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이 하쿠세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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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이 하쿠세키는 에도 시대의 유학자이자 정치 개혁가로,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보였다. 그는 홋타 마사토시의 가신에서 로닌으로 변신하여 기노시타 준안 밑에서 수학했으며,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를 보좌하며 '쇼토쿠의 치'를 주도했다. 그는 경제 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무역 규제를 시행했으며, 외교적으로는 조선 통신사 접대를 간소화하고 서양 문물을 연구했다. 그의 정책은 기득권 세력의 반발로 사후 대부분 폐기되었지만, 일본의 경제, 외교, 학문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까지도 다양한 관점에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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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이 하쿠세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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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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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아라이 하쿠세키 |
본명 | 아라이 군미 |
자 (字) | 시아 |
아호 (雅号) | 하쿠세키(白石), 시요(紫陽), 텐샤쿠도(天爵堂), 콧사이(忽斎), 자이추(在中), 사이비(済美) |
이명 | 요고로(与五郎) 카게유(勘解由) |
별명 | 불의 아이 (火の子) 귀신 (鬼) |
시호 | 없음 |
계명 | 지세이인덴샤쿠조카쿠다이고지(慈清院殿釈浄覚大居士) |
묘소 | 도쿄도다이토구 호온지 도쿄도나카노구 고토쿠지 |
신호 | 없음 |
생애 | |
출생 | 1657년 3월 24일 |
출생지 | 에도 |
사망 | 1725년 6월 29일 |
사망지 | 에도 |
관직 | |
관위 | 종5위하 지쿠고노카미, 사후 증정4위 |
막부 | 에도 막부 혼마루 요리아이 |
주군 | 쓰치야 도시나오 → 홋타 마사토시 → 홋타 마사나카 → 도쿠가와 이에노부 → 도쿠가와 이에쓰구 |
번 | 구루리 번 번사, 고가 번 번사, 고후 번 번사 |
가문 | |
씨족 | 아라이 씨 |
부모 | 아버지: 아라이 마사나리, 어머니: 사카이 씨 |
조부 | 간게요 |
배우자 | 정실: 아사쿠라 만에몬의 딸 |
자녀 | 아키요시 노리요시 딸 ( 이시가야 기요타카의 아내) |
학문 및 업적 | |
직업 | 성리학 학자, 학술인, 행정관, 작가 |
연구 분야 | 일본 역사, 문학 |
2. 생애
아라이 하쿠세키는 에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재능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홋타 마사토시를 섬겼으나, 마사토시 사후 가문이 쇠락하자 로닌이 되어 유학자 기노시타 준안 밑에서 학문을 배웠다.
1693년에는 마나베 아키후사의 추천으로 막부에 등용되어,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와 도쿠가와 이에쓰구의 신임을 받으며 정치 자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당시 막부의 공식 유학자 가문이었던 하야시 씨를 대신하여 쇼군의 최고 유학자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에노부 사후에도 그의 정책 일부는 유지되었으나, 도쿠가와 이에쓰구가 요절하고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쇼군이 되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그는 저술 활동에 전념하며 일본 역사와 서양 연구에 관한 많은 글을 남겼다.
사후에는 아사쿠사의 훈지(護持寺)에 묻혔으나, 후에 도쿄 나카노구의 고토쿠지(光徳寺)로 이장되었다.
