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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참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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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자유시에서 대한독립군단이 소련 적군과 공산주의 성향의 한인 무장 세력에게 공격받아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러시아 내전 중 일본군의 백군 지원과 한인 무장 세력 탄압에 맞서, 독립군들은 공산주의 세력과 협력하여 일본군을 격퇴했으나, 이후 독립군 내부의 노선 갈등과 코민테른의 지원 경쟁으로 인해 대한독립군단이 자유시에 집결했다. 자유시에서 대한독립군단과 공산주의 세력 간의 통수권 다툼이 격화되었고, 소련 적군은 독립군의 무장 해제를 시도하며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되었고, 독립운동 세력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독립운동의 이념 갈등과 비극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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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참변 - [전쟁]에 관한 문서
사건 개요
사건명자유시 참변
관련 사건러시아 내전, 한국 독립운동
시기1921년 6월 28일
장소극동 공화국 스보보드니, 아무르 주
결과소련 및 극동 공화국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 1극동 공화국 (소비에트 러시아)
고려혁명군정의회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교전 2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지휘관
지휘관 1네스토르 칼란다리쉬빌리, 오하묵
지휘관 2홍범도, 박일리야
병력 규모
병력 1소련군 제2군단: 10,000명
자유시 경비대 29연대
고려혁명군
자유대대
병력 2대한 독립군단: 3,500명
대한독립군
사할린 의용군
관련 명칭
한국어 명칭자유시 참변 (자유시 참변), 자유시 사변(自由市事變), 흑하사변(黑河事變)
일본어 명칭自由市惨変 (じゆうしさんへん, Jiyūshi sanpen), チャユシチャムビョン (Chayushichamubyon)

2. 배경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불타서 내려앉은 니콜라옙스크 일본영사관, 1920년 6월


당시 러시아러시아 내전 중이었다. 레닌의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적군(赤軍)과 군주제, 자본주의, 반공산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한 백군(白軍)이 대립하고 있었다.[10] 그래서 러시아 내전을 적백내전이라고도 부른다.

시베리아에서도 적군과 백군의 대립은 이어졌다. 또한 러시아 흑룡주정부가 독립하여 극동공화국이 되었고, 이 공화국은 볼셰비키 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 외국군의 무력간섭이 겹치면서 연해주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백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백군을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1918년 4월에 일본은 시베리아로 출병했고 백군을 지원하면서 연해주에서 독립무장투쟁을 하는 공산주의 계열 한인무장부대를 소탕하고자 했다.[2]

이에 공산주의 독립군은 적군(赤軍)에 협조했다. 1920년 3월 12일에는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과 적군이 연합하여 일본군과 백군을 격퇴시켰다.[11][12] 일본군은 1920년 4월 4~5일 야간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모든 볼셰비키 기관과 신한촌을 비롯한 한인 밀집지대를 습격했다. (이 사건을 신한촌 사건이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볼셰비키 기관과 적군이 일본군을 피해 북방으로 후퇴함에 따라 연해주의 한인 무장부대도 근거지를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볼셰비키 세력이 강성한 극동공화국의 자유시로 향했다. 그곳에는 극동공화국 소속 오하묵의 자유대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한인무장부대들은 자유시로 속속 집결하기 시작했다. 연해주 한인무장부대는 이만군대, 다반군대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만군대는 사령관 김표돌, 부사령관 박개서와 김덕보로 이루어져 있었고, 다반군대는 사령관 최니콜라이가 이끌고 있었다.

독립군에 대한 대규모 토벌을 감행한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만주에 있던 독립군 부대들은 항일 근거지를 구축하고자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되었다. 1921년 3월, 부대 이동 및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 많은 부대가 만주에 잔류했고, 일부는 연해주로 이동했다. 러시아로 이동한 독립 투사들은 소비에트 적군 출신의 한인 부대 지휘관들로부터 군사 훈련을 받았고, 무기 획득을 위해 소련 정부와 군사 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일본은 강력한 외교 공세를 펼치며 소련 정부에 독립군 무장을 해제할 것을 요구했다.[1]

2. 1. 러시아 내전과 연해주 한인 사회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는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적군(赤軍)과 반혁명 세력인 백군(白軍)이 대립하는 러시아 내전 상황에 놓였다.[10] 시베리아와 연해주 지역은 이들의 격전지였으며,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과 외국의 군사 개입까지 겹쳐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2]

연해주 지역은 오래전부터 한인들이 이주하여 형성된 한인 사회가 존재했다. 이들은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이후,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 역할을 하였다. 특히 신한촌을 중심으로 많은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은 백군을 지원하며 1918년 4월 시베리아에 출병했고, 연해주 지역의 한인 무장 독립군을 탄압했다.[2] 1920년 3월 12일에는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과 적군이 연합하여 일본군과 백군을 격퇴시키기도 하였으나,[11][12] 4월 4~5일 야간에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비롯한 한인 밀집지대를 습격하여 한인 무장부대는 근거지를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이 사건을 신한촌 사건이라고 한다.) 이에 한인 독립군은 적군과 협력하여 일본군과 백군에 맞섰다.

