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릉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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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릉 전투는 삼국 시대 동오와 서진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로, 272년 오나라 장수 보찬이 서진에 투항하면서 시작되었다. 오나라는 육항을 중심으로 서릉 탈환을 시도했고, 서진은 양호와 양조를 파견하여 이를 지원했다. 육항은 뛰어난 방어 전략으로 서진의 공격을 막아내고, 서릉성을 함락시켜 승리했다. 이 전투에서 육항은 보찬과 그의 일족을 처형했지만, 다수의 병사들을 사면하며 관용을 베풀었다. 서릉 전투는 오나라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후 서진의 오나라 정복의 발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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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릉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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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정보 | |
전투명 | 서릉 전투 |
위치 | 후베이성이창시이링구 |
교전 세력1 | 오나라 |
교전 세력2 | 서진 |
지휘관1 | 육항 |
지휘관2 | 보천 양호 양조 |
시기 | 272년 10월 ~ 273년 2월 |
결과 | 오나라의 승리 |
병력 규모1 | 30,000+ |
병력 규모2 | 8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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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삼국 시대 동오와 촉한의 국경 근처에 있던 서릉(西陵, 현재의 이창시 서릉구)은 229년 보즐이 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247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동오가 점령하였다. 보즐 사후 그의 아들 보찬이 서릉의 역할을 이어받았다.[1] 263년 조위가 촉한을 정복하고, 266년 위는 서진으로 대체되었다.
2. 1. 오나라와 진나라의 대립
272년 8월, 오나라 황제 손호는 서릉의 도독이었던 보천을 무창으로 돌아오도록 명령했다. 아버지와 형을 이어 서릉을 지켜온 보천은 갑작스러운 소환 명령을 의아하게 여겨, 조정에서 참언을 당한 것이 아닌가 크게 의심했다[8]。손호는 마음에 안 드는 신하를 이유를 붙여 죽이는 일이 많았고, 전부터 폭군으로 두려움을 받고 있었다.272년 9월, 신변의 위협을 느낀 보천은 진에 사자를 보내 서릉성을 통째로 항복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형 보협의 아들 보기와 보선을 인질로 낙양으로 보냈다. 보천 자신은 휘하의 장병들과 함께 서릉성에 웅거했다. 진나라 황제 사마염은 보천을 도독 서릉 제군사, 위장군, 시중에 임명하고, 삼공과 동등한 의동삼사의 특권을 부여했다. 게다가 교주목를 겸임하게 하고, 의도공에 봉했다. 또한, 인질의 친족에게도 관위와 작위를 내려 후하게 대우했다[9]。
낙향도독 육항은 보천의 반란 소식을 듣자 즉시 부대를 나누어, 휘하의 좌익, 오언, 채공에게 명하여 서릉성으로 급행하게 했다[10]。
도독 형주 제군사 양호는 사마염의 명령을 받아 보천을 구원하기 위해 오로 진군했다. 양호는 형주 자사 양조에게 육로로 서릉으로 향하게 함과 동시에, 익주에서도 파동 감군 서윤이 지휘하는 수군을 파견했다. 또한, 스스로는 양동을 위해 양양에서 남하하여, 오나라의 거점 강릉으로 진군했다.
