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폴트 폰 랑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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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오폴트 폰 랑케는 1795년 독일에서 태어난 역사학자로, 근대 역사학 연구 방법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그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고전과 신학을 공부하고, 베를린 대학교 교수를 거쳐 1865년 귀족이 되었다. 랑케는 역사주의를 바탕으로, 사료 비판을 통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역사 서술을 강조하며, '사실은 과연 어떠했는가(wie es eigentlich gewesen)'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세미나 형식을 도입하여 학생들에게 사료 분석 능력을 길렀으며, 주요 저서로는 『라틴 및 게르만 여러 민족의 역사』, 『로마 교황사』, 『프러시아 역사』, 『세계사』 등이 있다. 랑케의 방법론은 역사학 발전에 기여했지만, 20세기 이후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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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트 폰 랑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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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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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레오폴트 랑케 |
출생 | 1795년 12월 21일 |
출생지 | 비헤, 작센 선제후국, 신성 로마 제국 |
사망 | 1886년 5월 23일 |
사망지 | 베를린,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
직업 | 역사가 |
모교 | 라이프치히 대학교 |
직장 | 베를린 대학교 |
알려진 업적 | 역사주의 |
영향 받은 인물 | 바르톨트 게오르크 니부어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
영향을 준 인물 | 하인리히 폰 지벨 빌헬름 딜타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시르마허 필리프 야페 |
학문 분야 | |
관심 분야 | 역사학 정치학 철학 |
사상 | 역사주의 |
역사관 | 역사는 '실제로 일어났던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고 믿었다. |
방법론 | 엄격한 원천 비판과 아카이브 연구 강조 |
주요 저서 | |
초기 작품 | '로망스 및 게르만 민족의 역사 (Geschichte der romanischen und germanischen Völker, von 1494 bis 1514)' (1824) |
기타 저서 | '종교 개혁 시대의 독일사 (Deutsche Geschichte im Zeitalter der Reformation)' '프로이센 역사 (Neun Bücher preussischer Geschichte)' '16, 17세기 로마 교황사 (Die römischen Päpste in den letzten vier Jahrhunderten)' '세계사 (Weltgeschichte)' |
기타 정보 | |
칭호 | 폰(von) (1865년 귀족 작위 수여) |
회원 |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 회원 바이에른 과학 아카데미 회원 |
기념 | 랑케슈트라세 (Rankestraße, 베를린 거리) 명명 |
2. 생애
랑케는 1795년 12월 21일 작센 선제후국(현재의 독일 튀링겐 주) 비에에서 루터교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고전과 신학을 공부하며 중세 사료 강독법을 익혔다. 1818년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더의 김나지움 교사가 되었고, 1825년에는 훔볼트 베를린 대학교 사학과 조교수, 1834년에는 교수가 되었다. 1865년에는 귀족이 되었으며, 1886년 5월 23일 베를린에서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랑케는 루터교 신앙,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의 관념론,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인간성 철학을 통합하여 독자적인 역사철학을 구축했다. 또한 18세기 세계사관에 낭만주의의 원리를 연결했다. 랑케는 계몽주의에서 파생된 교훈적, 실용적 역사학을 비판하고, 실제 사물이 어떠했는지를 발견하려 노력했다.
랑케의 첫 저작인 『라틴 및 게르만 여러 민족의 역사』(1824)에는 라틴 및 게르만 민족의 서유럽 공동체 형성, 기독교와 인문주의의 문화적 가치 통합, 기독교적 신의 세계사에서의 영향 등이 기술되어 있다. 이 책은 그의 역사학을 규정하고 훔볼트 베를린 대학교에서의 교육 활동의 길을 열어주었다.
랑케는 인물 성격 연구에 뛰어났으며, 특히 『로마 교황사』(1834-1836)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근대 유럽 사회의 중심축을 교회와 국가의 관계 변화 속에서 찾았다. 랑케는 『프로이센 역사 9권』(1847-1848), 『프랑스 역사』(1852-1861), 『영국 역사』(1859-1869) 등 여러 민족사를 저술하여 16세기 및 17세기 근대 국가 발전기를 집중적으로 기술했다.
