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랑
1. 개요
설랑은 887년 진해군 절도사 주보 휘하에서 탁지최감사로 있던 인물이다. 주보가 향락에 빠져 백성들이 노역에 시달리자, 설랑은 부하 장교 유호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주보를 몰아내고 진해군을 장악했다. 이후 주변 지역을 공격했으나, 항주 자사 전류의 공격을 받아 887년 12월에 체포되어 이듬해 1월에 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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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8년 사망 -
당 희종
당 희종은 환관 옹립으로 즉위하여 재위 기간 동안 환관 횡포, 자연 재해, 왕선지와 황소의 난으로 국력이 쇠퇴한 당나라의 제19대 황제이다. -
888년 사망 -
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
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는 카롤링거 왕조 출신으로 프랑크 황제, 동프랑크와 서프랑크의 왕을 겸하며 샤를마뉴 제국을 일시적으로 재통일했으나, 무능함과 질병, 바이킹 침략 방어 실패로 폐위되어 제국 분열을 초래했다. -
참수된 사람 -
악비
남송 시대 장군 악비는 금나라에 맞선 애국 영웅으로, 진회의 모함으로 처형되었으나 사후 충절을 인정받아 무목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만강홍이라는 시와 함께 현대 중국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이지만, 최근 그의 군사 행위에 대한 재평가 논의가 있다. -
참수된 사람 -
주문모
청나라 출신 가톨릭 신부 주문모는 1794년 조선에 잠입하여 선교 활동을 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으며, 초기 조선 천주교회 성장에 기여하여 2014년 시복되었다. -
사형된 중국 사람 -
추근
추근은 청나라 시대의 여성 혁명가, 시인, 교육자로, 일본 유학을 통해 혁명 사상에 심취하여 여성 해방 운동과 청나라 타도를 위한 활동을 펼치다 무장봉기 실패 후 처형되었으나, 사후 중국 혁명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으며 그의 삶은 여러 작품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
사형된 중국 사람 -
반악
반악은 서진 시대의 문인으로, 빼어난 문학적 재능과 외모로 명성을 얻었지만 사마륜의 쿠데타로 처형되었으며, 슬픔과 비애를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태강문학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다.
2. 생애
설랑의 초기 생애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정사에도 그의 열전은 없다. 그는 887년 진해군 절도사였던 주보 휘하에서 탁지최감사(度支催勘使, 징세관)로 활동하였다. 당시 주보의 실정(失政)과 사병(私兵)인 후루도(後樓都)에 대한 특혜 등으로 인해 군 내부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설랑은 동료 장교였던 유호(劉浩) 등이 일으킨 군사 반란에 연루되었다. 반란이 성공하여 주보가 축출된 후, 설랑은 유호 등에 의해 임시 절도사(유후)로 추대되어 진해군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고, 항주자사였던 전류의 공격을 받아 888년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2.1. 가세(家世) 및 진해군 장악
설랑의 가세(家世)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며, 정사에도 그의 열전이 없다. 광계 3년(887년) 3월, 당시 설랑은 진해군절도사 겸 천하염철조용부사(天下鹽鐵租庸副使) 주보 휘하에서 탁지최감사(度支催勘使)로 있었고, 직함은 태자좌서자(太子左庶子)였다.
이 무렵, 주보는 향락에 빠져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일꾼들을 징발하여 본부 윤주(潤州, 지금의 강소성 진강시)에 외성을 쌓고 왕급의 관저를 지어, 백성들이 과중한 노역에 시달렸다. 또한 자신을 보위하고자 1,000여명의 새로운 친위대를 모병·조직하여 후루도(後樓都)라고 명명하고 진해군의 일반병들보다 2배나 많은 급여를 지급하여 일반병들의 원한을 샀다.
하루는 주보가 막료들과 함께 연회를 즐기던 중, 한 막료가 일반병들이 후루도에 원한을 품고 있다고 우려를 표하자, 주보는 "그놈들이 감히 소란을 피우면, 당장 그놈들을 죽여라!"라고 답했다. 설랑은 이 말을 벗이자 진해군 장령인 유호(劉浩)에게 전하며 군사들을 단속하라고 경고하였다. 이에 유호는 "우리가 쿠데타를 일으켜야만 죽음을 면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그날 밤, 유호는 동료 조군(刁頵)과 함께 진해군 사병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주보의 관저를 공격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주보는 후루도를 불러 쿠데타군에 맞서게 하려 했으나, 후루도마저 쿠데타군에 가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별다른 방도가 없던 주보는 가솔들을 데리고 걸어서 상주로 도망가 자사 정종실(丁從實)에게 의지하였다. 주보를 내쫓은 유호는 주보의 막료들과 보좌관들을 살해하였다. 이는 광계 3년 3월 18일(887년 4월 15일)의 일이었다.
이튿날인 3월 19일(887년 4월 16일), 유호는 설랑을 부청으로 맞아들여 유후(절도사 권한대행)·지부사(知府事)로 추대하였다. 주보가 이전에 조용부사(租庸副使)를 겸임하며 성 안에 쌓아두었던 막대한 재화는 모조리 쿠데타군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
2.2. 최후
진해군을 장악한 설랑은 남쪽으로 비릉(毗陵, 지금의 상주시 무진구)을 습격하고 서쪽으로는 건업을 침공하였다. 그러나 항주자사 전류는 설랑을 인정하지 않았다. 전류의 상관인 위승군(威勝軍, 본부는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에 위치) 절도사 동창은 희종으로부터 설랑을 토벌하라는 칙명을 받고 전류에게 군사행정을 위임하였다.
887년(정미) 5월, 전류는 부하 장령인 동안도장(東安都將) 두릉(杜稜), 절강도장(浙江都將) 완결(阮結), 정강도장(靜江都將) 성급(成及)에게 각자 휘하의 본부부대를 이끌고 설랑을 토벌하게 하였다. 같은 해 6월, 두릉은 설랑의 장령 이군왕(李君暀)을 양선(陽羨, 지금의 강소성 무석시 의흥시)에서 격파하였다.
같은 해 12월 28일(888년 2월 13일), 설랑군은 식량이 소진되었고, 완결은 진해군의 군부인 윤주를 함락시키고 설랑을 사로잡아 항주로 압송하였다. 설랑의 부하였던 유호는 도망쳐 행방불명되었다.
광계 4년 1월 28일(888년 3월 14일), 전류는 설랑을 참수하고 그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내어, 죽은 지 한 달 남짓 된 주보에게 제사를 지냈다.
한편, 《구당서》의 소종 본기에는 사로잡혀 처형되고 심장이 적출된 인물이 설랑이 아닌 유호라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