만주에 있던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을 피해 항일 근거지를 구축하고자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되었다. 1921년 3월, 부대 이동 및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 많은 부대가 만주에 잔류했고, 일부는 연해주로 이동했다.[1] 러시아로 이동한 독립 투사들은 소비에트 적군 출신의 한인 부대 지휘관들로부터 군사 훈련을 받았고, 무기 획득을 위해 소련 정부와 군사 협정을 체결했다.

이들은 볼셰비키 세력이 강성한 극동공화국의 자유시로 향했다. 그곳에는 극동공화국 소속 오하묵의 자유대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한인무장부대들은 자유시로 속속 집결하기 시작했다. 연해주 한인무장부대는 이만군대, 다반군대 등이 대표적이었다.

2. 2. 독립군의 분열과 통합 시도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한 일본군은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작전을 단행했지만 성과가 없자 민간인과 군인을 구별하지 않고 한국인 수만 명을 학살하는 간도 참변을 일으켰다.[9] 이로써 서간도, 북간도 등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등의 간도 한인무장부대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독립군 부대들은 북쪽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 지역인 흑룡강성 밀산시(密山市)에 모였다.[9]

2014년 중국 흑룡강성의 밀산(密山)


이곳에 모인 독립군 10개 부대를 통합 및 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군단에 통합된 조직은 북로군정서, 대한신민회, 대한국민회, 혼춘대한국민회, 군무도독부, 의군부, 혈성단, 야단, 대한정의군정사 등이다.[13][14]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는 서일(徐一), 부총재는 홍범도(洪範圖)였다.[15] 군단 휘하에 여단을 두고, 여단 아래에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가 편성되어 있었으며, 총병력은 3,500여 명으로 대규모 병력이 되었다.[15] 그러자 역설적으로 대한독립군단은 대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장과 피복, 군량 등 여러 지원이 더욱 절실해졌다.[9]

코민테른은 약소민족의 독립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었다.[3] 지원이 필요했던 대한독립군단은 흑룡강주 밀산에서 겨울을 나고는 러시아-만주 국경을 넘어 시베리아의 자유시로 향했다. 이때 북로군정서의 김좌진은 자유시 합류를 반대했다.[9]

2012년 달네레첸스크(Dalnerechensk) 시청의 모습


볼셰비키의 적군은 대한독립군단을 흡수하여 백군과의 내전에 투입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대한독립군단은 지원이 절실했기에 계속 진군했다. 연해주와 흑룡강 일대에서 한인무장부대로 활동하던 문창범, 한창해의 도움으로 대한독립군단은 만주-러시아 국경 하천인 우수리강을 넘어 안전지대인 연해주 이만(Iman : 현재 러시아의 달네레첸스크(Dalnerechensk))에 집결하였다.[9]

극동공화국 소속 자유대대의 오하묵은 자유시에 대한독립군단을 위한 군대주둔지를 마련할테니 이곳으로 집결하기를 권했다. 이에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대한독립군단 소속 한인무장부대들은 자유시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대한독립군단이 자유시에 집결한 궁극적 목적은, 분산돼 있던 독립군 부대들이 힘을 합쳐 단일한 조직 아래 대일항전을 전개하려는 것이었고, 적군(赤軍)을 도와 일본군을 몰아냄으로써 자치를 보장받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독립군에 대한 대규모 토벌을 감행한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만주에 있던 독립군 부대들은 항일 근거지를 구축하고자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되었다.[1] 1921년 3월, 부대 이동 및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 많은 부대가 만주에 잔류했고, 일부는 연해주로 이동했다. 러시아로 이동한 독립 투사들은 소비에트 적군 출신의 한인 부대 지휘관들로부터 군사 훈련을 받았고, 무기 획득을 위해 소련 정부와 군사 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일본은 강력한 외교 공세를 펼치며 소련 정부에 독립군 무장을 해제할 것을 요구했다.[1]

당시 러시아는 러시아 내전 중이었다. 레닌의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적군과, 군주주의자, 자본주의자, 반공주의자 세력들을 중심으로 한 백군이 대립했다. 시베리아에서는 적군과 백군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게다가 극동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와 더불어 체코 군단의 반란과 외국의 군사 개입이 겹쳐 연해주에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백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일본은 1918년 4월, 백군 지원을 명분으로 시베리아에 군대를 파견하여, 백군을 지원하는 동시에 연해주에서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공산주의 계열 한인 무장 부대를 제거하려 했다.[2]

이에 공산주의 계열 독립군은 적군과 협력했다. 1920년 3월 12일,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서 독립군과 적군은 연합하여 일본군과 백군을 격퇴했다. 1920년 4월 4일에서 5일 밤,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포함한 모든 볼셰비키 조직과 한인 거주 지역을 공격했다. 이 사건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볼셰비키 조직과 적군은 일본군을 피해 북쪽으로 후퇴했고, 연해주에 있던 한인 무장 부대들 또한 근거지를 이동해야 했다.