랑케는 "세계사" 집필을 희망했고, 말년에 『세계사』(1881-1888)를 집필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까지의 기술로 미완성으로 남았다. 랑케는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복고주의에 빠져 혁명 세력에 대해서는 공정하지 못했다. 『세계사』에서도 시대착오적인 관점을 드러냈고, 대영제국의 패권, 미국 독립 혁명, 제정 러시아의 팽창, 자본주의 사회나 산업 혁명에 의한 산업 사회의 발전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역사관은 제한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향은 유럽과 미국 사회에 파급되어 근대 역사학 연구 방법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랑케는 고문서학의 뛰어난 연구가였으며,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시대의 외교 정책, 특히 동방 문제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16세기, 17세기 전반의 열강의 흥륭에 대해 연구를 확대했다.
조직자로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1858년에는 바이에른 왕국의 막시밀리안 2세 밑에 "바이에른 학사원 역사학 위원회"를 설립하여 문서와 서한의 보존과 간행을 지도했다.
훔볼트 베를린 대학교에서는 연습(세미나르) 형식을 중시하여 사료를 방법적으로 분석하고 경험적으로 해석·판단하는 방법을 채택하여, 바르톨트 게오르크 니부어와 함께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근세 역사가 비판』(1824)은 엄밀한 사료 비판을 통해 과학적인 근대 역사학의 기초를 확립한 저서로 평가받는다. 그의 후계자로는 프로이센 학파의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과 하인리히 폰 트라위체케가 있으며, 최말년 제자로 일본에 실증주의적 근대 역사학을 전파한 루트비히 뢰스가 있다.
2. 1. 초기 생애 (1795년 ~ 1825년)
랑케는 1795년 12월 21일, 당시 작센 선제후국(현재의 독일 튀링겐주) 비헤에서 루터교 목사이자 변호사 집안에서 태어났다.[7] 슐프포르타 김나지움과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고전학과 신학을 공부했다.[7]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요한 고트프리트 야코프 헤르만 등에게 고전학을 배웠고, 투키디데스, 리비우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우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바르톨트 게오르크 니부르, 임마누엘 칸트,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 프리드리히 슐레겔 등 다양한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랑케는 고대 저자들의 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전문가가 되었지만, 현대 역사 서적들이 단순한 사실 나열에 불과하다고 여겨 현대사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1817년부터 1825년까지 랑케는 오데르 강변 프랑크푸르트의 프리드리히 김나지움에서 고전어를 가르쳤다. 이때 역사 분야에 더욱 전문화하고자 했고, 역사의 작용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찾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8]
2. 2. 베를린 대학교 교수 시절 (1825년 ~ 1871년)
1825년, 랑케는 베를린 대학교 사학과 조교수로 임용되었고, 1834년에는 정교수가 되었다.[7] 1824년, 첫 저서 《1494년부터 1514년까지 로마 및 게르만 민족의 역사》를 출판하며, 다양한 사료를 활용하는 역사 연구 방법을 제시했다.[7][9] 베를린 대학교에서 세미나(연습) 시스템을 도입하여, 학생들이 사료의 가치를 검증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능력을 키우도록 지도했다.[10]랑케는 프리드리히 칼 폰 자비니의 역사법학을 지지하고,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역사철학을 비판하며, 각 시대의 고유한 특징을 강조하는 역사관을 발전시켰다.[10] 1832년부터 1836년까지 프로이센 정부의 지원을 받아 《역사-정치 저널》(Historische-Politische Zeitschrift)을 창간하고 편집하며, 보수주의적 관점에서 자유주의 사상을 비판했다.[11]
1834년부터 1836년까지 《16세기와 17세기 로마 교황, 그들의 교회와 국가》를 출판하며, '반종교개혁'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1차 사료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7][12][13] 1841년, 프로이센 궁정의 왕실 역사 편찬관으로 임명되었다.[15] 1847년부터 1848년까지 《프러시아 역사 9권》을 출판하며, 호엔촐레른 가문과 프로이센 국가의 역사를 다루었다.[7]
1852년부터 1861년까지 《주로 16세기와 17세기 프랑스 역사》를 출판하며, 프랑수아 1세부터 루이 14세까지의 프랑스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했다. 1859년부터 1867년까지 《주로 16세기와 17세기 영국 역사》를 출판하며, 영국 역사를 다루었다.
