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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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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액(算額)은 에도 시대에 일본의 사찰이나 신사에 봉납된 나무판으로, 기하학 문제와 그 해법이 그림과 함께 적혀 있다. 산액은 와산(일본 수학)을 사용하여 제작되었으며, 신과 부처에게 바치는 공물, 신자들에게 던지는 도전, 또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보여주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1997년 조사에 따르면, 일본에는 약 975면의 산액이 현존하며, 가장 오래된 것은 1683년에 봉납된 것이다. 산액 봉납은 일본 특유의 문화로, 일부는 중요 문화재 또는 민속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최근에는 산액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있으며, 21세기에도 산액을 봉납하는 신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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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액
개요
에도 시대의 산가쿠 그림
에도 시대의 산가쿠 그림
유형수학적 대상
주제기하학, 미적분학, 산수
시대에도 시대
기원일본
관련 항목와산
설명
산가쿠 (算額)일본 에도 시대에 사원이나 신사에 걸려 있던 수학적 내용이 담긴 나무 패널
문자 그대로의 의미계산판
다른 이름산가쿠 마나부 (算學額)
게이산가쿠 (計算額)
역사
기원일본 에도 시대
와산 학자들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거나, 동료나 신들에게 수학적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제작
내용주로 기하학 문제
원, 정사각형, 타원 등의 기하학적 도형과 관련된 문제
때로는 미적분학 문제 포함
특징그림과 함께 문제가 제시
해법은 제시되지 않는 경우가 많음
수학적 능력 과시 및 동료 학자들에게 도전
보존약 880개의 산가쿠가 현존
19세기 후반의 것들이 많음
소실사원과 신사의 노후화
태풍, 홍수, 지진 등의 자연재해
제2차 세계 대전
추가 정보
목적와산 학자들이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
동료들에게 수학적 업적을 과시
사원이나 신에 대한 헌납
언어일본어
참고 문헌후카가와 히데오와 로스 H. 맨스필드의 책 "일본 기하학 문제"

2. 역사

산액(算額)은 에도 시대 일본에서 발달한 독특한 문화로, 수학 문제를 풀거나 제시하는 내용을 담아 나무판(에마)에 적어 신사사찰에 봉납한 것을 말한다. 이는 신이나 부처에게 감사를 표하거나 학문적 성취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으며,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수학적 도전을 제시하는 장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산액 봉납 풍습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본 고유의 문화 현상으로 평가받는다. 많은 산액이 에도 시대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소실되었으나, 일부는 현재까지 남아 전해지고 있다.

2. 1. 기원과 발전

나라 엔만지 사원에 봉헌된 산액. 덴포 15년(1844년) 봉납.


사무카와 신사(가나가와현)의 산액(복원). 분세이 5년(1822년) 봉납. "소디의 6구 연쇄"에 해당하는 문제로, 우치다 고칸 문하의 이리사와 신타로 히로아츠에 의해 100년 이상 전에 이미 풀려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산액(算額)은 나무로 만든 판(에마)에 수학 문제를 다채롭게 그려 넣은 것으로, 주로 불교 사찰이나 신사 경내에 걸렸다. 이는 신이나 부처에게 감사를 표하고 학문 정진을 기원하며 봉납하는 공물이었으며,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전 과제를 제시하거나 문제의 해답을 보여주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산액 봉납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일본 특유의 문화로 여겨진다.

산액의 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엔포 8년(1681년) 무라세 요시마스의 『산학연저기』에 따르면 17세기 중반에는 이미 에도의 여러 곳에 산액이 걸려 있었으며, 메구로 부동의 산액 문제가 소개되기도 했다. 교토오사카에는 이보다 더 이른 시기부터 산액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산액 중 제작 연대가 확인된 가장 오래된 것은 도치기현 사노시의 호시미야 신사에 봉납된 덴와 3년(1683년)의 것이다.[5]

17세기 후반부터는 산액에 적힌 문제들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간세이 원년(1789년)에는 후지타 사다스케의 아들이자 제자인 후지타 가겐(1765–1821)이 최초의 산액 문제집으로 여겨지는 『신벽산법(神壁算法)』을 출판했으며, 1806년에는 속편인 『속신벽산법(続神壁算法)』을 간행했다.

