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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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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일은 함경남도 단천군 출신으로, 한국 전쟁 당시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춘천 및 홍천 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조선인민군의 자주포 공격에 맞서 육탄 공격을 감행하여 자주포 3대를 격파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중위로 특진하고, 태극무공훈장은성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사후 소령으로 추서되었다. 그러나 2016년, 그의 전공이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이에 국방부는 두 개의 상반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후 국방부 공적 확인 위원회에서 심일의 공적은 사실로 결론 내렸지만, 육군의 심일상 수여는 보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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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심일
씨족청송(靑松)
침랑(浸朗)
출생1923년 6월 5일
출생지일제강점기 함경남도 단천시
사망1951년 1월 26일 (향년 27세)
사망지대한민국 강원도 영월군 북면 마차리
묘소국립서울현충원 서울 위패 47번 3면 29호
군사 경력
소속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1949년 ~ 1951년
최종 계급대한민국 육군 대위 (사후 대한민국 육군 소령 추서)
근무육군 제6사단
육군 제7사단
지휘육군 제6사단 제7연대 대전차포대 제2소대장
육군 제7사단 예하 수색대대 수색중대장
주요 참전 전투/전쟁한국 전쟁
서훈 내역1951년 7월 26일 태극무공훈장 추서
서명Sim Il.jpg

2. 생애

함경남도 단천군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수료하고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 1949년 5월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춘천에 배치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제6사단 7연대 대전차포대 2소대장으로 참전했다. 남하하는 조선인민군의 SU-76 자주포에 맞서 아군의 대전차포가 효과가 없자, 5명의 특공대와 함께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적 포탑에 뛰어드는 육탄공격을 감행하여 자주포 3대를 격파하였다.

이러한 전공은 국군 전체에 퍼져 조선인민군의 전차 및 자주포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육탄공격 전술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개전 초기 조선인민군의 남진을 늦춰 국군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국제연합군이 참전할 시간을 버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후 충청북도 음성군, 경상북도 영천 등지에서도 전투에 참여했으며, 1951년 1월 26일 강원도 영월군에서 전사할 때까지 제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중위로 1계급 특진되었고, 사후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9호)과 미국 육군은성훈장이 추서되었으며, 소령으로 추서되었다.[13][14]

대한민국 육군은 심일 소령의 군인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2년 심일상을 제정, 2003년부터 매년 그의 전사일인 1월 26일에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우수 장교에게 시상하고 있다.[15] 강원도 영월군 북면 마차리에는 그의 생도 시절 교관이었던 손희선 육군대학 명예교수 등의 주도로 위령비가 건립되었다.

2. 1. 초기 생애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수료하고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하여, 1949년 5월 육군 소위로 임관해 춘천에 배치되었다.[13]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조선인민군의 남진을 지연시켜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국제연합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데 기여하였다.

2. 2. 한국 전쟁 참전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육군 제6사단 7연대 대전차포대 2소대장으로 참전했다.[13] 조선인민군의 SU-76 자주포가 아군의 대전차포를 맞고도 포탄을 쏘아대며 계속 전진해오자, 심일은 5명의 특공대를 편성해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적의 포탑 위로 돌진하는 육탄공격을 감행하여 조선인민군의 자주포 3대를 격파했다.[13]

이러한 전공으로 조선인민군의 전차 및 자주포에 대한 공포심을 떨쳐버리고, 모든 전선에서 육탄공격으로 적의 전차를 파괴하는 계기가 되었다.[13] 또한 개전 초기 조선인민군의 남진을 지연시켜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국제연합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데 기여했다.[13]

심일은 이 공로로 소위에서 중위로 1계급 특진되었으며, 이후 충청북도 음성군, 경상북도 영천 등지의 전투에서도 참전했다.[13] 1951년 1월 26일 제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강원도 영월군에서 조선인민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13]

2. 3. 전사

1951년 1월 26일 제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강원도 영월군에서 조선인민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13]

사후 1951년 7월 26일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9호)이 수여되었고, 11월 11일 소령으로 추서되었다.[13] 1954년 6월 12일에는 미국 육군은성훈장이 추서되었다.[14]

그 뒤 그의 생도 시절 교관이었던 손희선 육군대학 명예교수 등의 주도로 그가 전사한 곳인 강원도 영월군 북면 마차리에 위령비가 건립되었다.

2. 4. 사후

심일은 1951년 1월 26일 제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임무를 수행하던 중 강원도 영월군에서 조선인민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13]

사후 1951년 7월 26일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9호)이 수여되었고, 11월 11일 소령으로 추서되었다.[13] 1954년 6월 12일에는 미국 육군은성훈장이 추서되었다.[14]

그의 생도 시절 교관이었던 손희선(孫熙善) 육군대학 명예교수 등의 주도로 그가 전사한 강원도 영월군 북면 마차리에 위령비가 건립되었다.