2. 1. 태어남과 성장


하쿠세키는 메이레키 대화재가 일어난 다음 달인 메이레키 3년(1657년) 2월 10일(3월 24일), 에도 야나기하라의 피난처에서 태어났다.[10] 그의 선조는 본래 고즈케국 닛타 군(新田郡) 아라이 촌(新井村, 현재 군마현 오타시)의 토호였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 때 몰락하였다.[12] 아버지 아라이 마사즈미(新井正済)는 가즈사 구루리 번(久留里藩)에 등용되어 번사로서 메쓰케를 지냈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비범한 재능을 보여, 세 살 때 아버지가 읽던 유학 서적을 그대로 베껴 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총명했지만 성격이 격렬하여 화가 나면 미간에 '화(火)' 자 모양의 주름이 잡혔다고 하며, 이 때문에 번주(藩主) 쓰치야 도시나오(土屋利直)는 하쿠세키를 '''불의 아이'''(火の子)라 부르며 귀여워했다고 한다. 엔포 2년(1674년), 17세 때 나카에 도주(中江藤樹)의 《옹문답》(翁問答)을 읽고 유학에 뜻을 두게 되었다.[13]
그러나 번주 쓰치야 도시나오가 사망한 후, 아버지 마사즈미는 새로 번주가 된 쓰치야 나오키(土屋直樹)의 미움을 샀다. 나오키는 광기 어린 행동을 보였고, 마사즈미는 그를 섬길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출사하지 않았다. 결국 부자는 엔포 5년(1677년)에 쓰치야 가문을 떠나게 되었다. (21세 때인 엔포 6년(1678년)에는 아버지가 쓰치야 가문의 내분에 연루되어 추방 및 금고형에 처해졌다는 설도 있다.[13]) 빈곤 속에서도 하쿠세키는 유학과 사학, 시문(詩文) 등을 배우며 학문에 정진했다.
이후 쓰치야 나오키가 광기를 이유로 개역(改易)되면서 자유의 몸이 된 하쿠세키는 덴나 3년(1683년), 26세의 나이로 다이로(大老) 홋타 마사토시(堀田正俊)를 섬기게 되었다. 그러나 마사토시가 와카도시요리(若年寄) 이나바 마사야스(稲葉正休)에게 암살당하고, 홋타씨(堀田氏) 가문이 고가(古河), 야마가타(山形), 후쿠시마(福島)로 연이어 영지를 옮기면서 번의 재정은 크게 악화되었다. 결국 하쿠세키는 스스로 홋타 가문을 떠나 로닌(浪人)이 되었고, 독학으로 유학 공부를 계속했다.
로닌 시절, 거상 스미카와 스미토로부터 “지인의 딸과 결혼하여 가업을 잇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거나, 카와무라 미치아키로부터 “우리 집 과부와 결혼해 준다면 3000냥과 주택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하쿠세키는 호의에 감사하면서도 “어린 뱀의 상처는 몇 치라도 크게 자라면 몇 자가 된다”는 비유를 들어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
2. 2. 기노시타 준안과의 만남
독학을 계속하던 하쿠세키는 조쿄 3년(1686년)에 주자학자 기노시타 준안의 문하로 들어갔다. 보통 입문할 때는 속수(束脩)라는 입학금이 필요했지만, 하쿠세키는 이를 면제받았으며, 준안 역시 그를 제자라기보다 손님처럼 대우하며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준안의 문하에는 하쿠세키 외에도 아메노모리 호슈, 무로 규소, 기온 난카이 등 훗날 명성을 떨치게 될 학자들이 함께 수학하고 있어, 하쿠세키에게는 학문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스승 준안은 하쿠세키의 재능을 인정하여 당시 학문이 융성했던 가가 번의 관직을 주선해주었다. 하쿠세키 자신도 훗날 가가 번을 "천하의 서부(書府)"라 칭찬할 정도였다. 하지만 동문인 오카지마 다다시로가 연로한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며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부탁하자, 하쿠세키는 그에게 기회를 양보했다.