산액 봉납 풍습은 에도 시대 중기에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했으며, 특히 간세이, 교와, 분카, 분세이 연간(18세기 말 ~ 19세기 초)에 가장 성행하여 한 해에 봉납되는 산액 수가 100개를 넘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많은 이들이 모이는 신사나 사찰을 문제 발표의 장으로 삼아, 일부러 난해한 문제나 해답이 없는 문제만을 적어 봉납하기도 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그 문제를 보고 해답이나 관련된 새로운 문제를 다시 산액으로 만들어 봉납하는 방식으로 학문적 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 시기 일본은 서양과의 교류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산액 문제들은 서양 수학의 영향 없이 독자적으로 발전한 일본 수학, 즉 와산(和算)을 사용하여 풀이되었다. 예를 들어, 미적분학의 기본 정리와 같은 개념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면적이나 부피를 구하는 문제는 무한 급수를 이용하여 전개하고 각 항을 계산하는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서양 수학이 도입되면서 와산은 점차 쇠퇴했지만, 산액 봉납 풍습은 쇼와 시대 초까지 그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산액이 소실되었다. 1997년 조사에 따르면 일본 전국에 975개의 산액이 현존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4], 이 중 일부는 중요 문화재나 민속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메이지 시대가 되자, 일본에는 서양에서 수학이 도입되었지만, 산액 봉납의 풍습은 이러한 도입을 용이하게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최근 들어 산액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으며, 21세기에도 산액 봉납을 받아들이는 신사나 사찰이 있고[6], 새로 산액을 만들어 봉납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이는 과거 와산의 전통을 직접 계승한 것은 아닐지라도, 일본인의 수학 애호 문화를 보여주는 현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2018년에는 뉴질랜드 캔터베리 대학교의 로잘리 호스킹(Rosalie Hosking)과 동료들이 교토의 기타노텐만구에 산액을 봉납했는데, 이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사례로 기록되었다.[7] 해당 산액은 일본어와 영어로 작성되어 기타노텐만구에 현존하는 다른 산액들과 차별점을 가진다.[8]

2. 2. 전성기와 쇠퇴



산액은 와산(일본 전통 수학) 문제를 풀었음을 신불에게 감사하고, 학문에 더욱 정진할 것을 기원하며 신사나 사찰에 봉납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신사나 사찰은 문제 발표의 장이 되기도 했다. 일부러 어려운 문제나 해답이 없는 문제만 적어 봉납하면, 그것을 본 다른 사람이 해답이나 관련 문제를 다시 산액으로 만들어 봉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산액 봉납 풍습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일본 특유의 문화로 평가받는다. 일부 산액은 중요 문화재나 민속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1997년 조사에 따르면 일본 전국에 975개의 산액이 현존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4] 현존하는 산액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도치기현 사노시의 호시미야 신사에 봉납된 덴와 3년(1683년)의 것이다.[5] 엔포 8년(1681년) 무라세 요시마스가 쓴 『산학연저기』에는 이미 17세기 중반 에도 곳곳에 산액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메구로 부동의 산액 문제가 소개되어 있다. 교토오사카에는 이보다 더 이른 시기부터 산액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7세기 후반에는 산액에 적힌 문제들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출판된 산액집으로는 간세이 원년(1789년) 후지타 사다스케의 『신벽산법』이 효시로 여겨진다.

산액 봉납 풍습은 에도 시대 중기에 전국적으로 성행했으며, 특히 간세이, 교와, 분카, 분세이 시기에 가장 융성하여 한 해에 봉납된 산액 수가 100개를 넘기도 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도 산액 봉납은 쇼와 시대 초까지 와산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최근 들어 산액의 가치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21세기에도 산액 봉납을 받아들이는 신사가 있으며[6], 산액을 봉납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이는 과거 와산의 전통을 직접 계승한 것은 아닐 수 있으나, 일본인의 수학 애호 문화를 보여주는 현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2018년에는 로잘리 호스킹이 캔터베리 대학교의 동료들과 함께 교토의 기타노텐만구에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산액을 봉납했다.[7] 기타노텐만구에는 기존에도 산액이 있었지만, 일본어와 영어가 함께 쓰인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8]