그들은 볼셰비키 세력이 강했던 극동 공화국의 자유시로 향했다. 오하묵의 자유 대대가 그곳에 있었다. 공산주의 계열 한인 무장 부대들은 자유시에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2. 3. 연해주 한인 무장 세력의 갈등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블라디미르 레닌의 볼셰비키는 코민테른을 결성했고, 이에 영향을 받은 한인들은 크게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나뉘어 공산당 조직을 결성했다.[1] 이들은 코민테른의 지원과 한인 무장 세력의 통수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볼셰비키는 양측 모두에게 애매한 태도를 보였기에, 이들은 서로 대립하며 코민테른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으려 했다.[1]

1920년 3월 12일,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서 독립군과 적군은 연합하여 일본군과 백군을 격퇴했다.[2] 그러나 1920년 4월 4일에서 5일 밤, 일본군은 신한촌 사건을 일으켜 블라디보스토크의 볼셰비키 조직과 한인 거주 지역을 공격했다.[2] 이에 연해주에 있던 한인 무장 부대들은 근거지를 이동해야 했고, 볼셰비키 세력이 강했던 극동 공화국의 자유시로 모여들기 시작했다.[2]

1918년 이르쿠츠크 시가지


자유시에 집결한 무장 독립운동 단체는 주로 민족주의 성향의 대한독립군단과 연해주 및 시베리아의 공산주의 무장 단체였다. 코민테른은 대한 독립군단을 지원했기에, 공산주의 계열의 한인 무장 부대가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1921년 3월 말 자유시에 집결한 사회주의 무장 부대는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이었고, 이들은 러시아 공산당 극동 공화국의 지원을 받았다.[4] 코민테른 동방 비서는 이르쿠츠크파를 지원하여 양측은 러시아 내 한인 무장 부대의 지휘권을 놓고 충돌했다.[4]

박일야의 니항대는 고려공산당 상하이파를, 오하묵의 자유대대는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를 대표했다.[4] 상하이파는 상하이 임시 정부를, 이르쿠츠크파는 연해주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다.[4] 자유시는 극동 공화국에 속해 있었고, 자유대대는 극동 공화국의 부대였으므로 한인 무장 부대는 이르쿠츠크파의 자유대대에 편입되어야 했다. 그러나 박일야는 자유대대 편입을 거부하고 이 사실을 극동 공화국 한인부에 보고했다.[4]

당시 상하이파는 극동 공화국의 한인 부분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들은 한인 국민회나 자유대대와 협의 없이 박창은과 그리고리예프를 일방적으로 파견하여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4] 박일야는 니항군을 사할린 의용군으로 재편하고 모든 한인 무장 부대를 그 휘하에 두려고 시도했다.[4] 그러나 1921년 2월 중순 자유시에 도착한 박창은 일행은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사령관에서 물러났다.[4] 한인 인민부는 그리고리예프를 연대장으로, 박일야를 군사행정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4] 박일야는 자유대대에 편입되었던 니항군과 다반군을 마사노프로 이동시켰고, 간도 출신의 독립 투사들을 주축으로 한 대한 독립군단 역시 자유시에서 강제로 축출했다.[4] 자유대대는 끝까지 이에 불응하여 니항군과 다반군에 의해 장교들이 체포되고 무장 해제되었고, 극동 공화국 현지 수비대에 강제 편입되었다.[4] 이로써 상하이파와 박일야가 자유시에 집결한 대한 독립군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4]

3. 자유시로의 이동과 통수권 갈등

1920년대 초 극동공화국의 영토


네스토르 알렉산드로비치 칼란다리쉬빌리(Каландаришвили, Нестор Александрович)의 사진


자유시에 모인 한인 무장 군대는 크게 민족주의 계열의 대한독립군단과 공산주의 계열의 연해주 및 시베리아 한인 무장 세력이었다.[16] 공산주의 계열의 무장 세력은 2개로 나누어져 한인 연합부대의 통수권을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하고 있었다.

고려공산당 상하이파는 일리아 박의 이항군대로 대표되고,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는 오하묵의 자유대대로 대표됐다. 우리나라의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기 전에는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서울의 한성정부, 상하이의 임시정부까지 총 3개가 있었다. 상하이파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지했고, 이르쿠츠크파는 연해주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다.