이후 겐로쿠 6년(1693년), 37세가 된 하쿠세키는 스승 준안의 추천으로 고후 번의 번주 도쿠가와 쓰나토요(훗날의 도쿠가와 이에노부)를 섬기게 되었다. 원래 쓰나토요는 막부의 공식 유학자 가문인 하야시가(林家)에 인재 추천을 의뢰했으나, 당시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쓰나토요의 장래성을 낮게 본 하야시 가문이 거절하여 준안에게 기회가 온 것이었다. 고후 번에서 처음 제시한 봉록은 30인 봉록(三十人扶持)이었으나, 준안은 하쿠세키의 능력에 비해 너무 적다고 주장하여 40인 봉록(四十人扶持)이 제시되었다. 준안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하쿠세키는 고후 도쿠가와 가문이 다른 다이묘 가문과 격이 다르며(고료덴) 번주 쓰나토요의 장래성을 높이 평가하여, 오히려 스승에게 자신을 정식으로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
2. 3. 쇼토쿠의 치
호에이 6년(1709년), 고후 번주였던 도쿠가와 쓰나토요가 도쿠가와 이에노부로 이름을 바꾸고 제6대 쇼군으로 취임했다. 이에노부는 쇼군이 되자 기존의 소바요닌이었던 마쓰다이라 데루사다와 마쓰다이라 다다치카를 해임하고, 다이가쿠노카미 하야시 노부아쓰를 제치고 하쿠세키에게 그의 직무 대부분을 대행하게 했다. 이에노부는 고후 번주 시절부터 자신의 측근이었던 하쿠세키와 마나베 아키후사를 계속 중용하여, 훗날 쇼토쿠의 치(正徳の治)라 불리는 정치 개혁을 추진했다.당시 하쿠세키의 신분은 500석(후에 쇼토쿠 원년인 1711년에 1,000석으로 증가) 녹봉을 받는 무역(無役)의 하타모토였기에, 쇼군의 집무실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따라서 쇼군 이에노부의 자문 요청을 소바요닌인 마나베 아키후사가 하쿠세키에게 전달하고, 하쿠세키가 이에 답변하는 방식으로 정책 결정에 참여했다. 막부의 각료나 소바요닌도 아닌 일개 하타모토가 쇼군의 시강(侍講)으로서 막부 정치 운영에 깊이 관여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쿠세키는 쇼군의 정치 고문으로서 여러 개혁 정책을 주도했다. 우선 도쿠가와 쓰나요시 시대의 겐로쿠 살생금지령을 폐지했다. 외교 분야에서는 조선통신사 접대 의례를 간소화했으며, 조선으로 보내는 국서에서 쇼군의 칭호를 기존의 '일본국대군(日本國大君)'에서 '일본국왕(日本國王)'으로 변경하도록 했다. 이는 조선과의 대등한 외교 관계를 주장했던 쓰시마 번의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와 의견 대립을 빚기도 했다.
경제 분야에서는 막부 재정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금의 75%, 은의 25%가 해외 무역으로 유출되고 있었는데,[5] 하쿠세키는 이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했다. 그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질 좋은 화폐를 새로 주조하고, 1715년에는 무역 정책인 「가이하쿠고시 신레이」(海舶互市新例)를 시행하여 나가사키를 통한 해외 무역량을 제한하고, 중국과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지불하는 대금을 귀금속 대신 비단, 도자기, 건어물 등 일본 상품으로 대체하도록 했다.[4]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쓰시마 번과 사쓰마 번을 통한 귀금속 무역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해 그 효과가 제한적이었다.

하쿠세키가 추진한 정책들은 대부분 기존의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합리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도쇼 신군(東照神君,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래의 조법(祖法)은 고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보수적인 막부 각료들과의 심각한 마찰을 피할 수 없었다. 하쿠세키 자신도 자신의 주장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 반대 의견에 좀처럼 굽히지 않았으며, 때로는 "주군(쇼군)의 뜻이다!"라며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 때문에 보수파 막부 관료들은 하쿠세키를 '귀신'(鬼神)이라 부르며 두려워하고 꺼렸다.
이에노부가 사망한 후, 그의 어린 아들인 도쿠가와 이에쓰구가 7대 쇼군으로 즉위했다. 하쿠세키는 마나베 아키후사와 함께 계속해서 정권을 담당했지만, 어린 쇼군을 보좌하며 정국을 운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기존 막부 각료들과 후다이 다이묘들의 저항도 점점 거세졌다. 결국 이에쓰구가 요절하고 기슈번주였던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8대 쇼군으로 취임하자, 하쿠세키는 실각하여 모든 공적인 정치 활동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2. 4. 은퇴 이후
1716년, 도쿠가와 이에쓰구가 사망하고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쇼군이 되면서 하쿠세키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요시무네는 하쿠세키가 어린 이에쓰구의 권위를 높이고자 개정한 조선통신사 응접 제도나 무가소법도를 원상태로 복구했다. 또한, 하쿠세키가 이에노부의 자문에 응하여 제출했던 많은 정책 자료도 폐기처분되고, 막부에 헌상했던 하쿠세키의 저서도 파기되었다.에도성 안의 저택과 간다 오가와마치(지요다구)의 저택도 몰수되었다. 일시적으로 후카가와 이치이로마치(고토구 후쿠스미 1-9)의 저택으로 이사했지만, 1717년에 막부로부터 하사받은 센다가야의 땅에 은거했다. 현재 시부야구 센다가야 6-1-1에는 시부야구가 설치한 기념 안내판이 있다. 당시는 현재와 같은 도시가 아니라, 한눈에 밀밭이 펼쳐지는 땅이었다고 전해진다.
