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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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선우보는 후한 말, 위나라 초의 인물로, 유우를 섬기다 공손찬에게 유우가 살해당하자 유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염유를 오환사마로 추대하고 공손찬을 공격했다. 이후 조조에게 귀순하여 건충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조조의 오환 정벌에 종군했다. 위나라가 건국된 후에는 호아장군, 보국장군을 역임했고, 선비족의 가비능을 설득하고 촉한의 유선에게 항복을 권하는 조서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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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삼국 시대 사람 - 위유
위유는 후한 말 유우의 동조연으로, 유우가 공손찬을 공격하려 할 때 만류했으며 이민족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정책을 건의했으나 193년에 병사한 인물이다. - 중국 삼국 시대 사람 - 위자 (삼국지)
위자는 후한 말 장막의 부장으로, 조조를 알아보고 동탁 토벌을 지원했으며, 서영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 생몰년 미상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선우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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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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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선우보 |
자 | 국의(國懿) |
생몰년도 | 미상 |
시대 | 후한 말 ~ 삼국시대 |
소속 | 공손찬, 조조 |
관직 | |
임명 관직 | 오환교위(烏桓校尉), 기도위(騎都尉)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선우정 |
아들 | 선우단 |
손자 | 선우황 |
기타 정보 | |
주요 활동 | 오환족 회유 공손찬 토벌 지원 |
2. 생애
성명 | 선우보(鮮于輔) |
---|---|
시대 | 후한 시대 |
생몰년 | 〔불상〕 |
자·별호 | 〔불상〕 |
본관·출신지 등 | 유주어양군 |
직관 | 종사→도료장군(『후한서』)→건충장군→호아장군→보국장군 |
작위 | 도정후(『후한서』)→창향정후 |
진영·소속 등 | 유우→조조→조비 |
가족·일족 | 〔불상〕 |
선우보는 처음에는 유주목 유우를 섬겼다. 그러나 193년에 유우가 공손찬에게 목숨을 잃자, 유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유주종사(幽州從事) 제주·기도위 선우은과 함께 염유를 오환사마(烏丸司馬)로 추대하고 한족과 북방 이민족을 규합하여 수만 명의 군세를 모았다.[4]
선우보는 원소 밑에 있던 유우의 아들 유화, 원소의 부하 국의와 합류하여 공손찬을 연이어 물리쳤고, 199년에 공손찬을 멸망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4]
조조 진영에 합류한 후, 200년 관도 대전 때 조조에게 가서 원소와의 싸움에 참전했고, 205년에는 삼군(三郡)의 오환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다. 213년에는 조조에게 위공(魏公)이 되도록 권하는 상주문에 이름을 올렸다.
조위 건국 이후, 선우보는 황초 원년(220년)에 호아장군(虎牙將軍), 황초 5년(224년)경에는 보국장군(輔國將軍)에 임명되었다. 또한 선비의 대인(大人) 가비능을 설득하고, 촉한의 유선에게 항복을 권하는 조서를 보내는 등 외교적인 활동도 펼쳤다.
2. 1. 유우 휘하 활동 및 공손찬과의 대립
193년, 유주자사 유우가 공손찬에게 살해당했다. 선우보는 유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유주종사 제주, 기도위 선우은과 함께 염유를 오환사마로 추대하고, 한족과 북방 이민족을 규합하여 수만 명의 군세를 모았다.[4] 이들은 공손찬 휘하의 어양태수 추단을 공격하여 죽였다.[4]또한, 원소 밑에 있던 유우의 아들 유화, 원소의 부하 국의와 합류하여 공손찬을 연이어 물리쳤고, 199년에 공손찬을 멸망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4]
2. 2. 조조 진영 합류 및 활약
공손찬 멸망 후, 선우보는 공손찬의 옛 부하 전예를 장사로 임명했다. 이후 원소와 조조의 싸움으로 북방이 혼란스러워지자, 전예는 선우보에게 조조에게 귀순할 것을 권했다. 선우보는 전예의 말을 따랐고, 조조는 선우보를 건충장군(建忠將軍)에 임명하여 유주의 여섯 군을 다스리게 하였다.[4] 이후 선우보는 조조의 오환 정벌에 참전하였다.200년 관도 대전 때, 선우보는 조조에게 가서 원소와의 싸움에 참전했다. 조조는 원소군의 패주를 기뻐하며, 선우보 등 유주 장수들의 협력에 감사했다.[2] 205년 4월, 삼군(三郡)의 오환이 광평(獷平)에서 선우보를 공격하자, 8월에 조조가 선우보를 구원하여 오환은 새외로 달아났다.
213년 5월, 조조에게 위공(魏公)이 되도록 순유(荀攸) 등과 함께 권했다. 『위공국권진주(魏公國勧進奏)』에는 정욱(程昱)이나 왕랑(王朗)보다 상위인 10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2. 3. 위나라 건국 이후 활동
공손찬 멸망 후, 선우보는 공손찬의 옛 영역을 통치하며 그의 옛 부하 전예를 장사로 임명하였다. 이후 원소와 조조의 싸움으로 북방이 혼란스러워지자, 전예는 선우보에게 조조에게 귀순할 것을 권하였다. 선우보는 전예의 말을 따랐고, 조조는 선우보를 건충장군(建忠將軍)에 임명하여 유주의 여섯 군을 다스리게 하였다.[4] 이후 선우보는 조조의 오환 정벌에 종군하였다.황초 원년(220년), 후한이 멸망하고 문제가 조위의 황제로 등극하였다. 이때 선우보는 호아장군(虎牙將軍)에 임명되었고, 황초 5년(224년)경에는 보국장군(輔國將軍)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에 선우보는 선비의 대인(大人) 가비능을 설득하는 데에 나섰고, 또한 황초 연간에는 문제의 명령으로 촉한의 유선에게 항복을 권하는 조서를 몰래 보냈다.
참조
[1]
서적
三国志
[2]
서적
後漢書
[3]
논문
"「魏公卿上尊号奏」にみる漢魏革命の正統性"
http://ywata.gakkais[...]
2022-02-04
[4]
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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