2. 3. 현대의 산액

메이지 시대에 들어 서양 수학이 도입되었고, 일각에서는 산액 봉납 풍습이 이러한 서양 수학 도입을 용이하게 했다는 평가도 있다. 산액 봉납 풍습은 쇼와 시대 초년 무렵까지 와산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최근에는 산액의 가치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각지에서 나타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산액 봉납을 받아들이는 신사가 있으며[6], 신사나 사찰에 산액을 봉납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이는 직접적으로 와산의 전통을 계승한 것은 아닌 경우가 많지만, 일본인의 산술을 좋아하는 문화를 보여주는 현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2018년에는 로잘리 호스킹과 캔터베리 대학교의 뜻있는 사람들이 교토의 기타노텐만구에 산액을 봉납했는데, 이는 외국인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7]. 이 산액은 일본어와 영어가 함께 쓰인 첫 사례이기도 하다[8].

3. 내용 및 특징



산액은 와산(일본 전통 수학)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에 대해 신이나 부처에게 감사를 표하고, 학문에 더욱 정진할 것을 기원하며 신사나 사찰에 봉납한 나무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신사나 사찰은 수학 문제를 발표하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때로는 어려운 문제나 문제만 적고 해답 없이 봉납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를 본 다른 사람이 해답이나 관련 문제를 새로운 산액으로 만들어 봉납하는 방식으로 학문적 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산액 봉납 풍습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일본 고유의 문화로 평가받는다. 일부 산액은 중요 문화재나 민속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서양 수학이 도입되었는데, 일각에서는 산액 봉납 풍습이 이러한 새로운 학문의 수용을 용이하게 했다는 평가도 있다.

1997년 조사에 따르면 일본 전국에 975개의 산액이 현존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4].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도치기현 사노시의 호시미야 신사에 봉납된 덴와 3년(1683년)의 산액이다[5]. 엔포 8년(1681년) 무라세 요시마스가 쓴 『산학연저기』에는 17세기 중반 에도 곳곳에 산액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메구로 부동의 산액 문제가 소개되기도 했다. 교토오사카 지역에는 이보다 더 이른 시기부터 산액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7세기 후반에는 산액에 적힌 문제들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출판된 산액집으로는 간세이 원년(1789년) 후지타 사다스케가 펴낸 『신벽산법』이 최초로 여겨진다. 산액 봉납은 에도 시대 중기에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했으며, 특히 간세이, 교와, 분카, 분세이 시기에 가장 활발하여 한 해에 봉납되는 산액 수가 100개를 넘기도 했다. 이러한 전통은 메이지 시대를 거쳐 쇼와 시대 초까지 이어졌다.

최근 들어 산액의 문화적, 학문적 가치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21세기에도 산액 봉납을 받아들이는 신사가 있으며[6], 직접 산액을 만들어 봉납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이는 과거 와산의 전통을 직접 계승한 것은 아니더라도, 일본인의 수학 애호 문화를 보여주는 현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2018년에는 로잘리 호스킹과 캔터베리 대학교 관계자들이 교토의 기타노텐만구에 산액을 봉납했는데, 이는 외국인이 봉납한 첫 사례로 기록되었다[7]. 해당 산액은 일본어와 영어가 함께 쓰인 최초의 산액이기도 하다[8].

3. 1. 와산(일본 수학)



산가쿠(算額)는 나무 판(에마)에 기하학 문제나 정리를 그려 넣고 색칠하여 불교 사찰이나 신사 경내에 봉헌한 것이다. 이는 신이나 부처에게 감사를 표하거나, 문제 풀이를 통해 자신의 수학적 능력을 과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전 과제를 제시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산가쿠 판은 에도 시대에 성행했으나, 근대화 과정에서 상당수가 소실되어 현재는 약 900여 개가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저명한 수학자 후지타 가겐(藤田嘉言, 1765–1821)은 1790년에 최초의 산가쿠 문제집인 ''신벽산법''(神壁算法)을 출판했고, 1806년에는 속편인 ''속신벽산법''(続神壁算法)을 출판했다.