불우한 말년에도 저작 활동에 힘써서, 《채람이언》(采覧異言)을 최종적으로 교정한(자기첨삭) 과정을 완료한 5, 6일 뒤인 1725년 5월 19일에 향년 69세(만 68세)로 사망했다. 그의 묘소는 처음에는 아사쿠사(현재 도쿄 다이토구)의 훈지(護持寺)에 안장되었으나, 나중에 도쿄 나카노구의 고토쿠지(高徳寺)로 이장되었다.
3. 정책
이에노부 쇼군 시대에 로주(老中) 아베 세이쿄(阿部正喬) 아래에서, 아라이 하쿠세키는 쇼군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막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개혁 정책, 이른바 '쇼토쿠노치'(正徳の治)를 추진했다.
주요 정책으로는 새로운 화폐 주조를 통한 인플레이션 억제와 카이하쿠고시 신레이(海舶互市新例) 시행을 통한 귀금속 해외 유출 방지 등 경제 정책을 추진했다.[5] 또한, 조선 통신사 접대 의례 간소화를 추진했으며, 이는 쓰시마의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하쿠세키는 천명 사상을 덴노뿐만 아니라 쇼군에게도 적용하여 쇼군의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그는 쇼군이 선정(善政)과 도덕성, 그리고 덴노에 대한 존중을 통해 신성한 권위를 지님을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도쿠가와 가문의 혈통을 미나모토 가문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치적 지위가 정당함을 보이려 했다. 쇼군의 권력을 강화하고 국가적 위신을 높이기 위해 쇼군의 칭호를 '고쿠오(國王)'로 변경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3. 1. 경제 정책
아라이 하쿠세키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막부 재정 및 경제 안정을 위한 개혁 정책, 이른바 '쇼토쿠노치'(正徳の治)를 추진했다. 그의 경제 정책은 크게 화폐 개혁과 무역 제한으로 나눌 수 있다.'''화폐 개혁'''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 시대에 재정 관료 오기와라 시게히데는 막부 수입 증대를 위해 금과 은의 함량을 낮춘 겐로쿠 금은(元禄金銀)과 호에이 금은(宝永金銀)을 대량으로 주조했다. 이는 시중에 통화량을 급증시켜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었다.[14] 하쿠세키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중에 유통되던 질 낮은 화폐들을 회수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의 케이쵸 금은(慶長金銀)과 같이 순도 높은 양질의 쇼토쿠 금은(正徳金銀)을 새로 주조하여 통용시켰다. 이를 통해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고자 했으나, 일각에서는 당시 경제 성장에 따른 자연스러운 통화 수요 증가를 고려하지 않은 정책으로 인해 오히려 통화량이 위축되는 '하쿠세키 디플레이션'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14][15]
'''나가사키 무역 제한'''
에도 막부의 쇄국정책 하에서 나가사키는 청 및 네덜란드와의 교역이 허용된 유일한 창구였다. 그러나 이 무역을 통해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이 해외로 유출되는 문제가 심각했다. 하쿠세키는 무역 기록을 분석하여 당시 일본 전체 금의 75%, 은의 25%가 무역 대금으로 유출되고 있음을 파악하고 국부 유출에 큰 위기감을 느꼈다.[5] 또한, 과도한 귀금속 유출은 나가사키 항 자체의 경제적 어려움과 인구 감소, 우치코와시(打ちこわし, 도시 하층민의 폭동)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에 하쿠세키는 1715년, 나가사키 무역을 통한 귀금속 유출을 억제하기 위해 카이하쿠고시신레이(海舶互市新例)라는 새로운 무역 규제령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또한, 수출 품목도 제한하여 귀금속 대신 건어물, 황동 제품, 마키에(蒔絵) 칠기, 이마리야키(伊万里焼) 도자기 등 일본 국내 상품의 수출을 장려하고자 했다. 이 정책의 시행과 함께 나가사키 부교(長崎奉行)의 정원을 3명에서 2명으로 줄이고, 절약된 경비는 하급 관리 증원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막부의 통제가 미치지 못했던 쓰시마 번(대 조선 무역)과 사쓰마 번(대 류큐 무역)을 통한 귀금속 유출은 계속되었기 때문에 정책의 실효성은 제한적이었다.[5]
3. 2. 외교 정책
아라이 하쿠세키는 막부의 재정 건전화와 쇼군의 권위 강화를 목표로 여러 외교 및 무역 정책을 추진했다.'''조선 통신사 대우 간소화'''
하쿠세키는 조선 통신사를 접대하는 데 드는 막대한 비용이 막부 재정을 압박한다고 판단하여, 접대 의례를 간소화할 것을 주장하고 이를 관철시켰다. 이 조치는 당시 쓰시마 번의 유학자이자 하쿠세키의 동문이었던 아메노모리 호슈와의 갈등을 유발했다. 호슈는 하쿠세키의 조치가 외교적 결례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하며 반대했다.