대한민국 육군은 심일 소령의 군인정신과 유훈을 기리기 위해 2002년 심일상을 제정하였다. 이는 군단 단위 전투부대 중대장 가운데 탁월한 리더십과 지휘통솔력을 발휘한 우수 장교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2003년부터 매년 심일 소령이 전사한 1월 26일에 시상하고 있다.[15]

3. 공적 논란

심일의 공적에 대한 논란은 2016년 이대용 전 주월공사의 폭로로 시작되어, 육군국방부의 조사, 그리고 공청회까지 이어지며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

이대용은 춘천 및 홍천 전투 당시 심일이 육탄 공격은커녕 적전 도주했으며, 이후 전공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16][17] 그는 심일이 조선인민군 전력에 압도당해 퇴각하면서 57mm 대전차포 1문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이 때문에 보직 해임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심일은 제6사단 소속으로 1950년 10월 중국인민지원군에게 포위되었다가 낙오되어 묘향산 인근에서 사살되었으며, 전공 조작은 1951년 제7연대장 양중호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방부 공적확인위원회는 1950년 6월 25일 옥산포 전투와 6월 26일 소양강 전투에서 심일이 각각 3대의 적 자주포를 파괴했다는 결론을 내렸다.[24] 위원회는 제6사단 전투상보, 미국 군사 고문관 맥페일의 은성훈장 추천서, 태극무공훈장 공적서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육군군사연구소는 이대용의 주장을 지지하며, 생존자 증언, 제7연대 약사, 1차 사료 등을 검토한 결과 심일의 육탄 공격은 없었다고 밝혔다. 또한 은성훈장 추천서의 신뢰성에 문제를 제기하며, 조선인민군 측 자료를 분석하여 옥산포 일대에 유기된 자주포는 조선인민군이 스스로 자폭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2017년 1월 24일 열린 공청회[27]에서는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지만,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 이후 국방부는 심일의 무공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최종 결론을 발표했지만,[30] 학계 일각에서는 여전히 의혹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32]

논란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 1950년 6월 25일 옥산포 전투: 심일이 대전차포 1문을 유기하고 도주했는지, 실제 자주포를 파괴했는지 여부
  • 1950년 6월 26일 소양강 전투: 전투 자체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심일이 자주포를 파괴했는지 여부
  • 태극무공훈장은성훈장 수여 과정: 전공이 조작되었는지, 훈장 추천 및 수여 과정에 문제가 없었는지 여부


이러한 논란 속에서 대한민국 육군은 '심일상' 수여를 잠정 보류한 상태이다.[29]

3. 1. 이대용의 폭로 (2016년)

춘천 및 홍천 전투 당시 제7연대 제1대대 1중대장이었던 이대용 전 주월공사는 심일의 전공이 사후 거짓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폭로했다.[16][17] 이대용은 당시 전황 및 사후 조작 경위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심일은 춘천 및 홍천 전투 당시 육탄공격은커녕 조선인민군 전력에 압도당해 적전 퇴각했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심일은 제7연대 대전차포 중대장 송광보(당시 대위)의 명령에 따라 2소대 소속 57mm 대전차포 2문을 5번 국도 보대이벼루 도선장(지내리 남쪽 1.5km) 부근에 방렬하였다. 그러나 심일은 SU-76 자주포를 앞세우고 남하하는 조선인민군 제2사단 제6연대 병력에 중과부적이라고 판단하여 2탄을 사격한 뒤에 퇴각해버렸다.[18] 이 과정에서 수렁에 빠진 57mm 대전차포 1문을 그대로 버리고 달아난 점이 문제가 되어 심일은 보직 해임되었다. 6월 25일 개전 당일 조선인민군 제2사단이 춘천으로 진입하지 못한 것은 심일의 육탄공격 때문이 아니라, 김성(당시 소령)이 지휘하는 제6사단 제16포병대대의 정확한 곡사포격 때문이었다.[19] 다음 날인 6월 26일 아침에는 제7연대 제1대대가 방어진지에서 나와 옥산포에 기습적인 반격을 가해 조선인민군이 SU-76 자주포 5대를 유기·자폭하고 일시 퇴각하게 만들었다.[20] 심일은 이러한 제6사단의 성공적인 춘천 방어작전 과정에서 별다른 전공을 세우지 못했으며, 이후 한직인 포병 연락장교로 좌천되었다.

심일은 제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싸우다 영월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었다. 심일은 계속 제6사단 소속으로 남아있었으며, 1950년 10월 초산 및 온정리 전투에서 사단이 중국인민지원군에게 포위되었다 탈출하는 과정에서 낙오되었다. 그 후 동료 장교 1명(안태석), 사병 3명과 함께 묘향산 인근 화전민 움막에 숨어있던 도중 11월 10일경 중국인민지원군에게 발각되어 사살되었다. 이 사실은 당시 함께 있다 중국인민지원군의 포로가 되었던 안태석(당시 중위)이 다시 탈출, 1951년 3월 경에 제7연대로 복귀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당초 전사일자로 알려진 1951년 1월 26일제6사단이 후방에서 부대를 재편성하며 1·4 후퇴중 실종된 장병들의 군적을 정리한 날짜였다.