이 시기 일본은 서양 국가들과의 교류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산가쿠는 서양 수학의 영향 없이 독자적으로 발전한 일본 수학(와산)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예를 들어, 미적분학의 기본 정리와 같은 개념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면적이나 부피를 구하는 문제는 무한 급수를 이용하여 전개하고 각 항을 계산하는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세 개의 원이 서로 접하고 공통 접선을 공유하는 산액 퍼즐의 가장 작은 구별되는 정수 해.


r가운데r왼쪽r오른쪽
144
4936
916144
1625400
72200450
144441784
1000까지의 정수 반지름을 가진 여섯 개의 원시 삼중항


  • 군마현의 1824년 산가쿠에 제시된 대표적인 문제는 공통 접선을 갖는 세 개의 서로 접하는 원의 관계를 다룬다. 이는 데카르트의 정리의 특수한 경우에 해당한다. 두 바깥쪽 큰 원의 반지름이 주어졌을 때, 그 사이에 끼인 작은 원의 반지름을 구하는 문제이다. 답은 다음과 같은 관계식으로 표현된다.


:\frac{1}{\sqrt{r_\text{middle}}} = \frac{1}{\sqrt{r_\text{left}}} + \frac{1}{\sqrt{r_\text{right}}}.

(관련 개념: 포드 원)

  • 소디 육각원 문제는 서양에서는 1937년에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보다 앞선 1822년의 산가쿠에서 이미 다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 사와 마사요시(澤正義)의 산가쿠 문제와 모리카와 지헤이(森川知平)의 문제는 비교적 최근에 해결되었다.[1][2]

3. 2. 문제 유형



산액 문제의 전형적인 예시는 1824년 군마현의 한 산가쿠(산액 액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문제는 공통 접선을 가지는 세 개의 서로 접하는 원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데, 이는 데카르트의 정리의 특수한 경우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양쪽에 있는 두 개의 큰 원의 크기(반지름)가 주어졌을 때, 그 사이에 끼인 작은 원의 크기를 구하는 문제가 있다. 이 문제의 해답은 다음과 같은 수식으로 표현된다.

:\frac{1}{\sqrt{r_\text{가운데}}} = \frac{1}{\sqrt{r_\text{왼쪽}}} + \frac{1}{\sqrt{r_\text{오른쪽}}}

여기서 ''r''가운데, ''r''왼쪽, ''r''오른쪽은 각각 가운데 원, 왼쪽 원, 오른쪽 원의 반지름을 의미한다. (관련 개념: 포드 원)

아래 표는 위 관계를 만족하는 정수 반지름을 가진 원들의 조합 중 일부를 보여준다.

r가운데r왼쪽r오른쪽
144
4936
916144
1625400
72200450
144441784
1000까지의 정수 반지름을 가진 여섯 개의 원시 삼중항



한편, 소디 육각원 문제는 서양에서는 1937년에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이른 1822년의 산액에서 이미 다루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또한, 사와 마사요시나 모리카와 지헤이가 제시했던 산액 문제들 중 일부는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해결되기도 하였다.[1][2]

4. 문화적 의의

산액 봉납은 와산(일본 고유 수학)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된 일본 특유의 문화 현상이다.[4] 기록상 17세기 중반 에도에서 그 존재가 확인되며(무라세 요시마스 『산학연저기』), 교토오사카에서는 더 이른 시기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년명 산액은 도치기현 사노시 호시미야 신사의 덴와 3년(1683년) 봉납품이다.[5]

산액 봉납은 에도 시대 중기, 특히 간세이부터 분세이 연간(18세기 말~19세기 초)에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하여, 한 해 봉납 수가 100면을 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산액 문제들을 모아 출판하는 문화도 생겨났으며, 후지타 사다스케의 『신벽산법』(간세이 원년, 1789년)이 대표적이다.

메이지 시대 이후 서양 수학 도입으로 와산과 함께 산액 봉납은 점차 쇠퇴했지만, 쇼와 초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1997년 조사 기준 일본 전국에 975면이 현존하며[4], 일부는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중요 문화재나 민속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최근에는 산액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움직임 속에 21세기에도 봉납이 이루어지고 있으며[6], 2018년에는 외국인 학자가 교토 기타노텐만구에 산액을 봉납하는 등[7][8] 현대에도 그 문화적 의미가 이어지고 있다.