또한 하쿠세키는 조선에 보내는 외교 문서에서 쇼군의 칭호를 기존의 '일본국대군(日本国大君)'에서 '일본국왕(日本国王)'으로 변경하도록 했다. 이는 쇼군의 지위를 격상시키려는 의도였으나, 조선과의 외교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조치였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속유삼종》(俗儒三種)이라는 글에서 하쿠세키를 난폭하고 무례한 유학자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시도티 밀항 사건 대응과 서양 지식 연구'''
로마 교황의 명을 받고 그리스도교 전도를 위해 일본에 밀항했다가 체포된 이탈리아인 선교사 조반니 바티스타 시도티의 심문을 하쿠세키가 담당했다. 시도티는 나가사키를 거쳐 에도의 고히나타(茗荷谷) 기리시탄 저택에 구금되었다.
하쿠세키는 시도티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서양의 지리, 역사, 과학 등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서양기문』(1715년)과 『채람이언』을 저술했다. 이 책들은 하쿠세키 사후인 1807년에 간행되어 당시 일본인들의 서양 및 세계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시도티를 통해 얻은 서양 지식, 특히 로마자의 합리성에 관심을 보였으나, 그리스도교 자체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하쿠세키는 시도티를 본국으로 송환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막부에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시도티는 결국 구금된 저택의 하인에게 전도했다는 이유로 옥에 갇혀 사망했다.
'''무역 정책: 카이하쿠고시 신레이'''
하쿠세키는 당시 일본의 금과 은이 해외 무역을 통해 과도하게 유출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무역 기록 분석 결과, 일본 보유 금의 4분의 1, 은의 4분의 3이 외국과의 교역으로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파악했다.[5] 국가의 부가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1715년 새로운 무역 통제 정책인 '가이하쿠고시 신레이(海舶互市新例)'를 시행했다. 이 정책은 나가사키를 통한 청나라 및 네덜란드와의 무역량을 제한하고, 거래 시 금, 은 대신 비단, 도자기, 건어물 등 일본 상품의 수출을 장려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막부의 직접 통제를 받지 않는 쓰시마 번(조선과의 무역)과 사쓰마 번(류큐와의 무역)에는 적용되지 않아 귀금속 유출을 완전히 막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5]
3. 3. 기타 정책
아라이 하쿠세키는 황통(皇統)이 단절될 것을 우려하여 새로운 궁가인 간인노미야(閑院宮)를 창설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따라 히가시야마 천황의 여섯 번째 황자인 나오히토 친왕에게 막부가 1,000석의 영지를 주었고, 교호 3년(1718년)에는 조부인 레이겐 상황으로부터 '간인노미야'라는 궁호(宮号)를 받게 되었다.훗날 아라이 하쿠세키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고모모조노 천황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간인노미야 가문의 2대 당주인 스케히토 친왕의 여섯 번째 아들 사치노미야(祐宮)가 안에이 8년(1779년) 고카쿠 천황으로 즉위하여 황통을 이었다.