사후 전공 조작은 1951년 제7연대장 직을 맡고 있던 양중호(당시 대령)에 의해 주도되었다. 당시 심일의 4형제 중 2명(심일, 심익)이 전사하고 1명(심민)은 빨치산 토벌작전 참가 후 투병 중이었기 때문에, 유족은 매우 곤궁한 처지였다. 이들의 딱한 처지를 염려한 양중호는, 춘천 및 홍천 전투 당시 연대의 성공적인 방어작전 과정에서 심일과 육탄 5용사가 수류탄, 화염병 돌격으로 적 전차를 격파했다는 일화를 집어넣어 거짓으로 훈장을 상신할 것을 지시했다. 이 훈장 상신서의 전공에 주목한 국방부 정훈국의 이옥섭은 이를 『국방』 지에 특필하였다. 이후 심일은 대대적으로 알려지고 전쟁 영웅화되었다.

특히 손희선은 자신이 교관 시절에 가르친 노몬한 전투 당시 일본군의 대전차 육탄돌격 전술을 심일이 모범적으로 수행한 것에 크게 감명받아 영웅화 작업을 적극 후원하였다. 심일이 중국인민지원군 포위망을 탈출한 후, 원 소속이던 제6사단 제7연대가 아닌 제7사단을 찾아가 수색중대장을 맡았다가 전사했다는 이야기도 손희선이 꾸며낸 이야기이다.

이대용, 양중호, 옥산포 전투 당시 제7연대장 임부택 등 내막을 알던 지휘관들은 진실을 밝힐 경우 유족들이 입을 상처를 염려하여 심일의 양친 사후에 진실을 밝히기로 하였다. 그러나 심일의 모친이 장수(2005년 3월 2일 사망)하면서, 이 사이 양중호(1969년 7월 19일 사망), 임부택(2001년 11월 13일 사망) 등 관계된 지휘관들은 상당수 작고하였다. 이대용은 더 늦기 전에 사실을 바로잡기 위해 단독으로 폭로에 나섰다고 밝혔다.

2016년 6월 17일, 조선일보의 최보식 기자가 칼럼에 게재한 이대용 장군의 인터뷰를 실은 기사에서 그 전공이 날조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당시 제7연대 제1대대 중대장이었던 이대용 예비역 준장에 따르면, 심일은 실제로는 육박전을 하지 않고, 포 1문을 포기하고 도망쳤다고 한다.[2] 그리고 포를 버린 것이 문제가 되어 한직인 포병 연락 장교로 좌천되었고, 1951년 1월 묘향산에서 숨어 있다가 중공군에 포위되어 사살된 것이 탈출한 장교에 의해 전해졌다.[2] 심일의 부모가 제7연대를 찾아 "학도병으로 나간 셋째 아들의 생사는 불분명하고, 공비 토벌을 하던 둘째 아들은 병에 걸렸으며, 장남(심일)도 죽었고, 이제 막내만 남았다"고 울부짖었다.[2] 이에 동정심을 느낀 연대장이 "훈장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훈장 상신서를 제출했다고 한다.[2]

국방부의 지시에 따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와 육군군사연구소가 각각 자체적인 연구를 통해 각기 다른 결론을 내렸다.

2016년 7월 4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고 심일 소령 관련 조선일보 보도 검토 결과"를 보고했다. 당시 전투 상황, 제6사단 전투 상세 보고, 당시 제7연대장 등의 증언 등을 토대로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전공은 모두 사실로 확인되었다.

2016년 8월 11일, 육군전사연구소는 "고 심일 공적 진위 확인 결과"를 제출했다. 2016년 7월 6일 이대용과 면담한 결과를 토대로 8가지 쟁점을 제시했다.

# 심일은 자주포를 파괴하지 않았고, 육박전을 하지 않았다.

# 자주포는 6월 26일에 파괴되었지만, 이는 적의 승무원이 스스로 파괴했다.

# 육탄 5용사는 날조되었다.

# 심일은 보직 해임되었고, 제16포병대대에 전속되었다.

# 제7사단 수색 중대장으로 보내졌다는 손희선의 주장은 거짓이다.

# 심일은 묘향산에서 전사했고, 그것을 안서택이 보고 전사로 처리되었다.

# 심일의 어머니를 위해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기로 했다.

# 이옥섭에 의해 공적이 알려졌고, 손희선이 확산시켰다.

이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심일은 자주포를 파괴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

2016년 9월 20일에 "고 심일 소령 공적 확인 위원회"가 발족했다. 국방부 정책실은 객관적인 검증을 위해, 육군군사연구실 추천 전문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추천 전문가 각 3명과 한민구 국방부 장관 추천 위원 1명으로 총 7명으로 구성되었다.[3] 육군군사연구소 측 전문가는 이현수 전 육사 교수부장, 노영구 국방대학교 교수, 최홍석 청주대학교 교수였고,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측 전문가는 온창일 육사 명예교수, 김광수 육사 명예교수, 나종남 육사 교수였으며, 국방부 장관에 의해 추천된 위원은 허남성 국방대학교 명예교수였다.[3]

발족 이후, 밝혀지지 않았던 중요 자료 (실버스타 관련 서류, 태극무공훈장 관련 서류, 북한군 제262부대 훈장 상신서 등)가 발굴되어 공개되었다. 또한 발단이 된 이대용 등 생존자, 춘천 전투의 목격자와 구술 면담을 실시했고, 제기된 몇몇 문제의 확인과 검증을 위해, 미국 육군 역사 연구 센터(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영어)와 러시아 연방군 군사학술연구소(Nauchno-issledovatel'skiy institut(voyennoy istorii) VAGSH VS RFru)에 접촉하여 자문을 구했다.