2. 2. 보천의 투항과 서릉의 전략적 중요성
동오가 점령하고 있던 서릉(西陵, 현재의 이창시 서릉구)은 동오와 동맹국인 촉한의 국경 근처에 있었다. 229년, 보즐이 서릉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247년 사망할 때까지 이 직책을 수행했다. 그의 사후, 아들 보찬이 서릉에서의 역할을 이어받았다.[1] 조위는 263년에 촉한을 정복했고, 266년에 위는 서진으로 대체되었다.272년, 오나라 황제 손호는 보찬을 수도로 소환하여 황실 친위대의 통제관으로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보씨 가문이 서릉에서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보찬은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아 처벌받기 위해 소환된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보찬은 진나라에 투항하여 서릉을 항복시키고, 그의 두 조카 보기와 보현을 진나라 수도 낙양으로 보냈다.[1] 손호는 마음에 안 드는 신하를 이유를 붙여 죽이는 일이 많았고, 전부터 폭군으로 두려움을 받고 있었다.[8]
9월, 신변의 위협을 느낀 보천은 진나라에 사자를 보내 서릉성을 통째로 항복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형 보협의 아들 보기와 보현을 인질로 낙양으로 보냈다. 보천 자신은 휘하의 장병들과 함께 서릉성에 웅거했다. 진나라 황제 사마염은 보천을 도독 서릉 제군사, 위장군, 시중에 임명하고, 삼공과 동등한 의동삼사의 특권을 부여했다. 게다가 교주목를 겸임하게 하고, 의도공에 봉했다. 또한, 인질의 친족에게도 관위와 작위를 내려 후하게 대우했다.[9]
낙향도독 육항은 보천의 반란 소식을 듣자 즉시 부대를 나누어, 휘하의 좌익, 오언, 채공에게 명하여 서릉성으로 급행하게 했다.[10]
3. 전투의 경과
11월, 육항은 장함에게 강릉성을 사수하게 하는 한편, 공안독 손준에게 장강 남안을 수비하게 하여 양호가 장강을 건너 남쪽으로 진군하는 것을 저지했다. 진나라 파동 감군 서윤이 지휘하는 수군 또한 건평으로 쳐들어오자, 육항은 수군독 유려와 진서장군 주완을 파견하여 이를 맞아 싸우게 했다. 서릉에도 양조군이 도착하자, 육항은 스스로 포위진에 의거하여 이에 대치했다. 이때, 오나라 장군 주교와 영도독 유찬이 배신하여 양조의 군에 투항했다. 육항은 "유찬은 군중에 오래 있었고, 그 내정에 밝다. 나는 이전부터 훈련 부족인 이민족 부대를 우려하고 있다. 만약 적이 포위진을 깨뜨리려 한다면, 먼저 이민족 부대를 노릴 것이다"라고 말하며, 몰래 밤중에 이민족 병사가 지키는 곳을 늙은 오나라 정예병으로 교체했다. 다음 날, 예상대로 양조군이 이민족 부대의 거점을 뚫고 공격해 오자, 육항은 다른 부대도 동원하여 비처럼 화살과 돌을 쏟아부어 큰 손실을 입혔다.[15]
12월,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져 모든 계략이 소진된 양조는 서릉 공략을 단념하고, 어둠을 틈타 퇴각을 시작했다. 육항은 이를 추격하려 했지만, 배후에는 서릉성의 보천이 오나라 군대의 틈을 노리고 있었기에, 큰 병력을 할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병력을 정비하고 북을 쳐서 마치 추격하려는 듯이 보이게 했다. 양조군의 병사들은 혼란에 빠져 장비를 버리고 앞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적 부대가 무너지자, 다시 육항은 소수의 병력을 사용하여 추격전을 펼쳐 양조군을 크게 격파했다. 양조군의 대패 소식을 들은 양호는 더 이상의 공세를 포기하고 구원군을 전면적으로 철수시켰다. 오나라 군대의 포로가 된 자는 모두 수만에 이르렀다. 육항은 진나라 군대가 완전히 철수하는 것을 확인한 후, 서릉성에 총공격을 가했다. 그리고 마침내 서릉성을 함락시키고 보천 등을 포박했다.[16]
3. 1. 초기 단계: 육항의 방어 전략
육항은 반란 소식을 듣자마자 좌이(左奕), 오안, 채공(蔡貢) 등에게 별동대를 이끌고 서릉으로 향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적계(赤谿)에서 고시(故市)에 이르는 방어 시설을 건설하여 보천을 포위하고 진(晉) 군대의 공격으로부터 지역을 방어하도록 지시했다.[2]방어 시설을 건설하는 동안 육항의 많은 장교들은 서릉을 공격할 것을 거듭 촉구했지만, 그는 서릉성이 견고하고 식량도 많으며, 자신이 이전에 서릉독(西陵督)이었을 때 직접 축조하여 구조를 잘 알고 있어 급히 공격해도 함락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한 진나라 군대가 나타나면 전후로 협공을 받게 될 것이므로 방어 시설 구축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11]