4. 저서
아라이 하쿠세키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서는 6개 언어로 390종의 출판물에 걸쳐 237편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163개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6]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독사여론』(読史余論): 일본의 정치사를 논한 역사서이다.[17] 1712년에 저술되었다.[7] 2015년 한국연구재단의 《학술명저번역총서》 동양편 제548권으로 박경희가 번역하여 출간되었다.
- 『서양기문』(西洋紀聞): 1708년 일본에 밀입국했다가 체포된 이탈리아인 선교사 조반니 바티스타 시도티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얻은 서양의 사정을 기록한 책이다.[7][17] 1715년에 저술되었다.[7] 2021년 한국연구재단의 《학술명저번역총서》 동양편 제596권으로 이윤지가 번역하여 출간되었다.
- 『채람이언』(采覧異言): 시도티에게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세계 각국의 지리와 문화를 소개한 책이다.[7] 1709년에 저술되었다.[7]
- 『번한보』(藩翰譜): 여러 다이묘 가문의 가계도를 정리한 책이다.[17] 1894년에 간행되었다.
- 『고사통』(古史通) 및 『고사통혹문』(古史通或問): 일본의 고대사를 다룬 저작이다.[17] 특히 『고사통혹문』에서는 고대 일본의 미스터리로 여겨지는 야마타이국(邪馬台国)의 위치를 야마토국(大和国, 현재의 나라현)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로 평가받는다.[17] 다만 말년의 저작인 『외국지사조서』(外国之事調書)에서는 규슈설로 입장을 바꾸기도 했다.[17]
- 『오리타쿠시바노키』(折たく柴の記): 하쿠세키 자신의 회고록이자 일기이다. '비망록'이라고도 번역된다.[17]
- 『남도지』(南島志): 류큐 왕국의 사절들(정순칙, 나고 친방 첩문, 향수우, 옥성 친방 조훈 등)과의 회담에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저술한 책이다.[17]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저서들이 있다.
- 『본조군기고』(本朝軍器考): 1709년 저술.
- 『Hōka shiryaku|호카 시랴쿠일본어』(Brief history of currency): 1711년 저술. 일본 화폐의 역사와 유통에 관한 책으로, '혼초 호카 주요 지랴쿠'(本朝寳貨通用事略)라고도 한다.[8]
- 『왜지』(蝦夷志): 1729년 저술. 아이누 민족과 홋카이도(당시 에조치)에 관한 기록.
- 『동문통고』(同文通考): 1760년 간행.
- 『동아』(東雅): 1719년(교호 4년) 완성. 『화명류취초』(和名類聚抄)에 나오는 단어의 의미를 해석한 책. 전 20권.
- 『선철상전』(先哲像伝)
- 『귀신론』(鬼神論)
- 『아라이 하쿠세키 일기』(新井白石日記)
하쿠세키의 저서 대부분은 당시 막부의 금기 사항에 저촉되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메이지 시대 이전까지는 정식으로 출판되지 못하고 필사본 형태로 막부 관료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읽혔다.[18] 말년에 집필한 역사서 『사의』(史疑)는 그의 사후 행방불명되었다.[17]
그의 저작들은 이와나미 서점에서 간행한 《일본사상대계》 35권과 국서간행회에서 간행한 《아라이 하쿠세키 전집》(新井白石全集) 등에 다수 수록되어 있다. 또한 연문출판에서 낸 《일본한시인선집》(日本漢詩人選集) 5권에는 그의 한시 작품이 실려 있다.
5. 평가
아라이 하쿠세키는 에도 시대 중기를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정치가로서, 그의 학문적 성취와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그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와 도쿠가와 이에쓰구를 보좌하며 막부 정치에 깊이 관여하였고, 쇼토쿠노치와 같은 정책을 통해 당시 사회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 그의 활동은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비판적인 측면도 함께 거론된다.
