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옥동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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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주 옥동서원은 황희를 배향하는 서원이다. 1518년 창건, 1789년 사액되었으며 1871년 훼철되지 않았다. 17~18세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며, 역사, 문화, 경관 요소가 잘 보존되어 인문·역사적, 건축적,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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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희 - 황수신
황수신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음서 출신임에도 세조의 측근으로 발탁되어 도승지,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며, 세조 반정에 참여하여 공신이 되고 『경국대전』 편찬 및 불경 언해에도 기여했다.
상주 옥동서원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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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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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상주 옥동서원 |
로마자 표기 | Sangju Okdongseowon |
영어 표기 | Okdongseowon Confucian Academy in Sangju |
유형 | 사적 |
지정 번호 | 532 |
지정일 | 2015년 11월 10일 |
주소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546 |
면적 | 4,545m² (문화재구역) |
필지 수 | 1필지 |
추가 정보 | |
기념물 지정 (해제) | 지정: 1984년 12월 19일 해제: 2015년 11월 10일 |
문화재청 ID | 13,05320000,37 |
깨진 링크 | 관보 링크 |
2. 역사
1518년(중종 13년) 황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백화서원'으로 처음 건립되었으며, 1715년(숙종 41년) 경덕사와 강당을 짓고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다. 1789년(정조 13년)에는 나라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옥동’이라는 이름을 받았다.[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1]
경내에는 사당과 강당 등 주요 건물 외에 제물을 마련하는 전사청, 서원 관리인이 거처하는 고사, 화직사, 묘직사가 있다. 사당인 경덕사는 황희를 중심으로 좌우에 전식·황효헌·황맹헌·황뉴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강당은 2층 형식의 기와 건물로 교육 장소와 유림의 회합 장소로 사용하였다.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회보문’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위층은 난간을 두르고 중앙에는 마루를 두었다. 남쪽은 ‘진밀료’, 북쪽은 ‘윤택료’, 마루에는 ‘청월루’라는 현판이 각각 걸려 있다.
2. 1. 창건과 이전
황희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태종과 세종대에 걸쳐 육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20여 년 동안 의정부 최고 관직인 영의정 부사로서 왕을 보좌하였다. 학문이 깊고 성품이 어질며 청렴하여 조선 왕조를 통틀어 가장 이름 높은 재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상주 옥동서원은 황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1518년(중종 13년) '백화서원'으로 처음 건립되었으며, 1715년(숙종 41년) 경덕사와 강당을 짓고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다.[1]
2. 2. 사액과 훼철
황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옥동서원은 중종 13년(1518) ‘백화서원’으로 처음 건립되었다. 숙종 41년(1715) 경덕사와 강당을 짓고 현재 위치로 옮겼으며, 정조 13년(1789) 나라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옥동’이라는 이름을 받았다.[1]황희는 태종(재위 1400∼1418)과 세종(재위 1418∼1450)대에 걸쳐 육조 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였고, 20여 년 동안 의정부 최고 관직인 영의정 부사로서 왕을 보좌하였다. 학문에 깊고 성품이 어질며 청렴하여 조선 왕조를 통틀어 가장 이름 높은 재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1]
옥동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1]
2. 3. 현재
현재는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해마다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1]3. 건축
상주 옥동서원은 조선 전기 문신 황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1518년(중종 13년) '백화서원'으로 처음 건립되었으며, 1715년(숙종 41년) 경덕사와 강당을 짓고 현재 위치로 옮겼다. 1789년(정조 13년) 나라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옥동'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1]
3. 1. 주요 건물
경내에는 사당과 강당 등 주요 건물 외에 제물을 마련하는 전사청, 서원 관리인이 거처하는 고사, 화직사, 묘직사 등이 있다.[1]사당인 경덕사는 황희를 중심으로 좌우에 전식, 황효헌, 황맹헌, 황뉴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1] 경덕사는 가운데 마루를 구성하고 양 옆으로 온돌방을 배치하였다.[1] 강당은 2층 형식으로 된 기와 건물로 교육 장소와 유림의 회합 장소로 사용하였다.[1] 강당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회보문’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위층은 난간을 두르고 중앙에는 마루를 두었다.[1] 강당 남쪽은 ‘진밀료’, 북쪽은 ‘윤택료’, 마루에는 ‘청월루’라는 현판이 각각 걸려 있다.[1]
4. 배향 인물
상주 옥동서원에는 황희, 황효헌, 전식, 황뉴가 배향되어 있다.
4. 1. 황희
'''황희'''(黃喜, 1363년 ~ 1452년)는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정치가이다. 조선의 영의정을 지냈으며, 청백리의 표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본관은 장수,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이다.황희는 개성에서 태어나 고려 말에 관직에 진출하였으나, 조선 건국 후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의 간곡한 요청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섰다. 세종 시대에 이르러서는 영의정에 올라 18년간 재임하면서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황희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는 데 힘썼다.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구휼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며, 억울한 송사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4군 6진 개척에 반대하여 국방력 낭비를 막고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자 하였다.
황희는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실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지 않았으며, 항상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으로 정사에 임하였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황희의 사상은 실용주의와 애민 정신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형식적인 명분보다는 실질적인 이익을 추구하였으며, 항상 백성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정책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조선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후대의 많은 정치인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더불어민주당은 황희의 개혁 정치와 애민 정신을 높이 평가하며,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국민을 위한 정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4. 2. 황효헌, 전식, 황뉴
'''황효헌'''(黃孝獻|황효헌hanja)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상주 황씨이다. 황희의 손자이자 황치신의 아들이다. 음보로 출사하여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하고 1453년(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성삼문 등의 사육신 사건이 발생하자 그들의 처벌을 주장하였다.[1] 이후 경상도관찰사, 한성부우윤 등을 지냈다.[1]'''전식'''(田植)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담양(潭陽)이다. 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2]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2] 경상도병마절도사,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황뉴'''(黃紐|황뉴hanja)는 조선 전기의 인물로, 본관은 상주 황씨이다. 황희의 증손자이자 황사간의 아들이다. 1480년 식년시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사헌부 장령에 이르렀다.
5. 문화재적 가치
황희를 유일하게 배향하는 서원으로 1518년 횡당으로 창건되어 1789년에 사액을 받았다.[2]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았으며, 17~18세기 서원 건축에서 나타나는 강학 쇠퇴와 향사 강화의 배치와 특징이 잘 남아 있다.[2] 역사·문화·경관 요소가 현재까지도 기록과 함께 잘 전승되어 인문·역사적, 건축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2]
5. 1. 사적 승격 사유
황희를 유일하게 모시는 서원으로, 1518년 횡당으로 처음 지어져 1789년에 사액을 받았다.[2]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1871년)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서원 중 하나이다.[2]17~18세기 서원 건축에서 나타나는 강학 공간의 쇠퇴와 제향 공간의 강화라는 특징적인 배치가 잘 남아있다.[2] 또한 역사, 문화, 경관적 요소들이 기록과 함께 현재까지 잘 전승되어 오고 있어 인문·역사적, 건축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는다.[2]
참조
[1]
간행물
도지정문화재 지정해제 고시
경상북도지사
2015-11-23
[2]
간행물
「상주 옥동서원」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
http://gwanbo.mois.g[...]
문화재청장
201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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