2016년 11월 8일, 공적 확인 위원회는 옥산포, 소양강 일대에서 현장 검증을 실시했다. 검증의 초점은 6월 25일 오전 10시경 5번 국도를 따라 도주하는 심일을 목격했다는 이대용의 주장이었다. 공적 확인 위원회는 전투 상세 보고, 작전 일지, 관계자 증언, 평면 및 입체 지도를 사용한 도상 연구 등을 통해 이대용의 증언 내용에 문제 제기했다. 이대용과 심일 사이가 1~1.5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는 점, 6월 25일 새벽부터 비가 내려 안개가 짙어 시야가 좋지 않았다는 점, 5번 국도 서쪽에 있는 뽕밭 등 주변 환경으로 인해 전투복을 입은 군인의 식별이 쉽지 않다는 점을 고려했다. 이러한 요소들은 현장 검증에서 중점적으로 검토되었지만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었고, 이대용의 증언을 받아들일지는 보류했다.

또한 공적 확인 위원회는 당시 적에게 노출되어 있던 심일과 소대원이 취해야 할 행동은 신속하게 후방으로 철수 또는 퇴각하는 것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도주보다는 긴박한 전술적 상황에 따른 조치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대용이 심일의 행동을 도주로 표현한 이유를 찾을 수는 없었다.

2016년 11월 15일, 공적 확인 위원회에 출석한 이대용의 증언 청취가 진행되었다. 도주한 심일을 목격한 건에 대해 이대용은, 5번 국도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았고, 비도 이미 그쳐 육안으로 충분히 관측할 수 있었으며, 오전 10시 이후 심일을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공적 확인 위원회는, 이대용이 오후의 옥산포 전투 참가, 6월 26일 오전의 소양강 전투의 활약을 목격하지 못했고, 개전 초기에 심일을 목격한 시간은 오전 10시의 짧은 시간에 한정되며, 다른 행적에 대해서는 모두 전해들은 이야기였음을 파악했다.

이대용은, 포 1문을 포기하고 포병 연락 장교로 좌천된 것은 제7연대와 제16포병대대의 모두가 알고 있던 이야기라고 밝혔다. 사망했다는 이야기는 안태석 소위로부터, 심일의 부모가 두 번 연대 본부를 방문한 것은 연대장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진술했다.

공적 확인 위원회는, 1951년 1월과 5월에 부모가 연대 본부를 방문한 건에 대해, 중국군과 교전 중이었을 때 부대의 지휘소에 민간인이 방문하는 것이 가능한지 질문했다. 이에 대해 이대용은, 심일의 부모를 만난 적이 없고 방문했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은 것이라고 답했다.

1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 심일을 목격하는 것이 가능한지 질문했다. 이에 대해 심일을 봤다고 재차 강조했다. 또한 심일의 행동을 전술적 조치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대용은, 도주는 사실이며 당시를 아는 사람은 모두 알고 있었다고 답했다.

실버스타 훈장 추천서와 태극무공훈장 공적 문서의 내용을 알고 있는지 질문하자, 이대용은 알지 못한다고 답했고, 누가 엉뚱하게 조작했는지 알 수 없다고 반응했다.

이대용의 증언에 부정확한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어, 어머니가 연대장을 찾아 "공비 토벌을 하던 경찰의 차남이 병에 걸렸다"고 말했다고 전해지지만, 경찰청의 기록을 조사한 결과, 동생인 심민이 경찰에 입대한 것은 1952년 11월이었다.

3. 2. 육군군사연구소의 조사 (2016년)

이대용의 폭로 이후, 대한민국 육군육군사관학교 부설 육군군사연구소에 반박을 지시하였다. 육군군사연구소(소장 한설 준장)는 한 달 반에 걸친 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냈다.[21]

조사 내용내용
생존자 증언당시 전투 관련 생존자 13명과 면담 또는 통화한 결과, 모두 심일의 육탄 공격은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송광보 증언당시 제7연대 대전차포 중대장 송광보(당시 대위, 2016년 현재 캐나다 거주)는 최초 증언을 번복한 후 답변을 거부하였다.
제7연대 약사제6사단 제7연대의 전투기록을 담은 제7연대 약사(略史) 초판본(1955년 간행)에는 심일의 육탄 공격이 수록되어 있지 않았다. 이후 영웅화 작업이 진척된 뒤인 개정판(1978년)부터 해당 이야기가 들어갔다.
1차 사료전투상보, 작전일지 등 당대 1차 사료 검토 결과 심일의 육탄 공격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기타 자료여러 참전용사 회고록[19] 및 북한 측 사료를 검토해도 관련 기록은 없었다.
육탄 5용사심일과 함께 특공 공격을 벌인 것으로 알려진 육탄 5용사 김기삼(2등중사), 박태갑(하사), 홍일영(하사), 조군칠(하사), 심규호(일병) 5명 모두 병적기록부, 상훈, 전사기록 등이 없었다. 이 역시 조작된 가공의 인물로 판단된다.
사료 등장 시점1950~60년대의 주요 사료에는 심일의 전공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영웅화 작업이 본격화된 1970년대 중반 이후에야 등장하기 시작한다.