자유시는 극동공화국 땅이었고, 자유대대는 극동공화국 소속 부대였기에 한인 무장 부대는 이르쿠츠크파의 자유대대에 편입이 되어야만 했다. 이때 상하이파 박일리아의 이항군대가 자유대대 편입을 거부하고 이를 극동공화국 한인부에 알렸다. 당시 극동공화국 한인부는 상하이파 인물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한국민의회나 자유대대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박창은, 그리고 리예프를 파견하여 극동공화국과의 협의하에 주도권을 차지하려 하였다. 일리아 박의 이항군대를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로 만들어 모든 한인 무장부대를 이 밑에 두려 했다.

하지만 1921년 2월 중순 자유시에 도착한 박창은 일행은 총사령관으로서의 지휘권을 행사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총사령관직을 사임했고, 한인부는 그리고리예프를 연대장, 일리아 박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두 사람은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했다. 일리아 박은 자유대대에 편입되었던 이항군대와 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간도에서 온 독립군이 주축이던 대한독립군단도 자유시에서 강제로 내보냈다. 이때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하여 장교들이 체포되었고, 이항군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되었다. 자유대대는 극동공화국의 지방수비대로 격하되어 강제로 편입되었다. 이렇게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독립군 부대에 대한 통수권은 상해파와 일리아 박이 가지게 되었다.

그러자 자유대대를 이끌었던 오하묵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이르쿠츠크에 있는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 동양비서부에 가서 한인무장부대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코민테른은 극동공화국을 조종하고 있었기에 충분한 힘이 있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이르쿠츠크파와 오하묵의 손을 들어주었다. 동양비서부는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네스토르 알렉산드로비치 칼란다리쉬빌리, 부사령관에는 오하묵, 군정위원으로는 김하석, 채성룡을 임명하였다.[9]

1921년 6월 2일 소련적군은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는데, 이는 우리 독립군이 소련 공산당을 위하여 싸워달라는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소련 공산당을 위해 싸우라는 요구에 독립군은 항의하였으나 그들은 이미 독립군을 2중-3중으로 포위하여 무조건 수락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 때 소련군 배후에서 고려공산당(이르크츠크파)이 일을 꾸미고 있었으며, 김좌진은 소련 공산당의 이상한 눈치를 간파하고 극비리에 부하를 거느리고 아무르강(흑룡강)을 건너 중국 만주지방으로 돌아왔다.

일리아 박 등은 이에 맞서 한인군사위원회(전한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극동공화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한 네스토르 알렉산드로비치 칼란다리쉬빌리는 7일 자유시에 있는 전부대를 소집하여 자신이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임을 선포했다. 8일 일리아 박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로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일리아 박은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대한독립군의 홍범도와 안무의 군대는 명령에 따라 자유시로 들어갔다. 그러나 일리아 박은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에 계속 반항했다.[17]

1921년 6월 27일 오후 11시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의 연대장 그리고리예프까지도 네스토르 알렉산드로비치 칼란다리쉬빌리에게 투항했다. 네스토르 알렉산드로비치 칼란다리쉬빌리는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에는 상하이파 뿐만 아니라 간도에서 온 대한독립군 부대도 함께 있었다.[9]

3. 1. 대한독립군단의 자유시 집결

1920년 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에게 참패한 일본은 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한국 독립군을 토벌하는 대규모 작전을 개시했다.[1] 일본군은 간도 지역을 침략하여 독립군에 큰 타격을 입혔고, 민간인을 학살하는 보복 작전을 감행했다.[1] 상황이 위험해지자, 서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지청천의 대한 독립군,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등 여러 독립군 부대들은 미산(彌山)에 집결했다.[1]

당시 소련은 러시아 내전으로 볼셰비키가 이끄는 붉은 군대와 반혁명 세력인 백군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3] 일본군은 백군 지원을 명분으로 시베리아에 병력을 파견했고, 반일 감정이 커지면서 독립군은 붉은 군대에 합류하여 붉은 군대가 후퇴하면서 연해주로 이동했다.[3] 연해주에 있던 한국 무장 세력들은 볼셰비키 세력이 강화되면서 일본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자유시에 집결했다.[3]

코민테른은 약소민족의 독립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었고, 지원이 필요했던 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만주 국경을 넘어 시베리아의 자유시로 향했다.[9] 연해주와 흑룡강 일대에서 한인무장부대로 활동하던 문창범, 한창해의 도움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우수리강을 넘어 연해주 이만(현재 러시아의 달네레첸스크(Dalnerechensk))에 집결하였다.[9]