하지만 여러 장수들은 납득하지 못했고, 특히 의도 태수 뇌담은 강력하게 간청했기에, 육항은 한 번만 공격을 허락했다. 예상대로 공격은 실패했고, 장수들은 육항의 명령에 따랐다.[3][12]
한편, 보천은 진나라 군대와 만이(蠻族)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3. 2. 강릉 제방 파괴: 양호의 책략과 육항의 대응
진나라의 양호가 이끄는 군대가 강릉에 접근하자, 오나라 장수들은 육항에게 강릉을 떠나 서릉을 공격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육항은 강릉이 난공불락이라고 확신했고, 진나라가 점령하더라도 오래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서릉을 잃을 경우 남쪽 산악 지대의 부족들이 봉기하여 오나라에 문제를 일으킬 것을 더 우려했다.[4]강릉은 평지에 위치해 접근성이 매우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육항은 이후 장함(張咸)에게 명하여 강물의 흐름을 막고 평지를 침수시켜 도시 주변에 대규모 수역을 만들어 침략자들을 막는 방어벽으로 삼기 위해 대규모 제방을 건설하게 했다. 양호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이 방어벽을 이용하여 배로 물자를 수송할 계획이었지만, 제방을 파괴하여 육군이 통과할 길을 만들 것이라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육항은 이를 듣고 양호의 계략을 간파하여 장함에게 제방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양호는 당양(當陽; 현재 징먼시, 후베이성 남서쪽)에 도착했을 때 제방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했다. 그는 육로로 물자를 수송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게 되었다.[5]
양호가 5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강릉으로 침공하는 모습을 보이자, 낙향(樂郷)에 있던 육항은 양호에게 개의치 않고 서릉으로 향했다. 육항의 부하들은 낙향에 머물러 강릉을 방비할 것을 권했지만, 육항은 "강릉은 방비가 굳건하고, 병력도 제대로 갖춰져 있다. 만약 함락된다 하더라도, 지세적으로 보아 적이 계속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서릉을 빼앗기면, 장강 남안 여러 산의 만이들 또한 동요할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의 난관을 생각하면, 강릉을 버리고서라도 서릉에 대응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군의 지휘를 맡아 서릉으로 향했다.[13]
강릉은 평탄한 지형에 있어 진군이 용이했다. 육항은 강릉독 장함에게 명하여, 성 주변의 수로를 막아 강릉성으로 통하는 북동쪽 평지를 수몰시켜 적의 습격과 아군의 이반을 동시에 막았다. 그 때문에, 양호는 강릉을 공격하면서, 배를 이용하여 군량을 수송하려 했지만, 도중에 둑이 터져 물이 빠져나갈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스스로 둑을 터뜨려 보병을 진군시키는 허보를 흘렸다. 육항은 이 정보가 양호의 계략임을 간파하고, 여러 장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강릉의 수장에게 명하여 둑을 터뜨려 물을 빼게 했다. 양호는 당양까지 진군했을 때 둑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육로로 수송할 수레를 마련해야 했고, 수송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14]
3. 3. 양조의 공격과 육항의 반격