육군군사연구소의 조사 과정에서 1981년육군본부에서 이 문제를 내사했던 사실도 밝혀졌다. 당시 심일의 태극무공훈장 수여는 잘못된 것이라는 진정서가 접수되었으며, 이에 육군은 당시 육군본부 인사참모차장이었던 박경석 준장을 책임자로 하여 내부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다.

박경석의 증언에 의하면, 조사 당시 심일 주변 인물과 옥산포 근처에 있던 장병들 수십 명의 증언을 청취한 결과, 모두 허위 날조라는데 동의하였으며 이의를 제기한 사람도 없었다. 이에 박경석은 심일의 공적이 허위라는 결론을 내리고, 당시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김홍한 소장에게 태극무공훈장 삭탈을 건의했다. 그러나 당시는 5공화국 출범 초기로 어수선한 시기였기 때문에, 실제 삭탈 조치로 이어지지는 않았다.[22][23]

3. 3. 국방부 공적확인위원회의 조사 (2016년 ~ 2017년)

대한민국 국방부는 육군군사연구소의 조사 결과 발표 이후, 산하 전사 연구기관인 군사편찬연구소에 재검토를 지시하였다. 국방부는 2016년 9월, 국방부측 전문가 3명, 육군측 전문가 3명, 위원장 추천 1명으로 구성된 '고(故) 심일 소령 공적 확인위원회(위원장 온창일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를 구성하고 자체 진상조사에 착수하였다.[24]

위원회는 2017년 1월까지 8차례 회의를 통해 심일의 공적은 문제가 없으며, 이대용의 폭로는 사실무근이라는 최종 결론을 내렸다.[24] 위원회의 주요 결론 및 근거는 다음과 같다.[25]

  • 1950년 6월 25일제6사단 전투상보에는 "전차포중대장은…(중략)…적 전차가 근박함에 공격을 강행해 적 전차 2대를 격파 각좌시켜 수답을 낀 도로를 봉쇄 격퇴시켰다"는 구절이 있다. 격파 주체가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정황상 심일의 전공으로 추정된다.

  • 제6사단에 파견된 미국 군사 고문관 맥페일이 작성한 '심일의 은성훈장 추천서(1950년 9월 1일)'와 '태극무공훈장 공적서(1950년 11월)'에는 1950년 6월 26일 춘천 소양교 일대 전투에서 심일이 대전차포 소대를 지휘해 적 자주포 3대를 격파했다는 내용이 있다.

  • 심일은 최소한 1950년 10월 25일까지 제6사단 소속이었으며, 동년 12월 13일 제7사단으로 전속되었다는 육군 인사기록이 있다. 보직해임 여부는 확인되지 않으나, 가능성은 희박할 것으로 판단된다.

  • 단, 심일과 육탄 돌격을 감행한 것으로 알려진 '육탄 5용사'는 과장·미화된 것으로 판단된다.


2016년 9월 20일, "고 심일 소령 공적 확인 위원회"가 발족했다. 국방부 정책실은 객관적인 검증을 위해 육군군사연구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추천 전문가 각 3명과 한민구 국방부 장관 추천 위원 1명으로 총 7명을 구성했다.[3]

공적 확인 위원회는 4개월에 걸쳐 조사, 확인, 검증한 결과를 "고 심일 소령 공적 확인 위원회 공청회"에서 발표했다.[3] 중요 자료인 태극무공훈장 심의 공적서, 실버 스타 추천장 및 수여 기록, 제6사단 작전 교육처 "전투 상세 보고서", 인민군 제262군 부대 훈장 수여장을 첨부한 자료집을 배포하고, 이대용을 포함한 생존 참전 용사, 육군 군사 연구소, 최보식 기자 등의 문제 제기는 정당하지 않다고 평가했다.[3]

3. 4. 육군군사연구소의 재반박

육군군사연구소 및 일부 학자들은 공적확인위원회가 핵심 근거로 인용한 은성훈장 추천서가 사료로서 신뢰성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맥페일 고문관은 전투를 직접 보지 못했고, 2개월 이상 지난 9월 1일 전언으로만 추천서를 작성했으며, 본인 서명도 없다.
  • 추천서에 나오는 핵심 참전 인물은 군적(軍籍)에서 발견되지 않으며, 증언 채록 인물 명단도 없다.
  • 추천서의 전공은 교차 검증되지 않는다. 1950년 6월 26일 오전 10시 조선인민군 자주포가 춘천 소양교에 진입하여 격파했다는 전공은 다른 기록 및 증언에 없다. 라주바예프 보고서[26]에는 조선인민군 제2보병사단이 6월 26일 아침 공격을 재개했으나, 춘천 북쪽 공격을 맡은 제4, 6보병연대는 저녁까지 공격에 실패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육군군사연구소는 전투상보, 생존자 증언, 북한 공적서와 로동신문 기사를 종합하여 옥산포 일대에 유기된 자주포는 6월 26일 퇴각 과정에서 조선인민군 승무원들이 자폭시킨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심일의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심일의 전사 장소를 추정할 수 있는 직접적인 기록이나 증언은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심일의 사망을 확정한 장교 및 병 순보철을 통해 심일이 ‘실종 중 전사’로 처리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북한 지역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견해를 밝혔다.[25]

이를 토대로 육군군사연구소는 이대용의 주장이 사실에 가깝다는, 공적확인위원회와 상반된 결론을 도출하였다.