2. 3. 은퇴 이후 (1871년 ~ 1886년)

랑케는 1865년 귀족 작위를 받았고, 1882년 프로이센 비밀참사관에 임명되었으며, 1885년 베를린 명예시민이 되었다. 1884년에는 미국역사학회(American Historical Association)의 초대 명예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885년에는 미국철학회(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회원으로 선출되었다.[19] 1871년 은퇴 후에도 랑케는 독일 역사와 관련된 다양한 주제, 예를 들어 프랑스 혁명 전쟁,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20],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등에 대해 계속해서 저술했다. 1880년에는 고대 이집트와 이스라엘인들로부터 시작하는 방대한 6권짜리 세계사 저술을 시작했다. 1886년 베를린에서 90세의 나이로 사망할 당시 랑케는 12세기까지밖에 완성하지 못했지만, 그의 조수들은 나중에 그의 노트를 사용하여 1453년까지 연장했다.
1871년 아내가 사망한 후 랑케는 반맹이 되어 조수들이 읽어주는 데 의존하게 되었다. 1877년 1월의 일기에는 역사가로서의 그의 성숙한 생각이 담겨 있다.[21]
> 속담에 시인은 타고난다고 한다. 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일부 학문 분야에서도 젊은이들은 만개하거나 적어도 독창성을 보여준다. 음악가와 수학자는 어린 시절에 명성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역사가는 그의 연구 분야의 엄청난 범위 때문만이 아니라, 특히 변화하는 조건 하에서 긴 세월이 부여하는 역사적 과정에 대한 통찰력 때문에 나이가 들어야 한다. 짧은 경험만으로는 거의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개인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위대한 사건들이 그의 눈앞에서 그 과정을 완료하고, 다른 사건들은 붕괴되고, 새로운 형태가 시도되어야 한다.
랑케 사후, 시러큐스 대학교(Syracuse University)가 그의 소장품을 구입했다. 2만 5천 권의 책과 기타 자료로 구성된 랑케 도서관 (Ranke Library)은 대학 소장품의 10배에 달했다.[22]
3. 역사 연구 방법론
랑케의 역사 연구 방법론은 19세기 역사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역사학 연구의 기초를 다지는 데 기여했다. 랑케는 역사주의를 대표하며, 각 시대는 고유한 가치와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그 시대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역사철학을 비판하며, 역사가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각 시대의 특수성을 지닌다고 강조했다.[23]
랑케는 통합 이론이나 주제에 대한 강조 부족으로 인해 루돌프 하임에게 "경험주의자의 무의식"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세기에 랑케의 업적은 매우 인기가 많았고 그의 역사적 실천에 대한 사상은 서구 역사 서술에서 점차 지배적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칼 마르크스를 포함한 동시대 비평가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랑케의 방법론은 역사 실천에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지만, 그의 역사 서술과 경험주의에 대한 더 광범위한 사상은 현재 일부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 그의 사상은 20세기 중반까지 역사가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E. H. 카와 페르낭 브로델에 의해 도전을 받았다. 카는 랑케의 경험주의 사상을 순진하고 지루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반대하며, 역사가는 단순히 사실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실을 사용할지 선택한다고 말했다. 발터 벤야민은 랑케의 격언을 "19세기의 가장 강력한 마약"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28][29]
3. 1. 사료 비판
랑케는 역사 연구에서 1차 사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회고록, 일기, 개인적 및 공식적인 서신, 정부 문서, 외교 문서, 그리고 목격자들의 직접적인 증언" 등 다양한 1차 사료를 활용하여 과거를 객관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9] 랑케는 사료의 진위 여부, 작성자의 의도, 시대적 배경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사료 비판(Quellenkritik) 방법을 확립했다. 그는 사료의 내용뿐만 아니라, 사료가 작성된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랑케는 2차 자료보다는 1차 자료를 우선시했으며,[10] 특히 베네치아 외교 문서와 같은 기록 보관소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제자들을 여러 기록 보관소에 보내 정보를 수집하게 했고, 강의실에서 제자들이 찾은 자료들을 논의하며 역사는 "사건이 일어난 그대로" 서술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10] 이러한 이유로 랑케는 "비판적인 역사 과학의 선구자"로 불리기도 한다.[10]
랑케는 프리드리히 폰 겐츠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도움으로 베네치아 고문서 보관소에 접근할 수 있었고, 그 가치를 처음 발견했다.[7] 그는 부크 카라지치가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세르비아 혁명`(1829)을 썼고,[7] 이는 훗날 `19세기 세르비아와 터키`(1879)로 확장되었다.