4. 1. 사회적 역할



산액(算額)은 나무판(에마)에 수학 문제를 풀거나 제시하는 내용을 그려 넣은 것으로, 주로 불교 사찰이나 신사 경내에 봉헌되었다. 이는 신이나 부처에게 감사를 표하고 학문 정진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또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의 특성을 활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어려운 수학 문제를 제시하거나, 이미 제시된 문제의 풀이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학문적 교류의 장이 되기도 했다.[4]

산액 봉납은 에도 시대에 시작되어 와산(일본 고유의 수학)의 발전과 함께 성행했다. 당시 일본은 서양과의 교류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서양 수학과는 독자적으로 발전한 와산을 사용하여 산액의 문제들을 풀었다. 예를 들어, 미적분학의 기본 정리가 알려지지 않았기에 넓이나 부피를 구하는 문제는 무한 급수를 이용한 계산으로 해결했다.

산액 봉납 문화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일본 특유의 문화 현상으로 평가받는다. 일부 산액은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중요 문화재나 민속 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메이지 시대에 서양 수학이 도입되었을 때, 산액 봉납 풍습이 이러한 도입을 용이하게 했다는 평가도 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서양 수학이 도입되면서 와산과 산액 봉납 문화는 점차 쇠퇴했지만, 쇼와 시대 초까지 그 명맥이 이어졌다.

최근에는 산액의 가치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으며, 21세기에도 산액 봉납을 받아들이는 신사나 사찰이 있고, 새로 산액을 봉납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6] 2018년에는 외국인 학자가 교토의 기타노텐만구에 산액을 봉납하는 등[7], 현대에도 산액은 수학 문화의 한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8]

4. 2. 종교적 의미



산액(算額|산가쿠일본어)은 나무로 만든 판(에마)에 수학 문제를 그리거나 풀이를 적어 신사사찰에 봉납하는 일본 고유의 문화이다.[4] 이는 에도 시대에 특히 성행했으며, 이나 부처에게 감사를 표하거나 소원을 빌기 위한 공물의 일종으로 여겨졌다.

주된 봉납 목적은 자신이 풀었던 와산(일본 전통 수학) 문제의 해답을 신불에게 감사를 표하고, 앞으로 학문에 더욱 정진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신사나 사찰을 문제 발표의 장으로 삼아, 일부러 어려운 문제나 풀이 없이 문제만 적어 다른 사람들의 도전을 유도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그러면 그 문제를 본 다른 사람이 해답이나 관련 문제를 다시 산액으로 만들어 봉납하는 방식으로 학문적 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산액 봉납 풍습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일본 특유의 문화 현상으로 평가받는다. 현존하는 산액 중 일부는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중요 문화재나 민속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서양 수학이 도입되면서 와산과 산액 문화는 점차 쇠퇴했지만, 일각에서는 산액 봉납 풍습이 수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여 서양 수학의 수용을 용이하게 했다는 평가도 있다.

5. 산액 분포 지역 및 문화재



산액은 와산 문제를 풀었음을 신불에게 감사하고, 학문에 더욱 정진할 것을 기원하며 신사사찰에 봉납한 그림 액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신사나 사찰이 문제 발표의 장이 되기도 하여, 난제나 풀이 없이 문제만 적어 봉납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이를 본 다른 사람이 해답이나 관련 문제를 다시 산액으로 만들어 봉납하는 문화도 나타났다.