육항은 장선에게 강릉의 방어를 강화하도록 지시하고, 공안현의 현위인 손준에게 남쪽 강둑을 순찰하며 양호에 대항하게 했다. 또한 유려와 주완에게는 서은의 공격을 막도록 명령했다. 육항은 세 개의 군대를 이끌고 이전에 건설해 둔 방어 시설을 활용하여 양조를 저지했다. 그러나 육항의 부하인 주교와 유찬이 양조에게 투항했다. 육항은 유찬이 부족 병사들의 약점을 알고 양조에게 알릴 수 있다고 판단하여, 그날 밤 부족 병사들을 정예 병사들로 교체했다. 다음 날, 양조는 부족 병사들로 구성되었던 부대를 공격했지만, 이미 교체된 후였다. 육항은 궁병들에게 반격을 명령하여 화살을 퍼부어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6]약 한 달 후, 양조는 육항을 이기지 못하고 밤에 군대를 철수했다. 육항은 추격하고 싶었지만, 서릉 안에 있는 보천이 뒤에서 공격할 수 있어 충분한 병력이 없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북을 치고 공격 준비를 하는 척하라고 명령했다. 양조의 병사들은 겁에 질려 갑옷과 장비를 버리고 도망쳤다. 육항은 경무장한 소수의 병사를 보내 양조를 추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양호와 다른 진나라 장군들은 양조의 패배 소식을 듣고 군대를 철수했다. 육항은 서릉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보천과 그의 가족, 고위 장교들은 반역죄로 처형되었으며,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은 육항의 요청으로 사면되었다. 육항은 서릉의 요새를 수리한 후 락향으로 돌아갔다.[7]
육항은 서릉에 도착한 여러 군에게 적계에서 고시 사이에 이중 포위진을 구축하게 했다. 이 포위진은 안으로는 보천을 가두고, 밖으로는 진나라 군대의 습격을 대비하는 것이었다. 밤낮으로 공사가 진행되어 군사들은 크게 피폐해졌다. 여러 장수들은 성을 공격하여 진나라 군대가 쳐들어오기 전에 함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육항은 서릉성은 견고하고 식량이 많으며 자신이 이전에 서릉독이었을 때 축조한 것이라 급히 공격해도 함락시킬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진나라 군대가 나타나면 전후로 협공을 받게 될 것이므로 대비해야 한다고 답했다.[11] 그러나 여러 장수들은 납득하지 못했고, 특히 의도 태수 뇌담이 강력하게 간청하여 육항은 한 번만 공격을 허락했다. 결과는 아무런 성과도 없었고, 여러 장수들은 육항의 명령에 따랐다.[12]
보천은 진나라 군대와 만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양호가 5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강릉으로 침공하는 모습을 보이자, 락향에 있던 육항은 양호에 개의치 않고 서릉으로 향했다. 육항의 부하들은 락향에 머물러 강릉을 방비할 것을 권했지만, 육항은 "강릉은 방비가 굳건하고, 병력도 제대로 갖춰져 있다. 만약 함락된다 하더라도, 지세적으로 보아 적이 계속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서릉을 빼앗기면, 장강 남안 여러 산의 만이들 또한 동요할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의 난관을 생각하면, 강릉을 버리고서라도 서릉에 대응해야 한다"라고 말했다.[13]
강릉은 평탄한 지형에 있어 진군이 용이했다. 육항은 강릉독 장함에게 명하여, 성 주변의 수로를 막아 강릉성으로 통하는 북동쪽 평지를 수몰시켜 적의 습격과 아군의 이반을 동시에 막았다. 그 때문에, 양호는 강릉을 공격하면서, 배를 이용하여 군량을 수송하려 했지만, 도중에 둑이 터져 물이 빠져나갈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스스로 둑을 터뜨려 보병을 진군시키는 허보를 흘렸다. 육항은 이 정보가 양호의 계략임을 간파하고, 여러 장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강릉의 수장에게 명하여 둑을 터뜨려 물을 빼게 했다. 양호는 당양까지 진군했을 때 둑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육로로 수송할 수레를 마련해야 했고, 수송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14]
11월, 육항은 장함에게 강릉성을 사수하게 하는 한편, 공안독 손준에게 장강 남안을 수비하게 하여 양호가 장강을 건너 남쪽으로 진군하는 것을 저지했다. 진나라의 파동 감군 서윤이 지휘하는 수군 또한 건평으로 쳐들어오자, 육항은 수군독 유려와 진서장군 주완을 파견하여 이를 맞아 싸우게 했다. 서릉에도 양조군이 도착하자, 육항은 스스로 포위진에 의거하여 이에 대치했다. 이때, 오나라 장군 주교와 영도독 유찬이 배신하여 양조의 군에 투항했다. 육항은 "유찬은 군중에 오래 있었고, 그 내정에 밝다. 나는 이전부터 훈련 부족인 이민족 부대를 우려하고 있다. 만약 적이 포위진을 깨뜨리려 한다면, 먼저 이민족 부대를 노릴 것이다"라고 말하며, 몰래 밤중에 이민족 병사가 지키는 곳을 늙은 오나라 정예병으로 교체했다. 다음 날, 예상대로 양조군이 이민족 부대의 거점을 뚫고 공격해 오자, 육항은 다른 부대도 동원하여 비처럼 화살과 돌을 쏟아부어 큰 손실을 입혔다.[15]