랑케는 자신의 첫 저서 서문에서 "역사는 과거를 판단하고 미래 시대를 위해 현재를 교육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러한 높은 임무를 이 책은 추구하지 않는다. 이 책은 단지 실제로 일어난 일을 보여주고자 할 뿐이다 (wie es eigentlich gewesende)"라고 밝혔다.[24][25] 이 말은 많은 역사가들에게 지침이 되었지만, 그 의미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 피터 노빅에 따르면, 랑케는 역사가가 사실을 발견하고 그 이면에 있는 본질을 찾아야 한다는 낭만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26] 랑케는 역사가는 "신성한 상형 문자"를 찾고 "보편적인 것에 대한 눈"을 유지하면서 "특수한 것에 대한 즐거움"을 가져야 한다고 덧붙였다.[27]
실증주의에 기반하여 사료비판을 통한 과학적인 역사학을 확립한 랑케의 업적은 역사학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의 실증주의적인 연구 방법과 교육 방법은 독일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등의 역사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2. '사실은 과연 어떠했는가'(wie es eigentlich gewesen)
랑케는 역사 연구의 목표를 '사실은 과연 어떠했는가'(wie es eigentlich gewesende)를 밝히는 것으로 제시했다.[24][25] 이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역사 서술의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이 문구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일부 학자들은 랑케가 사실의 나열만을 강조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랑케가 사실 이면에 있는 본질을 찾고자 했다고 해석한다. 피터 노빅과 게오르크 이거스는 랑케가 역사가가 사실을 발견하고 그 이면에 있는 본질(eigentlichde)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해석을 제시했다.[26] 이 관점에서 ''eigentlich''라는 단어는 "본질적으로"로 번역되어야 하며, 목표는 "본질적으로 무엇이 일어났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랑케는 역사가는 역사 속에 있는 신의 손길인 "신성한 상형 문자"를 찾고 "보편적인 것에 대한 눈"을 유지하면서 "특수한 것에 대한 즐거움"을 가져야 한다고 덧붙였다.[27]3. 3. 역사주의
랑케는 역사주의(Historicism)의 대표적인 인물로, 각 시대는 고유한 가치와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그 시대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역사를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발전하는 것으로 보는 헤겔의 역사철학을 비판하고, 각 시대의 특수성을 강조했다.[10] 랑케는 역사가가 과거를 현재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을 경계하고, 과거의 사건을 그 시대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854년 미래의 국왕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2세 앞에서 행한 강연에서[17] 랑케는 "모든 시대는 신과 가깝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역사의 모든 시대는 독특하며 그 고유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는 신이 역사 전체를 내려다보고 모든 시대를 동등하게 여긴다고 주장했다. 랑케는 각 시대가 다음 시대보다 열등하다고 간주하는 역사에 대한 목적론적 접근 방식을 거부했다. 따라서 중세는 르네상스보다 열등하지 않고, 단지 다를 뿐이었다. 랑케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가들은 한 시대와 그 시대의 용어를 이해하고 역사의 모든 시대를 활기차게 만든 일반적인 사상만을 찾아야 했다. 