극동공화국 소속 자유대대의 오하묵은 자유시에 대한독립군단을 위한 군대주둔지를 마련할테니 이곳으로 집결하기를 권했다.[9] 이에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대한독립군단 소속 한인무장부대들은 자유시에 집결하기 시작했다.[9] 자유시에 모인 한인무장부대는 간도지역의 독립군부대가 주축인 대한독립군단은 최진동 등의 총군부, 안무 등의 국민회군, 홍범도 등의 독립군, 서일 등의 서로군정서가 있었다.[9] 러시아 지역의 연해주 한인무장부대들로는 김표돌의 이만군, 최니콜라이의 다반군, 박일리아의 이항군, 오항묵의 자유대대, 박그리골리의 독립단군 등이 있었다.[9] 대한독립군단은 분산돼 있던 독립군 부대들이 힘을 합쳐 단일한 조직 아래 대일항전을 전개하고, 적군(赤軍)을 도와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자유시에 집결했다.[9]

한편, 북로군정서의 김좌진은 공산주의자들을 믿을 수 없다며 자유시 합류를 반대하고 간도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9]

3. 2. 통수권 다툼의 격화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무장 세력은 크게 민족주의 계열의 대한독립군단과 공산주의 계열의 연해주 및 시베리아 한인 무장 세력이었다.[16] 이들은 코민테른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경쟁했다. 고려공산당 상하이파는 일리아 박의 이항군대로 대표되고,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는 오하묵의 자유대대로 대표됐다.[16] 대한민국 임시정부 통합 이전, 상하이파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이르쿠츠크파는 연해주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다.

자유시는 극동공화국 영토였고, 자유대대는 극동공화국 소속이었기에, 한인 무장 부대는 이르쿠츠크파의 자유대대에 편입되어야 했다. 그러나 일리아 박은 이를 거부하고 극동공화국 한인부에 알렸다. 당시 극동공화국 한인부는 상하이파가 장악하고 있었고, 이들은 대한국민의회나 자유대대와 협의 없이 박창은, 그리고리예프를 파견하여 주도권을 차지하려 했다. 일리아 박은 이항군대를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로 만들어 모든 한인 무장부대를 그 밑에 두려 했다.

1921년 2월 중순, 자유시에 도착한 박창은 일행은 총사령관 지휘권 행사에 실패하고 사임했다. 한인부는 그리고리예프를 연대장, 일리아 박을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일리아 박은 자유대대에 편입되었던 이항군대와 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동시키고, 대한독립군단도 자유시에서 강제로 내보냈다. 자유대대는 이에 불응하여 장교들이 체포되고 무장해제되어 극동공화국 지방수비대로 격하되었다.

오하묵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통수권 교섭을 요청했고, 동양비서부는 이르쿠츠크파를 지원했다.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네스토르 알렉산드로비치 칼란다리쉬빌리, 부사령관에 오하묵을 임명했다.[9] 일리아 박 등은 한인군사위원회(전한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극동공화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1921년 6월 6일, 네스토르 알렉산드로비치 칼란다리쉬빌리는 자유시에 도착하여 자신이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고, 일리아 박에게 군대 인솔을 명령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러나 홍범도와 안무의 군대는 명령에 따라 자유시로 들어갔다.[17] 6월27일에는 그리고리예프가 투항하였고,

칼란다리쉬빌리는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의 무장해제를 결정하였다. 여기에는 상하이파 뿐만 아니라 간도에서 온 대한독립군 부대도 함께 있었다.[9]

네스토르 칼란다리쉬빌리의 사진

4. 자유시 참변

1921년 6월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의용대/сахалинский отрядru(대한의용군)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 대장은 사할린의용대/сахалинский отрядru(대한의용군)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사할린의용대/сахалинский отрядru(대한의용군)은 무장해제 명령에 불응했고, 자유시수비대 29연대는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9]

같은 날, 오후 4시 네스토르 칼란다리쉬빌리가 이끄는 소련의 적군과 오하묵의 자유대대가 사할린의용대/сахалинский отрядru(대한의용군)와 대한독립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관총, 장갑차, 대포를 이용해 몰아부쳤다. 독립군 뒤쪽에는 강이 있어 도망가지 못해 피해를 더욱 키웠다.

4. 1. 무장 해제 요구와 충돌

1921년 6월 2일, 네스토르 칼란다리쉬빌리는 대한독립군과 사할린의용군에 무장 해제를 요구했다. 이는 독립군이 소비에트 공산당을 위해 싸우라는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이다.[9] 독립군은 소련 공산당을 위해 싸우라는 요구에 항의했지만, 소련 적군은 이미 독립군을 포위하여 무장 해제를 강요했다. 이때 이르쿠츠크 파는 소련군 뒤에서 공작을 꾸미고 있었고, 김좌진은 소련 공산당의 수상한 의도를 감지하고 극비리에 부하들과 함께 헤이룽 강을 건너 만주로 돌아갔다.[5]

6월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가 사할린의용군(대한의용군)에 접근하여 복종을 요구했으나, 사할린의용군은 무장 해제 명령에 불응했다.[9] 이에 자유시수비대 29연대는 공격 명령을 내려 무장 해제를 강행했다. 같은 날 오후 4시, 칼란다리쉬빌리가 이끄는 소련 적군과 오하묵의 자유대대가 사할린의용군(대한의용군)과 대한독립군을 공격했다.[1][2] 기관총, 장갑차, 대포를 이용한 공격에 독립군은 뒤쪽에 강이 있어 도망치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었다.