5. 1. 긍정적 평가
에도 시대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정치가로서, 뛰어난 학문적 능력과 개혁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비범함을 보여 세 살 때 한자로 된 유교 서적을 베껴 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1] 원래는 핫타 마사토시의 가신이었으나, 주군 사후 로닌이 되어 유학자 키노시타 준안 밑에서 학문을 연마했다.[2]1693년, 마나베 아키후사의 추천으로 막부에 등용되어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와 도쿠가와 이에쓰구의 핵심 참모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기존의 하야시 가문을 대신하여 쇼군의 최고 유학자로서 막부 정치에 깊이 관여하며 자신의 경륜을 펼쳤다.[3]
로쥬 아베 세이쿄 아래에서 쇼군 이에노부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쇼토쿠노치'라 불리는 일련의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새로운 양질의 화폐를 주조하여 당시 심각했던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무역 기록 분석을 통해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이 해외로 유출되고 있음을 파악하고,[5] 이를 막기 위해 나가사키 무역을 통제하는 새로운 규정인 '카이하쿠고시 신레이'를 시행했다. 이 정책은 귀금속 유출을 억제하고 대신 비단, 도자기, 건어물 등 일본 상품의 수출을 장려하려는 의도를 가졌으나, 쓰시마 번과 사쓰마 번 등 일부 번의 독자적인 무역 활동까지 통제하지는 못하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6]
외교적으로는 조선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도 실리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쓰시마 번의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선 통신사를 맞이하는 의례를 간소화하기도 했다.
또한 천명사상을 덴노뿐만 아니라 쇼군에게도 적용하여, 쇼군이 이에야스 이래 미나모토 씨의 후예로서 정당성을 가지며, 도덕적 통치를 통해 그 권위를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쇼군의 칭호를 '고쿠오(國王)'로 변경할 것을 제안하는 등 막부의 권위를 높이고 국가적 위상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8]
이에노부와 이에쓰구 사후,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쇼군이 되자 정계에서 물러났으나, 이후 일본 역사와 서양 문물 연구에 몰두하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3]
5. 2. 비판적 평가
아라이 하쿠세키가 추진한 경제 정책인 쇼토쿠노치(享徳の致)의 일환으로 시행된 새로운 무역 정책, 카이하쿠고시 신레이(海舶互市新例)는 일본의 귀금속 유출을 막고 상품 무역을 활성화하려는 목적을 가졌으나, 쓰시마 번과 사쓰마 번의 무역 활동이 막부의 통제를 완전히 받지 않아 귀금속 유출을 막는 데는 제한적인 효과를 거두는 데 그쳤다는 평가가 있다.[5] 이는 당시 일본의 국부 유출에 대한 하쿠세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중앙 통제의 현실적인 한계를 드러낸 사례로 지적된다.
또한, 그는 조선 왕조의 사신을 맞이하는 의례를 간소화했는데, 이는 당시 쓰시마의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된 조치였다. 이러한 결정은 외교적 관례나 상대국에 대한 존중보다 막부의 편의나 위신을 우선시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하쿠세키는 쇼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천명 사상을 쇼군에게도 적용하고, 도쿠가와 가문의 혈통을 미나모토 씨와 연결하여 정통성을 강조하려 했다. 나아가 쇼군의 칭호를 '고쿠오(國王)'로 변경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이는 쇼군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려는 시도였으나 전통적인 덴노와의 관계 속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장이었다.
참조
[1]
웹사이트
Arai Hakuseki Japanese statesman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1-12-11
[2]
서적
Secret Memoirs of the Shoguns: Isaac Titsingh and Japan, 1779–1822
[3]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Stanford University Press
[4]
서적
Lever of empire
https://books.google[...]
[5]
서적
Early Modern Japan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6]
웹사이트
WorldCat Identities
http://www.worldcat.[...]
[7]
서적
Secret Memoirs of the Shoguns: Isaac Titsingh and Japan, 1779–1822
[8]
서적
Secret Memoirs of the Shoguns: Isaac Titsingh and Japan, 1779–1822
[9]
서적
江戸時代人物控1000
小学館
[10]
서적
新井白石全集 第6巻「附録 白石先生年譜」
国書刊行会
[11]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12]
서적
姓氏家系大辞典
[13]
서적
日本地理学人物事典 [近世編]
原書房
[14]
문서
대석신사부로 등의 연구에 따름
[15]
문서
奈良本(1974) pp.83-86
[16]
문서
奈良本(1974) p.86
[17]
서적
日本近世人名辞典
吉川弘文館
[18]
서적
コレクションと歴史意識 十九世紀日本のメディア受容と「好古家」のまなざし
勉誠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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