랑케에게 역사는 인간의 "진보"에 대한 설명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플라톤 이후에는 더 이상 플라톤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역사는 형사 재판소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랑케의 방법론의 핵심에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일반적인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대신 그는 1차 사료의 인용을 사용하여 당시 상황에 대해 진술하며 “내가 이해하는 ‘주요 사상’이란 단순히 각 세기에 지배적인 경향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단지 묘사될 수 있을 뿐이며, 궁극적으로는 어떤 개념으로 요약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랑케는 특히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이 수행했던 역사철학에 반대하며, 헤겔이 역사에서 인간의 주체성 역할을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의 주체성은 “단 하나의 사상이나 단어로 특징지어질 수 없거나” “개념으로 규정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중요하다고 했다.[23]
랑케는 그의 첫 번째 책 서론에서 "역사는 과거를 판단하고 미래 시대를 위해 현재를 교육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러한 높은 임무를 이 책은 추구하지 않는다. 이 책은 단지 실제로 일어난 일을 보여주고자 할 뿐이다 (wie es eigentlich gewesende)"라고 하였다.[24][25] 랑케의 역사는 wie es eigentlich gewesende("실제로 어떠했는가"라는 의미)의 원칙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진술은 이후 많은 역사가들에게 그들의 지침 원칙으로 받아들여졌다. 게오르크 이거스를 따라 피터 노빅은 낭만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랑케는 역사가가 사실을 발견하고 그 이면에 있는 본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고 주장했다. 이 관점에서 ''eigentlich''라는 단어는 "본질적으로"로 번역되어야 하며, 목표는 "본질적으로 무엇이 일어났는지 보여주는 것"이다.[26] 랑케는 역사가는 역사 속에 있는 신의 손길인 "신성한 상형 문자"를 찾고 "보편적인 것에 대한 눈"을 유지하면서 "특수한 것에 대한 즐거움"을 가져야 한다고 덧붙였다.[27]
실증주의에 기반하여 사료비판을 통한 과학적인 역사학을 확립했다. 랑케 이전의 역사 연구자를 “역사가”, 이후의 역사 연구자를 “역사학자”라고 부르듯이, 랑케의 업적은 역사학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또한 교육 면에서는 연습(세미나르(Seminar))을 중시했다. “사실은 과연 어떠했는가”를 탐구하는 실증주의적인 연구 방법과 교육 방법은 독일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등의 역사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4. 세미나(연습) 교육
베를린 대학교에서 랑케는 세미나 시스템을 도입하여 학생들에게 자료의 가치를 검증하는 방법을 가르쳤다.[10] 랑케는 역사의 다양한 시대적 특징을 강조한 프리드리히 카를 폰 사비니를 지지하고, 역사를 보편적인 이야기의 전개로 보았던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역사관을 비판했다.[10]랑케는 제자들을 여러 기록 보관소로 보내 정보를 수집하게 했고, 강의실에서 제자들이 찾은 자료들을 논의하며 역사는 "사건이 일어난 그대로" 서술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10] 이러한 교육 방식으로 인해 랑케는 "비판적인 역사 과학의 선구자"로 불리기도 한다.[10] 랑케는 2차 자료보다 1차 자료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랑케의 이러한 교육 방법은 실증주의에 기반하여 사료비판을 통한 과학적인 역사학을 확립하는데 기여했다. 랑케 이전과 이후의 역사 연구자를 각각 "역사가"와 "역사학자"로 구분할 정도로, 랑케의 업적은 역사학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의 "사실은 과연 어떠했는가"를 탐구하는 실증주의적 연구 방법과 세미나(연습) 교육 방법은 독일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등의 역사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4. 주요 저서
- 《1494년부터 1514년까지 로마 및 게르만 민족의 역사(Geschichten der romanischen und germanischen Völker von 1494 bis 1514, 1824)》[7]
- 《세르비아 혁명》(Die Serbische Revolution, 1829)》[7] (이후 《19세기 세르비아와 터키》(Serbien und die Turkei im 19 Jahrhundert, 1879)로 확장)
- 《16세기와 17세기 남유럽의 군주와 민족(Fürsten und Völker von Süd-Europa im sechzehnten und siebzehnten Jahrhundert)》[38]