4. 2. 피해 규모

독립군의 피해 규모는 자료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피해자 측인 사할린특립의용대는 현장 사망 72명, 익사 37명, 산에서 사망 200여 명, 행방불명 250명 등 총 600여 명이 사망하고 917명이 체포되었다고 주장했다.[18] 반면 가해자 측인 고려혁명군정의회는 사망 36명, 포로 864명, 질병으로 불참 19명, 도망 30명, 행방불명 59명이라고 주장하였다.[19]

1921년 6월 28일 오후 1시, 고려 혁명 군정 의회는 극동 공화국 자유시 수비대와 무장 해제 협상을 벌였다. 그들은 장갑차, 대포, 기관총으로 무장한 극동 공화국 제2군단 병력 약 1만 명을 동원했다. 오후 4시까지 양측은 대치했고, 칼란다리쉬빌리와 오하묵이 사할린 의용군을 공격하여 후퇴시켰다. 소련 군이 이미 유리한 지점을 점령했고, 독립군 뒤에는 강이 있어 도망칠 수 없었기에,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1][2] 이어진 포위 공격은 시가전으로 번졌고, 수백 명이 사망하고 나무로 지어진 도시가 불타버렸다.[1][2]

5. 결과 및 영향

이르쿠츠파와 상하이파 간의 공산주의 권력다툼에 대한독립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은 참변이었다.[9]

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되었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서일은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두 달 후 밀산에서 자살했다. 당시 이범석, 김홍일 등 일부 독립군은 러시아 이만으로 가지 않고 만주에 남아 있었고, 김좌진은 이만까지 갔다가 만주로 돌아왔기에 병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칼란다리쉬빌리의 명령을 이행하여 자유시로 미리 들어왔던 홍범도지청천이르쿠츠크로 함께 이동하게 되었다.[20]

홍범도와 같이 이르쿠츠크로 이동한 지청천은 그곳에서 오하묵 등과 함께 고려혁명군(1921.8)을 결성하고. 같은 해 10월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4월경 소련 당국이 학교 교육방침을 문제삼아 지청천을 체포했으나, 지청천은 동년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의 대립이 극심해졌고, 코민테른이 화해와 통합을 권유했으나 실패하자, 강제로 이들을 해체시킨 후 1922년 12월 극동총국 산하 꼬르뷰로를 설치하여 한인 공산주의 세력을 통일시켰다.

자유시 참변은 고려 공산당의 이르쿠츠크 파와 상하이 파 간의 공산주의 세력 다툼으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은 사건이었다. 사상자 규모는 자료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한 자료에는 사망 36명, 포로 864명, 실종 59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다른 자료에는 사망 272명, 익사 31명, 실종 250명, 포로 917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장 해제된 독립군들은 자유시를 탈출하여 만주로 흩어졌고, 포로들은 볼셰비키 혁명군에 편입되었다. 또한, 칼란다리쉬빌리의 명령에 따라 지청천홍범도와 함께 이르쿠츠크로 이동했다. 그들은 1921년 8월 오하묵 등과 함께 고려 혁명군을 결성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고려 혁명 군관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1922년 4월경, 소련 당국은 학교의 교육 방침에 의문을 제기한 지청천을 체포했지만, 임시 정부의 노력으로 그해 7월에 석방되었다.[2]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독립군은 와해되었고, 대한독립군을 조직한 서일은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두 달 뒤 미산에서 자결했다. 당시 이범석, 김홍일 등 일부 독립군은 러시아 이만으로 가지 않고 만주에 남았고, 김좌진은 이만에 갔다가 만주로 돌아와 부대를 보존할 수 있었다.[2]

이후, 한국 공산당의 상하이 파와 고려 공산당의 이르쿠츠크 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코민테른이 화해와 통일을 권고했지만 실패하자 강제로 해산되었다. 1922년 12월, 극동 총국의 꼬르뷰로가 설치되어 한국 공산주의 세력을 통합하려 했다.[2]

5. 1. 독립운동 세력의 와해와 재편

자유시 참변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되었고, 많은 독립군이 희생되었다.[9] 이 사건은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 세력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켰다.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서일은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두 달 후 밀산에서 자살했다.[2] 당시 이범석, 김홍일 등 일부 독립군은 러시아 이만으로 가지 않고 만주에 남아 있었고, 김좌진은 이만까지 갔다가 만주로 돌아왔기에 병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2]