이러한 산액 봉납 풍습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본 특유의 문화로 여겨진다. 현존하는 산액 중 일부는 중요 문화재나 민속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기록상 가장 오래된 기년명이 있는 산액은 도치기현 사노시의 호시미야 신사에 봉납된 덴와 3년(1683년)의 것이다[5]. 엔포 8년(1681년) 무라세 요시마스의 『산학연저기』에는 17세기 중반 에도의 여러 곳에 산액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메구로 부동의 산액 문제가 소개되기도 했다. 교토오사카에는 이보다 더 이른 시기부터 산액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7세기 후반에는 산액에 적힌 문제들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는 경우도 나타났으며, 간세이 원년(1789년) 후지타 사다스케의 『신벽산법』이 산액집 출판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산액 봉납은 에도 시대 중기에 전국적으로 성행했으며, 특히 간세이, 교와, 분카, 분세이 시기에 가장 활발하여 한 해에 봉납된 산액 수가 100면을 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전통은 메이지 시대를 거쳐 쇼와 시대 초까지 이어졌다. 최근에는 산액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으며, 21세기에도 산액 봉납을 받아들이는 신사가 있고[6], 새로 산액을 봉납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이는 직접적인 와산 전통 계승과는 다를 수 있지만, 일본인의 산술 애호 문화를 보여주는 현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2018년에는 로잘리 호스킹이 캔터베리 대학교의 동료들과 함께 교토의 기타노텐만구에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산액을 봉납했다[7]. 기타노텐만구에 현존하는 다른 산액들과 달리, 이 산액에는 일본어와 영어가 함께 쓰여 있다[8].

현존하는 산액은 일본 전국에 분포하고 있다.

5. 1. 산액 분포 지역

1997년에 실시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본 전국에는 975면의 산액이 현존하고 있다[4]. 현존하는 산액은 주로 관동 지방이나 도호쿠 지방에 많이 분포한다. 지역별 현존 산액 수는 후쿠시마현이 103면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이와테현 93면, 사이타마현 91면, 군마현 등의 순서이다.

지역현존 산액 수
후쿠시마현103면
이와테현93면
사이타마현91면



나가노현 키지마다이라무라에는 8면의 산액이 있는데, 이는 산간 지역의 작은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밀집되어 분포하는 예이다. 또한, 에히메현 마쓰야마시의 이사니와 신사에는 22면의 산액이 봉납되어 있는데, 이는 한 곳에서 확인된 산액 수로는 가장 많은 것이다[9]. 이사니와 신사의 산액에 대해서는 『도고 하치만 이사니와 신사의 산액』이라는 도록으로 정리되어 해당 신사에서 발행되고 있다. 일부 산액은 중요 문화재나 민속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5. 2. 문화재로 지정된 산액