육군 군사연구소는 이대용의 추가 증언을 확보하여 「이대용 장군 추가 질의 결과」를 제출했다. 추가 증언에서 이대용은 심일이 도망치는 것을 직접 목격했고, 1951년 1월과 5월에 심일의 부모가 제7연대 본부를 방문했으며, 심일의 전사에 대해 안태석에게 들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1950년 6월 26일 오전에 제7연대 제1대대가 옥산포 방면에서 역습을 가했지만, 이때 파괴된 자주포는 한국군이 아닌 인민군이 스스로 파괴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주장은 제6사단 작전처의 「전투상보」, 제16포병대대 「부대역사일지」, 미 육군의 공식 기록 등 많은 자료와 모순된다. 이대용은 자신의 증언과 어긋나는 실버스타 훈장 추천서와 태극무공훈장 공적 문서는 오류이거나 날조라고 주장했다.

육군 군사연구소는 이대용의 주장을 받아들여 실버스타 훈장 추천서와 태극무공훈장 공적 문서를 오류 혹은 날조라고 공식 제기했다.

육군 군사연구소장은 공적확인위원회가 육군 군사연구소의 주장을 무시하는 등 비효율적이고 편향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비판하고,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몇몇 자료를 선별적·제한적으로 공개하고 있다고 제기했다. 또한 실버스타 추천장의 신뢰성, 라주바예프 보고서의 오역 가능성 등 공적확인위원회의 자료 해석에 문제를 제기했으나, 구체적인 문제점이나 오역 부분은 언급하지 않았다.

육군 군사연구소는 이대용 등 생존 참전자의 증언에 중점을 두었다.

3. 5. 공적확인위원회 공청회 (2017년)

2017년 1월 24일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고(故) 심일 소령 공적 확인위원회(이하 공적확인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대한 공청회가 열렸다.[27] 이 자리에서 위원회는 그동안 검증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 공청회는 위원회의 조사 결과와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측에게 충분한 발언 기회를 주지 않아, 일방적인 행사였다는 비판을 받았다.[28] 주최측은 육군군사연구소가 별도로 제작한 자료집 배포를 막았고, 한설 준장이 요구한 파워포인트 사용도 거부했다.

또한, 현장에서는 공적확인위원회가 증언 자료를 임의로 삭제하거나 왜곡 해석하고, 사실 확인이 미흡했다는 주장도 나왔다.[28] 위원회가 제시한 자료와 육군군사연구소가 공개한 보고서 및 증언 자료를 비교하면, 심일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증언, 당시 지급된 포탄이 대전차철갑탄이 아니라 인마살상용 포탄이었다는 증언 등이 누락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 조선인민군에 배치된 자주포 기종은 덮개가 없는 개방형 전투실 구조를 가진 SU-76M이었기 때문에, 심일이 덮개를 열고 폭탄을 던져 넣어 파괴했다는 사실과 맞지 않음에도 위원회가 이를 무시했다는 지적도 있었다.[28]

공적 확인 위원회는 4개월에 걸쳐 조사, 확인, 검증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중요 자료를 첨부한 자료집을 배포하고, 이대용을 포함한 생존 참전 용사, 육군 군사 연구소, 채보식 기자 등의 문제 제기는 정당하지 않다고 평가했다.[27]

이에 대해 육군 군사 연구소장은 발표 내용에 대해 전반적으로 반대하며, 생존자의 증언은 공식 기록 문서와 동일한 신뢰성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또한 6월 26일 소양강에서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기존 주장을 반복했다.[27] 구술 기록의 신빙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화여자대학교 채제희 교수, 고려대학교 최호근 교수 등의 의견서를 제출했다. 특히 최호근 교수는, 미군 고문이 심일의 활약을 직접 목격하지 않고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실버 스타 추천장을 작성했으므로 100% 신뢰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며, 제로 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추천장의 어느 부분에 문제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았고, 이것이 상급 부대의 지침에 따라 작성되었으며 다른 실버 스타 수여자 추천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27]

육군 군사 연구소는 6월 26일 소양강 전투 부재를 증명하기 위해 당시 목격자 3인(춘천 대첩 선양회 소속)의 구술 기록을 제출했으나, 공청회에 참석한 이대용은 지금까지의 증언은 모두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공적 확인 위원회의 결론에 반대했다. 한편, 자신이 집필한 저서에서 춘천 전투에 관한 내용이 일관되지 않고 시간 오류가 있는 것에 대해서는 출판 과정에서 생긴 사소한 실수라고 해명했다.[27]