12월,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져 모든 계략이 소진된 양조는 서릉 공략을 단념하고, 어둠을 틈타 퇴각을 시작했다. 육항은 이를 추격하려 했지만, 배후에는 서릉성의 보천이 오나라 군대의 틈을 노리고 있었기에, 큰 병력을 할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병력을 정비하고 북을 쳐서 마치 추격하려는 듯이 보이게 했다. 양조군의 병사들은 혼란에 빠져 장비를 버리고, 앞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적 부대가 무너지자, 다시 육항은 소수의 병력을 사용하여 추격전을 펼쳐 양조군을 크게 격파했다. 양조군의 대패 소식을 들은 양호는 더 이상의 공세를 포기하고, 구원군을 전면적으로 철수시켰다. 오나라 군대의 포로가 된 자는 모두 수만에 이르렀다. 육항은 진나라 군대가 완전히 철수하는 것을 확인한 후, 서릉성에 총공격을 가했다. 그리고 마침내 서릉성을 함락시키고, 보천 등을 포박했다.[16]
3. 4. 진나라 군대의 퇴각과 서릉 함락
육항은 장선에게 강릉의 방어를 강화하도록 지시하고, 공안의 현위인 손준에게는 남쪽 강둑을 순찰하여 양호에 대응하게 했다. 또한 유려와 주완에게는 서은의 공격을 막도록 명령했다. 육항은 세 개의 군대를 이끌고 이전에 건설해 둔 방어 시설을 활용하여 양조를 저지했다. 그러나 육항의 부하인 주교와 유찬이 양조에게 투항했다. 육항은 유찬이 부족 병사들의 반란 계획을 알고 있으며, 이 약점을 양조에게 알릴 수 있음을 간파했다. 그래서 그날 밤, 육항은 부족 병사들을 자신이 더 신뢰하는 정예 병사들로 즉시 교체했다. 다음 날, 육항의 예상대로 양조는 부족 병사들로 구성되었던 부대를 공격했지만, 이미 교체된 후였다. 육항은 궁병들에게 반격을 명령하여 적에게 화살을 퍼부어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6]약 한 달 후, 양조는 육항을 이길 수 없었고, 어느 날 밤 군대를 철수했다. 육항은 적을 추격하고 싶었지만, 서릉 안에 있는 부찬이 뒤에서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여 충분한 병력이 없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북을 치고 양조의 퇴각하는 군대를 공격할 준비를 하는 척하라고 명령했다. 양조의 병사들은 겁에 질려 갑옷과 장비를 버리고 도망쳤다. 육항은 경무장한 소수의 병사를 보내 양조를 추격했고, 적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양호와 다른 진나라 장군들은 양조의 패배 소식을 듣고 군대를 철수했다. 육항은 서릉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부찬은 그의 가족 및 고위 장교들과 함께 반역죄로 처형되었고, 1만 명이 넘는 나머지 사람들은 육항이 오나라 조정에 요청한 후 사면되었다. 육항은 서릉의 요새를 수리한 후 락향으로 돌아갔다.[7]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육항은 보천과 그 일족, 간부급 무장과 군관은 처형했지만, 수만 명에 달하는 일반 병사들은 사면했다. 이로 인해 오나라에서 보천의 일족은 끊어졌지만, 보천이 항복했을 때 진나라에 인질로 보내졌던 조카 보현이 보씨 가문을 이었다.[1]
반란을 진압한 육항은 서릉성을 수리하고 낙향으로 돌아갔다. 큰 공을 세웠음에도 전혀 자랑하지 않아 병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육항은 이 공으로 대사마에 임명되고 형주자사 직을 받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손호에게 의심받아 강등되었다고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1]
진나라에서는 양호가 평남장군으로 강등되었지만 형주군 총사령관 직은 유지했다. 양조는 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2년 후 병사했다.[1]
이 전투는 나관중의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 제120장에서 간략하게 언급된다.[1]
4. 1. 오나라의 승리와 진나라의 좌절