장소소재지봉납 연도봉납자문화재 지정
야사카 신사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겐로쿠 4년(1691년)하세가와 린칸중요 문화재(국가 지정)[12]
금왕 팔만궁도쿄도 시부야구 시부야가에이 3년(1850년)미즈노 요시치로 마사타다 문인 에비사와 소에몬 마사야스시부야구 지정 유형 민속 문화재
금왕 팔만궁도쿄도 시부야구 시부야안세이 6년(1859년)오카유 야스모토 문인 사이조 번 야마모토 요조 사카타카시부야구 지정 유형 민속 문화재
금왕 팔만궁도쿄도 시부야구 시부야겐지 원년(1864년)미즈노 요시치로 문인 노구치 토미타로 겐 사다노리시부야구 지정 유형 민속 문화재 (특이한 부채 모양)[13]
세이칸지사이타마현 혼조시 츠시마교호 11년 9월(1726년)도츠카 모리마사혼조시 지정 문화재 (현존하는 산액 중 현내 최고)
히카와 신사사이타마현 가와고에시 쿠게토분카 8년(1811년)오쿠누키 고헤이지 마사사다 외가와고에시 지정 문화재
하치만구군마현 다카사키시분카 7년(1810년)세키류 오노 에이시게 문인군마현 지정 중요 문화재
하치만구군마현 다카사키시안세이 7년(1860년)세키류 나카소네 신고 문인군마현 지정 중요 문화재
하루나 신사군마현 다카사키시 하루나마치분카 8년(1811년)이시다 겐케이 잇토쿠 문인군마현 지정 중요 문화재
칸논이나리 신사군마현 오타시 호소야마치분카 11년(1814년)오카와 에이신 문인 오카와 나오부 외 3명군마현 지정 중요 문화재
사쿠라이 신사아이치현 안조시 사쿠라이초간세이 원년(1789년)후지타 사다스케 문인 마츠자키 요에몬 유키노리아이치현 지정 유형 민속 문화재
사쿠라이 신사아이치현 안조시 사쿠라이초교와 4년(1804년)사이토씨 문인 시미즈 코자부로 하야시 나오아이치현 지정 유형 민속 문화재
다이묘지아이치현 치타군 미하마정 노마 다이보메이와 8년(1771년)에노모토 쇼세이아이치현 지정 유형 민속 문화재
이사리바 신사에히메현 마츠야마시 사쿠라타니초교와 3년(1801년)마루야마 료겐 문인 오니시 사헤이 요시마사 외 22면에히메현 지정 유형 민속 문화재
코닌지나라현 나라시 코쿠조초분세이 10년(1827년)오쿠다 마사하치나라시 지정 유형 민속 문화재
코닌지나라현 나라시 코쿠조초안세이 5년(1858년)이시다 산라쿠켄나라시 지정 유형 민속 문화재
엔만지나라현 나라시 시모야마초덴포 15년(1844년)겐지로나라시 지정 유형 민속 문화재
킨조인지바현 노다시 시미즈안세이 6년(1859년)와타나베 겐고로 타다츠구노다시 지정 민속 문화재
다이산지에히메현 마츠야마시 다이산지마치가에이 5년(1852년)차야 난모마츠야마시 지정 유형 민속 문화재
류센지후쿠시마현 니혼마츠시 니이타키간세이 12년(1800년)타카다 요고로 가즈마사니혼마츠시 지정 유형 문화재(역사 자료)
이이누마 카토리 신사사이타마현 가스카베시 이이누마고카 2년(1845년)나카타 젠지로 마사쿠니가스카베시 지정 유형 문화재
핫토리 텐진구오사카부 토요나카시 핫토리모토마치덴포 14년(1843년)치카미치류 요시다 덴베토요나카시 지정 유형 민속 문화재[14]
핫토리 텐진구오사카부 토요나카시 핫토리모토마치메이지 9년(1876년)이무라 고지토요나카시 지정 유형 민속 문화재[15]
오시오 하치만구후쿠이현 에치젠시 쿠니카네초겐로쿠 14년(1701년)하치야 씨 류야후쿠이현 지정 유형 민속 문화재[16]
이시베 신사후쿠이현 사바에시 이소베초메이지 10년(1877년)사바에시 지정 유형 민속 문화재[17]
나카노 신사후쿠이현 사바에시 나카노초에도 시대 말기이이다시자에몬사바에시 지정 유형 민속 문화재[18]
후나츠 신사후쿠이현 사바에시 후나츠초분카 6년(1809년)사바에시 지정 유형 민속 문화재[19]
후나츠 신사후쿠이현 사바에시 후나츠초안세이 2년(1855년)타케우치 시게키 등사바에시 지정 유형 민속 문화재[20]
신메이 신사후쿠이현 사바에시 신메이초분세이 7년(1824년)츠지모토 쵸헤이사바에시 지정 유형 민속 문화재[21]



6. 시바 료타로의 조부와 산액

시바 료타로의 할아버지 역시 와산을 즐겼으며, 산액을 봉납한 기록이 있다.[10] 시바 료타로의 조부 후쿠다 소하치(福田惣八)[11]는 히메지 교외 출신이었다. 그가 젊었을 때, 와산 스승이 산조 대교의 만곡도를 측정하여 원의 크기를 계산하는 문제를 내고 풀이 시합을 열었다. 정답을 맞힌 사람의 이름은 히메지 남쪽 히로 마을의 신사에 산액으로 걸리게 되었는데, 이 마을은 시바 료타로의 선조가 400년 동안 대대로 살아온 곳이기도 했다. 시바 료타로는 할아버지가 태어난 마을을 정확히 알지 못했으나, 우연히 히로 마을을 방문하여 덴만구(天満宮)에 들렀을 때 할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했다. 밤늦게 도착하여 수많은 옥공(玉垣, 신사 울타리 기둥) 속에서 찾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손전등을 비추자 바로 할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옥공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10]

후쿠다 소하치는 흑선 내항 사건 이후 서양 문물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단발령이 내려져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투를 잘랐을 때도 그는 끝까지 상투를 유지했다. 이러한 생각은 아들 시조(是定, 시바 료타로의 아버지)의 교육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초등학교가 서양식 교육을 하는 곳이라 여겨 아들을 입학시키지 않고, 대신 테라코야에 보내 와산과 한문을 배우게 했다. 소하치가 히로하타(현재 히메지시 히로하타 구)의 덴만구에 봉납했던 산액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덴만구를 개조하는 과정에서 목수가 처분해 버려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11]

