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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나리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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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마즈 나리오키는 1791년 사쓰마 번의 10대 번주로, 1859년 사망했다. 그는 1809년 번주가 되었으나, 초기에는 조부 시마즈 시게히데의 영향 아래 있었고, 1833년 시게히데가 사망한 후 실권을 장악했다. 즈쇼 히로사토를 등용하여 덴포 개혁을 추진, 재정을 회복했으나, 밀무역 문제로 히로사토가 사망하면서 개혁은 중단되었다. 그의 후계자 문제로 오유라 소동이 발생했고, 결국 아들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번주가 되었다. 나리아키라 사후에는 다시 번정을 장악했으나, 복고 정책을 시행하다가 사망했다. 그는 사쓰마 번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으며, 밀교에 관심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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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나리오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시마즈 나리오키
이름시마즈 나리오키
원어 이름島津斉興
출생간세이(寛政) 3년 11월 6일 (1791년 12월 1일)
사망안세이(安政) 6년 9월 12일 (1859년 10월 7일)
초명충온(忠温)
묘소가고시마현가고시마시이케노우에초의 시마즈 가문 묘지
계명금강원전명각량인대거사(金剛院殿明覚亮忍大居士)
가문 정보
씨족시마즈 씨
아버지시마즈 나리노부
어머니스즈키 가쓰나오의 딸 (사타케 요시마사의 양녀)
배우자정실: 미히메(弥姫) (슈코(周子), 겐쇼인(賢章院)), 측실: 오유라노카타, 세키네 쓰네타다의 딸, 니시나리 준의 딸
자녀나리아키라, 이케다 나리토시, 순히메, 코우히메, 히사미쓰, 양녀: 오키코, 하루히메
형제자매혼다 야스츠구의 처, 강지진(剛之進), 다다키미, 직지조(職之助), 수희(随姫), 무오랑(武五郎), 총희(聡姫), 태지진(泰之進), 다다타케, 겸차랑(謙次郎), 번지진(繁之進), 마쓰다이라 야스토시의 처, 청이조(清二郎), 마쓰다이라 가쓰요시, 다네가시마 히사미치, 풍지승(風之丞), 신팔랑(信八郎), 오쿠보 다다아쓰의 처
관직 및 직위
관위종4위하 시종, 분고노카미, 좌근위권소장, 종4위상 좌근위권중장, 오스미노카미, 정4위하 참의, 정4위상, 종3위
주군도쿠가와 이에나리 → 도쿠가와 이에요시
사쓰마가고시마번 번주
주요 활동
시대에도 시대 후기
막부에도 막부
다이묘 임기 시작1809년
다이묘 임기 종료1851년
이전 영주시마즈 나리노부
다음 영주시마즈 나리아키라

2. 생애

1791년 11월 6일, 시마즈 요시노부의 장남으로 에도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모 가문인 스즈키 씨족은 낭인이었고, 나리오키가 태어난 후 시마즈 씨족과 스즈키 씨족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3]

1804년 10월, 원복도쿠가와 이에나리로부터 칭호를 받았고, 이름을 타다요시/타다하루/타다아츠에서 사이오키로 개명했다. 그는 정4위하, 시종, 분고노카미에 임명되었다.

1809년 6월, 아버지 요시노부가 할아버지 시마즈 시게고에 의해 킨시로쿠 붕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은퇴하게 되면서, 씨족의 수장이 되어 10대 영주가 되었다. 그러나 영주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지 행정 개혁 등의 실권은 시게고에게 있었다.

1833년, 시게고가 89세로 사망하자 영지 행정을 장악하고, 재정 개혁에 중점을 둔 사쓰마 번을 이끌 인물로 영지 개혁의 핵심 인물이었던 초쇼 히로사토를 임명했다. 그는 영지의 덴포 개혁에 착수했다. 호적국의 지도 아래, 영지의 행정 개혁은 250년 분할 상환, 청나라와의 밀무역, 설탕 독점, 위조 지폐 제조 등 큰 효과를 거두었고, 사쓰마 번의 재정은 빠르게 회복되었다.[3]

1848년 에도 막부로부터 밀무역을 책망받아 책임자인 초쇼 히로사토는 12월에 급사했다. 나리오키에게 책임이 미치지 않도록 죄를 혼자 뒤집어쓰고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대외 위기 고조에 즈음하여 양식 포술 채용을 결정하고 번사를 나가사키에 파견하여 배우게 하거나 주조장을 설치하여 대포 제조 등에도 착수했다.