- 《지난 4세기 동안의 로마 교황들(Die römischen Päpste in den letzten vier Jahrhunderten, 1834-1836)》[7] (원제: 《16세기와 17세기 로마 교황, 그들의 교회와 국가》(Die römischen Päpste, ihre Kirche und ihr Staat im sechzehnten und siebzehnten Jahrhundert))
- 《프러시아 역사 9권(Neun Bücher preußischer Geschichte, 1847-1848)》[7] (《브란덴부르크가의 회고록과 17세기 및 18세기 프러시아 역사》로 번역됨)
- 《주로 16세기와 17세기 프랑스 역사(Französische Geschichte, vornehmlich im sechzehnten und siebzehnten Jahrhundert, 1852-1861)》
- 《독일 세력과 군주 동맹(Die deutschen Mächte und der Fürstenbund, 1871-1872)》
- 《1791년과 1792년 혁명 전쟁의 기원과 시작(Ursprung und Beginn der Revolutionskriege 1791 und 1792, 1875)》
- 《1793년부터 1813년까지 하르덴베르크와 프로이센 국가의 역사(Hardenberg und die Geschichte des preußischen Staates von 1793 bis 1813, 1877)》
- 《세계사》(Weltgeschichte, 1881-1888, 미완성) (사후 조수들에 의해 1453년까지 연장됨)
- 《16세기와 17세기 오스만 제국과 스페인 제국》(The Ottoman and the Spanish Empires, in the Sixteenth and Seventeenth Centuries, 1843)》
- 《17세기와 18세기 브란덴부르크가의 회고록과 프로이센 역사》(Memoirs of the House of Brandenburg and History of Prussia During the Seventeenth and Eighteenth Centuries, 1849)》
- 《16세기와 17세기 프랑스의 내전과 군주제》(Civil Wars and Monarchy in France, in the Sixteenth and Seventeenth Centuries, 1852)》
- 《세르비아 역사와 세르비아 혁명》(The History of Servia and the Servian Revolution, 1853)》
- 《주로 17세기에 관한 잉글랜드 역사》(History of England Principally in the Seventeenth Century, 1875)》[39]
- 《세계사: 가장 오래된 역사적 민족 집단과 그리스인들》(Universal History: The Oldest Historical Group of Nations and the Greeks, 1884)》
- 《교황의 역사: 그들의 교회와 국가》(History of the Popes: Their Church and State, 1901)》 (사라 오스틴 번역, 초판은 엘리자 포스터가 1847~48년에 번역)
- 《라틴계와 게르만계 민족의 역사, 1494~1514》(History of the Latin and Teutonic Nations, 1494–1514, 1909)》
- 《세계사의 비밀: 역사의 예술과 과학에 관한 선정 작품》(The Secret of World History: Selected Writings on the Art and Science of History, 1981)》
- 《종교개혁 시대의 독일 역사(1845-1847)》(Deutsche Geschichte im Zeitalter der Reformation (1845-1847))
5. 비판과 유산
레오폴트 폰 랑케의 역사 연구 방법은 객관성과 과학성을 강조했지만, 여러 비판에 직면했다. 그의 사료비판에 기반한 실증주의 역사학은 근대 역사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동시에 여러 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칼 마르크스는 랑케가 자신의 방법론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사료를 자의적으로 선택하고 편향된 해석을 제시한다고 비판했다.[43] 발터 벤야민은 랑케의 '사실은 과연 어떠했는가'라는 명제를 "19세기 최강의 마약"이라고 비판하며,[29] 역사가가 과거를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랑케는 역사가 과거를 판단하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떠했는가"(wie es eigentlich gewesen)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24][25] 이러한 랑케의 역사주의는 각 시대의 특수성을 존중하고, 과거를 그 시대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는 역사 연구의 중요한 관점으로 자리 잡았다.