홍범도와 같이 이르쿠츠크로 이동한 지청천은 그곳에서 오하묵 등과 함께 고려혁명군(1921.8)을 결성하고. 같은 해 10월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20] 1922년 4월경 소련 당국이 학교 교육방침을 문제삼아 지청천을 체포했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동년 7월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2]

이후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의 대립이 극심해졌고, 코민테른이 화해와 통합을 권유했으나 실패하자, 강제로 이들을 해체시킨 후 1922년 12월 극동총국 산하 꼬르뷰로를 설치하여 한인 공산주의 세력을 통일시켰다.[2]

살아남은 독립군들은 만주와 연해주 각지로 흩어져 재기를 도모했다. 일부는 만주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이어갔고, 일부는 소련에 남아 고려혁명군 등에 참여했다.

1922년 11월 22일, 소련극동 공화국을 합병하여 그곳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 심지어는 그곳에 거주하는 한인들까지 소련 시민으로 간주했다. 1928년에서 1932년 사이에 소련 극동 지역에서 반한 및 반중 폭력이 증가하여 5만 명의 한인 이민자들이 만주와 한국으로 도망쳤다. 1937년, 스탈린의 소련 한인 강제 이주가 시행되었다. 거의 모든 소련의 한인 인구가 강제로 카자흐스탄으로 이주되었다.

5. 2.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과 통합 시도

볼셰비키는 고려공산당의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아, 양측은 코민테른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대립했다.[9] 자유시 참변은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 간의 공산주의 권력 다툼으로 대한독립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은 사건이었다.[9] 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되었고, 서일은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2]

이후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립이 극심해졌고, 코민테른이 화해와 통합을 권유했으나 실패했다.[2] 코민테른은 1922년 12월 극동총국 산하 꼬르뷰로를 설치하여 한인 공산주의 세력을 통합하려 했다.[2]

5. 3.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관계 악화

이르쿠츠파와 상하이파 간의 공산주의 권력 다툼에 대한독립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은 자유시 참변은[9]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해주 지역 한인 사회, 특히 공산주의 세력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이 와해되었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서일은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두 달 후 밀산에서 자살했다.[20] 임시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공산주의 세력과의 협력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을 갖게 되었다.

이후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의 대립이 극심해졌고, 코민테른이 화해와 통합을 권유했으나 실패하자, 강제로 이들을 해체시킨 후 1922년 12월 극동총국 산하 꼬르뷰로를 설치하여 한인 공산주의 세력을 통일시켰다.

6. 평가 및 역사적 의미

자유시 참변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빚어진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된다.[1] 이 사건은 독립운동 세력 간의 이념 갈등과 주도권 다툼이 초래한 비극을 보여주며, 독립운동의 험난한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여겨진다. 특히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이동휘가 가담하고 있는 적기단도 적대시하였다.[1]

자유시 참변은 대한 독립군이 러시아 붉은 군대와 친러시아 저항 세력에 포위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1] 이 사건의 배경에는 일본군과 러시아 볼셰비키 공산당 간의 협상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주요 내용은 대한 독립군의 해산을 요구하는 것이었다.[1] 차르 체제 붕괴로 인한 혼란을 틈타 시베리아 연해주에 주둔한 일본군을 협상을 통해 철수시키려는 볼셰비키 공산당은 일본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고, 대한 독립군을 볼셰비키에 흡수함으로써 일본과의 마찰을 피할 수 있었다.[1]

더불어 독립군 내부에서는 한국 공산당의 이르쿠츠크 파와 상하이 파 간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복잡한 배경을 가진 사건으로 평가된다.[1] 상하이 파와 이르쿠츠크 파 간의 원칙 없는 파벌 싸움은 초기 공산주의 운동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독립 운동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1]

6. 1. 독립운동의 비극적 사건

자유시 참변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빚어진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된다.[1] 이 사건은 독립운동 세력 간의 이념 갈등과 주도권 다툼이 초래한 비극을 보여주며, 독립운동의 험난한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여겨진다. 특히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이동휘가 가담하고 있는 적기단도 적대시하였다.[1]

자유시 참변은 대한 독립군이 러시아 붉은 군대와 친러시아 저항 세력에 포위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1] 이 사건의 배경에는 일본군과 러시아 볼셰비키 공산당 간의 협상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주요 내용은 대한 독립군의 해산을 요구하는 것이었다.[1] 차르 체제 붕괴로 인한 혼란을 틈타 시베리아 연해주에 주둔한 일본군을 협상을 통해 철수시키려는 볼셰비키 공산당은 일본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고, 대한 독립군을 볼셰비키에 흡수함으로써 일본과의 마찰을 피할 수 있었다.[1]