3시간 반 이상 진행된 공청회를 지켜본 육군 참모 차장은 국방부와 육군 본부의 중립적 입장을 밝히며, 공적 확인 위원회의 객관적인 결론은 신뢰할 만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청회에서 제기된 문제들로 인해 추가적인 연구, 조사, 논의를 통해 심일 소령의 공적에 대한 의혹이 해소되기를 바란다고 촉구했다.[27]

3. 6. 공적확인위원회 최종 결과 발표 (2017년)

2017년 4월 7일, 고(故) 심일 소령 공적 확인위원회는 14회의 공적심의회의, 5회의 현장답사, 2회의 생존자 증언 청취, 공청회 등의 활동을 거쳐 심일의 무공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대한민국 국방부2017년 4월 25일에 최종 보고서를 발간하고 언론에 공표하였다.[30]

제기된 주요 의혹에 대해 위원회와 대한민국 국방부는 다음과 같은 공식 입장을 밝혔다.

  • 심일이 1950년 6월 25일 옥산포 북쪽에서 대전차포 1문을 버리고 도주했다는 의혹에 대해, 위원회는 급박한 전투 상황에서 차후 진지로 이동하기 위한 정상적인 전술적 조치였다고 평가했다.
  • 심일의 대전차포 소대가 1950년 6월 25일 옥산포 전투에서 아무 전공이 없었다는 의혹에 대해, 위원회는 총 3대의 적 자주포를 파괴했다고 결론내렸다.
  • 1950년 6월 26일 소양교 지역에서 전투 자체가 없었다는 의혹에 대해, 위원회는 이날 새벽부터 소양교 인근에서 치열한 교전이 있었으며, 심일은 동료(박철원 대위, 김순화 이등중사, 윤봉국 이병)와 함께 총 3대의 적 자주포를 파괴했다고 결론내렸다.
  • 태극무공훈장 상신이 1951년 초 양중호(당시 대령)에 의해 거짓으로 이뤄졌다는 의혹에 대해, 위원회는 태극무공훈장 상신 시점(1950년 10월)이 심 소령의 부모가 제7연대를 방문했다는 시기(1951년 1월 및 5월)보다 빠르므로 사실 무근이라고 결론내렸다.
  • 은성훈장 추천서의 신뢰성이 낮다는 의혹에 대해, 위원회는 심일의 공적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맥페일 고문관이 추천서를 작성했을 이유가 없으며, 미 육군 관련 부서에 조작 여부를 질의한 결과 '어떤 문제도 발견할 수 없다'는 회신을 받았으므로 이 역시 근거가 부족하다고 결론내렸다.


위원회는 이러한 결론을 내리면서 6·25 전쟁 영웅인 심일의 명예가 더 이상 실추돼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으며, 이번 최종 검증작업이 군의 명예와 신뢰를 바로 세우는 표본이 되기를 소망한다고 밝혔다.[31]

이러한 결과 발표에 대해, 학계 일각에서는 의혹이 완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논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서둘러 결론을 낸 대한민국 국방부의 태도를 비판하였다.[32]

공적 확인 위원회는 심일과 대전차포 소대원이 1950년 6월 25일 옥산포에서 자주포 3문, 1950년 6월 26일 소양강에서 자주포 3문을 파괴한 것은 사실이라고 결론 내렸다.[31] 다만 1950년 6월 25일 옥산포 전투에서의 자주포 파괴에 대해서는 육박 공격을 했다는 일부 증언에 신빙성이 있음을 확인했지만, 사실을 과장 또는 미화한 것으로 판단했다.[31]

이대용의 포 1문을 포기하고 도망했다는 증언에 대해, 공적 확인 위원회는 도주라기보다는 긴박한 전술적 상황에 따른 조치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대전차포가 진흙에 깊이 빠져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것이 임부택 중령의 회고록이나 안태석 소위의 증언 등으로 확인되었다.[31]

3. 7. 심일상 수상 보류

전공 조작 논란이 계속되면서 대한민국 육군은 우수 전투중대장 및 우수 육군사관학교 졸업생도에게 수여하던 '심일상'을 당분간 수여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29]

4. 가족

심일은 4형제 중 셋째였다. 둘째 형 심민은 경찰관으로 1960년 7월 내무부 치안국 경무과에서 근무하던 중 과로로 순직했다.[33] 셋째 동생 심익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17세의 나이로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낙동강 전투에서 실종되었다.[34] 심일의 전사 후 태어난 막내 동생 심승택이 유족으로 있다.