나리오키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번 내부에서 분쟁이 있었다. 나리아키라의 성인 아들은 정실 부인 야히메(슈코)(이케다 하루미치의 딸, 돗토리번 번주)에게서 적자를 두었고, 측실 오유라에게서 다섯째 아들 히사미츠를 두었다. 원래 장남이 뒤를 이을 예정이었지만, 나리아키라는 오유라와 히사미츠를 반대했다. 그러나 번 내부에는 총명한 나리아키라를 후계자로 추천하는 사람이 많았고, 1849년 12월, 오유라 소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시마즈 히사미츠와 그의 어머니 오유라를 암살하려는 음모였으며, 야마다 세이야스, 다카사키 고로에몬, 곤다 류자에몬을 포함한 50명 이상이 다카사키 나리아키라를 지지하려 했지만,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강제로 자결했다. 그 후 번은 분열되었고 갈등이 계속되었다. 1851년 2월, 아베 마사히로의 조정에 의해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가독을 잇게 되었다.[1]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급사한 후, 교토로의 군사 원정을 취소하고, 안세이 대옥으로 교토에서 사쓰마로 도망친 겟쇼의 보호를 거부했으며, 사이고 다카모리의 신분을 아마미오시마에 숨기고, 쇼군에게 사이고의 죽음을 알렸다. 또한 슈세이칸의 축소 명령과 같은 개혁 정책을 수행했지만, 1859년 9월 12일 병으로 사망했다.[2]

그의 관직 임명과 승진은 다음과 같다.

날짜관직
1804년 10월원복. 도쿠가와 이에나리로부터 한 글자를 받아 사이오키(斉興)로 명명. 종4위하 시종 임관. 분고노카미 겸임.
1809년 6월 17일가독 상속.
1809년 12월 16일사콘노곤쇼쇼 전임. 분고노카미 겸임 유임.
1818년 12월 16일종4위상 승서, 사콘노곤츄조 전임. 분고노카미 겸임 유임.
1832년 5월 16일겸임의 분고노카미에서 오스미노카미로 개임.
1832년 윤 11월 2일정4위하 승서. 사콘노곤츄조·오스미노카미 유임.
1838년 12월 5일산기 보임.
1842년 12월 1일정4위상 승서. 산기 유임.
1851년 2월 2일은거.
1857년 12월 15일종3위 승서.


2. 1. 가독 승계

간세이 3년(1791년 11월 6일), 9대 번주 시마즈 나리노부의 장남으로 에도에서 태어났다. 생모의 친가인 스즈키씨는 낭인이었기 때문에, 나리오키 출생 후에 번과 스즈키씨 간의 다툼이 일어났다.

분카 원년(1804년) 10월에 원복을 하고,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에게서 를 받아 초명이었던 忠温 (타다요시/타다하루/타다아츠)에서 나리오키로 개명하고, 종4위하 시종 겸 분고노카미에 취임했다.

분카 6년(1809년) 6월, 킨시로쿠 붕괴의 책임을 지는 형태로 아버지 나리노부가 할아버지 시게히데에 의해 강제 은거당했기 때문에, 그 뒤를 이어 10대 번주가 되었다. 그러나 번주가 되긴 했지만, 번정 개혁 등의 실권은 시게히데에게 있었다.