E. H. 카는 랑케의 경험주의적 역사관을 비판하며, 역사가가 사실을 선택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45] 페르낭 브로델은 랑케의 역사 서술이 정치사에 치중되어 있으며, 사회,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측면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월터 스콧의 역사 소설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점에 충격을 받고 엄밀한 사료 비판을 중시하게 된 랑케였지만, 실제 역사 서술에서는 전통적인 방법론을 따랐다는 비판도 있다.[44]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는 한국의 중도진보 성향의 역사학자들은 랑케의 객관적 역사 연구 방법론을 수용하면서도, 그의 보수적인 정치적 입장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이들은 역사 연구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관점을 반영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5. 1. 비판
레오폴트 폰 랑케의 역사 연구 방법은 객관성과 과학성을 강조했지만, 여러 비판에 직면했다. 칼 마르크스는 랑케가 자신의 방법론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사료를 자의적으로 선택하고 편향된 해석을 제시한다고 비판했다.[43] 발터 벤야민은 랑케의 '사실은 과연 어떠했는가'라는 명제를 "19세기 최강의 마약"이라고 비판하며,[29] 역사가가 과거를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E. H. 카는 랑케의 경험주의적 역사관을 비판하며, 역사가가 사실을 선택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45] 페르낭 브로델은 랑케의 역사 서술이 정치사에 치중되어 있으며, 사회,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측면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랑케는 월터 스콧의 역사 소설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점에 충격을 받고 엄밀한 사료 비판을 중시하게 되었지만, 실제 역사 서술에서는 전통적인 방법론을 따랐다는 비판도 있다.[44]
5. 2. 유산
랑케는 사료비판에 기반한 실증주의 역사학을 확립하여 근대 역사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29] 그의 역사 연구 방법론은 전 세계의 역사학 연구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독일,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등에서 랑케의 영향을 받은 역사학자들이 등장했다. 랑케의 세미나(Seminar) 교육 방식은 역사학 교육의 중요한 모델이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전 세계 대학에서 활용되고 있다.랑케는 역사가 과거를 판단하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떠했는가"(wie es eigentlich gewesen)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24][25] 이러한 랑케의 역사주의는 각 시대의 특수성을 존중하고, 과거를 그 시대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는 역사 연구의 중요한 관점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랑케의 역사 서술과 경험주의에 대한 사상은 E. H. 카와 페르낭 브로델 등에 의해 도전을 받았다. 카는 랑케의 경험주의가 순진하고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비판하며, 역사가는 사실을 선택하고 해석하는 주체라고 주장했다. 발터 벤야민은 랑케의 격언이 "19세기의 가장 강력한 마약"을 나타낸다고 비판했다.[28]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는 한국의 중도진보 성향의 역사학자들은 랑케의 객관적 역사 연구 방법론을 수용하면서도, 그의 보수적인 정치적 입장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이들은 역사 연구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관점을 반영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6. 수상
수여 국가 | 훈장 이름 | 등급 | 수여 날짜 |
---|---|---|---|
바덴 | 자링거 사자 훈장 | 1등급 | 1856년[1][30] |
바이에른 왕국 | 바이에른 과학예술 막시밀리안 훈장 | 1853년[1] | |
성 미카엘 공로훈장 | 대십자장 | 1866년 | |
벨기에 | 레오폴드 훈장 | 1841년 10월 22일[1][32] | |
헤세 대공국 | 필립 대왕 공로훈장 | 1등급 | 1875년 3월 31일[1][33] |
그리스 왕국 | 구세주 훈장 | 대십자장 | |
세르비아 왕국 | 성 사바 훈장 | 대십자장 | |
스웨덴-노르웨이 | 북극성 훈장 | 대십자장 | |
뷔르템베르크 | 뷔르템베르크 왕관 훈장 | 1등급 | 1842년[35] |
프리드리히 훈장 | 1등급 | 1865년[35] | |
프로이센 왕국 | 붉은 독수리 훈장 | 2등급, 월계관 장식 | 1850년[36] |
호엔촐레른 가문 훈장 | 사령관 훈장 | 1851년 10월 14일[36] | |
공로훈장 | 1855년 1월 22일[36] | ||
프로이센 왕관 훈장 | 1등급 | 1877년 2월 17일[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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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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