아버지심기연(? ~ 1979년)[33], 1969년 제4회 5·16 민족상 사회부문 장려상 수상
어머니조보배(1904년 ~ 2005년)[34]
동생심민(1929년 ~ 1960년)[33]
동생심익(1934년 ~ 1950년?)[34]
동생심승택(1954년 ~)



아버지 심기연은 함경남도 단천 출신으로, 젊은 시절 일본에서 기술을 배우고 목재상을 운영하며 성공했다.[7] 1945년 12월, 월남하여 원주에 정착했다.[7] 한국 전쟁 이후에는 속초에서 목재상 외에도 현대산업주식회사, 현대극장 등을 설립하며 기업가로 활동했다.[7] 1962년에는 강원도 명주군(현 강릉시) 구정면 구정리에 난민 정착촌(청파마을)을 조성하여 5·16 민족상을 수상했고,[7] 1965년 4월에는 원주 현충탑 부지를 기증했다.[7] 1979년 사망.[7]

어머니 조보배는 1904년 10월 4일에 태어났다. 한국 전쟁 후 원주에서 복주여관을 운영했다.[7] 2005년 3월 2일, 101세로 사망했다.[10]

둘째 심민은 경찰관으로 재직 중 1960년 과로로 인한 심장마비로 32세에 사망했다.[12] 셋째 심익은 서울고등학교 재학 중 17세에 학도병으로 참전,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전사했다.[12] 넷째 심승택은 심일 사후에 태어나 공무원이 되었다.[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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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뉴스 [최보식 칼럼] 北 탱크를 부순 '호국 영웅'의 불편한 진실 http://news.chosun.c[...] 2019-06-16
[3] 뉴스 6·25 호국영웅의 '불편한 진실'은 없다! https://pub.chosun.c[...] 2019-06-18
[4] 문서 故 심일 소령 공적확인 최종 결과 보고서 2부 1장 4 https://www.mnd.go.k[...]
[5] 웹사이트 連続刊行物 東亜日報「金弘一 劉載興少將等 十二將兵에게 武功勳章授與」 http://db.history.go[...] 国史編纂委員会 2015-07-29
[6] 뉴스 [최보식 칼럼] 北 탱크 부순 '호국영웅'의 불편한 진실, 그 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9-06-29
[7] 뉴스 심일 소령의 부친 심기연 옹의 강원사랑 http://www.kado.net/[...] 강원도민일보 2019-06-19
[8] 뉴스 木界の麒麟兒 沈基淵氏の飛躍 1935-07-24
[9] 뉴스 원주에 심일 소령 동상 제막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9-06-19
[10] 뉴스 '[전우광장]‘조국의 어머니’ 편히 잠드소서' http://kookbang.dema[...] 국방일보 2019-06-19
[11] 뉴스 6월의 6·25전쟁영웅 조보배 여사 http://www.korea.kr/[...] 국가보훈처 2019-06-19
[12] 뉴스 6·25 호국영웅의 ‘불편한 진실’은 없다! https://pub.chosun.c[...] 조선뉴스프레스 2019-06-19
[13] 서적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 전쟁 영웅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4] 뉴스 6·25전쟁 영웅, 심일 소령을 더 이상 욕되게 말라! https://www.newdaily[...] 2016-12-04
[15] 뉴스 육군 제1회 심일賞 시상 http://kookbang.dema[...] 2003-01-27
[16] 뉴스 北 탱크를 부순 '호국 영웅'의 불편한 진실 http://news.chosun.c[...] 2016-06-17
[17] 영상 마지막 주월공사 이대용 장군 (4) : 심일 소령 무공기록 바로 잡아야 https://www.youtube.[...] 참깨방송 2016-07-13
[18] 서적 6·25 전쟁사②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전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9] 웹인용 1950년 춘천 전투 참전 중대장의 수기(1/4) http://blog.naver.co[...] 2014-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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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뉴스 北 탱크 부순 '호국영웅'의 불편한 진실, 그 뒤 http://news.chosun.c[...] 2016-12-02
[22] 뉴스 “심일 소령 공적은 허위” 군, 36년 전 이미 결론 http://news.khan.co.[...] 2017-02-02
[23] 뉴스 ‘만들어진 호국영웅’ 진실은 숨길 수 없다 http://news.khan.co.[...] 2017-07-30
[24] 뉴스 국방부 '6·25 초기 춘천전투 심일 소령 공적' 사실로 결론 http://www.newsis.co[...] 2017-01-24
[25] 뉴스 6.25전쟁영웅 '故 심일 소령' 공적 진위 공청회... 진실은? http://www.konas.net[...] 2017-01-25
[26] 서적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 (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7] 뉴스 "'아수라장'된 심일 소령 공청회...가짜영웅 vs 사실무근" http://the300.mt.co.[...] 2017-01-24
[28] 뉴스 가짜 영웅 논란 속…국방부, 심일 소령 구하기 눈물겹다 http://ilyo.co.kr/?a[...] 2017-01-26
[29] 뉴스 육사, 심일소령 공적 논란 속 '심일상' 수여 않기로 http://news.sbs.co.k[...] 2017-02-06
[30] 뉴스 軍 "6·25 영웅 심일 소령 공적은 역사적 사실" 최종 결론 http://www.yonhapnew[...] 2017-04-25
[31] 뉴스 故 심일 소령의 공적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 http://kookbang.dema[...] 2017-04-25
[32] 뉴스 군 “심일 소령 전공은 사실”···새정부 출범 전 '역사 알박기’ 의혹 http://news.khan.co.[...] 2017-04-25
[33] 뉴스 심일 소령의 부친 심기연 옹의 강원사랑 http://www.kado.net/[...] 2015-05-20
[34] 뉴스 ‘조국의 어머니’ 편히 잠드소서 http://kookbang.dema[...] 2005-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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