2. 2. 덴포 개혁

덴포 4년(1833년), 시게히데가 89세로 세상을 떠나자 비로소 번정의 실권을 잡고, 시게히데 대부터의 번정 개혁의 중신 카라스 쇼히로를 중용하여, 재정 개혁을 주로 한 사쓰마번의 덴포 개혁에 착수했다. 번정 개혁에서는 조쇼 주도로, 빚의 250년 분할 지급이나 과의 밀수, 설탕의 전매, 위조 지폐 제작 등이 크게 효과를 나타내, 사쓰마 번의 재정은 단번에 회복되었다.[3] 그러나 가에이 원년(1848년), 막부로부터 밀무역 건으로 책망받아, 책임자인 조쇼는 12월에 급사했다. 사이오키에게 책임을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해 혼자 죄를 뒤집어쓰고,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대외 위기의 고조에 즈음하여, 양식 포술의 채용을 결정, 번사를 나가사키에 파견하여 배우게 하거나, 주조소를 설치하여 대포의 제조 등에도 착수했다.

2. 3. 오유라 소동

이 무렵, 시마즈 나리오키의 후계를 둘러싸고 번 내에서는 분쟁이 일어났다. 나리오키의 아들 중 성인이 된 남자는 정실 이요히메(돗토리번주 이케다 하루미치의 딸)와의 사이에서 낳은 적자 시마즈 나리아키라와 측실 오유라노카타와의 사이에서 낳은 5남 시마즈 히사미쓰가 있었다. (차남 이케다 나리토시는 오카야마 이케다씨를 계승함).[1]

원래라면 적남인 나리아키라가 이어야 했지만, 나리오키는 오유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히사미쓰를 편애하였기 때문에, 그를 후계자로 하려했었다. 그러나 번내에서는 총명한 나리아키라를 후계자로 권하는 사람이 적지 않아, 가에이 2년(1849년) 12월에 오유라 소동이 발발했다. 이는 나리아키라의 옹립을 바라는 야마다 기요야스(山田清安), 타카사키 고로에몬, 콘도 류자에몬 등 50여 명이 대립하는 히사미쓰와 그의 생모 오유라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있었지만, 사전에 계획이 드러나 자살한 사건이다.[1]

이 후에도 번 내에서는 나리아키라파와 히사미츠파로 나뉘어 대립이 끊이지 않았으나, 가에이 4년(1851년) 2월, 로주 아베 마사히로의 조정에 의해, 나리오키는 은거하고, 나리아키라가 가독을 잇게 되었다.[1]

2. 4. 만년

안세이 5년 (1858년) 7월 16일, 나리아키라가 50세의 나이로 급사하자, 나리아키라의 유언에 따라 히사미쓰의 장남 다다요시가 어리다는 이유로 다시 번정을 장악하였다.[2] 나리아키라가 계획했던 병사를 거느리고 상락하는 것을 취소하고, 안세이의 대옥에서 교토에서 사쓰마로 도망쳐온 겟쇼의 보호를 거부했지만, 사이고 다카모리의 신병에 대해서는 아마미 오오시마에 숨기고, 막부에는 사이고는 죽었다고 위장했다.[2] 또, 집성관 사업의 축소를 명하는 등, 복고 정책을 실시했지만, 안세이 6년 (1859년) 9월 12일에 69세 (만 67세)의 나이로 병사했다.[2]

3. 가계

항목내용
아버지시마즈 나리노부 (1774년 ~ 1841년)
어머니사타케 요시마사의 양녀 - 스즈키 카츠나오의 딸 (측실)
정실이요히메 (1792년 ~ 1824년) - 카네코, 켄쇼인, 이케다 하루미치의 딸
장남시마즈 나리아키라 (1809년 ~ 1858년)
차남이케다 나리토시 (1811년 ~ 1842년)
차녀코우히메 (1815년 ~ 1880년) - 야마우치 토요테루의 정실
4남모로노스케 (諸之助, 1817년 ~ 1819년) - 요절
6남친노스케 (珍之助, 1819년 ~ 1820년) - 요절
측실오유라노카타 (1795년 ~ 1866년) - 쵸닌 출신
3녀사토히메 (智姫, 1815년 ~ ?) - 요절
5남시마즈 히사미츠 (1817년 ~ 1887년) - 타네가시마 히사미치, 시마즈 타다키미의 양자
7남유시치로 (唯七郎) - 요절
측실세키네 츠네타다의 딸
측실니시나리 준의 딸
약혼자토미 - 마츠다이라 하루사토의 딸
생모 불명의 자녀혼다 야스아키의 정실 (장녀 : 順姫)
양녀



쇼와 천황의 황후인 고준 황후는 나리오키의 4대손(외증손녀), 아키히토는 5대손, 나루히토는 6대손에 해당한다.

