
식수메다크 & 마부브나가르 식수 사업2001년
식수첸나이 식수 사업2002년
여성 복지이슈와람마 여성 복지 트러스트 설립2005년
식수동부 및 서부 고다바리 식수 사업2007년

4.3. 의료 봉사

1954년 푸타파르티에 무료 종합병원이 건설되었고, 1957년에는 아쉬람 내에 의료 병원이 건설되었다. 1956년 10월 4일 프라산티 닐라얌에 슈리 사티야 사이 종합 병원이 개설되었다.

1991년 11월 22일 푸타파르티에 슈리 사티야 사이 고등 전문 병원이, 2001년 1월 19일 방갈로르에 슈리 사티야 사이 고등 전문 병원이 개설되었다. 이 병원들은 화이트필드의 스리 사티야 사이 수퍼 스페셜티 병원과 함께 무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사이 바바 단체는 "교육, 의료, 음료수는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제공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라 봉사 사업을 펼치고 있다.

5. 논란과 비판

사티야 사이바바에 대한 비판은 주로 그의 기적에 대한 진위 논란, 성추행 의혹, 재정 운영 관련 의혹 등을 포함한다.

1972년, 아브라함 코부르는 사이바바가 세이코 시계의 새 모델을 만들었다는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밝혀내며, 사이바바에 대한 최초의 공개 비판을 제기했다. 1976년 4월, 호수르 나라심하이아는 "기적 및 기타 검증 가능한 미신을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설립하고 사이바바에게 통제된 환경에서 기적을 행할 것을 요구하는 공개 서한을 보냈으나, 사이바바는 이를 무시했다. 그는 영적인 문제에 대한 과학적 접근 방식은 부적절하다고 언급하며, "영적 능력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과학이 아닌 영성의 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나라심하이아는 사이바바의 무시를 그의 기적이 사기라는 증거로 간주했다.

인도 합리주의자 바사바 프레마난드는 1976년부터 사이바바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으며, 1986년에는 그를 금 통제법 위반 혐의로 고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995년 TV 다큐멘터리 구루 버스터스는 사이바바가 그의 물질화를 조작했다고 비난했다. 1998년, 에를렌두르 하랄드손은 사이바바가 미국인 신봉자 월터 코완을 부활시켰다는 주장에 대해 조사한 결과, 코완이 위독했지만 사망하지는 않았다고 보고한 의사들의 증언을 확보했다.

2002년, 덴마크 다큐멘터리 사티야 사이바바에게 매혹되다는 사이바바의 공개 현현 영상을 분석하여 속임수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전 신봉자 알라야 라흐므와의 인터뷰를 통해 성추행 의혹을 제기했다. 2004년, BBC 다큐멘터리 비밀의 스와미는 알라야 라흐므와 마크 로슈의 성추행 혐의를 다시 제기하고, 바사바 프레마난드의 물질화 위조 주장을 담았다.

사이바바 사후, 단체의 재정 관리 방식에 대한 의혹과 함께 그의 개인 거주지에서 현금과 금이 든 여행 가방이 반출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2011년, 그의 개인 거주지에서 98kg의 금 장신구, 307kg의 은 장신구, 116(미화 260만 달러)의 현금 등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사이바바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그는 비난의 배후에 질투, 증오, 두려움이 있으며, 많은 신자들이 돈을 받고 험담을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빌 에이킨, 아닐 쿠마르 등을 포함하여 공개적으로 그를 변호했다. 2001년 12월,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 총리 등 인도의 주요 인사들은 공개 서한을 통해 사이바바에 대한 비난에 "깊은 고통과 분노"를 표명하고 그를 옹호했다.

6. 한국과의 관계

사티야 사이바바의 가르침은 한국에도 전해져, 그의 저서와 강연집이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한국에도 사티야 사이 바바 센터가 설립되어 활동하고 있다. 1990년대, 아오야마 케이슈, 하야시바 나오코 등 일본의 유명 인사들이 사티야 사이 바바를 언급하면서, 한국 대중에게도 그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