여강으로 돌아간 육항은 안동장군으로 승진했다. 한편 양호는 안남장군으로 강등되었고, 양조는 평민이 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양호는 오나라 군인과 백성들에게 존경심을 표하며 오나라의 마음을 얻는 데 집중했다. 역사 기록에는 서릉 전투 이후 양호와 육항 사이에 기묘한 우정이 있었다고 전해진다.[1] 274년 육항이 사망한 후 양호는 진나라가 오나라 정복을 수행할 것을 강력히 옹호했고, 이는 5년 후인 279년에 시작되었다.육항은 보천과 그 일족 및 간부급 무장과 군관은 처형했지만, 그 외 수만 명에 달하는 장졸과 하급 병졸은 사면했다. 이로 인해 오나라에서 보천의 일족은 끊어지게 되었지만, 보천이 항복했을 때 인질로 진나라에 보내졌던 조카 보현이 보씨 가문을 이었다.[1]
반란을 진압한 육항은 서릉성을 수리한 후, 낙향으로 귀환했다.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혀 자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사들은 이전보다 더욱 육항을 존경했다고 한다. 육항은 이번 공적으로 인해 임지에서 대사마에 임명되어 형주자사의 직을 받았다.[1]
진나라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양호가 평남장군으로 강등되지만, 변함없이 형주군의 총사령관이었다. 양조는 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2년 후에 병사했다.[1]
4. 2. 삼국 시대의 정세 변화
여강으로 돌아간 육항은 안동장군으로 승진했다. 한편 양호는 안남장군으로 강등되었고, 양조는 평민이 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양호는 오나라 군인과 백성들에게 존경심을 표하며 오나라의 마음을 얻는 데 집중했다. 역사 기록에는 서릉 전투 이후 양호와 육항 사이에 기묘한 우정이 있었다고 전해진다.[1] 274년 육항이 사망한 후 양호는 진나라가 오나라 정복을 수행할 것을 강력히 옹호했고, 이는 5년 후인 279년에 시작되었다.나관중의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 제120장에서 이 전투를 간략하게 언급한다. 육항은 보천과 그 일족 및 간부급 무장과 군관은 처형했지만, 그 외 수만 명에 달하는 장졸과 하급 병졸은 사면했다. 이로 인해 오나라에서 보천의 일족은 끊어지게 되었지만, 보천이 항복했을 때 인질로 진나라에 보내졌던 조카 보현이 보씨 가문을 이었다.[1]
반란을 진압한 육항은 서릉성을 수리한 후, 낙향으로 귀환했다.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혀 자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사들은 이전보다 더욱 육항을 존경했다고 한다. 육항은 이번 공적으로 인해 임지에서 대사마에 임명되어 형주자사의 직을 받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후에 손호에게 의심받아 강등되었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1]
진나라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양호가 평남장군으로 강등되지만, 변함없이 형주군의 총사령관이었다. 양조는 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2년 후에 병사했다.[1]
5. 관련 인물
5. 1. 오나라
5. 2. 진나라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52
[2]
서적
Sanguozhi vol. 58
[3]
서적
Sanguozhi vol. 58
[4]
서적
Sanguozhi vol. 58
[5]
서적
Sanguozhi vol. 58
[6]
서적
Sanguozhi vol. 58
[7]
서적
Sanguozhi vol. 58
[8]
서적
資治通鑑
null
[9]
서적
資治通鑑
null
[10]
서적
三国志陸抗伝
[11]
서적
三国志陸抗伝
[12]
서적
三国志陸抗伝
[13]
서적
三国志陸抗伝
[14]
서적
三国志陸抗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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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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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資治通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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