4. 평가

시마즈 나리오키는 사쓰마 번의 경제 발전을 이끌었으며, 이는 막말 시대의 중요한 재산이 되었다.[1] 정실인 미히(슈시)와 사이가 좋지 않아 아들 나리아키라를 싫어했다는 설과, 반대로 사이가 좋았다는 설이 공존한다.[2]

나리아키라의 급작스러운 죽음에 대해서는 나리오키가 막부와의 대립을 강화하는 아들에게 불만을 품고 독살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한다.[3] 그러나 나리아키라 역시 막부의 간섭에 불만을 가졌다는 자료도 남아있다.[3]

나리오키는 종삼위 관직 승진을 위해 은퇴를 미뤘다는 의혹을 받았으며,[4] 은퇴 후에도 아들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정치에 관여하려 했다.[5]

한편, 사쓰마 번의 유리 제조 기술인 사쓰마 기리코는 나리오키가 에도에서 유리 장인을 초빙하여 시작된 것이다.[6] 그는 밀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1810년 이전에는 "료닌"이라는 법휘를 받았으며, 1822년에는 대승도 법인의 면장을 받았다.[7] 또한 1821년에는 영내 사찰에 『법화경』의 "보문품"을 하사하기도 했다.[7]

4. 1. 긍정적 평가


  • 사쓰마 번은 시마즈 나리오키(사이코) 시대에 이루어진 개혁으로 경제 발전을 이루었고, 이는 막말기의 재산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1]
  • 젊은 시절부터 밀교에 대한 관심이 강했다. 1810년 이전에 다이카쿠지의 몬제키 료신으로부터 "료닌"이라는 법휘를 받았으며, 1822년 6월에는 재속인 채로 대승도 법인의 면장을 받았다.[7]
  • 1821년에는 지샤 봉행을 통해 영내 전역의 사찰에 『법화경』의 "보문품"을 하사했다.[7]
  • 사쓰마 기리코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사쓰마 번의 유리 제조는, 시마즈 나리오키가 제약관을 설치했을 때, 에도에서 유리 장인을 초빙하여 약병을 제조하게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6]

4. 2. 부정적 평가


  • 시마즈 나리오키(島津斉興)가 은거하지 않은 것은 종삼위 관위 승진을 노렸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 때문에 은거해도 관위 승진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자 은거했다고 한다.[1]
  • 은거 후에도 아들인 나리아키라후견하겠다고 선언하여, 이를 그만두게 하는 데 반년이 걸렸다고 한다.[1]
  • 나리아키라의 급사에 관해서는, 막부와 대립 자세를 강화하는 나리아키라의 자세에 불만을 가진 나리오키가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나리아키라가 막부의 뜻대로 되는 것에 불만을 느꼈다는 자료가 존재한다.[1]

4. 3. 종합적 평가

사쓰마 번은 시마즈 나리오키 시대에 이루어진 개혁으로 경제 발전을 이루었고, 이는 막말기의 재산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1] 나리오키는 정실인 미히(슈시)와 사이가 좋지 않아 미히 소생의 아들인 나리아키라를 싫어했다고도 하지만, 반대로 미히와 사이가 좋았다는 설도 있다.[2] 나리오키는 미히와의 사이에 4남 1녀를 두었는데, 이는 사쓰마 번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2]

나리아키라의 급사에 관해서는 막부와 대립하던 나리아키라에게 불만을 품은 나리오키가 독살했다는 설이 있다.[3] 그러나 나리아키라가 막부의 뜻대로 되는 것에 불만을 느꼈다는 자료도 존재한다.[3]

나리오키가 은거하지 않았던 것은 종삼위로의 관위 승진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4] 은거 후에도 나리아키라를 후견하겠다고 선언하여 이를 그만두게 하는 데 반년이 걸렸다고 한다.[5]

사쓰마 기리코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사쓰마 번의 유리 제조는 나리오키가 제약관을 설치했을 때, 에도에서 유리 장인을 초빙하여 약병을 제조하게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6]

나리오키는 젊은 시절부터 밀교에 대한 관심이 강했고, 1810년 이전에 다이카쿠지의 몬제키 료신으로부터 "료닌"이라는 법휘를 받았으며, 1822년에는 재속인 채로 대승도 법인의 면장을 받았다.[7] 또한, 1821년에는 지샤 봉행을 통해 영내 전역의 사찰에 『법화경』의 "보문품"을 하사했다.[7]

5. 기타

시마즈 나리오키는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면모를 보였다.