더불어 독립군 내부에서는 한국 공산당의 이르쿠츠크 파와 상하이 파 간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복잡한 배경을 가진 사건으로 평가된다.[1] 상하이 파와 이르쿠츠크 파 간의 원칙 없는 파벌 싸움은 초기 공산주의 운동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독립 운동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1]

6. 2. 역사 교과서의 서술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자유시 참변을 "적색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적색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적색군은 내전에 승리한 후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야기하였다."고 설명하였다.[21]

6. 3. 한-러 관계의 고려사항

자유시 참변으로 민족주의 독립군 대부분은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공산주의에 등을 돌렸다. 특히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이동휘가 가담하고 있는 적기단도 적대시하였다. 이는 독립운동이 내외부적으로 험난한 과정을 거쳤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7. 연표


  •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발생하여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고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였다.
  • 1918년 7월: 일본군이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시베리아로 출동하였으나, 붉은 군대와 교전하던 미국체코슬로바키아를 비롯한 연합군은 철수하였다.
  •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다.
  •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이 일어났다.
  • 1920년 3월: 니콜라옙스크 사건이 발생하였고, 러시아에서 철수하던 일본군은 남하하는 과정에서 만주에 있는 조선 항일 무장 단체들을 토벌하기로 결정하였다.
  •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최진동 장군이 이끄는 북로독군부가 중국 지린성 허룽현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과 교전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 1920년 10월 21일: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군과 최진동,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연합하여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 1920년 10월 ~ 1921년 4월: 일본군은 잇따른 대패에 대한 보복으로 만주 지역의 한국 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고자 간도참변을 일으켰다.
  • 1921년 1월: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인해 독립군은 전략상 러시아령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이동 중 밀산에서 독립군을 통합 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창설하였다. 병력은 약 3,500명 규모였다. 대한독립군단러시아 연해주 자유시로 진입하여 분산된 모든 독립군을 집결시켰다.
  • 1921년 1월~6월: 대한독립군단 내에서 군권을 장악하기 위한 권력 투쟁이 발생하였다.
  • 1921년 6월 28일: 붉은 군대가 대한독립군단 내 소수파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대한독립군단을 공격하면서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독립군 다수가 사살되거나 부상당하고, 수용소로 끌려갔으며, 탈출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로 인해 연해주 지방의 조선 독립군 세력은 와해되었다.

참조

[1] 뉴스 자유시사변 https://encykorea.ak[...]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23-09-15
[2] 웹사이트 자유시 참변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3-09-15
[3] 웹사이트 자유시 참변, , 홍범도, . 자유시사 변 (티블T불화), 1924, 러시안 자유시오 https://adipo.tistor[...] Kakao Corps 2023-09-15
[4] 뉴스 자유시사변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3-09-16
[5] 뉴스 고려혁명군정의회 http://www.okpedia.k[...] Encyclopedia of Overseas Korean Culture 2023-09-20
[6] 웹사이트 자유시참변 http://kr.dictionary[...]
[7] 웹사이트 자유시사변 https://archive.is/y[...]
[8] 웹사이트 흑하사변 https://archive.is/4[...]
[9] 뉴스 자유시사변 https://encykorea.ak[...] encykorea.aks.ac.kr/ 2023-09-15
[10] 웹인용 자유시 참변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3-09-15
[11] 서적 The destruction of Nikolayevks-on-Amur: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http://journals.camb[...] Cambridge University Press
[12] 웹사이트 The Free City (Amur River – Hukgang) Incident The left-right confrontation in Korea – Its origin http://www.asianrese[...] 2003-11-13
[13] 웹인용 야단(野團) https://encykorea.ak[...] 한국학중앙연구원 1996
[14] 웹인용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https://encykorea.ak[...] 한국학중앙연구원 1995
[15] 웹인용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https://encykorea.ak[...] 한국학중앙연구원 2020-04-04
[16] 뉴스 자유시사변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3-09-16
[17] 뉴스 고려혁명군정의회 http://www.okpedia.k[...] Encyclopedia of Overseas Korean Culture 2023-09-20
[18] 웹인용 시베리아 내전과 한인 사회 https://db.history.g[...] 국사편찬위원회 2023-09-17
[19] 웹인용 시베리아 내전과 한인 사회 https://db.history.g[...] 국사편찬위원회 2023-09-17
[20] 뉴스 100년전 그날, '자유시'의 급수탑은 피로 물들었다 http://www.newdaily.[...] 2019-02-03
[21] 문서 국사편찬위원회, 고등학교 국사(하), 대한교과서 주식회사, 157면, 위 조한나 논문에서 재인용.
[22] 뉴스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의 '쓸쓸한' 말년 https://n.news.naver[...] 2008-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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