7. 산액을 다룬 작품


  • 우부카타 토오, 《천지명찰》, 카도카와 쇼텐, 2009년 12월, ISBN 404874013X
  • 엔도 히로코, 《산법소녀》, 치쿠마 서방(치쿠마 학예 문고), 2006년 8월, ISBN 4480090134.
  • 나가이 요시오, 《산학 기인전》, TBS 브리타니카, 1997년 4월, ISBN 4484972034
  • 카나모리 아츠코, 〈산사와 그 아내〉 (《맹인 여자의 죽음》 수록), 카도카와 쇼텐, 1990년 5월, ISBN 4048725777
  • * 산액을 조용히 내걸고, 와산을 근본적으로 지지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 오노데라 코지, 《산학 무사도》, 분게이슌주, 1989년 2월, ISBN 978-4163107707.
  • * 가난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생활 속에서 주인공이 산학에 빠져들어 자작 산액을 거는 것을 목표로 삼고, 그 정신이 무사도처럼 목숨을 거는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다.
  • 타임 스쿠프 헌터 〈“산액” 두뇌 배틀〉 편 (NHK, 2010년 4월 19일 방송)
  • 나카가와 마코토(각본), 카제리 켄(작화), 《와산에 사랑에 빠진 소녀》, 쇼가쿠칸 빅 코믹, 2013년 2월 4일, ISBN 978-4-09-184868-0
  • 카네시게 아키라, 《산학 무예장》, 아사히 신문사, 1997년 9월

참조

[1] arXiv Morikawa's Unsolved Problem 2020-07-25
[2] 간행물 An Unsolved Problem in the Yamaguchi's Travell Diary http://www.sangaku-j[...] 2018
[3] 뉴스 算額の問題に挑戦して見ませんか? https://nikkeibook.c[...] 日経サイエンス 1998-07
[4] 문서 深川(1998)
[5] 문서 ただし、この算額は1975年の火事で表面が焼けてしまい判読不能になってしまっている。ついで[[北野天満宮]](京都市)の[[貞享]]3年(1686年)のものが古いとされる。
[6] 간행물 算額を奉納すると言って高崎の八幡宮に行った 2008-12
[7] 서적 和算 江戸の数学文化 중앙공론신사
[8] 웹사이트 京都・北野天満宮で外国人研究員が算額奉納 英語と日本語で初 https://www.sankei.c[...] 産経WEST 2018-11-17
[9] 문서 22面のうちの最古のものは享和3年([[1801年]])丸山良玄門人大西佐兵衛義全奉納のもので、最新のものは昭和12年([[1937年]])村上先生門人中村正教奉納のものである。
[10] 서적 岡潔対談集 朝日新聞출판
[11] 서적 미しき魔方陣 久留島義太見参! 小学館
[12] 문서 八坂神社の元禄4年の算額(重要文化財)は、天和3年(1683年)に奉納された[[御香宮神社]](京都市[[伏見区]])算額の解答額となっている。
[13] 웹사이트 渋谷金王神社の算額内容 群馬県和算研究会 http://www.ene1.me.g[...]
[14] 웹사이트 有形民俗文化財 豊中市「服部天神宮算額」 http://www.city.toyo[...] 豊中市
[15] 웹사이트 有形民俗文化財 豊中市「服部天神宮算額」 http://www.city.toyo[...] 豊中市
[16] 웹사이트 福井県の文化財「鶴亀松竹の算額」 http://info.pref.fuk[...] 福井県
[17] 웹사이트 石部神社の算額 https://www.city.sab[...] 鯖江市
[18] 웹사이트 中野神社の算額 https://www.city.sab[...] 鯖江市
[19] 웹사이트 算額 https://www.city.sab[...] 鯖江市
[20] 웹사이트 算額 https://www.city.sab[...] 鯖江市
[21] 웹사이트 算額 https://www.city.sab[...] 鯖江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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