5. 1. 시마즈 나리오키와 "직간비법"

사쓰마 번의 유리 제조는 시마즈 나리오키가 제약관을 설치했을 때, 에도에서 유리 장인을 초빙하여 약병을 제조하게 한 것에서 시작되었으며, 사쓰마 기리코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5]

나리오키는 젊은 시절부터 밀교에 대한 관심이 강했다. 1810년 이전에는 다이카쿠지의 몬제키 료신으로부터 "료닌"이라는 법휘를 받았으며, 1822년에는 재속인 채로 대승도 법인의 면장을 받았다. 1821년에는 지샤 봉행을 통해 영내 전역의 사찰에 『법화경』의 "보문품"을 하사했다.[5]

가고시마현 역사자료센터 레이메이칸에는 "타마자토 시마즈가 자료" 중 하나로 『직간경작법전서』라고 불리는 흑칠 칠기함에 담긴 문서군이 존재한다. 금니가 칠해진 함의 뚜껑 표제 및 뒷뚜껑에 적힌 목록의 글자는 나리오키 본인의 친필이며, 칠보가 새겨진 목록에는 분세이 11년 2월 25일의 날짜와 나리오키 자신의 화압이 있어 나리오키 자신이 작성·보관한 문서군임을 알 수 있다.[5]

나리오키는 니니기노미코토로부터 삼종신기와 함께 대대로 전해 내려온 역대 천황의 비법이 세이와 천황을 거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시마즈 타다히사에게 전수했고, 시마즈 미츠히사 시대에 "호랑이 두루마리 비법"은 잃었다고 속이고 몰래 "직간 비법"으로 고쳐 역대 당주만이 아는 "최극심심비사"로 했다고 주장했다. 즉, "니니기노미코토 이래의 역대 천황의 비법이 세이와 겐지의 적통인 시마즈가 당주에 의해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6]

『직간경작법전서』는 나리오키가 존재를 주장하는 "직간 비법(호랑이 두루마리 비법)"에 관한 집대성이며, 그 안에 있는 『호랑이 두루마리 근본 제작법 최구전 규칙』이라는 나리오키 친필의 문서에는 1827년에 이오 섬에서 야타노카가미가 발견되어 나리오키가 이것을 입수했을 때의 감회가 적혀 있다. 나리오키는 교토 고쇼 (당시)에 있는 야타노카가미는 진짜가 아니고, 진짜는 안토쿠 천황에 의해 이오 섬으로 반출되었으며, "직간 비법"의 실천자인 자신이 얻게 되었다고 확신하여, 우에야마 성(현재의 조잔)에 궁을 조성하여 안치했다고 한다.[7] 안토쿠 천황의 후예를 자처했던 이오 섬의 나가하마가(소위 "나가하마 천황")에는 시마즈가에 의해 내용물을 가져갔다고 하는 "열리지 않는 상자" 사건이 전해지고 있으며,[8] 이 두 사건은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리오키가 입수하여 진짜라고 주장한 야타노카가미와 그것을 수납한 궁의 소재는 현재는 불명이다.[9]

5. 2. 등장 작품

참조

[1] 서적 Saigo Takamori - The Man Behind the Myth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2-10-12
[2] 서적 Origins of Japanese Wealth and Power: Reconciling Confucianism and Capitalism, 1830–1885 https://books.google[...] Springer 2006-02-04
[3] 문서 薩藩旧記雑録
[4] 서적 2016
[5] 서적 2016
[6] 서적 2016
[7] 서적 2016
[8] 서적 2016
[9] 서적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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